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적 기쁨 평가적 기쁨

 

1980. 3. 26. 수야

 

본문: 빌립보서 4장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세상에 많은 종교들과 사상들과 주의들이 있지만 그 전부의 욕망은 기쁨입니다.

다 기쁨을 가지려 해서 모든 삶을 하고 있는 것은 공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종교나 사상이나 주의나 철학이나 그 모든 것이 다 목표를 기쁨에 두고  있습니다. 이리이리 하면 사람이 기쁘게 살 수 있다. 또 저것은 저렇게 하면 다  인간 쾌락에 도달한다해서 사람들의 전 지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어떻게 하면 기쁨의 반대인 고통을 피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치 아니하는 고통의 반대인 그 쾌락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이 두  가지뿐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유와 목적이 많은 것 같지만 깊이 따져 보면 다 이 쾌락과  고통, 이 두 가지를 두고 고통 면하는 방편과 쾌락에 도달하는 그 방편을  사람들의 전 지식으로 가지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최종의 목적이라 하면 곧 기쁨입니다. 하나님  기뻐하시고 자기 기쁘면 이것으로 완성입니다.

 게 이렇게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체험하고 경험한 그  당면된 문제에서 제일 중대한 것이 고통과 기쁨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만일  기쁨을 소망하지 못한다면, 기쁨이 보여지지 않는다면, 기쁨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나 죽지 못해서 살고 있고, 살고 있으니  이것저것을 하여야 되기 때문에 움직이고 사는 것이지 그 생활은 사망 아닌 것  같은 사망입니다.

 그 기독교에는 일반인간이 원하는 그 정도와 범위 안에의 기쁨이 아니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이 '항상'이라는  이 말은 현재와 영원이라는 뜻인데 시간도 지금 몇 백년 몇 천년 몇 만년 뭐  영원. 공간으로도 이 세상 어디서든지 또 물질계에서나 영계에서나 어디서든지  어떤 존재라도 해할 수 없는 기쁨이 예수교 안에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믿는 사람은 궁함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있고, 또 부강함에서도,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금생에서도,  내세에서도, 성공에서도 실패에서도, 아무 것도 침노할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이 기쁨을 가져라 해서 항상 기뻐하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목표하는 그 기쁨들은 모두가 다 외모적이요 다 껍데기요 또 너무도  많은 제한을 받는 첩첩 감옥 속에 들어있는 기쁨입니다. 첩첩 감옥 속에  들어있는 기쁨이기 때문에 그 감옥 안에서는 일시 기뻐했지만 그 감옥을 터쳐  나올 때에는 그 기쁨이 하나도 없이 다 말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그 기쁨은 세상이라는 이 감옥 안에서는  기뻐했지만 세상 감옥을 떠나 옮겨지는 세상이라는 이 범위 테두리밖에  죽음이라는 문을 통해서 이 세상 테두리 밖에 나갈 때에는 벌써 가진 그 쾌락은  다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주시는 이 기쁨은 세상 테두리 안에서 테두리 밖에서  어디서든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이런 기쁨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찾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간 일도 재미없는 그 생활은  그것이 다 일이 되고 고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그 생활은  어떻게 피곤할 만큼 기진해져도 그는 능히 그 피곤을 이길 수 있고 그 기쁨이  자기에게 있는 그 정력이나 소유가 다 없어지는 마지막까지 기쁘고 즐거움으로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 이 말씀은 피곤치 않는 그 기쁨의 생애를 해라 피곤치 않는  기쁨의 생애가 아니라면 그것은 다 심판 받을 염려가 있고 또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 그런 불안전한 요소가 섞여 있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우리 믿는 사람은 기쁘지 아니할 때는 그 억지 신앙생활이요 다  죄입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기쁠 때 그때가 정상적인 기독자의 생활이 되는  때입니다. 그 기쁨은 두 가지 단계적인 그런 기쁨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  지식적 기쁨입니다. 지식이 기뻐하는 지식으로 기뻐하는 지식적 기쁨입니다.

 자기가 비판해 보니까 비판 끝에 기쁘고 평가해 보니까 평가 끝에 기쁘고  논리해 보니까 논리 끝에 기쁘고 이 모든 것을 비교해 보니까 비교 끝에 기쁨이  있는 이것이 예수 안에 기쁨의 초 단계입니다.

 이 지식적 기쁨이 모든 현실적 고통을 능가할 수 있는 이것이 기독교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일 지식적 기쁨이 자기 현실에 부딪쳐 있는 현실적 고통을  능가할 만한 그런 실력이 되지 못했을 때는 그 사람의 지식적인 기쁨은 그  현실의 고통에게 정복을 당해서 그만 그 기쁨이 고통에게 삼키어져 가지고  고통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 현실적 고통을 능가할 수 있는 지식적 기쁨에  도달하게 되면 그 사람은 현실적 고통을 이 기쁨으로 이겨나가는 그 이김에  전투를 가르쳐서 십자가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참으셨다' 하는 것도 예수님의 그 지식적 기쁨이 현실적인 그 십자가의 고난을  능가했던 것입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외부적으로 볼 때에는 저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렇게  말했지마는 그 자신에게는 당신에게는 지식적인, 비판적인, 평가적인, 논리적인  그 지식적 기쁨이 현실적 십자가의 고난을 능가할 수 있는 그 기쁨을 가지고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외부는 제 삼자들이 볼 때에 심한 고통을  당했고,  또 택자들의 모든 죄에 대가인 참 무한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은 우주적인 참  택자적인 과학적 이 고난을 당했지마는 그 속에 기쁨이라는 기쁨은 이 고통이  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속에 예수님의 이 기쁨은 십자가의 고난을 능가하고  남았고 또 하나님이신 그 기쁨을 상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안에는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피곤치 아니하면" 하는 그 말은 기쁨이  그 현실적인 고난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의 생명인데 생명이  역사해서 산 생활이라면 반드시 현실적 그 고난을 자기 속에 지식적인 그 기쁨이  그것을 이겨나는 고로 그 고통이 그에게 고통 되지를 못한다. 결국은 그 고통이  지식적인 기쁨에게 삼키어지고 정복을 당해서 그 고통은 지식적인 그 기쁨에  욕망을 달성하게 하는 욕망을 달성되게 하는 유일한 보조물과 협조무리 되어지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선물로 기쁨으로 감사히 받아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이 기독교의 걸음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자의 이 기쁨은 껍데기에 발려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껍데기에  발려있는 기쁨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노력 없이 기뻐지리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기쁨은 껍데기에 발려있는 기쁨이 아니요 보배로 다 싸서 속에 감추어 있는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은 찾아야 이 기쁨을 만날 수가 있지 저절로 기뻐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속한 기쁨은 다 그것이 껍데기 발린 기쁨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쁘지  아니할려고 해도 어쩌다 보니까 기뻐졌습니다. 기쁠라고 애를 쓰지 않아도  기뻐지요 또 겉에만 기뻐집니다. 그만 이 기쁨은 저절로 할려고 해도 저절로  만나지는 이 껍데기에 발려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속한 기쁨과 하늘에 속한 기쁨이 아주 본질적으로 다르고  또 그것을 찾아 만나는 방편이 아주 다릅니다. 세상에 있는 기쁨은 자기가 세상  지식을 가지고라도 세상 지식을 가지고라도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상에 속한  기쁨은 그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면 안됩니다. 그만 저절로 기뻐지고 다만  맛보기로 보여지니 세상에 속한 기쁨은 생각하면 절단 납니다.

