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01:30
하나님의 선지
1980년 1월 12일 토요일 새벽
본문: 열왕기상 22장 21절 - 23절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타락하였던 그 위치에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인간 근본 위치를 찾게 된 우리들입니다. 창조주시며 대주재시며 주권자이신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배짱도 소용이 없는 일이고 허영과 허욕도 공연한 일이고 인간끼리 서로 다툼이나 시기나 연결을 매는 것도 다 헛된 일입니다. 이래 알지 못하심이 없고 공평된 절대자가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이 모든 것을 홀로 책임지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겸손할 것과 그 분이 맡겨 주신 그 자기 처소에서 충성하는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유일로 슬기로운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인간끼리라면 이제 말한 그런 모든 허망, 허영 그런 것들도 쓸모가 있겠습니다만 절대자 눈 앞에서 절대자와 관련된, 상대되어 있는 우리들로서 그런 모든 경영은 어리석은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 일만 아니고 ‘지극히 작은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되다.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데도 불의하다’ 했습니다.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매 너희를 높이시리라’ 둔한 사람일지라도 모험이나 요행이나 그런 것을 가지지 말라.
어떤 사람의 책을 보니까 ‘신앙은 모험이라’ 그는 대단히 위험한 소리요 사약(死藥)의 소리입니다. 신앙은 모험이 아니요 요행이 이게 되지 않겠느냐 구사일생의 그런 것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기에 이는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뭐 이것이야 혹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그런 것이 만의 일도 섞이지 아니했다 할 수 있는 그런 자기에게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아, 시집간 사람이 ‘그 남편에게 순종해야 된다’는 그런 기야 뭐 염려할 것이 뭐 있습니까? ‘자식 낳은 부모가 자식을 알뜰히 길러야 된다’는 그것이 야 뭐 더듬을 것이 뭐 있겠소? ‘남의 집에 일하러 간 사람이 죄되지 않는 일이라면 열심히 일해야 된다’는 그런 거야 뭐 더듬을 것이 뭐 있소? 장사하는 사람이 정직하게 친절하게 많이 연구해서 나도 안 속아야 안 속일 테니까 안 속도록 또 물가를 잘 알고 이런 것을 열심히 연구해 가지고 손해가지 않를 일을 하도록 정직하고 친절하고 손해 가지 않을 그런 일들을 하는 그것이야 더듬을 것이 뭐 있소? 의례히 그것은 해야 될 일 아닙니까? 이렇게 알기 어려운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또 위험성 있는 그런 일을 호기심이나 모험성 만용이나 이런 것 가지고 하지 말고 그저 평탄한 대로 같은 자기의 일. 여기에 충성하면 이게 믿음입니다.
충성하면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간다. 충성하면 이제는 희미했던 그것도 확실히 자기에게 알려져서 또 갈 수 있도록 순서를 줍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인지, 뜻 아닌지 내가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은 버려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그 일만 충성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실히 알리기만 알리면 충성할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알려서 인도해 나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간다. 확실히 아는 데에 게을 부리지 말고, 에누리하지 말고, 헛된 생각 가지지 말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이면 거기에 충성하다 죽으면 그것이 곧 순교요. 하나님의 뜻인 거기에 죽도록 충성하는 그것이 순생입니다.
튼튼한 충성, 튼튼한 희생, 튼튼한 십자가 이러면 하나님께서 튼튼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데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아합 왕이 삼 년 그 전쟁이 없으니까 이 사람은 몽둥이로 치니까 근근히 움직였다가 아랍 나라의 몽둥이 없으니까 저는 잠꼬대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공상이 나왔소. 제가 이런 것을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 지파를 나에게 맡겼으니 나는 이 지파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 해야 되겠다’ 자기 분명히 할 일부터 더듬을 것 없이 이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했으면 하나님도 기뻐할 것이요. 백성도 축복 받아 흥왕 할 것이요. 자기도 평안할 것인데 그것을 하지 아니한 거기에서 이것이 나왔습니다. 이 계시가 주는 것의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이 마음, 이 마음 이것을 마음 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욕심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소원이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달성하는 그런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왜? 여기에 보십시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음성은 사 백명 가운데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 선지 사백 명이 있었지만 거기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내게 대해서, 자기에게 대해서 참 생명이 되는 옳은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뿐인데 사백 중에 하나도 없었으니 이런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요.
