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01:19
하나님의 사랑,소망,능력
1987. 8. 5. 오후집회 (수)
본문:에베소서 1장 17절∼1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많은 우리 기독자들이 이 우리라는 복수 하나가 되는 것은, 많은 개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라는 하나가 되는 것은 세 가지로 인해서 하나가 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사람되신 신인양성일위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죄와 마귀와 사망에게 매여서 영원히 그의 것이 되어 영원한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음으로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을 시켜 주셨습니다. 또 우리 대신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을 대신 행하셔서 하나님의 율법이 온전타 인정을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고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원수된 것을 하나님과 화친케 하시는 이 대속의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우리를 그의 세 가지 죽으심으로 값을 주고 대신 형벌받아 값을 내시고 우리를 사서 주님의 것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팔린 자들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온전한 그 생명을 가지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또 완전한 생명으로 살린 완전 생명은, 피조물에게 완전 생명은 창조주를 향한 것만이 완전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완전 생명을 가지고 진리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이루고 또 영감으로 영생을 이루는 이것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랬는데 예수님의 대형도 우리 각자들을 다 대신 형벌받아 가지고 대형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형하신 것은 한번 대형하심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함이 됐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우리 개인개인의 그 모든 잘못된 형벌을 예수님이 개인개인 대신해서 형벌에서 해방시켰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것도 저것도 다 하나입니다.
우리의 개인개인의 범죄로 마귀의 종된 것을, 또 사망의 종된 것을, 죄에 종된 것을 해방하셨는데 대신 해방하신 것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한 대형이 우리 많은 사람들의 형을 다 합해서 우리의 형을 담당하신 것은 우리 개인개인의 형을 다 담당하셨지마는 담당하신 주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한 분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면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것은 예수님의 피공로로 해방시켰는데 피공로로 해방시켰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해방시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부터 사람되신 그때부터 대속을 시작하셔 가지고서 사람으로 나신 것도 대속의 그 한없는 고난이요 그라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모든 불행을, 사망과 모든 멸망을 대속한 것은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데까지로서 끝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끝난 그것을 나타내서 예수님의 피로 속죄했다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말한 것은 도성인신 하셔서 죄는 없는 사람이지마는 꼭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나셔 가지고 우리를 대속하셨는데 그 대속하는 것이 죽음까지 대속이 끝났습니다. 이래서 죽음을 표시해서 예수님의 피공로로 대속했다 그렇게 말씀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하는 말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내어놓으시고 이 피조물되어 오셔 가지고 사생활 삼십 년 공생활 삼 년 사 개월을 하시면서 온갖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일을 하시다가 그 일이 마지막 죽으심으로 완료되고 끝났기 때문에 죽으심을 표해서 예수님의 피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의 대속으로서 다 쓰여졌고 다 바쳐졌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끝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대속했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들이 예수님에게 부담시킨 것은 각자들이 천 명이면 천 명 그 모든 영원한 사망을 다 개인개인이 주님에게 부담을 시켜서 천 명이면 천 명 모가치를 다 당신이 형을 받고 대신 또 행하시고 대신 화친하셨고 만 명이면 만 명 몫을 다 그렇게 하셨고 그 수많은 사람을 개별개별의 것을 예수님이 다 대신 담당을 낱낱이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로 담당하셨는데 혼자 담당하신 데 거기에서야 나 하나 더 있으나 덜 있으나 그것은 예수님이 대형하시는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에 더 있으나 덜 있으나 상관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깨달음들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나 한 사람이 있음으로 예수님의 형은 더 무거웠고 순종은 더 무거웠고 화친은 더 무거운, 우리 개별의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 예수님의 담당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당시킨 우리는 복수요, 담당시킨 우리는 수많은 숫자지마는 이 담당하신 주님은 한 분이십니다. 한 분이 사람으로서 담당하면 한 분밖에는 담당을 못 할 터인데 어떻게 한 사람이 두 사람이면 두 사람 모가치를, 천 명이면 천 명 모가치를, 만 명이면 만 명 모가치를, 수억억만 명이면 억억만 명의 모가치를 이렇게 담당할 수 있는가 하는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만으로가 아니고 예수님의 신성이 함께 대형 대행 대화친의 역사를 했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과 무한함이 한 격위를 이뤄 가지고 한 분이 하셨기 때문에 많은 양을 담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 또 ○목사는 밥 굶고 싶다. 오늘, 낮에 밥 먹었나? ○목사? 어제 졸다가 그만 밥도 안 줘서 못 먹었다면서? 오늘 또 굶는다, 그라면.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담당하신 것은 우리 각자의 것을, 각자 각자의 그 분량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한 대속을 하시고 많은 사람을, 하나 몫이나 둘 몫이나 한번 한 것 가지고 뭐 한 명을 대속 열 명 대속 많이 대속할수록이 수입이 되고 유익이 되고 한다는 그게 아니고 우리 개별개별의 형을 다 대신해서 담당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가지고 다 했다’ 하는 그말은 “첫째 아담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전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신인 계약해 가지고 위약해서 됐기 때문에 예수님도 한 사람이지마는 또 우리를 대표해서 신인 계약해 가지고 했기 때문에 됐다” 그 교리를 연결시켜 가지고 그렇게 사람들이 깨닫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형한 것은 우리 개별개별의 형의 그 중량을 다 예수님이 담당하셔 가지고서 대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속을 하신 분은 한 분이십니다. 대속을 하신 분은 한 분이시요 대속을 받은 사람은 숫자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대속하신 분은 한 분이기 때문에 한 분의 그 대형을 가지고, 한 분의 대형을 가지고서 우리가 다 사죄를 받았고, 한 분의 대행을 가지고서 우리가 다 칭의를 받았고, 한 분의 대화친을 가지고서 우리가 다 화목의 새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사죄한 분도 한 분이요, 칭의한 분도 한 분이요, 화친한 분도 한 분이지 두 분이 없기 때문에, 두 분이 없기 때문에 만일 열 사람이 있는데 열 사람이 이 사죄 받은 데 대해서 열 사람이 하나가 아니고 만일 두 쪼가리가 되면은 예수님의 그 대형 사죄는 하나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대형이 안 됩니다.
우리가 대형 받는, 대형 사죄받는 자는 천이든지 만이든지 억만이든지 이거는 한 대형으로 다 우리가 사죄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사죄받는 데는 한 대속주에게 내가 속하고 한 대속주에게 속해야 되지 대속주에게 속하지 안하면은 이 대속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와 형제와 둘이 나누어져서 둘이 된다고, 하든지 서이 된다 하든지, 열이 된다고 하든지, 이거는 다수가 합해 가지고서 하나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라는 것은 수많은 다수가 합해 가지고서 하나가 된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라, 그러기 때문에 그 말을 발표할라면 다수아라, 숫자가 많은 내라, 다수아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우리가 되지 안하고 개별로 이렇게 되어질 때에 우리가 대속을 받을라 하면은 예수님도 개별이 돼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라면 둘로 되면 둘을 대속할 수 있을 것이고 서이로 되면 서이를 대속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 분이시요 나누지를 못합니다.
그분이 담당은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마는 그분이 하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가 되면은, 하나가 되면은 예수님의 대속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지마는 대속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둘이 되면 하나는 대속을 받아도 하나는 대속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우리가 되지 안하면 예수님의 대속은 그에게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대속주는 하나뿐이기 때문에. 우리의 담당하신 것은 내 개별의 것을 담당하셨지마는 한 분이 개별의 것을 담당하셨는고로 담당하신 그분은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되지 안할 때에는 사죄도 칭의도 화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죄도 칭의도 화친도 그것은 하나가 안 되면 어느 것이든지 하나된 그것은 받고 나머지기는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 때에 세상을 뜬 수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렇게 대속받은 사람들이요 또 신약 시대도 벌써 근 이천 년이 돼 가는데 대속받은 수많은 사람들도 다 그것이 예수님의 한 대속을 가지고서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커다란 한 주체가 있습니다. 커다란 한 주체가 있어서 이것을 가리켜서 단일 교회라 그렇게 말합니다. 단일 교회라.
수많지마는 단일 교회인데 단일 교회에 거기에 지금 내가 예수 믿으면 나는 그 단일 교회 속에 거기에 파고 들어가야 됩니다. 내가 단일 교회 속에 내가 폐합이 돼야 됩니다. 나는 버리고 거기에 합해져야 됩니다. 나는 버리고 거기에 합해져야 되는데 우리라 하는 것은 구약 신약 모든 교회가 다 우리입니다. 하나입니다.
거기에 들어가야 예수님의 이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을 받는 것이지 거기에 들어가지 안하면 대속의 화친을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되지 안하고, 우리가 되지 안하고 자기가 내라는 그 개체로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개체가 되어졌을 때에는, 개체가 되어졌을 때에는 내가 참되고 옳으면 남은 모든 이제까지 역사의 교회는 다 헛일입니다. 헛일이요 그 역사의 교회가 그게 주님과 바로 연결을 가지고서 지금 대속을 받아 연결 가졌다고 하면은 나 하나가 안 붙으면 나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버림이 되지 그것이 변동되거나 그렇게 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 하나에 모여서 다수가 모여 가지고서 하나가 되는 그 수를 가리켜서 우리라 그렇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개체의 우리는, 개체의 내라는 것은 그것은 스스로 자멸을 취하는 것이지 사죄도 칭의도 화친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우리가 되는 것은 역사에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 벌써 근 이천 년이 되는 동안에 신약 교회가 숫자가 많은데 그 전부가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단일 교회라 이렇게 말해.
단일 교회는 단일 예수님의 대형으로다 사죄받은 것이요, 단일 대행으로 칭의받은 것이요, 단일 화친으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생명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 겉어머리는 많지마는, 겉어머리는 많지마는 암만 많아도 이거 한 뭉텅이로 이래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일로 되어지지마는 이것이 우리가 안 될 때에는, 우리가 안 될 때에는 대형자가 하나 더 되어 있어야 되고, 만일 교회가 예수 믿는 사람이 한덩어리가 되지 안하고 우리가 되지 안하고 개별의 개체 개인이 있다고 하면, 하나 더 있으면 대속주가 하나 더 있어야 되고 둘 더 있으면 대속주가 둘 더 있어야 되기 때문에 대속주는 하나뿐이지 둘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도 유일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요 또 도성인신하는 것도 한 분이시요 하나님이 계약하고 약속하고 영원 전부터 그렇게 하나님이 벌써 택할 때부터 예정으로 이렇게 나오는 것이 다 하나이기 때문에 둘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우리가 되지 안하고 자기가 구원을 고집하는 것은 그것은 이제까지에 모든 수많은 단일 교회인 이 교회를 다 파괴시키고 제가 그보다 중량이 높다는 것이요 또 그리 하면은 이제 유일하신 이 대속주를 또 대속주 하나 만들라고 한다는 그와 같기 때문에 그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들은 우리가 되지 안하면 구원이 안 되고 없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되지 안할 때에는 이 구원 선 밖에 다 탈선돼서 구원 선 밖에 외에 것이지 이 구원 선 안에 있는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단일 사죄 칭의 화친이라는 것을, 이 몫은 단일의 우리 여럿이 얼마든지 그 단일을 우리가, 하나를 가지고서 여럿이 나누어 가지는, 우리 다수가 다 합해 가지고서 한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천 명 만 명이라도 한 대속 받았는고로 이게 우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되어지고, 또 우리가 중생은 수많은 사람들이 중생을 했습니다. 중생을 했지마는 이 중생된 것도 단일 중생 그 능력을 가지고 우리가 중생했습니다. 그러면 중생의 능력은 몇 가지가 합해 가지고 중생의 능력이 됐습니까? 손가락으로? 몇 가지가 합해 가지고 중생의 능력이 됐습니까? 녜, 이 세 가지. 피, 성령, 진리, 이 세 가지 합해 가지고서 중생의 능력이 됐는데 세 가지 합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이 셋은 합하여 하나라” 했습니다.
중생시키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중생시키는 건 하나뿐인데 하나를 그 속에 내부에 들어가서 분류를 분석을 한다고 하면은 피, 성령, 진리, 우리가 나눌라고 하면은 이렇게 셋으로 나눠서 삼분으로 할 수 있지만 논리상 혹은 우리가 말로써 이렇게 표현할 때는 이 분류할라면 서이지마는 이 셋은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이래서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인데 이 셋은 하나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중생시키신 것도 하나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되지 안하고 만일 자기가 이 단일 교회에 들어가 가지고서 하나가 되지 안하고 자기 개별이 된다고 하면은 자기가 어데까지든지 세상에서 위대하게도 지낼 수 있고, 또 유력한 활동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거기에서 유명해질 수도 있고 하지마는 단일 교회인 이 우리가 절단이 나든지 그 사람이 이 시대에 세계를 울리고 아주 위대한 역사를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깨지든지 우리가 깨지든지 둘 중에 하나는 깨져야 되지 둘 다 있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제가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거대하고, 아무리 능력 있고 어떻다 할지라도 우리 속에 들어가지 안하는 것은 다 이것은 도태되고 이거는 다 멸망을 받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될 때에 그 생명이 자기에게 있지 우리가 안 되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비유가 될란지는 모르지마는 한 몸에 세포로 말하면 숫자가 심히 많습니다.
나는 그 세포를 잘 모르지마는 내가 언제 그걸 많다고, 여기 ○박사가 있으면 내가 더러 물을 건데, ○박사 어데 있어? 어데? ○박사 말이요, ○박사. 의학박사 말이지 뭐 신학박사는 소용 없고. 손가락이 하나 세포가 몇 개나 됩니까? 대략? 한 몇천 되는가요? 몇십만 개? 아이구야. 이 손가락 하나 세포가 몇십만 된답니다. 아마 몇십만 된다 그걸 내가 더러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포가 이 몸에 붙었을 때는 다 살지마는 이 몸에서 떨어지면은 그만 그것은 어느 시기 지나가 버리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왜? 한 몸에 한 생명 가지고 살기 때문에 그 수많은, 그뭐 사천만이라 했나? 몇천만이라 했나? 몇십만이라 했나? 몇십만이니까 온 몸뚱이로 말하면은 뭐 몇억만 되러구만요.
