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3 00:58
하나님의 사랑
1982. 5. 11. 화새
본문 : 벧후 3:9-13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 마음은 두 가지가 주장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는 하나님을 배반한 악령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장 안 하시면 악령이 주장하고, 악령이 주장을 안 하면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마음을 자기 단독이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악령이 강제로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악령도 강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이신 성령도 강제하지 못합니다. 대속하신 주님도 강제하시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유한한 자유이지마는 자유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제한된 자유이지 궁극적인 자유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은 악령이 그 마음을 강제로 주장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악령은 미혹적으로 꾀워서 그 미혹에 빠졌을 때에 악령이 주장하게 되고, 하나님이신 성령은 일러 들리고 감화 감동해서 감동을 받았을 때에 성령이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독립할 때는 없습니다.
그러면 말세에 악령이 우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주장하는가? 우리를 전적 이 정욕으로 기울어지도록, 정욕을 가지고 우리 마음을 주장합니다. 정욕이라고 하면 사욕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자기대로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욕은 어떤 사람은 돈을, 명예를, 자기 혈통을, 또 자기 나라를, 자기의 온갖 명예욕, 행락욕, 음욕 이런 것 다 정욕 속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을 일으켜서 그 욕심이 그 사람을 주장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무슨 욕심이든지 욕심이 주장해서 성령이 아무리 와서 감동시켜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욕심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아주 뚜렷한 가치있는 큰 욕심이 아니라도 사소한 욕심이라도 그 욕심이 그 사람 마음을 주장하도록 이런 방편을 쓰는 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악령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에는 욕심으로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한다 이래서 요한계시록 9장에는, 이 욕심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면 한계가 있느냐? 한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무저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오셔서 우리를 주장하게 하실 때에는 어떻게 주장하시는가? 첫째로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일, 곧 자기가 세상을 끝마치는 일, 주의 재림과 자기 개인의 세상 떠나는 이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의 날, 자기 죽음, 부활, 심판 여기에 마음이 다 기울어지게 됩니다.
첫째로 주님에게 기울어지면 주님에게 속한 심판, 재림의 날, 죽음의 날, 부활 여기에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다 주님의 약속하신 그 약속에 기울어지게 되고, 악령이 오면 자기 욕심에 기울어지게 되고 이 두 가지로 확실히 분별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하실 일은 무엇인가? 의냐 불의냐 하는 이것을 판단해 가지고 구원과 멸망으로 나누게 됩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불타지만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노니 의가 거기 거하리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주장하는 것은 둘인데, 악령이 주장할 때에는 어떻게 내 마음을 주장하는가? 내 마음이 어떻게 될 때에는 악령이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또 내 마음이 어떨 때에는 성령님이 주장하고 계시는 것인가? 이것을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 가지고 멸망치 아니하고 남아 있는 요소들은 어떤 것인가? 의입니다. 의는 무엇인가? 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신 그 뜻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의입니다.
그러면 그 의가 뭐인가? 의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난 주일날 우리 교인인지 누군지 몰라도 어떤 사람이 아주 편지를 장서로 써 가지고 넣어 놨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이름을 기록해서 써 놨으면 그 멸망에서 구원을 시킬 수가 있겠는데 이름을 쓰지 않았으니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 사람이 마음에 안타깝습니다.
그는 이번에 집회 와도, 참석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참석한 것 같기도 한데 순전히 666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은 가장 인본주의, 기독교 인본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도덕주의는 약간 섞였습니다. 혹 여기 참석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나를 찾아오면 내가 만나서 자기가 지금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말해서 깨닫는 데까지 깨닫도록 내가 해 줄 때까지는 해 주도록 노력할 터이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알리면 나만 알지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러니까 자기 멸망을 자기가 그대로 가지고 있지 말고 말을 해 주면 제 힘껏은 살리도록 한번 해 보겠습니다.
