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12:22
진실-양심
1980. 11. 8. 토 새벽
본문 :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 생활을 아는데 있어서 세상은 우리에게 꼭같은 일을 하고 잇습니다.
우리에게 효력도 같은 효력을 우리가 취할 수있도록 해 있고 또 우리에게 대한 마찰도 꼭 같은 마찰을 가지고 잇습니다. 또 하나님도 부르심과 택함의 은헤를 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만 진실이라는 이것이 차이 있는데 이 차이가 자기를 통해서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 진실 면에 대해서 풍부하면 풍부한 그것이 이면 이면 근거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이 진실이 그 사람에게 풍부하면 하나님이 그 사라메엑 뜨겁게 강하게 함께 하시는 증표 입니다. 사람이 진실이 없는 사람 있는 사람, 충만한 사라 있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이면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고 있고 풍성한 그 표적입니다.
그러기에 진실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 면에 함게 하시지 않는 그 표적입니다.
그러기에 일은 곧 우리의 모든 소유나 몸이나 생명보다 아주 탁월한 보배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는 땅위에서 우래 사는 것도 아니요. 땅 위에 유명하게 사는 것도 아니요. 또 부강하게 사는 그것도 우리의 가치는 아닙니다. 다만 믿는 사람은 십칠장에 말씀해는 이 모든 것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는 이것만이 자기의 성공이요 가치입니다. 아주 높은 자리 유명한 자리 높으고 유명하고 부강한 그 위치에서도 이 싸웅ㅁ에 이기는 것은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또 자기가 인간 중에 사람으로 보기에 가장 천한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 모든 들을 승리한 그런 사람으로 구원에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음녀라든지 일곱머리 열 뿔 도 음행의 포도주 도 금잔안에 들어 있는거 이런 것은 어떤 사람에게나 꼭같은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병신같은 못난 사람이라도 이것이 꼭같은 전투의 상대로 났습니다. 또 아무리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는 광대한 무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 전투의 대상은 같은 자입니다. 껍데기만 색깔만 다르지 속은 꼭 같습니다. 색깔이 다르다 그말은 사람 보기에 이는 크다, 작다, 영광스럽다, 천하다 하는 그런 꺼풀은 다르지만은 속에 신도 악령도 같고 하나님의 목적도 같고 또 승패의 상벌도 꼭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애 가치는 승리에 있습니다. 승리는 택함을 입어야 되고 또 중생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는 어디서 차이 있느냐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 진실 진실은 어떤 기 진실ㄹㅇ이냐 진실은 둘이 아닌 하나만 되는 이 하나를 찾아가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를 찾아가는 것이 진실인데 하나는 이치로서는 진리츨ㅊ 찾아가서 만날 수 있는 진실이 되고 사람은 인격 존재인 그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나야 아 진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진실은 자기가 인정할 수 있는 진실이 되어야 ㅗ디겟고 또 이 사회성 역사성 다시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수 있는 이 특별계시 보통게시 이 계시가 인저아는 진실이어야 하고 다음에는 하나미이 인정하는 진실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인정하는 진실이라 그 말은 자기 양심이 인정하는 진실이라 그말입니다.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진리인데 이 진리가 인정하는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 어 이 자연계시 특별계식가 인정하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에 딱 들어 맞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중심하지 아니하고 자기 중심으로 여기 이치에 맞출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에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무넹 그것은 또 머리가 없는 진실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미을 찾아서 만나면 그것이 최종인데 우리가 출발하는 첫 발자국이 뭐인고 하니 자기가 인정하는 진실입니다. 자기가 인정하는 진실이라 그거는 어 자기 신앙 양심이 에 인정하는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신앙 양심이 인정을 한다. 그러면 이것이 첫 발자국입니다. 이것만 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돕습니다. 돕는데 자기 할 일은 어떤 것이 자기 할 일인고 하니 오만한 자기에 앉지만 안하면 진리를 필연적으로 찾아 만나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찾아 만나게 됩니다. 또 진리를 찾아 만난 자가 오만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게 됩니다. 이거는 다 필연성입니다.
