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이 하나다


선지자선교회 1985년 7월 1일 양성경건회

 

본문 : 베드로전서 5장 5절∼11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새찬송 311장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의 정성껏 기도했나'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얻을라면 공을 들여야 됩니다. 믿음을 우리가 만들어야 되고 또 만든 믿음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또 만든 믿음을 써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주의 제단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 마라.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한다'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산제사 드린 후에' 산제사 드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산 제사  드리는 것은 곧 자기 부인이오, 자기부인. 살기는 살아 있으나 자기 주관은  주관의 기능 역사는 전혀 없는 것이 그것이 산 제사입니다. 그라면 '주 네 맘을  주장하여.' 주님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그라면 주의 뜻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고 또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깨닫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합니다.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주의 밝은 빛에 항상 활동하며 선한 사업을 힘쓰겠네.' 이 선한 사업이라는  것은 어떤 게 선한 사업입니까? 선한 사업은 어떤 게 선한 사업이지요? 네 선한  사업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의 사업이 선한 사업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몇 가지만 알면 성경의 해석은 혼자서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선에  대해서 정의가 지금 분명치를 안하고 있고 악에 대해서도 정의가 분명치 안하기  때문에 이런 데서 성경 모든 해석이 다 삐뚤어져 가지고 틀린 것입니다.

 선한 사업이라 하면 뭐 사회사업, 구제사업, 자선사업, 또 무슨 문화사업, 이런  것을 다 선한 사업이라고 이래 보기 때문에 거기서 그만 다 삐뚤어져서  혼잡해졌습니다. 이래서, 우리 한국에도 선교사들이 와 가지고 선교를 하는 데에  전도만 하려고 하니까 아무 재미도 없고 또 그렇게 뭐 환영하는 사람들도 적고  이라니까 이제 '선한 사업은 그런 것이 아니라 뭐 이런 그저 의료 사업이라든지  이런 모두 교육 사업이니 하는 것이 선한 사업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 가지고  병원 차리기를 힘쓰고 또 학교 세우기를 힘쓴 그 결과에 유익이 있나? 유익은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대학이라고 그거 또 ○○대학이라고 해서,  ○○대학이 신앙이 뭣이 있는가 하면 신앙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대학은  신앙이 있느냐 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그만  일반 상식화 속화 이래 시켰지 신앙의 진리를 고수하고 그런 것들은 없습니다.

이 선악에 대해서 정의를 가지는 이것이 자기의 신앙생활에서 크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 얻으려면 주의 뜻을 좇고 너의 모든 것 희생하라.' '주의 제단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이런 건 참말로 은혜있는 찬송입니다. 자기  것을 다 바치지 안하고 뭐이든지 자기의 것으로 가지고 있는 그게 있으면 안  됩니다.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내 제자 되지 못한다 하는 그런 진리는  그거는 변동없이 그렇게 하나 참 고유적인 그걸 에누리를 자꾸 하는 통에  실패합니다. 한 번 더 찬송합시다.

 신앙이라는 것은 신구약 성경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또 이 지식으로 영감을  찾아가서 영감에게서 받아 가지고 신앙이 생겨지고 자라 가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도 다 같은 성경이요 또 영감도 같은 영감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교파들이 많아 가지고 신앙 노선과 계통들이 복잡하게 돼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그 사상이라는 것이 성경 지식에서 나오나 신앙 사상은 전적 인적  요소입니다. 인적 요소가 하나 신적 요소인 성경 말씀을 상대해 가지고 그 둘이  조화를 이루어 가지고 하나의 인격성이 생겨지는 것이 그것이 신앙 사상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앙 노선이라고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되면  성경을 몰라도 차차 그거는 알아지게 됩니다. 또 행위가 부족해도 차차 회개되어  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신앙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지식을 상대할 때에 인적 요소와 신적  요소가 이렇게 서로 화합되는 거기서 신앙 사상이라는 것이 나오고 신앙 사상  그것이 막 바로 신앙 인격이 됩니다. 그러기에, 이거는 신앙의 이 동지라는 것이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 지식이 어리고 또 신앙  행위가 아직까지 어리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성도의 교제를 바로 해서 옳은  성도의 서로 교통을 가지게 되면 그거 성경을 모르는 것이나 행위가 또 심히  부족한 것이나 그런 것은 시간을 따라서 차차 차차 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잘못된 신앙 사상을 받아 가지고 잘못된 신앙인들의 교제를 가지게 되면  그것은 참 막대한 해를 보는데 그 손해는 그것은 죽어도 손해본 줄도 모르고  마지막 멸망까지 끝을 맺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 첫째는 성경을 바로 알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신앙인들을 사귀는 그 일이 둘째로 중요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의 행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도 물은 그릇  모양 따라가고. 물은 그릇의 모양을 따라가고 사람은 자기가 사귀는 그 동무를  따라간다 그렇게 안 믿는 사람들도 통계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저 식물 같은 것도 그 식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  먹으면 죽습니다. 우리가 뭐 가지는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음식이라는 것은 잘못  먹으면 죽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꾸 여러분들 지식의 탐심만 가지고, 지식  탐심이나 다른 탐심이나 꼭 같습니다. 탐심은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곧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탐심입니다.

 그러기에 탐심이 참 무섭습니다. 탐심 중에 아주 세상이 알기에 이는 못 쓸  탐심이라 하는 그런 것은 해독이 적습니다. 그런 탐심은 가지면 언젠가 어떤  그런 역경을 당하면 반성이 되고 회개가 되고 아마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인갑다 해서 돌아서기가 쉽고 그것이 아닌 것인 것을 실감하기가 쉽지만 세상이  좋아하고 칭찬하고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고 참 존대하는 그런 탐심은. 그  탐심이나 어떤 악의 탐심이나 구원 못 이루어지는 건 하나입니다. 탐심이 있는  동안은 구원은 안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탐심으로 인해서 구원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탐심은 자타가 인정 못 하고 그거는 환하게 이거는  아니라 하고 그렇게 인정될 수 있는 그런 탐심도 있고, 모든 사람들이 '아,  그것도 좋기는 좋다. 기념할 만하고 칭찬할 만하고 아름답다 하는 그런 탐심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탐심은 나쁜 줄 모르고, 아주 나쁜 탐심은  나쁜 줄 알지만 나쁜 탐심은 우리에게 손해를 많이 주지 못하고 그런 탐심은  우리에게 손해를 많이 줍니다.

