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07:16
주일의 은혜
1983. 11. 6. 주전.
본문 : 계 1:9-20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주일을 바로 지켜야 되겠다는데 대해서 증거를 하려고 그래 제게 감동이 와서 생각하기 시작해 가지고 끝에는 요한계시 1장 9절에 있는 말씀으로 증거하게 됐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 요한이가 마지막으로 기록한 성경이 요한계시록이고 또 육십오 권에 흩어서 예언해 놓으신 모든 말씀이 마지막으로 종합해서 결론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말세의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예언에 거슬리는 악의 세력들이 많은 고로 이 사실을 바로 문서로 기록하면 보존되기 어렵고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과 신구약 육십오 권을 삼가 읽은 사람들만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대개는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간추려서 머리만 따서 인용해서 기록을 했고 또 상징적으로 이렇게 기록을 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기록된 문서 그대로 생각하고 해석하면 아주 다른 뜻이 되게 됩니다.
여기에 9절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하는 것은 사도 요한이나 우리나 꼭 같은 사람입니다. 뭐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와 이 나라를 바라보는 그 생활에 환난이 오는 것과, 또 이 환난 생활을 계속하는 계속이 없으면 안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나라와 환난과 참음 이 세 가지는 하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이 당한 환난을 양은 다르고 방편은 다를지라도 자기에게도 예수님의 당하신 그 환난이 자기에게도 옵니다. 그래 가지고 예수님이 건설하신 예수님의 그 나라가 자기에게 오게 되고 또 이 생활을 계속해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환난,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참음, 이 세 가지를 다 겪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없이 구원을 바라는 자는 다 그거는 소용없는 속이고 속는 마귀 역사입니다. 예수님 없는데 구원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구원을 이루어 가려고 하면 환난없는 그 방편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를 자기가 소망하고 이루어 나가는 데에는 계속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합해서 하나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여기에 동참되어야 구원에 동참이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본구원을 말함이 아니고 건설구원을 말합니다.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를 인해서 세상에게 배척을 당해 가지고 밧모섬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밧모섬에 가서 갇혔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죄되지 아니하는 것은 얼마든지 봉사하고, 얼마든지 양보하고, 얼마든지 관용하고 해도 반드시 그 세상과는 이색져서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의 증거, 예수의 증거는 예수님의 소망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사상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그 생애를 증거해서 예수님과 같은 그 소망, 예수님과 같은 인질, 예수님과 같은 생애 법칙을 하려고 하면 자연히 세상에서는 이색져서 마찰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래 가지고 사도 요한이는 밧모섬에 가서 갇히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가 세상과의 관계된 그 모든 관계는 다 가려지고 끊겨지고 하나님과 밀접한 연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로 보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버리는 것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치 않는 것 아닙니다.
세상을 대적하는 것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하나님을 대우하고 섬기는 인생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참사람의 행위와 참사람의 소속 행동을 하려고 할 때에 이것이 옳은 것인데 악령이 미혹시켜서 만들어 놓은 악의 세력의 모든 세력들이 이를 환영하지 아니하고 대립합니다.
이러니까 기독자들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세상을 멸망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또 하나님의 그 성품대로, 또 하나님이 주시는 참사람으로 이렇게 살려고 할 때에 세상은 마다고 배척하다가 미워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에 세상에게 손해를 보는 것으로 그렇게 인간 지식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내가 과거에 세상에 있었던 세상 사람이 된 우리들인데 세상 것이 되어 있던 세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그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같은 속성이 돼 가지고 하나님에게 소속하여 피동되는 그 생활을 하려고 하니까 세상이 마다고 버리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을 내놓으라고 세상이 위협하고 간청하고 유혹하고 무력으로 탄압하다가, 우리가 하나님의 도리와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면 그들이 우리에게 온갖 어려움을 가합니다. 온갖 어려움을 가하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법칙대로의 행위를 더 강조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형상과 법칙을 버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온갖 박해를 시키고 마지막에 생명을 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생명을 끊었으면 내 생명이 그들에게 점령당해서 그들의 것이 되는 것 아니고 내 건강이나 내 소유가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그들에게 박해를 당함으로 손해가고 없어지고 적어지고 죽어지고 하면 내 모든 육의 것이 세상 세력에게 빼앗겨져서 세상 세력의 것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과 참사람의 심신이 되어 변질되지 아니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와같이 박해하는 그것으로써 변질될 우려성이 있는 미완성의 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것과, 하나님의 법칙 그 진리대로의 것으로서 완전히 그것이 되어지는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내게 대해서 무슨 일을 했는가?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나와 내 행위와 내 소유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과 진리의 것이 되 어지도록 이루는 거기에 역꾼만 돼 가지고 이용돼서 그 일이 이루어지게 돕는 결과만 맺지 저의 소원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아닌 것입니다. 저와 소원은 이루지 못합니다.
