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0:20
치우치지 않는 법
본문 : 롬 3:10-18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참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 사람이면 됐다 할 만한 그렇게 하나님이 등용하실 만한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인이 없다는 말은 사람들이 표준한 의인은 많지마는 하나님이 표준하신 의인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지 안하면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으므로 비로소 의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의인은 어떤 것이 의인인고 하니 자기로나 어떤 피조물로 능동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원동이 되어서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 하나님으로 인하여 마음도 움직이고 생각도 움직이고 뜻도 움직이고 소원도 움직이고 감정도 움직이고 몸도 움직이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마음의 움직임이나 몸의 움직임이 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잠깐 의인의 길 걷다가 또 그만 불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발을 씻으셨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선생님이 제자된 내 발을 어찌 씻을 수 있습니까? 결단코 못 씻습니다. 내가 씻지 안하면 너와 나와 상관이 없다 할 때에 씻어 달라고 전신을 다 씻어달라고 하니까? 이미 씻어서 깨끗한 자는 발만 씻으면 깨끗해지느니라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그것은 미래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것을 가리켜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는 전체적으로 대속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졌기 때문에 한자옥 한자욱 걸어가는 발만 씻으면 된다 하루 하루 자기가 마음이나 몸이나 움직여 그것만 예수님의 피공로에 고해서 사유함을 받으면 된다 하는 그런 말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이 깨닫는 것도 하나님 중심해서 성경대로 깨닫는 것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있고 또 사람에게 대해서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 세상과 천국에 대해서 가르쳤었습니다. 거게 대해서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은 성신의 감화를 받지 안하면 깨닫는 자 하나도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종교마다 그 종교에서 다 이 우주의 주인 되는 신을 찾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들이 천조 대신이니 뭐이니 그런 소리를 하지마는서도 그 우주의 주인되는 그 신을 말할 때는 그들이 인정을 합니다. 그 신이 제일 높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일정 때에 신사참배 때문에 말할 때에 그 일본에도,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말하기를. 일본 말로 '아마노미 나까노 누시노감'이라는 신이 있지 않느냐, 이 우주에 제일 주인되는 신이 있지 않느냐 그 주인되는 신 그 신을 우리는 믿는다, 그 주인되는 신을 알지 못해서 이름은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부르는데 없는 가운데에서 우주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주장하시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 이름이야 뭐 지방마다 사람들이 이래 부르든지 저래 부르든지, 알고 부르든지 모르고 부르든지 어쨌든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하는 것을 해석을 해줄 때에 그 사람들이 그 신을 부인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지마는 그들이 참으로 참 하나님을 찾았느냐. ○교에서는 하나님을 많이 말합니다. 하늘님을 많이 말하고 한울님을 많이 말하고 이렇게 많이 말하지마는 따져 들어가고 보면 범신론입니다. 신 아닌 것이 없이 모든 것은 신이라는 것으로 돌아가고 말기 때문에, 일본 사람은 돌도 신이요 나무도 신이요 흙도 신이요 짐승도 신이요, 그만 전부 신이라고 이렇게 보는데 그것은 내나 ○교 사상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중에는 제일 ○교가 낫지마는서도 ○교도 내나 역연 범신론입니다. 그가 '인심이 즉 천심' 이라고 말한 것도 범신론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별스러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 치우쳐, 다 치우쳐서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속에 죽음이 가득 찼으니까? 목구멍을 열고 말을 하면 전부 이 죽음만 나온다 말입니다. 말을 하면은 말은 전부 이 죽이는 말 죽은 말뿐이지 산 말이 없어.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혀라 하는 것은 언제든지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를 중심한, 자기에게 속한 물질을 중심하든지 뭐 중심하든지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 한마디 전부가 다 인생을 삐뚤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부 이 속이는 말이라. 