말세에는 제일 독이 많은 것이 사랑이요 생명이 충만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신·불신자 간에 다 제일 귀한 것으로 인정하는데 교회 안에서는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제일 귀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에 제일 귀한 것으로 인정하고, 또 일반 세상에서는 사망이 그 속에 있는 중에 사랑 속에 사망이 제일 강하기 때문에, 사망케 하는 것이 세상의 목적이요 제 할일이기 때문에 세상에게는 제일 죽이는 독소가 강한 사랑이 저에게는 제일이고, 또 기독교는 죽음에서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기독교 사명이요 목적이기 때문에 생명이 제일 충만한 사랑을 제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뭐인가? 사랑이 의라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사랑은 의라. 사랑은 의라.’ 사랑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것인데 이 사랑은 전지 전능 완전의 실력을 가지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라 이것을 가진 자는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밖에는 이 사랑을 가지신 분이 없는데,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사랑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가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는 것은 우리 중보자 예수님의 대속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힘입어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니까, 완전자와 연결되어 완전되고, 전지 전능자와 연결되어 전능되고, 영원 불변자와 연결되어 불변자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택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가질 수도, 줄 수도 있지마는 믿음으로만 됩니다. 믿음으로만 된다 그 말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가지고, 마치 수도관이 저수지에 연결이 되어야 수도관에 물이 나오지 몇십년 나오던 수도관이라도 저수지에 연결만 끊어져 버리면 그 수도관에서 물 나오는 것 아닙니다. 꼭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이 우리에게 흘러 나올 수 있고,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는 그 시간으로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랑이 하나는, 죽이는 역사를 하는 자는 죽이는 실력이 제일 강하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로 인정하게 되고 살리는 직책을 가진 자는 살리는 힘이 제일 강하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로 이렇게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게 사랑이냐? 의가 사랑이라. 의가 사랑이라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그게 사랑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그것이 사랑이라.
그러기에 사랑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은 당신이 우리 현실에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줄 때에 그 뜻을 받아서 내가 그대로 행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지만 실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 받느냐? 현실에서만 받지 다른 데서는 받지 못합니다. 상상으로나 추측으로나 소망으로나 그렇게 받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망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현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가 간직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주는 것도 현실이오.
그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랑은 의라. 현재에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바로 찾아 가지고 그 뜻대로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가 잘 간직하는 것이 무엇인가? 현재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버리지 않고 그 뜻을 내가 잡고 있을 때에 그 뜻이, 현실이 바꿔지면 뜻이 바꾸어집니다. 현실이 지나가기까지 그 뜻을 내가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그것이, 그 뜻대로 하면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내 현실에서 그 사람에게 내가 행할 뜻이 무엇인가?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해야 되느냐? 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 하나님의 뜻 그것을 내가 행하면 하나님의 그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너는 이 사람에게 이 말을 해 줘라. 이 사람에게 이것을 시험해라. 이 사람에게 이걸 경고시켜 살려라. 이 사람에게 세상 것을 줘라. 하늘나라 것을 줘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대해서 ‘네가 어떻게 하라’ 하는 그것을 행한 그것이 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을 줘도 소용없습니다.
이번에 그 장서를 써 넣은 사람은 제일 큰 것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참하고 가련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나한테 안 오면 죽습니다. 나한테 안 오면 건설구원은 절대 못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은 순전히 세상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과 혼돈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해야 되고, 또 천주교가, ‘거기 구원이 없다’ 그 말은 교파는 교리를 근거해서 생긴 것이 교파입니다. 천주교 교리에서는 건설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천주교 교리로서는 건설구원은 없습니다. 기본구원은 거기도 있을 수 있고, 불교도 있을 수 있고, 유교에도 있을 수 있고, 기본구원은 무신론자 속에도 기본구원은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 사람의 행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되기 때문에 무신론자 속에도 하나님의 선택자가 있을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나 건설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성경 도리대로 행동하는 그 행동을 통해서만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천주교는, 지금은 이제 성경을 읽도록 하지마는 천주교의 그 독재의 불의의 교권 세력이 강할 때에는 성경을 보면 사형합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보면 죽입니다. 성경을 못 봤어. 숨어서 봐도, 악령에게 붙들리기 때문에 그만 그 교파 시키는 대로 하면 다 구원이 되는 줄로 이렇게 오인하고 있기 때문에 보지 말라 할 때에 안 봤습니다. 교황을 하나님처럼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성경을 전혀 못 보고 성경에 경전 그 몇절을 불의한 교권이 더 강해질 수 있는 그런 절수만 빼 가지고 외우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또 그러고 그들은 제이계명을 현저히 어기고 있습니다. 그 속에 일계명이든지 이계명이든지 그 속에 어떻게 됐다 하는 것은 그것은 말해야 잘 모르지마는 좀 참 양심을 써서 신앙생활을 할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백의 백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압니다. 그거는 하나의 세상입니다.
