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응답

 

1987. 1. 30. 밤 (금)

 

본문:시편 91편 14절∼1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광고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금주에는 하루 평균 여게 와서 기도한 사람 오백이십오 명입니다. 등록하실 분은 일층 입구에서 하면 됩니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나오도록 합시다.

십 분 기도 후에 지난 주 설교 재독이 있습니다.

분구된 {남구역장님들께서는, 분구된} 남구역장님들께서는 보고서를 다 내시기 바랍니다. 입구에 보고서 용지와 받는 함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반사에 대한 광고입니다. 전국에서와 또 외국에서 우리 주일학교를 참관도 하고 또 시찰도 하고 견학도 하기 위해서 방문한 그 단체가 한 육백여 회 됐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그때마다 모두 주일학교 책임자들이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라고 그중에도 반사 선생님 중에 거게서 심방하는 것을 견학할려고 온 그런 선생들이 있을 때에는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심방을 하고 하느라고 그들에게 좋은 본도 보여야 되겠고 또 힘을 주어야 하겠고 하니까 반사 선생님들이 자기 혼자 심방하는 것보다도 좀 힘이 많이 들고 수고가 된 줄 압니다. 그런 반면에 그로 인해서 자기 또 반사 사명도 잘 감당한 줄 압니다.

그분들의 그 수고에 대해서 지금 잠깐 호명합니다. ○○○선생, ○○○, ○○○, ○○○, ○○○, ○○○, ○○○, ○○○, ○○○, ○○○, ○○○, ○○○, ○○○, ○○○, ○○, ○○○, ○○, ○○○, ○○○, ○○○, ○○○, ○○○ 남반사 스물한 명입니다.

또 여반사, ○○○, ○○○, ○○○, ○○○, ○○○, ○○○, ○○○, ○○○, ○○○, ○○○, ○○○, ○○○, ○○○, ○○○, ○○○, ○○○, ○○○, ○○○, ○○○, ○○○, ○○○, ○○○, ○○○ 이 스물세 명입니다. 이래 합해서 마흔네 명된 이 반사들은 그동안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또 와서 같이 심방 다니고 간 교회마다 다 크게 그 교회들이 부흥을 얻었습니다.

이래서 아주 우리 이 서부교회를 참 모교회처럼 그렇게 사모하고 대단히 존경하고 그렇게 늘 좋은 소식이 들려 옵니다. 그렇게 열심히 충성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아니하고 유익을 줄라고 하는 데에는 많은 수고가 있었은 줄 압니다.

오늘도 벌써 타교회에서 반사 선생님들이 한 군데인가 두 군데인가 몇십 명 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여기 참석하고 또 내일 종일 심방하는 거 다니면서 배우고 이래서 이 주일학교 운동이 지금 뭐 전국적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들어 쓰실라면 막대기를 가지고도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데 주님이 우리를 들어 쓰시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줄을 압니다.

그런고로 이제 호명된 선생님들이나 그 외에 모두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우리로 하여금 빛이 되도록 이렇게 산위에 세운 성으로 우리를 세우셨으니까 여러분들이 끝까지 잘 견뎌서 수고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실망 주지 안하고 크게 믿음에 유익을 주도록 끝까지 노력하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에 대한 그 노고를 결단코 헛되지 않게 당신이 기억해서 다 축복하실 것입니다. 끝까지 수고로워도 그 산위의 세운 동리라고 말씀한 대로 빛의 생활을 잘 계속하시고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둡니다.

오늘 이 말씀을 봉독하게 된 동기는 과거에는 팔월 명절이든지 또 설 명절이 닥치면 뭐 교인들이 그만 이렇게 저렇게 해이해지고 명절 지내고 나면 신앙들이 많이 해이해지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금년에는 유별히 모두 다 기도에 힘을 써서 꽃마을에도 그 날만 기도하러 간 사람이 한 이백여 명이 됐다고 하고, 또 양산동에 기도하러 간 사람도 그 날에 한 삼백여 명이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오백여 명이 기도하러 가서 그 날 종일 기도하고 온 사람들도 있고, 또 밤에 그 추운데 그 산에서 기도한 그런 분들도 있고, 오늘도 보니까 지금 저 양산동 그 산에 모두 비니루 한 장씩 두터쓰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을 봤습니다.

여기 그전에 우리 교회에서 제직회 서기하던 ○○○집사님도 지금 그 산에 가 있고 ○○○장로님도 산에서 기도하고 있읍디다. 제가 내려오면서 ‘안 가려느냐?’ 이라니까 내일 가겠다고 그렇게 하면서 거게서 기도하고 있읍디다.

그분들이 이 밤예배는, 제일 높은 봉우리 거기 있는데 그 상봉에서 기도실까지 내려와 가지고 예배를 드리니까 지금 여게서 강단에서 하는 그 소리를 그들이 다 듣고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모두 기도에 힘을 쓰고 또 말씀대로 살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징계가 없는 사사로운 아들과 같이 아무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방임해 둬 뒀다가 이제 좀 회개를 하면서 살라고 애를 쓰니까 하나님께서 ‘그러면 내가 너희들을 이제는 좀 함께 하겠다’ 하는 그런 응답으로서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것이 보여집니다.

하나님이 관리하시면 첫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치료가 있습니다, 사랑의 치료. 사랑의 징계가 있어서 잘못된 그런 것은 다 수술을 해서 제거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런 것을 미리부터 다 성경에서 말씀했고 설교도 많이 했기 때문에 자기 사업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는 것이 있으면 그런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그대로 둬 두지 아니하시고 다 그것을 치료해서 회개하도록 그렇게 하신다 하는 것을 많이 배우기는 배운 줄 압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마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나는 왜 이런가?’ 하는 그런 시험을 받기도 쉽습니다. 그런 데 대해서 올바른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면이든지 잘못된 면이 있으면 반드시 그 면은 치료가 되어야 합니다. 고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무엇이 좀 변동되고 또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든 그것을 냉정스럽게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인가, 이것은 이제 공연히 억울함인가 그런 것을 잘 생각해 보면 잘못된 것이 깨어질 때에는 ‘하나님이 이제는 나를 착수하시고 간섭하셔서 나에게 모든 잘못된 것을 다 치료하시고 이제는 영육의 행복을 주시기 시작하는가보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이 없이 기도하러 온 사람들도 많이 있지마는 대개는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에게 어려움이 있으니까 기도하러 온 그런 사람들이 많은 줄 압니다.

야고보서 5장에 “어려움이 있느냐 하나님께 기도해라 또 무슨 기쁜 그런 일이 있느냐 하나님의 은혜니까 감사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물론 더 나아가기 위해서 기도하러 온 분도 있지마는 또 자기에게 어려움이 있으니까 어려움을 해결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분들도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15절에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간절히 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응답하리라,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응답이라 말은 내가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서 그 답을 해 준다 말입니다. 그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답을 해 주시는, 기도에 답을 해서 기도를 들어 주신다 그말입니다. 응답이라 말은 기도를 들어 주신다 하는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행복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내 소원을 들어 준다면 우리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는데 하물며 이 세상 뭐 어떤 부강자나 정권자로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신다면 그 외에 더 우리에게는 행복된 일이 없고 세력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응답 받는 그런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간단하게 증거를 하겠습니다. 첫째로 응답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있는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대해서 응답을 해 주실 것인가? 요것을 첫째로 여게 말씀해 놨습니다.

14절에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이 꼭 같은 말입니다.

“그를 건지리라” 건진다는 거, 함정에 빠진 거와 같이 어려움에 빠져 가지고 있는데 건져 주신다. 또 그를 높여 주신다. 이것이 다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서 응답해 주신다. 응답해 주신다. 그것은 사람이 기도할 때에, 요거 아주 알아듣기가 좀 어려운 말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건지리라,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이렇게 말했는데 그라면 그의 기도를 다 응답해 주겠다 이랬는데 요 말씀이 아주 좀 깊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좀 힘듭니다.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으로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기 쉬운데 거게 대한 참 뜻은 그런 거 아닙니다. 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인 것입니다. 요거 좀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신다 요렇게 똑 보기 쉬운데 그게 아니고 꺼꾸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 벌써 기도의 응답을 들어서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그것이 우리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는 사람이 돼야 기도를 들어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알게 되는 그것이 벌써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대개는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지금 인제 번역을 알기 쉽도록 그래 놨는데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거룩하게 하옵시며” 이랬는데 그래 가지고는 너무 알기 어려우니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래 놨습니다.

