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

 

1989. 8. 20. 주일오후

 

본문: 요한복음 1장 10절∼13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 믿는 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발원돼 가지고  나오는데 나올 때에 진리로 나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충만을 다 은혜로 받아 가지고 자기 것을 삼고 영원히 누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그 충만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이치로 주십니다. 이치.

밥 하는 이치도 있고, 길쌈하는 이치도 있고, 또 각 요리도 요리하는 이치가 다  있고, 또 우리가 보는 뭐 차, 비행기, 심지어 리어카 무엇이든지 다 이치로 그것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치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치대로 하면  그것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이치에 틀리면 그것은 다 절단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또 어떤 종류든지 다 이치로 되어 있다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만드셨는데 이  우주는 얼마나 큰지 우리는 모릅니다 사람들이 뭐 근 육천 년 동안 이렇게 늘  건설해 나온다는 그 문화라는 것이 그것이 극히 협착하고 유치한 것입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있지마는 그것을 사람들은 다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다 이치로 조성됐고 이치로 만들어졌고 또 이치로 보존되고  유지되고 또 그런 것들이 다 이치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치에 삐끄러지면  깨지고 이치대로 되면 잘 성립되고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그 무한하시고 충만하신 온갖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 이치로 주십니다.

 그러면 이치를 받아 가지고 그대로 하면 곧 하나님의 은혜의 실상이  이루어집니다. 그 이치는 하나님의 지식이라 고도 하고 하나님의 지혜라고도  하는데, 이 세상에는 지식이 두 종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인 이치가 있고 또  인간의 지식인 유혹의 반 거짓 지식이 있습니다. 반은 맞는 것 있고 전체가  거짓된 것도 있고,  이래서 그 지식은 본래부터 존재한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있는 것들입니다. 수천 년 내려오고 난 다음에 오늘에는 사람들이 그것을  판별하지 못하고 다 혼잡 혼돈되어 있으나 인류 시조 때부터 그 근원에서 내려와  보면 환하게 다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류 시조를 지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이치를 주셨는데 그 이치흘  따라서 살지 못하게 미혹하는 마귀가 와 가지고. 배암을 입고 와서 유혹할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신 이치대로 살지 안하고 배암이 말하는 이치로 살다가  인간에게 죽음이 오고 저주가 왔습니다. 이 우주는 배암의 그 유혹하는 이치.

유혹하는 그 지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고 은혜로 먹고 살고  자라면서 행동은 하나님의 이치를 따라서 살지 안하고 사람을 유혹시켜서  멸망시키는 마귀의 이치를 따라서 산 것이 세상 건설이요 또 모든 세상 지식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부터 오늘까지의 모든 유래를 계통해' 가지고 밝히 아는 정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식인 이치와 그 외 다른 지식인  이치가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는 그 주인공이 마귀라 그렇게  전통을 말하고 있지마는 사람들은 망각성이 빠르고 또 심령이 어두워 졌으므로  그 근본 내려온 전통 그 계통을 자꾸 부인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전인류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 있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식에 복종하는 것만  구원이지 하나님의 지식을 복종하는 거 그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그 사실을  지금으로부터 한 사천 년 전에 하나님이 한번 보였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물로 이 모든 불의한 것을 다 심판해서 멸할 터인데 하나님이. 이 물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방주를 모아야 된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물심판 방비가 되는 그 말씀을 다  등한히 보고 듣지 아니하고 배암의 지식대로 해서 분망하게 땅의 것만 자꾸  노력하고 연구하고 건설하고 이렇게 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라다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흥수 심판이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신청하고 순종한  노아의 여덟 식구는 홍수 심판에서 다 구원 얻었고 남은 백성들은 전부 다  전멸을 상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에서, 그때도 인간들의 모든 지식대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계획하고 소원했고,  노아 여덟 식구는 하나님의 지식대로 소원하고 계획하고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라다가 그 종말이 구원과 멸망으로 갈라진 거와 같이, 또 성경에 말하기를  이제는 불심판으로써 온 세계에 만물 또 이 우주애 있는 모든 것을 다  심판하시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지구 땅덩어리라는 것은 우주의 존재 가운데에 극히 아주 적은 그런  존재입니다. 이 지구 땅덩어리보다 큰 그런 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이 큰 우주에 제일 주격이 되는 위치에 뒀고 그  지구상에서 모든 이 우주를 통치하는 존재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래서, 이 우주  가운데에 조그만한 지구 땅덩어리라 하는 데에 사람들을 살게 해 가지고  사람들은 이 물질계로 되어 있는 우주에 주인공이 되고 위임 통치하는  통치권자가 됐던 것입니다. 이러다가 사람이 실수내서 범죄하니까 사람만  저주받은 게 아니라 우주 전체가 다 저주를 받아서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불로 모든 우주에 있는 체질들을 다 뜨거운 불에 다 녹혀서  완전히 이것들이 다 원소가 됩니다. 그러면 지금은 수많은 천태 만상의 존재들이  있지마는 그때는 사람 외에는 원소뿐이지 딴거는 하나도 없도록 다 원소가  됩니다. 원소가 된 것은 그것은 우주의 주권자가 되는, 우주를 하나님 앞에  위임받아 가지고 대리 하나님으로 우주를 통치하는 그 통치권을 받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법도를 어긴 그 값으로 우주는 그때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때  저주받은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거게서 속량을 받은 것이 택한  자들이 속량을 받고 또 택한 자들이 속량받은 그 택한 자들과 동거동행한 모든  만물은 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하시는 그때에 만물이 새로와집니다.