몇억만 되는 세포가 한 생명 가지고 사는데 이 한 생명에서 떨어지면 저만 죽습니다. 한 생명에서 어떤 세포가 떨어져 가지고서 나는 살라고 그 생명을 제가 끌어들일라 하면은 다른 전신이 죽을 터이니까 전신이 그 한 세포에게 끌려갈 리가 없는 것이고 그 생명에서 다른 사람이 사는 생명 거기에 자기가 붙지 안하고서 자기는 딴 생명 독단의 생명을 가질라고 하면은 결국은 그 세포가 죽고야 마는 것이지 전신이 죽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비유가 될란지 모르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확고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된 것은 한 생명 가지고 중생됐습니다. 한 생명은 분류를 한다고 하면은 셋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대속과 성령과 진리 셋으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 이 셋은 하나기 때문에 나누지를 못합니다.
셋이 만일 나눌 수 있다면 삼분지 일을 제가 끌고 가 가지고 어떻게 독차지를 하면 할란지 모르지만 이거는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끌고 갈라면 셋을 다 끌고 가야 되고 그리 안 하면 못 끌고 가고, 셋을 다 끌고 갈라 하면 제가 이 우리 속에 들어가지 안하고 따로 있어서 제가 이 셋을 끌고 갈라 하면은 이 우리라고 이 역사의 교회, 구약 때로부터 신약 교회 역사의 모든 교회가 죽든지 제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죽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 하나에 소속하지 안하면 살 수 없는 것인고로 이제까지의 역사 교회 단일 교회가 저 하나에게 밀려서 죽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생명에서 떨어지는 게 되고 만다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안 되면 생명에서 떨어지는 것이요 또 우리가 안 되면 사죄에서 떨어졌고, 칭의에서 떨어졌고, 화친에서 떨어졌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도 개체개체가 개인개인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역연 이 세 가지로 하나되어 있는, 이 중생한 세 가지 능력으로 하나돼 가지고 있는,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으로 하나되는 이 구멍을 통해서 하나님을 관계 맺을 수 있지 이 구멍을 통하지 않고 딴 구멍을 뚫어 가지고서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가 접할 수 있고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생명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생명이기 때문에 한 생명은 벌써 우리하고 하나가 돼, 한 생명은 우리라는 거 이거 우리하고 하나돼 가지고 이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 될 때에는 그때는 이 생명과 자기는 끊어지게 되는 것이고, 또 우리가 영생하는 것도 진리로 영생하는데 진리는 외부로 퍼쳐 나가 가지고서 활동할 때에는 그 수가 한없이 수가 많지마는 그 진리는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입니다. 하나가 이렇게 마치 햇빛은 태양은 하나인데 태양 하나가 이 우주에 가득차게 이렇게 광선으로 비추어 나가는 거와 같이 이렇게 진리도 하나인데 한 진리로 우리가 영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우리가 되지 안하면은 한 진리 외에 딴 무슨 진리를 제가 가져야 영생할 수 있지 딴 진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이라. 진리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또 우리가 영감으로, 영감은 천인 만인에게 이 영감이 비취지마는서도 영감은 하나입니다. 하나가 천인 만인에게 이렇게 비춰 가지고 있는데 그거는 우리와에 연결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 개체가 우리에게 속해서 우리가 되지 안하면은 이 영감은 안 됩니다.
저 ○집사님? 거기에 아이들 거기 있나? 집에 아이들 거기 있어? 그러니까 아이들을 보니까 그만 그래. 부인 어데 갔어? 이제 부인이 맡아요.○○○씨 저거 목사 될까 바라고 있는데 목사는커녕 조사도 못 되겠어. 그 부인이 아이들 다 맡고 따로 똑 똘거져야 되지 저래 가지고는 마귀나 될까 소용 없어. 저 아주 뭐 굉장한 사람인데, 굉장한 사람인데 영 그만 버려 버렸구만.
저거 마누라, 애처가거든. 그러니 저거 마누라는 다 저 놀도록 딴데 돌아다니고 선선한 데, 아마 앉아서도 그 욕심쟁이 그라면, 그 욕심쟁이는 저 바람 시원한데 앉았을 것이라, 내가 몰라도. ○○○권사님? 좀 주사를 한 개 놔 줘요. 인제 아이 맡겨버려. 저거 평소부터 자꾸 좋아하니까 저거 아버지 안 떨어질라 할 거라.
거기 만날 항상 졸고 있구만.
하나님은 욕심쟁이요. 마음을 나누는 것은 싫어하십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은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안한 사람이 다르다. 결혼 안 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영화롭게 할까 하되 결혼한 자는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지마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해서 마음을 나누느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세밀해.
마음 나누는 것도 알고, 백분지 구십구는 내게 있고 백분지 일은 딴데 가 있는 것도 알고, 백분지 구십구는 딴데 가 있고 백분지 일만 당신에게 가는 것도 알고,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전지자신데 얼마나 명철하겠소? 그분의 그 비슷하게 그분을 좀 닮아가는 자들도 그 머리가 굉장한 것입니다. 그뭐 말은 안 해도 거의 다 알 수가 있어.
그 말할 때에, 네가 어데서 어데서 어떻게 미혹을 받아 가지고서, 어떤 동기로, 네가 그래 나가면 끝에 가서 어떻게 될 그것을 알기 때문에 교훈하기를 ‘네가 그리하면 이렇고 이렇고 하니까 그래라’ 하는데 제가 반대하고 빡빡 세우지마는 나중에 오랜 지난 후에 보면은 ‘그 말이 맞다’ 이라니까 마지막에는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 그 말이오.
이런데 예배보면서 아이 그놈이 자꾸 있다 아빠 이래 쌓아니까 또 이라면 또 마음이 그리 가 버렸지, 또 그리 또 기울어지지, 그거야 뭐 자다가 해도, 자다가 해도 그만 이거 아빠 하면 떡 들어붙을 수가 있지마는서도 하나님하고는 그렇게 쉽게 붙지 안하요. 쉽게 붙지 안해요. 하나님은 잘 붙어 주지 안해요.
그래 가지고 그전에 이용도 목사님이라 하는 그 목사님이 기록한 거 보니까, 그분을 이단으로 몰았는데 그분의 그 전기를 보니까 그분이 예수님을 만났어.
그분이 만났다 말이오. 만났는데 예수님을 한번 이렇게 잊어버려 놓으면 그 주님 찾을라 하면 어떻게 힘이 드는지 뭐 죽자 살자 헤매 가지고서 주님 만날라고 내나 그라니까 그때사, 실컷 진액 뺄 대로 빼고 고통할 대로 고통하고 이라니까 그때 나와 가지고서 ‘왜 찾노?’ ‘어데 갔습디까?' `내가 여기 있지 안했느냐? 너하고 같이 있지 안했느냐? 네 눈이 어두워 못 봤지.’ 그렇게 만나기가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만나면 뭐 기도 줄줄줄 하고 설교도 줄줄줄 하는 그거야 죄짓고라도 상관없고 죄짓고라도 기도도 상관없고 설교도 상관없는 거 그거는 아예 하나님 만나는 건 상관없고 여기 그 스피커 모양으로 그저 녹음기 모양으로 그래 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연결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연결되면 설교하고 연결 안 되면 설교 못 하고 연결 안 되면 기도하는 것 보면 환하게 표가 나고, 이거는 연결이 됐든지 안 됐든지 청산유수입니다. 그 사람 그 병들어 놓은 거 하나님 떼놓고 제대로의 이 신앙 생활 하는 걸 이 가식으로 하는 그거는 악습 중에는 큰 악습인데 그 악습은 고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마음 나누면 안 돼. 이래 놓으니까 자꾸 인제 멀리 갈라고 요리 앉고 조리 앉고 아이 떼놓을라고. 그거 또 자꾸 따라오는데 어짤 거라? 요다음에는 그래요. 맡겨 줄 수 있어? 몰라, 맡겨 줄 수 있을까? 딱 맡겨 줘요. 맡겨 주고 딱 와서 무릎팍 꿇고, 거기만 앉지 말고 인제 여기도 앉고 좀 자리도 바꾸기도 하고 이래 가지고서 처음부터 해서 단단히 들어. 그래야 하나님의 일이 손해가 안 되지.
내가 뭐 하다 그랬지? 그만 그리 가 버렸다. 뭐라 하노? 녜, 우리가 사죄도 하나, 한 사죄를 가지고 우리가 다 사죄 받았습니다. 한 사죄나 그 사죄에 우리 몫이 다 들 수 있는 양이 그 속에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죄를 받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첫째 아담이 하나로서 대표해 그런 것처럼 둘째 아담도 이 대표해서 그렇다’ 하는 그말도 변증으로 성경에 해 놨지마는 또 우리의 개인개인의 그 모든 형을 다 담당했다는 것도 성경에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한 대형의 우리 몫이 그 가운데 다 들었기 때문에 한 대형을 받고, 한 칭의를 받고, 한 화친을 받고, 또 한 중생을 받고, 또 한 진리를 받고, 한 영감을 받고, 이래 가지고서 우리가 영생하기 때문에 하나 속에 우리가 다 들어가야 되지 하나 속에 들지 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에 우리가 천인 만인이 다 영생하는 생명을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지마는 한 생명을 가지고 천인 만인이 우리가 다 나눠 쓰고 갈라 쓰고 있습니다. 나눠 쓰고 갈라 쓰고 있어요.
마치 말하면 한 사람이 생명으로 살아 있을 때에 거기에 수억만의 세포가 달려 있지마는 그 한 생명 가지고 저희들이 나눠 쓰고 있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지마는 그 세포가 그 몸을 떨어지면 그만 즉시 죽습니다.
몸을 떨어지면 뭐 혹은 몇 분간은 사는지 혹 몇 시간은 사는지 모르지마는 그 세포가 몸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우리는 자기가 내가 되면은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라는 이것을 깊이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라 하는 것은 우리 사람은 숫자가 많지마는 그것이 예수님의 사죄로 하나됐고, 칭의로 하나됐고, 또 화친으로 하나됐고, 또 중생으로 하나됐고, 또 진리로 하나됐고, 영감으로 하나됐는데 우리가 이제, 하나됐다 말은 한 영감에 우리가 속해 가지고서 한 영감으로 우리가 수많은 사람이 살아났다 그말입니다.
한 영감으로 수많은 사람이 살아났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서 탈선되면 사망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에게서 탈선되면 사망입니다.
사람들은 타락한 후에는 자꾸 악이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악령이 와 가지고 벌어뜨려서 우리 사람들을 악성으로 만들어서, 악성으로 만들었다 말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그만 개성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개성을 만들었고 또, 또 뭐이지? 녜, 악습으로 이렇게 개별 행위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가 죽은 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벌써 수천 년 동안 뿌리박아서 대대로 내려오기를 전부 개인주의, 개인주의, 개인주의 이 악이라는 것으로서 악령으로부터 내려와 가지고서 사람이 죽게 됐습니다.
그러면 개인주의가 아니면 전체주의는, 전체주의라는 철학이라는 그거는 산 건가? 아니고 그거는 더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악령이 이래 가지고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이렇게 해 가지고서 죽게 된 이것이 타락 후에 생활법입니다. 타락 후 생활법은 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요,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서 자기 중심이 돼야 자기가 재미가 있고, 자기 위주라야 재미가 있고, 또 무슨 일을 해도 자기 주장이 서야 재미가 있고, 자기 주장이 서야 재미가 있고, 자기 명예가 돼야 재미가 있고, 자기가 왕이 돼야 재미가 있고, 모든 것들이 자기에게 귀속이 돼야 재미가 있고 하는 이것이 뭐이냐? 사망의 법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이 전체가 사망되는 것뿐이지 딴거는 하나도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대대로 여기에서 뿌리박아 가지고서 사망에서 사망으로 자꾸 전달해 가지고서 내려온 이것이기 때문에 본 게 그것뿐이요, 들은 것이 그것뿐이요, 또 받은 것이 그것뿐이요, 연습한 게 그것뿐이기 때문에 이것을 돌아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김현봉 목사님은 그분은 참 그 당시에는 우리 한국 교회서는 제일 큰 교회를 맡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가 천 명 교인이 모였었는데 그때 서울에 큰 교회가 삼백 명 모인 교회가 별로 없었고 다 이백 명, 뭐 백오십 명, 그저 이백 몇십 명 그래 됐었는데 아현교회는 그때 천 명 모였습니다. 김현봉 목사님이 세상 뜰 그 임시에 천 명 아마, 얼마나 모였습니까? 천백 명까지 모였거나 그랬을 것입니다.
그분이 그때 뭐 따른 제자들이 많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아현교회는 모두 바보들만 오고 다 무능한 자들만 모이기 때문에 거기는 시키는 대로 아현교회서 김 목사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 못난 것들만 모여 그렇다’ 하는데 그게 아니오. 거기 뭐 장관들도 있고 사장들도 있고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도 거기에 많이 있었지마는 하나님과 진리 앞에 굴복 안 할 수가 어데 있겠습니까? 그분이 하나님과 같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항상 유언하기를 자기가 죽거들랑은, 죽거들랑은 그 육체를 리어카에다 끌어다가 화장시켜 달라고 그렇게 해서, 뭐 그때 제자들이 많고 이러니까 굉장한 영광스러운 잔치를 할 수 있지마는 리어카에 끌고 가 가지고서 화장을 했습니다.
하게 된 동기는 뭐이냐?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이놈을 가지고 싸워서 이놈을 아주 죽여서 없앨라고 이놈하고 실컷 싸우고 싸우고 해도 나중에 거석하기 때문에 그 철천지 원수가 돼서 이 고기덩어리 이거는 불에 태워서 바짝 태워 가지고서, 바짝 태워 가지고서 새로 이제 부활이 돼야 되지 이게 땅속에 묻어놔서 조그마치라도 그것이 안 타고 그게 그대로 좀 건너오면 큰일 난나고서 그래 불에 태우기를 원해 가지고서 화장을 했습니다. 그랬지요? 그래.
이러니까 이거 여러분들, 우리가 우리 되기가 얼마나 쉬우며 우리의 반대인 나, 우리 반대인 나 이놈을 죽이고 우리 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걸 이거 자기 원수로 삼고 내라는 것이 나타나지 안하도록 항상 우리, 그러니까 자기는 우리가 안 되면 죽습니다.
우리가 안 될 때는 뭐하고 떨어집니까? 우리가 안 될 때는 뭐하고 떨어지요? 우리가 안 될 때에는 사죄와 떨어지고, 칭의와 떨어지고, 화친과 떨어지고, 생명과 떨어지고, 진리와 떨어지고, 영감과 떨어지고, 수많은 우리로 단일 교회 돼 있는 그들과 떨어집니다. 알겠습니까? 떨어지니까 이 산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이오.