제일은 제 제가 보기에 순전히 자기가 노력이라고 제가 보기에 순전히 자기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 자기 보기에 진실 이 양심 신앙 양심 생활에 도달이 되면은 그 다음에는 오만한 자리에만 앉지 아니하고 이제 됐다 하고서 끝내지만 아니하면 자기 양심을 찾아서 만난 고것이 이면 넉넉히 종착합니다. 마지막 종착 하나님에게 종착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생활은 제일 어려운 것이 어디 있느냐 양심 생활이 제일 어렵습니다. 양심 생활이 제일 어렵습니다. 양심 생활에 도달하면 양심을 자기의 안내자로 지도자로 이렇게 삼아서 양심의 인도를 받게만 되면 그 다음에는 오만한 자리에만 앉지 아니하면 필연적으로 자기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양심은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이 계시를 자기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찾아가는 이것이 양심인데 양심대로 햇다고 해서 진리에 맞은 것 아닙니다.
성경에 모든 진리를 자기가 아 활용학 이 특별계시의 지식을 활용해 가지고 가면 자기가 걸어가야 할 그 자기 진리 자기 궤도에 도달하게 되니다. 설령은 자기 진리에게 인도하는 역활을 합니다. 성경 말씀이 자기 진리에게 인도하는 역활을 할때에 그것을 믿는 사람의 상식이라 일반적 성경 지식이라 이 지식으로 활용하면 마지막에는 자기 진리 지식에 도달할 수 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인도를 받는 이겄이 어렵습니다. 양심의 인도를 받을라고 하면 첫째는 사가 없어야 됩니다. 사가 있으면 양심의 인도를 못 받습니다. 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사를 부리는 것을 말하는 사가 아니고 자기에게 대해서 사를 부리는 사를 말합니다. 사라 없어야 됩니다. 어 이것을 부인하라 하는 말슴이 사를 버리라 그말이빈다.
사욕을 버리라 사정을 버리라 자기 중심을 바리라 자기 위주를 버리라 하는 그런 말들이 다 양심을 일으켜 살리는 방편을 가라쳐서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양심을 만나는 데에는 사를 서리야 양심을 만나게 ㅗ딥니다. 아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다르 ㄴ사람이나 또 이해나 그런 것을 완전히 초월해서 잇는 신령한 기관입니다. 게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어 자기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웃도 돌보지 아니하고 사정도 돌보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향하여 가는 것이 양심입니다. 진리의 인도를 받는 것이 양심입니다. 이래서 이 양심에 대해서 이떤 어 학자들은 이 야잇ㅁ은 인적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게서 사람들에게 신적 요소를 보내는 그것이 양심이다 이러기에 이 양심은 사람에게 신적 요소를 보내는 그것이 양심이다 이러기에 이 야잇ㅁ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졸면 안돼)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제가 그때 여 고신에 와 가지고서 헤겔의 그 철학자가 와서 헤겔에 대한 그 철학을 강의하는데 그 사람은 양심은 인적 요소가 아닌 하나님의 사자라 그렇게 인식하고 있으비다. 있고 물리학자인 그 사람은 선고사로서는 진리에 가장제가 듣는 대로는 접한 대로는 밝다고 볼 수 있는 그 석바사라 하는 분이 한번 왔다 갔는데 그분도 양심은 하난미의 사자라 하는 그렇게 양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다 그들이 양심을 쓸 때에 그 양심이 부념ㅇ히 자기에게 붙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들을 가진것입니다. 이렇게 깨닫는 학자들은 양심은 자기의 요소입니다. 마음에 속한 것인데 마음에 제일 머리가 되고 마음을 바로 인도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인도 자인데 그것을 가라쳐서 너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하는 그 빛을 양심을 가라쳐서 빛이라 그렇게 마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이러헥 보는 그 견해가 어디서 나왔느냐.