 그러기에 생각지 않습니다. 또 연구하지 않습니다. 또 비판하지 않습니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비교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면 껍데기 발려있는  기쁨이기 때문에 그 기쁨이 뭐인고 싶어서 그 기쁨을 한 번 닦아보든지 그  기쁨을 그 기쁨을 헤벼 파보든지 하면은 그만 밑천이 드러납니다. 그만 밑천이  드러나서 그만 그 기쁨은 못 누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은 세상 기쁨은 무식한 사람이 많이 누리고 또 그 순전히  둔탁한 사람이 많이 누리지 세상 기쁨은 불택자라도 명철한 사람이라든지 또  심각한 사람이라든지, 진실한 사람이라든지, 유식한 사람이라고 하면은 세상에  속한 기쁨을 많이 누리지를 못합니다. 그저 얼마 누리나 조금 있다가는 그만 그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기쁨은 어짜든지 무식한 사람이라야 마치 우리에 있는  도야지가 아, 그것이 아무리 무식하고 저능한 사람만치라도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알고 비판할 줄 안다고 하면은 자기는 벌써 체중이 얼마 돼가니까 곧 이제  도살장으로 팔려간다는 그걸 생각하면은 그 도야지가 뭐 기쁠 것 있습니까? 아마  사람은 아무리 못나도 우리에 가둬놓고 키우면서 네가 며칠 되면은 이제  잡아다가 지금 사형을 시킬 거라 그러면 어떻게 옛날에는 사람 잡아서 약을 했다  하는데 뭐 잡아서 약으로 할거라 하는 그걸 알면 그 도야지 같이 그렇게 된  처지를 안다면 그 사람은 기쁨을 못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꼭 같은 입장이지마는 그 짐승은 기쁨을 누립니다. 그것은 왜 아주  사람보다 무식하기 때문에 또 저능의 동물이기 때문에 아무 비판과 평가가  둔하기 때문에 그는 지금 잡으려고 흥정하는 그 흥정 앞에서도 서로가 그만  맛있다고 좋다고 터벌터벌 거리면서 먹습니다. 예, 그것은 저능의 동물이기  때문에 비판과 평가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도를 모르는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세상에 속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유식하면 유식할수록 그 기쁨은 많이  누리지를 못합니다. 명철하면 명철할수록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진실해서 따져  들어가면 그만 그 기쁨은 부서져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철인 쳐놓고 기쁨을 가진 사람은 참된 철인이라면  기쁨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철인 쳐놓고 자기가 이래도 자기  수양이라 해서 인생이 이렇게 허무한 것이지마는 그래도 이걸 다 말해 놓으면  세상이 다 절단 나버릴 것이기 때문에 다 속아 사는 것이니까 내가 그래도 이걸  바로 말하면 사람들이 다 자살할 것이고 자결할 것이고 다 낙망할 터이니까 그저  사람에게 하나 거짓된 그런 욕망이라도 줘서 죽는 날까지 기쁨으로 살게 해야  되겠고,  또 이래야 이 사람들이 존재한 그 질서가 보존되지 그렇지 안 하면 이 안녕이  사람들에게 평안한 말을 합니다. 모든 이종교의 창설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이종교의 창설자 쳐놓고 또 그 종교에 벌써 도인이 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참으로 그 도로 인도할 수 있는 그 도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진 자라고 하면  그 사람은 기쁨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불교인으로서 정말로 기쁨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그렇지마는 이것이  인간의 권선징악의 하나의 교훈이니까 내가 이걸 해야 되지요 반대되는 내가  아는 대로 사실을 말해 놓으면 사람들이 다 혼돈 돼서 사람들도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라는 사람은 또 그 사회에서 국가에서 살려두지 안 할거라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명철을 가진 사람들은 기쁨을 가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  신문에 보니까 미국도 그 나라에 좀 유식한 사람들은 그 미국나라에 평강을  누리지 못한답니다. 잠을 못 잔답니다. 벌써 신경성이, 신경쇠약이 돼서 지금  오늘 올지 내일 올지 하고 있습니다.

 왜? 노리는 적들이 많고 폭발 위험물들이 많기 때문에 언제 이거 뭐 사람들이  그만 정신 착각되면 단추 하나 눌러버리면 다 타 버리기 때문에 그걸 아는  사람은 안심하고 기쁨으로 살지를 못한답니다.

 세상 기쁨은 그렇습니다. 그것은 안 알아봐 그렇습니다. 만일 따져보면 어떤  기쁨이라도 제가 놀라는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따져보면 즉시 조금만 따져  들어가 보면은 그만 죽음입니다. 조금만 따져 보면은 근심이요 고통입니다.

