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1986. 7. 11. 금밤

 

본문:베드로전서 1장 4절∼7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중생은 구약 교회 성도들이나 신약 교회 성도들이나 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중생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구약 성도들은 중생을 소망으로 가졌고 중생하지는 못하고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생을 하나님이 때가 돼서 대속주가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실 때에 그때에, 중생될 그 소망을 가지고 세상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그때에 휘장이 갈라진 것은 하나님 앞에 비로소 죄 사함이라 하는 것이 완성된 것을 나타내서 손 대지 않고 휘장이 갈라졌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이 열리고죽은 지 오래 된, 무덤에서 자던 성인들이 많이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에 죽은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실 때에 중생할 그 소망을 가지고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비로소 소망하던 그 중생이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증표로 무덤이 열렸고 자던 성인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이 과거 부활하심으로 완전히 중생의 공로를 베풀어 놓으신 그 후에 난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사람의 노력으로 중생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시키십니다. 중생하는 것은 본인이 모릅니다. 마치 바람이 부나 그 바람이 사람 눈에 보이지 안하지마는 그 바람 붊을 따라서 모든 물체들이 움직여지는 그것을 보고서 이는 동풍이라 서풍이라 그렇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중생된 사람이 신앙 행위를 할 때에 그걸 보고서 비로소 중생했다 하는 것을 알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생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중생됐고 우리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을 입은 것은 우리가 벌써 나기 전 하나님의 예정 구원 창조 구원 입고 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실 때에 택한 자들은 그때에 다 대속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대속 입는 것은 대속을 입고 생겨 나왔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의로 정하심을 받았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시기를 세 가지 대속을 하셨는데, 우리 대신 세 가지 죄의 값으로 영원히 사망되는 그 값을 대신 받아서 우리에게 사죄를 주셨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해서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다 통과하기까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을 대신 하셔 가지고 완전 이행한 그 의를 우리에게 입혀서 칭의를 입혀 주신 것이고 우리 대신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을 이루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의 우리 구원은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 구원을 우리가 받았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피와 성령과 진리의 공로로 우리 영이 중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서는 두 번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습니다. 한 번은 죽으신 공로 베풀었고 한 번은 부활하신 공로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났으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기쁘다고 이렇게 모두 다 기쁨으로 부활을 축하합니다.기뻐서 축하하는 것은 좋기는 좋지마는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기뻐하는 그 이유와 진리를 모르고 잘못 기뻐하면 안 됩니다.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났으니까 참 좋겠다’ 해서 그런 기쁨은 가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그 신성은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기쁨이 되어지지마는 예수님의 신성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신성이 인성을 영원히 입는 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의 형상을 영원히 입기 때문에 우리 사람이 마치 송장을 붙드시고 사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로 살아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수치요 천대요 아주 그것은 참 크게 절단난 그 일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 인간편에서 감사하고 기쁘고 못 견딜 만치 기쁘지 그 신성편에서는 큰 희생을 한 것이 마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의 희생과 꼭 같은 그 중량의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이 구원에 대해서 감사할 것은 내 대신 사죄 칭의 화친을 위해서 죽어 주신 이 사랑에 대한 감사나 다시 인성을 입고 부활하신 이 사랑의 감사나 꼭 같은 중량의 감사를 가져야 합니다. 왜? 주님도 꼭 같은 중량의 고난을 당신이 자취해서 당하신 것입니다.

여게 4절에, 「썩지 앉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해서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더럽지 안한 하늘에 강직해 놓은 우리 기업이 있다.

그러면 이 기업은 뭣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고 하니 우리가 죽어 가지고 부활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거쳐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거치는 그 심판은 멸망을 받느냐 구원을 받느냐 그 심판이 아니고 대속 안에서 받는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해 놓았는데 대속해 놓은 이 구원이나 기업을, 예수님이 대속해 주신 그 구원과 기업을 어느 정도 믿으며, 어느 정도 바라보며, 어느 정도 인정을 하고 이 구원을 자기 구원으로 삼고 있느냐 하는 그것을 이 세상 살이에서 행한 데서 다 나타나기 때문에 그 행한 것을 심판해 가지고 그것이 결정되는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러면 하늘나라 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기업은 어떤 것이 받을 기업인가? 그 기업은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난 다음에 하늘에 있는 거와 땅에 있는 것을 다 상속받았습니다. 다 상속받았는데 예수님이 상속받으신 그것을 우리에게 다 상속해 줄 때에 우리가 다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계에 하나님의 것과 이 우주에 하나님의 것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이 다 상속받습니다.

상속받는데, 그 상속을 받는 데는 중생한 사람들이 다 부활해 가지고 무궁세계 가서 그 기업을 상속받아 가지고 누리게 되는데 그 상속의 권위가 같지 안하고 어떤 사람은 상속을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은 상속을 적게 받고 한 그것은 행한 대로 그 상속권이 차이가 있는 것인데 그 행한 대로 차이 있는 그것은 이 세상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그 상속을, 그 기업을 자기가 잘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마련하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실력을 마련한 데 따라서 적당하게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그 기업을 받아 가지고 영원한 세계에서 누릴 만한 그 실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기업을 주나 받지 못하고 또 감당치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 기업이 오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늘에 강직한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우리가 다 받아서 우리의 소유로 가지는 그것이 기업이요, 상속받을 기업이요 썩지도 쇠하지 낡아지지도 안하고 더럽지도 안하는 그 기업인 것입니다.

또, 그외에 기업 하나는 뭐이 기업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영계에 있는 모든 수많은 피조물 또 이 물질계 우주 안에 있는 이 수많은 피조물 그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다 통치하시고 그것들을 기르고 또 보호하시고 입히시고 각양 각 존재에게 개별적으로 필요한 모든 은혜를 하나님이 다 입혀서 그것을 다스리시고 또 보호하시고 또 보존하시고 기르시고 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사역을 우리들에게 맡겨 줘서 사역을 상속받아 가지고 대신 우리가 그 사역을 행하는 봉사의 직책, 봉사의 일을 하는 것, 시은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또 우리의 기업인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기업인 두 가지로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우리가 기업으로 받는 것과 또 하나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은혜를 베푸는 역사, 또 봉사하는 역사, 모든 것을 기르고 다스리는 역사 그 역사를 또 우리가 상속받아 가지고 대리해서 받는 그 기업과 두 가지 기업이, 하늘에 강직했다 그말은 부활 후에 그 기업은 다 누리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끝절에는 보면은 만물 안에서 만물들에게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의 직책이요 우리의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강직한 것이라 하는 그 말은 우리가 그 두 가지를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가 다 이 세상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살이는 그 두 가지를 준비하는 세상입니다. 또 그 두 가지를 누릴수 있는 실력을 마련하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고,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5절에, 요 말씀을 증거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말세라 말은 신약 시대를 다 가리켜서 말세라 그렇게 말합니다. 뭐 신약 끄트머리를 말한 게 아니라, 벌써 신약 교회라 시작한 때부터 말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까지의 역사 세계를 세 동가리로 나눈다고 하면은 처음에는 노아 때까지의 한 첫 동가리고 그다음에는 예수님의 초림까지가 가운데 톰박이고 또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로 재림 때까지의 그 기간을 가리켜서 말세라 그렇게 말합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러면 이 구원이 뭐인가? 말세에 나타날 우리 구원이 뭐인가? 요것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알면 쉽습니다.

알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한 구원”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러면 우리가 받을 구원, 하나님께서 예비한 구원이라 하니까 예비한 구원은 다 만들어 놓은 구원이라 말입니다. 다 만들어 놓고 구원은 다 돼 가지고 있습니다.

