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선지자선교회 1988년 7월 4일 월새 

 

본문 : 벧전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어제 우리가 거듭나게 하기 위하셔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자원을 투자하셨는가  하는 것을 어제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육체로 난 우리를  이제 성령으로 다시 나기 위해서, 육체로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난 우리가  원죄와 본죄로 영원히 멸망을 받았는데 거기서 다시 멸망된 원인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을 짓고 또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모든  자원을 다 하나님이 구비하신 것을 어제 말했습니다.

 그 큰 자원을 들여 가지고 우리를 거듭나게 했지 거듭난 것이 그렇게 뭐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지신  그분이 우리를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자본을 들였는가? 어제 그 자본  들기를 몇 가지나 들였다고 그렇게 했습니까? 네, 여덟 가지 자본을 들였습니다.

여덟 가지 자본을 들여 가지고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다시 우리를 어떠한  생명으로 말할수 없는 그 생명으로 자유로 또 구비한 활동의 그 능력으로 참  존귀한 그 위치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한 자원을 하나님이 설정하셨습니다.

그 자본을 다 구비하셨습니다. 설정하셨습니다.

 설정이라 말은, 모든 것을 구비해서 베풀어 가지고 다 완전히 완결지운 것을  가리켜서 설정이라 그라는데 설정을 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이런 모든 자원을 다 마련해서 여덟 가지를  마련해 가지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자원을 다 마련해 가지고 이 자원으로  우리들을 거듭나게 해서 여덟 가지 자원으로 된 이 거듭남의 이 자원을 우리가  다 실지로 가지고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가지고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또  예수님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자본이 아니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그 모든 자본을 우리들이 실질적으로 가지고 영원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 효력을 실상으로 가지고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사람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큰 희생이요 또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것이 우리를  위한 영원한 큰 희생입니다. 십자가 못박혀 죽으심도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느냐  하면 창세전부터 우리를 위해서,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희생의 절정  희생으로 맨 마지막된 것이 예수님이 죽으심입니다. 마지막된 희생의 마지막  순서가 죽으심이오. 이래 가지고 우리의 거듭남에 자원을 구비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죽으심도 단번에 죽으신, 시간적으로 말하면 그저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때에 죽으심이라는 그 기간만이 아니고 벌써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하신 그때부터 우리를 대속하실 그 계획을 가지시고 그때부터  모든 것을 역사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위해서 죽으신 그 죽으심도 말할 수 없는 그 긴 시간을  걸쳐 가지고 우리를 대속하셨고, 또 이 대속하신 구비해 놓은 모든 구비, 우리들이  다 이렇게 거듭날 수 있는 모든 자본을 여덟 가지로 구비를 다 해 놓고 또 이  거듭남을 우리들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아무리 많이 가져도 뭐 못 누리면 소용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거 비유는 안 되지만 억만장자가 자기의 소유가 법적으로  뭐 부동산 등기가 굉장히 많고 자기의 가진 또 동산이 많고 아무리 많아 봤자  자기가 그만 죽어버렸으면 그거 자기 것이지만 자기가 누리지는 못합니다.

누리지는 못하는데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참  영광스럽다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그 신성이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피조물을 입게 된 그것이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로 비교하면 뭐  무엇으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람이 그 똥구덩이 속에 파묻힌 그것과  하나님이 이 피조물 되는 거와는 비교도 안됩니다. 그는 영원한 사랑의 희생으로  당신이 피조물이 되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는 피조물되어서 부활하신 것은 그라면 이 고생은 얼마나, 이렇게  천해진 것인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영원히 천해지는 것이요 영원히 무한히  희생하는 것인데 이 희생은 그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영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한 것도 영원전부터  주님의 죽으실 때까지요 또 주님이 부활하신 것도 부활하실 그때부터 영원히  당신은 한번도 하나님 노릇을 못 합니다.

