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에 부활받아

 

1981. 10. 11. 주일오후

 

본문: 베드로전서 1장 3절 - 12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는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는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주신 거와  같은 것입니다. 안식일은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이미  창조된 것들에게 거룩과 축복을 줘서 그것이 잘 되도록 하려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줘 가지고 이  안식일로 구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때부터는 주일날로 변경이 됐습니다. 주일날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가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그다음에 이리  저리 복잡한 일이 있었지마는 주일은 날짜 변경이 없습니다. 그대로 초대교회에  지키던 그 주일이 계속되어 오늘까지 지켜 나오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킨 여기서 안식일도 변동이 없었다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일은 예수님께서 이차 창조인 이 변동되지 아니한 영원히  변동이 없는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 이 생명성으로 건설하는 이 나라를  예수님께서 완전히 건설해 놓으시고 이 건설된 것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이  건설된 것들이 영원히 복되게 살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하나님이 주일을 주신  것입니다.

주일은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이 주일을 주신  것은 부활의 날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정해진 이 부활의  날은 우리에게 부활하는 날로 주신 것이 이 주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부활됐는가? 우리의 마음과 몸에는 수많은 요소가 종합돼  가지고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몸입니다. 영은 단일체로  되어있는 것이 영이요, 육이라고 하는 이 심신은 수많은 요소들이 모여 가지고  이것이 종합되어 한 체계를 이룬 것이 우리의 마음이요, 몸이요, 합해서 육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날에 부활이 된 것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활된 것은 영원히 죽지 안하고  다 영생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할 때에 어떤 힘으로 어떤 생명으로  부활이 되는가? 부활은 예수님의 이 공로를 인해서 진리가 역활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진리는 이 공로에 수종들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이 공로를 인해서 수종드는 이 진리는 하나님과 연결을 시켜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시는 것이 이 진리로 역활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이신 성령과 진리와 예수님의 공로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된  것은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부활된 것은 죽이지를 못합니다. 왜 부활시키신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이 공로가 그를 지키시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악한  것들이 만지지도 못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과 진리와 주의 공로로 부활된 이 심신의 요소가 엿새 동안 살면서  부활된 이것이 엿새 동안 부활된 그것이 삽니다. 마치 송아지를 갓낳아 놓으면  일어나지도 못하고 일어났다가 쓰러졌다가 일어났다가 쓰러졌다가 하다가  한나절이 지나면 뻘뻘 떨면서 일어섰다가 하루가 지나면 또 뛰어 다니다가 한  이삼일 지나면 제법 뛰어 다닙니다. 그것이 생명체로 나기는 났지마는 처음에는  난 행동을 못하고 자꾸만 환경은 쓰러지기 마련이고 또 꺼꾸러지고 자빠지고  쳐박히고 이러나 그렇게 하는 그 공간 속에서 난 것이 연단되어서 이제는 어떤  공간을 만나도 자유롭게 뛰고 걷고 할 수가 있는 것처럼 주일날 부활된 이  심신의 요소가 엿새 동안 온갖 환경을 만납니다. 온갖 환경은 이 부활한 요소를  부활한 요소 그대로 살려고 할 때에 살지 못하게 하는 그런 모든 환경들입니다.