다 돼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을 우리에게 줄라고 지금 준비해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을 신약 교회가 받을 그 시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가? 이 구원은 곧 우리의 대속과 중생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 하는 이 구원이라 말은 예수님의 이 사죄와 연결이, 우리가 사죄를 받았지마는 하나님의 공심판으로 우리가 사죄를 받았지마는 실상으로는 우리가 사죄를 중생된 영은 받았지마는 다른 것은 사죄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죄를 우리의 심신이 이 사죄를 받기 위해서, 이 사죄는 준비가 돼 가지고 있기는 있는데 이 사죄를 우리가 실상으로 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죄를 실상으로 받는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심신이 죄 없는 심신, 죄 없는 심신이 되는 것이 우리 구원인데 주님이 죄 없는 대형으로 사죄를 우리에게 입혀 주신 그 사죄가 실지로 내게 와 가지고서 나의 사죄가 되어지고 사죄와 나와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사죄와 나와 하나가 돼 가지고 다시는 죄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사죄, 사죄라는 것은 죄 없는 것이라 그말이오. 사죄라는 것은 죄 없는 것이라. 사죄는 죄가 없는 것이라 그렇게 알면 좀 알기가 쉽겠습니다. 사죄는 죄가 없는 것인데, 죄 없이 하심을 예수님께서 베풀어 놨지마는 우리는 아직까지도 죄와의 이런 관계가 끊어지지 안하고 죄가 와서 자꾸 우리를 침노하고 또 우리는 죄와 관계가 자꾸 연결이 되어지고 이런 가운데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죄와 완전히 끊어져서 죄와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예수님의 사죄의 공로와 하나가 돼서 예수님이 그 사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심판에 죄 없는 자로 통과한 이 사죄, 죄 없는 자. 죄 없는 자가 완전히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구원을 입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칭의를 완전히 입어서 하나님의 그 율법을 완전 이행하신, 완전 이행하신 그 공로를 내가 입어서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이행하지 안했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한 자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한 자가 내 자신이 실상으로 되어지는 이것이 우리 구원이요,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논리적으로만 아니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완전 화친을 가진, 완전히 하나님과 화친돼서 하나님과 아무 빈틈이 없이,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대주재이신 하나님,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이 하나님과 나와의 완전히, 논리적인 결합이 아니고, 논리적인 결합이 아니고 법적인 결합이 아니고 그 실상의 결합이 되어지는 이것이 이 구원을 입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러면 이거는 예수님이 이 세 가지를 만들어 놨는데 이 세 가지가 완전히 내것이 돼서 이 세 가지와 나와 완전히 결합해서 하나가 되어지는 이것이 예수님의 피공로와 연결되는 것이고 그라고 난 다음에 둘 있는 거는 뭐이냐 하면은 성령과 나와의 연결이 돼 가지고, 성령하고 나하고 이렇게 끊어졌다가 이 중복되는 게 아니고 성령님의 이 역사와 나와의 하나가 돼서, 성령과 나와 하나가 되어지는 것. 성령님과 나와 하나가 되어지는 이것이 구원을 입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진리와 하나되는 것이 이것이 구원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은 그것을 내것으로 실상으로 입어서 완전히 내것 만드는 것이고,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완전히 내것 만드는 것이고 또 둘은 뭐이냐 하면은 성령과 나와 하나가 돼서 동행하는 것 또 진리와 하나돼 가지고 동행하는 것 이것이 예비해 놓으신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도 예비해 놨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우리가 성령님과 하나될 이 성령님도 다 대비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 성령님과 우리와 하나되도록 다 완전히 완료를 해 놨고 진리와 하나되도록 완전히 완료를 해 놨습니다.

해 놨는데,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 말은 이 다섯 가지와 실상으로 하나되는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

그러면 내가 진리를 지키는 게 아니고 진리와 나와 하나되는 것. 또 성령과 나와 하나되는 것.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내가 실상으로 입는 것 요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요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인데 이것을 언제 입느냐?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입어야 되지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못 입으면 다시는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거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입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러면 요 믿음을 요것을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요 믿음은 우리 주관 믿음이 아닙니다. 요 믿음은 우리 주관 믿음이 아닙니다.

주관 믿음이라 말은 내가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그러면 요 믿음은 우리 행동은 하나도 여게 속하지 안했습니다. 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하하심을 입었다 하는 요 믿음은 우리 사람들의 노력은 하나도 여게 섞여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노력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는 믿음입니다. 요거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돼. 사람들의 노력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는 그 믿음입니다.

에베소서 2장 7절 이하에 보면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그 은혜로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믿음으로 구원 얻은 그것은 믿음도 우리가 만든 믿음 아니고 구원도 우리가 만든 구원 아닙니다. 요 믿음은 요거는 사람이 만든 믿음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이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요것 잘 알아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요것도 잘못하면 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다 하는 요 믿음을 인간 주관 행위가 시작하고 난 뒤의 믿음이라고 요렇게 생각하면은 모든 성경의 교리가 다 뒤비져 버립니다.

요걸 구별을 단단히 해야 됩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나니」 믿음으로 구원 얻었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얻었나니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는데 그러면 이 구원은 행위가 아니고 선물이라. 그러면,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이 요 구원만을 선물이라고 말한 말입니까 그 믿음까지를 다 선물이라고 하는 말입니까? 요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그 믿음까지를 선물이라 한 것인지? 요것을 구별을 요걸 바로 해 가지고서 요것을 구별을 해 가지고 요거 밝히는 밝히는 교리와 신조 조직신학이 별로 나타나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지금 이 조직 신학 쳐 놓고는 뻘코프 조직 신학을 제일 유리하게 모두 보고서 근거하고 이래 연구하는데 여러분들이 자세히 살펴서 봐서, 요게 인제 문제입니다.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은혜」 은혜라 말은 공으로 받는 거 아닙니까? 「은혜를 인하여」 은혜를 인해 뭘 받았다 말입니까?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그러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이랬으니까 은혜로 가지고서 얻은 것이 구원이라 말입니까, 믿음이라 말입니까, 믿음과 구원 둘이라 말입니까? 뭐이요? 둘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를 말하는 것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녜, 둘.

요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금방 말하고 나니까 아는데 요걸 잘못하면 나가 가지고서 요게 그만 마귀란 놈은 자꾸 요렇게 사이비한 요런 걸 떠 가지고서 혼돈을 시킵니다.

요 믿음은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 주관이, 내 주관, 내가 말이오. 내가 듣고 읽고 난 다음에 알고, 알고 나서 인정하고, 인정하고 난 다음에 그대로 순종해서 행위하고 하는 그게 믿음인데 여게는 아는 것도 안 들었고, 들은 것도 안 들었고, 믿는 것도 안 들었고, 또 행동하는 것도 안 들었고 하나도 안 들었습니다.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믿음이라 말이오.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된 믿음이라 말이오. 요걸 똑똑히 알아야 돼요.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그러면 이것이 하면은 그 구원 말입니까 믿음 말입니까 뭐입니까? “이것은” 했으니까 “이것은” 하는 것은 구원을 말합니까, 믿음을 말합니까, 믿음과 구원을 두 가지 다 말합니까? 자, 이 구원을 말한 것이라고 아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안 들고. 그러면 믿음과 구원 이 두 가지를 다 합해서 “이것은” 하는 것으로 그렇게 구별해서 아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요걸 똑똑히 알아요, 요대로. 바로 알았는데 요걸 바로 알아야 돼요. 그런데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순전히 그 은혜로 인해 가지고 됐다 말이오.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했으니까 요 믿음 말한 요것이 은혜에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습니까? 확실히 들어갔습니까? 요거 똑똑히 알아야 돼요. 요거 모르면 어실므실 하면 안 돼요.

나중에 그래 가지고 마귀란 놈이 뭘 작용하느냐 하면은 이제 베드로전서 1장에 볼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입었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를 입었다고 했으니까 입은 것이 믿음으로 입었는데 ‘믿음으로 입었다고 하지 안했느냐?’ 마귀가 와 가지고.

‘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함을 입었다고 말하지 안했느냐? 네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입을 만한 믿음이 정말로 있나? 한번 생각해 봐라.

