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07:32
죽으심과 살으심에 연합
1982. 5. 30. 주후
본문:로마서 6장 5절~7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먼저 되어진 것만치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자가 됩니다.
우리는 현실 현실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는 이것을 노력하고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노력의 순위는 먼저 죽은 자 되는 노력이요 그 다음에는 산 자 되는 노력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상상이 아니고 또 점차적이 아니고 단번에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완전히 죽으심이요 아주 죽으심이요 영원히 죽으심이요 완전히 죽으심이오. 우리의 영원한 사망을 대신하셔서 영원한 사망을 완전히 사망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미정에 있거나 미결에 있거나 아직까지 미수에 있는 것 아니고 완전히 죽어서 끝났습니다. 끝났는데 여게서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살려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는 그리 될 것을 예언적으로 선포한 것이지 예수님의 심신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죽지 아니하셨고 또 예수님의 그 영은 죽지 않았습니다. 영은 대속물로 여전히 끝까지 기도하셨지 죽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대속 제물로 바친 바 되었으나,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담당해서 이렇게 죽으셨으나 실상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은 예수님의 신성과 영이 같이 죽음의 고난에 동참을 했지마는 둘은 고난만 당했지 죽지를 않았습니다. 죽일 수가 없습니다. 신성도 죽일 수가 없고 예수님의 영도 죽이지를 못합니다.
왜? 예수님의 인성이 범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영으로는 하나님과의 결합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 주격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영은 죽는 데 이르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이 죽으심에 우리가 연합한 자가 되는 것은 이것은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은혜로 벌써 주격 위치에서 정죄도 다 받고 또 사죄도 받고 칭의도 받고 중생했기 때문에 정죄니 형이니 죄니 하는 과정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을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영은 벌써 죄와 상관이 없고 또 정죄와 사망과 상관없는 하나님과 결합되어서 영생을 가진 것이 우리의 영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을 이룰려고 하는 것은 이 혼과 몸의 구원을 이룰려고 합니다. 마음과 몸의 이 구원을 이룰려고 지금 노력하는 것이지 영의 구원을 이룰려고 노력하는 것 아닙니다.
다만 영은 그 실력을 갖출려고 노력하고, 이 육은 구원을 얻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육이 구원되는 것은 육이 헛된 것에게 복종하는 것, 자기 주격이 아닌 것에게 복종하는 여기에서 자기 주격에게 복종하는 이 혼과 몸이 될려고 노력을 하고, 중생된 영은 자기의 소유인 마음과 몸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영이 인도할 때에 인도를 받으면 그 인도 받은 것만치 그 기능은 연습해서 연성을 했기 때문에, 그 현실에서 시작이며 끝이 되는, 그 심신의 개별적으로 그 생사가 결정되는, 구속을 받은 후 처음으로 구속입은 행위를 함으로 구속이 완전히 자기에게 입혀지는 이 순서는 현실이라는 한 번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영의 지도를 받으면 영에게 속하고 영은 그것을 다스릴 수 있고, 하면 영원 무궁토록 영이 그 심신을 이용할 수 있고 그 심신은 영에게 이용을 당해서 지배를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이 우리 정신에게 연결되어서 정신에게 지배를 받고 이용이 되면 그 정신대로 이것이 살아서 가치있는 일 하지마는 이 몸이 그 정신에게 지도를 받지 아니하고 이 몸 제대로 날뛰면 그 사람을 가리켜서 정신 이상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몸은 산산히 깨지고 말 것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금 구원을 노리고 있는 것은 이 심신의 구원을 지금 우리가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심신은 법적으로는 살았지마는 실상은 죽어 있는 것이, 법적으로는 살았고 실상으로는 죽어 있는데, 현실에서 법적으로 산 이대로의 산 생활 한 번만 하면 영생입니다. 영원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에서 법적으로 산 이것이 그 산 생활을 하지 못할 때에는, 현실에서 ‘산 생활을 네가 하겠느냐 죽음으로 돌아가 죽음의 생활 하겠느냐? 둘 중에 결정을 해라.’ 할 때에 그 현실에서 옛사람 죽음에게 소속하면 둘째사망 영원한 사망을 당하고, 이 현실에서 법적으로 산 이대로 삶에 속해서 현실을 통과하면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결정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이 심신은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고, 영은 자기의 심신을 영원히 자기 것을 삼느냐 빼앗기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 빼앗기면 영은 그 몸의 형체는 자기의 것이라 부활해 가지고 무궁세계 가 있지마는 그 심신의 기능은 세상에서 다 빼앗겨 버리고 다 도적맞았기 때문에 그 영은 무궁 세계 가 가지고 무능한 육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쓸모없는 육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영계는 마음이라는 자기 지체를 기구로 가지고, 마음이라는 기관을 가지고 영계를 활동하고, 이 몸이라는 기관을 가지고 물질계를 활동하는데 아무 거기 활동하지를 못하니까, 바다에는 배로 가야 되겠고 공중에는 비행기로 가야 되겠고 육지에는 구루마나 차나 걸어가야 될 터인데 아무 배가 없으니까 바다에는 있어도 자기에게는 통용을 못하는 소용없는 바다가 되어 있고, 공중이 넓지마는 비행기가 없으니까 공중에는 자기에게는 소용없는 것이 되고, 좋은 대로가 있지마는 뭐 차가 없으니까 꼬박 꼬박 걸어나 다닐까 그 길이 자기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처럼 무궁세계가 그렇게 됩니다.
