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08:10
중생된 자의 생활, 욕심의 3종류
1983. 11. 10. 목새.
본문 : 약 1:14-18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는 어떠한 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소원대로 일호를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이 많이 있는데 창조하신 것 중에 당신의 쇼원대로 되어지는 것이 제 일호가 되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관리하게 하시고 또 그것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시고 또 그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바로 조절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하나님도 그것들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베푸시기를 원할 수 있는 이런 관계를 맺도록 하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제사장이라 선지자라 왕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18절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조물, 모든 창조하신 모든 것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로 한 첫 열매, 첫 열매라 말은 결과라 말입니다. 첫 결과 첫 결과. 당신이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과인데 첫 결과라 말은 첫 목적이라 말이요 하나님의 제일 소원하시는 소원이라 말입니다.
소원하신 그대로 성과를 이루도록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아무것에도 피동되지 안하고 당신 혼자의 결정을 따라, 뜻을 따라, 당신의 의지를 따라, 결정한 그대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셨느니라 낳았다 말은 살려냈다 말입니다. 낳았다 말은 살려냈다.
그러면 첫째 아담에게 속한 우리들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령에 감화받아 가지고 완전히 변질돼서 영은 단번에 죽었고 심신은 서서히 세상에 있는 동안을 통해서 완전히 죽는 이런 가운데에 빠져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의 능력으로 살려서 영감으로 살려서 영감으로 영생하고 진리로 살려서 진리로 영생하게,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힘은 영감이 우리의 생명이요 힘이요 진리가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힘입니다.
이렇게 '낳으셨느니'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낳았다 말은 생산했다는 말인데 여기에 낳았다고 하는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아담의 자손을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생겨나게 했다, 우리를 중생하게 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으로 살아난 자요 진리로 살아난 자요, 영감의 사상으로 살 수 있는 자로 살아났고, 영감의 소욕으로 살 자로 살려내셨고, 영감의 그 모든 지혜와 능력으로 살려내셨고, 곧 영감 곧 진리, 진리의 힘으로, 진리의 지혜로, 진리의 방편으로 모든 세상살이를 연습을 해서 그것이 이제 시험을 통과하고 또 연단을 받아 가지고 아주 완전히 연성이 돼 가지고 그것이 계속하는 '온전한 인내를 이루라 그것이 어떤 환경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그런 계속을 이루라. 그리하면 너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과 진리로 살면 우리가 자라가고 우리가 강건해지고 우리가 커집니다. 영감과 진리를 떠나면 우리는 점점 파 묻히게 됩니다. 한번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 것은 죽는 것이나, 강건해진 것은 약해지거나 그렇지는 안한데 영감과 진리를 떠난 악령의 그 감화와 또 인간 중심의 그 타락성과 모든 이것으로서 생활한 그 나쁜 구습, 나쁜 악습, 나쁜 연습 이런 것으로 살게 되면 이것이 무성해서 진리와 영감으로 살아난 새사람이 자꾸 파묻히게 됩니다.
마치 농사 짓는 사람들이 잡초를 제하면 곡식이 자라지마는 잡초를 제하지 안하면 잡초는 커 나가고 곡식은 자라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는 곡식이 잡초에게 파묻히게 되면은 그 곡식은 차차 녹아집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영혼아, 내 영혼아 머리를 들어라' 영혼이라 말은 영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영과 마음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내 영혼아 이제는 머리를 들어라' 회개를 하고 나면서 말하기를 '머리를 들어라' 그것들에게 파묻혀 있는데 이제 주인이 돼서 그것을 다스려야 될 터인데 그것들에게 파묻혀 놓으니까 무슨 사건만 나오면 그만 육신의 욕심, 생각, 주관, 자기 과거의 습성, 또 모든 통계 이런 것이 왕이 돼 가지고 세력을 부리니까 그만 영감과 진리는 도무지 거기에서 세력을 얻지 못 하니까 행하지 못하는 그런 일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여기에 우리 자신은 어떤 자라는 것을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물벌레가 물에서 자라 가지고 잠자리 됩니다. 물에서 자라 가지고 거기에서 자랄 대로 다 자라면 그것이 잠자리가 돼 가지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인데 잠자리가 되고 난 다음에는 제가 물 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러기에 잠자리가 알을 낳을 때는 물에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알 낳는 것이 자라 가지고 잠자리가 되고 난 다음에는 어쩌든지 공중에 날아야 되지 물 속에 빠지면 저는 죽습니다. 물에서 자라나온 것이지마는 죽습니다.