 하나님 노릇 못 하고 피조물을 입고 이렇게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셔야 하기  때문에 창조주가 피조물 입는 참 말할 수 없는 큰 낮아지심이요 희생하심이요 참  천해지시는 것인데 그렇게 되어져서 계심을 영원히 입고 계셔야 우리가 누릴  수가 있지 만일 예수님이 벗는 날이면 우리는 다시 이 거듭남이라는 이  영광스러운 구원을 그때 끝나고 말기 때문에, 우리를 계속해서 이 거듭남의  존귀와 권위와 영광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가지고 주님이 창조주가 사람되신  것, 그라면 아주 우리가 만든, 우리 손으로 만든다고 하면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 뭐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걸 우리가 조금 변형을 시키는  것뿐이지 우리는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었는 건데 우리가 변형시켜 만드는 것이라도 우리는 막대기  그런 것도 만들고 하면 그와 같이 내가 손으로 만든거와 같이 돼졌다 말이오.

하나님이 창조주가 지옴받은 것들과 같이 되어졌다는 그것은 얼마나 큰 희생이요  얼마나 큰 낮아지시고 천해지심인 것을 우리는 자꾸 이렇게 자기 지식을 주시는  대로 새기고 새겨서 깨달은 것만치 자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이 달라집니다.

 이것을 영원히 주님은 이 수욕의 이 부활을 가졌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인성으로 말하면 좋지만 신성으로는 한없은 그 희생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을 우리가 그전에 누릴 때에, 지금은 부활절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그전에 부활절을 우리가 누릴 때에 부활절을 기쁘고 즐겁다고만  이래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서 큰 희생해 주신 이 사랑을  생각하고,  부활을 우리가 맞이하는 데는 나도 이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맡겨 주신 형제를 구출하기 위해서 나도 이렇게 낮아지고 희생해지는 이것으로서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일을 늘 해야 되기 때문에 부활에는 일희일비의 절기라.

한편으로서는 기쁘고 한편으로서는 크게 참 고통스러운 일이라.

 이래서, 피조물에게는 한없는 기쁨이 되고 창조주에게는 한없는 희생이 된다.

그런데, 창조주에게는 큰 희생이 되는데 창조주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인해서 희생이 그분에게는 가장 만족이 되고 기쁨이 되셨다 하는  것으로서 우리들이 별스러운 부활 축하를 제가 여기 오고 난 다음에 여러 해  동안 그렇게 했었습니다.

 이래서, 주님이 이렇게 여덟 가지 이 큰 자본을 들여 가지고 우리들을 거듭나게  하실 수 있는 자본을 만들었는데 이 자본을 가지고 되는 이 거듭남을 우리가  가지고 누리도록, 실지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부활하지 안했으면 우리는 거듭나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돼  가지고 이렇게 만반의 부족함이 없는 이런 온전한 거듭남의 새 존재로, 새로  지음받은 새 존재로 새 영광의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다 갖추었지만 우리  자신들이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누리지를 못합니다. 누리지를  못하는데 실상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삼 일만에 부활을 하셔서 이 모든  자원을 다 우리가 다 누리도록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연구할 때에는 이 부활은 어떤 것을 누리는 것이냐? 여덟  가지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덟 가지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이  여덟 가지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부활인데 이 여덟 가지를 먼저 누가 누렸는고  하니 영이 누렸습니다. 영이 여덟 가지를 가지고 여덟 가지 자본으로서 누리도록  하는 이 영의 거듭남, 영의 중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은 중생받아서 영은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영이 지금 뭐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영이 구원이  변동됨이 아니고 영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는 다시는 범죄하지 안하고  완전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영에게 효력 있는 것이 뭐가  효력 있느냐 하면 영은 완전한 실력을 가졌지만 이 실력 행사를 못 했습니다.

 실력 행사를 못 했는데 영의 그 활동의 그 공적, 활동의 권위, 이 영의 권위성을  점점 성장시키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의 하는 일입니다.

 영의 권위성이라는 것은 영이, 영의 권위는 자기 마음에만 활용을 하지 딴데는  활용을 못 합니다. 그 영은 자기 마음에게만 활용을 하고 또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다른 데는 활용 못 합니다. 암만 우리 마음이 딴 거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해  봤자 활용 못 합니다. 자기 몸에만 활용합니다.