제가 평생동안 나는 거짓말 한 마디도 안했고 사람을 속이는 일 하나도 안했다 하지마는서도 그 사람은 제가 몰라 그렇지 제가,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다는 그 말이 아니라면 전체는 다 거짓말이요 다 속이는 말입니다. 자기는 좁게 봐서 무슨 물질을 속이지 안하면 뭐 있는 걸 없다 없는 걸 있다 그렇게 속이지 안하면 안 속인줄로 알지마는서도 인간은 다 멸망했는데 멸망 가운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 주님이시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 얻는데 주님을 전하지 안하고 주님을 중심하지 안한 그 말은 전부 다 속이는 말입니다. 물론 장사하면서도 속이고 또 정치하면서도 속이고 그래 속이는 거 있지마는 그거는 의례히 속이는 것이고 사람을 예수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는 그말이 아니면 전부 속이는 말입니다. 요것을 잘 기억하십시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피흘리는데 빠르다 그 말은 사람을 해치는데 빠르다는 말입니다. 해치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보응 주시기를 그에게 파멸을 주시고 고생을 주십니다. 인간들이 고생 당하고 파괴되는 것은 다 이런 연고입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말씀할라 하는 것은 이 말씀입니다. 12절에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뭘 하는 것같지마는 그 사람이 모두 다 치우치기 때문에 하나도 옳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치우친다는 것. 오늘 아침에는 치우친다는 요 명사를, 요 단어를 단단히 붙들고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어제 ○○○ 목사님이 이 감기 낫는 법을 말했는데 그걸 좀 하기는 했는데 아 낫습니다. 풍욕을 하니까? 그만 감기가 뚝 떨어지디마는 이제는 풍욕 그게 또 소용이 없어. 엊저녁에, 어젠가 ○○○ 목사님이 가르쳐 주는 것은 뭐 이태리 타올이라던가 그놈을 가지고 온 몸뚱이를 이래 되기 문대고 이라면 괜찮다 해서 엊저녁에도 문대 봤고 새벽에도 일어나서 문대봤고 이랬는데 감기가 잘 나갈란지 모르겠습니다.) 요 치우친다는 요 명사를 우리가 잘 기억합시다. 치우치는 것. 어데서든지 이리 저리 치우치면 안됩니다. 한문에는 '중용지도' 라고서 뭣이든지 제일 이리도 치우치지 안하고 한가운데를 잡으면 된다, 이것과 저것과 가운데를 잡으면 된다 그렇게 말해 놓은 것이 ○교입니다. 이 사람과 저 사람에 대해서 그 중앙을 취하면, 그것이 중용을 취하면 된다 이라는데 그게 아니고. 치우치는 것은 어떤게 치우치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이 없이 말씀을 해 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도 빠짐이 없이 다 말씀을 해놨는데 말씀 해놓은 고거에 명중돼서 말씀 해놓은 대로 그대로 돼야 되지 그게서 조그매 비뚤어 것이 그것이 다 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으로 치우칠 수도 있고 사람으로 치우칠 수도 있고 자기로 치우칠 수도 있고 남으로 치우칠 수도 있고 물질로 치우칠 수도 있고 명예로 치우칠 수도 있고, 여러 군데로 다 치우칠 그런 길이 존재마다 없는 것이 없습니다. 치우치는 것은 성경이 거게 대해서 말해 놓은 대로 그대로 해야 치우치지 안하고 바로 되는 것이지 성경이 말씀하신 그 외에 조그만치라도 이것을 중하게 여기든지 저걸 경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치우치는 것은 어떤 것이 하나님에게 대해 치우치는 건가? 그러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치우치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요렇게 믿어라 요렇게 의지해라 요렇게 바라봐라 요렇게 순종해라 하는 그대로 해야 하나님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지 제 생각대로 제 마음대로 이와같이 하는 그런 것은 다 하나님에게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하나 예를 든다면 마태복음 4장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라고 할때에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리라 할 때에 그때에 예수님께서 네가 이렇게 치우치는 말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대로 걸어서 자기가 부딪힌 그 어떠한 어려움에서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필요없는데,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가 안도와 주시는가 보자 이런데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제가 주장을 해 가지고서 발동한 그 일에 하나님이 따라서 돕는 그런 일을 하시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피동이 아니고 그것은 제가 주장하는 일에 하나님이 따라와 가지고 도와달라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정죄를 했을 때에 사탄이 도망을 쳐 버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자기에게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또 원수에게 대해서나 사랑하는 자에게 대해서나 가족에게 대해서나 친구에게 대해서나 이 사물에 대해서나 또 시간에 대해서나, 그 모든데 하나님께서 정확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정확한 가르침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그 정확한 가르침을 알고 그대로 해야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것이 가치가 있지 그렇지 안하면 다 헛일입니다.