우리는 첫째 아담에게 속해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마는 일단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중생함을 입은 후에는 우리는 세상 사람같이 그렇게 살면 자기는 자꾸 파묻히고 자랄 것이 자라지 못해서 시간마다 우리가 자라고, 우리가 또 더 구비하게 되고, 또 온전하게 되고 하는 그 모든 새사람의 요소는 다 죽어지고 맙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첫째 인류의 조상 원죄로써 죽은 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려냈는데 살려낸 것이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입은 자로 살지 안하고 벗어 버리니까 다시 그것이 현실 현실에서 산 것이 영생으로 완성을 하는 게 아니고 살아난 것이 영생을 버렸기 때문에 다시 사망하게 되는 것으로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유다서에 죽고 또 죽었다" 그말은 첫째 아담으로 죽었고 둘째 아담으로 살아난 것이 또 제가 미혹받아 가지고 죽은 것을 가리켜서 '죽고 또 죽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면은 물벌레가 잠자리 된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속을 받아 가지고 이제 새사람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우리가 세상에서 살았지마는 옛날과 같이 세상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죽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곤충들이 그걸 가리킵니다. 굼벵이가 땅 속에서 자라 가지고 매미가 되는 것이지마는 일단 매미가 되고 난 다음에는 땅에 떨어지면 개미 밥이 되고 그거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부화되고 난 다음에는 이제 공중에서 살아야 되는 것처럼 우리도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인간의 이 모든 타락의 수평선을 올라서 진리와 영감 세계에서 살아야 우리가 영생하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이 고생을 당하느냐? 안 믿는 사람들이 고생당하는 것은 범죄한 죄값으로 인해서 고생을 당하지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죄값은 주님이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실은 믿는 사람들은 고생 없이 사는 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왜 고생하느냐? 고생하는 것은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말할 것 아니고 고생은 네 안에 잘못된 욕심 그것이 들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네가 고생하는 것이지 그것 아니면 고생하지 않는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자기 욕심에 끌려 가지고 미혹받아 욕심 그놈에게 꾀여 가지고 욕심대로 하다 보니까 그만 근심 걱정할 일을 제가 마련해 가지고 근심 걱정을 하는 것이지 꼭 중생된 사람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전지 전능의 사랑의 주가 우리에게 필요한 순서대로 모든 것을 다 온전하고 구비하게 우리를 만들어서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이 부패성으로 인하여 어떨 때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기는 있지마는 이해 안 되는 그것은 나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내게 가깝게 있는 축복이 아니라 멀리 있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좀 먼 것은 우리가 이해가 안 됩니다. 아주 먼 것은 '이래 하면 망하는데' 싶으게 그렇게 정반대지마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그것이 이제 다시 세월을 거쳐서 진행하고 진행해 가지고 나중에 가면 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일도 이해할 일도 있고 요런 것은 좀 하나님의 뜻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조금 핍박을 당한다 어려움을 당한다 이랬지마는 어떨 때는 하나님 말씀대로 함을 인해서 완전히 멸망을 받는다 하는 그런 일이 있을 때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그대로 해 보니까 삼 년 후, 사 년 후, 어떤 것은 십 년 후 자기에게 큰 축복이 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줬습니다.