주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일 때에 죽임으로 저의 소원이 이루어졌느냐 하면 소원이 이루어지지는 안하고 아버지의 소원과 주님의 소원을 이루는 데에 세상은 마귀는 역사만 해 가지고서 결국은 제 소원 이루어지는 제것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완전히 되어졌기 때문에 악령은 손을 들고 패전을 당하고 완전히 악령과 죄악은 주님에게 다 굴복을 당하고 사망은 완전히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져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영감과 진리 때문에 맞는 것은 영감과 진리의 것이 더 되게 하는 것이요, 영감과 진리 때문에 상한 것은 -상하게 하는 것은 세상이 상하게 합니다.- 상한 것은 영감의 것 진리의 것이 된 것이요 영감과 진리로 인해서 세상에서 완전히 죽임을 받은 것은 완전히 영감과 진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로 인해서 세상이 빼앗으려 하는 것은 완전히 영감과 진리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니까 그는 하나님과 진리의 것이 내가 되어지게 하는 조력하는 역꾼의 역사를 하는 것뿐이지 저들은 완전히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안 빼앗기려고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히 빼앗깁니다.
그러기에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빼앗김으로 빼앗김을 이기고, 낮아짐으로 낮아짐을 이기고, 상함으로 상함을 이겨서 완전케 되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도의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를 인해서 밧모라는 섬에 있었더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하고 또 예수님의 형상대로 자기가 예수님의 모형으로 살려고 이렇게 함을 인해서 자연히 세상과 하나된 그 동질된 것이 이질로 변해지고, 같은 욕망이 다른 욕망으로 변해지고, 또 같은 애정이 다른 애정으로 바꿔지고, 껍데기는 같지마는 그의 사상이나 속성이나 생활의 그 모든 이념이나 그런 것은 세상과 다릅니다.
이러니까 세상과 다르니까 세상에게 다른 그 배척을 당해 가지고서 밧모섬에 갇혀 가지고 주일을 만나게 됐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신자들도 이 주일을 지킬 때에 우리의 일반적 모든 생애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그 사람의 일반 생애가 되어야 되겠고 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자기 직장에서도, 자기 사업에서도, 자기 가정에서도, 자기 단독 개인 속에서도 자기 속에는 두 사람이 있어 가지고서 거기에 완력이 생겨집니다.
그 속에서도 암투가 생겨지고, 자기 직장에서도 무언중에 암투가 생겨지고 자기 사회에서나 어디서든지 그것이 있는, 둘이 구별되어서, 하나였는데 하나가 아니고 새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것이 하나 생겨짐으로 말미암아 옛것과 서로 이질이 돼졌고 대립이 되었고 둘이 되어진 이 둘에 대한, 나타나든지 안 나타나든지 거기에는 은연중 서로 대립이 있고 마찰이 있고 이색이 되어 있는 요것을 가지고 요것이 있어야, 요것이 있어야 그 사람이 주일을 바로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제가 주일을 지키면서도, 주일을 지키면서도 세상과 하나 되어서, 여기 와 앉았기는 앉았지마는 세상과 대립되는 것이 없고, 마찰되는 것이 없고, 이색되는 것이 없고, 다른 것이 없는, 사상에 다른 게 없고, 소원에 다른 게 없고 모든 인간 속성에 다른 게 없고, 소망에 다른 것이 없고, 법칙에 다른 것이 없고, 정신에 다른 것이 없고, 다른 것이 없으면 아직까지 땅에 속한 사람인데 주일을 지키러 왔다면 주일 지키는 그것만 그 행동이 외식으로 좀 달랐지 주일 지키러 여기 와 앉았지마는 그 사람은 딴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주일을 지키지 안하면 밥을 안 주고 주일 지키지 안하면 불안하고, 주일 지키지 안하면 직장에 있지를 못하고, 그 사회에 머물지를 못하는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이 그 세력에 끌려서 주일을 지키는 것과 자기가 안에서 밖에서 전투가 있으면서 이 전투로 인해서 자기가 전투를 겪으면서 주일을 지키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새벽기도 나오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해도 나오지를 못하고 서서히 해서, 혹은 믿지 않는 자에게 거리낌이 될까 해서, 하나님의 법칙에 위반되는 주일은 안 지킬 수 없고, 또 교회법에 위반되는 삼일은 안 지킬 수 없고, 새벽기도 그런 것도 하나님 법칙에 있는 것이지마는 그런 것은 못 해도 이제 눈물로 고대하면서 주일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주일을 지키려 하는데 거기에는 온갖 마찰이 있어서 며칠은 지켜가다가 며칠은 사정을 딱 꾸며 가지고 '이렇고 이러니까 요번 주일만큼은 꼭 양보를 하시오' 이런 이 마찰되는 애로 가운데서 주일 지키는 사람의 주일 지키는 것과 그거는 아주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러기에 모든 날이 다 사망의 날이지마는 생명 역사가 움트는 날 하나님께서 이 구속한 자를 거룩하게 만드셔 그 자체를 변화시키고, 모든 생애 법칙을 변화시켜 주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신령한 그 소유를 구비시켜 주는 이 세 가지는 주일날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일날 자체를 성화시키는 종자적인 성화를 주일에 주시고, 또 성화된 것이 세상에서 성화된 자로 살 수 있는 그 생명의 법칙을 주일날 주시고, 또 산 자가 세상에서 살 때에 산 자에게 필요한 모든 자연 요소, 산 자에게 필요한 자연 요소는 또 주일날 받습니다. 그러면 산 자에게 필요한 자연 요소를 하나님이 주실 때 뭘로 주시는가? 주일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에 그 말씀대로 지키면 그 자연 요소들이 생겨집니다. 이래서 이 셋은 주일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날 중에 제일 귀한 날은 주일날이요, 시간 중에 제일 귀한 시간은 자기가 당한 그 현실 시간이오.