이거 도무지 살 수가 없는 것이오. 이거 자살 행위입니다.
자살 행위인데 마귀라는 요놈은 자꾸 그것이 좋다고 이래 가지고서 사람들이 실컷 무슨 의로운 일 해 놓고 나중에 가서는 마귀란 놈이 ‘네까짓 게 암만 의로운 일 해 봤자 그까짓 거 마지막에 약 한개만 먹이면 뒈져 버릴 건데’ 하고 안심하고 있습니다.
뭐이냐? 어리석에 자기 아닌 자기,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을 추켜 가지고서 설설 자기 아닌 그놈을 자기라고 인식을 시켜서, 인식을 시킬 때 뭐라고 인식 시킵니까? 그놈을 슬쩍 추 올립니다. 추 올려 대서 칭찬도 하고 이 추 올리는 그 바람에 그만 어리석게 그만 자기를 바꿔버린다 말이오.
자기만 바꾸고 난 다음에는 그라고 난 다음에 또 뒤에 가서 사람과 벌어지도록 누가 어짠다고 이간을 붙입니다. 이간도 붙이고, 이간도 붙이고, 간교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어떨 때는 가다가 안 들으면 꾀우기도 하고,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이래 가지고서 어쨌든지 옛사람이 자기의 주인이 돼 가지고, 심신과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똘똘 뭉치면 재미 있고 참 좋습니다. 죽는 날까지는 아무 이의는 없고 재미 있지마는 이놈을 반대하면은 얼마나 고통이 되는지? 이래 가지고서 가정에서도 이것이 합해지면은, 합해지면은 뭐 좋아서 못 견딥니다.
좋아서 못 견디지마는 거기에서 참으로 옛사람을 버리고 중생된 새사람으로서 옛사람과 합하지 안할라고 새사람으로 살라 하면 그때부터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왔다” 이랬습니다. 왜? 세상하고 한덩어리 돼 있는 이 가정에 새 생명을 갖다 넣어 주니까 이 새로 중생된 새생명을 갖다 주니까 이 죽은 자하고 산 자하고 대립이 안 되겠습니까? 마귀하고 하나님하고 거짓 불법하고 진리하고는 대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말이오.
개인 자기 중심도 자기 중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하고 중심 둘이 대해 놓으니까 탁 부딪쳐서 싸울 수밖에 더 있겠소? 싸울 수밖에 없는데 내가 이 싸움을 시킬라고 왔다 그 말이오. 이 싸움을 시킬라고 왔다. 이제 하나님 중심과 개인 자기 중심과 둘이 서로 전쟁을 붙이기 위해서 내가 왔다.
그러기에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이 둘이 하나되도록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둘이 이 불화가 돼서 시어머니하고 며느리하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형하고 동생하고, 시어미하고 며느리하고 다 이래 불화하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 그 말이오.
이거는 이제 우리하고, 우리하고 우리 아닌 것하고, 우리가 돼 가지고서, 이 우리 아닌 저거끼리 돼 가지고 이래 하는데 그놈하고 합하게 할라 하면은 예수하고 우리 된 데에 못 들어갈 것이고 예수님하고 우리 된 데 들어갈라 하면은 그놈들하고 대적이 돼야 되는 것이고 이라니까 그것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분쟁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분쟁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만 ‘좋은 게 좋지’ 하고서 그렇게 우리를 양보하고 마귀와 단체 개인주의로, 개인주의로 들어갑니다.
우리를 양보하고 ‘우리 집, 우리 집, 우리 부부, 우리 아들, 우리 집.’ 그라면 좋아한다 말이오. ‘우리 집이 남의 집보다도’ 집하고 집하고 원수가 돼 가지고서 그 집하고 대립이 돼서 그 전부 그 경쟁을, 경쟁을 집하고 집하고 경쟁하고, 회사하고 회사하고 경쟁하고, 또 이웃하고 이웃하고 경쟁하고 이렇게 경쟁해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면 다 좋아하고 이렇게 하나가 돼지지마는 그라면 그것이 사망하는 법에 들었고 사망의 세력에게 매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안 할라 하면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은 세상에 속했으면 저희 것으로 알아서 너희들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들에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세상이 저희 것이 아니니까 세상이 너를 미워한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실상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너하고 나하고 합작돼 있기 때문에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도 나 보내신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쭉 이래 하나되어 있는 우리되어 있는 거기에 내가 속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어쨌든지 우리가 어리석으면 안 됩니다. 내가 되면은, 내가 되면은 즉시 죽었습니다. 내가 되면 즉시 죽었으니까 언제든지 나하고 싸워야 됩니다.
내가 안 되고, 내가 우리에게 떨어지지 안할라고, 우리에게 떨어지지 안하고 우리가 될라고 애를 쓰고, 마귀란 놈이 요렇게 궤휼을 꾸미고 저렇게 유혹을 꾸미고 요렇게 협박도 하고 저렇게 간교도 하고 저렇게 ‘이러니 저러니’ 오만 말을 해 가지고 어쨌든지 우리 속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할라고 오만 그 장난을 다 치는데 우리가 우리에게서 벗어나지 안하면 우리는 죽일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 가지고 된 이 하나로 살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로 살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로 사는 그 덩어리에서 벗어나가면 우리는 죽습니다. 생명이 둘이 없기 때문에. 한 생명으로 사는 여기에서 떨어지면 생명이 또 있으면 딴데 살 수 있지마는 생명은 하나뿐이라.
한 생명 가지고 삽니다. 우리는 한 생명 가지고 사요. 또 한 진리 가지고 사요. 또 한 영감 가지고 사요. 한 사죄 가지고 살고, 한 칭의 가지고 살고, 또 한 화친 가지고 삽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천인 만인이라도 단일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래서, 세상에서는 개성을 좋아합니다. 개성을. 그래 내가 어떤 데 가 가지고 내가 말을 들었는데, 제가 말하기를 하늘나라는 천인 만인이라도 한 속성으로 살고 있다. 한 속성이다. 만인이라도 속성의 만일 여덟 가지를 말하면은 만인 천인이라도 한 지식으로 살고 있고, 한 지혜로 살고 있고, 한 사랑으로 살고 있고, 한 진실로 살고 있고, 한 거룩으로 살고 있고, 한 의로 살고 있고, 한 권세로 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네것도 네 지식도 모든 것 다 버려 버리고 하나는 뉘것이냐? 하나는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 하나는 주님의 것이오.
그러면 지식을 이 세상에서는 모두 제 지식을 다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래서 모두 다 제 지식을 선포하고, 그러기 때문에 논문에 박사 논문에 합격을 할라거들랑은 그만 그 교수, 그것도 팔방미인이 돼야 돼. 이 교수는 이 교수 좋아하는 대로 또 내가 안 그래도 또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래서 거기 맞춰야 그거 도와 주지 그리 안 하면 반대해요.
그러니까 어쨌든 거기에 신신학이나 이단이나 그런 모든 거짓된 교수가 있는 그 학교에서 논문 박사를 했다 하면은 그 사람은 두말 없이 거짓말, 부러 거짓말을 했든지 그리 안 하면 속였든지 둘 중에 하나는 없으면 학위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거 만일 거짓된 발트주의의 교수가 있다면 발트주의를 제가 긍정을 하지 안하면 그거는 안 된다 말이오. 발트주의를 긍정을 해야 된다 그 말이오. 그냥 발트주의가 이렇단다 이렇게만 아니고 발트주의를 자기가 긍정을 하는 긍정해야 인정을 해 줘요. 나는 그거 똑똑히 몰라서 혹 정확한 데는 틀렸는가 모르지만 박사들은 다 알 거라.
세상에서는 다 그런 것을 원합니다. 다 그것들입니다. 이러니까 세상은 분산하는 세상이요 또 하늘나라는 이제 분산된 것을 다 죽여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러니까 마귀란 놈은 우리를 자꾸 지금 쳐서 구원 이루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한 진리, 하나에서 우리가 속해 살기 때문에 ‘하나로’ 이라니까 이 세상은 또 세상도 하나를 만들라고 이 모든 악한 것들로 하나가 됩니다. 악한 것들로 하나돼 가지고서, 악한 것들로 하나되니까 이 기독교도 그와 같은 단합으로 하나되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을 하기 쉽습니다.
기독교의 단합은ㅡ세상 단합은, 세상 단합은 모래를 여러 차를 갖다 묻어놓으면 모래 무더기는 그 수많은 모래알이 한테 한 무더기 되지 않습니까? 자갈 무더기는 수많은 자갈을 모아 놓으면 집합시킨 무더기 되지 않소? 집합시킨 무더기.
세상 무더기는 다 집합 무더기요. 모래 무더기, 돌 무더기, 또 잘 돼 있으면 기계를 부속품을 한테 조립을 하면은 조립된 거와 같은 조립 한 존재 이것이지마는 기독교는 그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종합체가 아니고 기독교로 말하면은 말하자면 그 비유로 표시해 나타내기를 한 몸과 같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조립식도 아니고 집합식도 아니고 이거는 영원 불변의 단일에 속해 가지고서 단일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일에서 나와 가지고서, 마치 진리는 한 진리가 수많은 방면에 공간에 이렇게 비추어 나가는 거와 같이 하나가 이렇게 비추어 나가서 하나가 비취는 거기에서 우리가 소속해 가지고서 이래 산 것이지 집합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라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나라도 개성이 있다’ `없다' 이래 가지고서 논단이 나는 것을 봤습니다. ‘마치 우리가 화원에 가 볼 때에 그 꽃이 한 가지만 있으면, 물론 집단의 미도 있기는 있지마는 한 가지만 있으면 재미가 없다. 붉고 푸르고 희고 누르고 뭐 여러가지 꽃이 한테 섞어 있어야 아름다움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도 이렇게 이런 개성 저런 개성 인간의 개성들이 다 그대로 살려 가 가지고서 가서 가야 하늘나라 인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고 아름답고 재미 있다.’ 하늘나라는 몇 가지라요, ○○○목사님? 하늘나라는 뭐 몇 가지 개성, 올긋볼긋해야 좋아요? 하나뿐이라? 여러가지 올긋볼긋 이 개성 저 개성 수많은 사람의 개성이 한테 모아야 천국에 재미가 있는가? 그래 인제 미리 아니까, 엊저녁에 모두 이거 수재, 수재민 안 낼라고 모두 잠을 안 자서 오늘 곤한 모양이라. 어제 그렇게 또 한쪽머리는 돌아다니고 한쪽머리는 또 기도하고 이라는데 하나님이 어제 그 야단날 것 같더니마는 괜찮아. 아마 다른 데는 비가 좀 많이왔을 거라.
그래서 집단의 미와 같이 그렇게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 ○○교회에, ○○교회도 우리 서부교회서 세웠는데 다른 사람들이 뺏들어 가지고 가 버렸어. 이랬는데 ○○교회 제가 집회를 할 때에 어떤 그 신학교수들이 와 가지고서 참여를 하고서 ‘예, 이제 알았습니다. 나도 지금 신학교 가면 이와 같이 가르치겠습니다. 하늘나라는 모두 다 단일뿐이다. 모든 개성은 하나도 없고 개성은 다 죽여버리고 하나님 한 분의 그분의 속성을 다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 한 분의 속성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억억만 년 있어도 성질도 같고, 지식도 같고, 뜻도 같고, 견해도 같고, 비판도 같고, 평가도 같고, 소원도 같고, 욕심도 같고, 성질도 같고, 그라면 거기 싸움이 있겠어요? 이 ○장로님? 그래 천국이라. 천국은 그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내라는 이거는 다 죽여버리고 어서 우리가 돼야 됩니다. 우리가 되지 안하면 다 헛일입니다.
성질도 내 성질 네 성질 다 죽여버려, 소용 없어. 내 욕심 네 욕심 다 죽여버리고 내 소원 네 소원 다 죽여버리고 예수님 한 분의 욕심을 다 우리의 전부의 욕심이 돼야 돼요. 한 분의 욕심 그것 가지고 다 우리 욕심삼아 가지고서 사는 것이요, 한 분의 생명 가지고 우리가 다 사는 것이요, 한 분의 대속 가지고 우리가 대속받은 것이요, 하나의 그 진리 가지고 우리가 사는 것이요, 그러기에 진리도 하나요, 영감도 하나요, 또 생명도 하나요, 사죄도 하나도, 칭의도 하나요, 화친도 하나요, 다 이 소망도 하나입니다. 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될라 하면 그걸 뭐라 합니까? 저 조사님?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될라 하면 뭐라 해? 저 }○○○교회지? 우리가 돼, 그래. 많은 사람이 하나되는 것은 우리밖에 없어. 많은 사람이 하나되는 건 우리밖에 더 있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라고 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많은 사람이지마는 하나 가지고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합해서 하나가 됐으니 그 숫자는 이름을 하기를 우리라 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요 우리라는 요것을 똑똑히 깨닫고 보면 그라면, 우리라는 걸 깨닫고 보면은 자연히 우리라는 걸 깨닫는 그것이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이 돼.
“우리 주” 우리를 깊이 분석해서 우리를 깨닫고 보면은 ‘주님 한 분밖에 없구나.’ 다 주님이 돼. 모두 가 보니까 다 우리라 하는 전체 천명 만명이라도 다 주님에게 다 머리 숙이고 주님에게로 집합하고, 주님에게 소망 달고, 주님에게 의지하고 바라보고, 주님의 것으로 좋아하고, 주님에게 얻고, 주님에게 피동되고 다 이러니까 이거는 뭐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
우리 한 몸에 여러 세포가 있으면서 하나되는 거와 또 달라요. 그보다도 더 영원히 변동 없는 그런 하나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바로 되면 그 다음에는 주님을 필연적으로 주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되면은 그 우리된 그 전부는 주님 한 분에게 막 집합해 가지고서 거기에 막 속해. 주님 한 분을 향해서 막 전체가 달리게 돼요. 우리가 이것이 바로 되면은 거기에는 아무도 없어. 우리가 바로 되면은 주님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바로 되면은 주님 외에는 바라볼 것도 없고, 소원할 것도 없고, 기뻐할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접선할 것도 없고 하니까 주님밖에는 접선이 안 돼. 이것이 다 필연적으로 되게 된다 말이요, 필연적으로.
이래서 우리가 바로 됐느냐 알라면은 예수 한 분 외에 아무것도 없어. 예수 한 분 외에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다. 자기는 예수 한 분 외에는 구할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고, 뭐 바라볼 것도 없고 예수 한 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이것이 되어지면 우리가 바로 된 것이라. 우리가 되면은 저에게는 예수 한 분밖에는 없어요. 예수 한 분밖에 없으면 그게 우리가 바로 된 거라.