그러므로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욕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주시는 소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네가 이 소원을 가지라 이 욕심을 가지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원과 욕심이 있고 또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옛사람의 소원과 욕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 그 가운데 끼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범죄성과 우리의 부패성과 연약성을 알기 때문에 당장에 우리를 깨끗게 하려 하면 감당 못 할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일이지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원과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원과 욕심을 가리켜서 성령의 소욕이라 했습니다. 이 성령의 소욕은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요, 평안을 일으키는 것이요, 성공을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또 옛사람이 주는 소원과 욕심은 이것은 죽고 망하는 것을 이루는 것뿐입니다.
옛사람의 소욕은 뭐인고? 옛사람의 소욕은 당장 하나님의 법도를 거슬리는 소원, 하나님의 법도에 위반되는 소원 위반되는 욕심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우리에게 사망을 낳는 것뿐입니다. 딴것을 낳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무엇을 경영하든지 '이것은 옛사람의 소원과 욕심이냐?' 하는 것을 살펴서, 그러면 옛사람의 소원인가 욕심인가 하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이 법도의 말씀을 가지고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법도의 말씀을 가지고 잘 구별 못 하는 것도 그 사람 속에 자연의 빛이라 하는 자기에게 자기 광명이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자기 광명이 있기 때문에 이 자기 광명으로 양심으로, 그건 양심입니다. 양심으로 생각해 보면 '이거는 내가 성경에 똑똑히 어떻게 명문되어 있는 데는 알지를 못하지마는 아무래도 이거는 하나님 법에 위반되겠다' 그렇게 자기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서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옛사람의 소원과 욕심은 우리는 아예 그것을 멈추지 말고 버리려고 꺾으려고 없애버리려고 노력을 해서 그것에게 붙들라는 것은 망하고 죽는 것을 이룬다 하는 것을 알고 붙들리지 안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고, 또 하나님이 소원하는 욕심은 뭐 내야, 엎어지든지 자빠지든지 내 견해에서는 손해갈 것같이 보여지든지 망할 것같이 보여지든지 그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원하라 욕심하라 하는 그 소욕은 두말 할 것 없이 자꾸 그대로만 소욕해서 이루어 나가면 결국은 생명과 평강의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끼어 있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소욕, 이거는 하늘나라에 소용이 없지마는 이 소욕을 안 주면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범위로는 네 육체의 소원을 하라. 그러나 이 범위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 제한적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욕이 있습니다. 허락하신 소욕이 있으니 그 허락하신 소욕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범위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런 것은 하되 이 범위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는 그 범위를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허락하신 소욕, 예를 들면 허락하신 소욕이라고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이런 사업 저런 사업 또 가정을 이루는 것 이런 것은 다 그것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것을 뽑아 버리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서 범위를 허락해서 이것을 가지고 네가 단번에 육체의 취미를 완전히 끊어버리면 네가 견디지 못할 것이고, 네가 단번에 육신의 재미를 끊어버리면 견디지 못할 것이고, 네가 단번에 먹는 것을 끊어버리면 네가 견디지를 못할 터이니까 하나님이 그 허락하신 소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욕은 아니지마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욕을 이루는 데에 간접적 하나님의 소욕을 이루는 재료로도 쓰는 일이 있고 또 하나님이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그것을 죄짓는 데까지 나아가지 아니하고 죄짓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소욕을 이루고, 그러기 때문에 이 가운데 끼어 있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범위의 소욕은 이 소욕이 위로 하나님이 주시는 소욕에도 이것이 이용될 수 있고 또 악령이 주는 옛사람의 소욕에도 