 자기 몸에만 활용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작용은, 마음의 작용은 몸을 통해서야  이 모든 작용들이 지금 이루어질 수가 있다 그거요. 이래서, 영의 작용은 마음에만  활동하고 마음의 이 영의 작용 받은 마음은 몸에다가 작용을 해서 활동을 할  수가 있고 자기 몸에 이 기능을 가진 작용은 다른 데는 하지 못하고 이 모든  물질에 합니다. 그거는 물질에 하지 물질 없는 영계에는 할 권리가 없습니다.

영계에는 이 우리 고기덩어리는 못하요. 물질 이거 뭐 흙에나 돌에나 사람에나  나무에나 곤충에나 무엇이든지 있는 거 이 공기나 어디든지 이 물질로 되어 있는  거게만 작용할 수가 있다 그거요.

 이런데, 이제 예수님 믿어서 어떤 영은 자기 마음을 천분지 일을 다스렸고 어떤  영은 자기의 마음을 한 천분지 한 오백이나 다스렸고 어떤 영은 천분지 구백  구십 구를 다스렸고 어떤 영은 자기의 마음을 백프로 다스린 그런 그 영이  있으면,  영은 뭐 입고 돌아다니느냐? 영은 마음을 입고 돌아다니고 마음을 통해서 모든  거 하는데 영의 수족은 마음이라. 또 영의 모든 활동하는 모든 타고 돌아다니는  그 승구는 마음이라. 마음이 없으면 영은 활동을 못 해요.

 못 하는데 영은 마음을 통해서 하는데 이 마음을 다 자기가 활동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한 그것이 이제 영이 권위성이 올라가는 것이고 또 그  마음이 영에게 지배받은 그 마음이 자기 몸을 다스리기를 백분지 일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 있습니다.

 암만 마음에는 '내일은 아침에는 새벽기도 가야 되겠다' 이랬지만 새벽기도  한번도 못 나을 수가 있어. 그거 뭐이냐 하면 나올라 하면 몸 이놈이 들어서 '안  나간다' 이래 하고 이라니까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 못 나간다 그거요.

 또 자기는 '이거 내가 이거 자꾸 이거 거짓말을 해 쌓아서 이거 아주 심판받을  거짓말만 해 쌓으니까 내가 다시는 내가 거짓말하지 않겠다' 이라지만 그 육은  비웃고 있습니다. '네까짓 게 거짓말 안 하겠다고 뭐' '왜? 거짓말 안 해.' 이래  하고 거짓말 안 하겠다고 막 혀를 깨물고 이랬는데 거짓말 할 때가 닥치니까 혀  이놈이 들어서 거짓말을 싹 해 버렸다 말이오.

 이러면 그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혀를 자갈 먹이지 못하는  사람이라. 혀를 자갈 먹이지 못한다 말은 말을 자갈을 먹이면 말을 이렇게  재어하는 것처럼 혀를 이렇게 자기 마음 주장대로 제어할 수 있어야 되는데 못  한다 그거요. 그러면 마음의 권위가 없어.

 이제 마음의 권위는 몸을 다스리는 데에 마음의 권위가 생겨지는 것이고 영의  권위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영의 권위가 생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영이  마음을 다스리는 그 일을 우리 현실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두 번 해서  영의 권위가 올라가는 것은 그 마음이 영에게 붙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권위는 마음의 권위를 완전히 영에게 박탈당하는 것이 그것이 영의  권위요 영이 마음의 권위를 완전히 박탈시켜서 빼앗아서 영이 하고자 하는 대로  마음은 거게 복종을 하고 자유 자재하는 것이 그것이 영의 권위요 마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살아나는 것. 또 그 마음의 권위는 마음이 자기 몸을  다스립니다. 죽어도 내일은 간다 하면 가고 안 간다 하면 안 가고 또 한다면 하고  안 한다면 안하고 그 몸뚱이를 마음 마음대로 지금 이와 같이 지금 주장을  합니다. 주장을 할 때에 몸의 주장이 마음의 주장에게 다 뺏기고. 마음에게  완전히 순종만 하고몸에 자유 주장이 하나도 없어야 그 옴이 산 것이오.

살아납니다.