그전에 번역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거룩하게 하옵시며” 이랬는데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이름이 거룩해지는 것으로 이렇게 보여지지마는 그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우리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그런 기도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연보하는 것은 “연보를 해서 하나님에게 네가 모든 헌물이나 십일조나 하나님에게 드리라” 모두 드리라 이래 놨습니다. “연보를 하나님에게 드리라” 연보를 하나님에게 드리라 하는 그말은 똑 바로 말하면 ‘네가 연보로 하나님에게 받아라’ 그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바치라 말은 하나님에게 받으라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바치라 말은 하나님께 받으라 말이오. 하나님에게 바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받는 것입니다.

바치나 안 바치나 그것은 다 하나님이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바치는 그것으로써 자기는 하나님의 것을 영원히 자기 것을 삼는 것입니다.

요렇게 요거, 하나님에게 바치는 그것이 사람 말로는 바치라 했고 사람 보기는 바치는 것 같으나 바치는 그것이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는 것이라 하는 이것을 요런 말로 깨닫고 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이것밖에 없어요? 연보하는 것은, 우리가 연보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게 아니오. 우리가 보관해 가지고 있는 거 그거 보관해 가지고 있다가 세상 떠 버리면 다시는 자기 것 아닙니다. 이런데 일단 바친다는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영원히 자기 것을 만드는 거라. 자기 것을 삼는 것입니다. 영원히 자기 것을 삼는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두우니까 어두움을 따라서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바로 깨닫기가 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험하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평탄하다” 하는 그말은 또 정반대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평탄합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아주 좁고 험합니다. 가다가는 다 상해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 말로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그와같이 한 것인 것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는,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이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벌써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뭐 거게 대해서는 너무 좀 어렵기 때문에 그만 두고 간단하게, 이것도 또 아주 쉽게 말해야 여러분들이 압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한다 말은 기도에 대해서 대답해 준다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에게 이렇고 저렇고 말해도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은 척 만 척하고 뭐라 하거나 그저 눈도 꼼짝거리지 안하고 뭐라 하든지 상관없는 그것은 내게 대해서 아주 내 말에 대해서 푸대접하는 것이요 아주 그것은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할 때에 거게 대해서 ‘이렇습니까?’ 하면 그렇다고 서로 상대해서 대답을 해 주고 서로 의논해 주는 그것은 그 사람을 대우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그 응답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 응답을 우리가 잘 모르면 속기 쉽습니다.

하나님에게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첫째로 어떻게 오는고 하니 우리가 기도할 때에 기도하면 자기가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십니다. 응답을 하시는데 뭐라고 응답하는가? 요걸 잘 모르면 실패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는 데에 첫째로 들으실 때에 어떻게 들으시는가?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너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 계약의 말씀을 듣고 읽고 한 것을 생각해 보라’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제까지 배우고 읽고 듣고 한 이 계약의 말씀을 뭐라고 했는지 좀 생각해 봐라’ 그것이 자기에게 응답이 옵니다.

기도하면, 기도하는데, 기도할 때에, 기도하니까 기도가 안 됩니다. 기도가 안 돼서 뭐 자꾸 이래 뭐 기도 안 돼서 아래 위로 뛰어 돌아다니고 뭐 기도 안 되니까 번민 고민을 하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제 기도에 대해서 응답한 그 응답을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한 것입니다. 암만 돌아다녀도 기도 안 됩니다.

왜? 주님 앞에 기도하니까 주님께서 대답을 해서 자꾸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해 주시는데 대답하는 소리는 안 듣고 자꾸 말만 씨분거리고 자꾸 하니까 그 말하는 데 거게 대해서 합당한 대답을 해 주면 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이 또 대답해 주시면 또 그 대답에 따라서 내가 또 주님 앞에 기도하고 또 주님이 대답해 주시면 대답에 따라서 기도하고 이래야 되지 그 대답하는 소리는 듣지도 안하고 저 혼자만 자꾸 주관적으로만 중얼거리면 그 사람은 하나의 미친 사람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안해요? 아무리 우리가 육체의 부모라도 자녀가 부모에게 말하면 부모가 거기 대해서 말을 해 줍니다. ‘야, 너 그거는 이렇고 저렇고,’ 이래 말하니까 자꾸 안 듣고 자꾸 말만 하고, 말하는 데 대답을 해도 대답은 듣지 안하고 자꾸 간구만 자꾸 조우기만 조아댑니다.

‘내가 네가 말하는 데 내가 또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그래도 안 듣고 ‘그러면 지금 네가 이래 말하니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네가 이래야 되지 않느냐?’ 이라니까 그 소리도 안 듣고 자꾸 조우기만 조웁니다.

그라면 여러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꾸 그라면 어찌 되겠소? 그라면 여러분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뭘 달라고 조우든지, 뭘 달라고 조우는데 달라고 조우면 부모가 있다가, 그 달라고 조우는데 그 아이가 그걸 지금 모르고, 달라고 하는 데는 그거는 지금 제게 필요 있어 달라고 하더란대도 그거는 그라면 담을 그릇을 가져 오라든지 또 그거는 네가 그걸 필요해서 가질라고 하면은 고무 장갑을 끼고 그리 주의해야 되지 잘못 그러면 네 손 다 타 버리고 하니까 안 된다든지 이라는데 자꾸 소산수를 보고서 소산수를 달라고 자꾸, 쓸 데 있다고 자꾸 소산수 달라고 하니까 예를 들면은 그런 거 비유가, 부모가 있다가 말하기를 ‘이거는 이 독약이라 위험하니까 네가 그라면 무슨 사기 그릇이든지 뭐 그런 그릇을 가져 오너라. 또 그리고 네가 손에 뛰어가면 큰일나니까 장갑을 껴라.’ 이라니까 그 소리는 안 듣고 자꾸 달라고만 자꾸 조웁니다. 달라고만 조아.

‘주면 네 손이 바짝 다 타버릴 거고 그거 쏟아버리면 집도 집도 다 타버리고 안 될 터인데 자꾸 달라고만 조우느냐?’ 이래 하는데 자꾸 그래도 또 응답도 안 하고 자꾸 달라고만 합니다.

달라고 하면 어짜겠소? 달라고 하면 어짜겠습니까? 자녀 낳은 사람 한번 말해 봐요. 자꾸 달라고만 그래 자꾸 ‘야, 그런 게 아니다. 고무 장갑을 네가 저 가서 끼고 오너라.’ ‘아니요, 주십시오. 주십시오.' `아니다. 저 그릇을 가지고 오라.

위험하다. 그릇 가지고 오라.’ ‘아니, 주십시요 주십시오.' 자꾸 달라고만 하면 어짜겠소? 우리 ○○○장로님은 아들을 참 특별히 사랑을 내가 보는데 자꾸 달라 하면 어짜겠소, 자꾸? 어째요? 회초리로 깔려대. 회초리로 깔려대. 회초리로 깔려대든지, 아마 회초리로 깔려댈 게 아니라 우리 ○장로님 지금 남의 일로 보니까 회초리로 깔려대는데 회초리로 깔려댈 게 아니고 아마 그럴 거라. ‘야야 야야, 야야 가자.

어데 좀 잠깐 갔다 오자.’ 하면서 병원에 데리고 갈 겁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요, 병원에. ‘이거 아무래도 저거 정신이 이상이 됐으니까 이거 좀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야 되겠다.’ 아마 병원에 데리고 갈 거라.

뭐 회까리고 뭐이고 자꾸 이래도 그뭐 아무리 말해도 대답은 안 하고 자꾸 엉뚱한 소리 자꾸 달라고만 들이 조아재끼면 그건 정신 이상자고 미쳤기 때문에 ‘이거 아이가 왜 이러노, 이거?’ 뭐 채찍일랑 냅두고 종아리는 냅두고, 자꾸 그래 하면 종아리 안 때립니다. 아마 장로님 ‘아이 큰일났네, 이거. 아이가 왜 이래? 야야 너 왜 이래? 내가 자꾸 너 지금 안 준다 하나? 주는데 이 뭐뭐 이걸 가지고 와 준비해야 되는데 자꾸 그래 달라면 너 지금 큰일나는데 그래 하나?’ ‘아니요, 줘요 줘요.’ 자꾸 이라면 `아, 이거 아이가 이거 큰일났네. 이거 아마 정신이 돌았는가배.’ 하고서 그만 병원에 대리고 갈 겁니다. 안 데리고 가겠습니까? 병원에 데리고 갈 거라, 병원에.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해 주시는 그 응답을 우리가 조심 있게 듣고 응답을 들어서 그분이 내게 대답을 해 주시면 나도 또 거게 따라서 또 당신에게 간구해야 됩니다. 내가 한 마디 하면 또 주님이 또 우리에게 한 마디 하면 또 그말 듣고 또 이래 말하고 주고 받고 이래야 이거 대화가 되는 것이지 자꾸 일방적으로만 하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에 뭘 소리로 응답합니까, 또 무슨 환상으로 응답을 합니까? 어디다가 응답합니까? 주님의 기도의 응답을 들을라면 우리가 무슨 귀로 들어야 합니까? 저 ○○○목사님, 무슨 귀로 들어야 됩니까? 양심의 귀로 들어야 된답니다, 양심의 귀로 들어야 된대요. 양심의 귀로 들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양심을 쓰지 안하면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고 자꾸 일방적으로만 그래요.