 이래서, 잠시 후면 우주는 다 불로 녹아서 원소가 되어질 것이고 또 원소가  됐다가는 다시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만물이 그때 천태 만상의  그 모든 형상을 가지고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그것이 만물 회복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회복된 그것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따라서 회복됐기 때문에 성도들을  위하는 것으로 존재하고 성도들 행동에서 그런 것들이 다 회복도 되고 영원히  원소로 남고 존재되자 않는 그런 것도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그 이유가 뭐인가?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 때에 그때에  관련된 것은, 우리 현실에 관련된 것, 우리 현실에 관련된 것은 우리가 알기에는  내 현실이라는 것이 불과 몇 십 평 몇 천 평 몇 만 평 되는 것같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 사람의 좀 활동 범위가 넓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활동이  전국에도 미치고 온 세계에도 미치지마는 일반 서민으로 말하면 그의 활동  범위가 극히 좁은 걸로 보여지지마는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그 사람이  움직이는 그 시대의 것은 하늘의 것이든지 땅의 것이든지 어떤 별의 것이든지 그  시대 그 사람이 움직일 때에 그때에 관련된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신앙 행위의  여하에 따라서 멸망이냐 구원이냐 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만물 재판이 있을 때에 내 행동의 잘못으로써 저 우주 끝에 내가 이  육체를 가지고는 생각해도 생각하지 못할 만한 그런 넓은 광대한 범위 거기에  있는 그런 존재도 내 행동과 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며  정복하라 하는 말씀대로 지금 제이차적으로 다시는 변동이 없는 정복을 해서  자기 세계를 만드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남은 생애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물질계가 있고 또 물질계보다 더 좋고 큰 영계가  있는데 이런 것을 지금 우리가 상속받는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인  것입니다. 상속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주를 우리에게  주시는데 주시는 우주를 내 것을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 하는 것이 오늘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20절 이하에 보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이다 너희 것이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은 우주나 영계나 하나님 외에 지음받은 모든 것들은 다  우리 것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우리 것이 되어지는 그것은 우리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움직이는 한 움직임은 조그만한 감옥 가운데 들어가 가지고, 예를  들면은 한 반 평 정도도 안 되는 그런 감옥 가운데 내가 들어 있을지라도 그  감옥 가운데서 내 행동하는 그 행동은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존재에 내 행동의  영향과 그 혜택이 피해가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거게서 바로 하면 감옥  가운데 내 바로 한 것이 먼 영계와 우주의 끝까지에 모든 그 현실에 당도된  존재들은 다 구원을 얻게 되고 내가 잘못하면 그런 것들이 다 저주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런 것들이 다 나로 말미암아 구원 얻고 나는 그런 것들을 다  상속받아서 영원히 내것을 삼는 그 방편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우주와 영계의 모든 것은 다 그의 것이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히 큰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소망을  깨달은 사람들은 땅위에 뭐 내가 이렇게 무슨 운동해 가지고 어떤 강대국의,  중국의 무슨 정권자가 된다, 또 소련의 뭐 정권자가 된다, 미국의 정권자가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멸시하는 거는 아니지마는 극히 아주 극히 사소한 것으로  그렇게 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우리 소망이 아니고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너무 과장한 말이다' 그렇게 어떤 사람들이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과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 될  수 있고, 네가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된다고 그렇게 성경이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안 믿는 자는  뭐 그거는 목사가, 그런 말 할 때 목사가 '너무 그거 과장한 말이다' 하면은 그  목사는 목사가 아니오. 그거는 무식한 목사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마귀의  일꾼이든지 그렇지 그거 정상적인 목사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주를 우리에게 상속시켜 주시고 또 좁은  범위에서는 우리 현신 조그만한 자기 생애의 범위에서 의식주라든지 생명  호홉이라든지 응l런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다 어떻게 주시느냐?  전부 지식으로 주십니다. 지식으로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치로 주십니다.

이치로 주셔서 누구든지 사는 생리의 이치에 삐뚤어지면 그뭐 천 몇이고 만  명이고 나 죽습니다. 또 이치에 맞은 데에는 절대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연 은총의 것도 하나님이 주셔서 다 받지 안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이 주셔서 다 받아 가지고 살고. 또 신령한 것도 받아 가지고  살고.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의 것을 다 받아 가지고 사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방편이 이치로 주시고 또 우리가 받는 방편을 이치로 받습니다. 그러기에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래야 줄 수도 없고 주시는 설 받을래야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치는 세상에 수많은 도서실에 산더미같은, 책이 있는데 그 안에  들은 그런 이치는 도매금으로. 배암의 이치는 다 거부하면 됩니다. 배암의 이치는  다 부인하면 됩니다. 다만 그 이치는 간단 명료하게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법칙 곧 부강의 법칙 영생의 법칙으로 신구약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 말씀은 곧 우리의 사는 이치요. 또 하나님의 것을  은혜로 받아서 부강해지는 이치요. 또 영생과 평강을 누리는 이치요. 또 이  이치는 하나님을 이렇게 거부하면 망한다 하는 망하는 이치를 가르쳤고 죽는  이치를 가르쳤고 이제 다 절단나는 그런 이치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크게 말하면 하라 하지 말라는 두 이치로 되어 있다. 하라는 것을  하면은 다 생명과 평강이 되고, 하라는 것을 안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세  되면은 다 사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치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주와 영계를 지으실 때에  하나님은 명령하신 분이시요 시공자는 이치입니다. 이치가 모든 것을 시공해  가지고 지었습니다. 우주를 만든 것이 이치가 만들었고, 진리, 진리가 만들었고  하나님은 진리에 명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치라는 것은 인격 존재가 아닙니다. 제이위 성자도 아니요, 성령도  아니요 제일위 성부도 아니요 다만 이치라 하는 것은 무인격 존재로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  자존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시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우리들이 사는 생명에 대한 이치를 말씀했고, 평강에 대한  이치를 말씀했고, 또 하나님의 충만을 받아 가지고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그런  이치를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반대는 이와 반대로 죽는 이치, 망하는  이치, 또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하나도 받지 못하는 그런. 이치를 말해 놓은 게  신구약 성경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이치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진리라 말은 참된 이치라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칼빈은 말하기를 '신구약 성경은 계약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계약이라 하는 말도 곧 이치라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 계약은 이치대로 된  계약이기 때문에 이치라 말하는 그 말도 맞고 또 계약이라 하는 말도 맞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계약,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은 계약이라 하는 그 말보다 우리는 알고  있기를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렇게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나와 가지고 계약 조건이 있었고 또 계약이 이제 우리에게는 교훈으로  나왔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 믿는 사람은 어짜든지 이치에 가치를 두고 우리가 노력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영원 자존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요 또 하나님의 이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곧 하나님 다음에는  이치입니다. 이래서 논리적으로 하나님 다음이라 하지마는 하나님 계시는 데  이치가 없는 일이 없고 이치 있는 데에 하나님이 안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치는 언제든지 동거 동행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구원은 전부 이치로 된 구원이라 하는 이치에 대한 이 가치와  이 활동 범위를 알아서 이치에 대한 관찰이, 이치관, 이치를 보는 이치관, '인생관'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치를 보는 이치관을 바로 가져야 둬 터인데 이치관을  아주 무시합니다. 이치관을 아주 무시해.