양심은 사가 없는 자기에게 사정없는 자기에게 사정이 엇을 때에 양심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자기의 체험에서 말한 것이빈다. 대다히 아름다운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빈다. 그러나 그 개달음은 잘못입니다만은 양심이라는 것은 이것은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나 사건이나 물건이나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의붙들려 매이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그것이 양심이빈다. 진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등불이요 등불과 같고 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은 벌써 진리 안에 잇고 진리는 우리의 영 안에 있고 우리 영으로영감 안에 잇고 영감은 우리 영 안에 와서 있어서 있는 영생이 됐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룰려고 하는 것은 다만 심신의 이 구속 이것을 이루워 가는 거히 우리의 구원인데 영이 얻은 구원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꼭 같은 구원입니다. 택한 자들과 중생된 자들은 그러나 하늘 나라에가서 영의 영ㄱ솽의 차이가 있는 것은 무슨 차이나 어떠 영은 그 심신을 세상에서 ㅊ잘 다스려서 기능이 구비한 심신의 심신을 가지고 있고 어떤 영은 세상에서 그 심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복종시키지 못해서 이 심신이 제 욕심대로 제 뜻대로 제 주장대로 제 기분대로 저 하고 싶은 대로 벌판으로 이렇게 자유하는 이 심신을 다스리지 못한 이 영이기 때문에 기능이 구비치 못한 또는 빈약한 그런 심신의 기능이 빈약한 그런 심신을 가지고 있는 여입니다. 거기서만 차이 있습니다. 진실은 자기가 사를 떠나야 됩니다. 사르 나지 아니하면은 진실을 만나지 못합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생각하든지 생각할 땡에 자기 사정을 자기를 사정 두고는 자기에게 걸려서 이 양심은 벌써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양심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먼지 자기를 떠나서 자기에게 걸리지 안해야 됩니다. 또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아닌 어떤 그 민족이라도 국가라도 어떤 것이라도 그걸 떠나야 됩니다. 더나는 것 중에 민족을 떠나는 것 보다도 국가를 떠나는 것 보다도 애정을 떠나는 것보다도 물질을 떠나는 것 보다도 권세를 떠나는 보다도 고락을 떠나는 것 보다도 떠나는 것 보다도 자기 떠나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이것이 가라쳐서 자기를 부인하라 그말이빈다. 모든 걸 떠나라 하는 것을 가라쳐서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자기를 떠나야 양심을 만날 수가 있고 양심의 지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양심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양심의 대적이 자기인데 양심언 자기에게 사를 두지 않습니다. 사정을 두지 않습니다. 만일 두 사람이 관계되면 자기나 그 사람이나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사정도 안보고 내 사정도 안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 찾아가는 그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데에는 어떤 것이 옳으냐 그것만 찾는 것디 양심이요 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데에는 이는 법칙이 다른 법칙은 하나님을 하나님께로 안내하지 못ㅅ하니까 인도하지 ㅗㅅ하니가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이 자연계시로 실패햇기 때문에 특별계시 줬으니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를 이 종합해 가지고 하나님이 특별계시로 자연게시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그진리고 진리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잇습니다. 여 진리만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인도합니다.
이러기에 요 양심을 자기가 만나는 데는 사를 버리야 되는데 사를 버릴라면 어떻게 하면 버립니까 자기가 사정을 버린다 양심 생활하는 줄 알지만은서도 어리석습니다. 사를 자기를 부인해야 ㅗ디는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를 산 제물로 올려 놔야 자기가 부인되지 그전에는 부인이 안됩니다. 산 제사로 드리라 그러면 비로서 이 세대를 본 받지 아니하고 그말은 세상 같이 산지 아니합니다.
마음에 변화함을 받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자기가 만날 수 있으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 가서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부인하고 할라면 산제물로 드리야 되는데 산 제물로 드린다는 이것을 가라쳐서 마음을 다하고 못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또 어떨 때는 성품을 다하고 이랬는데 이것은 다한다 말은 그 무슨 말을 가라쳐 말하는고 하니 자기 마음이야 어쨌든 돌아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마으에게 붙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아 목숨을 다하고 자기 생명이야 죽든지 살든지 상관 없는 걸 말합니다. 왜 목숨 이걸 다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뭐 하나님만 만나면 도는 것이지 모숨잉 살고 죽고 고생스럽고 평안하고 자기의 힘에 힘이 많이 든다 들든다 그기 상관이 없어 힘이 많이 들든지 적게 들든지 힘이 거게 다 들어 버리든지 자기의 뜻 자기의 뜻은 자기의 사정이라 말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겟다 자기가 자기가 비판 다음ㅇ는 뜻이 정해지는 것인데 오늘 까지의 자기가 어떤 갖다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도 과거에 어떤 설비 어떤 진열 어떤 계획 어떤 사정을 만들어 가지고 있던지 상관없는 그걸 가라쳐서 그럴 초월하는 걸 가르쳐서 뜻을 닿낟는 것입니다. 그 뜻이 들어서 그것 하고 있는 것인데 이제 듯이 여게 다 기울어지니까 그것 다 포기라 그말이요 갖다가서 성품을 다하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이제까지의 습성에 대해서 어떤 습성이 있어도 그 습성을 그 습성에 붙들리지 안해야 비로서 양심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이것이 비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됩니다. 이래야 자기 부인이 되지 이것 다하기 전에는 자기 주인이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나아 있으면 그놈이 주장을 합니다.