 그러기에 이 지식의 탐심도 그것도 다 죄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든지  많이 알면 좋겠다 해서 성경을 많이 알라 하는 성경 지식의 탐심은 그것은  의로운가? 아닙니다. 그것도 꼭 같은 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허영과 허욕을  버리고 꼭 자기에게 해당된 그 하나씩 둘씩 차각 차각 그렇게 진실되게 자기  걸음을 걸어가야 하고 또 자라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식이라든지 지혜라든지 신앙 인격이라든지 또 신앙의 능력 있는  신앙 행위라든지 그런 것이 자라가야 된다, 또 그런 것을 여기에 저게 주 모우면  많이 종합하면 큰 무더기가 되니까 진합태산하는 거와 같이 이렇게 많이 주  모아서 이렇게 양이 많도록 그렇게 하여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라 가는  게 있고 모두 다 집합해서 이렇게 점점 양이 많아져 가는 그런 것도 있는데,  이렇게 집합으로 커지는 거 자라 가는 거 둘이 다른 점이 있습니다. 자라 가는  거는 그것이 그 종류대로의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집합되어  나가는 그것은 그 종류대로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 지식도 종합식을, 종합식을 택하는 사람도 있고 점점  성장해 나아가는 성장식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장식을 택하는 그  사람은 심히 답답하고 애터지는 것 같으나 어느 단계가 지나가면 다른 사람이  따라오. 지 못할 만치 그렇게 힘있게 썰어 나가지만 종합식을 택하는 사람은  아주 일시에 크게 뭐 속성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아주 속패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요 자라가는 거 종합되어 가는 거요 것을 아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만 아니고 사업도 그러합니다. 사업도 그 사업하는 사업의 소질을  본다든지 사업하는 사업 성질을 본다든지 그 사업의 모든 방편. 다시 말하면,  사업 사상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성장식을 가지고 가는  사람 있고 자꾸 집합식을 가지고 가는 사람 있고 그렇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 하나 더 나눌라고 하면 이것을 자꾸 늘어트려 확대시키는  확대식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장식, 또 집합식. 확대식 이래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은 이 두 가지는 성공을 보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여러분들이 알기 전에는 모르지만 요 종류를 알고 다음에는 모든  사업가에 대해서 이걸 볼 수가 있고 또 여러분들이 학교 가서 배우면 무슨  대학에서 강의를 배우든지 무슨 전문 지식을 배울라고 할 때에 그때 보면 '아,  이 교수는 확대식이다. 이 교수는 집합식이다. 이 교수는 그 사상이 성장식이다'  그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장식인 그 사람에게 배우면 그 사람이  든든하고 건전한 사업을 해 나갈 수 있지만 이렇게 종합식으로 집합식으로 하는  그런 사람은 아주 그것이 대단히 속성 같으나 아주 허무한 것이어서 실패합니다.

또 늘어트리는 것, 콱 늘어트리는 거 확대식 그것은 빨리 망합니다. 확대식은  빨리 망하고 또 종합식도 그 다음으로 빨리 망하고. 왜? 이렇게 집합식에는 그  속에 뭐이든가 주 모우면 생명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별별 것들이 다  모였으니까 나중에 반드시 그것이 사고가 나 가지고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장식을 취하는 사람은 그거는 든든해서 그거는 깨트릴 수가 없고 그 사람의  뭐이든지, 뭐 어떤 공업이나 농업이나 상업이나 정치나 또 교육업이나 어떤 걸  하든지 성장식으로 나가는 사람은 그 사람은 든든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 대해서 성장식으로 나가는 것은 어떤 것이  성장식이냐 하면, 신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지식에서 지식으로 자꾸  이래 지식을 많이 가질려고 애를 써서 지식의 탐심을 가집니다. 지식에 대한  지식의 욕심을 가집니다. 이 지식 욕심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 아주 모든  욕심보다도 지식의 탐욕이 모든 멸망의 근원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해독이 제일 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도 확대식으로 나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꾸 이렇게 읽는 그것을 널리 이렇게 뿌아 놔서, 많이  뿌아 가지고 자꾸 이렇게 전파해서 소리를 많이 내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많이 받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 그런 것은 다 그게 확대식입니다. 또 어짜든지  성경 지식을 많이 알아서 여기에 저게 어짜든지 성경을 많이 배우고 많이 알라고  하는 그런 것은 다 그것은 결국 그게 뭐이냐 하면 집합식이오. 집합식 그러면,  어떤 것이 성장식이냐? 내가 한 진리라도 배웠으면 그 진리를 내가 믿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 진리를 인정하는 것 내가 인정하는데 그 인정하는 것을  그냥 내가 믿는다 하는 그 인정에서 그러면, 고린도후서 3장 5절에 거기에 보면  네가 믿음에 있는가 없는가 시험해 봐라 하는 그런 말씀이 거기 있습니까? 네.

시험해 보라 이랬는데, 성장식은 어떤 것이 성장식인고 하니, 자기가 어떤 한  진리를 가지면 진리를 내가 믿는가 안 믿는가. 어느 정도 믿는가, 그러면,  그것을 자기가 그 뭐 시험해 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을라고 하면, 요  말씀을 내가 요대로 믿는다는 거는 어떤 것이 믿는 거냐 하면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그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을라고 이렇게 하면 전체가 시험입니다. 믿을라고 하면 전체가  시험입니다. 자기가 인정할라고 하면 전체가 인행하지 못하도록 부정하도록 하는  모든 것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많은 그걸 혹 한 진리를 말할 때에 이 진리를  내가 믿을라고 하면. 이 진리를 인정하고 실행할라고 하면 여기에는 이런 이런  마찰과 방해물들이 장애물들이 많다, 그 장애물들을 자기가 보고 구경한 그  장애물들을 다른 사랑들에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심령이 깨게 되고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대적이 많은 것을 발견을 하게 될 것이고, 또 자기가 심히  대적이 많은데 그 대적에게, 유혹 대적도 있고 강제로 억압하는 막고 꺾는 그런  대적도 있는데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나는 참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 이다 아무런 참 도무지 암만 봐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자기가 믿을 수 없는 참 그런 허무한 사람인 것을 차차 알게 될  것이고, 또 자기는 아주 무능한 사람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자기의 정체가 나옵니다. 자기의 정체가 나오고 정가가 나옵니다. 정체가  나오니까요 이만한 가치밖에 없다 정가가 나옵니다. 그러면, 정체를 바로  발견하고 정가를 발견해 가지고 정체 정가로 하나님 앞에 살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겸손한 자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 하나를 자기가 인정할라 하니까 자꾸 하나님께서는 또, 내가  인정할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나를 도와서 인정을 못 하는 것을 너에게 알려주마  하시고 인정 못 하는 그 부분을 알려 줄라고 주님은 쉬지 않고 노력을 하십니다.

또 내가 무능한 부분을 알려 줄라고 열심히 노력을 하십니다. 또 이렇게 내가  믿음을 지킬라 할 때에 여기에 대적과 모든 애로가 어떻게 있다는 것을 자기가  알아서 거기서 차차 차차 전투력이 생겨집니다. 전투력이 생겨지게 되면 그것이  곧 인격이요 그것이 그 사람의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지극히 작은 것  말하는 것을. 작은 것보다 큰게 좋지요. 그것은 지극히 작은 거기서 모든 큰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씨종자가, 씨 알이 거기에 있다, 또 움싹이 거기에 있다,  거기서, 움싹이 거기에 있지 큰데 거기에 움싹이 있지 많다. 거기에는 말하자면  그 움싹이 그것이 성장된 그런 줄기이기 때문에 줄기에서 열매가 맺지만 생명은  움싹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이 모든 자연 계시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성장식을 가지는 사람은 뭐 성경을 하나를 알고 알고 난  다음에 그걸 믿을라고 애를 씁니다. 고 하나 믿을라고 애쓰면. 진리는 전체가  하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 믿을라고 애를 써 가지고 고 진리를 자기가  인정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그 하나 가지고 수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왜? 그  하나로 인해서 뭐 백도 열도 넘은 대적이 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대적해서  이겼을 때에 그 때에 뭐이 되느냐 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이제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신성 같은 인격성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래 되면 그  다음에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을 대할 때에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알고 나서  행하고 나니까 또 알게 되고 이래 참 바로 알면 '자유하리라'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유하리라 그 말은 지행(知行)이 하나다 그말입니다. 지행이  하나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다. 알면 행해지고 모르면 안 행해진다.