 의사가 인간의 인체에 대한 이치는 무시하지 안하고 이것을 잘못하면 사람이  죽는다 해 가지고 그 이치는 아주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서 연구하고 바른 이치를  자기가 알라고 애를 쓰고, 과학자들이 뭐, 과학자들이 그 이치에 대해서 많이  논술해 놨지마는 논술한 이치를 실험해 보니까 다 툭툭 틀리고 하니까 '이거  이치를 논술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게 아니고 논술해서 실험을 해 가지고 실험에  들어맞은 이치라야 맞는다' 이래서 이치의 정확성이나 그런 가치성을 사람들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의 무슨 행동은 다 과학적으로 움직여야 되지  과학적으로 움직이지 안하면 안 된다' 그렇게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그  과학이라는 것은 물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물리에 맞춰야 되지 물리에 안  맞추면 안 된다. 물리에 틀린 그 물건이 존재하지 못 합니다. 존재했으면, 물리에  틀리면 서서히 물리에 틀린 데로 따라서 그것은 다 도태되고 소멸되고 맙니다. 또  이치에 맞으면 이치가 먼저 조립되면은 거게 따른 물질이라 하는 거는 조립되기  마련이지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나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고차원의, 억억억만 배도 더 되는, 이 우주를 통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인격이나 모든 지식, 인격이라면은 지식이나, 지혜나, 능력이나, 모든 그런  사상이나 그런 것이 다 인격인데 여게 대한 이치는 아주 등한히 합니다. 등한히  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목사라고 해도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 이 말 한  마디로 가지고 다 할라 하고 있고 어짜든지 미련을 부려서 '믿사옵나이다 하면  된다' 이래 가지고 뭐 어째 오다 가다가 병 하나 나으면 그만 그거 가지고 막  떠듭니다.

 박태선씨가 OOO교회에 장로로 있을 때 그때에 OOO목사님이 거게  목사였습니다. 담임 목사였습니다. 이랬는데 어째 그이가 기도 하다가 어떤  장관이 하나 거게 뭣을 아파서 왔었는데 기도하다가 그 병이 하나 나은 그걸  가지고 그만 그때부터 광고를 해서 떠들어 가지고 이라다가 마지막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는 이치가 필요한  줄 알고 이치를 자기가 알겠다고 뭐 아들을 '이류학교에 보내는 것보다도,  일류대학에 보내겠다', 또 이거를 '국민학교만 보낼 게 아니라 대학 대학원에  보내겠다' 모두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얼 찾고 있느냐 하면은 이치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치에 좀 능하고 이치에 남 밑에 가지 안하고 위에 가겠다는 그런  것을 그란 것인데 이것도 깨닫지 못하고. 세상 것에 대해서는 이치에 대해서 다소  평가하지마는 예수 믿는 이치는 전연히 이거 평가하지 않습니다. 믿으면 된다는  이거 가지고, '믿사옵나이다' 하면 다 된다 이래 가지고 뭐 굴마다 기도원마다  있어 가지고 나중에 폐단을 일으켜서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고 감옥에 가고 뭐  그런 일 되고 살인도 하고 뭐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이치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조그만한 사람들의 소꿉장난  물건을 하나. 소꿉장난의 그런 물질을 하나 만드는 그 이치보다도 예수 믿는  이치는 아주 간단한 것으로 보고 그저 '예수 믿으면 된다 믿사옵나이다.' . 하는  걸로 다 된다 말합니다. 우주를 통치할 수 있는 자가 어떻게 무능자가 유능자를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기독자는 자존자 하나님 전지 전능자 그분 다음으로 지능을 갖춘 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지능을 갖추는 데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지능은 억억억만 종류도 넘은데 한 종류의 하나님의 지혜라도 알고,  하나님의 이치를 알고, 한 종류의 하나님의 이치를 알고 그 종류에 따라서  이치대로 행하면 그게 성공되고, 한 이치를 따라 행하는 자에게 두 이치를 주시고,  두 이치를 따라서 행하는 자에게 세 이치를 주시고, 세 이치를 따라 행하는  자에게 열 천 만 이래 가지고 이제 하나님의 이치가, 비유컨대 하나님의 이치가  만일 억억만이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치 억억만에 다 접선이 돼 가지고  연결이 돼야 됩니다.

 하나님의 이치에 하나가 연결되면 하나의 이치만 자기는 알고 능하게 될 것이고,  만의 이치에 연결되면 만 이치를 알고 억억만의 이치를 알고 연결되면 억억만의  이치에 연결돼 가지고 이치가 부자 이치에 부요한 자 그자는 능한 자요 또  하나님의 그 이치에 연결이 많이 된 자는 그자는 하나님을 많이 닮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치와 우리 이치가 하나가 돼 가지고 움직일 때에는 거기는 전능의  역사가 결과적으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예수 믿는 거는 아주 이치가  하나 둘 뭐 셋 그것이고 그렇게 복잡하지 아니한 줄로 아는 그것이 탈입니다.