그러나 살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그런 환경을 이기고 살 수 있는 자로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마치 갓난 송아지를 넘어지지 않게 두더기로 싸 가지고 힘 안줘도  꼿꼿하게 서서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놓으면 좋은 것 같지마는 그러면 그  송아지는 힘을 못 얻습니다. 그저 제 힘껏 하다가 쿡 자빠지고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그 넘어지게 하는 공간 같지마는 실은 모태에서  나온 그 송아지를 힘있게 난 것이 튼튼하게 만드는 그 환경인 것을 우리가 잘  해석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일날 부활된 그것이 엿새 동안에 부활된 그대로 살려고  하다가 넘어지게 하는 것이 환경입니다. 넘어졌다가는 또 일어나고 넘어졌다가는  또 일어나고 또 있다가는 또 회개하고 정신없이 날뛰다가는 또 가다듬어지고  이렇게 주일날 부활한 그것이 엿새 동안 온갖 시험을 겪는 가운데에서 부활한 이  부활체가 연단을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입었느냐" 하는 것은 진리와 성령과  주의 피로 공로로 부활된 것이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입고,  보호함을 입었다 말은 무한한 능력으로 그게 부활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했고, 진리의 능력으로 부활했고, 예수님의 피의 그 사죄의 공로로 부활했고,  칭의의 공로로 부활했고, 하나님과 화친된 공로로 부활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지극히 큰 능력을 입고 있는 자입니다. 지극히 큰 능력을 입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험을 당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걱정하지마는 주일날 부활한  그것은 기어코라도 연단받아 가지고 튼튼하게 되고 자라지 그것이 죽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껍데기 범죄에 넘어졌으면, 범죄했으면 속에는 강한 후회와 각오가 있습니다. 또  오히려 속에는 승리하는 결심이 있고 외부의 행동까지 승리하는 이 승리를  안팎에 이루게 되면은 그 승리를 이룬 거기에 잡탱이가 끼어 들어 가지고 승리로  인해서 도리어 교만해짐으로 그 다음에는 또 한번 다지는 실패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이걸 가리켜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한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주일날 부활된 것은  어떤 죄 가운데 갖다 놔도 그것이 결국은 부활한 그 생명이 이겨서 그 생명  생활이 강해지기만 강해지고 튼튼해지지 죽이는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보배롭다는 것은 금이  없었으면 불에 들어가면 다 은이고 쇠고 타버립니다. 거기 안에 있는 금이  안탑니다. 있는 금은 안타고 없는 금이 불에 굽는다고 생겨지는 것 아닙니다.

있는 금이 파묻혀 있다가 불로 연단하니까 다른 잡탱이는 다 타버리고 금 그것만  남는 거와 같이 주일날 부활된 것은 어떤 시련 가운데 넣어도 주일날로 부활되지  안하고 인간의 결심으로나 각오로나 방편으로나 인간의 꾀로 이렇게 생겨진 그  모든 신앙 출발은 여러가지 이 시련을 당할 때에 타버립니다. 죽습니다. 이러나  부활된 것만 안타고 안죽고 쇠해지지 안하고 그대로 성장되는 것을 가르쳐  말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보배라" 말은 불로 연단하면  없는 금이 생겨지는 것이 아니고 속에 들어있는 금이 다른 잡것 때문에 금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그것이 연단을 인해서 잡것은 타고 금만 남아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공로로 인하여 부활된 그것만  시련 중에 남아 있고 나머지기 인본으로 된 것은 다 타버리는 것을 가르쳐  말합니다.

과거에 신사참배 때도 그때에 이 주일날 부활된 그 요소들은 신사참배로 타지  안하고 숨어있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말도 하지도 못하고 목사 중에도  찌끄러기 목사기 때문에 이리 밀려 돌아다니고 저리 몰려다니고 이 수단 방법을  가지고 하는 인간들에게 밀려 다니다가 신사참배때가 오니까 인본으로 된 모든  수단방법 이 세상 정권을 등어리대 가지고 날뛰던 그런 것들은 다 넘어져서 다  타버리고 다 신사참배때에 다 굴복을 하고 진리와 성령으로 부활한 그것은 타지  안하고 그러니까 신사참배로 인해서 지금은 한국인데 그때는 조선입니다.

조선에 있는 그 교회의 부활된 것과 부활되지 안한 가짜가 확실히 드러나서  부활되지 안한 인본으로 된 것들은 다 타버렸고 부활된 것은 그대로 남아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무엇 때문에 죽으셨느냐?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의 그 죄를 담당하시니까 죄의 값은 형벌인데 그  형벌을 담당하시면서 살아 있으면서 아무리 담당해봐도 그 담당이 다 되지  안하기 때문에 왜 그 죄는 죄의 값으로는 완전히 죽어 끝나버렸기 때문에 죽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 끝나는 것을 담당하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형벌을 받되 아무리 오래 받아도 천년 만년을 받아도 형벌 받음으로 끝나는 다  형벌 받음으로 얻어지는 죽음 요것으로 끝을 맺지 안하면 대형이 다 안됩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의 이 값을 다 대신 담당해서 우리에게  죄없다는 이 사죄의 공로를 입혀줬습니다. 이것은 죽지 않고는 안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그렇다는 것보다는 자기 자율로 자기 주관으로  사욕으로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대적이 되어있는 이것을 가리켜서 불의라  말합니다. 죄와 불의는 다릅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도를 어긴 것 미달된 것 거기  근거해 가지고 하는 것이고 이 불의는 범죄한 인간이 자기를 중심해서 이제  원죄가 죄지은 이 자기를 중심해서 자기가 왕이 돼 가지고 역사한 그 모든 것을  가리켜서 불의라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 중심으로 일으켜 놓은 그것이 불의입니다. 이 불의를 이것을 없애는  데에는 불의는 제 마음대로 해 가지고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게 되야 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순종하는  것을 아무리 고생스럽게 순종하고 아무리 길게 순종하고 아무리 알뜰받이 순종을  해도 아직까지 순종할 남은 것이 있을 때에는 순종의 완성은 안됩니다.