우리가 바로 돼야 그 다음에 주님 한 분 그 주님이 자기 주님이 되고, 자기 주님이, 주님 한 분밖에는 자기 주님이 안 될 때에는 자기 주님이 됐으니까 또 주님 한 분밖에는 자기 주님이 안 되고 주님 한 분만 바라보게 되다 보니까 주님이 뭐인데 이렇게 바라보느냐? 뭐이기 때문에 바라보느냐? 필연적으로 또 그 사귀게 돼요.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뭣인지 자꾸 또 인제 뜯어먹는다 말이오.
알겠소? 주님을 또 뜯어먹고 살아요, 또.
이제 그라면은 주님 한 분 거석하면 주님을, 주님 보니까 이 여섯 가지가 거기에서 나오거든. 거기 나오니까 주님은 영감이시요 진리시요 생명이시요 사죄시요 칭의시요 화친이시라.
그러면 주님은 화친이라, ‘내인데? 내가 이 여섯 가지 입고 있는데.’ 여섯 가지 입고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이 그 여섯 가지라. 그러면 내가 이 여섯 가지 입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 입고 있어. 주님 입고 있어.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이러니까 그만 둘이 분별 못 하면 내가 주님이요 주님이 내라. 주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주 안에 있고. 주님은 나로 살고 나는 주님으로 살아.
이렇게 해서, 몇 번을 해도 예수님의 대속으로서 이렇게 나도 예수님의, 예수님의 대속이 나도 점령해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내가 죽었던 것이 살아났고 예수로 살아났고 이 모든 것도 다 예수로 살아났고 이라니까 이거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고 또, 예수도 떼놓지 못하지, 예수님의 이 여섯 가지 하나로 우리가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떼놓지 못하지 우리 뭉텅이도 떼놓지 못하니 내가 거기에 속할 수밖에 없어.
이 속하는 그것이 뭐이냐? 약한 것이 강한 데 속하면은, 약한 것이 강한 데 속하면은 뉘가 덕 보요? 약한 것이 강한 데 속하면 누가 덕 봐? 약한 것이 덕 봐.
만일 사랑이 아니고 미움의 세계는 약한 것이 강한 데 속하면 어찌 되지? 잡아먹혀 버리지. 그래도 이 가정은 사랑이기 때문에 가정에는 제일 약한 것이 제일 왕이오. 약한 것이 왕. 그런 것이 다 우리에게 자연계시인데.
이래서 필연적으로 우리가 되면은 주님 한 분밖에는 없게 되고 이라게 되면은 그 다음에는 주님 한 분밖에 없으면, 왜 주님이 나는 주님밖에 모르노? 왜 주님밖에 모르노? 이러면 또 예수가 나타나요. 왜 주님? 예수이기 때문에 내가 주님밖에 모른다. 예수이기 때문에.
예수가 뭐인데? 예수가 뭐 했는데? 예수가 여섯 가지 했어. 이래 또 거석해.
이것이 뭐이냐? 내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자꾸 예수님의 대속을 또 되새기고 되새기고 자꾸 되새겨.
이래서 예수님의 피로 동하고, 피로 동한다 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동하는 그것이 내입니다. 새사람 내인지 옛사람 내인지 그것을 뭘 보고 분별할 수가 있느냐? 저 ○목사님? 이거 잘 안 배우고 호랭이만 잡고 상식적 가지고서 자꾸 교인들 호랭이 잡고 큰소리나 하고 이래 놓으면은 뭐 나중에 가서 뒤에 가서 배척당한다. 배척당해. 꼭 하나하나 알아 가지고서 요 진리에 알맹이를 가지고 하나씩 둘씩 따져서 진리의 새끼를 만들어 놔야지, 그거 사람 같지마는, 사람 같지마는 그 사람의 말이요, 그 사람의 제일 껍데기는 가죽, 가죽 속에 뭐입니까? 살. 살 속에 뭐입니까? 뼈. 살 속에 뼈, 그 속에 내장, 내장 속에는 뭐이냐 하면은 진리가 그만 속에 꽉 뿌리를 박아 가지고서 딱 뻗어서, 실은 그것이 그 보니까 이 첫째 아담의 사람 같지마는 속에 둘째 아담의 것으로서 진리가 거기 딱 박아버렸지, 진리로 그 속에 꽉 얽혀 가지고 있지, 영감으로 얽혀 가지고 있지, 새생명으로 얽혀 가지고 있지, 하나님 아들로 얽혀 가지고 있지, 또 무죄자로 얽혀 가지고 있지, 의로 얽혀 가지고 있지, 이래 가지고 얽혀 가지고 있어서, 그러니까 껍데기는 사람인데 알맹이는 보니까 예수라. 알맹이는 예수.
알맹이는 예수라니? 예수라니? 무슨 소리인가? 또 이거 잘못 듣고 가면 ‘우리를 예수라 하더라’ 이라면 그런데, 나중에 뭐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예수가 뭐인데? 예수님의 여섯 가지 대속이라 말이오. 여섯 가지 대속인데 예수님의 여섯 가지 대속으로 우리가 자꾸 이래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몸이라 이랬어. “하나님의 몸이라” 하나님의 몸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몸이라 말은 우리 신자들이 다 하나님의 몸이라 그말인데,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 몸이라 말인데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몸이라 말은,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몸인데 하나님의 몸된 이 개인 교회, 이 가정 교회, 사회 교회인데 이 모든 기독자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몸이라 이렇게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몸을 분석을 하면은, 분석을 한다고 하면은 하나님의 몸인 그 속에는 몇 가지가 들어 있습니까? 네 가지, 어? 세 가지? 어? 네 가지? 세 가지. 어? 네 가지?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분석을 하면은 몇 가지가 들어 있는지? 두 가지 들어 있어요, 두 가지. 두 가지. 첫째 아담의 요소와 둘째 아담의 요소 이 두 가지 들어 있어.
첫째 아담의 요소는 요거는 변하지 안해요. 첫째 아담의 요소는 변하지 안하는데 거기에 둘째 아담의 요소가 뿌리박아 가지고서 첫째 아담의 요소를 전부 다 빨아먹었고 이건 껍데기뿐이지 다 빨아먹고 다 뿌리가 얽혀 가지고 있고 둘째 아담의 물로 가지고서 팍 들여 놓으니까 그만 이거는 보기는 이거 완전히 하나님의 몸이야. 완전히 신화돼 버렸어.
신화됐는데 실은 그걸 탈색을 하면 뭣만 남아요?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우리가 부활 영생해 가지고 사는 그 사람을 만일 분석을 하고 분석하고 자꾸 이래 자꾸 분석하면 그 마지막에 완전히 분석하면 뭐이 나와요? 마지막에 분석하면 뭣 나옵니까? 이거 영, 하늘나라 가서 억천만 년 살다가서, 만일 가정을 해서 분석을 한다고 하면은 뭐이 나오는가? 나오는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 피조물이 나오요. 알겠습니까? 첫째 아담에게 속한 피조물 요소가 나옵니다. 이해가 돼요? 어째? 아직 이해 안 되나? 첫째 아담에게 속한 피조물 요소가 나옵니다. 또 하나는 뭐이냐? 순전히 영원히 자존하신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이 나옵니다. 완전 영원 불변한 것과 이제 이 피조물의 영 아주 변하고 썩어지고 낡아질 이거와 둘이 한테 합했는데 이 세력으로 완전히 삼키워져 가지고서 이와 같이 화합이 되고 보니까 이게 영생하는데 가정으로 해서 분류한다면은 언제든지 억만 년 가도 창조주 피조물은 나뉘어집니다. 피조물이라 하는 거는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요 창조주로 된 것은 그것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 이렇게 오묘하고 기이하고 영원합니다.
이래서, 예수를 다시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나니까 이렇게, 우리가 된 걸 생각하면 깜짝 놀라지, 또 이제 도성인신하신 이 여섯 가지를 우리에게 설정해 주신 주님을 자기의 구주를 삼고 보니까 또 우쭐해지지 기가 차지, 또 이래 가지고 또 한번 예수를 한번 더 새겨 보니까 이거 참 놀랄 일이지, 이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여 나를 만들어 가지고 놨는데 이거 만든 목적이 있으니까 뭣을 어데 쓸라고 하느냐? 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면 ‘내가 뭐할라고 있노?’ 하는 것을 자기가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어. ‘나는 뭐할라고 있는가?’ 자기의 존재 목적이 뭐인가 하는 그것은 존재라는 것은 다 찾는 것이 마련인 것입니다. 이라고 보면은 필연적으로 나중에 ‘나를 그리스도 만들라고 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나를 그리스도 만들라고 하는 것이라’ 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도 필연적으로 돼져요, 자꾸. 자기가 그 분량이 한목 되는 건 아니고.
이것이 이래서 이 돼 나가는 것이 제일 처음에 우리가 완전히 되고, 그 다음에 주가 완전히 되고, 예수가 완전히 되고, 그리스도가 완전히 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완전히 되고, 영광의 아버지가 완전히 되고 이렇게, 하나 완전하고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이 염불하는 중들 염줄 모양으로 한 개 두 개 이어 가지고서 있는 것으로서 이래 자라갑니까 그게 그렇지 안하고 이것이 아주 실을 모아 가지고서 똑 큰 밧줄 다는 것 모양으로 이 가느리한 것이 한 줄 또 한 줄 자꾸 이래 모이니까 커집니다.
이래서 줄을 한 오랭이 두 오랭이 자꾸 합하니까 이제 한 발 되는 이 실을 한 오랭이 두 오랭이 합하니까 이렇게 나중에 가 커다란 이런 밧줄이 되는 것처럼 이렇게 보태는 것처럼 이래 자라갑니까 중 염불줄 모양으로 그렇게 하나 완전히 해 놓고 또 그 다음에 또 이차적으로 완전히 하고 이렇게 염불줄 모양으로 그래 자라갑니까? 이제 줄 합해지는 것처럼 그래 자라갑니까? 어떻게 자라가요? 그렇겠어요? 줄 합해지는 것같이 그래 자라갑니다. 줄 합해지는 것같이 그래 자라가요. 이러니까 이게 세월이 걸리고 자꾸 이렇게 됩니다.
이래서 나중에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우리를 그리스도직을 맡길라고서 하고 있구나.’ 우리의 영원한 그 기업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기업이,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또 하나님의 후사로서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상속시켜 준다 했는데 하나님의 것을 상속시켜 준다는 그것이 곧 뭐이냐? 제사장 선지 왕직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상속시켜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7절 이하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내게 주셨으니 이제 너희들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들에게 말씀한 것을 가리켜 지키게 하라 나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같이 있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맡기신 거는 보니까 처음에 맡기신 것은 왜 처음에는 맡기지 안하고 나중에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맡겼는가?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말 했습니까 부활하기 전에 말했습니까, ○○○조사님? 부활하신 후에 말했어. 그거 잘못 말했으면 코빵 하나 줄라 했는데. 부활하신 후에 맡기셨다 말이요,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신 후에 그 맡겨 준 것은 뭐이냐? 보자 하고서 제사장 선지 왕직을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겨 놨는데 맡겨 놓은 거 보니까 잘했거든. 잘해서 완성을 했다 말이오. 완성을 하니까 그 다음에 이제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일시 맡길 게 아니라 영원히 주님께 다 맡겼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요 영원한 선지자요 영원한 왕이십니다.
이랬는데 주님이 또 우리에게 또 영원한 큰 것을 많은 것으로 맡겨 준다 하는 것은 맡겨 주는 것은 뭣 맡겨 주느냐? 그 돈 맡겨 줍니까, 뭐 이거 부동산 맡겨 줍니까, 동산 맡겨 줍니까? 뭣 맡겨 주요? 이 경치 좋은 금강산 같은 그런 거 맡겨 주는가? 그런 것이 필요가 없어. 그런 건 다 형이하의 것이기 때문에 아주 그것은 그렇게 천한 건데 거기에 맡겨 주는 것은 뭘 맡겨 주느냐 하면은 우리에게 제사장직 선지직 왕직을 맡겨 주는 것이라.
이래서 영광의 아버지라, 영광의 아버지라는 것을 어제 많이 말했는데 영광의 아버지라, 이제 영광의 아버지기 때문에 영광의 아버지라 말은 이분에게서 나오는 것은 전부 영광이다 그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분에게서 나오는 건 전부 영광이다 그 말이오.
이분에게서 나오는 건 전부 영광이라니? 이분이 시키시는 그것은 전부 영광이다.
영광이라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은 모든 존재들이 다 좋아하고 기뻐해서 나한테 칭송하고 찬송할 수 있는 그것만 맡겨 주신다, 이렇게 하는 그것을 영광의 아버지라.
이러니까 어떻게 해서 그라면 영광의 아버지라고 이렇게 그들이 알았습니까? 앞으로 좋은 것을 맡겨 줄 것이라서 영광의 아버지로 알았습니까? 좋은 것을 맡겨 줄 것이라서 영광의 아버지라고 알았소? 영광의 아버지라고 그분들이 어찌 알았어요? 저 우리 ○목사님 사모님, 눈 뜨고 잘 듣기는 듣는데.
어떻게 해서 이들이 영광의 아버지라 했어? 잔인한 아버지, 무정한 아버지 뭐 쌔버렸는데, 무서운 아버지, 너무 엄격한 아버지, 심판의 아버지, 정확의 아버지, 책망의 아버지 이럴 수 있는데 영광의 아버지라고 어떻게 그분들이 영광의 아버지로 모시게 됐을까? 어떻게 영광의 아버지로 모시게 됐지요? 잔인의 아버지로 모시지 안하고? 어제 말했는데. 어떻게 영광의 아버지로 모시게 됐어요? 한번 대답해 봐.
자, ○○○집사 한번 대답해 보지. 또 ○○○목사님 사모님 한번 대답해 보지.
그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 같은데 아주 좀 거리가 있다. 뭐이야? 여기 똑 주일학생 있으면 다 알아, 그만. 주일학생한테 물으면 다 알아요, 딱딱 알아요.
자, 여기에는? 여기에는 어째 영광의 아버지로 모셨어? 어제 그렇게 문제됐는데 낙제라. 또 그동안에 잊어버렸어? 받아보니까. 받아보니까.