어떤 영은 모든 것이 구비해서 영계도 물질계도 척척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하고 또 그 영은 다른 사람의 천인 만인의 마음 속에도 마음대로 활동합니다. 천인 만인의 마음 가운데도 그저 제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모든 사람 마음 가운데에 할동합니다. 하나도 거리낌이 없이 땅위에 살았기 때문에 어디든지 무상출입입니다. 또 하나님 안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 생활을 하나도 안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막히고 막히는 생활, 전부 이 배타적인 생활만 일생을 한 사람은 영계 가서 다른 사람이 다 자기 속에 출입하라고 환하게 문을 열어놨지마는 제게 거리껴서 출입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자유는 영계에 거기 자유하는 것도 좋지마는 그것보다도 모든 천군 천사들 속에 자유하는 것이 그것이 더 좋습니다. 천군 천사들 속에, 단체 속이 아니라 천군 천사의 그 본체 속에 자유로 활동하는 것이 더 좋고,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성도들 속에 자유로 출입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성도들 속에 자유로 출입하는 것보다 무한하신 하나님 속에 자유로 출입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 안에 자유로 들어가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자유 상통을 노력하는 것이 지금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영은 자기의 수족을 만들려고, 자기의 기구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고 영은 깨끗하기는 깨끗한데 영의 실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또 부활은 다 같이 부활하는데 심신의 기능이 차가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 차이있는 심신의 구원 이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이래서 고린도전서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너희들이 이 터 위에 집을 짓되 조심해서 지으라. 또 다른 터는 아무도 닦지 못하고 다른 터는 없다. 그러면 그 터는 무엇인가? 그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의 이 공로가 우리의 터가 되고, 이 공로를 통하여 들어가면 삼위일체가 우리의 근본이 됩니다. 포도나무 둥치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는 우리의 영원히 사는 생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만물과의 사는 유일한 법칙이 하나님의 뜻인, 당신의 뜻인 곧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구원 이루는 데에는 먼저 죽어야 하고 또 그다음에 살아야 합니다. 죽지 아니하면 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 되어 죽었으면 또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산 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것은 실상은 실상으로 우리가 죽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법적으로 이치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실은 죽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서 구속하신 그 구속을 내 것을 삼고 보니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가 동참해서 죽은 자 된 것이 이 법칙에서 죽은 자 됐고, 이 이치에서 죽은 자 됐는데, 죽은 자 된 이것을 우리가 알고 인정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지식하는 것이요, 죽은 자 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이것이 지식으로 하는 것이요, 우리가 주님이 대속하신 이 기본구원을, 기본구원에 이렇게 대속하신 구원을 우리가 지식하고 바라보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인정은, 인정은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실효는 거두지를 못했습니다. 건설구원에 있어서는 실효는 거두지를 못했고 다만 마치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이 옆에 있는 거와 같습니다. 먹으면 그만 배부릅니다. 또 추운 자에게 따뜻한 의복이 옆에 있는 거와 같습니다. 그만 입으면 됩니다. 입으면 되고 먹으면 되는데 입고 먹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식하고 인정하고 이래 있으나 실상이 되어져야 됩니다. 실상이 되어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대속은 법적이 아니고 우리 건설구원에 실질적으로 실효있게 우리에게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생 알고 인정하고 소원하고 노력하고 했다 할지라도 실지로 죽지 않았으면 건설구원의 밑천은 없습니다. 죽었으면 죽은 것만치 그 다음에는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제일 어려운 것은 뭐이냐 하면 실상으로 죽는 자 되는 것이 이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이것은 언제 되느냐? 현실에서, 현실에서, 죽은 자 되고 안되는 것이 현실에서 판정나는데, 현실에 죽은 자 되고, 산 자로 죽지 않고 산 자로 이렇게 판정나는 것이 현실인데, 안 죽을려고 애를 씁니다. 또 제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죽은 자 되어야 될 줄도 알고 되기를 소원도 하면서 현실에서 죽어 버리면 되는데, 현실에서 죽어 버리면 되는데 죽지 않으려고, 죽기를 싫어해서 애를 쓰는 이 두 가지 씨름이 있는데 그럴 때에 현실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해서 죽어버리느냐 또 안 죽고 내대로 사느냐 이것이 이 현실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싸울 싸움을 다 싸웠다’ 하는 그 싸움은 이 싸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체의 다른 지체가 있어서 이놈이 나를 끌어다가 사망의 법에 나를 복종시키고 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두 사이에 끼어서 내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지체하고 있다” 빌립보 1장에 말씀했고 그렇게 로마서 7장에 말씀을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 현실에서 그만 죽어 버리면 됩니다. 이 현실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버리면 돼. 