이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중간 것 이것은 이 범위를 잘 생각해서, 잘못하면 왼쪽으로 기울어지기가 쉽기 때문에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죄를 낳는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 그게 들면 하나님께 삐뚤어진 일을 차차 차차 해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삐뚤어진 것이 처음에 조금 조금 차차 많아지기 시작하면 결국은 사망을 낳고야 만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내의 소욕은 하나님이 허락만 했지 그것이 무슨 의가 되거나 그런 것 아닌데 허락하신 범위 내의 소욕은 이 중간에서 항상 이 소욕을 이것을 하나도 없는 성신의 소 욕으로만 살면 좋겠는데 성신의 소욕으로 살지 못하고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것이니까 육체의 소욕을 행하면서 성령의 소욕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소욕으로 가까와지도록, 성령의 소욕에게 속해지도록, 육신의 소욕대로 하는 그것이 성령의 소욕에 도움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성령의 소욕의 것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이 이것이 지혜롭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욕은 반드시 허락하신 범위가 있으니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되고 범위를 넘지 안해도 자기는 왼쪽을 향해서 이 소욕을 행하면 망하게 되고 오른쪽 하나님의 소욕을 향해서 이 소욕을 행하게 되면은 차차 차차 그것이 성화돼 가지고 하나님께 소욕한 성령의 소욕을 이루는 데에 거기에 보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도움이 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 가지 욕심 속에 사는 것이 우리들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소욕이 있고 옛사람의 소욕 악령이 주는 육체의 소욕이 있고, 그러니까 성령의 소욕은 우리가 의심 없이 할 것이고, 육체의 소욕은 절대 우리는 하지 안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중간 범위의 소욕은 우리가 그 소욕을 행하되 지나치게 하지 말고 그 소욕을 행하되 그 모든 것이 성령의 소욕을 위해서 하는 일이 돼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 예를 들면은 사람들에게 이 결혼이라 하는 것을, 하늘 나라는 결혼이 없습니다. 부부가 없고 세상에서 부부된 인연된 그것이 가면은 참 가정 교회라는 것으로서 굉장한 영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걸 두신 것은 음행하는 연고 때문에 음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부부의 관계라도 그것은 자기가 그것을 전혀 금지해 버리면 도리어 육체의 정욕이 불같이 일어나서 마귀의 틈탈 기회를 줘 가지고 멸망시키는 그런 시험에 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는 육체의 이 모든 가정 생활이라 하는 것도 그 생활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구원을 위해서 하고, 또 그것을 점점 구원의 것이 되어지도록, 이제는 처음에는 육신의 가정을 만들었지마는 그것이 나중에 가 차차 차차 변해 가지고 성령의 소원의 가정이 되도록, 성령의 소원의 가정이 되도록 그렇게 하고, 이제는 부부 동침이라는 그것도 차차 차차 절제하고 절제해 가지고서 이제는 모든 정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안하고 그것을 마귀가 틈탈 기휘를 방어하는 것으로써 사용하고 그 모든 결혼한 것이 아내로 말미암아 남편이 구원에 더 돌진하게 되고 또, 아내로 말미암아 남편이 구원에 돌진하고 남편으로 말미암아 아내가 구원에 돌진해서 이렇게 부부가 되었기 때문에 혼자 구원 이루는 것보다 구원에 도움이 돼서 전중심이 부부가 활동하는 것이나, 살림을 사는 것이나, 모든 동침하는 것이나 이 전부가 일변으로는 죄를 방어하고 일변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요렇게 해서 요 중간 욕심 요것이 잘 조절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도 의심할 것 없이 그대로 해야 되고, 육체의 소욕도 이거는 의심할 것 없이 금지해야 되고 이것을 방어해야 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중간 욕심이라는 이 욕심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가 있기 때문에 그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되고 이 중간 욕심이 차차 차차 변해서 다 성령의 소욕으로 이렇게 변화돼 나가도록 이렇게 하는 이 노력을 가지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이 세 가지 욕심을 항상 잊 어버리지 말고 살펴야 되겠습니다. 살펴서 '요것은 성령이 주시는 성령의 소욕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소원하시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욕심이다.' 그 욕심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해야 됩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욕심 중에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지 안한 순전히 이거는 내 사욕이다. 이건 육체의 소욕이다. 악령의 소욕이다. 죄의 소욕이다.' 하는 그것을 판정해서 그것은 뽑아버리고 꺽어버리고 그것을 용납지 아니하도록 항상 싸워야 됩니다.