알고 행해지지 않는 일이 없다. 알면 행해진다. 지행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다. 알고 난 다음에 행해야 된다 그게 아니라 알면 다  행해진다.

 그러기에 이렇게 여러분들이 집합식, 모두 주 모우는 것 말이지. 주모아 가지고  자꾸 뚤뚤 모아서 무더기를 커다랗게 집합식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말이오. 집합식을 생각해서. 내가 그런 말 들었는데 다른 데  신학교 가는 것보다도 여기 온 것은 좀 성경이나 많이 배우기 위해 가지고 이래  왔는데 이거 기대에 좀 어긋난다.' 이렇게 한다는 말 내가 교학실장으로 더불어  들었는데, 여러분들이 그 전부 이거 지금 죽는 사상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상을 완전히 뽑아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집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나 저기나 어디든지 다니면서 좋은 것만 자꾸 취해라,  여기 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좋은 것만 자꾸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자꾸 취해 가지고 살아라, 이러니까, 하나 가진 것보다도 둘 가진 게 낮고  둘 가진 것보다 백 가진 게 낮고 백 가진 것보다 천 가진 게 낫고 하나 아는  거보다도 열 아는 게 낮고 다 이러는데 그 아는 것이 그것이 자기 생명이 안  되면 그것이 자기를 정죄하는 심판의 정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집합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집합식을 그것을 버리고 또 이렇게 확대식  이거, 확대식이라는 것은 속에 하나는 하나인데 자꾸 널리 퍼져서 많이 선전하고  많이 보여 가지고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라니까, 가만히 이 말을 여러분들이 듣고 난 다음에 교계의 모든 사람들을  다른 사람을 심판적으로 할게 아니라 그 사람, 내가 참고로 삼기 위해서 폄론을  성경이 하라고 했습니다. 폄론을 하지 마라 폄론하라 했는데 폄론할 때 '저  사람은 보자, 저 사람은 집합식을 가지나, 저 사람은 확대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가. 저 사람은 지금 성장식을, 성장, 하나씩 차차 커 나가는 것 성장식을  가진 사람이가' 이것을 여러분들이 환하게 사람을 보고 비판할 수 있는 그것이  돼야 됩니다. 그것이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성장식을 가지기 전에는 절대로 집합식이니 그런  확대식이니 그런 것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확대식을 가진 사람은 집합식 가진  사람을 알고 그것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또 이제 성장식을 가진 사람은  확대식과 집합식을 알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설교를  들어도 한 마디 딱 듣고 난 다음에 '아, 저것은 확대식이다. 저건 집합식이다.

저거는 성장의 생명식이다.' 이렇게 바로 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한 이십 한 오년 전인데 서울의 원남동에 우리 서부교회서 개척  교회를 하나 세웠습니다. 지금 그 ○○교회가 대단히 큰 교회가 아마 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교회에 개척 교회를 세워 놓고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가서 가르치고 이래 있다가 그 뒤에 제가 어떤 교역자를 하나 보낼라고  했는데 ○○○목사님이 자기 동생을 그리 보내 달라고 쌓아면서 그리 보낼라  했습니다. 나는 그분을 내 마음에 맞지 안 해. 그분은 확대식입니다. 이라기  때문에 자꾸 이래서 이거 안 됐다 싶어서 안 보낼라 했지만 뭐 서로 신앙의  친구인데 자꾸 또 그래 쌓아면 내가 그 교회 무슨 주권하는 것처럼 그래서 할 수  없어 그이를 보냈습니다.

 그이를 보냈더니만 그이가 ○○○목사를 청해 가지고 집회를 했습니다. 나는  몰랐는데, 나는 몰랐는데 가다가 보니까 ○○○목사 집회 중이라고 해서 그래  제가 가 가지고 한 시간 들었습니다. 한 시간 들을 때에 그 사람은 무슨 식을  가졌느냐 하면 학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한 시간 그것을 듣고  난 다음에 내가 그때, 서부교회서 세웠고 그 사람들이 다 서부교회서 올라간  사람들이고 이러니까 거기에 ○○○목사님 동생 ○○○목사님이 교역자는  교역자이지만 실권은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직도 내가 말하면 다 모이고  이러니까 그 목사님은 내게 이래 하면서 목회를 했으나 그 목회가 비위에 맞지  안했습니다. ○○○목사를 나는, 뭐 하도 유명하기 때문에, 내가 말 들으니까  여기에 ○○교파의 ○○○목사님이니 뭐 ○○○목사님이니 모두 다 이런 분들이  여기에 ○○교회에 있는 거기 광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광장에 그분을 청해  가지고 집회를 한다고 이래서, 그때는 나는 가보지 안했는데. 그분이. 그러니까  그분들이 청하니까 아마 신앙의 사람이 아니겠느냐 나는 그분만 생각하고,  ○○교회에 그때에 집회하는 것도 ○○교파의 수뇌 목사님들이 인정을 하고  집회를 했으니까 아마 ○○○목사님도 그래 청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신학의 4회 졸업인가 3회 졸업인가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가 가지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 보니까 이분이 틀려서 이해하든지 안 하든지 내가 증거 할 책임이  있다 이래서 제직회를 모아서 '집회를 하나 너희들이 이제까지 배운 복음과는  다를 것이다. 너희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이제까지 받은 복음은 아주 땅속에  파묻힐 터이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똑똑히 눈을 뜨고 공부를 하도록 해라'  그라면서 그때 내가 좀 거석한 말이지만 '이것은 잠시 후면 다 없어질 것이다.'  제가 그런 말을 하고 그만 떠났었습니다.

 떠났는데, 그 뒤에, 거기에가 무슨 고을이고? 서울에 무슨 거기에 집회를  했는데, 관악산 거기도 아니고 저기 왜 집회를 거기 모르는가? 삼각산에 우리가  집회도 했고 삼각산 말고는 거기 뭐 무슨 동이지? 우이동에 가 가지고 집회를  하고 내려오니까 그때에 그 한강 백사장에서 집회를 하는데 그때에 거기에 십만  명이 모였다는 그런 말 들었습니다. 그때 십만 명은 요새 천만 명보다 더  많습니다. 그때는 뭐 천 명 모임이 잘 없었습니다. 제가 서울 가 가지고  ○○○목사, ○○○목사님의 동생 ○○○목사님이 청해서 가서 집회하는데  그때에 이천 명이 모았는데 서울 생긴 이후로 이천 명 모인 게 처음이라  이랬었습니다. 이라고, 그런데 그때 그 얼마 후에 십만 명이 모여서 모든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제가 한 번 참석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때 ○○○국무총리  했지요? 아십니까? ○○○, 그 ○○○씨 부인이 저한테 와 가지고 '저렇게  모였는데 어쨌든지 부산서 할 게 아니라 서울서 좀 복음을 전해야 된다. 이래서  내가 말하기를 '저기 가서 옳은 복음 전하면 두 시간만 전하면 그 사람들 다  도망 다 가 버리고 없습니다. 거기 남은 사람 몇 사람 안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좀 알고 다니십시오' 이라고 말았는데  그 뒤에 ○○○목사님이 얼마 지나고 난 다음에 여기에 ○○동에 와 가지고  집회한다 하기 때문에 내가 교인들 데리고 갔습니다. 이분이 그때 그랬는데 지금  어찌 됐는고 보자 해서 가니까 집회를 하는데. 새벽에 모인데 보니까 우리 외에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또 저녁엔 얼마나, 저녁에 모인 것이 한 뭐 열 댓  모였다던가 열 아홉      모였다 하던가. 뭐 그 사람 그라고 난 다음부터는  완전히 그만 끝을 막아 버리고, 제가 계룡산에 갔을 때 보니까 ○○회당이라  하면서 그 ○○○씨가 거기에 와 가지고 잔치를 많이 하고 이래 가지고 해서  ○○○씨 잔치하면 그 동네 사람들이 그 면 사람들이 모두 다 떡을 받아다  놓으면 석달까지 그렇게 간식을 해 먹을 수 있다고 뭐 그렇게 야단을 지깁디다.