죽어버리면, 내 전체가 죽지 아니하지만 그 현실에 해당된 내 요소는 내 요소가 예수님과 함께 죽느냐 또 예수님과 함께 죽는 그것을 버리고 과거 내대로 사느냐 이것이 결정되는 그때에 죽으면 그것은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즉시 살아나는 것이 그 다음 순서로서 살아나는 일이 자기에게 봉착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 현실에는 또 살아나는 순서가 바로 이루어집니다.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는 그 다음 현실이지만 형태적으로는 바로 그 현실이 그 현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 이 연습을 해 가지고 죽는 일을 성공할려고 애쓰는 것이 일차적이요 또 예수님이 부활하심에 연합한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 순서적으로 둘째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 이것이 실상으로 죽어야 되는데, 내일 죽을 것은, 내일 죽을 요소는 오늘에는 죽기로 암만 결심해도 그것은 예정이요 예상이요 상상이요 그것이 죽는 때는 그 현실이라는 현실을 딱 당할 때 그때라야 죽습니다. 그때 죽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전부 죽는 시간이요 죽는 장소요 죽는 모든 조건들이요, 또 사는 시간이요 사는 장소요 사는 조건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죽으심에 우리가 연합해 죽는 자 되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떻게 해서 죽었는가 그것을 우리가 이제는 알아야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 가지고 그대로 죽겠습니다. 예수님이 모로 누워서 죽었으면 우리도 거기 따라서 모로 누워 죽어야 되겠고, 예수님이 달려 죽었으면 우리도 달려 죽어야 되겠고, 예수님이 찢다 죽었으면 우리도 찢다 죽어야 예수님의 죽음에 연결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두 가지로 죽어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이 두 가지 죽음으로 죽음이 끝나 버렸습니다. 죽음이 미결된 게 아니고 죽어서 끝나 버렸소. 죽어 버렸소. 죽어 끝났어. 완전히 죽어서 끝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죽지 아니하고 기절했다가 살아난 것 아닙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리고 이것은 다시 새생명으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새생명으로 일으키신 것입니다. 죽은 때의 죽은 그 생명 그것 아닙니다.
죽음에 완전히 끝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으심이 이루어졌지 죽으심이 끝났지 않았으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끝날까지는 아직까지 미결입니다. 끝났을 때에 완성됐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두 가지 죽음입니다. 양면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한 번 죽으셨는데 그 죽으심은 양면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것이 양면 역사를 완료하신 것이 죽으심입니다. 양면 역사의 시발은 언제 시발하셨는고 하니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자존하신 사랑, 자존하신 기쁨, 자존하신 뜻, 자존하신 그 모든 그 자존성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 정하셨는데 이 목적은 존재적으로는 자존하신 분이 계셨고 그 다음에는 둘째로 하나님의 목적이 존재하게 됐는데, 이 목적이 존재하기 전에 자존하신 이 하나님, 하나님에게,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실 때에 당신의 소원이 계셔서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이 결정됐습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일은 시작은 어디서부터 했는고? 목적이 있을, 목적이 설 그때부터 시작해 가지고 예정도 하시고 창조도 하시고 또 섭리도 하시고 보존도 하시고 이렇게 계속해서 역사를 하시다가 하늘에서 내려오셔 가지고 사람이 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서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활로 끝낸 그 일들의 진행 과정입니다.
이러다가 신인양성일위로 오셔 가지고 33년 4개월동안 처음에 사생활 하시고 그다음에 공생활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 일이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셨다 말씀하신 것은 영원전 예정 때부터 당신이 그리스도로 맡은 일, 성자로 맡은 일을 이제 완료하셨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료하신 이 일을 지금 그때에 이 대속에 참가한 자들에게, 이 대속을 실상으로 분배해서 자기들이 다 이 대속을 영원히 입도록 하는 제2차적으로 완료의 과정을 지금 하고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면 이 완료를 성령님이 이 일을 맡고 진리가 이 일을 맡아서 하는데 그 일은 곧 주님의 피의 역사를 맡고 계십니다. 이래서 성령과 물과 피가 우리에게 이 구원을 전해준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양면 죽으심인데, 일면은 세 가지 잘못됨의 형을 받아서 죽었습니다. 이 형은 천년 만년으로 그 형이 끝나는 형이 아니고 영원한 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형을 담당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영원한 형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형을 받았는데, 영원한 형을 받으시고 영원한 형의 그 고난을 다 받으셨는데 아버지께서 그 많으신 긍휼대로 죽은 가운데서 새생명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영원한 형을 다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아버지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영원 형을 받았는데 사흘만 형을 받고 말았으니까 불공평이라 혹은 사람들이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불공평이 아닙니다. 그 형에 신성이 동참했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그 형이 영원 무궁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유한적입니다. 유한적인데 무한하신 분이 이 형에 동참한 이것 때문에 사흘 형이라도 그건 유한을 무한이 대충했기 때문에 그는 공로가 무한히 남아 있습니다.