악령은 우리의 마음을 이용하고, 성령도 우리 마음을 이용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 사백 종류의 악령이 내 마음을 이용하는 거기에 성령이 이용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입니다. 사백이 있었지만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 옳은 것은 없었어. 이런 세상이요. 이러한 악령의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가 마음에 나오는 대로 제 마음이라고 그대로 말하고 그대로 경영하고 그대로 행동을 시작한다는 것은 너무도 이것은 참 부당한 일입니다.
이러기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마음, 이것을 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참 근신하는 사람이요. 조심 있게 사는 사람이요. 이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으라 말은 조심하라는 꺼풀 속에는 잡은 하나님의 뜻을 놓지 말라는 말이요. '깨어 있으라' 는 것은 이렇게 자기 마음을 단속해서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이것을 생사의 원인인 줄 알고 이것을 심사해서 살피려는 사람은 마귀가 떱니다. 마귀가 떠요. 이것을 벌써 심사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움직이는 이 사람은 삼가 멀리해야 됩니다. 찾아오는 사람을 어떻게 박대는 못하지만 속에는 기도하면서 삼가 멀리해야 됩니다.
멀리하면서 그 사람이 마음에 나오는 대로 말하느냐 마음에 나오는 그것을 몇 십 번, 여기에 보면은 사백 번 심사해도 안돼요. 사백. 사백 그 사람의 말에 따라서 심사하고 안했으면 망했습니다. 이합 왕은 사백 선지자의 말을 삼고 참고해 가지고 심사해도 망했소. 사백여 명이 지내가고 난 다음에 한 사람의 미가야의 그 말로 가지고 자기 마음을 심사했더라면 이 비참한 멸망은 받지 안했습니다.
이러기에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그대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 사람인지 이 면을 살펴서 이런 사람 같으면 속으로 기도 해야 됩니다. 말은 들으면서도 주님이여, 내가 이 사람의 말에 이 사람의 마음에 나오는 대로 말하는 이 사람의 말에 내가 피동 되지 않도록 주님이 붙들어 주시옵소서. 서로 대화는 하면서도 속에 이 기도가 없는 사람이면 저는 삼켜지고 맙니다.
이러기에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자기니 이거야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어리석습니다. 자기 아닌 자기라는 것을 옛사람 육체의 사람이라도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죽인 원수인 자기 아닌 자기라고 요렇게까지 말을 해 준 이것을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뭐 이상 더 말할 수가 없소. 이런 것은 깊이 마음에 뼈아프게 느낀 거기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디에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죽인 원수인 자기, 이렇게 성경에 말해 놨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말을 여기에서 들었지 다른 데서는 별로이 들은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네? 이래도 무조건 자기에게서 나온 마음이라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인 줄 알고 그만 자기 마음을 추종하면 좋아하고 자기 마음은 무조건 그대로 그 결실을 맺을라고 애를 쓰고 여기에 방해하면 원수인 줄 알고 이렇게 하는 것은 이것은 참 비참한 속에 파묻혀 있는 사람입니다.
왜? 인류가 다 죽이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죽였소. 누가 죽였습니까? 해와도 배암 대화하고 난 다음에는 제가 저를 죽였소. 배암이 어찌 죽이겠소. 제가 선악과 안 먹었는데 그가 죽일 수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이것을 아무런 확고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이것은 피동적 존재로 지음 받았소. 이러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관할 자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고 수 많은 악령이 주관할 수 있는 내 마음이니, 내 마음이 단독 독립해 나갈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런데 내 마음을 주관할 수많은 원수가 가득찬 세상에서 내 마음이 움직인다고 의심 없이 이것은 내 마음이니까 날 위하는 마음이니 마음대로 해보자 하는 것은 그것은 미련하고 어리석고 벌써 저주와 사망 아래 파묻힌 자입니다.