 만일 몸이 마음에게 지배받지 안하고 제 단독대로 행동하는 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것은 아무래도 이거 술을 먹어서는 안 되니까 술 먹으니까 이거 전부  우리 가족들 신세가 다 절단나고 있으니 술 안먹겠다 이라면 안 먹어야 된다  이거는 마음이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고 있는데 뭐 암만 그래 봤자 소용없고 술 닥치면 그만 몸뚱이 이놈이  술먹고 싶은 벌써 그 악습, 주습이, 술먹는 주습 또 술먹는 그것이 몸에 배어  가지고 있는 술을 먹고 싶은 그 식욕 이놈이 들어서 막 달라드니까 마음으로 안  먹겠다고 암만 결심해도 소용이 없어. 그러니까 항상 그거는 몸뚱이 그놈 하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제일 못난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하면 못난 인간은 이 물질 하나도  지배하지 못합니다. 물질 하나도 조그만한 것도 제가 할 권리가 없어. 그 물질에  대해 권리 없는 그것이 권리 없는 몸이 되면 그 몸이 천하고 가치 없고 가련하고  또 그 몸에 대해서 권리 없는 그 마음은 천하고 아무 가치 없는 것이고 또  마음에 대해서 자유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그 영은 중생했지만 그 영은 아무  실력 없고 가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체는 온전하지만 그가 역사하는 그 이력을, 기능 역사를 할 수  있는 그 역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천한 자가 된다 그거요.

 그래서, 그러면 내 몸 밖에 있는 모든 만물은 그 만물이 자기 몸에게, 자기  몸으로 하고 싶은 대로 만물을 자기 몸에게 복종을 시키는 사람이 권위 있는  사람입니까 만물에 대해서 털끝만한 것도 제맘대로 하지 못하는 그 몸이 권위  있습니까? 어떤 몸이 권위 있소? 만물을 제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게 몸의  권위라 말이오.

 그러면, 또 몸의 권위는 어떻습니까? 몸의 권위는 몸 제 하고 싶은 대로  독립으로 제 주장으로 하는 게 가치 있습니까 그 몸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마음에게 지배받는 것이 그 몸이 권위 있습니까? 그거는 몸보다 마음이  모든 것을 다 바로 생각하고 널리 생각하고 세밀히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지배받는 것이 아무 눈도 없는 등신같은 몸뚱이 제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뛰어난다 말이오.

 그러고 인제, 그러면 마음은 제가 마음 제 단독이 무슨 행동하는 것이 이것이  권위 있고 가치 있습니까 마음은 중생된 영에게 지배받는 것이 가치 있습니까?  지배받는 게 가치 있는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는 그 말은 뭐인고 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는 말은 마음의 생각은 사망이요 몸의 생각은 사망이라 그 말입니다. 마음과  몸의, 마음이나 몸 이것은 죽는 것인지 사는 것인지,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망하는 것인지 흥하는 것인지 그걸 모르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중생되지 안한 그 사람들은 뭘로 사느냐?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은 뭘로 삽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뭘로 가지고 삽니까? 자기의 모든 이거  언행심사 모든 행동을 뭣으로 가지고 그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계획하고  해 가지고 삽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뭣이 주장하고 있지요? 마음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주장하고 있어.

 마음이 주장하기 때문에 마음은 뭣을 아느냐? 마음은 물질이기 때문에, 마음은  물질이기 때문에 이 물질 것만 알지, 물질계의 물질만 알지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물질 이상에 있는 영계 것을 모른다 그거요. 영계 것을 몰라요.

 이러기 때문에, 마음만 아니까 그 마음만 가지고는 인간은 죽은 후에는 영원이  있고, 이 세상은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것이지만 자꾸 우선 현재에 살라고만  생각하고 살아 있는 이것만 생각하고 보이는 이 세상만 생각하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며 어찌 되느냐 하는 이 물질계 이상을, 물질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  영계인데, 물질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 영세인데 이 물질계를 다스리는 물질계의  주인이 되는 영계는 전연히 모른다 그말이오.

 그 사람이 뭐 참 히틀러든지 톨스토이라든지 또 나폴레옹이라든지 뭐  진시황이라든지 이런 사람들 아주 뭐 아주 뭐 소크라테스라든지 이런 사람들  아주 유명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물질계라는 이 우주 안에 것만 알았지 우주  위에 우주를 다스리고 있는 영계라 하는 것은 하나도 몰랐다 그말이오.