이런 것은 다 뭐냐? 변화시키는 것, 삐뚤어진 것을 바르게 변화시키고, 썩을 것을 썩지 안할 것으로 변화시키고, 욕된 것을 영광스러울 것으로 변화시키고,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모든 없어질 이 혈육의 것들을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신령한 것들로 변화 시키고, 모든 것에 제한을 받아서 종되어 있는 것이 아무 제한을 받지 안하고 모든 것을 초월한 무제한의 완전의 것으로 변화함을 받는 이것이 다 주일날 움트고, 지식으로도 주일날 움트고, 능력으로도 주일날 움 트고, 종자적으로도 주일날 움트고, 우리의 사상이나 우리에게 있는 인격의 새로운 기능으로서도 주일날 움틉니다.
움튼 이것을 받은 말씀대로 엿새 동안에 변화된 새사람으로 엿새를 사는 것이 자기 생활을 자기가 하는 것이요 자기 일을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 생활이 아니면 그는 제 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일을 하는 것이요, 마귀의 일을 하는 것이요, 인간의 일을 하는 것이요, 사망의 일을 하는 것이요, 세상이 주는 세상의 일을 하는 것이지 산 자의 일 하는 자기 일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 10절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여기에도 주일날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의 날. 우리는 일요일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주일이라 하는 게 좋습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것은 이방 사람들이 이방신을, 이방 사신을 섬기는 그 사신 섬기는 날짜를 그렇게 정해서 한 것이 월 화 수 목 금 토 일로 그렇게 정한 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 예배에 대해서는 '수요일' 하는 것보다도 '삼일예배' 삼일예배는 주일만 가지고는 간격이 너무 떠지니까 주일에서 주일을 만나면 그러니까 이제 주일 사이에 하루를 둬 가지고서 삼일 예배라는 예배 시간을 정했고, 또 그 후에 오일예배가 정해진 것은 주님이 오일날 그날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까 그날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날로 명상하고 특별히 생각하는 그 날로 삼은 것이 이제 차차 그 필요성을 느껴 가지고서 오일예배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삼일예배 오일예배, 또 주일예배. 주일을 사람들이 무슨 주일 무슨 주일 하는 그것은 망령입니다. 망령. 어떤 큰 교파가 말해도 망령입니다. 주일은 주의 날로만 지켜야 됩니다. 주의 날을 어떤 부모라고 해서 그 부모를 섬기는 무슨 뭐 어버이날이니, 아이들을 생각한다고 뭐 꽃주일이니 뭐니 그거는 망령됩니다. 마귀가 내놓은 것이지 하나님이 낸 것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주일날 그리 하지 안하고, 자손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제오계명을 따라서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믿는 사람이 부모를 섬기지 않는 자는 안 믿는 사람보다도 더 악한 자입니다.
또 부모가 자녀를 그것을 평생 책임져야 되기 때문에 책임자의 보호로서 '주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노엽게 하지 말아라' 하는 그말은 네가 자녀에게 양심 앗기지 않도록, 자녀에 양심을 앗기지 안하도록, 자녀가 깊이깊이 그것 암만 생각해도 '우리 부모는' 하는 존경을 하고 너를 따라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지 네가 그에게 조그마치라도 양심에 '우리 부모도 의아심이 난다.
찬성할 수 없다. 뭐인가 잘못된 흑점이 있다.' 이런 일을 하지 안하도록 네가 조심해라 하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성경 말씀을 보고서 얼마든지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고 부모에게 잘 효성 할 수 있는데 하필 주일을 무슨 주일 무슨 주일, 그리 끌어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귀의 사람들은 좋아서 울렁거립니다.