성품 하나라도 뜻 하나라도 요 요 하나만 요 뜻 하나만 내가 행해야 되겟다 요 뜻은 정이면 정 요거 하나는 가져야 되겠다 요 맘 하나는 가져야 되겠다 하면은 남겨 있으면 고기 암입니다. 고기 지남침으로 남족을 가라칠라할 때에 고기 들어서 지남철에 자극을 줘서 고기 땅겨서 바로 갖다가서 남을 정상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것와 같이 고기 들어서 양심을 배격하고 양심을 대립합니다. 그리되면 자기는 양심의 인도와 그것의 인도와 두 인도 사이에 끼어 있게 됩니다. 이제 그것을 완전히 붙들어 완저히 철거해 가지고서 이것이 다해야 한테로 집중되어야 비로서 양심에게 자기를 맺기게 됩니다.
양심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의 일보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양심이 자기에게 자유로 비판해 집니다. 이렇다 저렇다 자유로 비판해지고 양심이 자기에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자기에게 자유할 수 있고 자기느 양시에게 매여 내가 마음에 매인바 되어 예루살렘으로가야 한다 거기서는 나를 죽일라고 기다리고 있다 하는 그 마음에 매였다는 그것이 양심에 매인걸 말합니다. 양심에게 완전히 지배를 받아서 양심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양심에게 자기는 완전히 자유를 박탈 당했고 양심이 자기에게 대해서 장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말합니다. 양심의 세력에게 눌려서 자기는 꼼짝 못한다 말입니다. 양심의 세력에게 눌려서 죽는 곳이지만은 안가고 못 견딘다는 말이빈다. 이것이 뭐이냐 그러니까 거게 반대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하는 듯이 하나도 없고 반대하는 성품이 하나도 없고 반대하는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도 반대를 못합니다. 생명이 그 양심에게 자유하지 못하는 그것을 가라쳐서 목숨을 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면 이제는 이것은 목숨에 거리낀다 해도 목숨이 거게 다 복종되 버렸으니까 못숨이 반대를 못합니다. 목숨에게 제재 받지 아니하고 이럴 때에 비로서 양심이 자기 심신에게 자유를 자는 것입니다.
자유를 해야 이래야 비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안내자를 찾은 것이비낟. 자기 안에 있는 안내자를 찾았으면 이 안내자는 어디로 인도 하느냐 신 구약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는 기 아니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그 활용해 가지고서 비로서 갖다가서 이 양심을 인도자로 세운 것입니다. 이 양심이 진리 안으로 인도하느 것은 자기 진리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다 진리지만은서도 사이비한 그 자기 진리가 많은데 예를 들으면 이 다섯가지 진리가 있는데 자기는 지금 이 가운데 이 진리와 지금 이 현실에서는 동행해야 할 터인데 이것도 진리 이것도 진리 이것도 진리 이것도 진리입니다. 이 자기가 지금 어 가야할 이 자기 지리를 찾는 이것이 비로서 갖다가서 그 진리를 만난 것입니다. 자기 진리는 그거는 어떤 것인가 자기 진리는 자기는 옛날 어떤 자이겄는데 지금은 어떤 자인데 앞으로 어떤 자로 살아야 될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빈다.