내 마음이야 나쁜 것이 아니지요. 이게 어리석게 여기에 피동 되고 저게 피동 되고 나를 피동 시킬 수 있는 능동의 악령이 얼마나 세상에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기에, 내 마음이 어디에 피동 됐느냐 하는 이것을 살피고, 또 이 마음이 현재 하나님의 주신 길과 도리와 어찌 되느냐 이것을 살피고, 이게 내 마음이냐 하나님의 마음이냐 이것을 살피면 간단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갈 수 없는 것, 명철한 자라야 가고 아주 어떤 선천적으로 뛰어난 그 재능을 가진 자, 후천적으로 많은 그 수양이나 배움을 가진 자, 그런 자만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아무리 못나도 조심하고, 이 두 자기가 있는 줄 알고,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가 있는 줄 알고,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가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가 자기를 살필 수 있는 이런 조심이 있는 사람이면 둔해도 다 걸어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대개 보면 잘난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어떤 것이 나오는지 이것을 실피지도 아니하고 자기 마음에 나온 것은 다 행할라고 합니다. 다 달성을 시킬라 하요. 그 자는 자기를 죽일 그 스승을 많이 둔 자요, 자기 죽일 그런 경영을 많이 시발해 놓은 자입니다. 그 사람이 잘난 사람이 아니요 불쌍한 사람이요.
이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도를 가지고 사람을 접촉해 보면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보면은 다 불쌍하고 가련한 자 입니다. 자기를 멸망시킬 그 스승 귀를 즐겁게 할 스승을 많이 둔 자라.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말씀해 놨소. 귀를 즐겁게 할 사욕을 좇을 귀를 즐겁게 할 스승을 많이 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살필 수 있는 이 사람이면 아주 이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왜? 거게서 모든 생사가 출발해요.
아합 왕이 이것을 좀 생각했더라면, 제가 이 마음 나온 것이 하나님에게 피동된 것인지 무엇에게 피동된 것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이 마음은 분명히 여호사밧에게 피동됐소. 유다 왕이 와 가지고서 아합 대왕님 대왕님 하고서 이렇게 하니까 우쭐해 가지고서 여기에 피동됐습니다. 여호사밧 왕에게 피동됐소. 이래 가지고 ‘아 내가 이렇게 강하고 위대하니까! 왜 우리 영토를 빼앗기고 있어? 길르앗 라못은 이것은 재래의 우리 영토가 아니었나 탈환할 수가 있어!’
인간이 자기에게 아무리 금은 보배를 주고 사랑과 정을 주고 자기를 아무리 존대해도 인간에게 피동 안 될라고 인간에게서 정하지 아니할라고 이것을 노력합니다. 이 노력이 없으면 다 죽은 자와 같은 자요.
그러기에 자기 안에서 자기 양심을 통해서 나오는 산 영에서 양심을 통해서 자기에게 나오는 거기에 충격받고, 자기 밖에서 충격을 받지 아니할라고 이렇게 애쓰는 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얼마 전에도 제가 그것을 좀 말했지만, 해와의 죽은 둘째 원인이 무엇이냐. 첫째는 하나님 잊어버렸고, 둘째는 동산을 다스리지 아니했습니다. 자기 현실을 자기가 지배하지 아니하고 자기 현실을 자기가 통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된 그 피동 가지고 자기 현실이 어떻든지 그대로 다했어. 그대로 상대해서 깨져도 그대로 다했고 죽어도 그대로 다했고 사자 구덩이에 들어가도 그대로 다했고 불 속에 들어가도 그대로 다했어. 환경에 피동 되지 안했어.
이렇게 여호사밧 왕이 오니까 우쭐해 가지고 거게서 동해 가지고 길르앗 라못 성을 쳐서 지금 빼앗을 수 있겠다고 우쭐한 이 어리석은 아합 왕. 이렇게 어리석게 이렇게 동했던 것이 거짓 사백 선지자가 와가지고서 문제 없습니다. 가면 승리합니다. 이러니까 거게서 안정했소. ‘아! 이는 튼튼하다' 안정했습니다. 벌써 동하고 정하는 것이 인간에게서 되면 헛일이요. '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아드니까 문제없다.' 안심하지 마십시요. ‘코에 호흡이 있는 자를 수로 헤아리지 말라’ 했소. 이 아합 왕이 이렇게 사백여 명의 선지자가 이는 뭐 하나님이 붙였으니까 안심하고 갈 수 있다고 말하니까 거게서 안정했습니다. 마음이 안심 됐습니다.
