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마음


선지자선교회 1979년 12월 30일 주전

 

본문: 베드로후서 3장 1절 ∼ 7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성경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 그리하여 모든 면에 잘못됨이 없이  대비하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 이 말씀은 우리의  지혜의 눈은 하나님의 계시 말씀으로 자기의 지식이 수정 될 때에 그때에 모든  견해는 바로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어두움에 속해서 지척을 분별 못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66권의 성경으로 왔고, 또 무한함은  성령의 감동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오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 할 수 있는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밝히 보고  넓게 전체를 보고 깊이 보아서 우리의 견해나 평가가 욕망이나 방편이 후회됨이  영원히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노아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노아가 그 당시  일백이십년이라 하는 긴 세월을 자기의 소유와 전심전력을 기울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명령 순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일백이십년 동안 모든 정력을 하나님의 말씀 순종에다 투자했고 모든  소유를 다 투자했지마는 호리의 효력도 저희에게 오지 안했습니다. 온다는 것은  멀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수지 안맞는 일을 노아가 하고 있으니  안타깝게 여겼고 아무런 수지 안맞는 일을 노아가 하고 있으니 안타깝게 여겼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조롱했고 멸시하는 이런 것이나 저희들에게 왔지 아무런  효력은 오지 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희생이나 투자나 할 수 있는 일백이십년의 순종 생활이  그에게 피곤치 안했고 지루하지 아니했고, 한번도 낙관하지도 아니했고,  부족함을 마음 아피 허리를 동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백이십년을  일관으로 기울렸던 그의 생애가 어디서 나왔는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던가?  그는 분명히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창조주시오 주재시오 주권자시오 모든  존재들의 움직임을 홀로 섭리하시고 경영하시고 선포하신 계약대로 이행하여  하나 하나의 개별을 심사로 보응을 입히고 계시는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  모든 것이 그로 인하여 있게 된 그 하나님, 그분의 권위와 위엄과 사랑과  절대적인 공의의 보수성과 정의의 복수성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인정하는  거기에서 일백이십년 후에 방주 될 수 있는 흠이 없는 것을 조성하려는 데에만  급했고 아무런 그의 인간 나태가 그의 나태가 생겨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연 그이 생애가 일백이십년후 홍수 심판이 없었다고 하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없었고 실패한 사람이 없었고 그것보다 인생을 크게 속인 일이 없을 만치  하나님은 속인자시오. 노아는 속임을 받은자요 그의 생애는 불쌍하고  가련했지마는 일백이십년 후 홍수의 이 심판 침몰이 있을 그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하심과 신실하심이 나타났고, 노아는 그이 생애가 그때가 있었고  그대에 그이 전심전력의 주력은 아깝지를 아니했을 것이고 허사를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믿는 사람중에 어떤 사람은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들 저 좋아 한 대로 했고, 또 그때도 각종의 유명한 네피림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대한 광대하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신실성을 인정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과 그 명령에 꼼짝 목하고  저희 식구의 일생이 붙들려 매여서 거기만 피동 되었던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인 것처럼 오늘도 그러합니다.

 오늘 보이는 모든 것 보이는 이면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추상 추론 추측 할 수  있는 모든 것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졌고 또 하나님이이를 친히  경영하시고 운영하시고 가감과 건설과 파괴를 홀로 하시는 절대자시요  주재자시며 주권자이신 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성경에 선포해놓으신 이 모든  계약을 참되게 인정하는 사람은 그 당시 노아보다 그의 마음과 모든 몸은 더  결박당해서 더 자유없어 거기에 피동되어 살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족해서  날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이분에게 거치지 안하도록 살려고 하는 것이  성도들이요 오늘의 이 성도들의 수가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의 일생에 심신의 움직임이 이분과 이분의 선포한 계약에게 완전히  결박당해서 이로 인하여서만 움직여지는 다른 틈을 가질 수 없는 이런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이 그 수가 무한합니다.

 성경에 한 밭에 둘이 일을 하는데 하나는 다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씀한대로 인간이 육안으로 인간이 자기 주관대로 모든 것을 견해해서  생각 하는대로 꼭 같은 외모의 생활을 하고 있지마는 실은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이행해서 거기에 피동으로 거기에 결박으로 조금도 자유하지 못하고  거기에 복종생활로 하는 그런 사람도 있고 껍데기는 같지마는 다같이 껍데기는  세상 생활을 하지마는 그 속속들이 하나님에 적인 인간 욕심에서 인간 행실에서  자아 중심으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놀랠만한 일입니다. 사람보기에는 꼭같은 생활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적인 생활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거기  떨면서 거기 맞추어서 언행심사로 사는 사람도 있고, 자기 욕심대로의 취사  선택을 해 가지고서 사는 사람도 있고 자기 욕심대로의 취사 선택을 해 가지고서  사는 사람도 있다는 이 성경을 볼때에 과연 내가 움직여 세상살이를 하고 있는  것은 어디 피동이냐 내가 피조물에게 피동인가 정말로 조물주 이분에게 피동인가  이분의 계약에 준한 움직임인가 여기 대해서 놀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들이 우리 개인들이 접촉할 수 있는 참사람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오, 또 우리 죄인들이 직접 접촉 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오.

