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1 21:59
하나님 다음가는 영광스러운 구원
1986. 8. 15. 밤(금)
본문:디모데후서 1장 8절∼9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오늘은 지난 주 공과요 또 다음 주 공과가 되는 말씀을 다시 한번 우리가 새겨 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에 우리를 불러서 구원하신 이 구원은 언제부터 이 구원이 시작됐는고 하니 영원한 때 전부터 시작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 뭐 몇천 년 몇만 년으로 그렇게 계수할 수 없는 영원 전에 시작된 구원입니다.
혹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신 것이 석가모니가 난 것보다 뒤에니까 그것을 가지고 말을 하나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가지고 사람되어 오신 때고 이 구원은 영원한 때 전부터 이 구원이 시작된 구원입니다.
또 이 구원은 우리 사람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된 구원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 된 구원입니다. 또 우리가 있은 지 후에 된 구원이 아니고 우리가 없을 때에 된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이 구원을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그대로 우리를 예정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유래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또 자주 들으니까 거게 대한 실상을 들어 아는 것같이 외우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지마는 실상은 우리가 이 구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모세만치 두려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는 모세만치 겸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그 실상대로 두려워하는 자가 어데 있느뇨?”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 쉬운 것 같지마는, 이 세상에 수많은 이종교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것은 불교니 유교니 하는 그런 종교는 참 대단히 그 시발된 연령이 높습니다. 유교는 하나의 도덕이라 하지마는 실은 그것도 근원은 종교의 유사입니다. 또 깊이 파고 들어가면 하나의 철학입니다.
그렇게 수천 년 동안 그들이 자기들의 일생을 다 바쳐서 아무 데도 기울이지 안하고 전심 전력을 기울여 모든 존재의 근원과 또 인생의 근원과 또 인생의 죽은 다음의 영원을 알아볼라고 애를 썼지마는 한 종교도 한 도덕도 바로 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석가모니 같은 사람은 인생의 근원을 알려고 할 때에 참 자기는 먹는 것 입는 것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 몸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지도 못할 만치 그렇게 바쳐서 일생을 연구했지마는 그들이 우주의 진리라든지, 인생의 진리라든지, 내세에 대한 진리라든지 이런 것은 그저 자기네들이 추측하고 추상하고 추론한 것을 기록은 했지마는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계시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도 바로 안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모든 존재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정리 정돈됐기 때문에 바로 예수님의 피 때문에 알려 주셔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계시를 택자들은 다 받아 가지고 알게 된 것입니다.
힘들지 아니하고 알고 또 너무 도덕이나 수양이나 이런 후천적인 것이 심히 어리고 약하기 때문에 들어봐도 무슨 말인지 이렇게 모르고 그저 지나가고 있는 그런 참 비참한 상태에 있는 기독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면 힘의 근원이 많습니다. 힘의 근원이 많아서 여게서 나오는 힘도 있고 저게서 나오는 힘도 있고, 여게서 나오는 용기도 있고 저게서 나오는 용기도 있고, 여게서 나오는 담대도 있고 저게서 나오는 담대도 있고, 뭐 여게 저게서 나오는 소망과 욕심과 그런 것들은 참 천태만상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한 말로 말해서 이 모든 것은 다 멸망할 것들입니다. 거게는 하나도 생명이 섞여 있지 안하고 하나도 영원히 살 영생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개인으로서는 세상을 떠나면 개인의 그 개체적인 것은 다 영원 전멸이 되고 또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이 우주라는 것은 다 전멸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 주 달려 가지고 여기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모든 존재들을 파악할라고, 모든 존재들에게 대한 지식을 가질라고 애를 씁니다.
거기에는 바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바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지식 신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요 지식만이 모든 존재관을 우리에게 바로 가르치고 있고 또 이 시간관을 바로 가르쳐서 이다음에 무엇 있고 무엇 있고 모든 순서대로 전개될 것을 바로 가르치고 있지 다른 데에는 다 틀렸고 옳은 것은 하나도 없는 이것을 성경이 말했습니다.
이랬는데 우리는 여게 대해서 아무런 실상으로 느껴보지를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 계시가 얼마나 보배고 존귀한 것인 것을 무감각하게 그저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이든지 하나 그것을 모르는데, 거게 대해서 알 길이 없는데, 뭐 모든 사람이,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떻게 나느냐?’ 또 `어떻게 죽느냐?' 또 `죽고 난 다음에 어찌 되느냐?’ 하는 그것을 사람들이 알라고 그렇게 수많은 머리 좋은 사람들, 절제 있는 사람들, 의지가들, 진실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여러 수십 대를 바쳐서 연구했지마는 그것을 다 바로 몰랐습니다. 다 삐뚤어지게 알아서 다 자멸하는 지식만 얻었지 바른 지식은 가지지를 못했습니다.
이런데 우리는 아무런 힘들이지 안하고 이런 바른 지식을 가진 여게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느끼고 있는지? 이것이 바로 기독자의 금생의 실력이요 영원 내세의 실력입니다.