잘못됨의 형을 인하여 죽었습니다. 만일 그때에 조금만치라도, 세포 하나라도 죽지 않고 남아 있었으면 이 형은 아직까지 완료가 안됩니다. 왜? 지성 지공법에서 완전히 영원한 사망을 당해야 되기 때문에 완전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완전히 죽었습니다.
언제 한번 선교사로 왔던 한부선 목사님이 일본에 있는 내촌 감삼씨에 대해서 증거를 하면서 ‘그분이 신신학이요, 그분의 교리적으로써는 정통이 아니라’ 하는 그런 말을 하면서 이것을 듭디다. 하천 풍언씨가 만주에 와 가지고 설교를 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흘리신 이 피에 우리는 연결을 받아서, 예수님의 이 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피는 살았다. 이 피에 우리가 연결해 가지고 우리 연결할 때에 우리 피는 산 피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마는 예수님의 피는 죽지 않고 살았다.’ 하는 그것을 그때에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 그분은 예수님의 대속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이라. 예수님의 피는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끝났다. 죽어 버렸다. 죽어져 버렸다. 그 피는 산 요소가 없습니다. 벌써 죽어서 끝나, 죽음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지마는 예수님의 피는 죽지 않고 살아 역사한다. 그러기에 그 피에 우리는 연결되어 그 피의 힘으로 살아난다.’ 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대속의 이 이치를 그는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피를 하나의 사상의 피로, 하나의 도덕의 피로, 이 대속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거기서 연결되고 동화되면 또 연합되고 이럼으로써 예수님의 피가 살아 산 피에 우리는 연결이 되어 가지고 사는 이렇게 그는 깨달았기 때문에 그가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도덕주의자가 되었고 참된 기독 신자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죽으심의 피입니다. 세 가지 죄의 형으로 완전히 죽었습니다. 희망없게 죽었습니다. 완전히 죽었소. 완전히 죽었는데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로 신인양성일위의 무한함이 이 형을 받아 동참했기 때문에 그 값이 되고도 남고 남기 때문에 거기에서 버려두지를 아니하시고 다시 새생명으로 연결시켜서 과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그 연결이 아닌 새 연결을 가지고 새생명으로 다시 살리신 것이 예수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 가지 죽으심이니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이 형을 대신했고, 또 하나는 타락하고 난 다음에 이 자율이 생겨졌고 주관이 생겨진 이 자율과 주관으로 행동한 이 형을 대신했고, 법을 어겼고 자율 주관으로 살 때에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항하는 이 형을 예수님께서 받아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형은 이 세 가지 죄의 형입니다.
불의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불의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율대로 주관대로 사욕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켜서 불의라고 말했고, 이 불의가 완전히 전환되는 데에는 하나님에게 소속해서 그분에게 피동되는 것으로만 이것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것은 하나님과 화친되는 것으로써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형이 다 영원한 사망의 형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형을 받아 영원한 사망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사망은 당신에게는 털끝만치도 흠이 없는데 순전히 우리를 대신해서 형을 받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기까지 고민하신 것은 죽기가 두려워서 고민하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 앞에서 대속의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성에 만족하도록 있는 것을 남김없이 다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만 의지하고 그분만 좋아하고 그분에게만 숭배해서 그분에게만 순전히 다 기울여야 지성에 합격이 되기 때문에, 혹 아파서 세포 하나라도 ‘아야’ 하면서 어만 데로 돌아가면 지성에는 다 이것은 범성을, 범지성, 지성을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인해서 고민했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지공법 앞에서 대속하고 있기 때문에, 죄지은 자가 형벌받는 것이 마땅한데 죄는 우리가 짓고 예수님께서 대신 형벌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거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서 인정 않습니다. 인정 않는데 전체가 원하니, 전체 세포 하나도 반대는 없고 전체가 다 원하니 그 원하는 주격성이 있고 또 주체성이 있고 자유성이 있는데 자유성 있는 자가 빠짐없이 전체가 원하는 것을 원해도 안된다 하면 이것은 강제요 이거는 지공법이 아니기 때문에 법에 통과되어 가지고 비로소 대속이 약속된 것인데, 혹 지공법에 걸릴까 지성법에 걸릴까 해서 심히 고민했을 때에, 이는 도무지 아무래도 이 잔을 마셔서 완성할 이가 없기 때문에 죽기까지 고민했을 때에 그래도 기도가 모자라서 천사가 와서 몸의 연약한 것을 도와 가지고 비로소 이 기도의 그릇이 차서 아버지가 이 일을 대신 맡기로 했습니다. 대신 맡은 그 아버지를 가리켜서 지극히 큰 능력이라고 에베소 1장 19절에 말씀해 놨습니다.