조그메만 따져 들어가 보면은 좀 있다 큰 복수라는 원수가 지금 원수의 화살이  들어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저 세상 기쁨은 무식한 사람, 비판 없는 사람, 짐승같이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사람 또 아는 사람은 부러 잊어버릴라 합니다. 그걸 따져  보면 안 되니까 만일 따져질라고 할 때에는 술을 한잔 실컷 먹고 그만  잊어버립니다. 그거 잊어버리고 그 실마리가 나와서 정상적인 비판과 평가와  비교 이것이 나오면 죽을 판이기 때문에 그만 들어가다가 그만 아아아 그만 안  들어갈라 합니다. 따져보면 저들의 모든 쾌락이 다 절단 나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가다가 역부러 잊어버리고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그래서 사람이 죽는다는 말을 하면은 듣기 싫어합니다. '아, 죽을 때 죽지 듣기  싫다' 안 따져 볼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쁨은 정반대입니다. 기독교의  기쁨은 맛보기로 보이는 기쁨이 아닙니다. 껍데기에 발린 기쁨이 아니요 이는  첩첩 봉지로 싸 논 보배로운 기쁨입니다. 깊이깊이 쌓여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쁨은 믿음이라는 이 연장을 가지고 믿음이라는 연장을 가지고  발굴해야 파야 이 기쁨이 나옵니다. 이 기쁨을 발굴해 가지고 잡기만 잡았다고  하면 이 기쁨은 세상이 조금도 없이 하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가지고서 하늘에 기쁨을 하늘에 속한 기쁨을 캐내야 된다는  그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은 일 점 일획도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완전자시기 때문에 당신이 거짓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획도 거짓이 없고 다 책임지시고 바른 참말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 참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참된 거짓이 하나도 없는  말씀입니다.

 말씀인데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을 했든지 이 말씀이 말씀한 것을 인정하는  이것이 첫째 믿음입니다. 이 성경에 말씀하신 이 말씀을 인정하는 것 성경이  영생있다 세상 사람은 인정 안 합니다.

 영생이라니 '아, 요새 돈으로 뭐 천만 원 일억을 들여도 일년 장수도 더 연장이  안 되는데 영생이라니 영생이 될 수 있는가?' 이렇지마는 성경에 영생이라고  말씀하신 이 하나님 말씀하신 이 영생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을 사실로 인정하는 이 인정이 첫째 있어야 됩니다.

 인정, 이것은 사람이 자기에 있는 지식이나 무엇을 가지고 인정할 만 하다 하는  그런 무슨 증거를 잡을만한 그런 연구하면 비판을 가질만한 그 평가를 가질만한  그런 재료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지식이나 경험이나 체험이나 그 뭐 어떤  거 명철이나 이것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성경에 있는 말씀을 비판하고  비교하고 따져 들어가 가지고 요거는 믿을만하다 요거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  가지고서 인정할만한 그런 비판 요소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 인간은 비뚤어진 지식일 뿐 아니라 전부가 다 제한되어 있는 유한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유한을 넘은 무한성을 가진 지식이요, 완전성을  가진 지식이요, 불변성을 가진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을 제가 달아보고  시험해보고 심사해보고 할만한 그런 실력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자기라는 그  자기라는 자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 평가해서 알아볼라 하는 그  자는 다 망할 자입니다. 다 그 망하는 것입니다. 그 옛사람이 하는 것이고  마귀가 하는 것이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인간의 요소, 인간의 뭐 주관가지고서 노력으로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인해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의 공로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받아 성신이 그 사람을 책임을 지고서 성령님이 보증자가 되어 가지고 이제  예수님의 피 공로로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이 택자는 성령님이 그 사람을  책임을 맡았고 맡아서 그 마음을 광명케 하고,  진리가 참된 이치라는 이 진리가 그 사람을 책임을 맡았고 맡아서 그 마음을  광명케 하고, 진리가 참된 이치라는 이 진리가 그 사람을 책임을 맡아서 진리를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받아서 진리와 그 사람과 하나 되도록 진리가 그 사람을  책임지고 그 사람에게 이 진리와 연결되어서 진리성을 환영할 수 있는 이 진리와  연결할 수 있는 이 연결 역사를 진리가 하고 성령님이 책임져서 그 사람의  어두운 모든 요소를 광명케 하는 이 하나님의 역사로 광명케 하시고 이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참된 말씀을 해 놓으신 이 말씀이 인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을 그 사람이 뭐 열 번, 스무 번, 백 번, 몇 백 번  읽는다고 해서 인정되는 것 아닙니다. 환하게 외워도 인정되는 것 아닙니다. 이  진리가 자기에게 이해가 돼서 이 진리가 자기에 참된 이치로 인정이 되어지는  것, 또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이 되어지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이렇게 이걸 주셔야 성경을 읽을 때에 인정이 되어지지 그라면  인정이 안돼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이 믿음에 비유컨데 믿음의 도구와 또  이대로 실행을 해 보는 이 믿음의 도구, 이 도구 가지고 비로소 이 기쁨을 캐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 첫 칸, 첫 칸을 가리고 있는 이 문과 같은 이 순종으로 그 다음 그  다음 것을 열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있는 그 기쁨을 열 수가 있고 그 다음  순종으로 그 다음 기쁨을 열 수가 있기 때문에 이거는 인정과 실행 이 두 가지가  합해서 믿음인데 이 믿음으로 쌓여있는 감추어 있는 이 기쁨을 찾지 안 하면 이  기쁨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찾을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있는 권세도 또 찾을 수 있도록 모든  도움도 다 구비돼 가지고 있습니다. 구비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사람으로  단독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지마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인해서 찾는 권세를  이미 받아놓고 또 찾는 방편을 받았고 또 찾을라면 찾을 수 있도록 모든 돕는 이  배경들을 돕는 이 모든 구비들을 다 설정해 놨기 때문에 찾기만 하면  찾아집니다.