그런데, 그래 가지고 다 헛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눈을 알아야 된다  말이오. 그걸 좀 보는 눈을 알아야 되지 그걸 보는 눈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 ○○교파에서는 많이 안 갔지만 ○○. 뭐 ○○뭐 또 이거 ○○그런 데서는  그때에 ○○○씨가 아주 대인기로 거석할 때에 뭐 전부 그리 콱 다  쏠렸었습니다. 여기 ○○교파 목사들이 좀 안 쏠리고 있었지 다른 목사 전부 쏵  다 쏠렸어. 그래 가지고 그때는 뭐 굉장히 쏠렸습니다. 또 그 사람이  ○○○교회에 ○○○목사님의 밑에 장로로 있던 분이고 이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많이 모두 쏠리고 하는데, 바로 여기 대신동 여기에 거기 공설  운동장에서 그때 집회를 해서 뭐인고 한번, 안 들어 봤기 때문에 한번 들어 보자  하고 갔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전에 제가 집회할 때에 제 뒤에 집회하는데 더러  따라 다닌 사람입니다. 따라다녔는데 어찌 그만 이적을 하나 뭐 해 가지고 그거  가지고 그만 확대해서 이래 해 나가다가 나중에 거석했는데. 가서 보니까 그  사람도 생명은 없습니다. 그것도 내나 확대식이라. 그래서 반 시간 듣다가 그만  다 알았기 때문에 나와 버렸습니다. 나오고, '저게 인제 몇해 안 갈 것이다'  이랬는데 몇해 안 가고 말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서 모두 일시 부흥사들이 일어났다가 나중에 끝이 없어지고  또 유명한 사람이 끝이 없어지고 또 그렇게 위대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가서는 끝에 가서 힘이 없어지고. 육체의 힘이 노쇠해지는 거와 같이 진리의  힘도 노쇠해지고 영감 힘도 노쇠해지고 설교의 힘도 노쇠해지고 모든 목회의  힘이 다 노쇠해지는 것이 그 무슨 연고냐? 그게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어서. 그것은 다 집합식이요 그렇지  안하면 확대식, 그런데, 여러분들은 내가 그 말을 들을 때에 아직까지도  집합식에 지금 취미를 가지고 있지 이 생명 성장식에는 아직까지 거기에는  입각하지 못했는가 보다, 여기 그동안 들었으면 알 것입니다. 그동안 뭐 여기서  성경 가르치는 것, 여러분들 암만 그래도 여거 안 온다고 해도 내가 여러분들  붙들고 뭐 계속 시간으로 그렇게 가르칠 것도 또 없을 뿐 아니라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가 진학기로 가르칠 필요가 없어. 가르쳐 봤자 못  알아듣습니다.

 가르쳐 봐야 못 알아듣는 것은 가르치는 것을 믿어야 알게 되고 인정해야 알게  되고 실행해야 알게 되지, 인정하고 실행하고 자기가. '참 내 제자가 되고'  자체가 변화가 돼야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됩니다. 변화가 돼야.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그 말씀대로 깨달은 대로 행한다  그말이오.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그 다음 뭐라고 했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라면 이 진리는 능력의 진리여서 이 진리는 그  진리 제대로 행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진리에게 붙들려서,  진리에게 끌려서. 진리에게 아듬껴서 진리에 보듬껴서 그렇게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저게 주관 생활이냐 객관  생활이냐, 저것이 인적 요소냐 저게 신적 요소냐, 그러면, 자기가 주관이 되고  하나님을 거기다 피동할라 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능동이 되고 자기는 거기  피동 될라 하는 것 그것이라야 인제 신앙이 올바른 신앙인데,  이러니까, 요새 신앙이라 하는 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성경에게, 자기가  인정하고 실행하면 알게 될 터인데, 성경을 읽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게  아니고 성경을 이용해 먹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위해서 이용을 할라고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자기가 이용을 당할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다 사망입니다. 그건 다  허영이요 허욕이요 그거 다 외식이요 다 헛일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합식 그런 것을 버리고,  아따 오래 돼서 모르네. 그 사람이 동남아 선교회 회장으로 그때 돼 가지고  미국의 어떤 선교사하고 둘이, 둘이 나한테 찾아왔습디다. 찾아와 가지고 그때  오전 예배 때인데 찾아와 가지고 말하는 가운데 '아, 지금 오후 예배도 참석하고  갈 겁니다.' 이라는데 내 마음에는 '참석 못 한다, 참 석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참석 못 하게 하는 붙드는 게 있기 때문에 못 한다' 내 속으로 이라고  '아, 예. 그래요?' 그라고 내가 나왔었는데 나중에 오후 예배 오기는  왔었습니다. 오후에 와 가지고 설교 한 이십분 설교하니까 말도 안 하고 그만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만 도망가 버렸습니다. 죽여 버리니까. 그분이  우리가 ○○○목사님 이래 같이 다닐 때에 말하기를 '성경은 여기 와서 배우고,  불은 저 불파 내나 오순절파라고 거기 가서 불은 거기 가서 또 받고, 그래  가지고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또 모든 그 언변은 다 수사학을 공부해 가지고  준비하고' 이래 뚤뚤 뭉쳐 가지고 한번 세월 내 보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그  뒤에 동남아 선교회 회장이라고 이렇게 하면서 책임자라 하면서, 저거 말로  그래요. 이 한국에는 와서 다른 데는 갈 것 없고 이 백영희 목사라는 이  목사님만 만나 보고 가면 그만 여기 온 일은 성공된다. 그만 여기 딴거는 뭐  만나볼 것도 없다' 이래 가지고 왔다고 이래요, 자기네 말이. 그러나 뭐 비행기  그래 탈라고. 안 하고 나는 또 그런데 상관도 안 하고 이랬는데, 그 뒤에 보니까  말이 없어. 아마 그 사람이 지금 언간히 까부러졌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저 여기 와 가지고는 성경 공부는 배운다고 해도  항상 그 말만, 하는 말 또 할 것입니다. 아마. 그런 게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새벽으로 이래 배우고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여기서 배운 그것만 다 자기  것을 삼았으면 뭐 성경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성경이든지 대번 다 알게  됩니다. 다 같아서. 그러니까, 이제 성경 신앙 사상을 바로 가지고, 신관을 바로  가지고, 또 구원관을 바로 가지고. 신앙관을 바로 가지고, 소망관을 바로  가지면, 그것만 바로 가지면, 그라고 나면 신구약 성경은 전부 그건데 뭐 다  배울 게 뭐 있습니까? 다 그만 자기가 파면 되는데 생각하면 다 나온다 말이오.