그 능력, 이는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이 일을 감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 안심하시고 와서 ‘이제 안심하고 쉬어라 좀 있다가 자 일어서 가자’ 하고 승리를 예수님께서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일면은 예수님의 이 세 가지 형으로 죽으신 이 죽음에 연합해서 죽은 자, 그러면 죄에 대해서 죽은 자, 불의에 대해서 죽은 자, 하나님의 대립에 대해서 죽은 자 되어야 할 것을 지식해야 되고 또 비판해야 되고 인정해야 되고 소원해야 되고 실상으로 죽어야 되겠는데 실상으로 죽는 일은 현실에서만 되어지지 현실 아닌 데서는 암만 해 봤자 그거는 하나의 공중누각되는 것뿐이지 소용이 없어. 현실이라야, 현실에 죽는 걸로 딱 통과돼 버려야 죽어 버렸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 주님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니, 주님이 죽으신 것을 내 대신 죽으셔서 베푼 그 공로를 내 공로를 삼을려고 하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자 될 때에 그 공로가 내것 됩니다. 죽은 자 될 때에 내것 됩니다.
그러면 죽은 자 될 때에 내것 된다는 것은 그 공로가 내게 건설구원 능력적으로 역사할 수가 있고 그 전에는 상상이지 실상으로 역사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한면 죽으심은 어떤 것으로 죽으심인가? 죽으심은 순종으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데,(○○○목사님 이걸 좀 피곤하지만 이 진리, 이 진리가 거기서는 어떻게 날카로운지 이래 버리면 이단 됩니다. 이러면 이단되고 이러면 정통되고 아주 차이가 호리입니다. 조그만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그대로 나가면 그만 탈선되어 이단 됩니다. 말 한마디 잘못되면 그게 자꾸 그대로 쭉 논리해서 나가기 때문에, 아주 지금 절정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빼딱 삐뚤어지면 헛일입니다. 여기까지를 가기 싫어합니다. 모두 여기까지를 가기 싫어하고, 거기서 벌써 거리가 천리나 이 남았는데 이 중간에서 그만 머뭇거리고 말기 때문에 이거는 뭐 종교는 통일이라 하는 것이 가능성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다 순종해야, 순종해야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아야 죄가 없고 하나님의 법을 다 순종해야 이제 의가 됩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데 또, 손도 순종하고 발도 순종하고 다 순종했습니다. 아직도 순종하는데 살아 있으면, 살아 있으면 다 순종으로 끝났습니까 아직까지 그 순종이 남아 있습니까? 살아 있으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이 순종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 순종에 완료가 된 참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이제 완성입니다. 이 법을, 법을 지킴으로 끝난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끝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순종으로, 순종으로 끝마친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순종하고 살아 있으면 또 어떤 명령이 내릴지 또 모릅니다. 순종에서 끝이 나 버렸습니다. 순종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이요, 그다음에는 이 불의의 반대, 불의는 인간 사상 인간 주장 인간 뜻 인간 소원 인간 욕심대로 인간 주권으로 움직인 것이 그것이 움직여 이루어진 것이 열매가 불의요, 의는 하나님의 인도에 거기 피동되어 가지고,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가지고 이루어 놓은 그 열매를 가리켜서 의라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끝나신 것이 죽으심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내 안에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그 일이 내 말로 나왔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가 말을 하신 것이다. 이거는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이다. 또 안식일 날 내가 일하는 이것 내가 일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에 그에게 피동되어서 안식일날 일한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속해서, 하나님에게 피동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전적 소속해서 피동이 되어야 하나님 다음에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이 연결이 맺어지는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은 우리가 독자적인 무슨 능력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말이오. 다만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그분에게 연결되어 그분으로 인하여 피동되는 이 피동이기 때문에 만물에게 충만케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낸 것 뿐이지 우리 독단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피동되는 이 피동으로 끝이 나버린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주님 안에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상호 내재하는 이 화친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일면은 하나님과 원수된 벌을 받아서 죽는 그 죽음이 일면에는 하나님과 화친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과 화친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과 이 화친을 가졌을 때에, 이 화친을 돌이켜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님을 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화친을 가지고 하나님께 친근히 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이 화친을 안 놓을려고 애를 쓰는데 악령과 세상은 하나님과 화친을 이것을 이간붙여 가지고 그 사이를 벌어지게 할려고 온갖 공작을 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가지고 있을 때에 옆에서 모든 공작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공작했지마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화친하고, 하나님도 저주를 하고 이랬지마는 하나님과 화친한 이 화친을 놓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화친한 이 화친으로 숨이 딱 끊어져 버렸습니다.