 석가모니 같은 사람은 그게 뭐 있으리라 하고 많은 말 해 놨지만 하나도 맞은  말이 하나도 아니라 말이오. 성경 보면 맞은 말이 하나도 없어. 전부 사람을  죽이는 말만 해 놨지 살리는 말 옳은 말은 한 마디도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러면 마음은 어디 지배를 받아야 됩니까? 영에게 지배를 받아야  되는데 안 믿는 사람은 그 영이 살아 있습니까 죽어 있습니까? 죽어 있습니다.

죽어 있기 때문에 그는 송장 한가지라서 기능의 작용적으로는 없는 거와  마찬가지요. 아무 기능이 없습니다.

 없는데, 이제 그 영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접선이 됨으로서  영은 살아나는 것이오. 살아나는 데 우리는 중생됐기 때문에 영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죽은 영과 육과 둘이 하나돼 가지고 이와같이 세상에 있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산 영과 이 죽은 육체와 하나돼 가지고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 이거 기독자입니다.

 그러면, 기독자가 이게 기독자인데 영은 살았지만 육체는 법적으로는 살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죽어 있는데 죽어 있는 이 육체가 현실에서  산영에게 복종하면 복종한 것만치는 영생으로 완전히 화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종하지 안한 것은 아직까지 복종할 그런 하나 시련을 겪어서 복종하는 그  시험을 치러 가지고 합격이 돼야 살지 그전에는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산 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영을  지배하고, 하나님에게 지배받는 영이 자기 마음을 지배하고, 또 산 영에게  지배받는 그 마음이 자기 몸을 지배하고, 또 산 영에게 지배받는 그 마음에게  지배받는 그 몸이 모든 만물을 이제 산 몸이 지배하는 대로 그대로 만물이  따라서 다 지배를 당하면 그 만물은 어찌 됩니까? 그 만물은 어찌 돼! O씨.

OO이. 엉뚱한 것 듣고, 여게 들어야 되지 이게 그래 쉬운 거 아니야.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건데 엉뚱한 생각 가졌으니 뭐, 대답을 옳게. 해도 다 그거 속에  능력이 안 가.

 물질이 산 몸에게 지배받은 그 물질은 다 영생하게 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그때 것은 다 산 몸에게 지배받은 모든 물질들입니다.

 이래서, 그러니까 만물이 뭣을 탄식하면서 뭣을 원하고 있어요? 만물이  탄식하면서 뭣을 원하고 있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하고  있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거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하는 것은 진리대로 사는 게 자유입니까 이 마귀대로  사는 게 자유입니까? 진리대로 사는 게 자유라 말이오. 이것도 좀 알면 할 건데  이거 전연히 먹통이라.

 자유라는 건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자유 아닙니까? 그렇지 안해요?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죄가 되는데 뭐 의가 돼요  우리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내기 때문에 나의 본질과 본성은 진리가 내  본질과 본성이요 영감이 내 본질과 본성이요 예수님의 대속이 내 본질과  본성으로 되어 있는 이 참사람 새사람이요 다시 난 사람이요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의 소원은 뭐이겠소? 이 사람의 소원은 '죄짓는 것이겠소 의롭게  사는 것이겠소? 의릅게 사는 것이 소원이라. 소원이 자유 아니요? 소원대로 하는  것이 자유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자유하기를 원한다 그말은 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육이 진리와 영감 예수님의 대속대로 그래 사는 것이 자유인데  그렇게 자유로 살면 뭣이 제게 소망 있는데? 그렇게 자유로 살면 재 소득이 뭐  있는가? 그 자유로 살면 제 소득이 뭐 있어? 자유로 살면 제 소득이 뭐이야?  OOO장로님. 예?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데에 거게 이용당하고  거게 지배를 받은 그것들은 하나도 만물도 썩지 않습니다. 그 만물들이 다 새  하늘과 새 당을 창조할 때에 거게 관련된 것이 다 새로 만물이 새롭게 될 때에  돼 가지고 그것이 영원히 그거는 다시는 불타거나 멸해지지 안하는 그런 세계로  이 물질계가 됩니다. 물질계가 영원히 멸해지지 안 할 것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하는 새 창조를 받게 됩니다. 창조라는 것은 재료, 창조는 아니고 그 모든  형체 창조를 가지게 돼요. 이러니까, 그렇게 이용된 것들은 다 그것이 영생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도 탄식하면서 고대하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뭘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못 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를 들어서 공산주의가 칼을 가지고 성도를 찌를라고 할 때에 칼은  공산주의가 거머쥐고 찌르니까 이용을 당해서 찌르는 일을 하고 있지만 칼이라는  그 물질의 소원은 뭘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때에 이 성도들이 칼에 찔려도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양보하지 안하고 그대로 고수해 가지고  거기서 순교하는 그것을 원하고 있어.