 왜 이 말을 지금 오후에 하고 있느냐?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을 이치를  배워서 이치에 맞도록 믿어야지 안 맞으면 헛일입니다. 이러니까 설교를 들을  때에도 제 기분 좋은 게 소용없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제가 뛰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뭐 생명을 내놓을 만치 그렇게 기분이 뜨겁게 좋아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꼭 이치에 맞아야 되지 이치에 안 맞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지어 말하기를 '하나님은 진리라' 그렇게 말했어. 이러니까, 예수  믿는 이치를 배워 가지고 이치에 맞도록 이렇게 할라 하지 안하고 예수 믿는  이치는 아주 한 둘 밖에 안 된 줄로 알고 그만 복잡한 이치를 말하면 아예  듣기도 싫어합니다. 평생 제가 목사 노릇 배워야 이치를 몰라서 말하면 당장 한  마디에 모르고 두 마디에 모르면 '아이꾸 그런 복잡한 건 우리는 싫다고 예수  믿으면 구원 얻지.' 그렇게 말을 하고 이치를 아주 무시하고 반발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은 전부 이치에 속한 것이고 이치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금정산에 가 집회한 때에 어떤 목사가 와서 말하기를, 나하고 친한  목사인데. 그때 나는 전도사입니다. '조사님 어짤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도마에 놓고 막 난도질을 해 재낍니까? 어린 교인들이 그런 말 해도 알아  듣습니까? 그 이치를 말하면 알아듣습니까? 그러니까 그만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 하면 성령이 와 가지고 가르치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하는 그 사람이  말로가 비참해졌습니다.

 이러니까 이치를 모르다 보니까 뭐 이 교파로 저 교파로 돌아 타니다가  처음에는 OO교파에 있는 사람인데 OO에도 이제 들어갈 수도 없고 이래  돌아다니다가 비참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이  OO교파로 돌아오라' 해 가지고 OO교파로 와 가지고 믿는다 했는데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치에 틀린 것은 결국 행동이 틀리고 결과가 틀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 성경은 무슨 이치를 가르치느냐? 거게 이치를  깨달을라고 자꾸 애를 쓰고 이라지 안하고 그저 '성경을 읽기만 하면 된다' 암만  읽어야 소용없어. 이치를 깨달아야 돼요. 이치 못 깨달으면 소용없습니다. 설교를  아무리 해서 뭐 천하의 웅변을 가지고 다 달라들고, 또 열변을 다 토하고, 아주  수사학을 다 토하고, 오만 정서의 그 모든 감정, 감정을 발동시켜 가지고 울고  불고 암만 해도 거게 사는 이치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거 다 울리는  괭과리라요. 울리는 괭과리, 깽메구 이라면 소리는 나지마는 그 속에 무슨 이치가  있습니까?  이것 모양으로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이치를 배울라고 하지 않는 거게사  탄식이 돼서 지금 오후에 내가 이런 말을 서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치에  대해서 좀 가치성을 알아서 아무리 이 종도 말이요, 이게 이래 종이지마는 이게  종 만든 이치에 맞아야 이게 소리가 나지 이치에 안 맞으면 소리 안 납니다. 이치  가운데 요 지금 방울이 있는데 요 방울이 위에 딱 때리는 그 이치에 맞아. 들어도  때리지 안 하면 암만 이래 봤자 소리 하나도 안 납니다. 또 이 쇠로 만든 이것도  이치대로 이거 녹혀서 해야지 이치에 틀렸으면 이거 다 타 버리고 맙니다.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밥을 짓는 것도 밥 짓는 이치에 맞아야 밥이 되고 죽 쑤는 것도 죽  쑤는 이치에 맞아야 죽이 되고, 그러기 때문에 죽을 잘 쑨다, 맛있게 쑨다, 요리를  잘한다 하는 것은, 맛있는 것은 맛있을 수 있는 이치에 맞아야 맞이 있지 맛있는  이치가 들어 있지 않는데 무슨 음식이 맛이 있습니까? 밥되는 이치에 틀려  버리면 쌀만 태워 버리고 맙니다. 암만 뭐 정성들인다고 '밥 잘돼라, 밥 잘돼라. 밥  잘돼라' 아무리 말한다 해도 이치에 쌀을 넣어야 뵈는데 쌀 넣을 이치를  잊어버렸으면 뭐 정성들여, 불경하는 사람들은 '밥 잘되게 해 주십시오, 밥 잘되게  해 주십시오' 암만 이래도 밥이 안 됩니다. 밥이 안되니까? 그런 소리 하나도 안  해도 딱 쌀 넣을 만치 넣고 물 넣을 만치 넣고 불 땔 만치 때면은 '밥을 되지  마라, 밥 되지 말아라, 밥되지 마라' 암만 퍼지 말라 해도 이치에 딱 맞으면 밥이  된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이치애 가치성을 두고, 이치 이것이  들어서 우주도 만들었고, 우리 이차 창조의 우리 구원도 하나님이 이치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이 이치를 무시하고 이치를 바로 알라고 안 하면  헛일이라 그말이오. 책을 이렇게 많이 저서했다 할지라도 그 책에 이치가 틀려  버렸으면 그 책은 언제든지 불살라집니다. 정죄받습니다. 아무리 조그만한  책이라도 이치에 딱 들어맞는 책이면 그 이치는 진리기 때문에 책은 태워도 그  진리는 절대 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설교하거든 이치를  깨달을 라고 애를 써야 되지 이치를 깨달을라는 그런 생각은 하나도 안 가지요.