네가 너를 알고 있지 않느냐? 네가 그런 믿음이 있나?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있는 것이지 네가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없는 것 아니냐? 공연히 네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있다고. 보호가 있기는 뭐 있어? 네가 믿어야 보호가 있는데 네가 믿지 않는데 무슨 보호가 있느냐?’ 이렇게 마귀란 놈이 들어붙일 때에, ‘과연 나는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라 하는 것이 그다음부터 의심이 나지게 됩니다.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실패합니다. 이거 지금 얼마나 중요한데 이 중요한 것을 사람들이 별로 예사로 여긴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요 믿음이, 「선물이라 행해서 난 것이 아니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했으니까 요 믿음이 자기가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인간이 만드는 믿음 그 믿음이 아니고 순전히 은혜로 된 선물의 믿음이라 하는 것이 확실합니까? “행위로 만든 게 아니라” 했으니까 확실하지 않습니까? 요걸 알아야 돼요.

그다음에 에베소서 1장 19절에 보면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에 「그의」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신의 강력으로」 강력이라 말은 강할 강자 힘 력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에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들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믿는 우리에게」 요 믿는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요 믿음은 무슨 믿음이요? 요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 그러면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믿는 자에게 오니까 믿을 때에 오고 안 믿을 때에 안 오고 그런 것입니까 믿으나 안 믿으나 이 능력이 와서 있습니까? 뭐입니까? 요런 거 단단히 구별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걸 구별 안 해요.

여러분들이, 오늘도 내가 말 들었어. 어떤 사람이 뭐 성구에 좀 찾아 볼 게 있어 가지고서 주석을 뒤벼 보면은 꼭 알고 싶은 거는 주석에 안 내놨다고. 그걸 낼 수 없고 뭐 다른 거 버멀버멀해 놓지 이제 주석에 그런 똑, 요런 것도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믿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오지, 믿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오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이니까 믿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오지 않느냐? 그런데 네가 뭐 믿노? 네게 하나님의 능력 어데 있다고 지금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네가 하고 있느냐? 네게 하나님의 능력은 오기는 오지마는 네가 믿어야 오는데 네가 믿나?’ 요 믿음을 자기 행위로 만드는 믿음이라고 딱 바꿔 붙여 놓으면 그 사람은 멸망입니다. 알겠습니까? 그 사람은 멸망이라.

요 믿음은 우리 사람이 만드는 행위 믿음이 아니고 요거는 순전히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준 믿음이니까 인간은 알기도 전에 온 믿음입니다. 알겠습니까? 인간은 모르는 믿음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든지 안 믿든지 의심을 암만 해도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요걸 믿어야 돼요.

우리가 그때에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이 능력은,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능력이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당신이 나에게 믿음 주시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왔으니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 왔는데 그 믿음이 내게 있는 것도 모르고 능력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것을 부여해 줘 가지고 택한 자들이면 중생 후에는 다 이것이 와져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이걸 똑똑히 구별해야 돼요.

지금은 이렇지마는 앞으로 환난을 닥치면 똑똑히 요거 믿는 사람은 다 승리하지마는 환난이 닥치면 덩더꿍이로 이래 지금 하는 사람은 이긴 거 같아도 나중에 따져보면은 다 패전했어요. 마귀란 놈이, 따져보면 다 패전했다 그말이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말할 때에 진주성경학교에서 학생들 가운데에 신사참배 안 할라 하는 학생들도 있고 또 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나라에서 강하게 탄압을 하니까 나중에는 ‘이것은 국기 배례가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 이렇게 이름을 바꿨습니다. ‘국가 의식이라' 이렇게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라니까 국가 의식이라고 사람들이 바꾸지마는 ‘실은 이거는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기 때문에 할 수 없다.’ 이랬습니다. ‘할 수 없다.' 이랬습니다.

이럴 때에 나중에 가서는 말하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이것이 국가 의식이 아니고 신사참배라고 해서 신사참배 안 해도 좋다. 신사참배 안 해도 좋다. 안 해도 좋은데, 안 해도 좋은데 다만, 안 해도 좋으니까 공부는 계속해 해라.

성경학교 공부는 계속해서 해라. 너거는 국가 의식이 아니고,ㅡ의식으로 아는 사람은 신사참배 하고ㅡ국가 의식이 아니고 우상 숭배라고 하는 사람은 신사참배 하지 말아라. 하지 말고 너희들은 이 진주 성경 학교에서 공부를 해라.’ 이렇게 했습니다.

‘공부를 해라’ 할 때에 그때에 거게 있는 학생들이 ‘나는 국가 의식이 아니고 신사참배기 때문에 신사참배 안 합니다.’ `그 안 해도 좋다. 그러면 너는 신사참배가 우상 숭배인 줄 알고 안 하니까 안 해도 좋다. 그러니까 안 하고 여기서 공부를 해라.’ 이렇게 했는데, 공부 한 학생들 많았습니다.

많았고, 또 어떤 학생은 ‘아니다. 이 학교 자체가 우상 숭배한 학교가 됐으니 이 학교에 공부하는 나는 내가 개적으로 안 해도 여기에 속해서 내가 공부하기 때문에 나는 우상 숭배한 자가 도매금으로 다 들어간 것이 아니냐?’ 이래 가지고서 학교를 퇴학을 하고서 공부 안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랬는데 그때 거게서 ‘너는 여기 학교 공부해도 너는 신사참배 안 하지 안했느냐?’ 이랬지마는 그 사람들은 나중에 얼마 안 가서 다 신사참배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때 눈이 밝은 사람과 어두운 사람들이 다릅니다.

○○○씨니, 마산 인애원에 있는 ○○○씨 또 최덕지, 또 ○○○ 이런 분들은 성경학교 공부하다가서 ‘신사참배 한 학교에서 공부하는 그 자체가 벌써 넓은 범위에서 신사참배 한 자라’ 하는 것을 깨닫고 거게서 퇴학을 하고 공부를 안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 이놈이 이리 저리 훑쳐 가다보면은 나중에 가서 죄는 짓고 제딴에는 안 지은 줄 알고 의로운 줄 알고 나중에 가 심판에 보면은 죄를 다 지었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이지 안한 것으로 저는 마구 손 씻고 뭐 씻고 이렇게 했지마는 나중에 가서 보면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십자가에 못박은 그 정죄는 빌라도가 했다 그말이오.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6 5 때 보니까 어떤 사람은 인민군들이 오니까 인민군들에게 ‘아이구,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이라고 마음대로 이래 다녔습니다. 그 사람은 마음대로 다니면서 말하기를 ‘인민군이 뭐이 두려워서? 모두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하고 모두 그라지. 인민군이 뭐이 두려워?’ 그 사람이 저렇게 신앙이 그럴 사람 아닌데 ‘인민군이 뭐이 두려워?’ 하니까 그거 이상하다. 뭐인가 다른 게 있다 해서 우리가 그 뒤에 교역자회 때에 물어 봤습니다. 그러면 인민군 때에 인민군이 두렵지 안하고 한 그 비결이 뭐입니까? 그걸 좀 말 좀 해 주십시오. 우리가 물었습니다. 그 물은 것은 알고 물었다 말이요, 알고.

의례히 그런 줄 알고 물으니까 그 말하기를 ‘그뭐 무서울 게 있나? 만나면,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하면 그 사람들 예 뭐 좋습니다. 그 수고하십니다 말 한 마디 하면 되는데 뭐 두려워해?’ 그게 바로 이제 그 무신론 주장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거게 무신론 주장 사상에 동참한 동편이라 그말이오. 알아 듣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 보면은 전쟁에서 패전하고 저는 이겼다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말이오.

배추달 선생을 주일날 ‘이 도야지 이놈 한 마리 지고 가자. 그라면 내가 너를 살려 줄 거다.’ ‘아이구 다른 날 같으면 내가 지고 가겠지만 주일날은 못 지고 가겠습니다.’ ‘이놈이? 그라면 자, 짐지고 가기 싫으면 개 이놈 한 마리 끌고 가자.’ 저거 뭐 전부 짐승 저거만 잡아먹지 안했소? ‘개 이놈 좀 끌고 가자.’ `개 그거 끌고 가는 거야 못 끌고 가겠습니까? 가지마는 주일날이기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이랬다 말이오.