옛사람을 새사람으로 바꾸려 하니까 주일날 오면 그만 재미가 없고 이래 가지고서, 제가 세상에 왕인 줄 알고 떠들고 이러다가 주일날 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양심으로 들어오면 어깨가 묵직하게 크게 징책을 받고 마음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마음에 큰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는 이것이 주일날인데 어짜든지 주일날 인간들 기분만 좋도록 이래 가지고 옛사람만 아주 더 주일날 숭상을 하는 이렇게 되는 것이 다 주일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여기 ○○○목사님이 어데 갔다 왔는데, 아라비아에 갔다 왔는데 거기에는 보니까 주일을 어느 날로 주일로 지킨다더라? 어느 날 주일 지켜? 금요일을 주일날로 지키더랍니다. 금요일을 주일날 대신 산업전도라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산업전도라는 것이 '산업에 따라서 주일을 정해 지키지 어느 날이든지 하루만 지키면 되는 것이지 주일을 지킬 필요가 뭐 있느냐?' 그러니까 산업을 따라 지키기 때문에 그 회사가 월요일날 지키기 좋으만 월요일날, 화요일날 지키기 좋으면 화요일, 금요일 지키기 좋으면 금요일, 사업에 따라서 주일은 피동되어서 변경될 수가 있다 하는 것이 산업전도입니다. 그것 순전히 마귀의 생각이요 그것만큼은 마귀 역사입니다.
주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주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에 사업이 따라와야 됩니다. 내가 언제 그 신문에 보니까 아주 박사입디다. 한국 교회에 박사요.
내가 그 이름은 밝히지 안해. 박사인데 신문에 내기를 '기독교가 토착화가 되어야 된다' 하는 그것을 신문을 내놨습디다. 내 놔야 보고 아마 벌로 봤을 것이오.
네, 민주주의도 토착화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자기 나라에 맞도록 토착화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토착화가 안 됩니다. 기독교는 모든 국가가 기독교화돼야 되고, 모든 민족이 기독교화돼야 되고, 모든 문화가 기독교화돼야 되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지 하나님이 어떤 민족에게 돌아가서 거기에 귀속되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깨어 살아야 됩니다.
"주의 날에" 그러면 주님의 날은 어떤 날인고 하니 일차 창조를 하고 일차 창조한 것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이에게 다 거룩한 깨끗함을 주신 것이 안식일입니다. 일차 창조한 후에 일차 창조된 것들에게 구원하는 날 복된 날로 정한 날이 안식일이오. 이차 창조는 진동되지 아니할 창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예수 그리스도도로 말미암아 대속으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으로 건설된 영원한 나라 이차 창조의 그 나라인데 이 나라로 모든 택한 자들에게 입혀 놓은 것을 실상으로 본인이 입은 것인 것을 알고 입은 자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택한 자로서 살도록 택한 자로 온전함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복된 날로 정한 것이 주일날입니다.
그러기에 일차 창조의 복된 날로 정한 것이 안식일이요 이차 창조의 복된 날로 정한 것이 주일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전에도 이 안식일을 지키나 예수님이 신약 시대에 하실 모든 행사는 안식일날 하지 안하고 -안식 후 첫날이라 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주일날 모든 일을 했습니다. 성령 강림도, 예루살렘 입성도, 또 변화산에서 변화도, 또 예수님이 대속한 세례도 모두 다, 할례도, 모두 팔 일 만에 받았다는 것은 그것은 이제 신약 교회 이차 창조는 일차 창조의 것을 이것을 다시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는 것으로 변화시켜서 이차 창조의 완전 구속을 이루는 그 역사를 하는 날로 정한 것이 주일날입니다.
그러기에 주일날 우리는 세상과 연결이 돼 가지고 그 줄을 끊지 못하고 그 줄에 매여 가지고서 여기에 온 사람들은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라 말은 택함을 받지 않은 불택자들이 악령이 주일 지키러 보내 가지고서 주일을 지키러 온 사람들인데 택함을 받은 사람들도 그 사람을 본떠 가지고 미혹을 받아서 불택자와 같은 그런 행동하는 것이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은 그 결과가 뭘로 나타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변하여서 색욕거리를 삼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서 이 세상 번쩍거리는 외모, 세상에 있는 이 세상적인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믿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을 이루는 데에 세상 것을 만드는 데에, 세상 이 외모를 만드는 거기에 이용하는 그런 자들이 된다 말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므로 인해서 세상 것이 잘돼도 그것은 우리 소망 아닙니다. 그것 잘되는 것은, 잘되는 것은 '하나님이 잘되게 했으니까 이것이 내게 축복이라 이것이 내게 분깃이라'생각하면 어리석습니다.