 오후에는 '자기 땅에 와도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게 하셨다 그러면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그 이름은 뭐입니까? 믿는 거는  뭐입니까? 이름은, 이름은, 그 이름은, 그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 그 이름이라 말은 그 행위라 말이요, 그  행동이라 말이요, 그 공로라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동한 건 뭐 행동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어 온 그 행동 또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 십자가 못박혀 죽은 행동, 또 삼 일 만에 부활한 행동, 또 사십  일 만에 승천한 행동, 또 승천 후 신인양 성일위로 다시 강림하셔서 세상  끝날까지 믿는 사람들과 동거동행하는 그 행사 그것이 예수님의 행사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 받는 것이라. 믿는 것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라고 뭐 여러 수만 번 듣지 안했습니까?  그라고 여게,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절에 '이는 혈통으로 난 자가 아니요 또  육정으로 난 자가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러니까, 첫째 아담의 계통이  아니라 말이오. 또 첫째 아담의 자손 거게서 뭐 움직여 가지고서, 무슨 거게서  무슨 정욕이나 그 움직이는 욕심이나 그런 걸로 된 게 아니라 말이오. 또 그런  첫째 아담에게서 난 그자들의 뜻이나 생각으로 소원으로 된 것도 아니라 말이오.

계획으로 된 것도 아니라.씨는 순전히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자들이니라 이것이  지금 문제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이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라.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요 육정으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니라'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지금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는 부르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파묻혀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첫째 아담의 자손이, 첫째 아담의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는데 여게는 혈통도 아니요 육정도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요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난  자들이니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줬다 했는데 하나님의 자녀는  육정으로 난 것 아닙니다. 혈통으로 난 것 아닙니다. 사람의 뜻으로 난 것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둘째 아담의 자 손이라 그렇게 제가 오래 전부터 많이 증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래서, 잠깐 또 이치를 조금 말할 터이니까, 이치를 말만 하면 골치 아프다고  그만 안 들을라 합니다. 이치를 말하면 골치 아프다고 안 들을라 해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이름,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 그 이름이라. 예수님의  역사, 예수님의 이력, 예수님의 공로, 그것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도성인신서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내놓고 거게서부터 출발해 가지고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  하시고 그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의 토막을 한 공로라, 한 이력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입니다.

 죽으심의 공로로 사죄의 결과를 맺었고, 칭의의 결과를 맺었고. 화친의 결과를  맺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공심판에게까지 자유하는 자가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없는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중생돼서 영생하는 생명이 우리에게 있게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산 소망이 있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을 정리하고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완전 준비해 가지고  생명만 있으면 영생할 수 있고 아무 거리낄 게 없는 완전 터전을 마련했는데.

완전 터전을 암만 마련했지마는 생명의 씨를 심으지 안하면 거게서 뭣이 생명이  납니까?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생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심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사죄 칭의  화친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로 받았고 우리가 영생하는 생명으로  중생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게 된 것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하나님이 사람되심이 제일 큰  희생이요 또 사람되셔 가지고 십자가에서 대형 대행 대화친의 죽으심의 제물되신  것이. 죽으신 것이 그것이 곧 예수님의 다음 희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의 희생은. 죽으심의 희생과 예수님의 사람되심의 희생이 손해인데 그 두  희생 가운데는 주님이 사람되심의 그 희생이 크고. 죽으심보다도 그게 더 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되어 오심에 대해서는 별로이 감각을 가지지 안하고  예수님의 크신 이 희생이라 하는 것을 그런 것을 별로이 느끼지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신앙이 장성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것도 크지마는 그것보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그것이 크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그 무한성을 아는 사람은 무한성의  하나님이 피조물 형상을 입고 피조물 그 가다 속세, 피조물 형틀 속에 내주하게  되었다는 그것이 얼마나 큰 희생이란 것을 깨닫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제 하나님으로서 피조물 형상을  입었다가 피조물 형상을 벗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심으로서  인성인 그것은 죽어 버렸고, 예수님의 신성은 죽지 안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신성으로만 완전히 하나님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러면 그만 하나님이오.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나 꼭 같이 자유하고 살 수 있는 것인데 다시 인성을 입고 새로,  부활하신 것은 인성을 다시 입은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형상을 다시 입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이나, 하나님으로서 사람되어 오신 것이나, 하나님이  거게서부터 주욱 내려와서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데까지의 하나님의 고생의  희생과 또 죽은 가운데서 주님이 다시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신 이 부활의  희생과 그 희생이 같습니다. 부활하신 희생은 영원히 계속합니다. 만일 부활하신  희생을 주님이 억만 년 후에 '아이고 내가 창조주가 피조물 형상 속에 들어서  창조주가 피조물 노릇할라 하니까 너무 고생이라' 하고 그때 만일 예수님이  인성을 벗는다고 하면 우리 구원은 박살되고 맙니다. 영원히 벗지 않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하는, 나를 위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천대와 멸시와 이 모든  부자유, 이 모든 천해지고 모두 다 이 한없는 고생을 당하는, 창조주가 피조물  노릇 하는 거, 오늘 우리가 부자가 가난한 사람 생활하는 것도 고생이라 하고  만일 상전이 종노릇 하는 것도 고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 입은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어데까지  이 구원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 구원을 내가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또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내가 천해지고 부자유돼야 됩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면 우리가 똥구덩이에 빠지면, 똥구덩이에서 산다고  하면은 주님이 인성을 입고 다시 부활하신 것과 같은 그만한 정도의 고생이  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된 이것은 우리가 똥구덩이 들어간  걸로 비교 못 합니다. 우리가 송장물 속에, 송장물 속에 들어간 것으로 비교 못  합니다.