그러면 영광의 아버지로 이래 모시게 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이렇게 영광의 아버지인데 자기가 영광의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것은, 모시게 되는 것은 이 믿는 거라 말이요. 믿어야 자기 것 돼. 믿는데 믿는 이거는 무슨 지식 가지고 믿게 됩니까? 자기 지식이 필요해, 자기 지식이. 요거는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이라.
이와 같이 우리로부터 상구 얻은 걸 보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전부 영광이라. 영광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분에게 나온 건 전부 영광인데 영광이라 말은 자기 혼자 좋다 말이요, 다른 사람이 좋음으로 말미암아 그 다른 분이 좋아서 못 견뎌서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영광이 됩니까? 그라면 영광의 아버지라는 것은 자기 받은 것이 자기 좋다 말이요 모든 전체에게 좋아서 좋은 것이라서 모든 전체가 좋아서 자기를 칭송하는 그런 것이라는 그 뜻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여기에서는 뭐이 필요하냐 하면은 필연적이 필요하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하나 하나가 필연적이 돼야 영광의 아버지를 모시게 되지 필연적이 아니면 안 돼. 여기 하나라도 강제로 억지로 자기가 논리적으로 이래 가지고 ‘그렇다’ 이라는 것 가지고는 거기에 무슨 지식이 안 가 있느냐 하면은 이제 자기 지식이 거기서 생겨지지 안했기 때문에 자기가 보지 안했고 듣지 안했고 맛을 보지 안했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기에 모두 다 이것의 기독교의 구원에는 꼭 이걸, 암만 말해도 여러분들이 알기가 참 힘든데, 기독교 구원은 꼭 필연적인 구원입니다. 필연적인 구원. 자기가, 필연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구원을 우리 구원을 만드는 데에는 구원 만드는 방편이 뭐입니까? 구원 만드는 방편이 뭐이지요? 믿음. 구원 만드는 방편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인데 이 필연적을 만드는 데는 거기에 믿음에 무엇이 하나 첨부돼야 됩니까? 진실. 진실 없으면 헛일이라. 기독교는 진실 없으면 제가 뭐 아무리 유명한 부흥사라도 껍데기, 또 자기가 아무리 개혁가라도 껍데기, 아무리 신학자라도 껍데기, 진실 없으면 다 껍데기입니다. 이 진실 없으면.
진실이 뭘 내놓습니까? 진실이 뭣을 만들어 냅니까? 진실에서 뭐이 나옵니까? 진실에서 뭐이 나오요, 저게? ○○교회? 진실에서 뭐이 나와? 뭐라 하노? 승리? 승리? 그런데 핀트가 안 맞아. 삐뚤어져 버렸다 말이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다 필연성인데 그 모든 은혜를 우리가 받는 방법은, 방법은 하나뿐이니 곧 믿음뿐입니다. 믿음뿐인데 그 믿음에다가 진실을 들어붙이면 아는 것도 진실히 알고, 인정하는 것도 진실히 인정하고, 행하는 것도 진실히 행하면, 진실히 행했는지 안 했는지, 진실히 아는지 인정하는지, 진실을 붙이면 필연적으로 뭐이 나옵니까? 성령? 인정? 뭐라 하노? 참 어렵다.
하나님의 것을 받는 데는 믿음으로 받는데 그 믿음은 가짜 믿음도 있고, 또 외식 믿음도 있고, 반 되다 만 믿음도 있고, 이제 칠십프로 된 믿음도 있고 자꾸 이랬는데 그 진실은 백프로 된 것을 진실이라 하는데 백프로 된 진실한 믿음이 되면 거기에서 뭣 나와요? 순종? 어? 그래 여기 하나 대답했어. 자기 지식이 나와요. 자기 지식. 안 그렇습니까? 자기 지식이 나와요.
자기 지식이 나오는데 믿음에다 진실을 거기 보태지 안하면은 그 뭐이냐? 자기 지식이 나오지 안해요. 그 경험과 체험이 안 나와요. 그러니까 해 보니까 되거든.
아브라함이 그분이 믿음의 조상인데 그분이 믿음을 진실되게 가지니까, 진실되게 가지니까 다 경험과 체험이 있거든.
다니엘이 그분이 뭐 사자구덩이 지금 갖다 넣는다고서 왕이 조서를 내려왔는데 조서 보고서 다니엘이 기뻐했다 했습니까 뭐 어떻게 그만 걱정을 했습니까 기뻐하고 감사했습니까? 감사했어. 감사한 거는 그거는 무슨 지식으로 감사해요? 자기 지식으로 감사했어요. 이제까지 겪어본 것이 그분 시키는 대로 해 가지고서 좋지 안한 일이 한번도 없었거든.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이번에 또 이거 온 전국이 시키는 대로 못 하구로 하는데 전국을 거슬려 시키시는 대로 하면은 굉장한 일 생기겠다’ 싶어서 지금 속으로 벙긋거리면서 좋아했다 그거요. 요 꼭 신앙은 경험의 지식 체험의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이 생길라고 하면은 믿음에 진실이 가해 가지고서 진실된 믿음이 아니면 그게 안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실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필연적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다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믿음은 뭐이냐?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기에 우리가 자꾸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가는 것도 그 믿음에 진실을 보태면 그거는 자꾸 믿게 되고 믿게 되고 믿게 되는데 그러기 때문에 암만 믿음 말해 쌓아도 진실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에게 표적을 안 줍니다. 거기서 딱 들어맞지 안하면은 기적을 안 줍니다. 딱 들어맞지 않으면 기적을 안 줘요. 표적을 안 줘요.
기적을 안 준다 말은 뭐라 말인고 하니 인간이 하는 것 아닌, 인간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그분이 하는 것을 가리켜서 기적이라 하는데 거기에 될 대로 믿음이 바로 됐을 때에는 하나님이 ‘바로 됐다!’ 하는 것으로 표적을 줍니다. 표적을 줘요. 표적을 주면 그게 뭐이냐 하면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경험 체험이거든.
그러니까 자꾸 더 믿게 돼 버리요.
이래서 오늘 모두 우리가, 우리가 종전에 내가 배울 때에 그때는 내가 신학교 가 가지고서 좀 고민한 것은 그것이 고민이었었습니다. 왜? 제가 처음에 산골에서 예수 믿을 때에는 그때 앉은뱅이도 일어났고 또 큰 문둥이는 아니어도 다른 사람 모르는 은밀한 문둥이도 나았고 그만 이렇게 이래 했는데, 제가 위천 가서 있으니까 거기에서 모두 다, 조사라 하면 그 사람들하고 참 친하고 심부름꾼이라. 조사면 으례히 학교 무슨 회의나 있으면은 조사 청해 가지고서 한번 강연하고 오고, 또 주재소서도 거석하면 또 강연하고 오고, 인제 강연하는 거는 전부 그 사람들에게 이용당해 가지고서 그런 일 하니까 뭐 친해졌어요.
이라니까 그분들이 좋아해서 다 환영했지만끝서 ○조사님이라고 a해서 환영했지마는 그 교인들이 그만 빠짝 말라 가니까 어떻게 연보가 안 나오는지 그 사모님은 항상 바느질 이래 품들고 또 항상 쌀 꾸러 돌아다니고 이랬는데, 그 위천에 나이 많은 교인 없나요? 뭐꼬? ○집사 알겠네. ○조사 몰라요? 나 가기 전에 있는 ○조사? ○○○집사님은 알 것 같은데? ○조사님 부인 쌀꾸러 다닌 것 알아요? 바느질 품든 것 알아요? 바느질 품들고 쌀꾸러 다녔어. 아주, ○○목사도 알아요? 그래. 그만 그렇게 목회하니까 그 교회는 안 돼서 참 곤란을 당했어.
이랬는데 내가 가 가지고는 가니까 막 인사하러 왔어요. ‘아이구 오셨습니까?’ 인사하러 와 가지고서 떡 청하는데 한번도 안 가. 그 강연해 달라 하는데 한번도 안 가고 ‘자기네들 내가 전도하러 가면 가지만 딴거 안 간다’ 여기 대해서 강연해 달라 하는데 내가 그 강연할 수가 있어야지? 이라니까 그만 그 다음에는 나하고 원수가 돼 버렸어. 거기에 있는 관서하고 원수가 됐어. 뭐 어떻게 밤낮으로 욕을 하는지, 요새도 이 백 목사 이거 참 모질고 독해요. 여러 사람이 욕을 하지마는 그래도 뭐 안 녹아지고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만히 생각하면 참 복 많애. 자꾸 나만 욕을 하는데 욕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나만 욕 얻어먹을 짓만 없으면은 자꾸 그게 상급이 되는데 욕 얻어먹을 짓만 있으면 탈이라. 그러니까 이거 뭐 할 일은 욕 얻어먹을 게 없는 게 할 일이지요.
욕을 자꾸 하는데, 뭐 주재소 있으며 자꾸 욕을 해 쌓고 이래 쌓아니까 못 견디는데, 그래 여기 ○○○목사님 장모님이라. 와 가지고서 ‘그렇게 자꾸 욕을 하고 그러는데 욕하는 순경이 그만 요번에 지금 병이 들어서 막 곧 다 죽어갑니다. 지금 하나님의 벌을 받아 그런 것 같습니다.’ 자꾸 그래 쌓아.
그라면서 ‘데리고 올까요? 그거 지금 그만 이때 낫아 주면 그만 항복을 할 건데 데리고 올까요?’ 이래. 그래 ‘데리고 오라' 했다 말이오. 데리고 오라 하니까 인제 데리고 왔어.
아침을 먹기 시작하니까 왔어. 얼마나 콧대가 높은 사람들인지? 그때 뭐, 지금과 달라요. 경관이라 하면. 그래 아침을 먹으면서 거기 앉혀 놓고서, 막 볼볼볼볼 떨어 쌓아며 지금 죽을라고 쌓는데 앉혀 놓고 아침 다 먹고, 다 먹고 이래 가지고서 ‘어째 그래?’ 이라니까 뭐 어짜고 그래. ‘그래 그라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거 있는가 그런 거 회개 좀 하지.’ 그라면서 그래 내가 기도해 줬어. 두 마디 기도해 주니까 그만 벌떡 일어나 버려. 뻘떡 일어나고 그만 괜찮애. 그래 가지고 이 소문이 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 핍박이 하나도 없어. 그게 인제 그런 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이러니까 우리 이 집회 요번에 대구집회에서도 오백삼십 명인가 사십 명인가 병이 나았어요. 백삼십 뭐 다섯 종류든가, 병이. 이래 나았는데 그런 것을 자꾸 자기가 예수 믿으면서 개인적으로, 왜 엊저녁에 요거 자꾸 읽어보라 하는 것 다름이 아니라, 보니까 ‘하나님이 저렇게 그 사람에게 직접 와서 저렇게 역사해 주는구나’ 하는 것을 다른 사람 보고 ‘나도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해 주시면, 대통령이 와 가지고서 자기 집에 와 가지고서 대통령이 와서 뭐 많은 거 주나 적은 거 주나 대통령이 자기 집에 와 가지고서 한번 방문만 했다면 그만하면 그거 크지 안해요? 대통령이 그 집에 만일 여기, 여기 주상면이가? 주상면에 대통령이 역부러 그 집에 와 가지고 한번 방문했다 하면은 말 안 해도 그 집에 뭐, 무엇이 자꾸 끼역끼역 들어갈 겁니다. ‘아이고 저 사람이 대통령하고 그러니까’ 당장 여기서 모두 지방장관들이 다 이렇게 높일 것이고, 그거 뭐 필연적이지.
경주에 이 박사, 이 대통령 양아들, 가짜 양아들이 거기 와 가지고서 양아들 왔다 해도 막 그때 굉장했는데, 귀하신 몸이 어떻게 오셨느냐고서 그 굉장해서 한때 노래가 있지 안했어? 이러니까 그분이 와서 한번만, 대통령이, 대통령보다, 하나님이 크요 대통령이 크요? 하나님이 크지 안해요? 크지요. 이런데 그 대통령이 와서 한번 이래 방문을 해서 역부러 와 가지고서 ‘감기 들었다 했기 때문에 내가 왔다. 네가 감기 들었다 하기 때문에 내가 왔다.’ 이라면서 감기약을 주고 가는데 그만 감기가 나았다 말이오.
나았는데 감기 나은 그게 큰 게 아니라 그 대통령이 역부러 감기 났다고 찾아와 가지고서 감기 낫는 약을 줘서 치료를 해 주니까 이제 그게 막 소문이 나. ‘그 사람이 감기 들었다고 저 서울에 대통령이 와 가지고서 어떻게 감기약을 줘서 치료를 했단다.’ 그러면 감기 나은 게 크요 그분이 와서 치료한 게 크요? 굉장한 세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라면 그만 다 알아 길 거라, 뭐. 그래 놨으면 뭐 그 집에 별게, 공연히 알아 기고 ‘아이고 부디 잘봐 주십시오.’ 이것 뭐 이래 가지고서 다 자기에게 어려움 다 면해 달라고 뭐 출세해 달라고 잘봐 달라고 오는 게 자꾸 많을 거라 말이오.
이런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와 가지고 자, 크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와 가지고서 찾아와서 해 주셨으면은 큰 걸 해 준 것과 작은 것 해 준 것과 뭐 다릅니까 같습니까? 같애, 같애. 그분 오신 게 커. 오셔 가지고 한 게 크다 말이오.
이런데 이것을 말을 하면은 모두 듣기 싫어해.
듣기 싫어해서, 내가 그때 그만 처음에 한 것을 냅뒀더니만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서 기도를 안 주시고 대답 안 해. 하나님이 그만 섭섭해서 그만 돌아가요.
하나님같이 잘 삐꾸는 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은 안 삐꾸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다가는 참 혼납니다. 생전 못 만나요.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뭐와 같다 했습니까? 사슴과 노루와 같다 했어. 그 사슴 노루는, 사슴 노루의 특성은 뭐이 있는고 하니 사슴 노루는 이 가다가서, 노루가 보리 뜯어먹는 데는 허연 말뚝을 깎아서 이래 세웁니다. 세우면 이놈이 가 가지고 이 풀을 뜯어먹어. 보리를 뜯어먹다가 눈을 뻐뜩 드니까 뭐이 허연 말뚝이 섰거든. 그만 깜짝 놀라 가지고 뛰기 시작하면, 어데가 한정입니까? 저 봉산 사니까 알지? 어데까지가 한정이지? 놀라서 뛰면 어데까지 가지? 어? 산꼭대기. 산꼭대기까지 도망쳐 버려.