잘되게 해 줄 때에 '이것은 내 분깃도 아니요 소망도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내것으로 주시지 안했는데 이것을 뭐 하려고 주셨을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첫째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보관해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이것을 쓰라 할 때는 써야 되겠고 흩으라 할 때는 흩어야 되겠다.' 순전히 세상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쓸모 있어서 당신의 것으로 보관시킨 것이기 때문에 주신 것도 그분이요, 보관도 그분의 뜻대로, 쓰는 것도 그분 뜻대로.' 이래 가지고 세상과 물질만 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하나의 도화선이 되고, 하나의 계기가 되고, 그들에게 하나 이해에 증거가 되게 하는 이 사실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믿음으로 살아서 자기가 세상에서 다니엘 같은 그런 위치에 있어도 다니엘 같은 그 위치가 다니엘에게 준 지위나 권세는 아닙니다. 다니엘이 받을 지위와 권세는 무궁한 영원한 하늘나라의 지위와 권세가 저의 것인데 '하나님이 왜 이것을 내게 줬을까? 주여, 이것은 내것이 아니고 내것은 하늘나라의 것인데 이것은 내것이 아닙니다. 왜 이것을 주십니까?' '내가 총리대신의 지위를 주는 것이니까 이것은 네것이 아니고 내것 아니냐? 내것으로 네가 보관하고 있거라. 그러기 때문에 총리대신의 그 권세를 내가 쓰라 하는 대로 보존해라. 버리라 할 때는 버리라. 그래 가지고서 그것으로써 내 복음 역사에 필요 있어 쓰일 것이니까 내가 쓰라 하는 대로 쓰고 네가 보관도 관리도 내 뜻대로 하고 네것인 줄 알고, 네것은 썩지 안할 것 쇠하지 안할 것 더러워지지 안할 것 낡아지지 안하는 그것이 네것이요,' '주여, 옳습니다.
그것이 내 것입니다. 이것은 내것이 아닌데 주님이 주셨으니 주님의 것으로 보관하지 이것을 내 것이라고 내가 분깃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분깃을 삼고서 이것 줬으니까 됐다 하지 않습니다. 이거 나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이 변하여서 영원한 것이 되기를 원하지 이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할 것이어늘, 이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안하고 그만 미혹받아 가지고 그게 자기 분깃으로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변해서 색욕거리를 삼았다' "색욕거리를 삼았다' 유다서 4절 이하에 보면 내리 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이 주일을 자기가 세상하고 사이가 벌어지지 안하려고 어쩌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친근히 지내려고 오만 희생을 다하고, 오만 봉사를 다하고, 오만 조심을 다하고 오만 양보를 다하되 다만 주님과 진리만은 양보할 수가 없어서 주님과 진리만은 양보를 못 함으로 말미암아 항상 자기와 이색된 것이 있고 마찰된 것이 있고, 이래서 자기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세상에 대한 애착이나 사랑은 없는 자입니다. 이자로 주일을 지켜야 됩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속에 없다" 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거기에 애착이 붙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애착 붙어 그런 것인데 내가 세상에 있는 그것을 그대로 사랑하면 그것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하나님에게 귀속시켜서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거기에 소속해야 그것이 살아나기 때문에 사랑할수록 이것을 하나님에게 소속시켜야 되기 때문에 항상 그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을 다 쓰니까 껍데기는 나는 좋아해도, 그는 나를 싫어해도 나는 그를 좋아 하는 척하지마는 실은 속으로 훼딱 뒤비쳐서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나는 하나님을 좋아하고 그는 내가 좋아함으로 하나님께 끄는 것으로 좋아하지, 하나님께로 끄는 걸로 좋아하지 내가 좋아서 그렇게 끌려가는 것으로 좋아하는 것은 털끝만치도 없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주일을 지킵니다. 이럴 때에 성신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내가 뭐 돈 보고 직장에 나오나? 주님이 나에게 맡기기 때문에 이거 맡겼으니 내가 이 자리에서 빛을 발해야 되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되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실을 드러내야 되고 이 자리에서 죽어도 직장이 당장 목이 달아나고 직장이, 직장이 당장 없어져도 계명은 어길 수 없는 사람으로 이걸 증거하지.' 다니엘이 그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기독 신자들은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함으로써 자기에서 온 것이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자기가 우상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선물은 하나님께서 줬고 하나님의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잘 보관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마는, 불신자도 공산주의 김일성 이 건강도 하나님이 주셨소.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마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제가 다 잊어버려서 끊어버리고 하나님과는 연결성을 끊어버리고 그것만 그것대로 상대할 때에 그것이 악이 되고 맙니다. 그것대로 상대하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 소라도 유익이 되리라고 거기에 소망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직장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 걸 알아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내 직속상관이 있지마는 상관 위에 하늘의 상관이 있다.' 하늘의 상관의 명령의 직속 명령일 때는 죽도록 그 상관에게 충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늘의 상관 명령을 어긴 그 자기 위에 상관이 어겼을 때는 그는 역적 행위기 때문에 자기는 그 동참죄를 지을 수 없는고로 '안 됩니다.