제이계명에는 ‘무엇이든지 거기 절하지 말아라’ 이랬는데 그들은 현재에, 천주교 교파에서 말은 주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지마는, 그 교인 전체가 가깝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마는 우리에게 도성인신 하신 중보자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우리에게는 가깝습니다. 가까운 것이 이것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 중보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에게 속해 가지고 하나님에게 속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베드로와 마리아가 더 가깝습니다. 베드로와 마리아가 그들의 구원의 중보자입니다. 또 그들은 미사드린다는 것이 성경에 있는 인물들을 동상으로 만들어놓은 데도 있고, 그건 돈 좀 많은 천주교이고, 또 동상으로 만들지 못하고 그림을 그려 가지고 붙여놓은 데 있고, 있으면 그 그림 한 그림마다 반드시 무릎을 꿇고 하루 아침에 두 번 세 번 절합니다.
무릎을 딱 꿇고. 화상이든지 동상이든지, 아벨의 화상이라면 - 그림 화(畵)자 얼굴 상(象)자, - 화상이라면 아벨에게 아벨의 화상에 대해서 무릎을 꿇고 일어나기가 힘드니까 한쪽 무릎 꿇고 한쪽은 일어서 가지고 거기서 절을 두 번 하고, 그 다음에 제가 보니까 칠십 몇 사람을 그렇게 해 놨는데 또 많은 데는 더 많습니다. 이래 가지고 하루 아침에 거기다가 절을 한꺼번에 두 번씩 해 가지고 쭉 이렇게 절하는 그것이 뭐이냐? 미사드리는 것이라 이럽니다. 어떤 사람은 한 차례 하고, 어떤 사람은 하루 두 차례 하고, 하루 세 차례 하고, 그것이 처음에 어째 생겨났느냐? 이렇게 성경 중에 있는 유력한 인물들을 생각함으로 자기의 모든 심신이 변화된다 하는 그점에서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오늘도 이 개혁교도 자꾸 그림이니 달력으로 하는 그것을 이번 대구 집회에서도 말을 했는데, 우리가 성경 중에 있는 어떤 유력한 인물을 본받을려고 하면 그것이 곧 천주교로 타락해 내려가는 그 길입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그 말은 성경을 기록한 기록 영감을 받아 그 행동한 것은 정확무오합니다.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는 정확무오입니다. 그러면 신인 결합의 일행, 신인 결합의 일행으로서 정확 무오, 정확,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는 이것을 본받으라는 것이요, 그 성경 기자의 주체자는 성령이기 때문에 해석하면 성령을 본받으라 말이요 그 다음으로 껍데기는 하나님과 결합해 가지고 정확 무오한 성경을 기록한 이 결합 이것을 본받으라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교회 세우겠다’ 하는 말도 영감, 그 영감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지, 바울이라는 그 사람을 본받으라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성경 중에 있는 그런 인물, 어떤 성경, 서장에, 거기 이종교는 들어가면 다 살해를 시키는 그 참 비밀의 나라인데 그 나라의 입구에서 그 나라 사람이 혹 나오면 복음을 전하고 들어가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1년만에 하나도 만나고, 1년만에 하나도 만나는데 거기 복음을 전할려고 벌써 7년을 자기가 거기 바쳐 가지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몇사람에게 성경을 전해줬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귀한 일을 하기로 시작됐습니까?’ 하니까 성 후란시스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가지고, 그분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했다고. 그러니까 그분은 아마 하나님보다 후란시스가 자기에게 가까와. 후란시스의 그 신앙 인격과 그 행위를 본받고자 하는 것이 그에게 불붙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차차 차차 변해져 가지고 천주교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대구집회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사람을 자기의 목표의 대상으로, 자기의 원형의 대상으로 삼지 마십시오. 사람을 자기의 표본으로 삼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표본으로 삼으라고 성경에 말했지 사람을 표본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은 아니라’ 하는 그것을 강조했는데, 이 천주교가 아주 멸망 속에 들어서 그 교리로서는 기독자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일을 한 것이 천주교입니다.