그만 그것만 보면 어떻게 놀래서, 자기 생각에 없는 것 말이요, 자기 뜻밖에 뭣이 하나 나타나면, 뜻밖에 뭣이 하나 나타나면 깜짝 놀래 가지고 뛰기 시작하면 뭐 어짜든지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저 산만당에 올라가 가지고야 뒤를 돌아봐.
올라가 가지고. 이래서 주님은 노루와 사슴 같다. 사슴도 그래요.
주님에게 삐뚤어진 거 하나 있으면, 삐뚤어진 거 하나 있으면은 그만 홱 달아나면은 뭐 어데까지 달아나는지 몰라. 노루 사슴 모양으로 그만 어데까지 그만 달아나느냐? 안 보이는 데까지 달아나 버려, 그만. 이러니까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사슴과도 같도다” 아가서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이러니까 암만 찾을라고 하고 사귈라 해도 사귀어지지도 안하고 자꾸 기도할라 하면 잠만 오지 뭐, 암만 기도할라고 몸부림을 치고 뭐 무릎을 꿇었다가 했다가 내가 고통을 많이 당했어. ‘이거 뭣 때문에 그런가? 주님이 뭣 때문에 이렇게 섭섭해서 돌아가셨는가?’ 자꾸 이래 찾으니까, 그때 또 인제 ‘주님, 그뭐 집회에 갔다 와서 은혜를 주시고 어짜고’ 이런 걸 말하니까 아예 들은 척 만 척해요.
들은 척 만 척해.
그라는데 내가 또, 그때 작년 오월 집회라. 작년 오월 집회인데 오월 집회 하고 났으니까 또 팔월 집회가 있는데 팔월 집회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아예 듣지 안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니까 ‘아하, 하나님이 이렇게 그때는 한, 제일 많을 때 얼마라? 칠백? 칠백사십 명이라. 그때 많아 칠백사십 명이 나았는데 여기에 대해서 그뭐 나은 걸 또 이 우리 교역자들은 ‘아이구 목사님 자꾸 병낫는 그것만 지금 자꾸 하고 있으면 나중에 가서 병신만 와그르르 모이면 어찌 됩니까? 병신 와그르르 모이면 병신 모아 가지고 낫지도 안하고 죽어서 초상치면 뒤에 가서 뭐 그 기도실에서 죽였다 하고 뒤에 가서 후유증이 굉장히 클 것인데 어떻게 하실랍니까?’ 자꾸 옆에서 이래 쌓지, 이러니까 말을 못 낸 거라.
그것 또 ‘하나님이 이렇게 이적을 했다’ 하면은 ‘또 제 자랑한다, 이 백 목사 제 자랑한다.’ 이라니까 이거 입을 벌리지 못하고 이거 그냥 묻어 둬야 돼. 칠백 명이 나았든지 팔백 명이 나았든지 그만 거기 대해서는 말을 안 해야 되지 말하면 안 된다 그 말이오.
이라는데 하나님께서 ‘너 이놈아, 네가 거기에서 영병 고친 게 얼마며, 마음병 고친 게 얼마며, 고기덩어리병 고친 게 얼마인데 고기덩어리병 고친 것만 해도 칠백여 명인데 네가 거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노? 내가 한 일은 네가 얼마나 멸시를 하고 천대를 하노? 네가 내가 한 것을 이 세상 뭐 권력가가 한 만치라도 알아 주나?’ 이렇게 자꾸 그만 해 대는데 내 속에 해 대는데 내가 견디지를 못하겠어. ‘주님이여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내가 지금 그걸 당장 책자를 만들어 가지고서 양사방 광고를 하고 자꾸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그 책자를 만들었어요. 만들어 가지고서, 그때 몇 권 만들었노? 천 권 만들어 가지고 다 팔았어? 천 권 만들어 다 나갔어요. 천 명에게는 그것을 했거든. 하나님이 그 다음부터는 나를 교제를 해 주시요. 좋아하시고 이래서, 그 다음 내가 알았거든. 이래서 어데, 그후에 팔월 집회 것도 만들었지, 또 금년 오월 집회 것도 다 만들었지, 오월 집회 거는 조그매 오백 권만 만들었는데 그만 우리 서부교회 교인들은 그 맛을 봐 놔서 다 살라 하니까 뭐 거기만 팔아도 모자라겠어. 그래 나중에 ‘팔지 말아라’ 못 팔게 했어.
여기 와서는 지금 인제 그걸 다 모든 사람이 알고, 주님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사랑하며, 주님이 우리 인생과 예수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얼마나 가까우며, 얼마나 밀접하며, 얼마나 친밀하게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고 우리에게 쉽게 사귀고 역사할 수 있는가 하는 그것을 그 흔적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래 하는데 여기서는, 가져온 게 몇 권 가져왔어? 다 팔고 거기서 못 팔게 해 백오십 권 가져왔는데 여기서 지금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지금 제법 많이 남아 있어. 얼마 남아 있어? 반 남았대요. 그러니까 그만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귀중히 여기지 안하는 그 차원이 그렇게 있다 그거요. 알겠습니까? 여러분들 그걸 가지고서 ‘하나님이 이렇게도 역사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와 가지고 그렇게 역사하시는 거라. ‘이 사람은’ 자, 그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예를 들어서 누운뱅이라, 누운뱅이 병이면 누운뱅이 병에다가 또 소경병에다가 또 감기병에다가 이 세 병을 거석했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보실 때에 당신이 와 가지고 치료하시는 것은 꼭 누운뱅이 병을 고치는 것과 감기병 고치는 것과 당신이 와서 치료해 주셨다고 하면은 그 고친 데 대해서 그 가치가 누운뱅이 고친 게 가치 큰 겁니까 감기 든 거 고친 게 가치 큰 겁니까, 누운뱅이 고친 거나 감기 고친 거나 전능자가 와 고쳤으니까 가치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애, 같애.
같으니까 이분이 가만히 생각하기를, 내가 저한테 친근히 가 가지고서 이렇게 해 주는 요거를 알리면 되는 것이지,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한다 하는 가까운 걸 알려 표적만 나타내 보이면 되지 누운뱅이 이걸 아직까지 살려 놓으면 누운뱅이 이게 날아 돌아다니면서 굉장한 뭐 몇십 배나 죄를 짓고 돌아다닐 것이고 이거 또 소경 눈이 떠 놓으면 이거 굉장할 터이니까 이놈을 고치고 난 다음에 고쳐 줘야 되지 이 누운뱅이 소경 눈만 띄워 놓으면 안 될 거라.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제일 쉬운 것 약한 것, 고쳐 봤자 별 피해는 적을 것 그것을 고쳐 주시는데 고치는 그 능력은 전능자기 때문에 작은 걸 고쳐도 당신이 와 고쳐 주셨으니까 고친 표적만 보이고 그 사람에 화를 만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제 사소한 그런 병을 고쳐 주셨다 그거요. 이해가 돼요? 이해가 됩니까? 말쟁이로 꿰 맞춘 거요 이해가 돼요? 이해가 돼요? 이해가 돼. 이해가 돼요.
그래요! 다 그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것은, 그러기 때문에 이 표적은 믿는 자에게 있다고 했습니까 믿지 않는 자에게 있다고 했다고 했습니까? 어? 믿는 자에게 있다 말도 맞소. 믿지 않는 자에게 믿을 때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믿을 때에 표적을 턱 나타내 가지고 ‘네가 안 믿을 때는 안 되지? 요래 믿으니까 되지 안했느냐?’ 해서, 믿지 않는 자를 믿는 사람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표적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표적이라고 성경에말씀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당신이 착수하는 것이거든 감기든지 뭐 조그만한 어떤 것이라도 예수님에게 기도해 가지고서 예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 주신, 기도를 들어 주신, 기도를 들어서 이루어 주신 그것은 내가 인간이 하지 안하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한 걸 알 수가 있다 말이오. 한 것은 그것은 표적입니까 표적 아닙니까? 기적입니까 기적 아닙니까? 초자연의 능력이 한 것입니까 인간이 한 것입니까? 초자연의 능력이 한 것이라.
이랬는데 예수님의 초자연의 능력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신 그런 경험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신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한번도 없는 사람 그라면 해 줄 터이니까 손 들어 봐요. 그라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오셔 가지고서 전능의 능력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큰 일이나 작은 것이나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한번이라도 하신 그 표적을 본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아이고, 이렇게 다 들었는데 이제 여기에는 뭐이냐 하면은 이렇게 보고도 이러니까 맷정밖에는 없어. 매밖에는 맺을 것이 없어.
하나님이 와 가지고 다 이렇게 자기에게 뭐, 부인할 수 없어. 자기에게 다 왔으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와서 다 해 주시고 이렇게 하나님과 자기와 밀접하고 친밀하고 자기의 모든 소원을 들어 주시는 이분이 계시는데 왜 이분하고 의논하지 안하고 아무 힘없는 그런 것들하고 의논할라고 자꾸 하고 있어? 이분하고 의논하지 안하고.
이러니까 이뭐 표적 이거 읽을 것도 없구만, 다 경험했으니까. 이러니 우리 기독자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것을 만홀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십니다. 알겠습니까? 자,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제일 큰 계명이 뭐입니까? 무슨 계명이요? 십계명 아니요? 기독교의 제일 큰 계명은 십계명 아니요? 십계명이 기독교의 강령 아닙니까? 십계명 아니요? 틀려요? 십계명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한 데 대해서 제일 큰 계명이 십계명이 큰 계명 아닙니까? 십계명 아닙니까? 십계명 초두에 뭐라고 말했어? 어? 그보다 더 초두 있어. “하나님이 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애굽땅 종되었던 데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게 초두에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당신의 하신 그 흔적을, 흔적을 무시해 버리는 거 그보다 더 분하게 여기는 게 없어. 성경에 보면 다 그거 전부 그겁니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 했는데 그걸 네가 무시했다. 내가 언제 요전번에 너한테 말했는데 네가 그걸 무시했다. 내가 너한테 말한 것을 네가 잊어버리지 안하고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그것을 기억하고 잃지 않는 것을 그분이 그렇게 좋아하시고 당신이 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을 그렇게 노여워하십니다. 알겠습니까? 그러기에 자기의 신앙 생활에 일생 동안 똑 지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그거요. ‘주님이 아무 요전번에 나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이걸 모르고 했는데 그때 나에게 이렇게 내가 꾸중하신 것을 내가 압니다. 그때 꾸중들은 걸 압니다. 내가 그때 꾸중들은 걸 내가 잃지 안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이것으로써 꾸중을 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꾸중들을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이럴 때에 당신이 내가 감기 들었을 때에 당신에게 내가 기도했더디마는 당신이 나에게 낫아 주셨습니다. 내가 무슨 존재인데 만유의 대주재이신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요, 전지 전능자요, 대주재요, 주권 개별 섭리자요 이런 분이신데 당신이 내가 이 감기로 아파서 못 견뎌서 구하니까 당신이 낫아 주셨습니다.’ 이것을 평생 씹습니다, 평생.
‘주여,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랄 때에 당신은 좋아하시고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걸 자꾸 이렇게 자꾸 이래 말하니까 당신도 칭찬받기를 좋아해 그래요 뭐라요? 당신 칭찬받기 좋아해요? 당신도 이렇게 추켜 올리니까 좋아하는가? 어째 그렇지요? 당신을 추켜 올리면 당신이 좋아하니까 당신도 칭찬받기를 좋아해서 그런 걸 말하면 그만 하나님이 벙긋벙긋 하시면서 좋아서 뭐 좋아서 아무 가린 것 없이 그만 친근하게 교제를 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귀는 법이 있어요. 이러니까 모르는 사람, 이 사귀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뭐 단식하고 금식하고 암만 해도 못 사귀어. 주님 만나면 그만 속닥속닥하면 그거 그만 주님하고 딱 들어붙어 버려. 교제하는 중에 하나도 그것입니다.
그거는 어째요? 당신이 당신을 추켜 올리면 칭찬을 좋아하셔, 당신도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셔서 그래요? ○○선생? ○○○선생? 칭찬받는 걸 좋아서 그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에. 욕심쟁이로구만. 영광 나타나기 위해 하니까. 또 저 ○조사? 봉산 ○조사? 대접 받으니까 좋아하는구나. ○장로님? 아버지께 영광 돌아가기 때문에. 참 어렵다. 견해가 다르다.
누가 대답을 잘할 사람이 있나? 저 목사님 어데서 오신 목사님이요? 나는 잘 몰라요. 그러니까 섭섭하게 생각지 말고. 어데 교회서 왔어요? LA서 왔어요? 먼데서 왔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베푸신 것을 ‘언제 요전번에 당신이 이렇게 해줬습니다. 내가 밤에 급해서 내가 구했더니마는 당신이 이렇게 나를 들어 줬습니다. 내가 어데 갈 때 되게 외롭고 무서웠더니마는 기도하니까 당신이 나를 보호해서 나에게 평안을 줬습니다.’ 자꾸 이래 쌓으면 당신이 좋아하시는 것은 그것은 당신을 추켜 올리고 칭찬하니까 그래 좋아하십니까 왜 그래 좋아하실까? 뭐라 하노? 상속받기 때문에. 엔간히 멀게 범위 넓게 뛰기는 뛰는데, 호베호베 거기서 하지 안하고 멀리 뚝 뚝 뛰어서 좀 대답이 범위 넓게 이래 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그 안 맞았어. 만점이 아니라.
어?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어? 뭐라 하노? 구원할 뭣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지요? 자, 예? 녜, 저게서 툭 튀어나온 대답 하나 있는데 그럴듯 하다. 주기 위해서, 주기 위해서. 알겠어? 주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왜? 그러면 자꾸 당신이 그렇게 알면 자꾸 그거 새김질하면은 이제 주님을, 주님이 우리 교만해 가지고 그렇지 안하고 자꾸 사귀기를 원하는데 이게 사귀지 안하니까 그라면 야 그걸 말하면 자꾸 주님과 우리와가 가까와지기 때문에 주님의 그 무한하심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대로 다 줄 수 있고 우리는 받을 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자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많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좋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 그거 기뻐하신다 그 말이오. 이 대답이 맞아요 안 맞아요? 대답 맞아요 안 맞아요? 맞습니까? 맞아요. 거기 대답 잘했어. 저 뭐꼬, ○○교회 전도사가? 소리는 똑똑한데 나중에 교만하면 뒤에 툭 떨어진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잃지 않는 것을 이렇게 좋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문서적으로 이렇게 접촉한 것은 오순절 될 때에 십계명 주신 것입니다. 오순절에 십계명 주신 것. 주실 때에 십계명 선두에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 애굽 땅 종되었던 데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렇게 말씀하셔서 거기서 인도한 것을 그렇게 먼저 말씀하시고 ‘인도한 것을 네가 잊어버리지 말고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신 그것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좋아하시는 것은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그말입니다. 제일 당신이 좋아하시는 거는 우리에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오.