이런, 바둑을 둘 때에 여기에 저게 순장점을 놓지 안했습니까? 순장점을 놔  놨으니까 순장점을 연결만 시키면 되는 것이니까, 이 우뚝 우뚝한 이런 것만  이렇게 바로 정의를 깨닫고 나면 성경 읽고 기도하고 하면 탈선 안 되고 나가는  길만 바로 바로 가르쳤으니까 그 길로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아래 기도할 때 보니까 저 지금 ○○○교회서 온 학생 이름이 뭐이지?  ○씨? 저 ○선생 보니까 오래 동안 그랬는데 찬송은 말이죠 찬송하면 맛이  있지요? 찬송하면 맛이 있고 또 찬송을 하면서 이렇게 자기가 느끼기도 하고  이래 하는데, 그것이 오래 동안 좀 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걸 하면 나중에 가서  뭐이 되느냐 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그거 큰일납니다. 내가 그래서  그날 누가 그라는가 보고 알라고 이래 가니까 내나 저 학생이데. 그래 내가 그때  말 안 하고 나왔었는데 언제 기회가 있으면 말을 해 줄라고 이랬었는데 우리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그게 뭐이냐 하면 말하자면 주관주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관을 죽이고 자꾸 객관측으로 가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찬송이 좋기는 좋은 것이지만 찬송이 주관주의가 많기 때문에,  또 기도도 가다가는 기도도 주관성이 강해서 주관성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서 내가 거기 자꾸 따라갑니다. 따라가,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도가 뭐이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한 말이라도 바로 들어 알았으면  됐어요. 바로 알았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제일 든든한 것은 성장주의로 내가  믿을라고 말이지, 믿을라고, 요게서도 인정하고 조게서도 인정하고, 그러면,  인정할라고 하면 적이 천천 만만이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정할라 하면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장애물이 가득 차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거  하나 하나 싸워서 이기면 그게 진리요. 그게 능력이오. 또 내가 실행을 할라고  하면 더 그래. 그러면, 내가 인정하고 실행하면 고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고 한 진리를 인정하고 실행하면 고 능력이 모든 거 다른 거 다  할 수 있어요. 이러기 때문에. 한 진리를 그것을 바로 깨달아서 이렇게 자꾸  새김질하면서, 그러면, 하다 보면 나를 부인하고 고 성경 말씀에 따라  들어갑니다.

 그러고, 찬송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성경에서 보고 어떤 개인이 참 영감 받아  가지고 아주 말하자면 법적인 것보다도 감상적인 면을 많이 해 가지고 그렇게 그  울려나온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자꾸 이라면 내가 그만  감정으로만 자꾸 거석해서 나중에는 그라면 자기가 감정에 충만해 가지고 충족  가지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돼서, 그러면, 자기 입으로 나온 것이 귀로  들어오고 귀로 들어와 가지고 또 입으로 도로 또 토해 내고 자꾸 이래 뱅뱅 이래  돌리다가 자꾸 이래 보면 나중에는 객관 세계를 접촉을 못 한다 말이오. 자꾸  이래 이래 해 가지고. 이래 가지고 나중에 그래 가서 그만 불건전한  신비주의로서 그만. 마치 어떤 전공가가 그만 거기에 취미에 빠져 가지고  말하자면 비정상적인 사람일만치 거기에 도취돼 가지고 하는 거 모양으로 그래  돼 버리고 말아.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꾸, 우리는 좁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은  넓기 때문에 그 넓은 세제를 어찌 볼 수 있느냐? 넓은 세계를 성경을 '가지고  넓은 세계를 본다 하지만 성경 가지고 넓은 세계를 못 봅니다. 성경 가지고 내가  믿고, 믿을라 할 때에, 인정하고 행할라 할 때에 많은 세계를 봅니다. 그러면  사람이 뭐 며칠 말해도 못 할 그런 것을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 성구를 믿을라고  할 때에 수많은 적이 나타나 가지고 사이비 하게 이렇게 저렇게 하는 모든 것을  몇 번이든지 구경하기 때문에 그 구경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다 자기들이,  모르지만 그런 걸 구경은 했다 말이오. 그런 느낌을 가졌더라 말이오. 그런 것을  체험을 가졌다 말이오. 이러니까 다 깨달아져 가지고 힘을 얻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모든 광대하시고, 광대하시고 복잡하신 이 전체를  우리가 상대하고 이리 저리 치우치는 편견이나 편향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아니하고 전체를 가져서 이렇게 나갈 수가 있지 잘못하면. 하나님과 우리 주객이  조합이 잘돼야 되지 이거 잘못되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꾸 우리의 부패성도 자기를 사랑하는 게, 똥도 자기 똥은  냄새가 안 난다 하는 거라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 주관을 자꾸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 그러면, 자기 취미있는 것을, 자기 취미있고 자꾸 자기 재미있고 자기  취미있고 자기 기쁜 그걸 자꾸 따라서 나갈라고 하고 애를 쓰는 것이 그게  우리의 바로 그것이 원죄입니다. 원죄요 그게 자기 주관성인데. 그런 거로 자꾸  돼 나가기 쉬워  이러니까 이거 확대식은 그게 주관식이 돼 가지고 있고 또 이래 종합식은  그것은 뭐이냐? 객관식이 돼 가지고 있고, 객관식도 아니고 주관식도 아니고  객관을 내가 주관으로써 그것을 삼켜 가지고 먹어서 양식을 삼아서 그렇게 할  때에 거기서 건전한 신앙이 자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제가 지난 주일날 오전 설교에는 요한복음 4장을 설교했는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는 그 말씀 가지고 오전에 거의 다 했습니다. 그거 다  아는 건데 그런데 자꾸 뭐 말하는 것이 아는 걸 또 말하니까 사람들도 재미없는  사람들은 재미없게 여기지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는 그 근심은 그것은,  근심은 두 가지 있는데, 하늘에 속한 근심 있고 땅에 속한 근심 있으니까 하늘에  속한 근심은 성경이 말하는 근심. 성경이 근심하라 하는 성경이 말하는  근심이고, 땅에 속한 근심은 이 세상 지식들 모든 주관들, 이 현상 세계에서  나에게 주는 근심이니까 그 근심을 하지 말아라 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그  근심에 쌓여 있지, 하지 말라는 근심은 하고 하라는 근심은 안 한다 그말이오.

바울이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탄식하며 고통한다 하는 그것은 근심인데, 그거는  갈수록 근심이 자꾸 커졌는데 하늘에 속한 근심은 자꾸 커져야 된다 말이오. 이  근심은 안 하고. 근심 하나만 해도 근심 하나 지금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해야 믿음이고 순종이 아니겠느냐? 지금 하는 사람인지 안 하는 사람인지 한번  확정을 지어 봐라. 네가 어떤 사람이냐? 그거 하나만 가지고도 해서, 고걸 제가.