 그러면, 순교하기 원하면 그때 순교될 때에 그 칼은 죽였으니까 그게 멸망을  받는 게 아니라 그거 순교하는 그 일에 의롭게 사는 데에 도움이 됐고 칼이  아니면 순교를 못 했을 것인데 칼이 순교시키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에 그 칼은  뒤에 가서 영원한 존재로서 상을 받고 있다 그거요. 알겠습니까? 이거 이해가  돼요?  이러니까, 자꾸 이래 지식으로만 듣지 말고 자기가 이렇게, 새김질하는 것도  좋아요. 새김질하는 것도 좋으나 야고보서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이 생명의  도를 받아 가지고 버리지 안하고 늘 도를 들여다보고 있고 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듣고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듣고 버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그대로 사는 사람이 그 도리를 지키고 있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했어.

 지켜 행했으면 벌써 행한 것 만치 그 진리는 자기화 됐기 때문에 영원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거는 말씀대로 실행해 보는 데에서만 내용은 깨닫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못 깨달아요.

 그러니까, 아주 그 사람이 명철해서 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실행을 안 하는  사람은 하나도 깨닫지를 못해.

 그러기 때문에, 구원 얻는 것은 문으로 말했어, 문으로 비했어. 문 첫째 문 둘째  문 세째 문 네째 문 모양으로 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 그 다음 문을 만나서  그다음 문을 열고 들어가야 만나고 이렇게 점점 주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이것은 다 문이 열리는 것은 믿음으로 열어야 돼. 믿음으로 열어. 문을 여는 건  믿음으로 여는 것은 '믿사옵나이다' 그라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몇 가지가 합해서 믿음입니까? 자, 네 가지가 그라면 뭣뭣이지?  알고, 인정하고, 소원하고, 실행하고 이런 것인데 이제 이것으로 가지고 열기  때문에 행하지 안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식으로 암만 부흥사가 돼 가지고 아무리  설교를 하고 떠들어 쌓아도 그 사람은 그 속을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속을 깨달은 사람이 행해 본 사람이 말하면 행하지 안한 사람은  항상 그 소리는 듣기 싫어하고 거짓말쟁이 말만 잘 듣고 싶어한다 말이오. 되지도  안할 말을 이렇게 말하면 그 말은 잘 듣지만 실지로 실행해서 되는 말은 안  듣는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데에는 자기가 진실해야 되는 것인데  진실이라는 것은. 자기가 행해야 되는 것이지 말만 들어 가지고 지식으로만 하는  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알고, 아는 것 암만 소용없어. 알고 난  다음에는 믿어야 돼. 인정을 해야 돼. 인정만 해도 소용없어.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또 거기 대해서 소원을 가져야 돼. 소원만 가져도 소용없어. 실행하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뭐라  했습니까? '참 내 제자가 되고' 하는 말은 예수화 된다 그말이오.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라고 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를 새로 알게 돼요. 이러니까, 실행 안  하는 신자는 설교를 원하고 실행해 본 자는 실행 안 하고 한 설교는 안 들을라  해요. 가보면 막 은혜가 된다고 이라는데 듣고 실행한 사람은 그 설교는 들을  때에 '이거는 아무것도 공중에다 집 짓는 것과 같은 아무 소용없는 거짓말하고  있다' 이 거짓말 알고 있어. 거짓 말씀. 실행한 사람은 거짓말하는 거짓  선지자인지 알 수 있고 실행 안 한 자는 거짓 선지자일수록 말로 풋장을  다리니까 아주 좋아한다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들은 공과를 꼭 외우고 자기가 다른 걸 많이 못 해도 요 공과  요대로 실행을 하자 하는 실천을 하는 가운데서 고게서 경험하고 체험하면  차차차 자라 가지고 모든 성경 말씀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라고 하루  30분 기도 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 환난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야 되지  하나님의 도우심 아니고는 아무도 그 이길 자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30분 기도를 이렇게 하라고 하는데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이고 하거나 말거나 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 없이 제힘으로  제가 살 수 있다 하는 사람이라.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시편에 시편 전부는 인간이 자기 믿고 의지하는 것은 다  망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분을 두려워서 그분에게 복종하는  자만이 다 평강이요 소원이요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이 해 주시지 인간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놓은 것이 시편입니다.