한 자리에 있지만 여호사밧은 안심이 안 됐어. 이 외에는 선지자가 없습니까? 안심이 안 됐어. 안심이 안 됐지만 그 자도 그 자요. 여호사밧 그 자도 그 자요. 뭣 때문에 이스라엘 왕이 길르앗 라못을 가서 치자고 이리 이렇게 말하니까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모든 군대는 당신과 일반이요, 모든 군기는 당신의 것과 일반이니까 다 당신의 것과 같은 것이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요. 그렇게 간교하게 이런 자도 하나님의 뜻 이루지 못합니다. 생명을 내놔도 내놔야지.
아벨이 어떻게 주의 뜻을 이루었소 예? 형과 마찰이 돼도 가족과 마찰이 돼도 거기에 피동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된 그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그것이 아벨입니다. 일국의 대왕이 이를 죽이겠다고 옥에 가두고 이래도 거기에 피동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된 그것을 일관한 것이 선지자 미가야 입니다. 어리석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제일 우리가 주의할 것은 영과의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제일 주의해야 돼요. 성령은 좋지만 우리 마음을 영감시키는 것은 성령만 아니요. 악령도 우리 마음을 얼마든지 영감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기에 요한1서 4장에는 영을 분별하는 것을 중요하다 했소. 영에 대해서 첫째로 조심해야 되고, 둘째로 조심할 것은 사람과의 관계요. 사람을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을 조심하는 중에도 그 중에도 제일 조심해야 될 것은 원수는 네 집안 식구리라. 네가 제일 친근한 자. 그 자가 네 원수리라.
사람들이 옳은 길을 말할 때에 옳은 길을 삼킨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길이 옳으니까 이 길을 갈려고 작정하고 갈라는 데에 가장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그 길을 막고 가까운 사람이 거기에 유혹을 주기 때문에 거기에 받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 원수가 말하면 그 말이야 따르지 아니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그리 가지말고 이리 가자 하기 때문에 죽은 것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롯으로 딱 대립시켜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했소?
롯이 가까운 자기의 부부, 자기의 자녀, 자기의 종업자들 수하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거기에 충격을 받은 충격을 받아 자기의 양심을 꺾고 자기의 그 의리를 꺾은 것이 그것이 롯이요.
아브라함은 그렇지 안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피동, 의리 피동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피동이요 그는. 롯은 의리 피동이라도 됐으면 그런 것 억제할 수 있소. 제가 따라 나와서 저거 큰 집이요 저거 삼촌이니까 아, 그분이 하나님과 먼저 계약이니까 하나님 따라 나왔으면 그 분이 큰 집이니까 그분이 좋은 것 차지하고 저는 그 다음을 차지하는 것이 의리 아니요? 예의 아니요? 도리 아니겠소? 하나님에게 피동된 영감 아니라도 알 수 있지만 여기까지도 다 자기 가족에게 대해서 말살했어 말살을 당했어. 롯은 멸망할 길 밖에는 없어. 그는 살 희망성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요.
'원수가 (네 집안) 너의 집안 식구리라.' 너를 죽일 자는 너를 속일 자는 너를 넘어지게 할 자는 집안 식구리라. 수제자 베드로가 주여, 이런 일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할 때에 얼마나 세상적으로 육적으로 그 위하는 참 정이 두꺼운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그 중심이 달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일, 그것이 중심이었고 자기 중심이나 자기 뜻이나 자기 일, 이것을 생각지 아니한 그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하는 말이 당장에 거슬렸다 말입니다. 당장에 거슬려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이것이 자체 변화에서 나옵니다. 중심이 이런 자는 이 말만 제에게는 달콤하게 들려지고 다른 말은 느껴지지 않소.