믿으면 그게 생명이 되고 능력이 되고 고거 다 나오는데,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게서 나왔든지 저게서 나왔든지 주님 만나면 다요.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고 성장식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성장식은 하나라도  내가 그것을 참 인정하는데, 인정하면 자꾸 시험을 합니다. 내가 참으로  인정하나 안 하나 이렇게, 벌로 하면 인정 다 했어. 벌로 하면 인정 다 했는데  인정을 하나 안 하나 스스로 시험을 해서 보면 인정할라 하니까 방해물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행할라 하니까 더 대적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고  이러니까 나중에 가서 '나는 믿는 자가 아니다. 나는 믿음이 없는 자다. 나는  믿음이 없는 자다.' 믿음이 없다 할 때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인정 못  한다고, 인정 못하니, 이 점을 인정 못 하니, '이거 내가 인정 못 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내가 인정하는, 믿게 해서 인정하게 해 주옵소서' 인정 못 한  걸 가지고 인정하게 해 달라고 할 때에 그게 본인은 그렇게 보이지만 제삼자가  볼 때 벌써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고 장성한 사람이라.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신앙생활은 자꾸 자기가 성장으로 나가는 사람은  자기 보기에는 죄인 중에 죄인이요 괴수 죄인인데 다른 사람은 자꾸 성자라 하는  것이고, 또 자기는 모든 그 현실을 당할때 이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건 참  패배자요 무능자인데 지나간 세월을 보면 어떻게 됐는지 그래 돼서 다 이겨져  버렸으니까 말하기를 '이거는 하나님이 해 주셨지 내가 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어찌 참 황소 뒷발로 쥐잡듯이 어떻게 그만 그래 돼졌지만 이게  앞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될 수 없다. 내가 할 만한 내 실력이 없다.' 없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내 능력은 약할  때에 강하여 지느니라' 그렇게 고린도후서에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뭐 시간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여기에 겸손에 대해서만 잠깐  하나 말합시다. 이 겸손은 어떤 게 겸손이냐? 겸손 요거를 겸손 하나만 요거  바로 알아도 우리가 아주 복잡한 것이 없어지고 아주 단순해지고 참 우리 길이  단순하고 좁게 됩니다. 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게 겸손이냐? 둘 있는데  하나 있다 하는 그런 게 겸손 아니라. 겸손도 외식 겸손이 있습니다. 겸손이  뭐이냐 하면 자기가 겸손할라고 애를 써서 하는 겸손은 전부 외식 겸손이오.

그거는 겸손을 방편으로 삼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참 절도의  겸손이오. 그거 못 쓰는 겸손이오.

 겸손은 어떤 게 겸손인가? 하나님이 겸손하다 하지 자기는 겸손을 꿈꾸고 하는  것 아니고, 여기에 겸손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바로 알고. 자기를 바로 알고  자기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겸손이오. 자기를 확대해 가지고 자기를 과대평가 해  가지고, 또 자기 아닌 자기를 과장을 해 가지고 이래 둔감을 해 가지고 이라는  그것이 다 교만이오. 겸손은 어떤 게 겸손이냐? 겸손은 자기를 바로 알아서  주님만 상대하고 주님과 자기와의 상대해 가지고 고 두 관계를 가지고 사는  그것이 겸손한 사람이요 교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냐? 교만한  사람은 자기와 모든 피조물과를 상대해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것이 교만이오.

자기와 하나님을 상대해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떤 자인지 근본도 알고 현재도 알고 자기를 바로 알아서  자기의 그 실존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그것을 바로 알아 가지고 그 사람으로서  사실대로 한 냥쭝이면 한 냥쭝 두 냥쭝이면 두 냥쭝 참 백 냥쭝이면 백 냥쭝  '더웁든지 차기를 내가 원하노라 네가 미직지근하여서 내가 토하여 내치겠다.'  이거는. 자기를 바로 알고 자기가 자기로 살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고 좋아할  것이고 모든 인간들도 다 동정할 것인데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자기가 자기로 살지 안하고 모든 둔갑을 해 가지고 이렇게 모두 다 확대되고  과장해 가지고 이래 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미워하시고 사람들에게도 미워  보이고, 또 계산도 그게 다 망합니다.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 서이 있는 줄  알고 모든 걸 경영해 놨으니까. 자, 그게 실패되겠소 안 되겠소? 어찌 됩니까?  실패 안 될 수가 없다 그말이오. 하나 있는 줄 아는데 하나 가지고 계산을,  계획을 가졌는데 그게 무슨 실패가 있겠소, 하나만 하면 다 되는데?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바로 알고 자기 바로 알면, 이상합니다. 자기 바로 알면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자기 안 것만치 하나님을 알게됩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를 아는 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알지 않고는 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가 어떻게 자기 알 수 있는가? 한 말씀이라도  믿을라고 할 때에, 믿을라고 할 때에 그때 현실에서 인정하나 안 하나, 실행하나  안하나, 자기가 꺼꾸로 자기를 과장해 가지고 자기를 편을 드는 것이 아니고  양심보다 더 깨끗하신 하나님 앞에서 정평 정가를 받을라고 하는 가운데서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안 것만치 하나님 알고 하나님 안  것만치 자기 알게 되지 자기 모르고 하나님 알 수 없고 하나님 알고 자기 모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자기를 알아서 우리는 사람을 상대할 때에 그런 줄 알 아야  됩니다. 우리는 그러면 어떤 자들입니까? 근본 우리는 처음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전적 부패한 우리 아닙니까? 전적 부패한 자 아닙니까? 전적 부패한  자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에덴 동산 선조  때부텀 우리는 진공과 같은 아무것도 없는 빈 그릇인데 이 빈 그릇에 뭘  채웠습니까? 이 빈 그릇에 못 쓸 것 채워 놨습니다. 빈 그릇에 못 쓸 것을 채워  가지고 지금 못 쓰게 됐는데. 빈 그릇에 못 쓸 것 채운 건 뭐 채웠는가? 뱀의  것을 채웠다 말이오. 사탄의 것을 채웠어. 사탄의 것을 채웠어. 사탄의 것을  채워 가지고 우리가 그것으로 하나 가득차 가지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  찬 거 이거 가지고 지금 이게 자기요. 뱀의 것 채운 것 이게 자기인데, 우리는  옛사람이라 이라는데 그게 뭐이냐 하면, 악령 악성 악습 악령은 뭐이냐 하면  자기 중심의 악이라 말이오 악령은 자기 중심의 영. 악의 정의를 바로 하지  못하니까 이거 뭐 악령이 뭐인지 그것도 모르고 뭐 원죄가 뭐인지 그것을 도무지  이것을 정의를 내지 못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악령은 자기 중심의 자기 중심의 영이 악령이오. 악성은 우리 인간의  본성이 자기 중심의 성 자기 위주의 성으로 뱀의 미혹 받아 가지고 변해졌다  말이오. 그러니까. 하와가 이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어째 뭐 하나님은 어찌  됐든지 이거 먹으면 네가 된다 이래 가지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 중심, 선에 속한 것이 이것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악성이 되고 나니까,  악성이 되고 나니 얼마나 타락했느냐? 하나님으로 자기를 전부를 만들어야 될  건데 하나님 냅둬 버리고 아주 선악과 거기에 미치지 안했소? 과일 한 개 가지고  자기가 존비귀천 그게 다 결정된다. 어떻게 과실 한 개 가지고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어두워지는 그게 뭐이냐 하면 하나의 그 형식 계시로 보인  것인데. 하나님 중심이 아니면 그렇게 타락돼 가지고 허무하게 된다는 것이오.

그라고 나서 찍 해야 저 보호한다는 것이 그게 무화과 잎사귀 가지고 엮어서 옷  입었으니까 그게 무슨 안보가 되겠소? 하나님이 보호해야지 그거 참 천부당  만부당한 일 아닙니까? 또 제가 은신해서 피해서 숨는다 하는 것이 숲속에 숨어.