오늘은 국경일이라도 오늘은 주일 범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국령이라도 아무 데도 못 갑니다. 내가 신사참배도 못 갑니다. 아무데도 못 갑니다. 국군묘지도 못 갑니다. 오늘은 주일이기 때문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됩니다.' 하면 그것이 자기 생명을 건지는 구원이요 생명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생명을 건져주는 계명이요, 우리의 멸망을 방어하는 구원이요, 우리의 모든 구원과 행복을 끌어오는 이 계명입니다. 계명은 자기가 무거운 짐진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옛사람 멸망할 그놈이 지금 죽는다고 마다고 이 계명을 싫어하지 중생된 새사람은 이 계명은 자기의 피난처요, 자기의 방패요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의 손입니다.
주일날 외로운 밧모섬에 거석해 가지고 밧모섬에 가 있었지마는 다른 날은 그런 날이 없었는데 주일을 당해서 '주일날 성령에 감동하여' 그전에도 사도 요한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마는 이제 그가 세상 다 줄이 끊어지고 세상에게 배척을 당했는데, 죄짓다가 배척당한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세상에서 배척당하고 끊겨졌습니다.
이러니까 세상과 멀어졌으니 멀어진 것만치 이전에 하나님과 가깝던 그 가까움이 아니고 새로운 가까움을 만나게 됐습니다. 세상과 멀어진 것. 만치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세상과 이질이 된 것만치 하나님과 동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 없이 하기 때문에 주일을'이렇게 지키는 것을 그렇게 감사하지 못합니다. 3.8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다 처음에 와 가지고 주일을 지키면서 안 운 사람이 없었어. 안 운 사람이 없어.
해방 전에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주일을 지키려고 해도 악의 세력에 일정 그 왜정 말년의 정권으로 인해 지지고 주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고 주일 지키다가 죽기도 하고 뭐 주일 지키다가 제가, 배추달, 주일학교 반사인데 배추달 반사가 주일 지키다가 순교당했습니다.
박기천 조사님이 주일 지키다가 순교당했습니다. 이랬는데 그 박기천 조사님은 그전에 예수 믿는 사람 아니오. 이 복음을 받고 난 다음에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요새는 말 들으니까 박기천 조사님이 순교적인 신앙은 지금 신앙으로 지도한 사람은 어만 사람이 돼 가지고 있소. 그 아들도 모르고 있소. 먼저 왔는데 그 말 하니까 '이거 뭐 무슨 이런 말 말하는가?' 못 알아듣습디다.
세상은 이렇게 바꾸어지고 어두운 세상입니다. 죄인이 포승줄을 거머쥐고서 의인을 묶어 가지고 '이놈' 하면서 뚜드리며 형벌하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놀랠 일은 너무 여러 꺼풀로써 이렇게 변장 변색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앞으로 그 모든 것이 껍데기를 확 벗겨서 진정이 나타날 그때에 사람들이 놀래고 그때 참 떨고 그때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많은 꺼풀이 있지마는 꺼풀로 가룰라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꺼풀에 가려 몰라도 제가 꺼풀을 벗기고 벗겨서 이다음에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과 같은 그 진상이 드러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그 날을 지금 공작합니다. 그 날을 지금 정리하고, 그 날을 정돈하고, 그 날을 정비하고 있는 것이 기독자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를 '저 미친 사람이다. 아무 일없는 것을 자꾸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네.' 하지마는 그는 보는 눈이 달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기 때문에 그 날을 보면서 정리하고, 정돈하고 정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그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전 성령의 감동이 아닙니다. 이전 성령의 감동이 아니오. 새로운 성령의 감동입니다.
이래 가지고 그전 성령의 감동으로서 '교회는 귀한 것이다. 교회 위해서 생명도 바칠 만한 교회요, 교회는 모든 피조물 중에는 교회가 제일 성결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도 했고, 주님이 거룩하신 것도 알기도 했고, 또 주를 위해서 수고해야 될 줄도 알기도 했지마는 주일날 성신의 감화 감동을 받아 가지고 그 눈이 환히 열리고 보니까 눈이 열리니 주님이 이전 주님이 아니라 말입니다.
주님이 보니까 "그 털이 희기가 양털 같고 눈과 같다" 예수님에게는 털끝만치도 불의한 것이 없고 전부 성결뿐이라는 것을 보고 또 놀랬습니다.
예수님의 안면이 해와 같이 빛난 것을 보고 또 놀랬습니다. 예수님의 안면이 부셔서 보지를 못하겠어, 예수님 안면을 턱 대하고 보니까 자기가 한 것이 전부가 이중이요, 삼중이요, 가면이요, 주님에게 대해서 멋모르고 알지 못하고 날뛴 것이요, 하나 선을 했으면 둘 서이 한 척하고, 다른 사람이 없는 선을 칭찬할 때에는 가만히 있고, 있는 악도 말할 때에는 그걸 싫어하고, 뭐 모든 것이 눈이 밝아지고, 주님이 감동시켜서 보니까 주님도 이전 보던 주님이 아니고, 자기도 이전 보던 자기가 아니고, 자기 행위도 이전 보던 행위가 아니니까 거기서 꺼꾸러져 죽을 수밖에 없어서 거기서 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와 갈이 되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내 무릎에 네가 기대고 드러눕고 그렇게 할 때의 그 주님이 내나 지금 주님이다. 알지도 못하고 너희들이 나를 배척하고 어쨌을 그때도 내가 너희들을 긍휼히 여기던 그 주님이 내나 지금 대한 주님이다 네 눈이 밝아서 내가 변해졌지 내가 변해진 것 아니다.