죄라는 그 말의 뜻은 이 표를 찍어 놓고. 활을 쏘는 사람들이 가운데 점을 찍어 놓고 요 점에 딱 들어맞아야 이제 바로 쏜 합격이 된다 할때에 그게 딱, 그 점 찍어 놓은 그 구멍을 화살이 꼭 뚫어 버려야 이거는 바로 됐다 과녁을 맞췄다 이라는 건데 그게 맞추지 안하고 삐뚤어진 것은 옆으로 삐뚤어지거나 또 그 좌우로 삐뚤어진 것이나 상하로 삐뚤어진 것이나 어디로 삐뚤어져도 그 삐뚤어진 건 다 같다 그렇게 한 뜻을 가리켜서 죄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하면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또 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봉사해야 된다고 봉사 봉사. 희생 희생 이라면서 자기를 모르고 또 그리 치우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내나. 다른 사람을 모르고 자기만 아는, 그, 남에게 대해서 잔인무도한 그것이나 꼭 같은 죄입니다.
뭐 조금도 나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아무래도 많이 읽어야 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이 여게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그렇게 성경을 가지고 찾는 것이 말하자면 윤곽을 찾는 것입니다. 울타리 윤곽을 찾는 것이고 그래 찾아, 성경대로 찾아봤자 그 찾은 것이 그저 아주 삐뚤어지지는 안하지마는서도 바른 데에 가까이 갔다 그거요. 그라고 난 다음에 거게서 자기에게 양심과 함께 성신의 감동이 감동해 주는 그 감동이 있으니 감동대로 그대로 딱 됐을 때에 그것이 과녁을 맞힌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인도를 받고 성경의 인도를 받고 난 다음에 자기 양심이 살아납니다. 성경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성경대로 해야 되겠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성경이 뭐라고 말씀했는가, 성경의 그 구절을 자기가 모르면 여게 대해서는 설교할 때 어떻게 했으며 또 여게 대해서는 내가 평소에 알기를 어떻게 알았는가, 그 성경의 절수는 모르지마는서도 성경에 이리 이리 했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자기 정도로서 그것을 생각을 합니다. 생각을 해 가지고서 성경에 맞추어서 할라고 할 때에 그 마음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하는고 하니 신앙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양심이라 말은 자기 마음 가운데에 제일 깨끗하고 명철하고 바르고 옳고 정확하고 밝고 한 그 마음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이 다른, ○교에 대해서 ○교에서 뭐라고 말하노, 이 ○교대로 할라 하면 ○교적인 양심이요, 또 신앙적인 양심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나 성경 말씀이 말씀하는 그대로를 찾을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 양심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으로 뭘 찾느냐 신앙 양심으로 영감을 찾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짐작을 해서 찾아 놓고 성경 말씀 요대로는 요 성경 요대로 다 그래 놓고 거게서 요대로인데 내가 어떻게 해야되나 하는 것을 자기가 신앙 양심으로 찾을 때에 영감이 인도 하는 그 영감에 명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신앙이 된다 말은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에게 피동이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대로 한다고 해서 피동이 다 되느냐?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그저 그 방향을 가르쳐 주고,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인데 방향을 가르쳐 주는 그 인도를 받아 가지고 영감의 인도를 받아야 꼭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6장 19절입니까?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말이 어데있소? 예? 예? 마태복음 몇 장이지? 예? 6장 19절이요? 