세상에서는 이 사람 저 사람 모든 뜻을 합하고, 의사를 합하고, 견해를 합하고, 연구를 합하고, 생각을 합하고, 추상을 합하고, 추론을 합하고, 추측을 합하고 이 전부를 합해 가지고 거게서 뭐이 나오는가 해서 그저 머리를 싸짜매고 이렇지마는 거게는 영생에 속한, 온전에 속한, 영원 불멸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이 정죄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교는 어데서 능력이 나오며, 어데서 권위가 나오며, 어데서 지혜가 나오며, 어데서 생명이 나오는가? 기독교는 올바른 데에서 나오는 바른 것을 가지면 그것은 영원입니다. 멸해지지 않습니다. 그는 다 영원이요, 완전이요, 불변이요, 영생입니다. 이렇게 보배로운 완전 무결한 영원 불변의 이 생명의 것이 우리 기독자들이 바로 찾아 내 가지고 가지기만 하면 이렇게 다 완전한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의 최고를 말하면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전지 전능한 완전이 기독자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기독자의 이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과 도덕과 포부와 욕망과 담력과 그의 자신의 그 형상됨이 우주보다 크고 영계보다 크고 하나님 다음으로 큰 자가 되어지는, 하나님 다음으로 큰 자가 되어지는 이 큼이 어데서 나오는가? 이것을 또 오늘밤에 또 재삼 그렇게 증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자의 보배가 어데서 나오는가? 하늘에서 나오는가? 땅에서 솟는가? 전인류의 통합이 되는 전인류라는 인류에게서 나오는가? 만물에게서 나오는가? 뭐 하늘에서 나오는가 땅에서 나오는가? 별과 달에서 나오는가? 어데서 나오는가? 그 나오는 출처가 어덴가? 어데서 나오는가? 그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마는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완악하고 어두워져서 모릅니다.
세상은 다 ‘이런 보배로운 것이 있기는 있다. 이 보배로움을 우리가 가져 가지고 참 보배를 가진 가치 있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져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더듬어 파기를 어데를 파는가? 어데 가서 이 보배를 캘라고 파고 있는가? 어데 가 가지고 가서 이 보배를 만날라고 이리 저리 헤매여서 날뛰고 움직이고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는가? 그것은 기껏, ‘아무래도 이것은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해서 모든 사람이 여게 있다 저게 있다 말하고 있으니까 거게 가서 찾아야 이런 보배를 찾아내지 않겠는가?’ 해서, 인간들의 그 수많은 지걸거리는, 그 발언하고 또 발표하고 주장하고 또 저술해 놓은 책, 말 그런 데 가 가지고 이런 보배롭고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나올까 해서 그런 데 가서 파고 더듬고 헤매고 야단을 지기는 것이 세상입니다.
온전한 것이 온전치 못한 데서 온전한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데서 영생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유한한 것에서 무한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멸망할 것들 속에서 영원히 멸망치 안할 것들이 나올 수도 없고 멸망할 것들은 억억만이 합해 가지고 단합해서 한다 할지라도, 멸망할 것이 억억만이 단합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조성한 것은 내나 멸망할 것들이지 멸망할 것들의 숫자가 많다고 그것들이 멸망치 아니할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들이 이 완전한것을 발굴해 가지고 이 완전한 것을 찾아내는 것은 어데서 찾아내는가? 찾아내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소개하고 있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안내하고 있는 그 안내를 따라서 가 가지고, 신구약 성경이 안내한 그것들에게 가 가지고 이렇게 영원하고 온전한 것을 발견도 하고 찾아 가지기도 하고 가질 만한 사람도 됩니다.
사람은 그대로의 자연인으로서는 아무리 그 사람이 크다고 해도 요 지구 땅덩어리 안에 다 싸잡혀 가지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좀 크다고 하면 우주라는 이 테두리 속에, 이 공간 속에 파묻혀 있는 자들입니다. 여게를 넘지를 못하고 이 너머는 모릅니다.
이종교에서 공연히 추측 추상 추론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그 이종교 창설자들은 다 자기들의 그 죽은 양심도 없는 자들입니다. 유교를 주장한 유교 학자들은, 그 도를 전한 선도인들은 솔직하게 말해서 사람에 대한 지식도 ‘생부지 사부지라’ `사람이 어떻게 났는지 그거 모른다. 또 죽으면 어찌 되는지 모른다.’ 그게 솔직한 고백인데 석가모니는 알지도 못하며 이런 말 그런 말 거짓말을 해서 인간을 유혹시켜서 자멸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뭐 불교인들이 들으면 굉장히 시비가 나지마는 나는 성경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인생관과 석가모니가 말한 인생관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니까 그거 틀렸다고 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자들이 자신을 이 우주를 집어넣어도 한쪽 구석도 채우지 못할 만치 자기를 크게 확대시켜서 우주와 영계를 다 집어넣어도 자기 속에 한 구석도 채우지 못할 만치 자기를 큰 사람 만드는, 자기를 크게 만드는 것이 어데서 자기를 크게 만들 수가 있는가? 그 크게 만들 수 있는 그것을 오늘 저녁에 말할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이 시간이라는 세월이라는 이 세월 속에, 억억만 년이라는 세월 속에 자기가 싸잡히지 안하고 이 세월을 초월해서 억억억억??만 년이라 해도 그것이 내 안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한쪽 구석도 채우지 못할 만한 이 시간을 초월한 이렇게 큰 자를 만드는 것을 어데서 만들 건가? 또 우리가 아주 하나의 그저 곤충에 지나지 못하는, 그거 뭐 사람이 참 “한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크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사람의 생명이 가치 없습니다. 6 5 때 죽은 생명만 해도 뭐 이백만이라던가 이천만 명인가 죽었답니다. 노아 홍수에는 수십억이 죽었습니다. 그거 가치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는 그 생명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이 피조물인 인생이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결합이 돼서 하나가 되면 하나된 그 결합은 모든 천상 천하의 피조물보다 크고 위대하고 또 가치 있다 하는 걸 말했습니다. 가치 있습니다. 하나님 다음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능력도 지혜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시간 자꾸 가니까?