이러기 때문에 전날 그렇게 불법하고 무례하고 내게 대해서 무식해도 내가 너를 사랑으로 구원하고 사랑했는데 네가 그때다 비해서는 이렇게 많이 변화됐는데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면서 위로를 했습니다.
주일날 이 감화받고 난 다음에 보니까 주님이 아주 변해졌습니다. 이전에 보던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일날 자기가 세상 줄을 끊고 이 날은 참 하늘의 것으로 새것을 만들어, 썩을 걸 썩지 안할 것으로,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을 신령한 것으로, 땅의 것을 하늘의 것으로, 사망의 것을 영생의 것으로 바꾸는 이 날인 것을 알고 이 날에 와 가지고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가 영감받은 것과 같이 우리가 세상 줄을 끊은 것만치 오늘 영감은 다를 것입니다.
이 자리에 사람들이 많이 있지마는 반드시 영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사람이 세상에게 가득히 붙어 있으면 영감은 저에게 오랑캐가 될 것이요 적이 될 것이요 이 시간은 지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세상 줄을 끊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붙이고 왔다고 하면 한 자리 있지마는 그 사람이 받은 영감은 다를 것입니다.
주일날 우리는 이전보다 다른 영감을 받아야 되겠고, 이러고 보니까 주님도 이전 주님과 다른 주님으로 보입니다. 자기도 다른 자기로 보입니다. 모든 생활도 자기는 다른 생활로 보입니다. 소망도 과거에 보니까 참 어리석고 미련해서 찌끄러기 찌끄러기 썩고 가치 없는 것 오히려 나를 해독만 주지 유익 하나도 주지 못하는 그걸 유익이라고 그걸 보배라고 주 모우고 어짜고 싸우고 시비한 걸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모든 그 눈이 바꾸어집니다.
이러고 나서 보니까 마지막으로서 '네가 이것을 봐라' 보니까 주님의 손에 일곱 별과 일곱 촛대가 잡혀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일곱 별이 잡혀 있는데 그 일곱 별이 하나님의 사자라, 하나님이 세운 종들이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 하나님의 교회라.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과 이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 종이 더러워지면 교회가 더러워지고 종이 깨끗하면 교회가 깨끗해지고, 종이 구원을 이루면 교회가 구원을 이루고 종이 멸망하면 교회가 멸망을 이루고, 이렇게 교회와 하나님의 사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 절실히 절실히 자꾸 느끼고 보니까 사도 요한이 이것으로 인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도 죽을 지경이 됐어.
이러기 때문에 교회의 사자가 죄를 하나 범하면 교인들은 열이나 백이나 범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사자가 의를 하나 행하면 교인들을 의를 열이나 백이나 할 줄 압니까? 아니요, 정 반대입니다. 죄와 의가 다릅니다.
교회의 사자가 하나 죄를 범하면 그 교인들은 죄를 열이고 스물이고 백이고 범하게 돼도 교회 사자가 의를 열을 행하면 교인들은 의를 하나 행하거나 백을 행하면 혹 몇을 행하거나, 이 의와 죄의 전염성과 번성성이 다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일 준비를 바로 합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말씀대로 살므로 맘미암아 세상과 이렇게 이질이 되기 때문에 나는 대립이 안 되려고 하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예수의 증거를 인해서 세상과 이렇게 이질이 되어지는 것, 이렇게 이질이 되어지는 것, 이것을 인해서 그저 기다려지는 것이 주일입니다. 자기가 차차 차차 세상과 싸우다 보니까 자기에게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식어져가고, 하나님께 대해서 경외의 마음이 식어져가고, 하늘에 대한 소망이 차차 흐려져가고, 진리에 대해서 강한 '생명을 내놔도 진리대로 산다! 내가 어떻게 현실에서 진리를 뭐하고 바꾸며 영감을 뭐하고 바꾸느냐? 우주와 생명과도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내가 뭐하고 내가 영감과 진리를 바꾸겠느냐?' 이렇던 내가, 주일날 이랬었는데 월요일날은 그것이 좀 월요일날 많은 파란을 겪으고 보니까 흐려지지, 화요일이 되니까 흐려지지, 이러니까 수요일이 되니까 영 답답해 못 견디는데 수요일 예배가 되니까 기다리다가 수요일 예배를 보니까 그날 좀 힘을 얻고 하니까 또 좋아지고.