 그래서 기독자들이 기쁨을 자기가 노력해 가지고 찾아서 이 기쁨을 만나는 것  만치 자기는 세상에서 천국생활을 합니다. 이 기쁨을 만나는 것 만치  천국생활하지 이 기쁨을 만들지 못한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생활 중에 제일  고된 생활이고 참 못할 노릇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안에 있는 이 기쁨을 찾아 만난 사람은 예수 믿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고 이 기쁨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생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어떻게 되나 하는  그것이 곧 세상이 하늘나라에 가서 될 그림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늘나라의 것이 비추어 오고 있는 것이 세상이요, 또  지옥이 비추어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이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도 별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것과 하늘나라의 누리는 것이 조금 다른 것만 있지 다른 거는  뭐냐 다른 것 있는 것은 방해물이 그때는 없으니까 방해물이 없으니까 가리어진  것이 없으니까 그때는 세상보다 더 뛰어난 그 기쁨이 되어지지마는 내나  세상에서 기뻐했던 그 기쁨이 하늘나라에 내가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 기쁨을 이 방해해서 가리는 구름 같은 것,  먼지 같은 것, 보자기 같은 것이 쓰지 못할 이 세상 것이 자꾸 이 기쁨을  가리어서 이 세상이 세상에 기독자의 기쁨이 그 드러나는 것이 희미해지는 것과  하늘나라는 그 가리는 것이 없으니까 환하게 드러나니까 더 광명해서 똑똑해지는  그것만 다르지 그 자체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꼭 같습니다.

 일호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쁜 기쁨이 일호였습니다. 세상에 모두 저  잘났다고 전부 '나 잘나 내가 잘났으니까 내가 옳으니까 날 따르라' 하는  사람들뿐이지 나는 못났으니까 딿겠다 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는데 실은 봐야  하나도 믿을만한 거 없습니다.

 하나도 의지할만한 게 없어 전부 뭐 참 도적은 오히려 수갑 포승줄을 들고 가고  양민은 포승을 묶여 가지고 가는 것이 이 세상이고 도적질도 잘못해서 들키지  잘하는 사람은 안 들키고 사기 협잡도 그렇게 악도 잘하는 자는 안 들키고  서투른 자가 나타나니까 이것 세상은 이런데 이걸 누가 흑백을 가리겠습니까?  흑백 가릴 이가 없지,  또 잘못하고도 잘했다 하고 잘하고도 잘못했다고 그만 매장시키면 매장  당하니까 그걸 아무도 그 규정을 지워줄 이가 없습니다. 규정 지어줄 이가 없어.

또 거기 대해서 올바른 보응을 할 이가 없어.

 이러니까 참 모든 것을 절대성 있게 정확하게 그 사실대로 이 세상을 판단할  이가 없는데 이 판단하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찌 좋은지, 또 아무리  의지하고 바라보고 따라 봤자 우리에게 참된 것을 줄만한 사람이 없는데  의지하고 바라보고 따라서 추호도 속임이 없을 이 분이 계시기 때문에 기쁩디다.

 아무리 이렇게 복잡하고 아래위가 없이 혼란 되어있지마는 이 분이 조만간에  모든 것을 다 정비 정돈 정리를 딱 해서 인간이나 뭐나 그래 마음이나 생각이나  모든 것 가진 그대로 공평 되게 딱 드러내 가지고서 모든 것을 판정 지어서 다  규정을 지어 가지고서 이제 질서를 딱 정연하게 잡을 이 분이 있는 것  생각하니까 살맛이 있습니다.

 네, 이 분이 없으면 정말로 살맛이 없습니다. 전부 이 도적인데 전부 속이고  전부 거짓말로 아무 실력도 없는 것이 책임도 하나도 지지 못할 것이 전부 제가  책임진다고 '날 따르라 날 따르라' 하는데 책임질 자는 세계에 하나도 없다 그  말이요 인류 중에 하나도 없어.

 이런데 이 인간뿐이라면 희망이 없어 소망이 없어. 이것은 소학을 대학이  삼키고 소학이 무학을 삼키고 무학이 너를 삼키는 이 세상이니까 무슨 소망이  없지마는 절대자 한 분이, 한 분 계시기 때문에 든든하다 그 말이요. 예, 이  분이 우리 왕이 되고 이 분이 지금 모든 것을 갔다가 통솔할 터이니까 이 분이  한 분 계시니까 살맛이 있어. 제가 기쁨 가운데에 제일 기쁨이 하나님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기쁨이 제일 기뻤습니다. 이 기쁨이 제일  기뻐요.

 이러니까 무얼 봐도 원망 불평할 것이 모든 것을 환하게 다 알고 계신  분이시니까 뭐 불평할 것 하나도 그 분 보니까 불평이 하나도 있을 거 없고 또  뭐 대우 안 한다 안 하니까 못 알아준다 하는 그런 것도 할 필요가 없고 떨면서  고칠 것뿐이지, 아무런 원망 불평이 다 없어져 버려요.

 또 거짓말로 거짓말 잘해서 일시 권력 잡은 사람 보면은 이 분이 계시니까  마음에 그 사람보고 애터지고 안스럽고 저것 뜨거운 국에 뭐 모르고 덤빈다  싶어서 애타고 안타깝지 뭐 분하거나 밉거나 괘씸하거나 그런 것도 아무 것도  없나니 저 죽을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하는데 그 뭐 괘씸할 게 뭐 있습니까? 이  분이 계시니까 모든 게 해결이라.

 이래서 '아, 기쁘다 참 절대자이신 이 분이 계시니까 살맛이 있고 희망이 있고  기쁘다.' 이 분을 생각하고 참 기쁜 생활했고. 이 분을 생각하고 어떻게 기쁜지  모든 것 다 보니까 절망 낙망 원망 시비 불평 미움 모든 것이 이 분을 발견하고  보니까 다 없어져버려.

 다 없어지고 멋모르고 저 망할 줄 모르고 날뛰니까 동정이나 가고 마음에  안타깝고 마음에 안스럽고 동정이 돼서 '하나님 저기 저 죽을 줄도 모르고 저  망할 줄도 모르고 저러니까 그 뭐 갚을 것이 뭐 있습니까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아, 이런 관대한 기도가 나오지 거기 대해서 아무런 지옥이라 하는 것이 이 분을  발견하고 나니까 지옥이 다 없어져 버려요. 그만 지옥이 거의 다 없어져 버려요.