 산다 싱 전기를 제가 읽었습니다. 산다 싱이 서장에 가 가지고 복음을 전하다가  거게서 복음 전하는 걸 못 전하구로 해 가지고, 거게는 사형을 시키는 사형법이  시체굴이라는 굴이 있는데 그 굴에는 아주 깊이 파서, 수십 길을 파서 깊이 파서  널리 파 놓고 위에 철판 뚜껑을 크게 해 놓고 그래 죄수들이 있으면 그만 그  안에 집어던져 버리고 철판으로 그만 닫고 쇠통으로 채우고 모든 왕과 장관들의  도장을 가지고 딱 계인을 딱딱 해서 그래 이제 사형을 시키는데 그 산다 싱을  그만 거기다 잡아 넣었습니다.

 잡아 넣었는데, 자기가 뭐 오만 고생을 주를 위해 당할 때애 감사하게 당했는데  거게서는 견디지 못해서 아주 자기가 주여 내가 여기 죽겠사오니, 내가 여기 못  견디겠다고 그라면서 호소한 그런 것을 기록해 놨읍디다. 어떻게 여러 수천  수만의 사람이 막 들어가 가지고 거게서 썩어서 전부 이래 가지고, 공기도 하나도  안 들어가고 전부 거게서 썩기만 하고 이래 가지고 있어놓으니까 굉장한  사형굴인데 그 악취가 어떻게 거석한지 도무지 아무래도 견딜 수 없어.

 산다 싱은 주를 생각하고 열대 지방에, 열대 지방에 거머리 압니까? 거머리는,  열대 지방의 거머리는 이만석한데 그 거머리는 잠깐 몸에 붙으면은 피를  빨아대면 거머리 이만한 빠짝 마른 게 살이 팅팅쩌서 피가 쪽 빨아댑니다. 몇  마리 안 말아서 그만 사람 피가 쭉 빨리는 것입니다. 붙들어 매어 놓고 거머리를  잡아다가 온 몸에다가 여러 박 지기 들어부으니까 얼마나 좋다고  빨아먹겠습니까? 그래도 산다 싱이 거기 대해서 불평을 하지 안하고 '이제 주님이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받으신 그 고난의 흔적을 내가 지금 받고 간다'  하면서 주님의 고난의 흔적, 곧 그것을 성령의 인친 표로 생각하고 기쁘고 즐겁고  달게 여기면서 피할라고 하지를 안했습니다.

 이랬으나 그 사형굴에 들어가 가지고 악취나는 거게서는 견디지 못해서, 못  견뎌서 아무래도 견디지를 못해 가지고 주님에게 내가 여기 못 견디겠으니까  나를 여기서 구출해 달라고 이라니까 주님이 그 위에서 줄을 달아 내리우고, 탈  줄을 내려 놓아서 거게서 타니까 그래 쭉 올라가서 굴 밖에 나갔습니다. 굴 밖에  나갔지마는 그거는 굴은 문을 열리지 안한 건데 주님의 능력이라. 굴 밖에  나갔어. 나가 가지고 저 딴데 가 또 전도했어. 그거 인제 보니까 더 좋아서  전도했어. 했는데 보니까, 거게 보니까 인을 찍힌 것이 그대로 찍혀 가지고  있는데, 문도 그 왕이 열쇠 가지크 있는데 열지 안했는데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놀라고 그뒤에 약간의 복음이 퍼졌습니다.