순종함으로 이제는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요소가 완전히 순종하는 것으로 다  끝나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순종할 요소가 없소. 그 요소는 전부 순종할 것으로 다  끝나버렸소. 이러기 때문에 더 순종할 것이 없는데 다 순종하는 것이 다 돼버렸기  때문에 그러기에 이 죽음으로 예수님이 대신 순종해서 우리에게 이 의를  입혀주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이것을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는 이것을,  이것도 사망인데 원수되어 있는 이것을 우리에게 면제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심신을 다 기울여서 화평하려고 노력했지마는 그  화평은 이루어지지를 안했습니다. 마지막에 화평을 하시려고 화평하려고 하는  화평, 노력에서 당신의 것이 화평 노력에 다 들어가 버리고 이제는 화평 노력을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화평 노릇할 요소가 마지막으로 다 쓰여졌습니다.

고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전부는 화평을 위해서 끝났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 화평을  요청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화평에 응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 화친의 공로를 베푸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법적으로 된 것이요. 법적으로 된 것이요. 법적으로  된 것인데 이 법적으로 된 이것을 암만 법적으로 돼봤자 실질적으로 안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면해 나왔지마는 감옥에서 죄없는 자로 그렇게 해방이 됐다  할지라도 감옥에서 나오지 안했으면 감옥의 죄수 중에 하나로 있는 것이지  나오지 안하면 무슨 소용있습니까? 감옥에서 죄없는 자로 이제 석방 명령이나 그  감옥에서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이 사람이 죄로 죽은 자라. 죄가 없이  됐다 할지라도 살아나야 어짜지 죄없는 시체 의로운 시체 하나님과 화평된  시체라고 해 가지고 살아나지 안하면 무슨 소용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에서  죄없는 우리, 의로운 우리, 하나님과 화친된 우리, 우리가 됐지마는 실질적으로  죄없는 자로 살아야 되고, 의로운 자로 살아야 되고, 화친된 자로 살아야 이게  복있지 살아야 영원히 살지 죽어있는 것이 죄없으면 어쩔거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없다 해도 죄없으니까 죽이지 못한다. 의로우니까 그는 산다. 하나님과  화친됐으니 그는 화친대로 산다 할지라도 우리가 실지로 살아나지 안하면  우리에게는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시체로 이 심판에서 이거는 죄 없으니까 이리 내놔라, 내놔봤자  시체요. 이러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무엇 때문에 부활하셨느냐? 예수님의  공로로 이 세 가지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 만나면 우리를 행복된 자로, 하나님의  화친의 아들로, 의로운 자로, 죄없는 자로 이렇게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서  우리에게 이런 자를 만들어 놨지마는 이런 자로 실지로 이런 자로 우리가 살아나  가지고, 이런 자로 살아나 가지고 이런 자로 살아야 영광이 있지, 존귀가 있지,  이런 자로 살아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온갖 법적으로 불행을 제거하고 행복을 주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평강과 영광과 행복을 마련하는 요것을 실지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실지로 살려  이 생명과 평강과 복이 있는 자로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또 피조물을 입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중생이 왔습니다.

부활하시지 안하면 우리는 중생 못합니다. 죄는 없고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친된 자이지마는 우리 영은 죽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비로소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생명의 공로가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공로를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효력있게 적응할 수 있는 역사가 시발되어서 부활로 인해서  이 세 가지 공로를 입고 우리가 중생했습니다. 이것은 영이 중생된 것입니다.

중생됐는데 중생된 우리가 이제 남은 영은 중생했지마는 아직까지 심신은  중생되지를 못하고 죄아래 그대로 있습니다. 또 이거는 단번에 한번만 중생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 요소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 번을 중생해야  될런지 만 번을 중생해야 될런지 모릅니다. 마음도 고깃덩어리도 요소가 천요소  만 요소 더 됩니다.