뭐 우리가 그런 거 많이 있습니다. 자꾸 아이가 있다가 말하기를 말이요, 말하기를 ‘돈 억만 원만 줘요. 돈 억만 원 줘요.’ 이놈이 억만 원 쓸 일이 없는데 자꾸 ‘돈 억만 원 줘요, 억만 원 줘요.’ 쌓아니까, 그래 하니 ‘야야 돈이 네게 억만 원이면 뭐 쓸 거냐?' `아이, 억만 원 줘요.’ ‘그래 어디다가 네가 쓸라고 돈을 억만 원을 달라 하노? 네가 억만 원이 돈이 얼마인 줄 아나?’ ‘아이, 억만 원 줘요. 억만 원 줘요.' `억만 원이 네게 무슨 필요 있노?’ ‘억만 원 줘요 억만 원 줘요.' 자꾸 이라면 그만 그 아이 병원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어. 미쳤거든. 정신 이상이라. 이거 모양으로 하나님께 참 답답한 일 많다 그말이오.

자기에게 해당되지 안한 걸 간구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순서적으로 말해 주는데 그 순서를 듣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제일 먼저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기도해서 양심을 써서 기도하면 ‘네가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읽었으며 어떻게 들었느냐? 네가 성경 말씀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되지 않느냐? 네가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읽었으며 성경에 뭐라고 했느냐?’ 이것을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의 응답이 그것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하다가 ‘아이구 이거 성경을 봐야 되겠다.’ 기도하면은 성경 볼 마음 생기고 또 기도하다 보면은 그래요, 저도 오늘 산에서 기도하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뭣을 말씀하는데 그 성경에 뭐라고 성경에 어데 있으며 또 그 절수를 찾아 가지고 ‘성경에 보자, 정확하게 어떻게 말했는고 보자.’ 또 정확하게 말한 그걸 찾아서 읽어보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 ‘성경에 이렇고 이렇다’ 하는 그걸 내게 깨달아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또 하나님이 또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그거요.

그러면, 성경을 알려 주시고 그라면은 뭣을 주시느냐? 당신이 ‘너 이렇게 성경에 기록했는데 네가 그라면 어떻게 되지?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는데 너는 지금 어떻게 했지?’ 이래 묻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됐으면은 너는 어떻게 했지?' 이래 묻습니다. 그게 응답이오. 첫 응답은, 처음에 응답은 ‘네가 이 성경을 뭐라고 읽었으며 어떻게 배웠느냐?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들었으며 어떻게 읽었느냐?’ 이걸 묻습니다.

그럴 때에 그라면 우리 기도는 뭘 해야 됩니까? 내가 뭣을 이거, 전 기도가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기도하면은 당신이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읽었으며 어떻게 들었으며 또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었느냐?’ 이거 묻습니다. 이거 묻는 것을, 그럴 때에 묻는 것이 어데 뭐 소리로 묻는 거 아니고 우리 양심을 통해서 묻습니다.

‘내가 이 성경을’ 양심 쓰지 안하는 사람은 ‘주여 뭐 주십시요 뭐 주십시요 뭐 주십시요’ 뭐 `이렇고 저렇고’ 막 주 지껄이지마는 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더불어 서로 대화를 해서 서로 이렇게 대화, 주고 받는 서로 대화하는 이 사실을 알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습니다. 입을 함부로 벌리지 안해요. 입을 하나님 앞에 함부로 벌로 말을 하지 말라 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했어요.

상대방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전지 전능자인 줄 알고 완전자이고 지극히 크신 분이신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말할 때에 조심 없게 말하지 안해요.

아무나따나 뭐 그저 자기 군소리 모양으로 중얼중얼중얼 그렇게 안 합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하고 나하고 지금 서로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히 하나님 앞에 ‘내가 이 말을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사람도 서로 만나 가지고 말할 때에 ‘이 말을 하면 상대방에게 비위에 거슬리겠나, 혹은 꾸중을 듣겠나, 혹은 좋아하겠나?’ 이럴 거 아닙니까? 그거 인격 아닙니까? 서로 기도라 하는 것은 인격, 신격과 인격이 서로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참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제일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네가 기도를 하는데 그러면 네가 이렇게 산에 와서 기도하고 또 집에서 기도하고 지금 기도하니’ 듣든지 말든지 하는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상관 안 해. 듣든지 말든지 하는 그런 기도는, 그런 기도는 응답은 없습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상관없이 기도하는 기도는 응답이 없어요.

그런 기도는 어떤 효력이 있느냐? 그 기도할 때에는 사람이 그래도 더러운 소리 나쁜 소리 그런 죄 짓는 소리는 안 합니다. 이러니까 자꾸 뭐 소리를 내 가지고 자꾸 일방적으로만 자꾸 이렇게 말하는 그런 사람의 기도는 어떤 효력이 있느냐? 그렇게 기도함으로 자신이 자꾸 입으로 좋은 말을 하고 또 자기 한 말을 귀로 또 좋은 말을 듣고 자꾸 이라는 가운데서 자신이 다소 성화됩니다. 자신이 성화되는 일은 있지마는 주고 받는 응답은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자꾸 입으로 자꾸 이렇게 말할 때에 그저, 이 말하면 상대방이 듣는가 안 듣는가 이거 서로, 기도라 하는 건 대화인데 대화는 하지 안하고 자꾸 일방적으로 이래 기도하는 사람 그것도 기도할 때 욕하지 안하고, 기도할 때에 죄 짓지 안하고, 기도할 때에 나쁜 소리 안 하기 때문에 자꾸 좋은 말만 하니까 제 입으로 말해 가지고 제 귀로 들어오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어오고 그래도 그래도 자꾸 좋은 소리만 들으니까 자기에게 거룩하게 사람이 변화되어지는 그런 은혜는 있어요.

그런 유익은 있습니다.

유익은 있지마는 하나님하고 서로 상대방으로 옳다 그르다 서로 대화적으로, 내가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기도에 대해서 답을 해 주시고 또 답에 따라서 내가 또 말하면 하나님이 또 말하시고, 내가 한 마디 하면 주님이 한 마디 하고 주님이 한 마디 하면 내가 또 한 마디 하고 자꾸 이렇게 대화해 가지고 서로 의논해 가지고 무슨 일을 성사해 나가는 이런 일은 없다 말이오. 기도에 대해서 응답은 받지 못해요.

응답 받을 사람들은 첫째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꾸 이래 뭘 이래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다 보면은 퍼뜩 생각해집니다. 기도하다 보면은 뭣이 기도 가운데 퍽 생각해지기를 뭐이 생각해지느냐? ‘그러면 네가 여게 대해서 성경에 어떻게 기록돼 있지?’ 성경에 어떻게 기록돼 있지 하는 게 자기에게 생각이 납니다.

‘내가 이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이냐 성경적이 아니냐, 내가 기도하는 데에 성경에 뭐라고 말했더라? 그 성경대로 정확히 내가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성경에 뭐라고 정확히 말했지?’ 자기가 성경을 자연히 들춰 보게 됩니다. 성경에 들춰 보게 돼. 성경을 안 들춰 보면 이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도 ‘성경에 뭐라고 했지?’ 하는, 성경에 대해서 들은 것과 자기가 읽은 것, 들은 것 읽은 것 또 성경을 배운 거 이런 것이 생각이 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경이 생각나는 거, ‘성경에 뭐라고 했느냐?’ 하는, 성경을, 성경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 그것이 일차적으로 주님과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이게 없는 사람은 자기 주관적으로 자꾸 말하기 때문에 소용이 없어. 일차적으로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라고 나면은 이차적으로 자기가 성경을 보고, 성경을 보면 확신이 있습니다. ‘주님이여, 성경에 과연 이렇고 이렇고 이랬습니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는 그런 고백이 또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주님에게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성경에 뭐라고 말했노? 성경에 이렇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이렇게 설교를 들었습니다. 내가 성경 읽을 때 이렇게 들었습니다.’ 그라면 주님에게 주님하고 나하고 대화가 됐습니다.