이래서 이 천주교에서, 루터가 개혁자라 하지마는 루터 개혁자 전에 옳은 성도들이 얼마나 죽임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순교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순교 당한 그 참 진실한 성도들이 깨달은 그 교리가 체계적으로 종합되지는 아니한 그 교리가 하나씩 둘씩 여기 저기 꺼내온 그것을 주 종합해 가지고 체계적으로 편집한 사람이 칼빈입니다. 또 그것을 들고 나서서 깃발을 든 사람이 루터입니다. 그 안에 많은 순교자들이 있어 가지고 이랬습니다.
이런데 ‘천주교에 숫자가 많은데 거기 구원이 없다고 하니’ 하는 것을 반발한 편지를 했는데 그 사람 그걸 고쳐야 됩니다. ‘합동 번역한 그 합동 성경은 현시대적이고 현대적이어서 그 성경을 보니까 더 깨달음이 은혜가 있더라’ 하니까 이거는 정반대요. 천주교는 건설구원은 교리적으로는 없다 그말입니다.
사데교회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보지 못했다 찾지 못했다” 그러면 온전한 행위라야 건설구원이 되는 것이라 그거요. 왜? ‘살았다는 이름이 있으나 실상은 죽었다. 산 것이 다 죽었다.’ 다 죽은 것은 온전한 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다 죽었다. 온전한 행위라야 다 산다. 온전한 행위 된 그것만큼만 산다.
환하게 거기 나타나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제이계명에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거기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이랬는데, 현저히 제이계명을 범하는 것을 자기네들은 제일 잘 믿는 신조요 교리로 삼고 있는 그 교파에 어떻게 성경대로의 온전한 행위가 될 수 있는가? 그러기 때문에 건설구원은 절대 없습니다. 절대를 붙입니다.
나도 이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도 이게 틀렸으면 내가 심판받을 요량 하고 내가 지금 기록합니다.’ 했는데 그 사람도, 아주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인데, 그 사람도, ‘세상 지식을 목사님이 부인하는데’ 하는 그 배암 지식이 많아 가지고 그 사람을 멸망시켰습니다. 이 가운데 있는지 모르겠는데, 배암 지식이 그 사람을 멸망시켰으니까 나한테 오면 내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서 고요히 그 사람에게 깨닫게 하도록 가르쳐 가지고 구원에 이르도록 내가 해 주지, 그 사람을 대해서 내가 대항적으로나 시비적으로 그래 하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할 그런 단계에 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교리와 신조가 ‘하나가 틀렸나 두개가 틀리나 그것이 됐을 때에 그거 가지고 이렇게 논쟁을 하지 이는 뭐 전체가 다 틀렸는데, 그 사람에게 대해서, 안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으로 전도를 해야 되고, 그 사람이 내게 어떤 박해를 가해도 들어가면서 전도를 해야 되지 그 대항할 그런 상대는 안된다 그거요.
‘천주교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천주교보다도 마호메트교 그 교파의 숫자가 통계낸 것 보니까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고, 숫자가 많은 숫자가 따른다고 구원있는 것 아닙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 될 때에는 자기가 신고함에 써 넣어서 ‘이 점이 이해가 안되니까 좀 알려 줄 수 없습니까?’ 하면서 신고함에다가 자기 이름을 써 넣으면 내가 그 사람을 전화번호를 써 주면 그 사람에게 연락해 가지고, 사람을 봐서 ‘아, 이 사람은 좀 있으면 말해 주지 않아도 차차 이거는 살아나겠다.’ 싶은 사람은 그럴 필요 없고, ‘이 사람은 멸망 가운데 완전히 깊이 빠졌으니까 이 사람은 건져줘야 되겠다.’ 할 때에는 건져 주게 될 터이니까, 그렇게 하면 살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허락을 하고 용납을 합니다.