또 나중에는 ‘그러면 네가 이거 그러면 내가 말하다가 안 됐고 이러니까 마당을 이걸 좀 쓸고 가라.’ 마당 뭐 동가리 쪼맨한 거 빗자루 한 여남은 번만 이래 버리면 되는 건데 ‘이걸 좀 쓸고 가거라.’ 안 쓸었다 그말이오. ‘마당은 우리 집에도 소제를 합니다마는 자기가 나를 주일을 범하게 하기 위해서 도야지 지고 가자, 거게서 또 인제 개를 끌고 가자, 고다음에는 마당을 쓸라 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주일을 범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고것이기 때문에 나는 주일을 범하지 못합니다.’ 이래 가지고 가 가지고서 순교당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이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못 알아들어.

그렇게 비 하나 쓰는 그것이 생명을 내놓고 비를 안 쓸었기 때문에 그게 뭐이냐 하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한 그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비 쓰는 그것 때문에 생명 내놓으면 그런 바보가 어데 있겠습니까? 주일에서부터 이와같이 올라왔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주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랬다 그거요.

이래서, 이 믿음도 이 믿음이 인간이 만든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입니다. “네가 믿는 대로 되리라. 믿는 대로 되리라.”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믿는 대로 되리라는 그 믿음은 인간이 만든 믿음입니까 여게 말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입니까 무슨 믿음입니까? 병신이 나았을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그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인간이 만든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믿음입니까? 예? 인간이 만든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다” 하는 이 믿음은 인간이 만든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의 믿음입니까? 선물의 믿음입니다. 요 믿음을 두 가지로 구별 못 하면 안 돼요. 요 믿음을.

마귀란 놈은 자꾸 그걸 이거는 하나님의 선물의 믿음으로 오는 것이지 인간이 만든 믿음 가지고는 올 수가 없는 것인데 그 선물의 믿음을 따지기를, 내가 하나님의 능력의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려고 하니까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네가 성경을 봐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한다 했으니까 네가 믿는 믿음이 뭐 있노? 네가 믿는 것만치 너에게 능력이 오는 것이니까 네가 지금’ 믿음 없는 걸 자꾸 말한다 말이오. 믿음 없는 거. ‘이런 게 있으니까 네가 믿음 없지 않나? 이거 봐라 믿음 없지 않나? 믿음 없는 걸 네가 보지 않느냐? 믿음이 있느냐, 어데? 믿음이 있기는 눈꼽재기만치밖에는 없는데 능력이 와도 그러면 눈꼽재기만치 더 왔을 것이가? 그 능력 가지고 네가 뭐 할 것이고?’ 이러니까 ‘아이고 나는 믿음이 없으니 능력이 없다.’ 이래 가지고 공포와 기겁에서 다 꺾어지고 만다 말이오.

그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의 믿음이다. 에베소 2장 7절 이하에 똑똑히 있다.

선물인 믿음이다. 구원도 선물이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 그것은 뭐이냐 하면은 그 믿음이 우리 인간 주관은 인적 요소는 하나도 들지 안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걸 말해서 행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성경에 똑똑히 말해 놨다.’ 요걸 딱 대면서 ‘나는 믿음이 한 내끼도 없어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는 입고 있다. 지극히 큰 능력이 내게 와서 있다.’ 이래 할 때에 마귀들은 우리를 유혹하지 못하고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승리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면 능력으로 보호 입었으니까, 입었으니까 이거는 이미 입은 것입니까 현재 입고 있는 것입니까 앞으로 미래로 입을 것입니까? 이거는 과거사입니까 현재사입니까 미래사입니까? 과거사입니다.

벌써 입고 있습니다.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벌써 우리는 다 입고 있다 말이오. 우리는 벌써 중생될 때에 그때에 다 이 믿음도 받았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도 다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보호받고 있는데. 이 보호를 왜 받느냐? 보호를 왜 받느냐? 보호를 받는 것은, 요거 잘 들어요. 뭐 묘기하는 사람들, 마스바이, 서커스 한다 하던가? 서커스라 하던가 뭐 서커스인가 뭐인가 그거 하는 사람들 그 줄타는 사람들 있지 않애요? 줄타는 사람 줄 탈 때에 처음에 연습할 때는 그 밑에다가 그물을 쳐 놔요. 그 밑에 그물을 쳐 놔요.

그물을 쳐 놓고, 줄을 타다가 퉁 떨어져도 그 그물에 받쳐지니까 뼈도 뿌러지지 안하고 거게서 푹석하게 이라니까 떨어져도 상하지 안하고 그래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그물 쳐 놓는 거라. 그물 쳐 놓는 거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능력의 보호가.

요거만 간단하게 말하고 말 터이니까 자세히 들어요.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시험을 인하여」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안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요 시험은 무슨 시험입니까? 요 시험은 어떤 시험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세에 나타내기로 우리 몫, 우리 모가치, 우리 모가치 이 구원을, 우리 모가치 구원을 다 준비해 놨는데, 완전히 다 준비를 해 놨는데 준비해 놓은 이 구원은 무슨 구원인고 하니 사죄와 연결돼서 완전히 가지고 칭의와 연결돼서 칭의를 완전히 가지고 화친을 연결해서 완전히 가져서, 예수님의 피공로는 나를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마귀란 놈은 ‘네가 무슨 공로 있다고 하느냐?’ 예수님이 나 대신하신, 이 대속하신 이 사죄 칭의 화친을 확실히 내것으로 확실히 잡아 가지고 내것을 잡는 것, 내것을 만드는 것, 확실히 내것이 돼서 내것이 돼지는 것 말이오. 내것이 되어지는 이것이 우리가 입을 구원입니다. 입을 구원이오. 내것이 되어지는 것, 내것이 되어지는 것.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이 성령님, 이 성령님이 완전히 나와 하나가 되어지는 것, 이 성령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가 되어진, 하나가 되어지는 요것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어져 가지고, 성령님과 나와의 하나가 되어져 가지고 있습니까 앞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까? 어째요? 하나가 되어져 가지고 있습니까 앞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까? 하나가 앞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하나가 되어져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하나가 되어져 가지고 있어. 이거 잘 알아. 하나가 되어져 가지고 있어.

진리는, 진리도 우주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한 능력입니다. 또 우주를 만든 그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곧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이면 내나 성령과 꼭 같은 한 분이라 말이오.

한 분인데, 성령님은 전지 전능인데 그 전지 전능과 나와의 연결이 돼 가지고 있고 진리도 전지 전능인데 진리와 나와도 연결이 돼 가지고 있고 또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은 완전히 내것이 되어 가지고 있고, 대속은 내것 되어 가지고 있고 둘은 나와 연결되어 가지고서 나와 하나가 돼 가지고 있고 있는 건데, 있는 건데, 있는 이 사실을 자기가 있는 것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인 것을 알고 이것을 벗지 안하면 됩니다. 있는 것인 것을 알고 자기가 버리지 안하면 되는데, 이미 입혀 놓은 이것을 자기 것이 되어 있는 것인 것을 알고 벗지 안하면 된다 말이오.

벗지 안하면 되는데, 그러면 네것인 것을 네가, 네것이 되어 있는데. 네것인 것을 네가 인정을 하느냐? 또 지금 네것으로 네가 가지고 싶으냐? 네것이 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느냐? 네것 되어 있는 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것으로 이것을 가질라냐 이것을 버릴라냐 하는 그 시험이 우리에게 시험인 것입니다. 그 시험.

이거 잘못 알면 안 돼요. 그 시험이 우리에게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뭐이냐 하면 요 현실에서 그러면 네가 전능의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너와의 지금 이와같이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되어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하나 안 하나 그것을 시험해 본다 말이오. 또 네가 이 연결된 것을 좋아하나 이것보다 더 좋아하는 게 딴게 있나? 딴걸 좋아하나 이걸 좋아하나? 또 연결된 것을 네가 믿나 참 믿나 안 믿나? 믿나 안 믿나? 네것 되어 있는 전능에 너는 연결된 것을 믿나 안 믿나, 좋아하나 안 좋아하나, 이보다 딴거 좋은 게 있나, 이거 할래? 이라니까 이거 시험이라 말이오, 시험! 시험인데, 그러니까 이렇게 좋아하나 안 좋아하나 이걸, 또 믿나 안 믿나 시험을 하는데 거기에 지금 뭣이 작용하고 있는고 하니,시험하는데, 그러면 여러 각도로 말해야 되겠어.