이래 가지고 답답하다가 주일을 바라고 이러다가 주일날 와 가지고서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영감을 받고 보니까 새로운 힘이 나니 '내가 토요일날 한 것은 실수가 많았다. 내가 왜 악을 악으로 내가 뭐 대항 했던고? 악을 선으로 왜 이기지 못했던고? 오른뺨을 칠때에 내가 오른뺨을 맞든지 왼뺨을 맞든지 몸이 바스러져도 내가 그 죄악에게 피동되어서 죄악화되지만 안했으면 되는데.
죄악화되지만 안하고 사죄만 내가 상처받지 안하고, 칭의만. 내가 상처받지 안하고 그대로 있으면 됐는데 내가 껍데기 거기에 그것 이해를 따질라 하다가 내가 속에 의를 버렸고 사죄를 버렸고 이와같이 됐다'는 자기의 그 어젯날 생각이 어리석었다 하는 것이 생각이 되는 것이 새로운 힘을 얻는 이것이 주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날 자기 생활은 언제나 내가 진리와 영감대로 사니까 세상은 그 악령과 악성의 인간의 자율, 인율, 인본의 인간을 근본으로 하는 인본의 생활이요 하나님의 이 도는 하나님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서로 이래 마찰이 되고 대립되는 것이니까 이 마찰이 우리 생활에 있어야 합니다. 이 전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전투가 있어야 성경도 보고 싶고, 하나님도 그립고, 영감도 그립고, 기도도 하게 되고, 주일도 볼 때에 은혜가 받고 싶고 갈급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우리가 주일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하지 안했습니까? 우리의 매매하는 것을 다 그것을 쉬고, 또 자기의 업을 다 쉬고, 자기의 모든 의복이나 몸이나 마음이나 그런 것을 다 깨끗이 해 가지고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기다리다가 딱 와 가지고서 자기의 마음과 정성과 힘 전부를 다해서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생각해서 깨달아서, 한 번이라도 와 가지고서, 예배 시간에 늦게 철렁철렁 오지 말고 와 가지고, 여기 또 안 오면 다른 데서라도, 자기가 그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하나님이 누구고? 아버지가 누구고? 주님이 누구시고? 십자가에 뭘로 대속했노?' 이렇게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첫째는 감사에 견디지 못해서 감격의 눈물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그 권세를 의지하고 바라보고 하니까 평 안하고 즐겁고, 이래 가지고서 마음에 감사의 눈물과 참 또 자기의 잘못한 어리석은 그런 것에 대해서 원통의 그 후회도 생겨지고, 이래 가지고 주일날 와서 과거에 주님의 받은 바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격한 거기에다가 또 하나님이 새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을 주실 때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변화가 돼 버립니다.
마음이 변화되고, 성질이 변화되고, 각오가 변화되고, 의지가 변화 되고, 소망이 변화되고, 자기의 전투의 대상이 변화되고, 자기의 모든 평가가 변화되고, 변화가 되어지고, 이렇게 변화가 되어지고, 변화된 것을 오전에 변화를 거기다가 오후에 또 변화를 받고, 그다음에 일곱째로는 돌아가 가지고 여기에서 변화받은 것을 혼자가서 또 새로 한번 새김질해서 또 변화받고, 변화받은 것을 또 가족끼리 또 만나 가지고서 말해서 또 변화를 받고, 또 그리고 남은 시간이 있으면 "아무것이가 그걸 모를 터이니 가서 물어보자" 또 가 가지고 변화시키고.
이러다가, 이러다가 열 가지 기본구원도 또 생각해 보니까 또 변화가 되고, 일곱 가지 기도 제목도 생각해 보니까 변화되고, 하나님과 성경과 사람과 일과 물질에 대해서, 하나님, 성경, 사람, 사건, 물질에 대해서 스무 가지를 말한 그런 것도 생각하니까 또 변화가 되고, 이래 변화가 되어서, 이러다 보니까 자기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주여, 감사합니다.' 무릎 끓는 자가 되고, 또 자기가 하나님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자기는 자연히 성경을 보는 자가 되고, 새김질 하는 자가 되고, 이러다가 시간 됐으니까 부득이 또 주를 위해서 자야 되지 안 자면 안 되겠으니까 '누워 자자' 하면서 하는, 예수 안에 믿는 생활이 절대로 피곤치 안한 생활입니다. 젊은 독수리와 같은 생활이요. 피곤치 아니합니다.
우리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데서 다 그렇고,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질된 이 새사람인데 행동은 이 세상의 옛사람 죽은 거기 가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 탁해지고 흐려지고 무엇인가, 무엇인가 께꾸름하고, 무엇인가 불안하고, 무엇인가 불쾌하고, 무엇인가 힘이 없고 떨어지는 것은 그것은 마치 공중에 사는 새를 물 가운데 집어넣은 것과 같이 자기가 그런 구멍으로 기어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데로 들어갔고, 진리 떠난 데로 들어갔고, 옛사람의 육체의 소욕으로 들어갔고, 정욕으로 들어갔고 그런 데로 들어갔으니까 자기가 고민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