 그래 30분 기도하고 부장 선생님들은 그 모든 반사 선생님들에게 깨워 주는  일을 하고 또 반사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깨워 주는 일 해서 이제 이런 지금  고차원의 이 목회 방법으로 해야 되지 그 전과 같은 아직까지 유치한 그런 방편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다른 데서는 우리 교회 시찰을 세 번 온 사람도 있고 네 번 온 사람도 있대요.

제일 많이 온 사람 몇 번이나 왔어? 다섯 번 왔어. 그 사람들은 처음에 와 보니까  효력이 있으니까 한 번 더 왔다 가면 더 효력 있고 두 번 더 왔다 가면 효력  있고 이래 가지고 그래 가지고 다섯 번까지 온 사람이 있어. 그 사람들은 재미를  봤거든. 와 보니까,  그래 가지고 이 서부교회로 말미암아 우리 한국에, 남한에 주일학생이 이래 불은  것은 이것은 수백만이 불었습니다. 이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오.

 남한, 북한, 이라는데 나는 한국이라 말하고 싶지 남한이라 말하기 싫어. 이  남북이 이 지금 남북이 통일이 될란지 안 될란지 모릅니다. 꼭 통일돼야 됩니까?  이게 모두 다 근시자들이라. 우리가 근본을 따지면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오.

알겠습니까? 아담의 다 자손들이라. 아담의 자손인데 지금 흑인종 황인종 뭐  백인종 이래 쫙 이렇게도 갈라져 버렸고 이거 이렇게 쭉 갈라졌는데 뭐 이북과  이남이 갈라질 때 그렇지 갈라지는 게 정한 이치인데 갈라진 게 뭐 그렇게 큰  일이냐 그말이오.

 인간들이 다 갈라져 사는 것인데 하필 이북과 이남 갈라진 건 큰일이 아니라  그거요. 여기 이남의 사람들도 이남에 살라 해도 안 살라고 지금 가라 소리를  허락 안 해 그렇지 가라 하면 뭐 전부 미국으로 다 가버리고 없을 거라 말이오.

뭐 그 땅덩어리 그거 붙은 게 무슨 이유가 있어서 꼭 남북 통일, 통일 고집을  하고 주장을 하고 있느냐 그말이오. 그것도, 이걸 반대하는 게 아니라 통일되면  좋지만 꼭 죄를 지어 가면서 살인해 가면서 통일할 필요가 없는 거라 말이오.

 통일할 필요가 없지 또 남북은 우리가 갈라지고 싶어 갈라졌습니까? 그 큰 세력  미국하고 소련하고 두 나라에서 양쪽에 미국은 남한 꽁댕이를 거머쥐고 이 또  소련이 이북 대가리를 거머쥐고 잡아 댕기니 둘이 늘어져 지금 늘어졌다 말이오.

늘어져 끊겨졌어.

 끊겨진 이걸 뭐 이을라고? 위에 잡아댕기는 세력이 있는데 이을라하면 무슨  힘으로 이을 거라? 학생들 저거가 이을라고? 천지도 모르고. 이을라면 댕기는  놈부터 없어야 돼. 이북에는 소련하고 완전히 끊을 수 있고 자립할 수 있는 그게  되고 난 다음에 있은 거라. 이남은 미국 덕택 하나도 안 보고 남한은 남한대로  독립하고 자립할 수 있는 그런 실력 있고 나서, 거머쥐고 저 매어놓고 댕기는  줄부터 끊고 난 다음에 이거 자유가 되지 끊으면 암만 잇은 것보다도, 잇겨  가지고 있던 하나돼 가지고 있는 것도 잡아당겨 멀어졌는데 이제 떨어져 가지고  있는 것을 저거 힘으로 이을라고? 어리석은 소리라. 이 말 하나도 하지 못한다  말이오.