이번 공과에 제목이 그러합니다. 제목이 뭐이냐? ‘하나님 다음가는 영광스러운 구원이라’, ‘하나님 다음가는 영광스러운 구원이라' 하나님이 첫째고 하나님 다음, 영계의 모든 것도 우주의 모든 것도 우리 다음 다음입니다. 하나님 다음에 우리 구원, 우리 구원 다음에 영계와 물질계의 그 모든 것들입니다.
이제 본론에 가서는 열한 가지를 여게 기록했는데 우리의 그 보배롭고 영원한 것이 어데서 나오는가? 우리가 소망하는 보배롭고 영원하고 그 큰 것이 무한한 것이 어데서 나오는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믿음 자체에서 나오는가? 아닙니다. 믿음에서 나온다 말은 믿음 그 속에 뭐 아무것도 없습니다. 튕 비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에서 나온다 말은 그 모든 것이 무한히 내재하여 있는 그것과 연결에서 나온다, 연결에서 나온다 그말입니다.
믿음에서 나온다 말은 무한이 있는데, 그 무한 완전 영원 불변 이것이 있는데 그것들에게 연결된 그 연결에서 나온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연결이라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그 연결은 어떻게 된 연결인가? 무한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그것을 자기가 실상으로 아는 데서 나옵니다. 아는 것만치 나옵니다. 아는 것만치 인정하고 인정한 것만치 그것이 나옵니다. 그것을 소망하는 것만치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이런 저런 작용 가지고는 근방에 가지를 못합니다. 다만 그 무한한 것을 내가 실지로 알고, 무한한 것의 실상을 내가 알고, 무한한 것의 그 실상을 내가 느끼고, 무한한 것의 그 실상을 내가 소망하고, 무한한 것의 그 실상에 내가 접선된 것만치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 무한한 소망이 어데서 되는가? 무한한 소망을 우리가 달성하는 데에는 어떻게 노력해야 되는가? 우리가 전능자가 되는 데는 어떻게 노력해야 되며, 우리가 큰 자가 되는 데는 어떻게 노력해야 되며, 모든 피조물을 다 발 아래 둘 수 있는 그런 자가 되어지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는가?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히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이 부자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이것은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읽고, 그다음에 생각하고, 한 것만치 인정하고, 실상으로 바라고, 실상으로 나와 접선된 그것이 바로 완전이요 영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해도 또 무슨 말인지 심령이 어둡고 좁으면 모릅니다.
이제 여게 열한 가지를 제가 읽겠습니다. 읽겠는데, 여러분들이 이 열한 가지를 첫째는 열한 가지를 외우십시오. 열한 가지를 외우십시오. 외우는 것은 읽는 순서요 기억하는 순서입니다. 열한 가지를 외우십시오. 그다음에는 열한 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한 가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하는데 그것만 생각하면 우리 심령이 어리기 때문에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특별계시요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만물과 하나님의 섭리와 모든 존재들의 그 본능과 기능과 사상과 그런 것들이 다 합해서 자연계시라 보통계시라는 말인데 이거는 자연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자연계시요 문서를 가지고 우리에게 그 무한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특별계시입니다.
이러니까 여게 열한 가지를 외우는 것은 이것은 특별계시입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에 있는 것을 따다가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게 특별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계시를 특별계시만 가지고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특별계시를 연구할 때에 자연계시를 가지고 연구를 하십시오. 자꾸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는 것은 처음에는 특별계시와 이 자연계시와 비교를 해 보십시오. 자꾸 비교를 해 보십시오. ‘특별계시는 이런데 자연계시는 어떠하뇨?’ 이렇게 비교를 해 보십시오. 비교를 해 보면 크고 작은 것이 나올 것입니다. 이거하고 이거하고 둘을 비교해 보면 크고 작은 것이 나올 것 아닙니까? 비교해 보면 크고 작은 것이 나올 것입니다.
또 거게서 가치를 비교하면 가치가 높고 낮은 것이 나올 것입니다. 또 거게 능력을 비교해 보면 능력이 많고 적고 크고 작은 것이 나올 것입니다. 뭐 자꾸 비교해 보십시오. 또 권위를 비교해 봅니다. 또 그런 것들의 존재의 활동성을 비교해 봅니다. 그 존재의 기한을 또 비교해 봅니다.
이래서 비교로 생각해 보고, 생각으로 비교해 보고, 생각으로 비판해 보고, 생각으로 평가해 보고, 이모 저모로 이런 것들을 자연계시에 있는 이 모든 만물들이 있으니까 이 자연계시로 되어 있는 이 만물들은 사람들이 대개는 알고 있고 모르는 것은 많지를 못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만 해도 원자라 하는 그것은 있었지마는 그것을 발명 못 해서 몰랐습니다. 원자니 전자니 뭐 수소니 하는 그런 것을 몰랐는데 지금 사람들이 발견해 가지고 ‘그 힘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다.’ 이거면 다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발견 못 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발견 못 한 것이 많이 있지마는 다 발명이 돼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발명이 된 지 오래가 되면 그걸 일반의 것이라 자연의 것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다 우리가 아는 대로 큰 힘을 가졌고, 강한 힘을 가졌고, 다 높은 가치를 가졌고, 권위를 가졌습니다. 그런 거 우리가 압니다. 아니까 그것과 우리의 보배로움이 나오는 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것을 그냥 글자로만 읽고 지내버릴 게 아니라 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것을 실상을 좀 만져보십시오. 실상을 생각하십시오.