 우리는 직접 접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오 우리가  흠없는 참사람을 접할 수 있는 이 참사람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오, 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보자 되어서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의 본질과  본성과 그 기능의 온전함과 같이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처음 열매로  나타나셨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됩니다. 우리의 눈을 크게 떠서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는 눈을 크게 떠야 됩니다.

하나님이 상대하라고 하는데 까지는 우리는 볼 수 있고 상대할 수 있고 하나님이  알게 하는데 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의 눈 우리의 지혜 지식의 눈을 밝혀서 성경을 보는대로  보고 성경이 비판하고 평가하는 대로 나의 가치관도 비판간도 이대로 가질 수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재빨리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우리가 수많은 존재를 시간마다 상상을 접하고 지식으로 접하고  우리의 욕망에서 우리의 이목에서 접하고 있습니다.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의 이면에 그것을 만들 때에 수종을 들었고 그것의 섭리 할  때에 같이 했고 그것을 경영할 때에 같이 시발하여 모든 것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심사 통치하고 주관하고 있어 우리가 알고 원하는 그 실존 그  존재 그것이 하나도 자존성이나 자유성이 없이 그들이 붙들려 매어 있는 그들을  결박하고 있는 그들을 절대성으로 통치하고 있는 그 이면에 참된 이치가 있는  것을 우리가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이면에 그를 사로잡고 있는 참된 이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고 아무리 큰 운동 배후라 할지라도 가난한 부이지  않는 세력을 붙들고 있는 참된 이치가 그 배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또 이보다도 그이에게 나온 모든 것은 다 진리요, 참된 이친데 이치를 이  아무것도 없는 무에 파송 하셨고, 파송 받은 이것이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이분  영체도 물체도 없으신 완전하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그 지혜와 권능과  사랑과 평강과 비판과 온 영화 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우리가 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러기에 육안으로 보는 것이나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나 지식으로  뜻하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만 보고 그 이면에 그보다 무한히 큰 세력을 가진  참된 이치를 보는 눈이 없으면 우리는 외식자, 이치만 보고 무인격 존재인  이치만 보고 이치 이면에 영원 생존하신 살아계시는 인격 존재, 우리 사람의  사람에게 그 분의 형상을 찾아 볼 수 있는 지정의 희로애락 모든 속성을 완전  속성을 가지신 이 분이 계신 것을 잊어버리고 만일 이치만 상대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의 율법주의자로서 자기를 정죄 할 것 이상이 없을 것이고 이 이치를 모르고  보이는 존재만 상대한다면 그의 생애는 전체가 조이는 것들에게 종이 되어  멸망할 생애 외에는 아무것도 이루어 질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땅위에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는 모든 존재에 첩하여 삽니다.

그는 나보다 큰 자, 그러나 그보다 참된 이치는 더 큽니다. 그보다 하나님은 더  크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면 내가 죽는 것을 기뻐하였으리라, 왜 나로  하여금 죽음보다 능하신 그 분은 나보다 크심이라 나보다 큰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너희들이 걱정하고 슬퍼하고 파괴요 사망이요 실패인줄 아니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그는 오판의 사랑이기 때문에 나를 넘어지심을 바라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땅위에 어떤 생활을 하든지 우리의 생애는 앞에 하나님으로  심판이라는 이 절대성 있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심판에서 우리의 모든 생애는 영원한 결정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심판을 인한 조심이 아니라면 다 죽은 생활이오, 아무리  조심해도 심판을 보면서 심판을 인하여 하는 조심, 심판에게 걸리지 아니하도록  하는 조심, 심판을 보는 조심, 주의 심판을 보는 근심 심판을 보는 비판과  심판을 보는 노력 심판을 보는 절재 심판을 보는 건설 심판을 보는 의지 심판에  상관없는 의지가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앞으로 심판....