이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화친의 완성이요, 피동의 완성이요, 율법 이행의 완성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이 세 가지로 양면 죽음을 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에 우리 현실에서 우리가 실상으로 죽은 자 되는 것은 주님의 법을 내가 행할려고 할 때에 주님의 법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이런 모든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법을 현재에 행하는 것으로, 이 시간 주님의 법을 내가 행하면서, 주님의 법을 행하면서 내 손가락 하나 가지고 행하고 주먹 하나 가지고 행하고 두 손 가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주님이 법을 행하고 하나님에게 피동되고 하나님에게 화친되는 이 생애를 현실에서 이것으로 나는 끝을 내는 것이 이것이 이 죽음에 동참해서, 죽음에 연합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데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 그말은 남은 것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죽음에 동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생애는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현실에서 예수님 순종에 연합, 순종으로 죽으시는 이 죽으심에 연합하는 데에는 그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남김없이 다 가지고 행해야 됩니다. 그 뒤 시간을 우리는 바라지 않아야 됩니다. 뒤 시간은 하나님이 살려 주든지 말든지 당신에게, 당신의 권한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으로서, 순종 이것으로 자기는 끝날 생각 이것이 뭐이냐? 죽는 것입니다. “단언코 말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이것이 이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죽음이라’ 이것은 현실에서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두 가지로 죽으셨는데, 이 죽으심에 연합된 이 죽음은,-이걸 우리가 똑똑히 명심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형받은 데에 연합되었으면, 형받은 데 연합된 것은 내가 형을 받아서 죽은 것, 예수님의 순종에 죽으신 것은 대신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 그러면 현실에서 내가 살면서 이 두 가지 죽음으로서 자기는 끝이 난 생활을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요 우리가 가는 걸음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으로 우리 생애는 끝났고, 이 시간으로 우리의 생애는 끝났습니다. 이것 참 어려운 말입니다. 이 시간으로 우리의 생애는 끝났다. 우리는, 내 삶은 끝났습니다. 나는 여기서만 자유 있습니다. 여기서만 자유있고 여기서만 나는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죽는 데만 남아 있습니다. 죽는 것, 죽는 데만 남아 있지, 죽었는데 그다음 시간 또 살아 있습니다. 또 그러면 그다음 시간에 나는 죽는 권리밖에 없습니다. 죽는 권리밖에, 죽는 죽음은, 죽음은 이것은 내가 자유로 합니다. 내 주관으로 합니다. 내 주관으로, 내 이성 판단으로 합니다. 이성 판단 주관으로 해야, 주님의 죽으심을 내것 삼을 때에, 내것 삼을 때에 내가 죽은 것이라. 내가 죽는 것이 실상으로 죽은 것은 현실에서만 죽는 것이라. 현실에서만 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가 연합해서 내가 죽을 때에 예수님이 대속하심이 내것 됩니다. 대속하심이 내것 되고, 나는 이 죽음으로, 죽음으로 예수님의 대속이 내것 됐고, 대속이 내것 됐고, 그러면 살아 있는 것은 뭐입니까? 살아 있는 것은 이것은 주님이 값주고 산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값주고 사신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것이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산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서 산 자 된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것은 내가 연합한, 나는 있기는 있지만, 나는 있기는 있지마는 내가 연합한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끝나버리고, 끝났는데 남아 있는 이것은 내 것이 아니오.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주의 것이오, 나는? 나도 당신이 산 당신의 것이오.
이러니까 이것이, 뭐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어야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이 될 수 있는 깨끗한 것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깨끗한 것이 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이 되니까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요,-주님이 안 죽고 사실 터인데, 주님이 안 죽고 사실 터인데 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나는 죽었고 지금 이제는, 주님이 안 죽고 살았으면 살았을 터인데 주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산 것이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 내게서 사십니다. 알겠습니까? 당신이 내게서 사십니다.