그라면 주님이 나한테 뭐라고 말씀하느냐? ‘그러면 네가 여게 대해서는 어떻게 됐지? 여게 대해서는 어떻게 됐지?’ 이걸 당신이 말합니다. 당신이 말할 때에, 나는 벌로 덤볐는데 주님이 나한테 ‘네가 그라면 이 성경에는 이렇게 이렇게 말했는데 그러면 너는 어떻게 했지?’ 이라니까 자기가 모르던 것이 이런 일 저런 일이 자꾸 생각이 나옵니다.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나올 때에 그때 ‘주님이여,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내가 이렇게 하지 못하고 내가 여게 대해서는 이렇게 했습니다. 아무 사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했습니다. 아무것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첫째로 당신이 나에게 ‘너 잘못한 게 뭐이지?’ 이래 묻는 것입니다.

`잘못한 게 뭐이지?’ 이래 물어. ‘잘못한 게 뭐이지?' 이래 묻지 안하고 처음에 성경을 말해서 성경을 알도록 이렇게 물으시고, 그러면 ‘성경에 이렇게 이랬습니다.’ 이래 내가 말을 하면 주님이 있다가 ‘그러면 너는 이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했지?’ 이렇게 당신이 또 묻습니다.

물을 때에 그때에 내게 생각이 납니다. 나 가지고 ‘주님이여, 나는 그때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그때는 나는 잘한다고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게 좀 의문이 됩니다. 좀 잘못됐는가 모르겠습니다.’ 이라면, ‘그게 잘못됐는지 바로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라면 또 당신이 또 대답이 옵니다. 또 응답이 옵니다. ‘잘못됐는지 잘됐는지 네가또 어떤 성구를 줍니다.

어떤 성구를 가르쳐 주면서한번 더 한번 생각해 봐라. 성경에 이런 성구가 있지?’ 자기가 그때 보지 안했는데 자기에게 가르쳐 준다 말이오. 가르쳐 줘서 그 성구를 또 생각하니까 ‘아이고 잘못됐습니다. 한 그게 잘못 됐습니다.’ ‘그래? 잘못됐어?’ `내가 그때는 참 무지해서 몰라서 그랬는데 잘못됐습니다.

이거 용서해 주십시오. 이거 고치겠습니다. 고치겠습니다.’ 이러면, ‘고치겠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상대해서 `고치겠습니다’ 이랄 때에 주님이 위로를 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보여집니다.

또 그라고 나면 ‘내가 이렇고’ `그러면 네가 한번 좀 생각해 봐' 그러면 자기가 ‘내가 이것도 뭐이 잘못됐습니다. 이것도 잘못됐습니다.’ 잘못된 것이 자꾸 생각이 나 가지고 그것을 자꾸 하나 둘 자꾸 이래 들춰 나가면서 ‘이게 어떻습니까?’ 그라면 잘못됐다는 것이 발견이 되고 잘못된 걸 주님 앞에 말하면 그것을 바로 수정해서 하나씩 하나씩 깨끗하게 정리를 해서 결정을 지워 주십니다. 그게 주님의 응답입니다.

그라고 인제 그거 한참 할 대로 합니다. 그라다가 당신이 자꾸 그것을 자꾸 묻는데 내가 딴걸 가지고 가면은 당신이 따라오지 않소. 어떨 때는 또 나는 거게 대해서 더 생각하고 싶습니다. 거게 대해서 좀 더 생각할라고 하는데 당신은 거게서 또 딴걸 가지고 옵니다. ‘그걸랑 내비두고 여게 대해서 내가 지금 그러면 네가 지금 현재에 무엇을 하고 있지?’ 이래 묻게 됩니다.

‘뭘 하고 있지?’ `나는 지금 이렇게 이렇고 이래,' ‘뭘 하고 있지?’ 할 때에 그때에 우리에게 용감스럽게 `이런 거 이런 것을 지금 제가 주님의 뜻인 줄 알고 하고 있습니다.’ 또 그라면 꼭 무리하게 하지 않소. 무리하게 하지 안하시고 ‘이런 거 이런 것을 제가 하고 있습니다.’ `그거 잘됐다’ 잘됐다 할 때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잘됐다 할 때는 ‘잘됐다’ 이래 안 하고 `잘됐다!' 할 때에는 우리 속에 확신이 오는 것이 기쁨이 옵니다.

기쁨이 오고 난 다음에 또 그 다음에, 그러면 그때 자꾸 생각이 난다 말이요, 그때 ‘너 뭣은 어찌 했지?’ 평소에 자기가 생각지 않던 것이 생각이 나옵니다.

‘무슨 일은 어찌 됐지?’ 그러면 기도하면은 기도하는 가운데에 자기는 평소에 생각지 않던 일이 생각이 나지고 잘못된 것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이것 저것 생각나는 것이, 이 잘못된 것을 또 고치고 나니까 또 이거 잘못된 걸 자꾸 말합니다.

그때에 자기에게 기도할라고 지금 주님 앞에 지금 나타나 가지고 대화하고 있는데 자기에게 이거 나쁜 거 하나 둘 나쁜 것이 자꾸 생각나는 것이 그것이 누가 그렇게 해 줍니까? 나쁜 거 생각나는 그게 뭐입니까? 그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여러분들. 기도의 응답이오. 교제를 해 보십시오.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가서 또 ‘네가 지금 그러면 네가말합니다.네가 무슨 일을 하다가 중단한 거 있지 않느냐? 하다가 중단한 거 있지 않느냐? 왜 그거 중단했느냐?’ ‘내가 그거 하다가 그만 중단했는데 그거 내가 참 진실되이 못 하고 인내하지를 못하고 그만 그래 됐습니다. 지금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이라면 ‘네가 다시 한번 해 볼래?' `예, 한번 해 보겠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당신이 권고해서 내가 그 권고를 듣고 ‘다시 하겠습니다.' 이렇게 또 우리가 주님 앞에 고합니다.

그라면, ‘네가 이런 것을 지금 네가 할 일을 안 한 것이 있으니까 요것을 해라.

조거 해라. 하다가 중단한 거 요거 해라.’ 요게 자꾸 내게 생각이 나진다 말이오.

내게 양심을 통해서 잘못된 것이 생각나지고, 또 할 것을 안 한 것이 생각나지고, 하다가 중간에 그 결말을 보지 못하고 중단한 그런 게 생각나지고, 또 그만 하다가 이래 집어 던져 버린 것이 또 생각나지고 자꾸 그런 생각 나지는 그것이 주님이 나한테 자꾸 깨우쳐서 지금 말해요. ‘너 요게 대해서는 어떻지? 여게 대해서는 어떻지?’ 자꾸 말해 주는 거라 그거요.

그래 가지고 이라다가 나중에 그것이 다 뭐 자기대로는 정리가 됩니다, 자기 정도로서는. 자기 정도로서는 ‘이거는 이렇고’ 자기 잘못된 거, 또 할 것을 안 한 거, 하다가 중단된 거, 또 해야 될 거 이런 걸 당신이 자꾸 말해 줘.

그걸 ‘이건 냅두고 내가 지금 급합니다. 이거는 내비두고 내가 지금 급하니까 이거 급한 이것부터 좀 말씀해 주십시오.’ 안 따라옵니다. 그 버르징이를 하나님이 고치시지 우리에게 굴복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오.

얼마든지 시간이 걸려도 거게 대해서 자꾸 내게 뭐이 내게 요것 조것 알려 주실 때는 그거 주님이 나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니까, 주님이 알려 주시는 것이니까 주님이 알려 주시는 것을 그것을 무시하지 말고 자꾸 뭐, 그러면 그저 ‘밥 때가 됐는데, 뭐이 오는데.’ 이래도 자꾸 알려 주실 때는 자꾸 이 말을 대화를 합니다.

대화해서 요것조것 자꾸 자기가 잘못된 것을 주님이 말씀해 주실 때도 있고, 또 해야 될 걸 말씀해 주실 때도 있고, 또 하다가 중단한 것을 말씀해 주실 때도 있고, 또 지금 앞으로 이렇게 하라는 것을 또 말씀해 주실 때도 있고, 앞으로 또 할 것을 말씀해 주실 때도 있고 자꾸 말해 주십니다.

그러면 자꾸 성경은 같이 나가요. 성경은 같이 나갑니다. 그러면 성경이 그때에, 그때 성경이 나한테 말해 주는 것이 곧 주님이 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것만 단단히 기억하면 돼요.