그러면, 예수님의 피 성령 진리 이 셋과 나와의 그 연결되는, 요 셋이 구원입니다.

요 셋이 구원이오. 요 셋이 구원인데 요 구원은 어데 있느냐 하면 말세에 나타내기로 준비돼 가지고 있는 구원입니다.

이 준비된 구원은 이 구원은 어데 준비돼 가지고 있느냐? 예수님이 세 가지 대속을 하신 그 대속이 준비되어 있는 구원이요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감과 진리를 우리에게 허락했으니 그것이 예비되어 있는 구원이요 그 구원은 지금 내가 상속받아 가지고 그 구원은 내가 받아 가지고 있는데, 받아 가지고 있는데 요 현실에서 내가 요 구원을 팔지 안하고, 요 구원을 내가,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요 구원을 내가 인정하고 좋아하고 가지고 내 주지 안하면 됩니다. 믿고, 믿는 게 인정 아니요? 인정하고 좋아하고 가지고 내 주지 안하면 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시험을 할 때에 요것도 처음에 뽀스래기, 먼지만치 쪼그만한 거 얻고 또 그다음에 콩내끼만치 얻고 그다음에는 주먹덩이만치 얻고 그다음에는 자꾸 이렇게 점점 크게 해 가지고서 이제 진리, 진리와 다 연결되고 또 성령과 다 연결되고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과 다 연결이 되어지는데, 이 연결이 되어지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참으로 믿는지 안 믿는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자기가 가지는지 집어 던지는지 그 시험을 하게 되니까 그 시험이 지금 무진장으로, 대속의 공로도 영감도 진리도 무한함이 지금 내것으로, 내게 줄라고 예비돼 있으니까 그것을 내가 차차차 얻어 가지게 되니까 그 시험이 시험이 항상 그만한 시험이 되면은 얻어지는 것도 그만한 그것만 얻어질 것이고 차차 좀 큰 걸 얻을라면은 시험이 좀 클 것이고 좀 더 큰 거 얻을라면 시험이 점점 커질 것이고 점점 시험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시험이 커지겠지요? 어때요? 내가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그것을 자꾸 내가, 이 시험은 뭐이냐 하면 시험은 우리가 만드는 거 아니오. 우리가 이거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이 진리와 나와 하나돼 가지고서, 진리와 나와 하나되면 된 것만치는 전지 전능인데, 영감과 나와 하나됐으면 된 것만치는 전지 전능인데, 또 예수님의 대속과 나와의 연결됐으면 연결된 것만큼은 죄가 없고 완전히 의롭고 하나님과 화친된 이것인데 그러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이미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완전히 내것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요것을 현실에서, 내것 되어 있는 것을 내가 인정해야 되고, 믿음으로 제것 되지 안 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인정해야 되고, 인정해야 되니까 인정하나 안 하나, 그만, 인정 안 하고 ‘인정합니다’ 하니까 주께서 인정을 하나 안 하나 그 시험이 있어야 되겠소 없어야 되겠소? 고 시험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없어야 되겠습니까? 인정하나 안 하나 고 시험이 있어야 되겠소 안 있어야 되겠소? 여러분들 자꾸 이 이치를 따져야 돼요.

인정하나 안 하나 그 시험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없어야 되겠습니까? 있어야 되지요. 또 그러면 ‘네가 참으로 이것을 좋아하나 안 좋아하나?’ 그거 또 그 시험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좋아하나 안 좋아하나? 그거 또 시험이 있어야 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네가 이것을 내 주지 안하고 이것을 네가 그러면 잘 강직하나 안 강직하나 또 시험이 있어야 된다 말이오.

이것을 이 사실을 네가 인정하나 안 하나 시험이 있어야 되겠고, 좋아하나 안 좋아하나 하는 시험이 있어야 되겠고, 또 이것을 네가 잘 보존 보수 하나 안 하나 하는 시험이 있어야 되겠고, 그러면 여러가지지마는 한 서너 가지로 시험이 있어야 되겠다 말이오.

시험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요 시험이 있어야 되는데 요 시험이 차차 차차 자꾸 더 큰 것을 얻고 점점 더 하나님하고 밀접하게 자꾸 들어붙고 들어붙고 자꾸 이래 해서 이렇게 점점 완전하고 온전하고 더 능력 있고 더 크고 강한 완전한, 점점 가치가 높은, 가치가 높은 권위가 높은 이것을 자기가 더 많이 인정하고 자기가 더 믿고 더 좋아하고 더 소원하는, 그러면 그것이 차차 차차, 그 사람이 더 좋아하는지 덜 좋아하는지, 또 더 믿는지 덜 믿는지, 더 보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하는 그런 차이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차이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차이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그런데 그런 차이가 뭐이냐 하면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리와 영감과 피와의 이 하나되는, 이 하나됨을 말이지요. 똑 같이 줄 수가 없어. 똑 같이 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됨이 조금 줄 사람, 많이 줄 사람, 더 많이 줄 사람 이렇게 되니까 그것을 주는 데에는, 받아 가지고 나중에 잘못 사용해 버리면 그거 악화돼 버리고 말면 큰일나기 때문에, 처음에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것도 그런데 뒤에 가서 타락한 것은 그 몇천 배 더 타락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 시험해 가지고서, 그러면 너는 어느 정도 네가 귀하게 보겠느냐? 그러면 처음에는 네가 이 가치를 천 원만치 귀하게 여기느냐 만 원만치 가치로 여기느냐? 천 원 만치 가치를, 천 원보다 가치를 낫게 여기면은 그다음에 그것을 얻었고, 그다음에는 만 원을 가지고 시험할 때에 만 원보다 가치가 있다 하면은 만 원만치 얻었고, 억만 원어치를 시험을 할 때에 억만 원만치 그것보다도 이걸 더 귀하게 여기면 억만 원어치만한 그런 큰 것을 얻고 자꾸 이 양이 높아질 것 아닙니까? 높아지고, 또 믿는 것도, 믿는 것도 네가 어느 정도 믿느냐?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네가 믿는데 어느 정도 믿느냐 하는 것은, 믿지 못하게 하는 의심하게 하는 것이 조금 가서 시험해 가지고 조그만한 의심에서 똑 떨어지는 사람 있고, 열 명이 가 가지고서, 꼭 같은 의심을 주면은 의심이 오니까 아홉은 의심에 떨어져 버리고 하나는 의심하지 안하고 합격이 됐겠고 이렇게 자꾸 올라가는 거 아닙니까? 그거 모양으로. 시험이라 하는 건 그런 거라 말이오, 시험.

이 시험이 자꾸 돼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자와 나와의 연결된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그런 시험, 그러니까 우리의 시험은 차차 차차 점점 커지고 높아지고 자꾸 어려워지고 하는 것은 필연이오. 자꾸 커지고 높아지고 자꾸 어려워지겠다 그거요. 어려워지고.

또, 그러면 이렇게 여러가지 시험이 오는데 시험이 올 때에 그때에 “잠깐 근심하지 안할 수 없다” 그러면 근심하는 것 이 근심하는 것은 누가 근심을 합니까? 그 시험을, 시험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거 진리를 진리를 어기지 안할라고 영감을 어기지 안할라고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안할라고, 영감대로 살고 진리대로 살고 죄 안 짓고 의롭게 살라고 자꾸 이렇게 신앙 생활 할라 하니까 어려움을 줍니다.

그러면 어려움을 주기는 누가 어려움을 줍니까? 어려움을 주는 건 누가 어려움을 주지요? 그 어려움을 주는 것은 악령 악성 악습이 어려움을 주는데 악령 악성 악습이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를 어려움을 줍니다.

그러면 악령 악성 악습이 온 세상은 저희 것이기 때문에, 온 세상은 원죄의 것이요 본죄의 것이요 악령의 것인데 온 세상을 거머쥐고 군대를 삼아 가지고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이렇게 방해를 합니다. 살지 못하게.