이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멸망을 받고 가나안에 가지 못한 그 이유가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일을 할 때뿐이고 그만 그 다음에 잊어버리고 하고 나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자꾸 잊어버려 가지고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거, 열 가지 재앙에 하신 것이라든지 그 모든 기적 나타내신 그것을 이제는 아는가 싶어서 또 하나 나타내면은 ‘아이구 그건 내가 될까 모르겠습니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이라니까 ‘과거에 내가 그렇게 해 줬는데 너에게 안 해 주겠느냐? 내가 너한테 시켜 가지고 나쁜 게 뭐 있느냐?’ ‘그렇지마는 과거에는 그랬기는 그랬지마는 이번에도 그럴란지 안 그럴란지 그거 좀 모르고 의문이 됩니다.’ 그게 뭐이지요? 뭣 하는 것이지요? 그게 뭣 한 것입니까? 그게 시험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것. 항상 이미는 그렇지마는 ‘이번에도 될까? 이번조차 될까? 이번조차 될까?’ 한번 한 그것으로 믿지 안하고 ‘그때야 그리 됐지마는 이번에도 그리 될까?’ 이라다가, ‘이번에도 그래 될까?' 하다가 되면 ‘아이구 과연 그렇습니다.’ ‘될까?’ 하다가 의심하다가 되니까 `아, 예 됐습니다.' 하는 그게 시험이라 말이오. 알겠습니까? 그게 시험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그거 제일 미워했습니다.
그것 제일 미워했어요.
뭐 우상 섬기는 것도 미워했고, 간음하는 것도 미워했고, 우상의 제물 먹는 것도 미워했고 이랬지마는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했는데 하나님을 시험하는 걸 미워했습니다. 그 전부를 다 총칭하면은 믿지 않는 것이라 그 말이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진실을 믿고, 하나님의 신실을 믿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 것, 한 번만 말씀해도 믿는 게 더 가치 있는데 한 번 해 주는 거 봤으면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 믿어드려야 될 터인데 암만 해도 믿지 안하니까 하나님을 믿지 안하니 하나님을 업수이 여기는 것이라.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업수이 여기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오. 생명이 끊어지는 그런 일을 닥칠 때에도 믿는 것은 그거 뭐이냐 하면은 생명보다 당신을 믿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순교자가 제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신 걸 여러분들이 잃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이유가 다른 사람 한 것도 좋지마는 자기에게 대해서 하신 일, ‘언제 무슨 일을 하셨다. 언제 무슨 일을 하셨다. 언제 무슨 일을 하셨다.
하나님이 언제 이럴 때에 나에게 이렇게 해 주시더라. 나에게 이렇게 해 주시더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 걸 자꾸 열거를 해 놓습니다.
전부 기록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해 주시더라. 하나님이 이럴 때도 나는 그때 나는 믿지 안하고 의심하고 낙망했는데 하나님이 그 뒤에 이렇게 해 주시더라.’ 자꾸 이런 거를 쭉 기록을 이래 해 가지고서 그걸 ‘하나님은 과거에 내게 대해서 이렇게 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맺은 이것을 다 잊어버리지 안하고 낱낱이 기억해 가지고서 이걸 들먹일 때에 당신은 기뻐하십니다. 됐다 말이오. ‘내가 너한테 준 것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그걸 자꾸 기억하고 있을수록이 앞으로 당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자꾸 돼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으니까 되는데 못 믿구로 해 가지고 멸망을 시키는 게 마귀 작전인데 이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하신 것 또 잊어버려 버리고 또 잊어버리고 자꾸 잊어버려 버리니까, 아무리 은혜받았지만 잊어버리니까.
어떤 인간은 아무리 해 줘도 해 준 거는, 해 준 것은 다 잊어버려. 남에게 얻은 거는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봉사해 준 은혜 베푼 것은 다 잊어버리고, 봉사 베푼 것은 집채같이 봉사를 베풀고 은혜 베풀어도 그건 다 잊어버리고 제가 남에게 콩쪼가리만한 은혜 베푼 것도 그거는 항상 잊어버리지 안해. 그거는 항상 잊어버리지 안해. 그자는 어떤 자입니까? 그자가 어떤 자요? 악 중에 악자.
자, 따라합시다.악 중에 악자!악! 악! 악자! 그게 자기 중심이라.
네로 황제가 로마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여 놓고 제게 큰 고통이 당하니까 이제, 그 사실은, 성경이 아니지마는. 눈물을 받으면서 ‘에이고 내 눈에 눈물이 난다.’ 이러니까 제 희생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제 희생은 털끝만한 희생이라도 크게 여기지마는 다른 사람이 저에게 은혜 베푸신 그것은 도무지 크게 여기지 안해.
제가 남에게 가해한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이 자기 가해된 것만 생각하고 하는 그게 다 악인데 다 사망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것을 우리가 낱낱이 기억하고 잃지를 맙시다. 그것을 자꾸 기억해서 생각하면 하나님과 가까와져요.
‘하나님이 언제 요전번에 나에게 이렇게 했다. 이렇게 했다.’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당신과 나와의 밀접한 것을, 밀접한 것을 자꾸 알게 되고 밀접한 걸 알수록 그분을 더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렇게 쉽게 친밀하게 화친해서 그 모든 교류가 되기 때문에 그분에게 얻어지고 또 내가 구하는 관계가 밀접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 기적의, 제일호가 몇 건이요? 일호가 몇 건 됐지? 칠백사십, 또 이호가? 이호가 삼백십팔, 또? 삼호가 사백이십, 또? 사호가 사백오십. 이런데 이걸 자꾸 이렇게 기록해 가지고서 읽어보는 것은 자꾸 읽어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자에게 이렇게 해 주시는구나.’ 이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이렇게 하셨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이렇게 하셨다. 엘리야에게 이렇게 하셨다. 또 에녹에게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아벨에게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하신 그것을 자꾸 이렇게 보고 앎으로써 자기가 깨달을 게 있고 하나님과 자기와 밀접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오백 권을 기록했더니마는 그만 광고하니까 당장, 어느 날 팔았나요, 그거? 어느날 팔았어? 금요일날 팔았는데 금요일날 그날 삼백오십 권이 나갔는데 그만 나중에 거석하면 하나도 없어버려요, 그거. 하나도 없는데 전부 다 우리 다 갈라 할라고 ‘이제 지금부터는 와도 주지 말아라’ 이래서 그만 판매 중지를 해 버렸어. 이래 가지고서 백오십 권 남궈 가지고 왔다 말이오. 이런데 여기에서는 못 팔아서, 돈 벌라고 하는 거 아니라. 돈 버는 게 아니라 그거 돈 일전도 안 남아요, 손해만 가지. 돈 벌라고 하는가 싶어서 사 주는 줄 알지, 사 주는 줄 알 거라.
여러분들, 그래서 어짜든지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지혜를 써 가지고서, 참 아까 말하기를 ‘믿음에는 사양 말고 믿음에는 욕심 품어 하나님의 뜻을 일으키자’ 그렇게 찬송했는데 그런 것도 자꾸 좋아요. 왜? 사람이 기독교 성현전을 읽으면, 기독교 성현전을 읽으면 점점 기독교 성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기독교 이적 서적, 하나님의 이적 서적을 자꾸 읽으면 이적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믿고 난 다음에 산다싱 서적을 좀 읽었습니다. 읽고 나서, 읽고 나니까 산다싱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해요. 동물도 그렇게 하고 다 그래요. 지금은 다 그만 내가 그걸 그만 먼데 와서 이 부산 와 가지고서 영 그만 백 조사 그만 버려놓은 것 같애. 그때는 참 재미가 있었는데.
내가 한번 왜정 말년인데 어떤 의사하고 한번, 저 거기가, 뭐꼬? 둔터재가? 둔터재를 넘어갔어요. 둔터재를 둘이 넘어갔는데 이래 가서 거기 가서 척 앉아 가지고서 찬송하고 기도하니까 그때는 또 뭐 까마귀 까치떼가 막 공중이 새까맣도록 그만 모여들어요. 뭐 공중에 햇빛이 안 보이도록. 그렇게 모여들어 가지고서 뭐 좋아서 춤을 추면서 지저귀고 그래 쌓아니까 그만 이분이 그만 혼이 났어. ‘아이쿠야, 이래 하는 게 뭐 일났나?’ 그래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오는 것을 기뻐해서 그러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또 우리가 가면 다 저거 다 가 버립니다.’ 그때는, 후란시스가 이렇게 할 때에 그 모든 새들을 사랑하고 새들하고 얘기하니까 후란시스한테 새들이 와 가지고 서로 얘기하고 이라는데 그것 보고 ‘그 후란시스 누구며 나는 누구냐? 후란시스도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같이 받았고 나도 받았는데 다를 게 뭐꼬?’ 이래 가지고 나도 새하고 얘기하기를 시작했어요. 이래서 둔터재 넘어가면서 항상 거기 가면 저 앉으면 그만 새들이 와요. 우 오면 또 이야기해요.
‘나는 너의 주의 대속을 받은 내인데 나는 너거 주인이야. 앞으로 너거 주인 될 자라. 너는 내것인데 내가 너를 사랑하지 해하지 안해.’ 뭐 와 가지고서, 후란시스에게는 어깨에도 앉고 뭐 이래 가지고 막 와 가지고 이랬는데 나는 독이 있어 놓으니까 그놈들이 와도 그렇게 오지 안해요. 요 옆에 말이지요, 요 손을 내 가지고 얼핏 잡으면 잡을 수 있는 그만치 와요. 그만치는 와도 어깨에 앉고 이래 안 돼. 후란시스는 어깨에도 앉고 머리에도 앉고 막 앉았어. 그놈들도 알거든.
내게는 향기를 피우는데 독이 있으니까 그렇게 그만치 오기는 좀 안심이 안 되니까 안 온다 그거요.
여러분들이 그거 느끼지 못해요? 산에 가서 기도해 보십시오. 내게 주님과 가까와지면, 주님과 가까와질 때는 의외에 없는 새들이 와서 좋아하고 막 지저거리고 노래를 불러 줍니다, 주님과 나와 가까와질 때에. 내 믿음이 떡 식어져 주님과 나와 가깝지 안하고 멀어질 때에는 새 한 마리도 안 와요. 새 한 마리도 안 와. 왔다가는 픽 달아나 버리지 안 와요. 이래 만물이 우리보다 지혜가 더 있어요. ○목사, 그런 꼴 봤어? 다 봤을 거라.
내가 요새 언제 보니까, 그 사람은 예수를 잘 안 믿는 사람인데 집사는 집사라.
그래 예수 잘 안 믿어요. 잘 안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만 그 무슨 부도 고장이 나 가지고서 꼼짝할 수 없이 산골짝에 들어 가지고 있는데 그만 사람이 변화가 됐어. 내가 떡 한번 가니까 뭐 나를 그렇게 좋아해요. 그렇게 좋아해.
아이들도 압니다. 아이들도, 아이들 생전 처음 봐도 목사 좋아하는 건 그 희망이 있어, 복을 받아요. 암만 처음 봐도 아이들도 목사 싫어하는 거 있어요. 싫어하는 그거는 속에 귀신이 들어 그래.
그래, 이래 오더니마는 기도하고 나니까, 기도하고 나니 내가 떠나면서 그래 ‘그라면 자, 계십시오.’ 이래 악수를 하고 나오니까 손을 안 놔. 손 안 놓고 꽉 거머쥐고 있어. 이래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 가지고 있는데 내가 확 뿌리닿지도 못하고 뭐 손 놓구로 기다리지 어짜겠어? 그래 가지고 있으니까 자꾸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뭐 훌쩍훌쩍하더니만 나중에 보니까 장판 바닥에 눈물이 흥건해, 얼마나 거머쥐고 울어놨던지 말이지.
이러는데 그분이 떡 있더니만 ‘목사님, 가서 있으면 난데 없는 새들이 와아 옵니다. 새들이 와 가지고서 지절거리면서 그렇게 장시간 동안을 그렇게 별 소리를 다 하면서 노래를 불러 주고 그래 갑니다.’ 그래 인제 가서 새떼 와 가지고서 만나는 것이 하나의 재미라요. 만물은 그러합니다. 그거 주관이 아니라.
그 주관이 새 그놈이야 뭐 내 주관대로 하겠소? 우리가 초목은 볼 때 ‘초목이 나를 보고 기뻐한다’ 이래 하는 것은 내 주관이라 할 수 있지마는 새 그놈이 먼 데 있는 놈이 날아와 가지고 그래 하는 것이야 그거 내가 주관으로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이 날아왔으니까 그거 객관 역사 아니요?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을 좋아합니다. 좋아해요. 주님은 참 좋아. 주님만 속에 들었으면 좋아.
내가 오랫 동안에 한번 반한 여자 있어. 반한 여자 하나 있다 말이오. 이래 놓으면 이 목사도, 내가 반한 여자 하나 있어. 서부교회는 다 알아요. 그 처녀가 열여덟 살 먹는데, 내가 나이를 물으니까 열여덟 살 먹어. 열여덟 살 먹는데 이 눈이 어둡습니다. 어두워서, 이제 운명한다고서 나를 한번 꼭 보기를 원한다고 쌓아서 그래 한번 갔어요. 평소에 내가 만나도 혹 제가 인사하면 이러지 내가 벌로 봤었는데 가니까 그때 갈 때라.
갈 때인데, 어떻게 주님을 사모하는지? 어떻게 주님을 사모하고 뭐 하는 것이 주님을 사모하는데 주님하고 둘이 접촉하는 거 같애. 주님을 사모하니까 나도 보니까 그만 그 처녀에게 반했다 그 말이오. 어떻게 좋은지. 빠짝 말라 가지고서 이라면서 누웠는데 주님을 그렇게 사모하니까 나도 좋아서 얼마나 좋아졌던고, 얼마나 좋아졌던고 그만 그 처녀 갈 때에 나도 함께 그만 주님의 나라에 그만 가 버리면 싶었어. 그 속에 주님이 계시니까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좋아서 거기서 장시간 그로 더불어 같이 기도하고 이라는데, 그라고 나서 며칠 있다가 세상을 떴어요.