자기를 바로 알면은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 아는 것인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있는 고걱ㄹ 바로 아는 것이 바로 아는데 그 다음에야 암만 알아도 소용 없어 그러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바로 아는 것은 우리의 중보자인 에수님께서 구속하신 이 구속을 바로 아는 것이요 그러기에 구속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 이것이 비로서 자기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 진리 자기 진리는 자기 진리는 나는 하나님에게 피조물이요 하나님으로 인하지 안하면 순간도 살 수 없다 하는 그기 살 수 없는 자기라는 그것을 아는 것이 자기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진리를 아는 것이 하나 아는 것입니다. 자기느 영원 멸망 가운데에 빠졌던 그 영원 멸망자 자기 인 것을 아는 그것이 자기 진리를 아느것이요 자기 진리에 살고 있는 것은 영원 멸망 받았던 자기라고 사람으로서 고 자리 사는 거 여게서 주님이 어떤 구속으로 이제 구속을 해 가지고서 세가지 구속을 하신 이 구속을 이매 받은 자기니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자기에게서 그리스도만 존귀히 그리스도만 자유하도록 요렇게 되어 있는 자기 산제물되어 있는 자기 자기는 자기 것이 아닌 자기 피로 생명으로 값 주고 산 주의 것인 그 자기 요것을 자기가 알고 요 자로 사는 고것이 자기 진리 안에 있는 것이요 자기 진리 안에 있는 것이요 자기를 자기를 바로 알아서 아는 그기 자기 진리 자기에게 대한 진리 그러면 자기는 멸망하엿던 자기로 예수님의 큰 구속으로 구속을 받은 큰 구속을 받은 자기로 앞으로 큰 부요를 받아서 하나미처럼 온전하고 거룩한 자가 되어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미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이치를 아는 것이 자기 진리를 아느 것이요 그러면 이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진리를 만나게 되면 이 진리를 만나면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이 이 구속의 것이 완전히 되어진 다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지는 것이지 이러기에 이것을 가라쳐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심이요 참된 음료라 그말은 무슴 말인고 하니 하나님 찾아갈 힘을 얻는다 그말입니다. 이러기에 이 모든 것이 양심을 쓸 대에 글려지고 보여지고 알려지지 야잇ㅁ을 만나지 안한 자는 이런 소리가 전부 자기를 속이는 것 밖에는 안되고 맙니다. 예이것이 자기를 정죄하고 자기를 저주받게 하는 자기를 망치는 일로 어리석게 마귀에게 속아서 이 세상을 이용해 세상을 자기 위해서 이용해도 큰 죄인데 진리를 자기 위해서 이용하고 하나님을 자기 위해서 이용하면 이것은 그만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히니 열매없는 가을 나무라는 요 말씀이 믿는 자에게 한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택한 자에게 안믿는 자들은 그들은 갖다가 뭐 죽을 두번 죽을 것이 없습니다.
이매 다 죽어있소. 그러기 대문에 진실한 자들은 이긴다 이 진실은 하나에 도달하는 것인데 하나에 진실한 자들은 이긴다 이 진실은 하나에 도달하는 것인데 하나에 도달하는 것은 진리에 도달해도 진리 아래 또 있습니다. 진리에 도달햇다고 다 아니요. 하나님에게 도달했으면 그 이상은 없으빈다. 하나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 진실인데 이 진실은 자기가 인정하고 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고 사면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고 삼면에 연결이 되어 있는 그것이라야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은 여게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 있다 그말이요. 우리가 움녀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적인데 적으로 싸우는데 싸우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이 노정이요. 이것이 이 용물들이요. 이것을 이요하지 안하면 안됩니다. 이것으로 더불어 싸우는 전투하는 용것을 통해서 하나님 향해 가기 ㄸ매누에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 내 하나님으로 모시도록 하나님에게 나를 인도하는 모든 요소로 노비로 노자로 이 주신 것입니다.
응 그러기에 이 세상은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내 노자요. 이거는 내 노자요. 이거는 내 노자요. 양심은 나를 인도하는 초급 인도자요 몽학 선생이요.
여게서 이제 진리가 나를 인도하는 이 인도는 지니는 내가 걸어가야 할 내 궤도입니다. 기차가 레루 위에 올라서는 것처럼 이제는 이 진리는 내 길입니다.
나를 하나님에게 도달하게 할 수 잇는 인도자요 내 길이요. 이러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마나면 이것이 나에게는 생명이요 영생입니다. 그러고로 믿는 사람들이 야심을 영접하기 전에는 구원이라 하는 그거는 안되비다. 내가 세상노동일 해 가지고 먹고 사는 것 또 세상 지식 가지고서 출세하고 먹고 사는 것 또 하나님 안에서 이것 저것 해 가지고 먹고 사는 거는 그건 항상 땅의 생활이지 하늘의 생활은 아닙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양심을 쓸 때에 성경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뭐할라고 성경을 배우겠소 배우기를 갖다가서 양심을 쓰면 자꾸 인도해 주는데 그래 인도를 받아 가지고서 성경을 알고 배운것이 제일 완전합니다. 지금 벌서 세계 유명한 신학자라 하면은 벌써 껍데기 되 버렸소 예 그 사람은 벌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살고 난 껍데기 알맹이 아닌 껍데기 그것만 가지고 나와 고기 아니요 칼빈이 되는 거이 문제지 칼빈이 갖다가서 암만 주석을 막 외워도 그거는 칼빈아닙니다. 칼빈이된 사람을 칼빈이 어던 사람을 소개하는 소개지 칼빈이 아니요 갖다가 외식하면 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