아합 왕은 그가 왜 미가야가 그에게 원수가 됐습니까? 왜 그렇게 자기가 미워하는 대상이 됐습니까? 분명히 자기가 자기 사욕대로 하는 잘못된 그 일에 동의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요 충고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많은 지내간 과거가 있으니까 양심을 가지고 더듬어 살펴보면 이 사람만이 나에게 바른 말 해 준 사람이라.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라. 분명히 평가하고 비판할 수 가 있는데 지내간 일이니까 환히 알 수 있는데, 왜 그가 자기에게 대적이 되고 미움이 됐더냐? 그것은 자기가 더듬어 봐도 자기와의 대립된 것은 자기의 사욕과 대립된 사람이요. 자기의 자유와 대립된 사람이요. 자기 손해 보는 그 일을 할 때에 대립된 사람으로 알 수가 있단 말이요. 지나갔으니까. 이렇지만 과거를 살피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 양성과에 연구하는 가운데에 한 제목이 나온 것은 혼람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열람해라. 이 사람을 이 사람과 나와의 말한 그 결과는 어찌 됐느냐, 나에게 유익을 준 사람이 누구며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누구냐, 나에게 미혹을 준 사람이 누구냐, 이 사람은 내가 사귄 결과가 어찌 됐으며 이 사람은 사귄 결과가 하나님과 하늘 나라와 진리와 성신의 감화와 양심에 대해서 이 사람과 사귐으로써는 소생이 됐더냐 가라 앉았더냐 이것을 연구하라고 하나의 연구 제목 중에 하나 내 줬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환하게 압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요. 왜 모르요. 이 사람은 나에게 육을 유익하게 한 사람이냐 영을 유익하게 한 사람이냐, 천국을 유익하게 한 사람이냐. 세상을 유익하게 한 사람이냐, 이 사람은 나를 유익하게 한 사람이냐, 나에게 말할 때에 하나님을 유익 되게 한 사람이냐 판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판정해 가지고 기록하되 그것을 사람 이름을 기록하면 혹 그것이 발로되면 인간으로 더불어 좋지 못한 그 성근 결과로 구원 역사가 하는 데에 방해되기 쉬우니까 이름은 기록하지 말고 자기로서는 표를 해라 요거는 누구다. 요거는 누구다. 누구다 해 가지고서 이렇게 암시적으로 표시해서라도 이제까지의 겪어 나온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조사해서 구별해라 이것을 제목으로 내 줬어. 여러분들이 제목으로 가지고 연구하지만 안해. 완전히 땅에 속하고 육에 속해 있어. 이것을 옮겨 서지 않으면 헛일 입니다.
양성원에서 공부하는 것, 이거 자기를 죽이는 결과가 이루어질 수도 있소. 성경 말씀이 죽이는 것이 아니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는 심판에 정죄해 죽이는 말씀도 되고 살리는 말씀도 되요.
‘내가 너를 정죄나 심판하기 위해서 온 줄로 알지 마라 나는 너희들을 구원하러 왔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마지막에 너희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삼가야 됩니다. 사람을 삼가서 나에게 그저 수종하고 따른다고 인간 숫자 그까짓 것 무슨 소용 있습니까? 유다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따랐으니까 유다 나라 전부가 따른 것 아니요? 전국에 퍼져서 사람을 주관하고 있는 지도하고 있는 사백여 선지가 자기에게 따랐으니까 다 되지 않했소? 그래 그 숫자가 자기를 구원했습니까? 아합 왕을 구원했소? 아합 왕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편이 된다고 안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의 많은 사람이 자기와 대립됐다고 떠는 자도 어리석은 자요. 수 많은 사람이 자기의 대립이 되도 하나님과 대립되지 아니 했을 때에 오히려 기쁘고 즐겁고 유유하고 담대하게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보고 조롱도 하고 했어.
다 개혁가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루터도 팔려간 그거 할 때에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모든 선지자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니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나님은 나를 대적하니 수 많은 인간이 무슨 힘이 있느냐? 의지가 안돼.