그래,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운 것과같이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뇨'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눈이 어두운 것 외에 네게 있는 빛이 어둡다 그 말은 뭘 가르쳐 말하는 것인고 하니 이 눈은 육신의 눈을 말했고 '네게 있는 빛이' 하는 그 빛이라는 그 광명은 양심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기에 제일 옳고 바르고 곧고 명철하고 광명한 그런 제일 으뜸되는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이 많이 어두워지면 얼마나 어두워지겠느냐 한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그 마음을 가지고 이제는, 이 육체의 감각을 가지고서 성경말씀을 찾고 육체의 감각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찾고 성경 말씀을 찾아 가지고는 양심을 가지고 영감을 찾습니다. 그러면 영감이 인도하는 그 인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라면 이제 그대로 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이, 이렇게 방향이 뭐 천도 만도 넘은데 세상 사람들이 어떤 한 사건에도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것이 그 종류가 뭐 수가 뭐 없을 만침 수가 많습니다. 그 사람의 지식대로, 지식이 천 개 만 개 넘으니까? 이 지식으로 말하면 이리 해야 되고 저 지식으로 말하면 저리 해야 되고 그러니까? 거게 대해서 불교인이 그 불경적으로서 말하는 것과 유교인이 유교적으로 말하는 것과 회교도들이 회교대로 말하는 것과 각각 다릅니다. 또 강도들이 저거 법대로 말하는 것과 다르니까? 이것을 이렇게 어지러운 이 갈래길 많은, 내가 앞으로 걸어갈라 할 때에 어데로 가야 되느냐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에 대해서 이 갈래길이 많은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길이 많은 이 길이 많아서 참길을 찾기 어려운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길에서 자기가 바른 길을 찾는 것이 무엇이 제일 필요한고 하니 성경 말씀이 필요합니다. 성경 말씀 가지고서 대충 바른 길을 찾습니다.
바른 길을 찾되 그 바른길 찾은 것이 어느 정도에 정확하나 하면은 울타리 정도로 정확하다 말이요. 저 울타리 밖이 아니고 이제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는데. 울타리 안에 들어왔지마는서도 그 울타리가 지금 우리 예배당 울타리 만하다고 하면은 이쪽 구석에도 있을 수 있고 저쪽 구석에도 있을 수 있고 또 어느 구석에 갈지 모른다 제일 한가운데를 가야 될 터인데 한가운데가 어데인지 그것은 성경 말씀 가지고는 찾아서는 안 되겠고 이제는 자기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성신의 감동이라야 그것을 바로 찾을 수 있다 그거요. 중앙을 그 안에 들어가 찾아.
그러니까? 이거 대신동에 가야 될런지 뭐 집이, 한없이 집이 많이 있으니까? 어느 집으로 가야 될지 모르는데 어느 집으로 가야 된다는 것을 대충 찾는 것은 성경이 찾는다 그거요. 성경을 찾으면 벌써 그 집 안에는 들어갔다. 성경으로 찾으면 그 집안은, 집을 바로 찾아 가지고 집 안에 들어가기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는 들어갔는데 울타리 안에서 어데가 한 가운데인지 모르겠다 어데가 한가운데인지. 그 한가운데를 찾는 것은 자기 신앙 양심으로 찾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성경은 배우라 사람에게 배우라 그 말은 그 울타리 안을 그 처소를 찾는 것은, 어떻게 행할 것을 찾는 것은 그, 성경이 가르치는데 그건 사람들에게 배워라 그러나 성경을 배워 가지고서 울타리 정도로서 이렇게 찾고 난 다음에 중앙을 찾는 것은 사람에게 배우라 했습니까? 배우지 말라 했습니까? 사람에게 배우라 했소 배우지 말라 했소? 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또 가르친다고 그 사람이 가르칠 줄 알고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남의 것은 못 가르쳐 줍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이 가르치도록 성령에 물어야 되도록 했습니다. 왜? 사람의 양심을 써야 되도록 요렇게 해서, 그래야 이 육체의 모든 기능이 자라게 되고 살아나게 되고 또 양심이 살아나, 이 모의 양심 저 모의 양심 양심도 다각인데 이면에 대한 양심이 있고 저면에 대한 양심이 있으니까? 그 양심이 다각면으로 살아나야 되겠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 양심을 써야 살아나는데 다른 사람이 자꾸 가르쳐 주면 그 사람은 기계와 같은 것이지 아무 소용이 없어. 이러니까? 