 또 둘째로 제가 기쁜 것은 자, 암만 삦어 봐도 별 수 없고 깎아 봐도 별 수  없고 딲아 봐도 별 수 없고 자꾸 생각하고 연구하고 찾아 들어가 보니까 잘못된  것만 자꾸 훨훨 나옵니다. 찾을수록 뭐 부처 밑구멍을 건드리면 뭐 쌍꺼풀이  나온다 하지마는 이것 자꾸 조사를 해서 자기를 살펴볼수록 자꾸 더러운 것만  술술 나오니 이것 예수님의 대속의 이 사죄가 없었으면 이거는 참 비참하고  이거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자기에게 잘못된 이것 때문에 지금 이게 하나님  심판 앞에 가면 어찌 되겠느냐? 이걸 알지 못하신 분이 없으니 이 분 앞에 가  가지고서 이런 게 술술 나올 것을 나올걸 찾아보니까, 찾아보니까 그만 나오는  게 아니라 찾아볼수록 자꾸 나옵니다. 끝이 없이 나와. 아, 끝이 없이 잘못되는  것이니까 이게 많이 나올수록 기쁩니다. 이게 나올수록 주님의 피는 나에게  보배요.

 예, 이러니까 이걸 찾아서 자꾸 이게 나와서 고통, 고통, 번민, 부끄럼이었는데  이 웅덩이가 커질수록 주의 피로 사죄를 갔다 붙여 놓으니까 그만 시원하고  기쁘고 아예 세상에 죄 지은 것이 고통이 되어지는데 아, 죄 지은 그게 기쁨이  되어지고 즐거움이 되어지고 '아, 다행스럽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기쁨이  되어지는 이 기쁨이 예수 안에 있고,  자기가 눈을 뜨고서 모든 일에 대해서 의무와 책임을 생각해 보니까 저 조그만  하게, 조그만 하게 가정에 의무 책임, 사회에 의무 책임, 친구에 의무 책임,  이거 뭐 과거를 죽 생각하면 전부 배신한 것뿐이고 배신한 것뿐이고, 무책임한  것뿐이고, 거짓말한 것뿐이고, 공연히 헛장담한 것뿐이고, 남한테 속인 것뿐이고  그런 것뿐이지 하나도 '야, 그거야 내가 후회 없고 부끄럼 없이 책임 감당했다'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요.

 이런데 이것만 나오고 나니까 그만 바다 속에 파묻히는 것 모양으로 견디지를  못하겠는데 아, 예수님이 내 모자라는 것을 대신 행하신 대행의 이 칭의가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이걸 생각하니까 어떻게 다행스러운지 이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좋다고 했지마는 나를 살펴보고 보니까 내게 대해서 예수님의 대속이  없으면 이것 참, 이거 이상 더 비참한 게 없습니다.

 나뿐 아니라 이웃을 생각해 보고 인류를 생각해볼 때에 생각해 보니까 거기  대해서도 이거 죄에 대해서, 자기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절대자와 원수 된  이것을 생각해 보니까 모두가 다 송장 덩어리이고 사망 속에 저주 속에 몇 만  층어리 저주 속에 파묻혔는데 여기서 건져낼 자가 누구냐?  예수님의 피 공로로 대형, 대행의 이 대생의 세 가지 대속의 공로로, 이 공로로  어디까지 깊이 빠졌던 데도 다 솎아 올려 가지고 살려내는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하니까 어떻게 기쁜지.

 세상 사람은 이걸 모르기 때문에 기쁜데 우리는 이 궁극적으로 모든 해결을 다  짓고 남음이 있어 가지고 있는 기쁨이니까 이 기쁨은 아무도 해할 수가 없는  기쁨인 것을 우리 기독교 안에만 있습니다.

 셋째는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 하나님 아버지라. 아, 독생자도 아끼지  안 한 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 이 아버지를 찾아서 자기가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 되신 이것을 찾고 찾아서 아버지 되신 것이 더 밝히 보이고 보여지면,  보여지면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 됐으니까 땅 위에 누가 해하겠습니까?  교만해질까 싶어서 두려워지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셨는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는데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기까지 당신이 생명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심으로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삼으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데 그만 이만해도 다야. 뭐, 그래 놓고 찾아 봤습니다.

 자, 세상에 있는 근심아 걱정아 몰아 오너라. 근심과 걱정아 다 오너라 보자,  근심과 걱정을 다 끌어다가 오니까 아버지 근방에도 오지 안 해서 다 녹아  버려요, 다 녹아 버려요. 아버지 품안에 있는 나에게 세상 근심, 걱정 있는 것  같더니마는 찾아 가지고서 그걸 찾아보니까 다 없어져 버렸소. 좀 근심과 걱정과  고통으로 오라 하니까 어디로 달아나 버렸는지 다 달아나 버리고 하나도 없어.

도무지 근심 걱정을 만날래야, 찾아 돌아다녀야 찾지를 못하겠어.

 눈을 감고 과거에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근심하게 했던, 괴롭게 했던,  걱정스럽게 했던 그것을 아버지를 모시고 찾아가 보니까 어디로 달아났는지  없어. 암만 달아나야 근심을 못 만나겠습니다. 암만 찾아 다녀도 걱정을 못  만나겠고 암만 찾아 다녀도 두려움을 못 나가겠어.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버지  찾으니까 이것이 다 어디로 그만 도망가 버리고 사라져 버렸는지 하나도 없어.

기독자의 기쁨은 찾으면 고통이라 하는 것이 다 그게 무한한 기쁨이 됩니다.