어디 거기 가서 무슨 피난처가 되겠소?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못 쓸 것을 가득히 채워 놨습니다. 채워 놨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를 예수님의, 우리가  중생된 것은 우리가 중생될 때에 그때에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다 비운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게 예수님이 우리를 중생시키실 때에 우리의 마음의 죄 몸의 죄 전부  다 이거 다 비워졌습니다. 그 마음의 죄 몸의 죄를 어떻게 비웠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몸의 주격이 영이기 때문에 주격의 이것을 다 미래 것까지 다  끌어다가서. 미래 짓지도 안하고 나지도 안했는데 그 죄를 어찌 끌어온다  말이오? 그거는 하나님의 전지의 지혜로서는 천 년이 하루같다 했습니다.

그러면, 미래의 천 년이 오늘과 꼭 같애, 이러기 때문에 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나기 전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형했는데 그와 꼭  같은 논리요. 못 할 게 없는 거라. 이러니까 우리 것을 다 끌어다가서 우리의  주격인 영에게 부담시켜 가지고 예수님이 다 대속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 비웠다  말이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다 비웠어 이번에도 대구에서 집회할 때에  하나님께서 표적을 나타내 주신 것은 그것은 우리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안심하라' 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혀서 너는 입었다 하는 것을 증거의  표적으로 말했소. 암만 들어도 그거야 또 어두운 사람은 또 안 들린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는 다 비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비었어. 비우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 진공이라. 진공이니까, 진공이니까, 진공은 누가 진공입니까?  예수 믿어 중생된 사람은 꼭 같이 빈그릇이오. 하나도 없는 빈그릇이오.

빈그릇이니까, 중생된 이후에 이제 이 빈그릇에 첫째 아담의 것을 채우느냐 둘째  아담의 것을 채우느냐 채우는 것입니다. 한 시간 한 시간 채워. 우리가 한 시간  살면 한 시간 두 시간에 뭘 채우든지 채웁니다. 이래 채우니까 어떤 사람은 이  왼쪽의 이것으로 자꾸 채워지고 어떤 사람은 오른쪽의 것으로 채워지고,  이러니까. 우리 할 일은 부지런히 채워진 것을 파 내버리고 또 새걸로 채우려고  자꾸 이렇게 애를 쓰지만 과거에 채워 놓은 거는 파 내버릴 도리가 없다  그말이오. 없으니까 그저 그것을 주님 앞에 사함이나 받지 그것이 파 나가서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그거는 그만침 된 것만침 둘째 사망의 해로 벌써 유황불  구렁텅이에 타게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이 일생 동안 살지만 심신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다 타 버리고. 빼짝 마르게 영뿐이고 심신의 기능은  형체뿐이지 속에 실력은 하나도 없어요. 사람이 뚱뚱한데 힘 하나도 없으면  그거는 앉지도 못하고 데굴 데굴 구불러 다니지도, 구불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에. 사람을 대할 때 저나 나나 처음에는  예수님의 공로 아닐 때는 다 더러운 것 사망으로만 가득히 찼던 내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중생될 때는 톨톨톨 다 비우고 저나 내나 빈 그릇이오.

밑천이 같다 말이오. 꼭 같애. 뭐 병신이나 문둥이나 천지 바보 나 무식한 자나  밑천이 똑 같애요. 똑 같이 근본이 같은 자라. 같은 자인 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좋은 거 주석서 좋은 거 채우면 내게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것이 있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쁜 거 주셔서 채우면 참 비참하게 돼지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는 좋은 거 주고 누구에게는 나쁜 거 주는가? 당신이 주권  가지고 하시는 거 당신이 기뻐한다는 데 뭐 누가 이의를 달 것입니까? 이러니까  성경에 말하기를 토기쟁이가 임의로 진흙을 가지고 이 것 저것을 만드는데 그  만들어진 토기가. 옹기가, 그릇이 뭐 토기쟁이에게 무슨 이의를 달수가 없다  그말이오. 거기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이의를 달수도 없는 관계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에게 대해서 저와 나와 꼭 같은 진공의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더러운 것을 다 비워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진공이 되어  있는 자인데, 꼭 밑천이 같은데, 근본이 같은데 주님이 나에게 좋은 거 주셨으니  내게 좋은 게 있고 저 사람에게는 좋은 거 안 주셨으니까 좋은 게 없으니까. 그  사람 볼 때에 주님은 내게 좋은 거 줬으니까 내가 짜랑하고 조롱하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이 주셔 좋은 거 줬으니까 내 마음으로는 저 사람에게는  좋은 거 주지 안해서 좋은 거 없으니까 동정이 되어, 나쁜 거만 줬으니까 내가  미안해서 '주님은 나만 좋은 거 주시고 좀 같이 안 주셨으니까 형제 보기에  미안하다' 부끄러운 감을 가지고 오히려 동정하고 '저에게도 좋은 걸 주십시오'  하는 그것이 성도들의 기도라 그말이오. 이래야 되지, 그걸 가지고 내가 나 된  것처럼 '아 나는 이렇게, 지혜로와야지 바보같이 등신같이 저런가? 왜  어리석을까? 왜 너는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하노?' 이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을 쓰지만. 속 중심에 그라면서도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주님의  대언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고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나로서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을 그걸 속으로 느끼지 안하면 벌써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를 바로 알고, 모든 면으로 바로 알고 또 자기  행위도 자기가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 아는 거보다도 자기가  제일 잘 압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잘 안다는 그거는 참 그것은 외식의 말이요  껍데기 말이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압니까?  그러기 때문에, 제가 그때 지금으로부터 한 이십 년 전에 전국의 학생 신앙  운동 때에 제가 새벽 집회 인도할 때에 이런 설교를 한 시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천하에 있는 모든 죄가 나를 해치는 것보다 자타가 알고 있는 자기  죄 하나가 자기를 해하는 해독이 크다 자타가 알고 있는 모든 죄 그 전부의  해독보다도 다른 사람 모르고 자기만 아는 자기 죄 하나가 해독이 더 크다. 또  자기만 아는 그 죄 하나의 모든 죄보다 자기만 알고 있는 모든 죄의 해독보다도  자기가 모르는 죄 그거 하나가 해독이 더 크다 고놈 이 뒤에 가서 큰 재를  저지른다. 그게 숨어있는 암병이라. 그거보다는 제일 큰 죄는 뭐이냐 하면  주인을 바꾸지 안한 것이다, 완전히 자기를 부인해 가지고 자기는 죽고 참 새로  살아나야 된다. 이제는 주님이 주인이 되고 나는 주의 것이 되고,  우리가 자꾸 말 쉽게해서. 예수님의 피공로로 우리가 뭐이냐? 피공로로  인해서는 내가 주의 것 되는 이게 성공이 돼야 됩니다. 이것을 자꾸 해서 연습을  해서 내가 자다 깨도 '아 나는 주의 것입니다. 그만 뭐 바쁠 때나 틈날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어려울 때나 언제든지 나는 주의 것이라 주의 것이라 하는  그것이 변동이 안 돼야 됩니다. 말로만 그래서 아직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를 자기 것인 줄 아는 그 사람들이 실수를 많이 하고 재를 많이  저지른다 말이오. 우리가 주의 것이오. 또 주님의 종이오 주님에게만 복종해야지  다시는 제 맘대로 못 살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게 우리 아닙니까? 주의 종, 주의  성전이요,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까 나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까 주님 모시고 계시고 주님이 날 움직이는 것뿐이지.