그 실상을, 첫째가 ‘영원 전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 한 분만 스스로 계셨다’ 여게 ‘살아 계셨다' 그래, 내가 그래 공과 안 했는데 `스스로 계셨다’ 이랬는데 ‘살아 계셨다' 이렇게 기록됐는데 이거 고쳐야 됩니다. 스스로 계셨습니다.
요거 하나를 가지고 여러분들이 일 년이고 이태고 자꾸 생각하십시오. ‘아, 영원 전, 영원 전, 영원 전이면 천 년 전이가? 만 년 전이가?’ 자꾸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억만 년 전이가? 억억만 년 전이가? 몇 해 전이고?’ 영원 전이면 언제입니까? 몇 해 전입니까? 억억만 년 전입니까? 한번 계산해 봅시다,영원 전. 억억만 년 전? 아니오. 틀렸소. 억억억억만 년 전, 억억억억억만 전, 그라면 맞습니까? 틀렸소. 억억억억억?? 만일 그 사람이 백 살 먹는다 하면은 한 살서부터 백 살까지 억억억억?? 암만 해도 그 숫자는 영원 전은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영원 전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월과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장구합니까? 영원 전, 영원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는 모든 시간을 다 발 아래 밟고 그런 것을 다 멸시하고 그런 것을 무시하게 됩니다. 뭐 천 년이라고 깜짝 놀라겠습니까? 억만 년이라고 깜짝 놀라겠습니까? 영원 전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일은 억만 년 형통하다’ ‘억만 년 형통해도 그까짓 거야 한 치에 지내지 못하다.’ `이거는 억억만 년 형통하다’ ‘그래도 그까짓 거는 한 자에 지나지 못하다.' 영원을 자기가 깊이 깊이 생각해서 ‘영원이 뭐이냐?’ 영원에 대한 그 실상을 느낀 사람은 이 시간과 세월에 대해서는 완전히 그런 것들을 다 초월하고 그런 것들에게 제재나 제한을 받지 않는 시간적으로는 무한히 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영원 전. 영원 전. 영원 전 자존하셨다.’ ‘미국 나라가 영원 전에 있었느냐? 미국 나라는 언제냐?’ 그거 아주 몇닢푼치 안 됩니다. 얼마 안 됐소. ‘영원 전,' ‘그라면 이 지구 땅덩어리는 얼마나 됐느냐?’ 영원 전. `아이고, 이건 영원 전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영원 전이 아니다. 우주도 영원 전이 아니다. 영계도 영원 전이 아니다. 영원 전 것은 하나도 없구만. 영원 전은 하나도 없구만.’ 우리의 구원은 뭐라 했습니까, 오늘 본문 읽을 때에? 영원한 때 전부터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구원은 영원한 때 전부터라는 요것 하나만 알아도 땅위에 어떤 이종교의 그런 미혹을 받거나, 땅위의 어떤 것에게 피동되거나, 거게 매력을 느끼거나, 거기에 공포를 가지거나, 욕망을 가지거나, 평가를 두거나, 가치를 두거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이제 이를 우리가 느끼고 느끼고, 깨닫고 깨닫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우리는 우주와 영계를 하나님 밑에서 통치하고도 그것은 참 하루 아침 일거리도 안 됩니다. 잠깐만의 일거리도 안 돼요.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이 구원의 범위가 심히 넓어서, 그 넓다 할 게 아니라 우리 구원의 범위는 전부 무한이오. 우리 구원의 범위도 무한이요, 또 실력도 무한이요, 보존도 무한이요, 가치와 영광과 존귀도 무한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 한 분만이 스스로 계셨다’ 눈을 감고 가만히 ‘영원 전이라' 영원 전을 눈을 감고서 생각하니까 ‘이제 육천 년이 되는 이 우주 창조가 있었다’ 나는 영원 전에 가 가지고 지금 거기서 한번 생각해 보고 궁구할라고 하니 우주가 창조된 것은 벌써 그 뒤에 뒤에 뒤에 아주 뒤에 뒤에기 때문에 뒤를 얼마나 돌아봐야 보이지 돌아보지 안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우주는, ‘우주가 창조됐다’ `얼마나 됐나?' `육천 년.' 육천 년에 창조됐으니까 내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영원 전을 나는 그것을 지금 돋파서 거게 대해서 나는 지금 거게 있는 모든 사실들을 연구할라고 애를 쓰니까 ‘육천 년 됐다’ 그것은 아주 뒤를 돌아봐서 한참 돌아보니까 보일똥 말똥 있습니다. 땅위에 있는 이런 거 저런 거 그런 것은 더군다나 더 그러합니다.
‘영원 전 하나님 혼자 스스로 계셨다. 스스로 계셨다. 보자, 스스로 있는 게 있나?’ 제가 아는 대로 자꾸 주 댑니다. ‘이거는 어찌 됐노?' `그것도, 그것도 스스로 있는 게 아니고 원인이 있다. 그것도 원인이 있다. 그것도 원인이 있다.