 그래 내가 그걸 읽을 때에 '예수님이 다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의  고통을 부활의 고통을 산다 싱에게 체험하게 했는가보다' 하는 그것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산다 싱이 그 사형굴에 가 가지고 도무지 악취가  나서 견딜 수 없는 그것이 예수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영원히 나를 구원해 가지고  계시는 이와 비교를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부활절이라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좋아서 전부 찬송도 살아났으니까 좋다  하지마는 하나님이 인성을 영원히 입고 부활했다는 그거는 죽으신 거와 꼭 같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희생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두 가지로 우리를,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두 가지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한 희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까지 끝이 났고, 그런데 그 희생은 어데서부터 시작했느냐 하면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다고 하실 그때 그리스도가 곧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희생해 나온 그것이 이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는 것으로서 큰 또 한 토막을 지내 가지고 땅위에 오셨고, 땅위에  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우리를 죄에서, 의에, 하나님과 화친 이 세  가지 공로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세 가지 공로를 자꾸 생각하면서, 이렇게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뭐 주님 우리가 대접할 것 딴것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요 모든 것 없는  가운데 엿새 동안에 창조한 분이신데 대접할 것 없고. 주님이 이렇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영원 전부터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사람되어서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것까지를 생각하면서 늘 생각하고 거게 대해서 감사하고 이로 말미암아  '내가 사죄를 받았다, 칭의를 받았다 화친을 받았다'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와  기쁨이 우리 속에 충만해지는 그것이 주님의 대접이요,  또 하나는 주님이 이제 죽으심으로써 주님은 완전히 해방입니다. 죽으심으로써  완전히 해방이요 완전히 평안이요, 이제. 신성은 신성으로 인성은 인성 그까짓 거  휘떡 벗어 내던져 버리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신성으로 전지 전능자로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서 이떻게 크게 호령치고 하나님으로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성부와 성령과 진라 이렇게 지낼 수가 있는데 다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인성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에게는 신성 인성 신인양성일위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생명을 줬습니다. 주님이 영원히 사람으로 사는 이  일을 입지 안하면 우리가 사람으로서 영생하는 이 길이 열리지 안하고. 예수님이  사람되어서 하나님을 향하여서 사는 이 길을 열어서 우리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영생의 새생명의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래서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대속을 했고, 의에  대해서 대속을 했고. 화친에 대해서 대속을 했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에 대해서  대속을 했는데. 그러면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인데  지금 간단하게 말해도 여러분들이 모를 것이기 때문에 그저 기억이나 하도록  말합니다. 이 네 가지인데 한 가지가 네 가지씩 해 가지고 사사 십육 열여섯  가지입니다. 요것만 기억하고 여러분들이, 요 사사 십육 열 여섯 가지라. 죄에  대해서 네 가지 의에 대해서 네 가지. 화친에 대해서 네 가지,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에 대해서 네 가지 요 네 가지를 기억하시고 가만히 눈감고 어데든지 은밀히  생각하고 늘 가면서 오면서 생각하고 뭐 변소 가도 생각하면은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내가 깨닫는 진리는, 내가 아는 대로에 깨달은 진리는 다른 사람은 세상 지식만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나는 장 국민학교 오학년밖에 안 했다 합니다. 나는  국민학교 오학년밖에 안 했지마는 내가 그후에 예수 믿은 지는 스물다섯 살 먹어  예수 믿었는데 스물다섯 살 먹어서 예수 믿은 이후로 성경을 전공으로 공부한  것은 내가 하루도 빼지 안했습니다. 매일 계속해 밤이나 낮이나 늘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이러니까, 팔십이니까 몇해입니까? 오십오 년입니까? 성경 전공은 오십오 년  내가 했습니다. 저거는 다른 배암의 지식만 짜다라 기르고 있다가 성경을 이제  아니까 '그럴 턱이 없는데' 그거는 세상 지식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의 지식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에 '나는 일류대학을 졸업했는데 저거 뭐 국민학교 오학년밖에  안 했다.' 그 지식은 내가 대항할 수 없지마는 나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내가  오십오 년을 전공을 했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구원 주신 것과 합하면 네 가지  우리를 대속했다, 그러면 네 가지를 풀어 놓으면 억억만도 넘습니다. 네 가지를  풀어 놓으면 우주에 가득하고 뭐 그걸 책에다 기록할라면, 세상에 다 둬도 둘 수  없는, 그런데 간추리면 네 가지가 강령이기 때문에, 그물이 천 고라도 벼릿줄  하나만 들면 천 고의 그물이 다 거기 달리는 것 마찬가지로 이 네 가지 강령에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억억만도 더 되는 것이 다 여게 다 관련되어 속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죄에 대해서 네 가지로 생각해 봅시다. 죄에 대해서 네 가 지라는 것은,  하나는 어떤 죄를 예수님이 대형했느냐? 어떤 죄를 대형했는가? 네 가지 죄를  대형했습니다. 대형. 하나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한 그 죄값으로써 형을  대형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안한 그 죄값을 대형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배반치 말라 했는데 하나님을 배반한 그 죄값의 형을  예수님이 대형 했습니다. 또 하나님 외에 딴 것에게는 소망을 두지 말라 했는데  다른 것들에게 소망 둔 그 죄값을 예수님이 대형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죄의 형을 몇 가지 죄의 형을 대형했습니까? 손가락으로?  네 가지 죄의 형을 예수님이 대형을 하셨습니다. 뭐 이라면, 뭐 꼭닥스럽게 그렇게  할 것 없이 그만 쭈르르르 뭐 사이다 설교로 이렇게, 그런 것은 하면 속에 도가  담겨 있지 안하고, 도의 이치를 모르면 안 됩니다. 어짜든지 이치를 배워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여게 교역자들이 많이 왔는데 교역자들도 설교할 때에 꼭  성경이 가르친 이치를 증거할라고 하십시오, 이치를 증거하지 안하고 그뭐  열변이나 웅변이나 암만 해 봤자 멸매는 안 맺고 아무 소용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데 가지입니다.

 또 의에 대해서 네 가지, 의에 대해서 이 네 가지를 주님이 대신 행해 가지고  우리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행해서 의를 주신 의는 몇 가지를 대신  행했느냐 하면 네 가지를 대신 행해서 의를 행했습니다. 한 의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그 의를 우리 대신 했습니다. 안 하는, 네 가지 형을  대신했고, 의를, 형은 세 가지 형을 대신했고 의는 대신 네 가지 의를 대행으로  했습니다. 대행으로.

 그러면 무슨 의를 행했느냐? 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아니한  그 행의 의를 주님이 대신 의를 성취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신 것을  주님이 대신 하심으로 또 의를 이래 대행했습니다. 또 하나님만, 하나님만  화합해서 하나님만 상대로 하고, 하나님으로만 결합하고 딴것으로는 결합하지  말라는, 하나님만으로 결합한 것을 우리 대신 결합해 가지고 그 의를  성취했습니다. 또 하나님에게만 얻어서, 하나님에게만 소망하고 하나님에게만 얻는  그 의인데 그 의를 예수님이 대행해 가지고 우리에게 의를 입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소망했고 딴걸 소망하지 안했고 하나님에게만 얻어 가졌지  딴거 하지 안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분류해서 말해 주지 안하면은 엉뚱한  생각한다 말이오. 의는 무슨 의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 의라 하는데 무슨  웝을 행했느냐? 뜻대로 행한 그거,뜻대로 행한 그 의를 요 네 가지 강령을 들고  연구하면 그 밑에 모두 다 속해 가지고 다 환하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대화친으로 가지고 이렇게 대화친도 대행했습니다. 화친도 대신  화친을 해 가지고 우리에게 화친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화친주신 그것도 네  가지를 대신 해 가지고 화친을 주셨습니다. 네 가지 대신한 화친이 뭐인가?  예수님께서 죄를 대항해서 죄를 짓지 안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한  것이 그게 죄를 범하지 안한 것인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할 때에  예수님 단독이 안하지 안 했습니다. 단독이 안하지 안하고 아버지와 화친이 돼  가지고 아버지와 동행으로 둘이 합작해 가지고 그 일을 했기 때문에 이것이  화평의 의가 됩니다.