그러고 합동 번역 그것보다도 그 무슨 성경이지? 이야기 성경이라 하나 뭐라 하노? 현대인의 성경, 그 현대인의 성경 그보다 이름이 좀 뭐 다르던데? 성경 말씀을 순전히 어린아이들이라도 들어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게 번역을 하고 기록을 해서 성경이라 하고 나온 성경 있습니다. 그 성경은 완전히 성경의 권위성을 파묻어 버렸고, 또 성경 안에 내재적 영감은 완전히 떠나게 했고, 순전히 그거는 배암의 말입니다. 성경 말을 말했지마는 배암이 말했기 때문에 배암의 말이오. 성경의 말씀을 이용해도 배암이 성경 말씀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 말은 전체가 배암의 말이라 그말이오. 배암의 말이지마는 성령님이, 하나님이 이용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말이오. 누구의 말을 말했든지 그 이용, 이용한 그자의 말이라 말이오. 그 자가 누구인가? ‘이는 배암이 하나님 말씀을 이용했구나. 이는 성령님이 마귀의 말을 이용했구나. 인용했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다 하나님 말씀인데 거기 배암의 말도 있고 마귀의 말도 있고 별말도 다 있습니다. 그게 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그 그것들의 말을 인용해서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이 사랑이 하나님의 의 이것이 사랑이라는 이것을 아주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의가 하나님의 사랑이라’ 이 말은 얼토당토 않는데 실은 이게 맞습니다. 이걸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의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의가 뭐인가? 의가 뭐인가? 충성이 의입니다.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뜻 다하고 힘 다한 그 충성이 그것이 의입니다. 왜? 이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모든 면이 많은 차이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차이에 있는 사람도 제일 낮은 차이에 있는 사람도 의를 행할 수 있고 사랑을 행할 수 있고 또 지극히 높은 인간으로서는 최고에 있는 사람도 그 사람이 자기 의를 행할 수 없는 사람 있습니다. 충성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충성에 있다. ‘네가 마음, 목숨, 힘, 뜻 다 했나 안 했나?’ 거기서 의는 결정된다. 그 의가 가치로서 결정되는 것 아니다. 의의, 인간의 의의 결정이 인간의 의 그 가치에 근거해 가지고 결정하는 것 아니다. 인간의 의 중에는 제일 1등 의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그 가치로 근거해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걸 할 때에 어떻게 했느냐? 마음 뜻 성품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 그걸 보니까 10분지 1을 드린 사람은 제일 1등을 만들었지만 이 사람은 10분지 10을 다 드려야 될 건데 10분지 1만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의라고 정죄해 버리고 만다 그거요. 그걸 가리켜서 두 냥쭝 받은 자는 두 냥쭝 남기니까 하나님께서 꼭 같은 대우했습니다. 닷냥쭝 받은 자는 닷냥쭝 다 활용해 가지고 닷냥쭝을 남겼어야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어떻게 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오는, 저수지에 있는 그 물이 우리 부엌에, 저수지에 있는 그 물이 우리 부엌에 들어오는데, 저수지에 있는 그 물이 우리 부엌에 들어오는데 부엌으로 들어오는 것은 뭘로 들어옵니까? 뭘로 들어오지요? 수도관, 수도관으로.