그것도 원인이 있다. 모든 존재가 다 원인이 있다. 우주와 영계 모든 것이 다 그것이 근원이 있다. 원인이 있다.’ 원인 있는데, ‘이것의 원인은 뭐이냐?’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다.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다.’ 이제 자기가 아는 대로 주 대 봅니다. ‘이것의 원인은 뭐이냐? 이것의 원인은 뭐이냐? 이것의 원인은 뭐이냐?’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다 무엇이다.’ ‘그러면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는 그 스스로 있는 게 있느냐?' `스스로 생긴 거는 하나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의 원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그 모든 존재가 크다는 것을 내가 생각할 때에 그것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계시니까 창조주와 이 모든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의 이 비교를 하고 평가를 하고 비판을 해 보니까 이것을 없는 가운데서 지으신 분과 지음을 받은 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이래서, 모든 우주와 영계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차차 차차 보여집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크다는 게 보여집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스스로 계셨다. 그러면 그분은 원인이 없는 분이다. 무엇으로 말미암아 존재한 게 아니고 그분 홀로 계셨다. 아무것으로도 원인되지 안하고 스스로 혼자 계셨다. 스스로 계셨다.’ 그 스스로 계셨다고 당신이 증거한 이 스스로 계신 이 사실을 자꾸 궁구하고 궁구하니까 궁구하니까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았는데 그분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 없고 그분은 스스로 계셨다’ 이럴 때에 그분의 크심이 차차 차차 알려질 것입니다.
그분의 크심이 차차 차차 알려져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될 때에 거게서 ‘나는 이 크신 분의 아들이라, 이분의 아들이라. 이분과 서로 교제할 수 있고 상호내주할 수 있고 이분과 관련을 가질 수가 있다. 나는 이분의 아들이다.’ 이렇게 점점 이분의 크심을 생각할 때에 자신의 큼을 알 것입니다.
자신의 위대함을 알 것입니다. 자신의 존귀함을 알 것입니다.
‘천상 천하에 모든 것은 우리 발 아래 있고 우리는 그것들 위, 하나님 아래 모든 피조물의 중보로 되어 있다.’ 말을 하니까 이 말만 들어서 아무 감각 없이, 녹음기가 말 들어서 녹음되는 것처럼 아무 생명이 없고 아무런 실상의 그 감각이 없이 하기 때문에 놀래지 안하지 이 사실만 자기가 느끼고 깨달은 사람들은 다 깨달을 때에 뛰고 굴렸고 이것을 느껴서 깨달은 사람은 아무런 천상 천하에 우리 구원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뭘 탐하겠습니까? 뭘 탐합니까? 이래서, 우리의 눈을 좀 넓혀야 됩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우리가 멀리 보고 우리의 발자국을 좀 넓혀서 억억만 년이라 하는 것을 한 발자욱으로 건너뛰고 억억만 년을 다리를 쭉 벌리면은 억억억억억만 년이 내 다리새에 딱 들어갈 수 있는 이 큰 자가 우리는 돼야 합니다. 이런 큰 자인데 우리가 느끼지 못해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홀로 계셨다’ 느껴보고 느껴보고, 불교에서는, 불교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다 조부라운, 조부라운 꿀밤딱지같은 그 속에 들었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철학이고 뭐이고 다, 철학이 아무리 말해도, 똘똘 다 뭉쳐 와 봐도 한 주먹으로 때려서 바싹 깨고 이 모든 것은 ‘요 꿀빰딱지 안에 너거들은 든 것이다’ 그 밖에 있는 무엇을 그들에게 말할 때 그들은 상상도 느끼지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큰 구원을 우리가 받았지마는 우리가 등한히 하고 이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면 성령이 도와 가지고 우리에게 알게 하는데 생각해 보지 안하고, 비교해 보지 안하고, 성경에 말한 것을 새겨다 놓았는데,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이, 온 천하가 통일됐다 합시다. 통일된 그 통일 정권을 자기가 가졌으면, 통일 정권, 이 전세계 통일 정권을 자기가 가졌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큽니까 작습니까? 통일 정치의 전세계의 정권 가진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작은 것을 느껴봤습니까! 정말로 느껴봤습니까! 느껴보면 사람이 변할 것입니다! 암만해야 변하지 안해! 항상 땅의 욕심뿐이라.
땅의 욕심, 땅의 욕심 가지고 이는 뭐 이름 신자고 말 신자지 실상으로 생각해서 실상을 보지도 안했고 느껴보지도 안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항상 마귀에게 유린당하고 마귀의 꼬움에 걸리지, 마귀가 암만 꾀워 봤자 그 꼬일 것 뭐 있습니까? ‘보자, 마귀야.’ `이게 좋다.' `그러면 좋으면 그것의 수명이 얼마나 되느냐?’ 그가 거짓말 할 수 있습니까? 수명이 얼마나 됩니까? 뭐라고 해? 영원이라고 마귀가 말합니까? 뭘 영원이라고 말합니까? ‘또 그것이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느냐? 권위가 얼마나 되느냐? 필요 있게 이용 가치가 어데 어데가 소용이 되느냐? 소용 범위가 얼마냐?’ 얼마 안 물어서, 얼마 안 물어서 사탄에게, ‘네가 봐라, 내가 가진 건 이런 걸 가졌다. 이런 것 가졌는데 네가 이보다 좋은 것 줄 수 있느냐?’ 하면은 그놈이 바싹 깨져서, ‘너는 내 종이야. 영원히 너는 내게 종노릇 해야 돼.’ 그놈이 상전으로서 고패를 드리고 복종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도 참 자기가 만석군의 장자라 할지라도 제가 모르면 밥먹을 것이 없어 밥굶을까 걱정하는 못난 그런 사람도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라면 그거 정신 병자 아닙니까? 우리가 전부 정신 병자요. 이렇게 지극히 큰 구원을 우리가 도무지 생각해 보지 안하고 느끼지 안하기 때문에 자라지 안하고 자신이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땅위에 이런 뭐 피조물에 우리가 부러워할 게 뭐 있습니까? 부러워할 것이 뭐 있으며 두려워할 게 뭐 있습니까, 있기를? 이 큰 걸 모르기 때문에 땅에 있는 구더기같고 아주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의 억억억억??만분의 일도 안 되는 그거는 두려울 줄 알면서 이 큰 거는 두려워할 줄 모릅니다. 이 억억만분의 일도 안 되는 이것은 보배인 줄 알고 자랑할 줄 알면서 이 큰 거는 자랑할 줄을 모릅니다.