이러니까 나는 당신이, 당신이 당신으로 사실 것인데 당신으로 사시기를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당신으로 사신 것을 나로 당신으로 사십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의 대용이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나를 대신해 대용됐기 때문에 내가 죽음으로 그 대신한 것이 내것이 되어 예수님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에는 살 수 없는 자 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부활은 세상에 사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 당신으로 살 수 있는 그 삶은 끝나버렸기 때문에, 나 때문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남아 있는 이것이 예수님의 당신의 피요, 살이요, 당신의 몸이요,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 살아 계시던 그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신 그 삶을 내게서 살기 때문에 이제 살아 있는 나는 내것이 아니요 주의 것이요, 내 몸이 아니요 주의 몸이요,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내게서 사시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요, 내라는 나조차도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요, 당신이 살고자 하시는 대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당신의 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쓰고 싶은 대로, 당신의 것으로, 당신이 친히 내 안에서 사심이라. 이것이 주님의 사심에 연합한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인데 이는 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에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죽었지 우리를 대신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는 죽일 자가 없습니다. 죽이는 법칙은 마태복음 4장에 마귀가 와 가지고 예수님을 범죄케 할려고 할 때에 범죄만 하면 예수님의 그 신인양성일위도 죽지마는 범죄하기 전에는 죽는 법이 없습니다. 왜? 사망은 죄값으로만 사망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몸이었는데 우리를 대신해 죽었고,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고, 우리의 살아 있는 것은 대속의 공로로 죽어서 완전히 그걸 일단 해결짓고, 이거는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의 지체이기 때문에, 이것은 실은 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죽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남은 것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 가지고 살기만 살면 산 그것은 죽일 법이 없기 때문에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 다 영생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 가지고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이 사는 것 아닙니다. 죄 없는 자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서를 통해서 죽음에 먼저 연합되고 삶에 연합된 자로 사는 것이 아닌 것은 이것이 옛사람이기 때문에 내나 자기는 예수님의 구속에 상관없는 자기 것이요, 예수님의 구속에 상관없기 때문에 그자는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남은 이 존재가 이 죽음에 연합이 되면 즉시 삶에 연합이 되는 것인데, 죽음에만 연합되고 삶에 연합이 안되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쳐서 죽고야 마는 것이고, 죽음에서 같이 연합한 자가 되어 죽은 자로, 죽은 자가 됐으면, 죽은 자로 끝난, 죽은 자로 끝난 것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다면, 죽은 자로 끝난 것이 존재해 있으면 그거는 예수님의 지체라. 그것은 죄악이나 아무것도 상관하지 못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다 영생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와 연합한 자로 살 수도 있고, 주님과 연합한 것은 구설뿐이고 실상은 주님의 부할하심에 연합되지 아니하고 옛날 죽음에 연합된 그 끈에서 끊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죽음에서 끊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됨으로 옛날 죽음에서 완전히 끊어져서 딴 동가리가 돼 버리고, 딴 동가리 된 이것이 암만 예수님의 공로로 죽음에서 끝나버렸지마는, 이것은 의롭다, 이거는 깨끗하다, 이것은 온전하다, 하나님과 화친했다 하지마는 이것이 실상으로 사는 행동은 하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이 되어야 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이 실상과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이 실상이 현재에서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건설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니까 자꾸 여러분들에게 논리가 많아지는데 실은 다시 말하면 우리 건설구원인 이 성화는 뭐이냐? 예수님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 가지고 예수님의 당신의 지체로, 당신의 그 기능으로, 당신이 내 심신뿐 아니라 나도 당신의 소유를 삼아 가지고,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아 당신이 내 안에, 내 안에 내가 되어 가지고, 내 안에 참 내가 되어 가지고, 사심이 나를 통하여, 내 심신을 통하여 나타나 역사하는 그것만이 영생이요 그것이 성화구원이요 그것이 천상 천하의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지극히 존귀한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체입니다. 그러기에 이게 모든 것을 통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너무 쉽게 에누리를 해 가지고, 그저 제가 예수 믿으면서 주일이나 지키고 또 예수님의 이름이나 부르고 뭐 제 욕심대로 다하고, 속에 확 파 뒤집어 보면 명예주의, 영광주의, 사욕주의, 돈주의, 오만 떼 욕심을 전부 품어 가지고 그저 이름만, 말만 이래 가지고, 전부 착취, 전부 협잡, 사기, 이러니까 ‘양의 껍질을 입었으나 속에는 이리다. 전부 절도요, 강도다, 삯군이다.’ 하는, 이 발표한 여기에서 건설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에누리에서 모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던 자가 어리석게 유혹받아서 ‘아, 저렇게 살아도 예수믿는데 이렇게 살 것이 뭐 있느냐?’ 하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실상으로 죽고 실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산 것만침, 그러면 한 번 살았으면 영원히 사느냐? 아니라. 이 시간까지, 이 시간까지 살았어도 이다음 시간에 죽을 수 있어. 이 죽고 사는 것은 심신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심신의 요소는 천도 만도 억도 넘습니다. 그 갯수가 억도 넘소. 마음의 갯수도 억도 넘고 또 몸의 갯수도 억도 넘습니다.