그랬는데 나만 그래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마는 가는 사람마다 그렇게 좋아서 그만 그 처녀를 만나면 모든 게 다 없어지고 평안하고 즐겁고 해서, ○○○ 끄떡이는데 너도 한번 가 봤어? 두 번 가 봤어? 가 보니까 좋더나? 너도 반하겠더나? 그래. 저 처녀도 그 처녀한테 반했대요.
여러분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계신 것만치 만물이 좋아합니다. 만물이 좋아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모든 성도들도 다 좋아해요.
그 속에 주님이 계시는 그 성도 좋아하지 안하는 사람 없어요.
이러니까 주님이 그 안에 계셔서 참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몸이 되고, 이래 돼 놓으면 그 사람이 저 덕유산 꼭대기 가 있으면 뭐 그 덕유산이 대로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못 견뎌, 가고 싶어서. 이렇게 주님은 좋습니다. 주님은 좋아 주님이 자기 안에 그 사람 속에 있으면 사람들이 보고 좋아서 못 견뎌요. 만물도 좋아하고 새도 좋아하고 다 좋아해요.
이렇게 주님을 좋아하는데 이 강가에 가서 앉아 가지고 이래 떡 가 가지고 거기서 기도하고 있으면은 주님이 좋아하시면 어데서 오는지 고기떼가 와 가지고 어글어글해. 어글어글해 가지고 막 와 가지고 저거들이 와 가지고서 그뭐 좋은 데도 없는데 와 가지고 있어. 그런데 다른 때는 가 보면 한 마리도 없어요.
우리가,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모든 어두움은 물러가고 생명만 충만하기 때문에 산 것은 다 좋아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다 좋아합니다. 이래서 후란시스는 그렇게 모든 만물과 교제를 그렇게 했어요.
후란시스는 믿음으로 기적을 많이 봤어요. 기적과 표적을 많이 봤는데 그것 보고 ‘나도 기적과 표적 못 할 게 뭐 있는가?’ 싶어서 해 가지고서 하니까 돼.
이런데 모두 여러분들도 목회하면서도, 요새 말은 청산유수라 다 잘해요.
청산유수라 다 잘하는데 이러니까 그 말을 들을 수가 있어야지? 하나님이 그 사람하고 같이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러니까 아무리 설교를 하고 뭐 막 이리 조겨대고 저리 조겨대고 이렇게 이런 교리로 저런 교리로 암만 쳐봤자 그 껍데기 사람들은 ‘아이구 말 잘한다’ 하고 이래도 속에 영은 냉냉해서 영은 친하지 안해. 영은 냉냉해 있어. 영은 냉냉해 있어.
그래, 그런데 ‘백지 말만 잘하고’ 얼마나 업수이 여겼다고? ‘말만 잘하고.
주님 공연히 자꾸 호랭이만 잡고 협박만 자꾸 놔 쌓고. 인제 내가 한번 코빵을 주고 한번 인제 협박 놓을 때가 닥쳤다.’ ‘그물로 가지고 저 바다 깊은 데 던져 가지고서 고기를 잡아라’ 이라니까 턱 말하기를 ‘예, 이거는 선생님이 말하기 때문에 내가 던지는 것이지 내 고기 잡는 상식으로 던지는 것 아닙니다. 이건 내가 책임지고 내가 던지는 것 아닙니다.
선생님이 말하기 때문에 던집니다.’ 할 때는 딱 작정하고, ‘대낮에 그나마 투망을 가지고서 이 고기를 잡는데 그뭐 깊은 데 던져 놓으면 그물보다 고기는 십 배나 날랜데 그물 내려오면 그놈 깊은 데 다 도망쳐 버리지.
얕은 데 떡 던져야 이놈이 밑에 땅이니 후덕거리다가 그만 이래 걸려버리는 건데, 요번에 야나지다.’ 해 가지고, ‘선생님, 이거는 내 고기잡는 식에서 내 식으로 내 믿음으로 내가 된다 해서 하는 것 아닙니다. 나는 이거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지마는 주님이 던지라 하기 때문에 내가 던집니다.’ 얼마나 교만했어? 이랬는데 척 댕겨 올리니까 그만 그물이 묵직하지 배에다 그라니까 두 배가 거뜩 찼지 이라고 모든 사람이 다 놀라지 그만 그때 베드로는 그만 기절해 버렸어.
왜 기절했어요? ‘주님의 말씀은 내가 볼 때에 천부당 만부당도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오늘까지에 주의 말씀을 내가 부인했다. 이런 주의 말씀을 부인했다.’ 이걸 생각하니 가슴이 터져 죽겠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그만 그 앞에 꺼꾸러져 가지고서 ‘주여 나를 멀리 하소서. 떠나시옵소서. 나는 죄인로소이다.’ 이거 뭐 가지고 봤어요? 주님 그 말씀 듣고 그래 했어요? “저 바다 깊은 데 가 가지고서 그물을 던져서 네가 고기를 잡아라” 그 말씀 듣고 베드로가 그렇게 회개를 했어요 뭣 보고 했어요? 표적 보고 했어. 이러기 때문에 표적이 필요하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증거라.
이랬는데 내가 신학교 가기 전에는 이러니까 막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열심히 이래 와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그라니까 제가 6 5 때에, 6 5 때 위천교회 있었는데 그때 6 5가 나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백 조사 있는 데로 가야 피난한다.’ 백 조사 있는 데로 가야 피난한다 해 가지고서 위천 조그만한 교회에 한 사백 명 모였어요. 교회가 그때 스물여덟 평인가 그렇지? 스물여덟 평인데 사백 명 모였어. 꽉꽉 찼어요.
벌써 인민군들은 점령해 가지고 거기 막 지금 사람들 자꾸 죽이고 뭐 폭탄으로 뭐 전부, 거기에서 조금 점령해 가 가지고 쌔악골이라는 데는 미군 차가 한 사오십 대 거기에 다 파괴를 당했어. 당했는데 거기에 그렇게 뭐, 위천이 제일 인민군이 센 데라. 거기에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때 며칠 내가, 오래 돼서 몰랐어요. 그 며칠 집회 했던고 모르겠어? 그때 며칠 집회 했던고? 사십 일을 집회 했던가 모르겠어. 상당히 많이 했어. 한 달은 넘었어요.
집회 해서 했는데, 그라니까 그때 모두 ‘이 백 조사 있는 데 가야 피난한다.’ 이래 가지고서 거창 협천 함양 거기 있는 신자들이 다 그렇게 막 모여들고 그랬어요.
이러니까 뭐, 그때는 또 그것도 인제 하면 되는데, 그 비 오는 것도 그랬어요. 이 집회 하고 나서 교인들이 갈라 하면 이거 뭐 소낙비가 와서 야단을 지길 때는 그것도 그래 기도해. 엘리야 기도해 듣는데 우리는 기도하면 안 들을 게 뭐 있느냐? ‘주님이여, 이 소낙비가 이거 문제니까 갈 때까지 멈추어 주옵소서.’ 자꾸 이래 기도하면은 그거 비가 안 올 때라 안 왔는지 올 때 안 왔는지 또 멈춘다 그말이요, 또. 멈춰 가지고 또 나중에 비가 오고.
자꾸 이라니까 이 참 믿음으로 그래 하고서 이래 했는데 제가 고려신학교 가니까 ‘지금은 이적은 없을 때다. 이적은 옛날 초대에 있지 지금은 이적이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적 있는 건 그건 다 이단이고 그거는 다 정통이 아니고 그거 지금 이적이 없는 때다.’ 신학 가니까, 신학교 가니까 전부 그래.
그래 놓으니까 거기서 그만 이적 행한 게 그만 괴물이 되고서 수치가 돼 버렸어.
‘저 조사는 저거 지금 신학교 왔는데 저거는 이적 행하는 사람이다.’ 이라니까 다른 사람이 이거 똑 괴물같이 여겨서 순 이단같이 이래 여겨요. 그래 가지고서 그래 이적을 나도 부인했습니다. 이적을 부인하고 나왔어.
부인하고 나왔는데 부인하는 사람으로 이래 살다가 언제 내가 이랬느냐? 그때 대구집회 갈 때에 그때 내가 가만히 기도해 보니까 이게 아니라. 마귀 놀음이라.
이래서 이적을 부인하지 안하고 이적을 그때부터 믿는 그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을 가지고서 이제 이적 말을 많이 했습니다. 많이 하니까 그해, 얼마? 칠백사십 명이 나았어요. 칠백사십 명이 그때 나았다 그거요.
그라고 나서 이라니까 모두 다 동역자들도 ‘이적만 자꾸 저래 가지고서는 지금, 그라면 이 진리를 증거해야 되는데.’ 그 사람들 다 모두 신학자들의 물이 들어 그래요. ‘증거해야지 자꾸 이적만 주장하면 이거는 신비파 모양으로 안 됩니다.’ 이래.
그때 나는 확신을 가졌어. ‘아니다. 그게 틀렸다. 그게 틀렸다.’ 저거는 신학 교리 신조를 암만 말해 봤자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 말이오.
“바울도 알고 게바도 아는데 너는 도무지 어떤 놈이냐” 하고 마귀가 달라든 것 모양으로 이제 그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자기 인격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의 하나님이지 이 말라빠진 교리만 이 신조 이것만 가지고 날뛰고서 신앙은 버린 거기에 하나님이 같이 않는다 말이오.
그러니까 저는 신학자의 대가리지마는 기적이 안 나타난다 말이오. 기적이 안 나타나.
안 나타나니까 그거 신학자면 대가리인데 기적을 인정을 하는 날이면 자기에게는 기적이 없고 처음으로 믿는 전도사 집사 이런 데는 기적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위에 있고 자기는 밑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걸 내려앉힐 수, 꺾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이오.
여기에 눌려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이게 아니다’ 하는 것을 알고서 튀어났다 말이오. 튀어나고 난 다음에는 이제 그런 데에 꺾어지지를 않고 접히지 않습니다.
이래서, 그라고 나서 가만히 보니까 그 신구약 성경에 모든 사람들이 말을 하지마는 안 믿는데 표적이 나, 하나님이 같이 한다는 표적이 나타나니까 그때사 믿어. 예수님에게도 ‘당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달라’ 이랬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니까, 풍랑을 잔잔하게 하니까, 죽은 자를 살리니까 그래 보고서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다, 우리 메시야다.’ 이렇게 됐다 그거요.
이러니까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요 기적의 종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하고 진리 말씀을 증거하는 동시에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나타나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나타나야 돼요.
저아레 서부교회서는 그랬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자기에게 함께 하시고 자기에게 역사해 전능자가 와서 역사해 주시는 그런 표적을 한번도 못 본 자 손 들라’ 이라니까 두 사람 들었어. 두 사람은 내가 뭐라 한 줄 알아요? ‘당신은 표적 안 봤으면 불택자요 지옥 갈 자이니까 교회 나오지 마십시오.
나올라거든 표적을 보기까지 해서 표적 보고 난 다음에라야 하나님이 자기에게 착수한 것을 표적을 봐야 착수한 것이지 그리 안 하면 가짜요 공연히 자리만 비좁으니까 나오지 마시오.’ 이래 버렸다 말이오. 내가 그랬지? 내가 그래 설교 안 했어요? 그렇게 했지? 그랬어.
이라니까 당장 구역장이 와 가지고서 ‘인제 처음으로 나오는 사람인데 그라면 그 사람 그만 낙심하고 안 나올 것 아닙니까?’ 이래요. 그말 하면 내가 또 그거 그만 유혹받아 들으면 안 돼. ‘아버지께서 보낸 자는 옮기지 않으면 가지를 못합니다. 그거 택한 자라면 그 사람이 이제 주님의 표적 받을라고 지금 주님이 자기도 사랑한다는 그 표적을 볼라고, 그 표적을 볼라고 애를 써서 더 잘 믿게 되지 뒤로 후퇴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더 또 내가 또 더 그런 설교 더 할 겁니다.’ 내가 이라고 말았지.
또 한번은 ‘목사님, 너무 자꾸 그렇게 그만 마구 나무래 대고 막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니까 사람들이 그만 좀 감정이 나 가지고서 그렇게 좀 감정 나 가지고서 섭섭하게 그렇게 좀 반동할까 염려가 됩니다.’ 또 그것도 유혹이라.
‘내가 힘이 없어서 그걸 못 해서 지금 탈인데 그걸 강하게만 할 수만 있으면 되겠는데 그게 지금 줄어질까 싶어서 내가 크게 탄식을 하고 지금 걱정을 하고 있는 바입니다.’ 여러분들, 자, 여기에 온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에게 친히 오셔 가지고서 뭣인가 자기의 기도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에게 무엇인가 와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그런 만유의 대주재,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창조주, 전능자, 주재자, 한 분 되시는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 오셔 가지고서 자기와 함께 하시고 자기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에게 그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는 그 흔적을 한 번이라도 받은 사람은 손 한번 들어 봐요. 아따, 할렐루야! 할렐루야! 됐어, 이만하면 됐어.
많지. 받은 증거 많은데 이런데 오후에는 그거 놓지 마십시오. 잃지 마십시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주님이 해 주시는 것 아주 무시해서 버리는 것 그렇지마는 ‘언제 이렇게 해 주셨다. 언제 이렇게 해 주셨다. 언제 어려운 일 당할 때에 주님이 이렇게 해 주시더라. 그때 또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말해 주시더라. 성경은 이렇게 말해 주시더라. 그래 가지고 이런 꼴을 봤다. 이런 흔적을 봤다. 이런 기적을 봤다. 이런 표적을 봤다.’ 그것을 쭉 하나도 잊어버리지 말고 다 열거해 놓고 자꾸 그걸 외우면은 주님이 좋아하셔.
왜 좋아합니까? 그렇게 그러면 주님과 자기와 친밀돼서 주님을 더 믿고, 더 의지하고, 더 가까이하고, 주님 한 분으로 전부를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사랑의 주님은 기뻐하신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칭찬받아 좋아하는 게 아니고 우리 때문에 기뻐하시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하나 작정합시다. 오후에 당신이 주신 것, ‘주님이 내게 베푸신 것 많았는데 나는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 죄를 자복합니다.
이제부터 낱낱이 하나 하나 찾아 가지고서 이제 주님이 나에게 어떻게 해서 주님과 나와의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걸 내가 다시 새롭게 해 가지고서 주님을 모시고 내가 친근히 살겠습니다.’ 하는 요것을 작정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