사람들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이 너희들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가르쳐 줄 이는 '기름부음이' 기름부음은 곧 그가 중생된 영을 말합니다. 중생시킨 성령 중생시킨 성령님을 가리켜서 기름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기름부음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중생된 영이요 그 기름은 곧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너희 영에게 옳고 바른 것을 가르쳐 주고 있으니까? 네 신앙 양심이 중생된 네 주격, 네 영에게 물으면 영이 곧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랬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꾸 인식을 시켜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라 마귀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마귀 자식으로 살지 말아라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래야 이제 바로 찾아 가지고서 바른 길로 한자욱 한자욱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모르기 때문에, 뭐이냐, 16절에 산다는 것은 전부 파멸뿐입니다. 파멸. 자기가 자기를 파멸시키고 자기가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므로 파멸을 시키고 친구를 사랑하므로 파멸을 시키고 국가를 사랑하므로 민족을 사랑하므로 자꾸 파멸 전부 움직이면, 움직이면 파멸되고 움직이면 파멸되고 또 움직이면 고생되고 움직이면 고생됩니다. 이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평강의 길이 자기에게 없어. 평강의 길은 다 무슨 길인고 하니 하나님 두려워서 꼼짝 못하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꼼짝 못하고 하나님이 두렵지 안한 그 길이, 아 이 길로 가면은 하나님에게 관계없겠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꼼짝 못 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해하지 아니할 그 길만 찾아가는 길이 평강의 길입니다. 그 길만 찾아가는 것이 평강의 길인데 이 길을 모르니까? 자기 딴에는 이 길로 가면 염려없다 이 길로 가면 문제없다 이 길로 가면은 위험성 없다 이 길로 가면은 상할 이유가 없다 요렇게 안심하고 가는데 안심하고 가는 것이 전부 파멸이라 그 말이요. 그 길이 전부 파멸이요. 그 길이 전부 자기를 괴롭히는 그런 고통스럽게 하는 길이라. 그러니까? 왜 이렇게 했느냐 모두 사람이 뭐 의인이 없다 악하다 독하다 뭐 이렇게 모두 말했는데 그것이 뭐이냐 다 한말로 말하면 치우쳐서 그렇다 한 말로 말하면 치우쳐서 그렇다.
그러면 치우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 치우치지 않는 것이냐? 사람과 하나님과 하면은 하나님하고 사람하고 한가운데 딱 대반 쪼개는 것이 치우치지 않는가? 아니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가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가 남에게 대해서는 요렇게 해라 자기에게 대해서는 요렇게 해라. 다른 사람과 자기에게 대해서는 사랑하기를 어떻게 사랑하라 했습니까? 어떻게 사랑해라 했지요? 이웃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사랑해라 했으니까?, 사람은 이웃과 자기를 같이 사랑해라 꼭 같은 중량으로 사랑해라 그랬는데 사랑하는 순서는 어떻습니까? 한번 말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순서는 어떻지요? ○○○선생. 예? 그 순서는 누구를 먼저 사랑해라 했소? 예?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해라 했소 자기를 먼저 사랑하라 했소? '이웃 사랑하기를' 뭐라고 했소? 내 몸같이 그라면 누구를 먼저 사랑했소? 자기를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먼저 자기를 깨끗게 하고 다른 사람을 깨끗게 해야 됩니다. 자기를 하나님 앞으로 끌어서 하나님과 자기와 화평을 취하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을 자기가 화평을 취하게 합니다. 자기가 살아나야 다른 사람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고로 그 ○교에서 말하는 것은 그럴 듯한 말을, 기이한 말을 해서 한문에 중용 서전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도 다 보면 그럴 듯한데 666이요.