이러니까 이 시간에 갯수가 살아나고 그다음 시간에 갯수가 살아나는데, 이 시간에 살아날 그 갯수가 살아났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다 산 게 아니라. 그것만 살았고. 그 다음에는 또 죽을 수 있고 그다음에는 죽었다가 그다음에 또 살아날 수 있고, 이러기에 우리의 육의 구원은 개별적으로 중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루어진 것은 완전히 금을 불로 연단해도 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의 심판이 암만 살펴 가지고 막 뜯고 쪼개고 뭐 어떻게 금을 소산수에 녹이듯이 마구 떼고 굽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리 저리 쪼개고, 아무리 쪼개 봤자 이제 털끝만치도 흠없는 그것이 성화요 이제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 영생은 유죄보다 무죄가 깨끗하고, 무죄보다 의가 깨끗하고, 의보다 생명이 깨끗한 것입니다.
영생은 뭐이 영생인고 하니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마치 우리 손바닥이 이리 보면 안이고 이리 보면 겉이지마는 참 뉘가 말하기를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까지가 겉이라 하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제 밖에서는 보면 전부 하나님이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당신은 창조주 우리는 피조물,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님이 그 말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것이 내 말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말씀이라 한 것처럼 이제 속에 은밀한 속에만 창조주 피조물이 경계선이 또렷이 있지 그 밖에는 모를 만치 이렇게 하나님은 머리 우리는 몸 이만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영생입니다. 이런데 너무 영생을 에누리하는 가운데에서 교회들은 이렇게 됐습니다.
앞으로 계속하겠습니다. 이 도리, 이 교리를 밝혀야 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할 터인데 여러분들이 잘 들어서 여기서 변화를 받아야 되지 여기서 변화받지 못하면 자기 집에 혼자 가서는 변화받기 어려울 터이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변화를 받고, 오늘 저녁에 이 말씀을 다시 녹음으로 재독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또 듣고 또 듣고 뒤에 가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한 번 듣고 몰랐으면 요청을 적어 놨다가 ‘아무날 설교한 것을 다시 한 번 틀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이 오면, 요청함에 따라서, 요새 보니까 방송에서도 노래 부르다가 ‘아, 그 노래 내가 좀 청하니까 그 노래 한번 좀 불러주십시오.’ 이러니까 그 테이프를 돌리는 것처럼 이래 가지고 어쩌든지 알아야 됩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알아야 됩니다. 모르면 안됩니다.
이러니까 다른 사람이야 뭐 까다롭다고 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그는 다 서로 깨달음이 달라서 그런 것이니까, 누가 말하기를 이 교리를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도마 위에 놓고 막 난도질을 해 재끼니 어디 그럴 수가 있느냐?’ 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말씀 가운데에 수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내재적 영감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알지 못하면 20세기는 감당하지를 못합니다, 20세기는. 미국에 있는 그 현재 복음 가지고는 절대 미국은 구출 못 합니다. 안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씨 가서 말할 때에 다 그들이 쭉쭉 돌아오고 흔드는 것은 교리와 신조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재 그 교리와 신조 가지고는 안됩니다. 20세기를 감당할 수 있는 새 복음이 나와야 됩니다. 새 복음이 뭐이냐? 그 복음의 깨달음이라 그거요. 깨달음이 새로 나와야 돼. 중간에 가다가, 세상은 자꾸 발달돼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감당할 것을 말씀해 놨는데 이걸 깨닫지 못하고 게을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안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고 부활하심을 믿는다.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중생 새소망을 가졌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우리가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받았다.’ 이렇게 말하나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떻게 죽었는지,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죄값대로 죽었다 하는 이것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대부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인해서 죽으셨다는 이것만 알고 있는 것이 신자의 10분지 7, 8이 될 것이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로 죽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 행하는 대행을 위해서 죽으셨다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또 수효가 적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죽으심을 인정하고, 알고 있고 인정하지마는 실상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이 면에 노력하는 사람은 극히 희귀할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안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자기가 체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체험은 어디서 나오느냐? 죽음에 연합한 자가 될려고 할 때에 그 구멍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환하이 보이고 역사합니다. 살으심에 연합한 자가 될려고, 실상 연합한 자가 될려고 애를 쓸 때에 하나님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우리 안에 우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성신의 감화로 환하게 너희가 보리라’ 말씀했습니다. 기독자들이 다 기쁨의 능력도, 소망의 능력도, 담대의 능력도, 평강의 능력도, 이 자존의 능력도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 진수에 접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증거가 안 옵니다. 암만 여러 수십 마력의 전기가 있다 할지라도 접선이 되어야 불이 오지요. 그만 스파크가 터지든지 뭐 타든지 접선이 돼야 되는데 접선이 안 되는데 뭐이 됩니까? 접선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죽음에 연합하고 삶에 연합이 될려고 애를 쓰고 연합될 때에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