양심에서 주는 위로로 두려움에 놓이고 영감으로 주는 위로에서 평강과 담력을 얻은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 이스라엘이나 유대 나라가 전체가 그 일에 대해서는 막 동의요. 다 찬성이요. 그 찬성이 효력 있었습니까? 효력 없었소. 미가야의 한 음성만이 그에게 바른 생명의 말입니다.
사람에게서 마음이 피동 되고 사람에게서 마음이 멈추어지고 세상에서는 이렇게 삽니다. 세상에서는 다수를 따라야 돼요. 한 사람 점령보다 두 사람 점령한 사람이 승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점령을 했을 수록 내가 그 사람을 붙들어 내게 속했을 수록 나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생겨졌소. 나는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야 되겠고 생명을 줘야 되겠고, 하나는 거게서 오는 사망을 막아야 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너는 나에게 사망을 주고 나는 너에게 생명을 준다’ 이렇게 말했소. 네. 가장 가까운 친근한 자에게 이 자에게서 나에게 사망이 오지 생명이 올리는 없습니다. 이런 줄 알고 조심했어. 그 사람이 나를 죽이는 그것을 역할한다고 내가 그 사람에게 살리는 역할 아니하면 안 됩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살리는 역할하고, 그는 나를 죽이는 역할해, 미혹하는 역할하고 나는 그이에게 바른 지도 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 우리 입장이다 그것입니다.
이렇게 사백여 명이 되는 선지자가 권세자 아합에게 피동돼 가지고 그 시간 그 시간 메꿔서 위로와 안심과 응원을 받고 당시 정권이 응원하니까 그 응원을 받고, 당시 거기에 잘난 사람이 응원하니까 그 응원을 받고, 하나님의 응원을 받을 줄 모르고 왕의 응원을 받고, 많은 그 백성들이 왕과 대립되니까 저도 대립할 터이니까 백성들이 응원받고, 하나님의 응원이냐 하나님의 대적이냐 이 면을 살피지 않는 그까짓 것이 무슨 선지자입니까? 그것이 무슨 선지자요. 선지자 사백 명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하나도 끼어 있지 안했으니까, 선지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이야 어떻습니까? 네?
성경에는 오만 말씀이 다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느 장소에, 어느 시간에, 어느 사람에게, 이 말씀이 필요하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대해서 유혹시킬 때에 성경 말씀 외에 다른 말 가지고 유혹시킨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 말씀이면 다 성경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대적에 대해서 말한 것도 있고 마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도 있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지, 이 성경 가운데에 어느 말씀을 하고자 하는지, 칭찬을 하고자 하는지, 책망을 하고자 하는지, 금하고서 금하고자 하시는지, 명령하고자 하시는지, 자라고 하는지, 일하라고 하는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피동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피동 될라고 애를 쓰고 애를 쓰는 이것만 있으면 거기에 피동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대한 강해는 하기 쉬워. 성경에 대한 강해는 줄줄 얼마든지 그것을 할 수 있지만 이 시간이 사람에게 어느 말씀을 전해야 되느냐 그것은 인간은 몰라. 영감이 가르쳐 주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설교 준비를 못해. 성경은 읽고 항상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라는지 그것이 문제라 그 말이요. 그 시간에 강단에 서려고 하니까 서려고 할 때까지도 몰라. 그 번민, 고민하다가 그 시간에 깨닫게 해 주셔 가지고서 하는 것이지 성경을 몰라 그런 것이 아니라 다 증거할 수 가 있습니다. 어느 말씀이나 하면 증거할 수 가 있지만 그리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내가 하나님이 하는 말로 내가 해야 되지 하나님이 하시는 그 말을 내가 해야 되지. 하나님이 하시는 말이 아닌 그 말은 내가 그 상대방에게 대화하면 안된다 그 말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 같으면 할 수 있어. 창세기 1장부터 죽 연결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사백여 선지자가 그 정권자 아합에게 아부해 가지고 그의 비위에 맞도록 이렇게 말하고 전체가 통일됐습니다. ‘아! 이번 전쟁은 이겼다. 하나님께서 붙였다. 하나님께서 왕의 손에 붙였습니다. 이기게 하십니다. 탈환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빙자한 사백여 선지자 그것부터 죽여야 됩니다. 그것부터 죽여야 돼요 네? 