성경이 그때 내게 말해 주는 것이 자꾸 주님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내가 그런 걸 생각지 안했는데 기도 가운데서 이 성구가 떠오르고 저 성구가 떠오르고, 또 이 성경으로 인해서 또 할 일이 생각이 나지고 자꾸 이래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가서 ‘그러면 이런 거 어찌 되지?’ `녜, 고거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대로 하겠습니다.’ 자기는 기도할 때는 돈 달라고 기도하러 갔는데 자꾸 이래 대화하다 보니까 돈은 어디로 갔는지 그거 그만 돈에 대해서는 기도 한번도 기도해 보지 못하고 ‘녜,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래 살겠습니다.’ 자꾸 이게 됩니다. ‘내가 이거 하겠습니다. 저거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랄 때에 주님이 있다가 ‘그래 봐라’ 그라면서 인제 그렇게 할 마음이 생겨집니다. 마음이 생겨지고 결심이 생겨집니다. 마음이 생겨지고 결심이 생겨지요. 결심이 생겨지니까 그렇게 할라고, 자기가 그렇게 할라고 결심을 가지고, 그렇게 할라고 결심을 가지고 그대로 자기가 앉아서 할 일은 앉아서 하고 자기 현실을 닥쳐 할 일은 닥쳐서 하고 이래 되는데,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결심을 하고 ‘내가 요래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여게 잘 들어야 돼요. `요래 살아 보겠습니다. 내가 요걸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자꾸 따지고 따져서 우리 마음에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주님이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환경과 현실을 만들어 줍니다.

환경과 현실을 만들어 줘요. 환경과 현실을 만들어 줘요.

그렇게 자기가 결심을 하고 하겠다고 주님하고 약속하고 하기를 원하고 자꾸 하겠다고 하기를 원하고 할라고 결심을 가지고 ‘이대로 하겠습니다.’ 하기만 하면은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그런 기회와 현실을 만들어 줍니다.

벌써 자기가 이렇게 뭣을 할라고 하나님 앞에 약속도 하고 이랬는데 거게 주님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그 실상이 자기에게 당면되도록 그 현실을 만들어 줄 그때는 벌써 주님이 자기와 동행하는 것이요 자기의 기도의 응답을 듣는 것이요 자기와 항상 같이 하면서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제 그럴 때에 현실에서 자기가 작정한, 하나님으로 더불어 약속을 하고 그 계명대로 작정한 그 일을 실행을 할라고 합니다. 그 현실에서 그 작정한 일을 실행을 할라고 할 때에요거 잘 안 들으면 몰라실행을 할라고 할 때에 어려움이 옵니다. 실행을 할라고 할 때에 좀 어려움이 와요. 어려움이 와도 자기가 그대로 실행을 할라 합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대로 자기가 그 일을 실행을 해 볼라고 요렇게 노력을 합니다. 노력을 하면서 또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그 노력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는 그 일에만 전력을 기울이지 딴거 생각이 없어요. 그 일에만 지금, 내나 기도해도 그 일에만 전력 기울이고 하나님 하라는 그 일을 하나님하고 약속하고 그 일을 소원하고 그 결심하고, 결심하고 나니까 그만 현실을 안 닥치면 결심하고 말 터인데 결심하고 소원하고 나니까 그 행할 수 있는 현실을 딱 만나게 된다 말이오.

현실을 딱 만날 때에 현실을 만나니까 그것을 행하고 그 일을 진행할라고 애만 쓰고 내가 처음에 돈 구하러 갔었는데 돈은 생각도 없고 그만 그것만 할라고 애를 쓰다 보니, 애를 쓰다가 보면 그 애써서 그 계명, 하나님과 나와 약속한 그 약속한 고거 지킬라고 안 어길라고 애를 쓰는 애쓰는 가운데에서 뭐 생겨집니다.

알겠습니까? 애쓰는 가운데에서, 자꾸 말씀을 지키고 자기가 작정한 대로 그대로 실행을 하고 애를 쓰는 그 가운데에서 뭣이 나옵니다. 요거 여러분들이 요거 모르면 항상 덩더꿍이 놀음입니다.

애를 쓰는 고 가운데에서 뭐이 나옵니다. 요럴 때 경험한 사람 있습니까? 뭐이 나옵니까? 뭐이 나옵니까? 그럴 때 자꾸 자기는 그대로 결심하고 작정한 대로 실행할라고 애를 쓰는 그 애쓰는 거게 자기에게 무엇이 퍼뜩 생각이 나옵니다.

퍼뜩 생각이 나와요.

그렇게 자꾸 말씀 지킬라고 그대로만 말씀 지킬라고만 일단 정신이고 말씀을 그대로 행할라고만 애를 쓰는 그 일을 할라고 애쓰는데 엉뚱한 생각이 뭐이 하나 퍼뜩 떠오릅니다. 떠올라도 그 무슨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이, 할라고 하는 그 일과 배치되는 모순된 그런 일이 아니고, 모순된 일을 줄 때에는 마귀가 주는 겁니다. 잘 알아야 돼요.

모순된 일이 아니고 그 일을 그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지켜 행할라고 하니까 지켜 행하는 데에 무슨 다른 거기 대해서 의견이 하나 나옵니다. 의견이 나오고 생각이 나오요. 생각이 나오면서 자기에게 심령이 열려지는 것이 그 일을 실행할라고 하는, 그 일 실행할라고 전력을 기울이는데, 그 일 실행할라고 전력을 기울이는데 그 일 실행을 통해서, 그 일을 실행하는 그 실행을 통해서 하는 일이 생기더라 말이오. 하는 일이 생겨져.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업입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자기는 내나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고거 지킬라고 애를 쓰고 고거 할라고 했는데 그때 뭐이 생각이 뚝 떠올라 가지고 합니다. 떠오르면, 그 생각이 떠올라서 그와같은 유사한 일로, 판이한 일이 아니고 유사한 일로 이래 하는데 그 일을 승리하는아이고 어려워라.

그 일을 승리하는, 그 일을 승리하는 그 승리에 대해서 그 승리가 앞이 환하게 그 승리가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해 가지고 승리한다. 요렇게 요렇게 하면 승리한다. 요렇게 해야 된다. 요렇게 하면 승리한다.’ 환하게 작정되는 게 ‘요렇게 하면 승리하는데 요렇게 하는 일을 누가 막겠느냐, 요렇게 하는 일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요렇게 하는 일은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막히지 않는다.’ 하는 그 확신이 있는 환하게 시온의 대로가 환하게 보이게 됩니다.

보이고 환하게 보여져. 그때에 모든 것이 벌써 오 년 십 년 몇십 년 후 까지도 환하게 보여져. 보여지면 그라면 벌써 그 일을 통해서 내 심령이 밝아졌습니다.

밝아져 가지고 그럴 때에 이제 자기 할 일이 생각이 납니다. 자기 할 일이 생각이 나 가지고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그 직업이 뭐인가? 내가 지금 무슨 업을 해야 되는가? 할 일이 뭐인가? 그게 생각나집니다.

생각나지는데, 나는 환하게, 눈을 감고 생각하니까 그 일이 환해서 뭐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일사천리로 돼 나가는 건데 그 일을 막상 할라고 보니까 애로가 많이 있습니다. 애로가 많이 있어. 애로가 많이 있는데 내가 양심으로 생각해 볼 때에 내가 할라 하는 일은 바로 하는 것이고 이 일에 대해 방해하는 건 마귀다 하는 것이 확신돼요. 그럴 때에 그 방해되거나 말거나 그대로 해 나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너희가 여러 배 백 배를 얻되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때에 세상과 모순되기 때문에 세상이 반대하고 세상이 다 미련타 하고 어리석다고 말하나마 자기에게는 환하게 그 길이 환하기 때문에 그 길로 행해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응답 받는 그 기도는 당신이 나에게 대답해 주시는, 응답이라면 당신이 내가 구하는 데에 대답해 주시는 것인데, 답을 해 주시는 것인데 그 답을 받는 데는 우리 양심을 써 가지고 자세히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는 하나님하고 서로 인격과 신격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인격이라면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격인데 인격이라고 표시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그 신격입니다. 그러면 신격과 인격, 인격과 인격이 둘이 대화하는 것이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상대방의 인격을 자기가 인정치 안하며 기도는 안 됩니다. 암만 기도해도 그건 기도는 아닙니다.

인정치 않는다니? 인격을 인정한다니 무슨 말인가? 그러면 우리가 이런 기둥이든지 돌덩이든지 그런 걸 대할 때는 뭐 어떻게 이렇게 이래도 저래도 다 주관대로 말하지마는 인격을 대하는 것은 어떤 게 인격 대하는 것인가?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상대방이 듣든지 말든지 나만 자꾸 이렇게 주 지껄이는 그것이 인격 교제가 아닙니다.