이게 뭐이냐? 우리의 심령이 어두워서 여게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안하고, 비교해 보지 안하고, 비판해 보지 안하고 했기 때문에 보배를 가졌지마는 이걸 보배인 줄 모르고 마귀란 놈이 파묻어 마귀란 놈이 ‘더럽다’ 하니까 이걸 더럽다고 집어던져 버리고, 이 보배를 우리가 가지고 보배를 주고, 참 정금을 주고 똥덩이 사는 그 미친 자보다 더 미친 자입니다, 우리가.
이거는 생각해 보지 않은 데에서, 자기가 생각하면 진리가 알려 주고 하나님이신 성신의 감동이 우리에게 알려 줘서 이 무한한 것을 알면 우리는 국부적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다 알고, 전체적으로 모든 존재를 다 알고, 모든 존재를 구비하게 정평 정가해서 알고 하니 내 말이나 하나님 말이나 같이 돼. 하나님 말씀하신 그 말이나 내가 말한 말이나, 안 들은 말도 내가 말할 때에 하나님 말씀과 같이 돼.
모든 것을 다 보고 정평 정가하고 다 알게 되면은 하나님 말씀과 내 말이, 하나님 말씀만이 이해가 돼지지 하나님 말씀 아닌 그거는 전부 착각되고 착오되고 다 이거 조부랍게 이 전부 오산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 하나에 미혹을 받을 수가 없어. 이렇게 우리는 자기를 키워야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 당신과 같은 완전자를’ 하나님과 같은 완전자를,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만치 완전합니까? 석가모니만치 하나님이 완전합니까? 공자나 노자나 그런 사람 뭐 소크라테스나 그런 사람만치 완전합니까? 누구만치 완전합니까? 자기와 같은 완전자를 만들라 했으니까 하나님의 완전이 누구만치 완전합니까? 비교를 안 해 보기 때문에 비교 안 해 보니까 땅위에 모래 알 같은 거 티끌 같은 거 그런 완전을 보고 막 사람 수천 수만 명이 들이 모여들어 가지고 야단을 지기고 이 완전함과 비교하지 못하니까, 비교를 안 해 보니까 천한 거와 가치 있는 거를 모른다 그말이오.
하나님께서 당신과 같은 완전자를 만드실라고 계획했는데 그 완전자가 뭣만치 큽니까? 뭣만치 크요? 영국의 대학자만치 큽니까 미국의 대학자만치 큽니까? 세계의 대학자만치 큽니까 대정권자만치 큽니까? 역사에 어떤 인물만치 큽니까? 세계에서 노벨상을 받은 그만치 완전합니까? 당신 같은 완전자를 만드실라 하는 것이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라” 했으니까 그 말씀이 증거하지 안했습니까? 우리를 그와 같은 자를 만들라고 했는데 이 소망이 그라면 세계에 뭐와 같습니까? 뭐와 비교됩니까? 자, 하나님 당신과 같은 온전한 자를 우리를 만드실라고 지금 이렇게 대속하셨는데 우리의 소망인 이 우리가 완전자가 될 터인데 이 완전과 비교되는 것 한번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비교되는 걸 말해 보십시오. 이걸 혼자 자문자답으로 얼마든지 비교해 봐야 됩니다. 비교해야 됩니다.
‘아, 완전하다. 그러면 서울대학 천재생이라, 동양에 제일 좋은 대학 동경제대에 특수생이라, 세계 무슨 콜롬비아라 하바드라, 그러면 어데서 공부하는 그 실력만치 클까? 어데 큰가?’ 자, 이보다 희망이 큰 걸 한 번 말해 보십시오. 저 ○○○목사님은 좀 박식이니 좀 알아들을 수 있어. 이보다 좀 희망 큰, 희망 큰 게 세계에 뭐 있습니까? 세계에서는 제일 희망 큰 게 뭐입니까? 세계에 제일 희망 큰 걸 가려내 보십시오. 그거하고 이거하고 비중을 달아보십시오. 억억억억??만 배도 더 큽니다! 왜 이 소망을 왜 무시합니까! 왜 멸시합니까! 정말 우리가 비교해 봤습니까? 우리가 따져봤습니까? 우리가 좀 생각해 봤습니까? 그러면 성경이 거짓말입니까? 이 거짓말입니까? 이 어데서 이런 모순 모순이 들어 가지고 마귀의 조롱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탄식거리가 돼 가지고 가련한 자가 돼 가지고 있습니까? 뭐, 우리가 무한하고 보배로움을 어데서 캐낼 건가? 요 열한 가지를 자꾸 생각하면 나옵니다. 생각하면 나오고 깨달으면 나오고, 생각하고 깨달을 때 어찌 생각할 건가? 비교해 봐라. 이 자연계시와 비교해 봐라. 이 세상에 우주에 있는 거와 비교해 봐라. 또 비판도 해 봐라. 가치도 비교해 봐라. 이러면 ‘보다 크다.