 그러므로 우리의 비판도 심판을 보면서 심판을 근거한 비판이야 되겠고 평가야  되겠고 경영이야 되겠고 심판에 관련한 심판을 인한 가지라야 심판을 인한  영광이라야 심판을 인한 권세라야 심판을 인한 실력이라야 실력이지 심판을  모르고 인간 심판에 반드시 가고야 마는 것이 인간이 죽고야 마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 심판에 가서 깨어질 영광이 무슨 가치가 있으며 존귀가 무슨 가치가  있으며 실력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지위가 무슨 가치가 있소? 평강이 무슨  가치가 있오?  나를 존재한 이분의 검사가 있으니 이 분의 심사가 있으니 이분의 심판이  있으니 인간의 중론도 중요하지마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의 주관적 견해도  중요하지마는 이것도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이분의 심판 앞에 설터이니 이 심판에 어떻게 되느냐 하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기뻤는데 이 심판으로 인하여서 그 기쁨이 심판이 가지전에  사라지고 근심이 있었는데 이 심판을 인하여 근심 그까짖기 아무것도 아니라  사라지고, 이 심판에서 나오는 근심, 심판에서 통과될 모든 건설 심판이  파괴시키는 파괴 심판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자기는 아무런 것도 안심할 수 없고  상대할 수 없고 그의 모든 견해가 심판을 치중하여 움직여지는 이것이  기독자입니다. 우리는 갑니다. 안 죽으려해도 갑니다. 안 죽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심판 앞에 서지 아니할 자는 없습니다. 인간은 절대 자존자가 아닙니다.

 오늘에 지질학자 관학에 속한 과학자들은 이 우주가 생겨진 것이 여러  수억억만년도 넘었다는 이 말은 제 꾀에 제가 속았소. 성경에 말하기를 이천년  미만입니다. 인간이 말로 하니까 이천년 이러지만 실상 인간에게 역사가  이천오백년 이상 역사가 인간 역사가 없습니다. 성경에만 있습니다. 과학자는  인간의 도살입니다. 성경이 말한 것보다 크게 말하는 것도 죄요, 적게 말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런고로 심판에서 통과 될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라 자기의 전 생애가  심판에서 조절되고 앞으로 가서 심판 앞에 가가지고 될 그 조절을 그 심판을  스스로 오늘의 심판보다 스스로 자취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기가 다스리고  자기를 자기가 심판하여 내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지마는 내가 두려운 것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심판 앞에 갈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자책되는 것 다  해결 됐다 할지라도 내 눈이 어두어서 성경가지고 아무리 짚어봐서 해결 됐다  할지라도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 분 심판 앞에 갈때에 내가 건설해 놓은 것이  어떻게 파괴 할는지 내가 가진 그 모든 기능이 어떻게 될는지 내가 가진 주장과  모든 실력과 모든 희로애락의 모든 행복이 어떻게 될는지 여기에서 평가를  가질려고 하는 이것이 미래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땅위에서 아무리 자기가 노력한다고 회복하겠다고 해도 이 심판을  부인하고 가진 것은 다 허공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모든 건설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땅위에 어떤 건설을 한다 할지라도 심판  넘어 영원 무궁, 영원 불변의 세계가 있습니다. 인생에게는 영원 불변의  무궁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의 건설을 오늘에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어떤 종류의 건설을 하든지 그 나라가 우리의 영주처요,  우리의 세계요, 그 나라의 건설이 참 우리의 건설이오, 그 나라의 파괴가 우리의  파괴이기 때문에 땅위에서 어떤 파괴도 조롱하지 아니하고 그 나라의 파괴를  내가 부지런히 할라고 벗어 갈려고 땅위에 어떤 건설도 탐하지 아니하고 그  나라의 건설을 자기의 건설로 삼아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이 생활이 십자가의  생활이기 때문에 멸망 가운데 있는 어두움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걸음을 미련케  보고 어리석게 보고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이것이 권능입니다.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무궁을 소망하여 건설하고 보이는 파괴에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 여기고 무궁한 파괴를 자기 파괴로 삼고 빈부 귀천을  무궁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고, 현재의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겨  현재의 모든 것을 무궁을 위하여서 투자하고 수많은 인간의 역사의 모든  중론들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상대하여 그의 모든 것을 수정하고 경영하는 이  사람이 되게 하려고 우리를 구속하셨고, 66권 도리를 주셨고, 영감을 주신  것입니다.

 노아는 우리에게 거울입니다. 그가 치우쳐한 마음이 눌려서 산 그것보다도  바울은 말하기를 무거운 짐진거와 같다 마음이 눌려서 무거운 짐진 것 같다.

처음 주님을 만날 때와 일년 이년 지나가니까 느껴지는 그의 마음이 더 두렵다.

더 깨달아 지니까 더 두렵습니다. 갈수록 하나님이 더 두렵습니다. 그의 비판이  더 무섭습니다. 뭐 땅위에서 누가 알아주든지 못 알아주든지 상관이 없이 그가  상관이 없어 그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런고로 노아가 피곤치 않는 그 생애보다 오늘 신약시대는 그로 유가 되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아라,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 피곤치 아니할 수 있는  그 신판 진리관 심판관 세상관 바로 가져도 진리의 생애가 급급하고 마음이 조려  견디지 못하지 이것이 피곤타 지루하다 하는 이것은 벌써 소경이오, 근시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마음을 넓힙시다. 우리는 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존재를 다 두고 가치를  정합시다. 하나만 보면 그 가치가 제일이오. 그러나 모든 존재는 다 중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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