인격 그 상대라 말은 ‘내가 이럴 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나?’ 이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듣나, 어떻게 비판하나, 상대방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지금 응답을 하겠나?’ 상대방의 인격과 인격의 역사를, 그 인격이 지금 말은 안 해도, ‘말은 안 해도 지금 속으로 좀 섭섭해 가지고 있다. 말은 안 해도 아주 내 한 말에 멸시를 하고 있다. 말은 안 해도 이 아무짝도 못쓸 사람이로구나 이렇게 지금 평가하고 있다.’ 내가 하는 ‘내게 대해서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지금 비판하며 어떻게 앞으로 할 계획을 가지고 있나?’ 그 상대방의 그 신격 존재, 신격 존재의 그 자체가 내게 대해서 어떻게 지금 벌써 발표는 안 해도 내게 대해서 어떠한, 상대방이 어떠한 그 생각을, 어떠한 뜻을, 어떠한 견해를,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그것을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기도지 그거 없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데, 요새 내가 여기 기도하는 거, 오늘 아침에 어떤 사람 기도하는 데 대해서 좀 너무 거석해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큰 소리 기도가 좋습니다. 이런데 그런 분들은 아예 설교 듣고 난 다음에 그 자리서 기도하면 기도가 쉽고 자리를 옮기면 기도하기가 좀 힘이 듭니다. 그런 분들은 다 여기 스피커 다 있으니까 아예 그런 분들은 설교 들을 때에 자기 기도할 장소로 가십시오, 저 먼 장소. 가 가지고 거기서 딱 기도하면 거게서 그만 고함을 지르고 어째 해도 좋은데 이 가운데서는 하다 보면은 이 옆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소리를 또록또록 내 가지고 기도하다 보면은 시험에 들기 쉽다 했는데 무슨 시험에 든다 했습니까? 무슨 시험에 들기 쉽다 했소? 자, 옆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소리를 또록또록하이 내서 이래 기도하다 보면은 시험에 들기 쉽다 했는데 무슨 시험에 들기 쉽다고 말했소? 저 뒤에 말해 봐. 뭐요? 여게 누가 말해 고함 질러 한번 말해 봐, 고함 질러 한번 말해 봐. 누가 말했어? 고함 한번 질러 대답해 봐. 누가 옮게 대답하던데. 뭐라 하노? 뭐? 남 들으라? 옮지 그거야. 설교. 기도가 변해서 설교됩니다. 기도가 변해서 설교되기 쉬워요.

그러기 때문에, 있다 보면, 기도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귀란 놈이 ‘야,떡 와 가지고너 기도하는 거 저 사람이 듣는다. 네 기도하는 데 저 사람이 잘 듣는다.

아주 은혜 받는다. 저 사람이 잘 들으니까 자꾸 설교를 열심히 해라.’ 그러니까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한 것이 나중에 가서 그만 설교로 변해 가지고 설교만 실컷 하고 말기 쉽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래 소리 내서 하는 기도가 하기 쉽습니다. 하기 쉬우니까 그래 할 분들은 예배당이 너르니까 아예 저 먼 데 가서 하는 것은 암만 고함을 질러도 옆에 사람 뭐 들리지도 안 하고 하니까 그런 시험에 안 드니까 그래 하라 그렇게 내가 기도를 말을 했고, 또, 자기 혼자 가 가지고 기도하면서 이래 고함 질러서 기도할 때에는 그 기도가 어떤 시험에 들기 쉽다 했습니까? 예, 감상 기도, 감상 기도. 제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고, 입으로 나와 가지고 귀로 들어가고 하니까 똑 감상하고 자꾸 저 혼자 뺑뺑뺑 돌리는 감상 기도 그거는 하나님은 상관이 없어. 상관이 없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기도는 꼭 상대를 상대해야 됩니다. 이게 기도지 그게 아니면 기도가 안 돼요. 설교는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가 그렇게 기도 자꾸 하면서 소리를 고함 질러 하면은 입으로 나와 가지고 귀로 들어오고 자꾸 들으면 자기 말에 감화를 받고 또 자기 혼자 눈물을 흘리고 이래 기도합니다. 그거 뭐이냐 하면 성화는 돼요. 성화의 효력은 보지마는 기도는 안 됩니다. 기도는 그보다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큰 유익이 있는 건데 기도의 유익은 보지를 못한다 말이오.

그러니까, 모두 기도한다는 것이 자기 하나의 그 감상, 자기가 설교하는 것을 감상하고 하는 것은 성화의 은혜는 있기 때문에 기도를 가리켜서 향이라 말했어.

향이라 말한 것은 그 모든 악취를 제해 버리는 향이기 때문에 향은 되지마는 기도는 안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기도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불러 놓고 하나님이 네게 응답을 하나 안 하나, 이렇게, 응답 하나 안 하나, 그러면 응답 하나 안 하나,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는 먼저 어째야 됩니까? 내가 이 기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노? 나를 보시고 ‘이 외식하는 놈아’ 이래 보시나, ‘이 입술만 놀리는 자야 네가 나를 뭐 짐뭉텅이로 아나, 지금 흙뭉텅이로 알고 있나, 네가? 돈뭉텅이로 알고 있나, 네가 내가 무슨 감각이 있는 줄 알고 있느냐?’ 당신을 기도한다 하며 당신을 아주 하나 부처와 같이, 그렇게 하나 허수아비같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 행동하기 쉽다 그말이오. 모두 우리 보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도무지 주고 받는 응답이 없어. 그런 기도 해서는 안 돼요.

이러니까, 내가 기도할 때에는 먼저 기도에 제일 중요한 게 뭐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대해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똑똑히 찾아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언제 기도에 대해서, 기도는 그 대상을 바로 찾아야 됩니다. 기도는, 기도는 서로 대화하는 것인데 내가 말하면 상대방과 둘이 대화가 있지 상대방이 없는데 나 혼자 무슨 대화를 합니까? 어떤 사람이 그 집에 심부름을 보내니까 그 집에 가 가지고 그 주인을 찾아 가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전하라 합디다.’ 듣고 그래 ‘그라면 가서 뭐라고 전할까요?' 이렇지 안하고 그 집에 가 가지고 주인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삽짝 밖에서, 삽짝에서 자꾸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 실컷 ‘이렇고 이렇고' 아무도 없는데 이라다가 그라고 나서 저거 집에 가 버립니다. 그와같은 기도가 많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기도는 쌍방이 아니면 기도가 안 돼요. 내가 기도에 대해서 요새 언제 한번 설교한 일이 없나요? 없어? 기도에 대해서는 쌍방이 이래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에 대상을 찾아야 된다는 그런 말 내가 가르친 것 같은데.

그래 기도는 꼭 응답 받는 기도라야 되지 응답 받지 않는 기도는 그거 기도가 아닙니다. 그거는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것도 유익이 없지는 안합니다. 유익이 있는 것은 자기가 성화되는 유익은 있지마는 내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그 무한하신 분이 내 기도를 들어 가지고 당신이 들어서 응답해 주신다는 거는 한없는 큰 성공이요 우주를 그만 차지하는 것인데, 기도는 능력인데, 이 기도는 응답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 기도가 그렇게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 응답 기도 아닌 저 혼자 자꾸 군담하는, 구수렁이 군담하는 거와 같은 그런 기도는 소용이 없어요.

제가 있던 개명교회, 개명교회, 아따 그 사람이 ○ 아니, 오래 돼서 잊어버렸다. ○ 뭣이라고 노인이 있어요. 그런데 별명이 들구수렁이라, 들구수렁이. 일하러 가면 나비며 자꾸 ‘이거는 어짜고 이거는 어짜고 이거는 누가 이래 놨노? 이래 놨노? 이거 이럴 건데 저럴 건데 어짜고.’ 그래서 그만 그이 이름이 그만들구수렁이라, 들구수렁이. 혼자 자꾸 그래 군담을 해요, 자꾸 주 지껄여요.

이거 모양으로 믿는 사람들이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에 아무 응답이 없어. 왜 기도하러 갔는데 변화가 없어? 기도하는데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이것은 다 들구수렁이, 들구수렁이 기도를 했든지 그리 안 하면 이거는 하나의 설교를 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사상 감상을 했든지, 그래도 성화는 다소 되기는 돼요.

되지마는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꼭 둘이 주고 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있습니까?’ 상대방이 없다든지, `이렇습니다' 네 말이 틀렸다든지 네 말이 맞다든지, 내가 말하면 상대방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내게 답을 응답을 합니다. 내가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 기도에 대해서 답을 해 주는 요걸 받아서 자꾸 이래야 뭐 일이 되어지는 것이지 응답 없는 그런 기도는 안 돼요.