보다 온전하다. 보다 영광스럽다.’ 이래서, 하나님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모든 우리의 소망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모든 목적, 목적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걸 예정하셨다’ 여러분들, 이렇게 큰 말을 어떻게 합니까? 세계 조직신학에는 아직 안 나왔습니다. 없어! 이것도 이제 설교록에 나갈 것 아닙니까? ‘자존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정했으니 목적 그것이 곧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가 있기 전에 이 구원이 있었고 이 구원을 당신이 계획했고 이 구원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후에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 이 구원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걸 예정하셨다.’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고 하니까 그만인 줄 알지, 하나님이 영계나 물질계에 앞으로 영원히 전개될 것 있는데, 자꾸 전개될 그런 설계가 있는데, 영원히 전개될 설계가 있는데 그 설계가 내 구원 위해서 설계됐다 하는 이것을 자기가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고 느껴보지 안했으면 어떻게 그걸 알 것입니까? 우리가 자기의 이성 판단으로 논리로 자기가 생각해 보기는 했으나 논리는 실존이 아닌데, 논리는 실존을 찾아가는 것인데, 논리로서 실존을 자기가 생각해서 실존에 점점 나아가서 그 실상과 자기와 합치가 돼서 실상을 자기가 봤고 접했고 실상과 자기와 접선이 됐다고 하면, 모든 예정이 내 구원 위하여 예정되어 있는 이 실상이 접선됐다고 하면은 이보다 더 존영한 자가 어데 있습니까? 복 있는 자가 어데 있습니까? 마구 전체는 내것인데. 전체는 내것인데! 모든 존재는 이 구원 위해서 창조했으니까 모든 존재는 이 내 구원 위해서 존재하는데.
이것을 네가 어느 정도 실감을 가지느냐? 어느 정도 실상을 아느냐? 네가 어느 정도 실감을 가지고 그 실상을 네가 어느 정도 네가 가졌느냐? 요것이 피조물의 대소입니다. 알겠습니까? 하늘나라의 큰 것이 이것으로 크는 것입니다. 기독자의 행복은 여게 있어요.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으로서, 알고, 인정하고, 내가 믿고, 그분과 실상으로 접하는 여기에서 우리 구원은 다 되는 것입니다.
뭐 땅위에 그런 거 이런 거 저런 아무 공작들이 많지마는 그까짓 공작 그거 가지고 이것을 측량을 하겠습니까, 근방에 대 보겠습니까, 가까이 가겠습니까? 이렇게 보배로운 구원이 우리에게 와 있지마는 마귀란 놈이 꼬와서 이 구원을 생각해 보지도 못하게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봐라, 여게 돈돈돈, 권세권세, 이 출세출세.’ 네가 마귀가 출세를 말하거든 그 출세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등용되는 이 출세와 좀 비교해 봐라. 비판해 봐라.
이것을 비교하고 비판해서 차차 차차 실상을 알아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출세, 내 등장, 내 성장, 내 성공, 이것의 실상을 자꾸 보고 보니까 이런 것들은 먼지같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내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고 모든 전개가 내 구원을 위해서 다 계획되어 예정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삼키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 싸이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세상을 발 아래 둡니다.
세상이 삼키지 못합니다. 악령이 삼키지 못합니다, 이렇게 큰 자를 악령이 어떻게 삼킵니까? 악령이 삼키면 이런 큰 자는, 악령이 삼키면 삼켜집니다. 악령이 삼킬라 하면 쑥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악령이 바싹 터져서 깨져버리고 맙니다.
악령이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속에 큰 게 들어가 뻐들트리는데 이게 어떻게 안 깨지고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세상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세상 보따리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세상 자루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당신같이 온전한 자를 만들라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셔서 섭리하신다.’ 이것을 우리가 실상으로 느껴봐야 될 터인데, 이거 느껴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가치 없는 것에게 종이 되고 거게 미혹을 받고 사로잡히고 다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과 같은 완전자를 창조하고자 하는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하셨으니 곧 예택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계획을 세웠으니 곧 하나님의 예정이다’ 우리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계획을 세웠으니까 이것이 예정입니다. 이 전개된 모든,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것, 영원히 전개되는 이 모든 것 이것은 우리 구원 위해서 설계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 압니까? 어떤 구원인지 압니까? 이 구원을 알면 마귀가 막 들고 떠들어 박살이 뭐 야단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넷째로, ‘예정대로 큰 공간을 만드셨으니 물질로 우주라는 공간과 영질로 영계라는 공간을 만드시고 또 물 w 양질로 큰 옥을 만드셨다. 큰 공간 셋은 무에 존재하게 되었다.’ 이 공간 큰 것 셋. 우주라는 이 큰 것, 영계라는 큰 것, 지옥이라는 큰 것. 이 큰 공간 셋을 만들었는데, 혹 생각하기를 ‘그 셋을 그라면 어디다 두느냐? 그 셋이 어데 있느냐? 그 셋이 들어 있는 것은 그 셋보다 더 큰 것이 아니겠느냐? 그 셋은 어데 들어 있겠느냐? 그 셋이 들어 있는 데가 있지 않겠느냐?’ 요렇게 착각해서 어두워질 것이기 때문에 말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 없는데 이 셋만 만들었기 때문에 우주만 둥둥 떠 있고 영계만 떠 있고 지옥만 둥둥 공중에 떠 있는데 이거는 어데 있느냐? 아무것도 없는 무에 이 셋만 있어. 무에 이 셋만, 이 셋 있는 그 외에는 뭐이냐? 무라. 이 셋 밖에는 어데냐? 무라. 거게는 하나님과 이 셋 외에는 무라. 무, 아무것도 없어.