그러면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을 지켜서 이 세 가지 이미 얻은 구원을 내 주지 안하고 이 구원을 내 주지 안하고 이 구원을 보수할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어려움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인해서 어려움이 오는데 우리가 구원을 지금 만들라고 함으로 어려움이 옵니까 이미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내 구원이 되어져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을 내가 뺏기지 안하고 보수할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이 옵니까 어떤 어려움이 옵니까? 이것도 여러분들이 지금 자꾸 여기서 말하니까 알지 지금 보수할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이 온다는 이것이, 여러분들이 자꾸 배워 봐. 다른 신학교도 모두 좀 다니며 봐 보라 말이오 지금, 어떻게 돼 가지고 있는가? 요것도 아주 없는 겁니다, 지금. 뭐 없는 걸 새로 말하기야 짜다라 쉽지마는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가 그게 문제라.

이걸 구원을 우리가 만들라고 해서 어려움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다 내것으로서 준비해 놓은 것이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니까 이 구원이 준비가 다 돼 가지고 있소 안 돼 가지고 있소? 다 돼 가지고 있다 말이오.

이래도 물으면 몰라. 이걸 얻을라고 하니까 이 구원을 뺏기지 안하고 내것 만들라고 이렇게 하니까 내것은 현실을 통해 가지고 내것이 돼지지 현실 안 통하면 내것이 안 되는데 현실에 내가 부인하면은 내것됐던 것을 벗어 버리고 현실에서 내가 인정하고 벗지 안하고 보수하면 내것 되고 이런 건데, 이 구원을 내가 지금 내것 만들라고 이렇게 애를 쓰고 뺏기지 안할라고 이래 하니까 방해하는 자는 악령, 악성, 악습, 세상이 들어서 방해를 합니다.

방해를 하는데, 온갖 방해를 합니다. 방해는 그래 하는데 “근심하게 되지 안할 수 없었으나” 하는 근심은 누가 합니까? 근심은 누가 해요? 이웃 사람이 합니까 다른 사람이 합니까 그 자신이 근심합니까? 자신이 근심합니다, 자신이.

자신이 근심을 하면은 자신 속에 근심하는 자가 누굽니까? 그러면 자기는 전부 이 구원을 안 뺏길라고 보수할라고 하니까 이렇게 여러가지로 환난이 어려움이 오니까, 어려움이 오니까 그만 지금 믿음을 지켜서 이 구원을 잘 보수하나 안 하나 이렇게 하는 문제에 있어서 내 속에는, 내 마음 말이오. 내 마음과 몸은 ‘그라면 아이구 이거 그만 이 구원은 못 가지겠다’ 구원을 가지고 싶은 사람과 이 구원을 그만 내 주고 싶은 사람과 그 두 사람이 있습니까, 구원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만 있습니까, 내 주고자 하는 사람만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시험을 당해서 겪어 볼 때에 어떻습디까? 두 사람. 두 사람이 있지요. 이래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그 두 사람 있는 사람은 하나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벌써 과거라는 그 현실이 지나간 과거에서 벌써 구원을 벗지 안하고 자기 구원을 삼았기 때문에 그것은 심신이 성화된 그 부분이라 말이오. 성화된 부분.

그 심신의 기능이 성화된 부분이 있고 성화 안 된 부분이 있으니까 성화된 부분은 ‘그래도 우리가 지켜 나가야 된다. 이 구원을 염려하지 말고 이 구원을 우리가 뺏기지 안하고 구원을 보수해야 된다.’ 내 속에 구원을 보수해야 된다는 요 마음이 속에 있는데, 또 ‘아무래도 이 보수하면 큰일났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요번에는 할 수 없으니까 요번에는 항복하고 이 구원을 내 주고’ 막 남편이 믿는다고서 걸치고 타고 앉아 가지고 칼로 이래 들이 밀면서 ‘너 예수 믿을래 내놓을래’ 자꾸 이와같이 지금 하니까 속에서는 지금 ‘아무래도 그래도 예수 안 믿는다 소리 못 하고 예수 믿는다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이렇게 하니까 ‘이때는 할 수 없다.

이때는 그만 내가 안 믿겠다고 하고 뒤에 새로 잘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라는데 내가 들어 본 대로는 잘 믿으면 되지 않느냐 하고서 패전한 사람으로서는 뒤에 회복하기가 복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와 주시요.

이래서, 그러면 두 사람이 있다 말이오. 두 사람이 있으니까 하나는 ‘신앙을 지키자’ 하나는 ‘어라, 안 됐다. 신앙을 양보하자.’ 이 두 사람이 자꾸 이래 있는데 누가 근심하느냐 하면은, ‘근심하지 안할 수 없었으나’ 근심하는 것은 내 속에 아직까지 악령 악성 악습에게 사로잡힌 내 심신의 기능 그것이 근심합니다. 알겠습니까? 그것에게 사로잡힌 그 심신의 기능 그것이 근심하는데. 왜? 그거는 마귀와 악령 b성 b습에게 꼬임을 받아 가지고, 지금 ‘네가 이 믿음 지키면 안 된다. 믿음을 지키면 안 되니까 이거 이때는 양보하고 뒤에 믿음 지키자.’ 자꾸 이렇게 하는 그 심신의 기능이 있는 그것은 악령 악성 악습에게 꼬임을 받아 가지고 그라고 있다 말이오. 꼬임받아 그라고 있는데, 꼬임을 받아 가지고 그게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신앙을 지킬라 하니 그게 죽을 지경이라. 그게 죽을 지경인데, 이라니까 그 위에 배경은 뭐이냐 하면은 악령 악성 악습이 막 달라들어 가지고서 ‘아무래도 네가 요번에 신앙을 지키지 못한다. 신앙을 양보해라.’ 자꾸 이렇게 한다 말이오. 신앙을 양보하라 양보하라 이라는데, 이라니까 이 속에서 성화된 것은 무슨 걱정하느냐? 성화된 것은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그만 나가면 된다.’ 이 마음이 있는데 또 요쪽에는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된다' `안 된다' 요 둘이 있다 말이오.

둘이 있는데 이라니까 뒤에 악령은 자꾸 ‘그라면 네가 안 된다.’ 이래 자꾸 이라지, 이라다가 이제 그만 패전을 해 버렸습니다. 패전을 하면은 어찌 되느냐? 패전을 하면은 속에 성화된 것은 크게 근심 걱정을 하고 이제 그 성화되지 안한 그 부분은 패전될 때는 좋습니다.

좋으나마 뒤에 그것이 인제 지옥의 고통으로 자연히 하나님과 끊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고통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다가 신앙 생활에 실패를 하고 난 다음에 사람이 후회되고 그만 힘이 안 나고 기분이 안 나고 그 사기가 팍 죽어지는 그것은 뭐이냐 하면은 패전한 그 심신의 기능의 해독의 영향이 와 가지고서 그와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라다가, 근심하다 고 현실에서 착 이겨 버립니다. 그 현실에서 그만 믿음을 지켜 가지고 이겨 버렸습니다. 이겨 버리니까 “처음에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했는데, 그 승리를 하고 나서이기고 나니까 기뻐하는 것은 누가 기뻐하는가? 기뻐하는 것은 악령 악성 악습에게 꼬임받아 가지고 그것의 이용물이 되어 있던 자가 자꾸 그 현실에 그 이용물을 할라 하고 한 쪽에서는 믿음 지켜서 그걸 벗어나라 하고 이래 쌓다가 이라니까 이게 되게 근심을 했다가, 착, 이 믿음을 지켜 착 벗어나 버리니까 이 악령 악성 악습이 훌떡 벗겨져 버리고 나니까 이게 정신 차리고 나니 성화된 그 심신의 기능이 한없이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도다’ 한없이 기뻐하고,

또 이미 성화되어 있는 그 기능도 기뻐합니다. 이겨라 져라 이겨라 져라 이래 쌓고 있다가서 척 이기니까 그 이미 성화된 기능도 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하고, 그러면 거게서 죽은 자는 누굽니까? 죽은 자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그만치 그 세력이 죽어져 버렸습니다. 세력이 죽어져 버렸고, 그만치 심신의 기능은 뺏겼습니다. 심신의 기능은 뺏겨서 이래 점령이 돼졌습니다.