이렇게 몰사 시킨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교역자들 여기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이렇게 몰사 당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있소? 없소? 어디에 있어? 어데서 죽였소? 기손 강가에서 죽이지 아니 했소? 엘리야가 마구 몰아다가 막 몰살 시키지 안했소?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내가 사백인 가운데에 들어있는 내가 선지자 내가 목사인지, 내가 목회자인지, 내가 한 사람 미가야와 같은 이 입장의 목회자인지. 우리는 여기에서 떨어야 합니다. 인간 피동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요, 권세 피동은 하나님 종이 아니요, 처세에 합리적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을 들어다가 인간에게 전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과거를 전하는 것도 현재를 전하는 것도 미래를 전하는 것도 이게 제일 선지자요. 선지라는 것은 미래사를 말하는 것만 선지자가 아닙니다. 인간이 모르는 인간과 틀려있는 인간과 맞아있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과거사나 현재사나 미래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얼마나 뼈 있소? 미가야가 이 말하니까 안심하고 갔소? 이스라엘 왕이라고 그 전쟁에서도 왕의 대우를 받으라고 왕복 입고 점잖이 이래 나갈 터인데 미가야가 말하니까 벌서 충격 받아서 안심이 안된다 그 말이요. 안심이 안되니까 나는 변복하고 나갈 터이니까 여호사밧 왕 유다 왕은 왕복을 입고 나가십시오. 얼마나 교묘하게 꾀를 썼소? 인간의 교묘에게 하나님이 점령 당합니까? 우연히 활이 툭 튀어 나갔는데 그의 갑옷과 투구가 벗겨져서 이스라엘 왕이라는 것이 드러났어 네?
하나님은 모든 활동계를 당신이 주관하고 있소. 생명계, 심리계를 당신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영이 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가 가지고 다 거짓말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첩첩이 당신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 분의 그 망을 벗어나려고 이분의 주권과 이 분의 절대성을 벗어나 보려고? 어리석습니다. ‘땅에 있는 군왕들이 허사를 경영한다. 절대자의 결박을 벗어날라고 한다. 하늘에 계신 이가 비웃으신다.’ 비웃으신다. 시편 2편에 기록돼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모든 이 활동계, 공간계, 인간의 심리계, 생사계 홀로 주권하고 계신 이 분이 우리를 책임졌으니까 염려할 것이 뭐요? 네? 이분이 다 알고 계시는데 뭐 억울하니, 애매하니, 알아주지 못하느니, 아느니, 벌 받을 것이나 고칠 일이지. 상 받을 것이 있으면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잃지 않겠다고 말씀했는데 무슨 염려라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 알아주면 더 좋지.
바울은 ‘지나치게 자기를 존대케 할까 해서 하나님이 찌르는 가시 줬다’고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에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지나치게 신 같이 여길까 싶어서 아무런 태도와 점잖이 이래 가지고 자꾸 사람 같잖이 말이요. 저 사람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구나, 신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보일라고 신이 아닌 인간 같은 놀음을 자꾸 하요. 죄 되지 아니한 인간 같은 놀음을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지혜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자꾸 올리려고 애를 쓰지 아니 하고.
돌아가서 연구하십시요. 여기에 수 많은 인물들의 거기 대한 거울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이렇게 아합 왕이 위협했지만 담대했지. 자기를 부르는 모든 그 사자가 모두 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다 말했는데 여기에 배치되면 사형당합니다. 같이 좀 말좀 해 주십시요. 하! 그 유혹이 다니엘에게 하루 종일 다리오 왕이 말한 것과 꼭 같은 유혹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고 맹세 하노니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하는 것 그거 외에 내가 어떻게 내가 다른 말을 하겠느냐! 그것만 하겠다. 이것이 아합 왕을 사랑한 것이요. 미가야는 아합 왕을 사랑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는 사백 명은 아합왕을 죽였소.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