 또 한번 생각해 봤소. 이거 뭐 하나만 가지고도 기뻐서 한이 없는데 또 한번  생각해 봤소. 해 보니까 야, 암만 그렇지마는 내가 만일 백년 산다, 백년 살면  백년 살면 내가 지금 한 20년 남아 살면 죽을 긴데 그 백년 살아봤자, 그만 천년  살아보자. 천년 살아도 또 끝이 안 있나 그 다음에 죽음이 안 있나 그러면  생명은 영생이 어찌 되느뇨. 아, 주님으로 인해서 영생을 얻었으니까 영생을  얻었으니까 그 이 영생을 얻은 데 대한 기쁨,  이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종노릇하는데 죽음이 두려운데  영생을 이제 발견하고 보니까 어떻게 기쁜지 죽음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다  없어지고 나를 해하지를 못합니다. 영생하는 영생을 우리가 받았으니 생명에  대한 모든 염려나 두려움이나 번민이나 고통이라 하는 것은 다 없어졌습니다. 이  영생을 가졌지마는 영생으로 말미암은 기쁨, 영생의 기쁨을 가졌지 못했기  때문에 영생의 기쁨이 가리어졌으니까 이러다가는 굶어 죽겠다 아이구,  이러다가는 병들어 죽을라, 맞아 죽을라, 어떻게 죽을라, 영생의 기쁨이  우리에게 가리어져서 없을 때에 이 죽음이라는 이것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걱정을 주고, 고민을 주지. 영생을 자기가 발견해, 영생의 기쁨을 가진 자에게는  사망적 고통이라 하는 것은 그 근방에 오지를 못합니다. 오기 전에 다 사라져  버렸소. 아무리 찾아 다녀도 아무리 찾아 다녀도 사망적인 고통이라 하는 것은  만나지를 못합니다.

 이거 뭐 시간 없는데 제가 한번 간단하게 시간이 없어 그 뭐 기쁨을 누릴라  하니까 그 시간이 없으니까, 하나만 해도 그런데 맛을 좀 골고루 볼라고 봤소.

이제 천국기쁨을 맛을 봤습니다.

 천국 기쁨 시공을 초월한 사랑과 진리와 진실과 봉사와 서로 모든 존재들이  서로 한 몸같이, 손가락이 발가락에 끼고 발가락이 손가락에 끼고 혓바닥이  등허리에 끼고, 등허리가 혓바닥에 끼고 막 이렇게 전체가 온 전신이 세포조직이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이렇게 아끼는 한 몸 만나면 분쟁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화 된 것으로 된,  그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허락이 되어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하늘나라가 내 나라가 된 천국 백성, 천국이 내 나라가 된 이 천국적 기쁨을  가지고 보니까 세상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탐나는 것도 하나도 없고, 부러운 것도 하나도 없고 이 세상 것 가지고서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좀 이사갈 준비를 잘 할까 이것만 생각나지 천국 기쁨을  가진 자에게는 세상 근심, 걱정, 고통이라 하는 것은 그에게 오지를 못합니다.

 우리 기독자의 이 기쁨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 세상 이런 근심, 걱정 세상 근심,  걱정, 고통이 오지 천국 기쁨은 세상을 다 능가하고 남음이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가진 것 이것 폐물 이용할  길이 있습니다. 네, 폐물 이용 길이 있소.

 이 죽음도 폐물 이용합니다. 자, 우리가 이래 세상에 가지고 있는 이것, 아무리  안 늙을라고 해 봤자 안 늙어지지도 안 하지, 아무리 가지고 있는 소유를 안  놓을라 해도 안 놓아지지도 안 하지, 이미 다 빼앗기고 없어질 것인데 이미  빼앗길 것인데 이것을 그 이용하는 폐물이용, 폐물이용 뺏길 것을 이용해  가지고서 썩을 것을 이용해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을, 약한 것을 이용해  가지고서 강한 것을, 욕된 것을 이용해 가지고 영광스러운 것을, 제한 받은 것을  이용해 가지고서 그 무한한 것을 아, 이렇게 바꿀 수 있는 이 기쁨. 이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암만 깜깜 울며 거머쥐고 있어봤자 결국은 다 빼앗기고  맙니다.

 자,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우리는 뺏기지 안 하는 것만 해도 좋을 긴데  빼앗기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빼앗길 것 이걸 가지고서 무한의 것을 뺏길 것  이것 가지고서 뺏길 것, 약한 것, 뺏길 약한 이것 가지고서 영원 무궁토록 안  빼앗길 강한 것, 이 욕된 뺏길 이것을 가지고서 영원히 영광스러울 것을 바꿀 수  있는 이 바꿀 수 있는 길, 이 심을 수 있는 이 길이 우리 앞에 놓였으니 어떻게  기쁜지 심으는 기쁨, 바꾸는 기쁨.

 여러분 속지 맙시다. 후회하지 말고 어리석지 맙시다. 이 가만히 보며 생각해  보니까 이 바꾸는 길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 방편을 이 권세를 주신 걸  생각하니까 바꿈의 기쁨, 이 심음의 기쁨 이제 그라고 나니까 하나씩 고쳐  봅니다.

 예수 안에는, 예수 안에는 마구 부끄러워서 만 인간에게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는 이 부끄러움을 지금은 가죽 껍데기로 덮어 가리고 구변으로 가리고 돈으로  가리고 권세로 가려서 이게 모두 나타나면 참 기가 찰 것인데 이런 걸 모두  덮어놔서 지금 안 보이지마는 이 다음에는 벌거벗은 것같이 환하게 보입니다.

 이 기막힌 데 이것을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인해서 요것을 이 부끄럽고 이 흉한  것을 이것이 변해서 흉한 것이 칭찬 받을 것이 되어질 수 있는 이게 있다 그  말이요. 회개의 길이 있다 그 말이요. 회개의 길, 회개의 길이 있으니,  그런 것 하나 본다면 김익두 목사님이라 하면 다 알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을  알아. 김익두 목사님이 시장에 장돌뱅이고, 술주정뱅이고 아주 불량자 김익두라  하면 다 욕하고 도둑놈이라고 하는 긴데 얼마나 불량을 지겼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나니까 하늘나라에 가서도 그게 영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저렇던 놈이 이렇든 성자가 됐다' 하니까 하늘나라 가서 하늘나라 가서 영광이  한이 없을 것인데 세상에서도 모든 사람이 '아, 세상에 김익두 그 놈이 지금  성자가 됐어 목사가 됐어 세상에 그런 도가 어디 있노?' 이러니까 자기도 가리는  게 아니고 집회 갈 때마다 가면 '나는 이런 놈인데 이래 됐습니다' 이  자랑거리가 되는 일, 이렇게 수치스러운 말로 할 수 없는 이 수치스럽고 악하고  더러운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이 길이 이렇게 됐으니 아, 이 기쁨이  어떻게 기쁜지.