 또 의를 행한 것도, 의를 행한 것도 예수님 단독이 행하지 안하고 아버지를 힘  입어서. 아버지하고 둘이 동행해 가지고 의를 행했습니다. 또 하나님과 화친한 그  화친 생활도 이것도 하나님과 동행해 가지고 화친 생활했어. 하나님을 힘입어  화친 생활 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힘입지 안하고 한 것은 전부 죄요 멸망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새기면 그 속에 깊은 뜻이 들어 가지고 있어요. 사람이 아무리 의를  행해도 하나님과 동행으로 안 한 거는 헛일이야. 아무리 하나님하고 내가  화친해서 하나님을 친하고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고 하나님을 앙모해 본다 할  지라도 내가 하나님과 둘이 동행해서 하나님을 힘입어서 화친이 아니라면  헛일입니다.

 또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도 내가 아무리 소망해도 단독 소망하게 되는 단독  소망은 소용 없어. 하나님과 하나가 돼 가지고 이제 소망을 해야 돼.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는 밀접한 관계에 털끝만치라도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벌어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이제 하나님과 화친함과 이 세 가지에 대한 것을  말했습니다. 세 가지에 대한 것을 말했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지는 하나님에게 얻어 가지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 그거 네 가지, 그거 네  가지도 내나 그런 이치로 풀이하면 됩니다. 죄에 대해서도, 죄에 대해서도 죄를  범하지 안하고 죄를 이긴, 죄를 이긴 그 행동에 대해서도 죄를 이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죄를 이기는 행동이 그게 뭐이냐? 하나님에게 소망 가지고 소망 때문에  죄를 이겼습니다. 소망 때문에 죄를 이겼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명령을 복종해 가지고서 의로써 그 소망을 이룬 거라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하는 그 소망을 가지고  소망을 해야 된다 말이오. 그거 무슨 말이요? 꽂감 접말 같지만 아니야. 하나님을  소망하는 소망 가지고 소망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소망 없이 소망하는 건  소용 없어. 소망만 할 수 있어. 하나님을 소망하지 안하고 그때 소망할 수 있어.

그러나 소망하는 그것 가지고 소망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인해서  소망하는 거.

 그러면 우리 구원이라 하는 건 얼마나 첩첩이 쌓여지고 그저 여러 수만 고로  얽어서 얽어서 물샐틈 없이 똑 무쇠 박지기같이 구멍 뚫리는 일이 없이 이렇게.

결박해 놓은 것이 하나님의 구원인데 이 구원이 뭐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껍데기로 제 주관대로 이와같이 슬슬 해 가지고 구원이 된다고 생각하는 진 다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는 그대로 우리가  기본구원 얻어서 하늘나라 가기는 가지마는 구월의 영광은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이 이치를 모르면 안 되기 때문에 이 이치를 알아서.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지금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사활의 대속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활의 대속을 내것을 삼는  데는 어째야 되느냐? 내것을 삼는 데는, 사활의 대속을 나를 주시면 영육이라는  나는 주님에게 맡겨서 내것이 아니고 내놔야 됩니다. 산 제물로 내놔야 됩니다.

주님의 사활의 대속을 내것 만들면 나는 살아 있지마는 이것은 예수님  제물되심같이 우리 되어서 산 제물로 주님에게 바쳐야 된다 말이오. 내가 주님의  것이 안 되면 주님의 사활의 대속은 내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라고 난 다음에는 내가 사활의 대속을. 이 네 가지 대속을 내가 벗지 안하고  입고 살라고 하면은 이걸 벗으라고 할 새에. 벗으라고 할 때에 좋은 말로 벗으라  하다가, 나중에는 소유를 훼방하며 벗으라 하다가. 소유를 뺏들고 벗으라 하다가,  그 몸을 감옥에 가두고 벗으라 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인다고 생명을 뺏을라고  하면서 협박하면서 이 사활의 대속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사활의 대속 때문에 없어진 것은 그것은 무엇이 된 것입니까?  사활의 대속 때문에 없어진 것은 무엇이 된 것입니까? OOO목사님? 녜,  세상에서야 빛이 됐지요. 세상에는 빛이 됐는데 사활의 대속으로 없어진 거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O장로님? 영생됐습니다. 사활의 대속으로 없어졌으면  다시는 시험받지 않는 완전의 영생이 됐습니다. 사활의 대속 때문에 없어진 건  영생이 됐어.

 그러니까 우리가 사활의 대속을, 대속의 성공은 소유를 다 드린 것이 성공입니까  생명을 다 드리는 게 성공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생명을 다 드리는 게 성공인데,  우리가 사활의 대속을 벗지 안하고 사활의 대속을 입고 사활의 대속 생활을  할라는 거, 사활의 대속 생활,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사활 대속하신 이 대속으로  살라고 하다가 우리의 성공은 어데 있습니까? 우리의 최종 성공은 어데  있습니까? 최종 성공은 어데 있습니까? 최종 성공은 어데 있어? 최종 성공을  어데 있어? 누구한테 좀 물어, 볼꼬? OOO장로님? 순생 생활이 완성이라? 순교!  그래야 되지. 똑똑히 고합 한번 질러 봐. 순교! 아, 안 들려. 순교! 사활의 대속  생활 하다가 내 생명이 사활 대속으로 끊어지는 그것이 완성입니다. 요 비결을  아는 사람은 밤낮으로 순교를 원하고 있어요.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약은  털끝만큼도 낼치 안해요. 이제 거기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그만치 알고 또 다음  시간이 있으면 증거 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예수 믿는 이치를 모르면 예수를 못 믿습니다. 예수 믿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주일을 범하고 뭐 직장 때문에 돈 때문에 자기 몸뚱이 때문에 생명 때문에 가족  때문에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주님의 뜻을 뿍뿍 어겨 나가지 아는 사람은 그래  어겨 나가지 않습니다. 아는 것은 힘이오. 진리를 바로 알아야 힘이 나오지  모르는데 무슨 힘이 나옵니까? 예수 믿는 건 이치라. 이치를 알아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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