하나님만이 가지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이미 많이 들어와 있는데 그 사랑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에 무엇을 통해서 들어옵니까? ○조사님? 뭐라 하노?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들어온다.’ 한 60점이나 될까? 낙제는 못 주겠고. 아니야. 60점밖에 못 돼. ○조사님 60점밖에는, 60점밖에 안돼. 자, 이 사람 한번 대답해 봐요. ‘충성을 다해서’ 또 저 뭐라고 하노? 또 ○○○? ‘충성’ 봐. 이렇게 이거 혼돈이 되니 참 기막힌 일이라고. 또 저 뒤에? 예 ‘주님의 대속’ 전부 범벅 타령이라. ○○○? ‘계명을 지키는 것’ 또 여기? ‘우리를 통해서’ 또 여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뭐 이래도 안다고? 하나님의 뜻! 다른 것 다 낙제야.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많이 와 있지만 현재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무엇을 통해서 오느냐? 이 현재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 뜻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오지 달리는 못 옵니다. 오는 길이 없어. 내가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줄 때에 어떻게 줘야 되느냐? 뭘로 줍니까? 뭘로 줘요? ‘내가 이 사람에게 대해서 이 시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일까?’ 하는 그 뜻대로 행하는 그것이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전부, 말에 귀가 있다 말은 말에 모때기가 있다 말입니다. 말에 각도가 있다 말이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까 뭐이 되어져야지? 보니까 유력하다 희망있다 하는 사람들이 전부 범벅타령이라. 이러니까 뭐이든지 일률적이면 마귀라는 놈이 두루뭉실로 두루뭉실로 이러니까 다 혼합 혼돈시켜 가지고 이래 놓고 있기 때문에 마귀는 얼마든지 장난을 칩니다. 저 혼자는 의인인데, 저 혼자는 의인인데 볼 때에 죄인이오. 그러니까 옳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다 보면 ‘어리석다, 치우쳤다, 또 저거는 신비주의다, 광신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거요.
이번에 그 편지온 사람, 편지했는데 그 사람이 666의 신앙가입니다. 그것을 대구에서 많이 말했는데, 그 말한 것이 고쳐지지 않고 마음에 반감이 생겼다 그말이오.
세상 지식을 반대하는 것 아닙니다. 종이 많이 있는 게 좋지마는 종이 좋은 것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종이 좋지, 많은 종의 세력이 커 가지고 주인을 이제 움켜 넣고 주인을 지배하게 되면 그 주인이 종 됐고 종은 상전 됐습니다. 세상 지식이 종이 되면 가치있고, 세상 지식이 상전이 되어서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제재하고 이것이 일어서게 될 만침 될 때에는 그 지식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가지 못한다는 그거는 부자는 돈뿐 아니라, 지식뿐 아니라, 권세뿐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다 그말이오. 아, 이 세상 이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지만 이게 잘못되면 안된다 그거요.
그러기에 서부교회는 사랑이 말라빠진 그런 핍절한 교회라 하는데 그래도 교회 중에는 서부교회의 사랑이 큽니다. ‘1년에 1억 이상의 부동산을 사면서 찍해야 이웃돕는 구제는 불과 얼마에 들지 못하는 소액을 했기 때문에 낯이 간지럽다.’ 그 사람 낯이 마귀 낯이기 때문에 낯이 간지럽습니다.
1억을 아니라 뭐 2억을 해도, 지금 우리는 이 주일학생들이 곧 여름이 다가오니까 이제 다음주부터는 뜨서 지금 못 앉을 거라 말이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으러 오는데 그 사람들을 한시간 앉혀 놓고 가르칠 만한 그런 장소가 없어서 마구 뜨는 형편이니까, 아 하나님 말씀을 들어 구원얻을 그 사람을 한시간 앉혀 놓고 말씀 가르칠 만한 그런 장소를 마련을 못 하는 그 형편에 다른 데 이 세상 구제를 언제 할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 얼마 한 그것도 부득이 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실상은 그 돈도 아깝지요. 땅 한 평이라도 더 사야지.
그러면 그렇게 땅을 사 가지고 그 땅을 무슨 호화 주택을 짓는가? 무슨 놀이터를 만드는가? 서부교회는 놀이터가 하나도 없어. 마당에 교인들이 나가 설 뜨락이 없습니다. 나가면 마당에 빡빡하게, 꼭 산떼 모양으로 들어서 가지고 이리도 못하고, 이리도 못할만치 빡빡하게 들어섰다 그말이오. 그렇게 허지가 없어. 다른 데는 강단이 되면 강단 놓고도 어북 멋지게 좋은 것 달지만 여기는 강단 조금만 남겨 놓고는 강단 옆에까지 다 앉습니다. 이런 교회는 없어. 어디 이렇게 지어 놓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이러니까 그 사람의 견해가 아주 틀렸다 그거요. 순전히 666의 불쌍하고 가련해. 그런데 그 사람이 세상 공부를 그렇게 안 했더라면 그렇지 않을 것인데 세상 공부는 해서 좀 지식은 가진 사람 같은데 아주 불쌍하다 그거요. 그러면 그 사람을, 이러니까 부끄럽다 하지 말고 그 사람이 언제 전화를 내게 하면 아무도 없는데 만나 가지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사는 길을 말을, 좀 힘이 들지마는 해 줄터이니까 나에게 개적으로 연락하고, 또 그 이름을 기록했으면 내가 그 이름을 찾아갈 건데 제 이름은 ‘서부교회를 아끼는 사람이 썼음’ 이래 놨다 말이오. 서부교회 아끼는 사람.