 예, 회개의 기쁨. 김예근 이라 하는 사람이 일본 사람들 앞잡이로서 만주에서  우리 조선 사람, 우리 한국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모릅니다. 일본 사람  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이래 죽인 자인데 예수님의 공로를 입어서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그것을 회개하고 난 다음에는 저런 그렇던 놈들이라 하고서 다 수치를  봐야 되고, 그 놈을 죽일라 하고 원수를 삼아야 될 터인데 그렇던 자가 회개하고  난 다음에 돌이켜서 새사람 되고 나니까 저도 자랑하고 다른 사람도 자랑하요.

 나, 오늘 저녁에 들어서 김예근씨 자랑합니다. 그렇던 자가 그 다음에 성자가  돼 가지고서 길가 가다가 그 학생이 아이들이 가니까 아이들 한데 전도할려고  각설이 타령을 시작해도 원층 아이들이 안 모이니까 각설이 타령을 시작하는데  막 몸을 갔다가 뱀 모양으로 꾸불트리며 각설이 타령하니까 뭐, 다른 사람이  하도 우습다고 아이들이 주 모아 들어 가지고서 그래 하도 괴물같이 그래 싸니까  돌맹이를 들어 가지고 그만 이마에 좀 벗겨졌으니까 번들번들 하니까 돌맹이로  때려주니 이마가 뚝 뚫어졌다 말이요.

 뚫어지니까 얼른 이 손으로 탁 피나면 놀랄 터이니 이래 가지고서 또, 각설이  타령 계속하면서 여 궁둥이 때리라고 이라며 이리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와  가지고 그래 가지고서 이제 복음을 전하고 앉은뱅이를 70명을 전도했고  누운뱅이를 70명을 전도했고, 거지는 무수하게 전도했고 자기가 살인 경우를  많이, 죽음의 경우를 많이 닥쳤지마는 거기서 복수하지 안 하고서 사랑으로  능가한 회개하고 나니까 김예근의, 김예근씨의 과거에 그 무서운 죄인 생활한  그것이 회개하고 난 다음에는 영광으로 바꾸어 가지고서 영광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어. 이기 우리 앞에 있다 그 말이요.

 네, 이렇게 수치스러운 것이 영광이 되어지고 가죽 속에 덮어 있는 이것이  다음에 벌거벗어 가지고 나오면 기가 막힐 터인데 예수의 공로에서 오늘  깨끗하게 회개만 하면은 그게 도리어 없었던 것보다도 더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이 회개의 길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얼마나 기쁩니까? 회개의 기쁨 이것뿐만  아니라 진실로 조그마한 것 하나라도 자기가 그것을 고쳐보면 고침의 기쁨,  고침의 기쁨, 고침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돈 기쁨으로 못 견딥니다.

 네, 사기 협잡, 착취, 이렇게 해 가지고서 기뻐지는 그 기쁨은 독해서 그  기쁨은 구역질나서 못 누립니다. 고침의 기쁨, 고침의 기쁨 이런 것도 참 고귀한  기쁨인데 이것은 파기 쉬워, 이 회개의 기쁨은 파기가 쉬워, 잠깐 파면 팝니다.

그만 그 뭐 힘들지 안 해 한 괭이만 쫏으면 그만 되 한 괭이만 쫏아 가지고서  하나 조그마한 것 하나 회개해 봐요 기쁨이 나오는가 안나오는가.

 회개의 기쁨 자기가 죄를 지어볼까, 말아볼까 요래 있을 때 한번 이겨보자  하고서 그 죄를 이기고 나면은 극히 기쁨, 죄를 이긴 그 기쁨, 그 뭐 자기가  죄짓는 그거는 소원인데 소원하고 싶어서 소원성취인데 소원을 꺾어서 죄를  이기고 보면은 그때는 지금 고통스럽지마는 자기가 그 지식적인 그 기쁨이  지식적인 기쁨이 죄를 이기는 그 고통을 능가할 수 있는 지식적인 기쁨이 그  죄에 고통을 그 능가해서 죄의 고통을 통과하고 나니까 그 지식적인 기쁨과 죄를  이긴 극기적인 그 기쁨이 합해 놓으니까 그 기쁨이 상당히 독합니다. 상당히  강하요.

 기쁨, 자기가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마는 거기 모든 여건들이 다 있어서 큰  해가 오고 있는데도 그래도 지식적인 기쁨이 아무래도 이래도 이 의를  양보해서는 안 되지, 내가 여기서 큰 희생을 당해도 안 해야지. 요 싸움해  가지고서 지식적인 기쁨으로서 의를 빼앗기지 아니하고 의를 보수하고 그것을  자기가 취했을 때에 취한 다음에 취하기까지는 십자가의 고통이요, 취하기까지는  고통인데 그 고통을 지식적인 기쁨으로 외부적인 고통 있지마는 속에는 고통이  없는 지식적인 기쁨을 가지고서 이제 의를 딱 도달하고 보니까, 의에 도달한  승리적인 기쁨과 이제 지식적인 기쁨, 지식적인 기쁨과 이제 그 실상적인 기쁨,  요 두 기쁨이 합해 가지고 누리는 것이 기독자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맛본 사람은 땅에 있는 기쁨을 썩은 기쁨이라서 구역질이 나서  못합니다. 여기에 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자기, 자기 기분대로 했는데  이걸 지식적인 이 기쁨을 가지고 '아무래도 요때는 날 꺾어야 되겠다 요것 나를  이겨야 되겠다 나를 꺾어야 되겠다 나를 이겨야 되겠다.' 요래 가지고서 자기를  이겨야 돼는 줄 알고 꺾어야 될 줄 알고 그것을 꺾을라 하면 힘이 들지마는  꺾으면 요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요것이 영생 얻는 길이기 때문에 이제  자기도 기쁘다는 이것을 비판 평가 논리로서 기쁜 요 지식적인 기쁨을 가지고서  자기를 착 꺾어가지고 고 경우를 딱 지나서 자기를 완전히 꺾어버려서 그  사건에서는 자기를 완전히 꺾어질 시기를 딱 지나가면 더디면 제가 일어 날래야  일어날 수 없는 그 시기까지 지내도 자기를 딱 꺾어서 그 시기를 탁 지나가고  보니까 아, 자기 꺾는 기쁨이 어떻게 있는지,  자기이긴 것, 자기 꺾는 기쁨이 어떻게 있고 또 자기를 자기 이놈이 발동을  하고 구불대를 치는데 '야,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데 네가 이라면  되나 이렇게 하면 너 고기 덩어리도 좋고 마음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도 좋은데  저 그리 말아라' 해서 자기를 살살 달래 가지고서 살살 달래서 요것 자기가  자기를 타이르면서 살살 달래 가지고 요것을 이제 그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가는  자기를 달래 가지고 요걸 권하고 장려하고 해 가지고서 요것 뻣뻣한 요 황소  모가지 같은 것을 요것을 살살 달래 가지고서 자기를 요렇게 권유해 가지고  권장해 가지고서 자기를 달래 가지고 요 뻣뻣한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겸손히  부어지도록 요렇게 자기를 달래 가지고 살살 길러 가지고서 요라고 보니까 그  기쁨이 또 굉장합니다.