 이러니까, 앞으로 통일을 될라고 하면, 될란지 안 될란지. 그거 뭐 하나님이 하신  것을, 된다고 보지를 못해요. 나뉘어 가지고 합해진 일이 별로 없고 합해져 가지고  좋은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잇는 것이 나뉘어 가지고는 좋은 일이 있고 나뉘었던  것이 합해 가지고는 좋은 일이 없어요.

 이러니까, 앞으로 합하는 것은 대세에 따라서, 이제 좀 있으면 성경에 말한 대로  소련하고 미국하고 둘이 합해 돼요. 둘이 합작이 돼요. 그것들이 합작이 돼서  하나가 돼지면 남한 북한도 자연히 동독 서독도 자연히 합쳐져요. 자연해 합해져.

 그 대세들이 합해지면 거게 따라서 그 소속한 것들은 자연히 합해져. OOO장로  이해가 돼요? 이래서 이 세 가지를 깨닫고 있어야 돼. 그러면 합해지면 좋아요  나빠요? 우리 OOO집사님. 합해지면 좋아요 나빠요? 모르겠어? 좋겠어?  나쁘겠어? 그러면 그래도 새벽기도 안 나오는데 뭐 깨닫기는 깨닫는 거로구만.

그거 가재 물종 잡듯이 물종만 잡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실지로  새벽기도 나와야 되고 해야 되지.

 나중에 그게 뭐이야? 일곱 머리 열 뿔이 하나되는 거라. 나중에 가서 '진실한  예수 믿는 사람만 또글 또글 남아 있어. 온 세계하고 진실한 자 예수 믿는 사람만  있어. 그러니까 그것이 참된 성도에게 환난의 뭉텅이를 지금 크게 만드는 거라.

 환난의 뭉텅이를 크게 만드니까, 크게 만드니까 이거 어린 양에게는 부딪히는  몽둥이가 큽니까 적습니까? 몽둥이가 커져요 적어요? 커져요. 커지는데 때리는  뭉둥이가, 때리는 몽둥이가 승리자에게는 때리는 몽둥이가 작으면 좋습니까 크면  좋습니까? 허, 이거 참 모르는 거라. 맞아서 죽는 자에게는 몽둥이가 큰 거나  작은 거나 다 한가지이지만 맞아도 안 죽고 사는 데에는 말이오. 안 죽고 살면  작은 몽둥이에 횟가리에 맞고 안 죽는 그게 셉니까? 온 세계가 몽둥이 갖다 막  다 뚜드려도 안 죽고 성성하게 살고 있는 그게 좋습니까? 이긴 자에게는  몽둥이가 클수록 좋아.

 이러니까, 모든 깨달은 것이 한 고비 두 고비 자꾸 이래 자꾸 첩첩으로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되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고 다 예수 믿으니 이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들 다 속고 있어.

 오늘밤부터 교역자회가 모입니다. 교역자회가 모이니까 이 교역자회서 뭘하는 고  좀 볼 사람들은 좀 보는 그런 눈이 있어야 되지, 공회가 이리 넘어가면 다 뒈지고  저리 가면 다 돼지는데 위에 머리가 죽으면 다 죽는 건데. 이러니까 이거 어찌  되는고 보자 그 좀 보고 싶을 터인데 너무 믿기 때문에 안 보는지?  그것도 눈이 어두워서 염통에 쇠 슬는 줄은 모르고, 염통에 쇠슬는다는 그게  요새 말하면 암병이야. 염통에 쇠슬는 거, 염통에 쇠슬는 거는 염통에 이 벌거지가  지금 먹는다 말이오. 염통에 벌거지 먹는 거는 모르고 손톱 밑에 배집 난 것만  안다고.

 이러니까 이 큰 멸망은 모르고 사소한 물질 한 푼 두 푼 손해라 또 자기에게 뭐  조금만 대항이나 공격하면 그거는 해인 줄 알지만 자기를 죽이는 거는 모른다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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