그러니까, 기도할 때에는 상대방의 그 인격을 자꾸 생각을 하면서 해야 대화가 돼지지 상대방을 목석같이 생각하고 귀머거리같이 생각하고 자꾸 저 혼자 중얼거리는 그런 것은 성화는 되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안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는, 하나님이 보십시오. 모세의 기도라든지 엘리야의 기도라든지 이 기도, 예수님의 기도라든지 기도는 꼭 그 법적입니다. 법적으로 조건부로 따지요. ‘이렇고 이렇고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게 지금 내가 부족하지만 당신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 주시마고 약속하지 안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지 안했습니까? 당신이 말씀했기 때문에 요 말씀에 근거해서 내가 요렇게 딱 도장 찍어서 간구합니다.’ 요라고 난 다음에 ‘아멘' 요래 한다 말이요, 하기를.

이러니까, 기도할 때에는 상대방의 대상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라 말이오. 대상을 생각하면 그 먼저 상대방의 주님이 기도할 때에는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면 기도할 때에 제일 첫 응답이 뭐입니까? 제일 첫 응답이, 그걸 받으십시오. 제일 첫 응답이 ‘네가, 내가 선포해 놓은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이 있지 않느냐?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이 있는데 그 계약을 네가 어떻게 읽었으며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들었느냐?’ 요거 먼저 말씀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리저리 말합니다. ‘그러면 네가 요것밖에, 좀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생각해 봐라.’ 그럴 때 ‘내가 이거 배운 말씀 들은 말씀을 다 잊어버렸구나. 요걸 한번 생각해야 되겠다.’ 다시 생각을 합니다.

생각을 자꾸 하면은 생각하고 싶고 생각을 해야 되겠다는 그런 느낌이 오고 또 생각을 해야 될 그 필요성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지고 하는 그것이 주님이 나한테 지금 말씀해 주는 거라 말이오. 주님이 나한테 지금 말씀해 주는 거라.

그럴 때 그 응답을 받고 요렇고 요렇고 자꾸 말하면서 요래 묻다가 ‘내가 잊어버렸습니다. 요거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라면 어떨 때는 주님이 ‘성경을 찾아봐라’ 또 성경 찾아보고, 어떨 때는 급하면 `내가 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또 당신이 요렇게 알려 주셔서 ‘요렇고 요렇고 배우지 안했느냐? 요렇게 하지 안했느냐?’ 똑똑히 확고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준다 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제일 첫 응답이 뭐이요? 제일 첫 응답이 ‘이 계약을 내가 어떻게 봤으며 어떻게 읽었으며 어떻게 들었느냐?’ 이것을 먼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먼저 묻소. 그럴 때에 내가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습니다.’ 할 때에 벌써 주님하고 교제가 됐어.

내가 당신 앞에 지금 말로 지금 요청을 하니까 당신이 답으로 ‘네가 계약을 어떻게 지금 알고 있느냐?’ `녜, 이렇고 이렇고 이렇습니다.’ 할 때에 당신이 그 다음에 답이 오기를 뭐라고 오느냐? ‘그러면 네가 이랬는데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살기는 어떻게 살고 있지?’ ‘이렇고 이렇는데 나는 요런 거는 행했고 요런 거는 행했고 요런 거는 하지 못했습니다. 요거는 요거 잘못했습니다.’ 그 잘못된 것을 간추려서 나에게 묻습니다. 그래 내가 잘못된 요것을 ‘요거 요렇고 요렇고’ 자꾸 요것 다 고해서 바칩니다.

인제 그라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네가 그라면 할 일을 안 한 게 뭐이지?’ `내가 이런 걸 이런 걸 지금 할 걸 안 했습니다.’ ‘그러면 안 했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지금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할라고 그것을 작정하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결심하고 ‘하겠습니다’ 했는데, 작정하고 결심을 했는데 작정하고 결심한 나에게 주님이 응답해 주신 거는 뭐입니까? 저 기자? 내가 작정을 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작정을 했는데 작정한 나에게 주님이 나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은 뭐입니까? 뭐 어떻게 응답해 주십니까? 응답해 주시는 거 어떻게 응답해? 저 대답해 봐요. 뭐라고 응답해 주시지, 응답해 주시기를? 자기가 기자라? 저 뒤에? 응답은, 그럴 때 응답은, 그랬는데 뜻밖에 그 일을, 자기가 작정하고 결심한 그대로 실행을 해야 될 현실을 딱 만들어 줘 버립니다. 그 현실 줘. 뜻밖에 그 현실에 탁 닥쳐버려. 이러니까 주 앞에 ‘이라겠습니다 저라겠습니다’ 해 놓고도 현실이 떡 닥치면 그만 ‘아이고’ 하고 뒤로 나자빠지면 그만 헛일이라. 교제는 다 끊어져 버렸어.

그때, ‘예, 내가 이렇게 할라 했더니만 주님이 이렇게 나에게 한번 나를 연습하고 연단받고 연성하라고 지금 이걸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현실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하고서 합니다.

그대로 실행을 할라고 지금 그 일을 실행합니다. 그래서, 하나 둘 자꾸 이래 실행을, 이래 실행해 가다 보니까 그거 내나 실행했는데 그래 가다 보니까 엉뚱스럽게, 엉뚱스럽게 그일 한 것이 변해서 사업이 됩니다. 알겠습니까? 그 일 하는 것이 변해서 사업되는 게 있고, 그 일이 변해서 직장되는 게 있고, 그렇게 하는데 의외에 자기에게 뭣이 생각이 떠올라 가지고 ‘이걸 해라’ 주님이 하라 하는 그런 주님의 답으로서 자기가 ‘이거 하면 되겠다.’ 평소에 그런 걸 생각할라 하면 몇 달을 생각해도 안 날 건데 그만 대번에 당장에 환하게 열리는 게 ‘이리이리 하면 되겠다’ 이럽니다.

그러면 그걸 ‘주님이여 이거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이렇고 이렇고,’ 또 그라면 주님이 있다가 ‘너 나한테 물을 게 아니라 내가 말하지 안했어? 나한테 물을 게 아니라 내가 말해 주지 안했어?’ ‘언제 말해 줬습니까?' `내가 신구약 성경 말은 내 말 아니야? 내가 말한 게 아니야? 그러면 신구약 성경에 비춰 보라.’ 그러면 또 쫙 나온다 말이오. 신구약 성경을 보니까 ‘성경에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하니까 이거는 틀림없다. 이건 백프로 틀림없다.’ 이 성경에 증거한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대로 하는데 또 그라면 나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주위 환경에 다 그대로 하게 돼져. 에스라서에 보면은 성전을 지을라고 할 때에 모든 사마리아 그 모두 지방 총독들이 반대를 해 가지고 성전을 못 짓게 했는데 이제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지을라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총독과 전체 반대하던 자들이 막 협동해 가지고 전부 성전을 빨리 짓게 한 것이 스룹바벨 그 성전인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이러니까 자꾸 이래서, 주님은 아무리 예민하고 다정 다감한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주님은 더 빠릅니다. 주님은 더 빨라요. 밤에도 부르면 즉시 대답하십니다. 낮에도 부르면 대답하고. 이래서 주님하고 나하고 서로 이 의논하고 교제하는 요것을 우리가 사귀어서 요걸 알아야 됩니다.

거게서 그래야 그분에게 들은 게 있고 뭐 아는 게 있고 배우는 게 있지, 또 뭣인지 우리가 어째 압니까? 주님에게 ‘이 일은 어찌 됩니까?’ 이랄 때에 당신이 가르쳐 주십니다. ‘이래라.' 그러면 우리가 벌써 그래 해 쌓는 사람은 ‘요 일은 주님이 시키는 일이다. 요거 틀림없이 주님이 시키는 일이다.’ 저 ○○교회에서, 오늘 내가 전화를 들었는데 ○○ 교회에서 막 장로님들이 오고 막 그때 와서 야단을 치고 ‘우리 그만 딴 교파로 갑니다’ 막 이래 쌓고 야단을 지겨도 내 마음은 뭐 하나도 그말 하거나 말거나 ‘주님이 뭐 하시는 일 있겠지, 주님이 하시겠지.’ 이랬는데, 그래 내가 전화를 했어. 전화를 해 가지고 ○○목사한테도 전화하고 그래 전화하면서 ‘○○교회는 어떻게? 그 ○○교회는 뭐 그게 그렇게 하는 게 하나님 뜻 아니야? 그거 한번 생각해 봐.’ 이랬더니마는 ‘그래 결정이 돼서 지금 곧 요번에 교역자회 하고 나면 이사갑니다.’ 하고 결정이 돼 버렸어. ‘저 ○○교회 있는 ○○○목사님은 서울 그 ○○교회로 가고 또 ○○교회 있는 ○조사님은 가조 ○○교회로 가고 그래 하기로 이 결정됐습니다.’ 하며 전화가 왔어.