 자기를 잘 달래는 것. '새벽기도 가자' 해도 '아이구, 그만 춥고 잠 오고 안  되겠다' 이런 때에 '야, 그래도 가야 너도 부활할 때 좋겠고 나도 좋겠고 주님도  좋아 할거고 가자' 살살 달래 가지고 달래 가지고서 그래 갔다가 '아이고, 참  가기 싫은데 그렇지만 나가보자' 이래 가지고 떡 자리를 가지고서 이제 예배당에  척 와서 앉고 보니까 어떻게 기쁜지. 자기를 달래는 기쁨, 다른 사람을 잘  달래는 기쁨.

 자기가 하나님의 이성 살이를 해 봅니다. 이성 살이를 하나님 속성 살이를 해  보요. 한번 진실히 한번 살아보자. 진실 받은 나도 진실로 한번 살아보자. 이  진실로 살아 볼라고 생각을 가지니까 꼭 목마를 때 똑 그 사이다 마시는 것처럼  무엇이 시원해집니다. '나도 이제 한번 진실하게 한번 살아 볼란다, 진실하게  살아보자' 진실하게 살아 볼라 하니까 똑 사이다 마시듯이 뭐 시원하게  좋습니다.

 이런데 이제 그 진실로 살라 하니까 그 진실을 까뭉케면 어려움이 자기와 딱  마찰됐을 때에 그때에 그래 그렇지마는 내가 진실로 살라 했는데 진실 요걸  양보해야 됐느냐? 요때는 어떻게 하는 게 진실이지? 요랄라 하니까 거기 고통이  그게 십자가인데 그래도 자기가 자꾸 비판하고 그리 안 하면 져 버리요.

 비판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따져보고 따져 보고 자꾸 그라면 나중에  가서 진실을 까뭉케려 하는 그 놈은 슬슬 사라지고 진실로 살아가야 되겠다는 그  세력이 차차차차 이제 지식적으로 강해져 가지고서 그때 그 진실로 자기가 그  시기를 넘겼다 그 말이요. 진실로 그 기회를 넘기고 그 사건을 넘기고 나면 그게  사소한 것인데 사소한 진실인데 그라고 난 다음에 자기에게 오는 그 기쁨은 받은  자 외에는 못 옵니다. 받은 자 외에는.

 진실이나 거룩이나 의나 사랑이나 화평이나 다 그렇소. 이제,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속성으로 우리가 된 우리의 속성인데 하나님의 속성 생활을 해 보는  거기에서 할 때는 어렵지마는 하나님의 속성 생활을 하고 나니까 어떻게 기쁜지  요것이 다 예수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요 기쁨은 가치 있는 기쁨이요 요거는 파고 파면 나오는 기쁨인데 그래 세상  기쁨은 껍데기 기쁨이니까 지혜 있고 지식 있는 사람 따지는 사람은 그만 그  기쁨 못 누립니다. 아예 세상 기쁨을 누리면 그만 도야지 모양으로 그만  마구잡이로 살아야 누리지 그거는 따져보면 헛일입니다. 따져보면 그 속에  사망뿐이니까 기독교의 기쁨은 따져보고 비판해보고 평가해보고 대조해보고  연구해보고 해 볼수록 한 걸음 더 파고들어 가니까 그 기쁨이 더 크고, 더  연구하니까 더 크고, 더 연구하니까 더 크고, 따지니까 더 크고, 비판하니까 더  크고, 평가해 들어가니까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은 영원의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기쁨이 예수 안에 있는데 이  기쁨을 찾지 못하고 기쁨 없이 예수 믿는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이요 그 사람은 진실 없는 사람이요 자기가 공연히 원치  안 하는 거기 매여 가지고 있는 못난 사람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예수 안에 있는 기쁨을 찾읍시다. 이 기쁨을 찾지 못한 예수교인이 세상 기쁨을  찾아서 야단입니다. 세상 기쁨을 찾았거든 조금 생각해 봅시다. 다시 들어가  보면은 세상 기쁨을 다시 뒤돌아보면 안 돼요. 그 속에는 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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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재림의 긴박/ 베드로후서 3장 6절-13절/ 1982. 4. 18.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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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지식과 지혜/ 잠언 1장 1절-5절/ 1974. 2. 24. 제 8공과 선지자 2015.12.28
1001 지식믿음,사람의 성공/ 시편 1장 2절/ 1983. 5. 4. 수후집회 선지자 2015.12.28
1000 지식믿음,사람의 성공/ 빌립보서 4장 8절-9절/ 1983. 4. 6.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999 지식을 새롭게 하자/ 골로새서 3장 1절-11절/ 1974. 4. 28. 제 17공과 선지자 2015.12.28
» 지식적 기쁨 평가적 기쁨/ 빌립보서 4장 4절/ 1980. 3. 26. 수저녁 선지자 2015.12.28
997 지식진실 행위진실/ 요한계시록 17장 12절-18절/ 1988. 10. 26. 수새벽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