조금 광신은 광신 같은데 내가 조금 짐작은 하기는 합니다. 어떤 광신자가 썼는가 하는 짐작은 하기는 하는데, 제 이름 쓰지 않는 그것도, 그전에는 제 이름을 잘 썼는데 제 이름을 안 썼다 그거요. 제 이름을 쓰지 않는 그것도 그 몹쓸 그런 나쁜 마음이라. 그 숨자는 것이거든. 범죄하고 난 다음에 아담 하와가 숲속에 숨던 그 귀신이 들어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 내가 짐작은 하고 있어요. 바로 듣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그래도 꼭 마귀가 말하는 그 말을 딱 써 놨기 때문에 내게도 또 확실히 깨달아지는 것은 ‘아, 이러니까 이 교훈이 확실한 중에도 이 교훈을 아주 강하게 많이 증거해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 내 속에 강하게 든다 말이오. 그것도 또 내게는 은혜가 됩니다.
네, 여러분들이 말 각도를 알아야 됩니다. 각도를 알아야 돼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타나 역사할 때에 여러 위로 나타났소. 하나님의 본성은 하나입니다. 사랑이시오. 사랑이신데 이 사랑이 이리 보니까 진노로도 보이고, 이리 보니까, 이 사랑을 이 모때기로 보니 진노이고, 이 모때기로 보니까 희생이고, 이 모때기로도 보니까 지공이고 지성이고 이렇습니다. 이 단일성이라는 것, 하나님은 단일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늘 많이 말했는데 이것이 이렇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각도를 모르고 두루뭉실로 이러면 안돼. ‘이거는 코끼리의 눈이다, 코다, 입이다, 꼬리다, 발이다.’ 이걸 알아야 되지 코끼리 하나 보고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 모양으로 그리 되어지면 안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많이 와 있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이 현재 우리에게 오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올 때에는, 저수지의 물이 수도관을 통해서 우리 부엌에 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한 사랑이 내게 올 때에는 무엇을 통해서 옵니까? 이러니까 ‘충성을 통해서 옵니다. 또 뭐 무엇을 통해서 옵니다.’ 다 말하는데 그 대답이 다 탈선 대답이라 그말이오.
‘그 현실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옵니다.’ 백점이라 말이오. 이 사람은 말을 들을 줄을 아는 사람이라. 말귀를 아는 사람이라. 묻는 그 문제의 각도를 아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은 각도를 모르고 벌로 대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 헛일이라 그말이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게 지금 다시 옵니다. 내게 다시 계속해서 올 때에는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 뜻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 뜻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줄 때에 돈을 주고 쓰다듬어 주고 칭찬해 주고 이게 아니오. 그거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마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주는 것은 내가 현실에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네가 이 말을 해라. 하지 마라. 또 이해해 줘라. 책망해 줘라. 이 사람에게 돈을 줘라. 이 사람에게 도와줘라. 이 사람을 냉정스럽게 끊어라. 뭐 어떻게 해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네가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영생이 된다.’ 하는 그 뜻 그대로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그에게 가지고 그를 사랑했소. 그 사랑이 곧 다 생명이오. 그것이 의입니다. 이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 의가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 의가 거하리로다” 하는 그 의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 이거는 거리가 천리 만리 멀기 때문에 다 그렇게 해석을 안 한다 그거요. 그게 그래 해석이 안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파악지 못한 사람이라 그말이오.
이런데 실컷 가르쳐 놓으니까 엉뚱한 소리만 퉁퉁 하고, 마귀의 소리 미치광이 소리를 했으니까 그 사람은 내게 와 가지고 그걸 말하면 내가 살려줄 그런 사랑을 내가 가졌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