하나님에게 그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알려 주셔서 이렇게 되겠다 싶으면 그대로 됩니다. 이 호호망망한 세상에서 당신이 인도를 받지 안하면은 우리가 뭘 짐작하고 뭘 어떻게 합니까? 우리 생각에, 생각이 이렇습니까? 그거 아니오. 우리 마음에 느껴지는 것도 소용 없고 생각하는 것도 소용 없고, 어떤 사람 말하기를 주님의 응답은 자기에게는 응답, 지금, 그때 집사인가 권사인가 그래요. ‘그래 그러면 권사님에게는 응답이 어째 옵니까?’ 그분은 또 응답이 그래 온대요. ‘나는 어데든지 가지 말라 하는 데 가면은 그 날 밤에는 그 가지 말라 하는 데 갔으면은 반드시 오줌을 쌉니다.’ 이래요. 오줌 싸는 게 증거라. 어데 갔든지 못 갈 데 갔으면 오줌 싸면 ‘여기 못 올 데 왔다.’ 그러면 간답니다.

‘또 그뿐입니까?’ `아주 되게 그 자리 가서 있으면 안 되고 거기 있어서 안 되는 아주 큰 일이, 가서 있으면 안 될 그럴 일일 때는 똥을 쌉니다, 그만. 똥 싸면 아이구 여기 못 있다 하고 그래 갑니다.’ 그래 가지고 그래 해서 그거 가지고 짐작한다 하는데 그런 짐작 있는데 그런 건 다 소용없어.

그 짐작한다 하는 그 소리 들은 사람 손 들어 봐요. 왜 손 안 들어? 권사님 손 안 들어 왜, 권사님? ○○○권사님 손 안 들어요? ○○○권사님 못 들었어요? 손 들어야, 그라면. 들었으면. 손 들어. 요래밖에 못 들어. 신경통이라 요래밖에. 이래 한번 뻐뜩 들어 모든 사람 보게 들어 보지.

다 그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또 머리가 어 어 하면 하나님의 뜻이라. 마음이 찌릿찌릿하면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 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로서 다 큰 낭파나는 것입니다.

꼭 오늘 저녁에 말씀한 대로 요대로, 응답이 제일 처음에 뭐이냐? ‘네가 너와 나와의 관계에 지금 계약서 있으니까 계약서를 네가 어떻게 봤느냐?’ 이거 묻습니다. 그거 묻소.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계약서에 그러니까 네가 오늘까지 이 계약서와 네 행위가 어찌 됐지?’ 잘못된 거 묻습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네가 지금 앞으로 할 게 뭐이지?’ 또 묻습니다. 그거 또 묻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네가 지금 어떻게 하지?’ 자기 할라고 결심하고 작정하면은 또 그 다음에는 뭘로 응답 줘요? 뭘로 응답 줘요? 현실로 줘요, 현실로. 현실을 줄 때 그때 현실에 그 싸움 만나 가지고 거게서 지지안하고 그 작정한 대로 주님 앞에 주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성경 말씀 찾아 가지고 그대로 하는 일을 실행할라고 애를 쓰다 보니까 그게 돼서 사업 돼 버렸어. 애를 쓰다 보니까 그게 사업 됐고 그게 출세 됐고 그게 성공됐고 그게 일 되고.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인도하시는 건 꼭 당신을 믿고 의지하고 당신에게 순종하는 그것을 통해서 만사가 성공되지 고거 빼 놓고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일을 통해서만 되고 우리에게 믿어지게 하는 일을 통해서만 되어지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는 일만 통해서만 모든 성공이 있지, 요 세 가지가 합해서 믿음이고 요 세 가지를 통하지 안한 하나님의 은혜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너무 범위가 넓어서 이게 지금,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린 아이 때는 요렇게 믿어 가지고 자꾸 응답을 받아야 돼. 믿음인데 제일 처음에 하는 것은 장성한 사람이 믿는 것인데 그것은 누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소. 요거 “저가 나를 사랑한즉” “저가 나를 안즉” 하는 것은 이것이 곧 기도의 응답이라 그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게 뭐 어떤 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대로 하는 것이 주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도의 응답 요대로 하는 것이 주님 사랑하는 것이오. 요한복음 14장 21절부터 24절에 보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러니까,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에 배운 대로 꼭 기도는 서로 상대방이 주고 받는 것이 기도지 혼자 중얼거리는 거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한 마디 하면 주님이 내게 한 마디 해 주시고 내가 두 마디 하면 주님이 두 마디 해 주시고 내가 또 한참 말 이래 말 하면 주님이 한참 또 당신이 내게 말하고, 주님과 나와의 쌍방이 서로 대화하는 거, 주고 받는 이 대화하는 그것이라야 기도에 응답 받는 것이니까 꼭 대화하는 데는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말할 때에 당신이 내가 이렇게 구하니까 당신이 성을 냈나 안 냈나? 사람이라는 건 그 교제 아니요? 교제하는 것은 서로 얘기를 한번 하니까 내가 얘기를 한번 떡 해 놓고 난 다음에는 ‘상대방이 내 얘기에 대해서 어떤 반응이 있는고 보자. 내가 얘기하는 데 상대방이 이 얘기해 보고 말같잖게 듣는다. 이 얘기를 듣고서 좀 노기를 가지고 있다. 이 얘기를 하고서 그거 좀 우습게 장난삼아 듣는다. 이 얘기를 할 때 들어 주기를 싫어한다. 들어 주겠다. 벌써 일이 됐다.’ 내가 상대방에게 말하는 데 대해서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이 어떠하냐? 반응이 어떠하냐 요것을 살펴서 그 반응에 따라서 또 내가 말하고, 내가 말할 때도 그 반응 말하고 이렇게 주고 받는 요것이, 이것이 기도지 이것이 없으면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내일 새벽에 다 나와요. 그러면 여기 기도에 대해서 좀, 더 좀 세밀하게 말하도록.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416 하나님의 아들-세 가지 특수성/ 에베소서 1장 5절-6절/ 1985. 7. 28. 주일새벽 김반석 2016.01.03
415 하나님의 아들 구원/ 에베소서 1장 5절-6절/ 1985. 7. 15. 월새벽 김반석 2016.01.03
414 하나님의 아들들/ 에베소서 1장 3절-14절/ 1985. 7. 14. 주일학교 공과 김반석 2016.01.03
413 하나님의 아들들/ 에베소서 1장 3절-14절/ 1985. 7. 14. 주일오후 김반석 2016.01.03
412 하나님의 아들들/ 에베소서 1장 6절-14절/ 1985. 7. 17. 수저녁 김반석 2016.01.03
411 하나님의 아들들/ 고린도전서 15장 38절-58절/ 1985. 7. 17. 수새벽 김반석 2016.01.03
410 하나님의 아들들/ 에베소서 1장 3절-14절/ 1985년 15 공과 김반석 2016.01.03
409 하나님의 아들들의 현재의 고난은/ 로마서 8장 18절-39절/ 1986. 5. 18. 주일오후 김반석 2016.01.03
408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요한일서 5장 1절-12절/ 1984. 8. 9. 목새집회 김반석 2016.01.03
407 하나님의 안보/ 이사야 26장 1절-7절/ 1982. 1. 13. 수새벽 김반석 2016.01.03
406 하나님의 역사/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1989. 3. 19. 주일새벽 김반석 2016.01.03
405 하나님의 역사/ 마태복음 5장 17절-20절/ 1989. 2. 21. 화새벽 김반석 2016.01.03
404 하나님의 역사/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1989년 3공과 김반석 2016.01.03
403 하나님의 역사/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1989. 3. 15. 수저녁 김반석 2016.01.03
402 하나님의 역사/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1989. 4. 9. 주일새벽 김반석 2016.01.03
401 하나님의 은사/ 로마서 6장 23절/ 1984. 11. 16. 지권찰회 김반석 2016.01.03
400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기도하라/ 에베소서 6장 12절-13절 / 1988. 6. 20. 월새벽 김반석 2016.01.03
399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를 다하는 것/ 베드로후서 1장 14절-21절/ 1982. 4. 2. 금저녁 김반석 2016.01.03
398 하나님의 음성/ 요한복음 6장 67절-68절/ 1981. 8. 9. 주일오전 김반석 2016.01.03
» 하나님의 응답/ 시편 91장 14절∼16절/ 1987. 1. 30. 금저녁 김반석 201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