그게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을 싸울 때만, 싸울 때만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뽑으려고 애써 뽑을 때만 바로 됩니다. '나는 다 뽑았다.' 뽑지 아니하는 때와 그것으로 더불어 싸우지 아니하는 때는 벌써 그 사람의 죽음에 삼켜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평생 우리가 싸우면서 가야 되고, 뽑으면서 가야 되고, 꺾으면서 가야 되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이거는 한쪽머리로 뽑고 싸우고 꺾고 이러면서 가고 한쪽의 이 성령의 소욕은 우리가 '소원했으니까 됐다'가 아니라 항상 소원하고 또 소원 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 회개하고 소원하고 회개하고 소원하고 자꾸 새 소원 새 소원 하면서 가야 되고, 중간에 있는 이 소욕은 이것은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범위를 정해 주셨는고로 그 받은 범위 내에서 그 소욕을 이루어야 되지 받은 범위 내에서 소욕을 이루지 안하면 죄 가운데 빠져서 멸망받게 됩니다.
받은 범위 내에서 소욕을 이룬다고 해도 받은 범위 내에서 소욕을 이루는 그것만큼은 다 썩는데 이르지 살아나는 것이나 무슨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썩는데 이릅니다. 받은 범위 내에서 소욕을 하면서, 그 범위 내에서 소욕을 하면서 그 소욕 하는 것이 성령의 소욕을 소망하면서 성령의 소욕을 보조하기 위해서 성령의 소욕에 유익이 되도록, 성령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모든 보조 역할, 거기에서 거기에 모든 이용되는 그 소욕의 생활 이것이 되어지면 그것은 차차 중간 소욕이 성령의 소욕으로 화해지는 사람도 있고, 중간 소욕이 육체의 소욕으로 이와 같이 타락해서 나가는 사람도 있고, 항상 중간 소욕은 중간 소욕으로 그대로만 하고 이제 성령의 소욕으로 향상하지 못하고 진화되지 못하는 그런 중간 소욕은 그것으로써 자기는 죄는 아니지마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생명이라 하고 승리한 생명의 것은 되지 안해.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중간 지점에서 그 시간과 모든 자기의 소유만 다 허비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방을 할 때도, 또 전도를 할 때도, 자기 혼자 기도할 때 명상할 때도 자기 속에 이 욕심을 심사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라서 '욕심은 세 개가 있다. 성령의 소욕 하나 육체의 소욕 하나, 하나님이 우리의 부패성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한정된 죄되지는 안하는 그 범위 내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욕이 있다. 허락하신 소욕이 있다.' 그러면 허락하신 소욕은 점점 하나님을 향해서 진화돼 가지고 마지막에는 전체가 허락하신 소욕에서 하나님의 소욕으로 옮겨지는 그것이 돼야 되겠고 타락하면 안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기는 어데서든지 욕심이 안 따라다니는 곳은 없습니다. 꼭 이 세 가지 욕심은 따라다니기 때문에 어데서든지 이것은 계속 심사해서 이것을 구별을 해 가지고 한쪽은 싸우려고 싸워 애를 쓰고 한쪽은 들어붙드려고 애를 쓰고 이것이 없으면 안 되고 중간 것은 범위를 알아서 왼쪽으로 치우치면 절단납니다.
오른쪽으로 점점 치우쳐서 향상돼 나가면 이것이 마지막에는 성령의 소욕의 분자가 되고 요소가 되고 보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십 분 기도 후에 사층 예배당에서 권찰회가 있고, 지금 등록한 사람은 삼천 이백이십사 명입니다.
주일학교가 많습니다. 주일학교가 칠백이 십팔 명이 등록하고 있고, 중간반이 구백삼십일 명이 등록하고 있고, 장년반이 천오백육십오 명이 등록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장년반은 출석수로 말하면 한 반 정도 등록이 돼 가지고 있고 중간반 거의 반이나 등록됐습니다. 출석수로 말하면 반이나 반 조금 넘게나 등록돼 가지고 있고 주일학교는 한 십분지 일쯤 등록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