주의 성전이요, 주의 지체요 이러니까. 주님의 지체니까 주님이 내 안에  주관하시고 당신이 나를 쓰지 나는 내게 쓸 아무 권리가 없어. 주의 지체라.

주의 몸으로. 주의 신부로 주의 나라와 백성으로, 주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주님의 선지자로 주님의 왕으로 이렇게 우리가 사는 이것이 성경에서 바로  우리가 아주 지름길로 배운 것이니까 요것을 자기가 믿으면 돼요. 믿는 것은  인정하고 실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힘이 강하고 약한 그것은 뭐이냐?  인정이 제재받지 안하고 그것이 자유하고 실행이 제재받지 안하고 자유하는 거.

자유하지 못하고 이것에게 제재받고 저것에게 제재받으면 상전이 많으면 그것이  약한 거라. 상전 없으면 강한 것이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이 분위기에 오기 전보다, 그걸 좀 생각해야 돼. '아,  여기 오기 전보다 오고나니 다르다. 여기 와서 보니까 예수 믿는 게 좀 다르다'  혹 다른 걸 여러분들이 발견을 했는지 내나 뭐 성경 배운 거 그뿐이라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 있는지, 혹 '예수 믿는 것이 다르다.' 다른 것이 뭐 발견이  됐는지 같다고 생각이 돼졌는지, 또 내가 성경에 깨달은 지식이 뭐 다른 지식  하나 둘 다른 그것이 중대한 문제 아니고 신앙 사상이, 신앙 사상 신앙 정신이  달라져야 됩니다. 그것이 한 성구 두 성구에서 생겨 지는 게 아니고 참 봄이  오면 모든 식물이 다 차차 차차 움이 나 가지고 속 움이 나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 신앙의 분위기라 하는 거 신앙의 사상이라 하는 거 신앙의 동지 성도의 서로  교통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잘못되면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을 모르거든 그 사람의 신앙의 동지를 보면 압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그렇게 판정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점을 여러분들이 많이 깨달아서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여기 교만한 것은 뭐이냐?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 준다 그 말은 그 무슨 말인지?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 준다  그 말은 무슨 말인지? 은혜 준다 말은 무슨 말인지요? 잘 알고있지요? 은혜 주는  건 뭐이요? 공으로 준다 말이 아니오? 공으로 주는 것. 공으로 주는 거 은혜  준다 말은 공으로 주는 거라.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공으로 준다 그말이오.

어떤 자에게? 겸손한 자에게. 자기가 자기를 바로 알고. 없는 줄 알고, 약한 줄  알고, 못할 줄 알고, 죽을 줄 알고, 바로 죽을 줄 아는 자에게 살려줘야 '아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사은의 생활하고 없을 때 그 사람에게, 저 없는  줄 아는 자에게. 없는 걸 없는 줄 아는 자에게 줘야 그것은 주님에게 받은 것인  줄 알지 제가 없는 줄 모르고 있으면 주면 제건 줄 알고 더 교만해지고 자꾸  나빠질 터이니까 주님이 어떻게 줄 수 있느냐? 그러기 때문에, 겸손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끌어오는 유일의 방편인데 이것만 틀려 버리면 다 헛일이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입으신  그분이오니 그분 앞에서 네가 어떤 자인지를 바로 찾아서, 하나님 앞에 바로  찾아서, 네가 바로 찾아라. 너는 울어야 될 자인지, 너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될  자인지, 하나님께 의뢰해야 될 자인지, 하나님께 맡겨야 될 자인지 네가 어떤  자인지 네가 너를 바로 알게 되면 하나님이 너를 만들고 만들어서 때가 되면  너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서 이렇게 높은 자를 만들어 쓸모있는 자를  만들어 주신다 그래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 말은 제가 제 일  할라 하는 것이 저는 저를 책임지지 못하는데, 저는 저를 책임 하나도 못 져요.

제가 무슨 책임을 질 수가 있소? 하나도 책임 못 져. 또 제가 제 일 하는 거  하나도 없소. 이런 것을 알고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네가 네가 네게  대해서 모든 면에 영육의 뭐 물질면이나 네 사회나 가정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너는 네게 대해서 책임질 수 없다는 자인 것을 네가 알면 그 모두 네가 할 수  없으면 자연히 주님에게 맡길 것 아니라?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맡길 리가  없습니다. 맡긴다고 해도 하나님을 꾀울라고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달갤라고  하는 것이오. 하나님을 삐꾸지 안하도록 할라 하는 것이오. 하나님 비위를  상하지 안할라 하는 것이오. 진정 맡겨라 주님은 그런 데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자인 줄 알아야 맡기지요. 맡기면 다 해 주신다 그말이오.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근신하라' 근신은 무슨 근신? 근신은 깊이 말하면 옛사람으로  살지 안하고 새사람으로 살라고, 다시 말하면 죄인이요 무지 무능자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그렇게 사는 것이 겸손이요, 이것이 겸손이요 이것이 깨어 있는  것이오. 없는 자가 없는 자로 아는 것이 깨어 있는 자 아닙니까? 이러니까.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으니, 피로 중생 된 것도 전부 빚쟁이뿐이라. 그렇지  않습니까? 피로 중생된 것도 전부 빚쟁이 뿐이요, 성령으로 중생된 것도 전부  빚쟁이 뿐이요. 진리로 중생된 것 도 전부 빚진 거 뿐이지, 그분에게 얻은  거뿐인데, 뭐 얻은 거뿐인데, 그러니까. 깬 거는 '나는 거지입니다. 나는 얻은  것뿐입니다. 내 말에는 입이 나올라면 감사할 것 외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마귀를 여기 말한 것은 마귀는 미혹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렇게 뭐  미혹 생활, 자기가 백지 자기 아닌 것을 둔갑을 해서 자기 아닌 자기로 그렇게  나타나도록 할라고 자꾸하니까 그게 우리가 죽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로 살지 못하도록, 자기가 자기를 잊어버리도록, 자꾸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것이 마귀 미혹이라 말이오. 자기가 자기를 잊어버리면 안돼요.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그러면, 우리가 마귀를  어떻게 대적하는가? 마귀 대적할 수 있는 거는 아무것도 없어. 결심도 소용도  없어. 믿음에 굳게 서는 것 뿐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 뿐이라. 마귀야 오거나 말거나. 마귀가 와서 뭐 가정을 파괴시키거나,  '명예와 지위와 재물을 원수가 취한들 상관이 뭐이냐 다 주께 있으리로다' 다  맡겨 놓고 나는 그저 다른 거 아무것도 없고 당신의 선포해 놓으신 이 말씀을  인정하고 실행하는 거 그것만 우리 할 일입니다. 그라면 모든 거 다 우리에게 다  돼 버려요.

 네, 다 같이 기도합시다.

 주님 이렇게 우리들을 한적한 짧은 한 토막을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대로의 이해 못 할 걸음을 걸어 일어서며 앉으며 걸음발하게 하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저희들을 진실되게 하사 기회를 헛되이 지내 보내지  말고 주님이 주실 때에 받아 감당하는 저희들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점점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이루어져 가며 주님 한 분으로 전부를 삼아 사는 자로  이루어져 정말로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의 종이 되고 주님의 지체가 되고 주님의  몸이 되어 온전히 주님의 형상과 영광의 찬미가 날마다 이루어져 세상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갈급 해서 기다리고 있는 저희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도록 주님의 충만하심을 그 들에게 전달하여 충만케 할 수 있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이 실력을 배양받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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