이런데, 그렇게, 이러니까 이런 신강 가운데에 이렇게 싸움을 하고 이래 있는데 그때에 자기가 이 믿음을 지킬라고 하면 세상 시험이 얼마든지 오지 않습니까? 여러가지 오는데, 고 시험이 오는데 ‘능력의 보호를 입었다’ 하는 그 능력은 무슨 능력인고 하니, 무슨 능력인고 하니 그 능력은 자기가 그 시험을 당해 가지고 신앙 싸움을 싸울 때에, 신앙 싸움을 싸울 때에 원수 악령 악성 악습인 이 세상에게 해를 보지 안하도록, 어떻게 해도 손해보지 안하도록, 상하지 안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이 보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에 현실에 당한 접전 고것만 해 가지고 죽은 자 죽고 산 자 살고 요것만 요렇지 거게서 다른 피해는 하나도 보지 못하고 또 고게서 본인이 믿음을 지킬라고 요렇게 할 때에, 믿음을 지킬라고 요렇게 할 때에는 요 악령은 생각하기를 ‘요놈이 믿음을 지키니까 당장 단번에 어떻게 그만 전멸시키는 고런 지금 큰 박해를 주면.’ 싶으지마는서도 고 능력의 보호가 절대 그 시험에 필요없는 그런 시험은 하지 못하게 해.

자기 구원에 필요 없는 그 시험이나 박해나 방해나 그런 것은 하지 못하도록 딱 요렇게 조절해 가지고 있어서 자기 그 현실에서 구원 이루는 데에 필요 있는 정도의 어려움만 닥치도록 하고 그 필요 있는 정도의 어려움만 닥치게 할 때에 나만, 나만 그 시험을 이길라고 믿음을 가지고 나만 달라들면, 나만 양보하지 안하고 나만 달라들면 다 되지 내가 달라드는 그 내 능력을 해할 자는 하나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딱 보호하고서 조절을 하고 있다 그말이오.

조절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에 내가 그런 시험을 당하고 있으면 악령은 뭐 얼마든지 해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이렇게 하지마는 우리 시험에 그 정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 시험에 꼭 알맞는, 알맞는 그 정도의 박해 그 이상은 당하지 안하도록 요 능력이 보호하고 있고, 나만 힘을 쓰면은, 나만 힘을 쓰면은 시험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의 협조가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능력의 보호는 우리가 그 시험을 당할 때에 내 구원에 필요없는 시험 닥치지 안한다는 거, 외의 시험 닥치지 안한다는 거, 내 구원에 필요 외의 그 박해라 하는 것은 털끝만한 것도 하지 못하도록 요 능력이 다 감시하고 감독하고 있다는 것.

또 내가 거게서 요 시험을 이길 때에 그 필요 없는 외의 걸 가지고 그들이 지나치게 우리에게 해하는 것도 하지 못하도록 딱 조절한다는 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내 정도에 맞춰서 감당할 수 있는 그만한 정도로만 딱 시험하도록 하지 그 이상은 하지 못하게 해요.

예를 들면은 욥에게 시험할 때도 ‘네가 그 시험을 하되 어데까지는 시험을 하는데 그 생명은 해하지 말고 다른 거는 시험해라.’ 꼭 시험에 ‘요만치 있으니 요만치 해라.’ 한정을 해 가지고 하나님이 정해 주시지 한정 이상은, 저거들은 뭐 대번에 시험을 많이 해 가지고 콱 절단내면 싶으지마는 한정 이상을 하지도 못하고 그 시험의 정도, 도수도 조절하고 외의 것도 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시험을 할 때에 나만 힘쓰면 거게서는 백전 백승으로 다 이길 수 있도록 내 힘으로 할라면 이길 수 있는 그런 걸 주지 이길 수 없는 그 이상을 주지 안하고 이길 수 있는 정도의 것을 주도록 하는 그 조절하고, 조절을 하고 감시를 하고 또, 조절하고 감시하고 또 우리만 힘쓰면 그 승리를 이루도록 또 협조하고 보호하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능력의 보호를 입었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심하지 안할 수 없었으나” 근심하는 그 이유는, 왜 믿음 지킬라 할 때에 근심하느냐? 믿음을 못 지키구로 방해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방해하는 자는 누구냐? 방해하는 자는 내 밖에 악령 악성 악습하고 온 세상 죄악의 세상이 똘똘 뭉쳐 가지고서 방해를 하는데 방해를 하면 그 죄악이, 나는 요 주먹덩이만한데 그 방해하는 것이 집채만한 무더기면 까뭉케져 버리고 깨져 버릴 것 아닙니까? 이 보호의 능력이 그것을 외의 걸 오지 못하게 합니다.

딱 조절해서 그 감당할 시험만 주지 감당치 못할 그런 시험은 오지 못하게 이걸 딱 조절을 해서 요렇게 하고, 또, 못 오게 조절을 하고또 거게서 우리가 시험을 이길라고 싸워 나갈 때에는 우리의 힘에 알맞게 하고, 그걸 이 능력이 조절하고. 알맞게 하고, 또 나만 할 일을, 내게 있는 힘만 다 기울이면 반드시 그 능력이 보호해 가지고 승리하도록 한다 하는,

능력의 보호는 조절하는 능력, 또 거게서 외의 박해를 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능력, 또 우리를 도와 가지고서 그 일을 반드시 승리하도록 하는 그 능력, 요 세 가지 역할을 하기 위해서 능력의 보호가 있는데, 잠시 근심하는 것은 왜 근심하느냐? 이제, 오는 것은 전부 시험인데 그 시험은 뭐이냐? 시험은 국민학교 일학년 들어갈라면 일학년 시험, 고등학교 들어갈라면 고등학교 시험, 대학 들어갈라면 대학 시험, 시험이 자꾸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거 모양으로 차차차 우리가 신앙 생활 해 나가면은 자꾸 시험이 높아져갑니다.

낮아져가는 아니라 자꾸 높아져가요.

높아져가는 것은 무슨 시험이냐? 그 시험은 무슨 시험이냐? 네가 참으로 전지 전능의 진리와 영감과 네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또 예수님의 이 세 가지 완성해 놓은 그것은 네 것인데 네가 믿느냐 안 믿느냐? 이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시험하는 것이요, 또 뭐이냐? 네가 그러면 이것을 좋아하느냐 이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 그게,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 주시는 건 주먹덩이만한 구원을 주시면서 이 세상은 집채 무더기만한 시험을 주면은 누가 이 구원 얻을라고 집채 무더기만한 거 손해 보겠습니까? 안 본다 말이오.

당신이 그때에 주실라고, 내 현실에서 주실라고 하는, 그 주실라고 하는 구원 그 중량과 세상에서 보이는 그 중량과 동등 중량, 동등 중량의 것을 우리에게 딱 주면은 그때, 이 구원의 중량과 이 중량을 봐서 중량 높은 데로 기울어질 거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 두 중량을 같이 하는데 이 구원의 중량은 영원 무궁한 것이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이 구원과 두 중량을 갖출 때에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중량이 좀 높으고 저쪽 세상 중량이 조금 가벼운 그것을 요래 딱 해 주는데, 구원의 중량을 가치를 안다고 하면은 요 가치를 버리지 안할 것이고 요걸 믿지 안한다면은 요거 버리고 세상을 취할 수 있도록 요 중량을 비중을 따져, 비중을 딱 해 가지고서 요렇게 해 줄 때에 그때에 자기가 ‘이것보다 나는 이것을 취하겠다’ `이것보다 이것을 좋아한다’ ‘이것보다 이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나는 이것을 가지지 안하고 이것을 가지겠다’ 또 ‘나는 이 세상에 관계되는 그것을 내가 믿지 안하고 하나님을 믿는다’ 요 믿음 시험, 가치 시험, 보수 시험 요 시험을 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이 이런 모든 현실에서 어려움 당하는 그런 시험들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전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시험 치는 시험 치르는 거라. 시험을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거게는 시험을 통과하지 안하면 다 낙제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믿으면 성공되고 믿지 안하면 실패되고 더 이 구원의 가치를 크게 여기면 다 승리하고 구원의 가치를 적게 여기면 다 실패하고, 구원의 가치를 보수하면 그 세상 것 내놓고 세상 걸 좋아서 보수할라 하면 이거 내놓고, 어느 것을 보수할래?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이냐?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을 네가 보수할 거냐,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을 가치로 여길 것이냐, 어느 것보다 어느 것을 믿느냐, 어느 것보다도 어느 것을 더 크게 여기느냐? 요거 시험하는 것이니 시험하는 그 시험에서 떨어지면 둘째 사망으로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고 거게서 이기면은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거 닥칠 때에는 반드시 “잠깐 근심하지 안할 수 없다” 왜 근심하느냐? 대적이 많아서 방해물이 많기 때문에 근심한다. 방해물이 많은데 왜 근심은 누가? 근심은 네가 하는 거 아니냐? 방해물이 많은데 왜 네가 근심하느냐? 내게 근심하는 것은 성화된 것은 자꾸 좋아하고 자꾸 하라 하지마는 성화 안 된 미성화의 것이 근심하고 있다.