무라.
다섯째로, ‘우주 안에 각종 물질과 영계 안에 각종 영질들을 만드셨고 옥계에는 물질과 영계 양계의 것이 정죄받으면 가게 된다.’ 영계의 것과 물질계의 것이 이것이 정죄받으면 그다음에는 옥이라 하는 데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물계, 영계, 옥계,ㅡ옥계라 말은 옥이라 말입니다.ㅡ옥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 목적인 택자들을 위해 창조되었고 또 이용에 순응하고 있다.’ 구원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용하시는데 거게 순응하고 있다.
일곱째로, ‘양계 안에 있는,ㅡ영계와 물질계 양계 안에 있는 억억으로 계수 못 할 무한의 것들은 천태 만상으로 나고 살고 죽고 일하고 있으나 모두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물주에게 이용되고 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실상으로 느껴 깨달으십시오. ‘종교, 철학, 과학, 정치, 사상 이런 것은 이 중에 포함된 것들이다.’ 하나님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운영하고 이용하는 그 속에 하나로 들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실상으로 깨달아서 믿어야 합니다.
여덟째로, ‘하나님 목적이 예정으로’ 하나님 목적하신 것이 예정으로 진달되고, ‘창조로 보존으로 섭리로 성취되어 택자 출생,’ 여게 택자 출생합니다. ‘택자 출생,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 대속, 중생, 신행,’ 믿음의 행위를 가리켜서 신행, ‘성화, 영화, 부활, 그리스도 심판, 무궁의 생명 세계, 다시는 타락과 죽음과 변함과 아픈 것과 곡하는 것이 없는 사랑과 성결과 믿음과 화평의 기쁨으로 소망 중에 영생한다.’ 우리가 가 살 곳은 그곳입니다. 그 나라에 가서 우리가 삽니다.
‘영생한다.’ 아홉째로, ‘영생도, 그 나라에는 영생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있다.’ 뭐 먹을 것 입을 것 없어서 걱정할 것 없어. 죽을까 걱정할 것도 없어. ‘영생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있다. 다시는 배고픈 것도 이별도 시기도 미움도 시비도 영원히 없다. 자유의 세계이다.
실력대로 산다. 마귀도 죄도 사망도 없는 나라이다.’ 열째, ‘한 가지 문제는,’ `한 가지 문제는 실력 차이, 영광과 대우 차이, 봉사 차이,ㅡ다른 사람을 유익되게 봉사 생활하는 봉사의 권위의 차이,ㅡ가치 차이, 활동과 자유의 차이가 무한하다.’ ‘무한하다.' `모든,ㅡ다 모두 자유하지 얼마든지 왜 못 하느냐?ㅡ모든 제재와 제한은’ 뭣 때문에 그 나라에 가 제재가 있어 그때 뭐 차이가 있느냐? ‘제재와 제한은 자기 실력에게 제재받는 것이다.’ `자기 실력에게 제재받는 것이다. 남에게는 아무 간섭받지 않는 양심보다 깨끗한 영감 세계이다.’ 열한째, ‘오늘은 영원이요’ `오늘은' 오늘 이게 바로 영원입니다. 오늘 이것이 바로 영원이오. 오늘 이대로 영원 됩니다. 오늘 자기가 이 세상에 사는 그대로 영원돼. ‘오늘은 영원이요 영주처의 모든 것은’ 영원히 가 살 영주처의 모든 것은, `금일’ 오늘날이라는 금일, ‘언행심사대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 금일 일초라 하는 광음은 영원을 좌우하고 있다. 마귀는 없어질 세상을 가지고 우리를 꾀우고 속이고 있다.’ 문답에, ‘우리 구원은 어떠하뇨?’ `하나님 다음가는 영광스러운 구원입니다.’ ‘셋 공간에 어디 있느뇨?’ 둥그란 거 우주라는 거, 영계라는 거, 지옥이라는 거.
‘셋 공간은 어데 있느뇨?’ `아무것도 없는 무에 있습니다.' 셋째로, ‘모든 존재들과 움직임과 일하고 사는 것은 무엇을 하고 있느뇨?’ ‘자신은 모르나 택자 구원 위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무엇이뇨?’ ‘영원 마련입니다.’ 오늘은 영원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실상으로 좀 느끼십시오. 실상으로 좀 느껴 가지고, 실상이 어떻다는 걸 느껴서, 우리가 이 실상을 자기가 느끼고, 실상을 가지고, 실상을 가지고 실상으로 우리가 살아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 건데 이거는 하나의 말에 지나지 못하고 하나 얘기같이 듣고 이 실상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이 실상이건마는 이 실상을 느끼지 안하고 자기가 접하지 안하고 하기 때문에 실상이 만들어지지 안하고 하니까 모든 미련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땅위에 있지 하늘에 있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많은 명상 가운데서 실지의 자기가 신앙 실행의 그 실상 생활에서 우리가 오늘에 느끼고 찾고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