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한 그대로, 그대로 하는 것이 윤곽적인 중앙이요, 윤곽적인 중앙이요 그 안에는 신앙 양심이 가르쳐서 영감이 하라고 하는 데가 이제 온전한 중앙이라. 참 치우치지 안하고 그게 꼭 바로 된 것이라.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이 치우치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을 기억하고 안 치우칠라고 하면은 우리가 눈이 밝아야 되겠는데 바로 볼라면, 첫째는 이 고기덩어리의 눈이 밝아야 됩니다. 고기덩어리의 눈이 밝아야 자기가 빠져 죽을 곳인지 안 죽을 곳인지 알겠습니다. 고기덩어리의 눈이 밝아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무슨 눈이 밝아야 됩니까? 마음의 눈이 밝아야 되겠고 또 그 다음에는 무슨 눈이 밝아야 되겠습니까? 영감 눈. 영감 눈이 밝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얼마나 그 어두움이 크겠느냐 했는데. 자기의 마음의 눈이 밝을라고 하면은, 마음의 눈이 밝을라고 하면은 거게 치료법이 뭐이라고 했지요? 치료법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인제 신구약 성경 말씀을 많이 읽어야 눈이 밝다 그거요. 또 치료범 하나 말했는데 뭐입니까? '보물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느니라' 네 모든 생활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게 되면은 차차 차차 마음이 밝아진다 그 양심이 밝아진다 네가 땅의 것에 소망을 가지고 피조물에게 소망을 가지고 살면 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네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살면 네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그라고 나면은,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은 영감의 눈을 받을 수가 있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치우치지 말 것. 어떤 사람은 그만 자기에게로 전부 치우쳐 가지고서 자기 하나밖에 모릅니다. 언제든지 들어보면 말하는 것도 제 중심이요. 가만히 그걸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들어보십시오. 말하는 것도 자기 위주 뭐 사건 처리도 자기 위주 모든 가치 평가도 자기 위주, 전부 이 자기 위주로 되어 가지고 있고 자기 위주로 되어 가지고 있는 그것을 벗어날라고.
나는 나 위주로 살 것이 아니라 남 위주로 살아야 되겠다 요렇게 또 남 위주로 하는 사람은, 남 위주로 하는 그 사람은 남 위주로 하니까? 자기 위주 아닌 줄 알아도 남 위주로 살라고 하는 그 사람의 위주를 파고 들어가면은 고등 자기 위주입니다. 그것이. 고등 자기중심. 자기중심이되고것은 지능적인 중심이요 고등 중심이라 고 등 자기중심이라. 이러기 때문에 그런 종교 창설자들이 지옥에 가 가지고서는 밑층에 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대로 가 아니면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모르면 그 사람은 눈이 깜깜한 사람이라. 눈에 안약을 사서 바르게 하라 그 말은 성경 말씀을 네가 가셔 성경이 뭐라고 인도하나 하는 성경 인도를 받아야 네 눈이 밝게 된다. 마음의 눈이 밝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기도회록에 등록된 사람은 삼천 사백 사십 팔 명. 10일 기도하러 온 분은 오백 팔십 육 명. 또 권사님들은 네 분. 장로님들은 아홉 분 이분들은 여게 와서 기도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도 기도 하고 직장에서도 바쁜 일 있을 때는 하고 어짜든지 하루 특별히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기도를 삼십 분을 잃지 맙시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 기억할 것. 치우치지 말 것 치우치지 말 것. 자기가 보면 알아.
자기가 자기를 알아요. 자기가 자기를 알고,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남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남에게 대해서는 띠끌도 보이지마는서도 자기에게는 들보도 안 보였으니까? 남에게 티끌을 찾거들랑, 그 티끌을 찾거든 그 티끌과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 반드시 자기에게는 들보만침 있다 생각하고 그만 추진해 들어가면, 추심해 들어가면 찾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