미성화의 것이 근심하는 건 왜 근심하느냐? 미성화의 것이 근심하는 것은 이유는 악령에게 꼬여 가지고, 자꾸 악령에게 꼬여 가지고 있다 말이오. 악령에게 꼬여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성화된 이 심신의 기능은 이렇게 믿음 지키는 게 제 망하는 줄 알고 저 죽는 건 줄 알기 때문에 지금 안 할라고 근심하고 이라다가, 어쨌든지 믿음을 지켜서 그만 착 이기고 나서 보니까, 거짓말쟁이 이놈을 뚝 떼고 나서 새 세계를 척 들어와 보니까 내가 이제까지 속았다 싶어서, 그러니까 이제 거게서 벗어난 심신의 기능은 거짓말쟁이에서 탁 탈피를 하고 나와 보니까 기쁘고 즐겁고, 이미 승리해 가지고서 후원하던, 이미 구원 얻어 가지고 있는 그 심신의 기능은 협조하다가 이기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거게서 마귀란 놈은 이제 패전하고 완전히 그 심신의 기능은 뺏겼습니다. 완전히 뺏겨.

그러면 우리 현실은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이 이 현실에서 나의 심신의 기능을 완전히 뺏기느냐? 이제 악령 악성 악습이 내 현실에 내 심신의 기능을 완전히 뺏겨서 이 피와 성령과 진리의 것이 되느냐, 피와 성령과 진리가 뺏겨서 완전히 악령 악성 악습의 것이 되느냐 하는 것이 판정되는 것이 이거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처음에는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안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하는 그 작용은 어데서 생겨졌느냐? 우리 심신의 기능이 구원 얻은 것도 있고 안 얻은 것도 있고 이제, 이것이 자꾸 이게 판결이 안 났으니 미결로 있으니까 저쪽에는 제 말 들을라고 야단치고 이쪽에는 이쪽 말 들을라고 야단치고, 이러니까, 이제 이미 성화된 것은 이것이 패전할까 걱정하느라고 협조하느라고 근심하고 또 이것은 실상 그놈에게 꼬여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겠다 싶어서 근심하고 이렇게 근심하다가 딱 승리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크게 기뻐하도다” 하는 이게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밤에, 이거 뭐, 여러분들이 새겨 알아야지 자꾸 이런 말 해야, 통하지 안하니까 힘이 잔뜩 든다 말이오. 통하지 안하니까 힘이 잔뜩 들어요. 그래 이걸 내가 설교할라고 몇 번 하다 또 안 되고 또 안 되고 도무지 통하지 안하기 때문에 이래, 이거는 행하지 않으면, 행하면 그만 말만 하면 척 다 통해 버리요.

이런데,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었다” 하는 이 능력의 보호는 아까 말하기를 줄을 타는 데 밑에 이 그물을 태여 놓고 거기다가 푹석한 솜을 가득 해 놨기 때문에 떨어져 봤자 상하지 않는다 그말이오. 이렇게 우리를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 말이오.

그 말은 그거 뭐이냐 하면은 거게서 다른 것이 상하지 않게 조그마치라도 우리 정도의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지 안하고 감당할 그 조절, 조절하는 그물이라.

조절하는 능력이요, 조절하는 능력이요 나만 힘쓰면 협조하는 능력이요 마귀란 놈이 암만 월권할라 해도 월권하지 못하도록 다 조절하는 능력이요 우리를 협조하는 그 능력이요 승리케 하는 능력이라 말이오. 이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가르칠 때에 여러분들에게 힘이 들고 이 말이 안 나가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믿음이 없다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서 자꾸 이래 살지 앞으로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예수 믿으면 죽인다’ 하는 이런 것이 올 때를 생각하지 안했기 때문에 여게 대해 탕탕 깜깜하기 때문에 이 설교하니 깜깜해. 내가 이거 설교가 더듬어 못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평생 생활이 이것이고 밤낮 기도하는 게 이건데 왜 내가 더듬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니 이거 참 그 발표하기가 힘이 들고 알리기가 힘이 든다 말이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어도 그저 덩더꿍이 믿음이지, 앞으로 ‘예수 믿으면 죽인다.’ 그러면 ‘죽인다는 이 총 앞에서 내가 어떻게 믿나?’ 또 `고문과 고형을 당하는 데서 어떻게 믿나?’ 이것을 지금 자기가 예수 믿어서 어려움을 당해 본 사람은 이거 뭐 말할 때에 그만 애가 터지지, 자꾸 쑥쑥 말하지 안하니까 애가 터지지마는 이제 처음 믿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라 그말이오.

어짜든지, 우리는 앞으로 이 시험이 닥칠 때에 그때에 내 속에 두 놈이 있는 걸 알아야 됩니다. 내 마음이 마음 하나는 이렇고 하나는 이렇고 두 놈이 내 속에서 싸우는 걸 알아야 돼요. 내 마음이 둘이라 그말이오. 내 마음이 둘이고 내 육체의 기능도 둘이라요. 둘이 있다는 거.

있는데 그때에 오른편에는 피와 성령과 진리가 나를 이렇게 협조하고 있고 왼쪽에서 악령 악성 악습이 협조하고 있는데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한 그 구원은 무슨 구원이냐? 다 이루어 놓은 이 구원인데, 현실에서 말이요, 현실에서 내 심신과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과 내 현실에서 심신의 기능이 찌그르르르 그러며 딱 들어붙는 요것이 현실이라 그말이오. 요게 현실.

요 현실 지금, 요것이 이래 가지고 이 떡 들어붙으니까 이제 이것이 돼 버리고 말고 들어붙으니 돼 버리고 말고 이것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인데 이 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절대 능력이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내 구원에 필요한 양만 하지 감당 못할 그런 시험은 오지도 안하고 필요한 양 그 이상은 털끝만치도 마귀가 해하지를 못하게 해요.

내게 유익된 그 어려움만 주고, 유익 그거는 안 하면은 이 상속의 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양만 하지 그 외에 양은 우리에게 주지를 않는다 그거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요새 세상 복, 어서 이 세상 복 받아 가지고서 천국 복 받도록 하자 하는 그 말은 세상 복 받고서 살라 그말 아니요. 세상 복을 받아 보면은 경험해 보면 알아.

경험해 보고 이제는 천국 복을 위해, 천국 복은 뭐이냐?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이 다 바쳐지는 것이 천국 복이라.

이러니까 어서 신앙 경험 해 가지고서 이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다 순교 순생자들이 다 돼야 돼요. 이 신앙을 준비해야 돼요. 주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을 사람.

자, 주님을 위해서 생명 내놓을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주님 위해 죽어도 믿을 사람! 생명 내놓을 사람! 아! 됐어. 저 뒤에 안 든다. 주님 위해 생명 내놓을 사람 손 들어 봐요. 소유와 몸과 이 모든 소유 몸 생명이 다 절단나도 예수님 내 주지 안할 사람 손 들어 봐요. 들어요!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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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중풍병자의 표적/ 마태복음 9장 1절-8절/ 1980. 12. 28.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