이래서 기능도 수많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중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인해서 중생이라고 말을 하든지 그러면 부활이라고 말을 하든지 이렇게  이것이 다시 살아나야 됩니다.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 말하기를 중생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중생은 영이 중생한 그것을 일반적으로 다 중생이라 이렇게 쓰고 이 모든  심신의 요소 이것은 중생이라 이렇게 하나로 말하기 때문에 구별을 못합니다.

그러기에 영이 중생한 것은 중생이요, 이 몸이 구속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은  이것은 부활이라 썩은 것이 생명에게 삼킴 받으면 이것이 살아나는 것이라.

이래서 우리의 이 심신 요소가 예수님의 공로를 가지고는 있지마는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새공로,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를 입고 있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이 다시 또다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이 공로를 우리가  입어 가지고 우리가 부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부활은 주님께서 이 주일을 주신 것은 부활의 날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래서 저 전에도 늘 증거했지마는 보면 과거에 제 칠일을 말했다가 제  팔일에 행사한 일이 있었는데 팔일에 행사한 것은 죽음의 그 범위 안에 들지  안하고 죽음의 범위를 벗어나서 이제 삶의 범위의 시작을 가리켜서 팔일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난지 팔일 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 제 칠일이 지난 새 이레중에 첫날이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러기에 안식일을 지킬 때에도 새생명에 속한 이것은 전부  주일날 했습니다.

그때 안식일날 모든 행사를 하지마는 주일날 해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된  그날도 주일날이고,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날도 주일날이고, 또 오순절 성령강림이  주일날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도 주일날이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땅  위에 사십일 동안 있었는데 그 여섯 주일을 지킨 그날도 주일날이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들어가신 것도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재림하실 것을  예표한 것인데 그날도 주일날이고 전부 주일날 행사입니다.

이걸 누가 어떤 학자가 좀 순서있게 좀 기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좀 보여주면  좋을 터인데 이것은 깜깜 묻어놓고 지금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무능한  제가 벌써 말하기를 수십년 두고 말하지마는 사람들이 간판 있어야 듣지 간판  없으면 안 듣고 내가 박사가 됐으면 들을 건데 박사가 돼 듣는 것도 가짜가 또  듣습니다. 그건 가짜가 듣소. 명예 보고 오는 자이기 때문에 가짜가 들어.

하나님이 듣게 할 자는 들어.

이렇게 주일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 죽은 것들이 주일날 부활이 돼야  됩니다. 주일날 부활됐는지 안됐는지 그것은 뭘 보고 표가 나느냐? 주일날 부활이  됐으면 엿새 동안 부활된 그것은 넘어졌다가도 일어납니다. 꺼꾸러졌다가도  일어납니다. 기어코라도 주일날 부활된 그거는 엿새 동안을 시련받아 가지고  그것이 튼튼한 자로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주일날 부활받지 안한 그 요소는 엿새 동안에 큰소리도 하고 뭐 장난도  하고 열심도 내고 온갖 짓 다 합니다. 맹세도 하고 요다음에 뭐이 오면 이긴다  큰소리 뻥뻥 하지마는 엿새 동안에 퍽 불을 대면 바짝 타버리고 맙니다. 속에  금이 있어야지 금이 없으면 탑니다. 아무리 뭉텅이가 커도 이 불은 속에 있는  금을 걸러내고 금 아닌 것을 태우는 것이 연단하는 불인데 속에 금이 없으면  불로 태운다고 금이 나옵니까 타버리지.

주일날 부활되지 안한 그것은 엿새 동안 제가 아무리 큰소리하고 아무리 열심을  내도 주일날 부활되지 안한 그것은 타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이 부활하심으로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고 변화산에서 변화되는 것도 주일날 했소.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도, 무궁세계에 들어가는 것도 뭐 모형한 것인가 무궁세계 들어가는  그 모형도 주일날이요, 또 사람들이 성령으로 되어지는 이 성령강림도 주일이요.

이러니까 주일날 우리가 부활된 것은 엿새 동안 시련받는 데에서 오만 불덩이를  다 쳐도 마지막에는 이기고 맙니다.

이것이 마치 송아지가 나 가지고 어머니 배 속에 탁 조리 찌고 있으니까 이리  넘어가도 제가 튼튼하더니마는 이제는 쏙 나오고 보니까 그 주위 환경이  넘어지게만 하는 것 뿐입니다. 여기에도 의지할 것 없고 넘어지면 푹 넘어지도록  공간이지 여기도 넘어지면 공간이지 넘어지게만 하는 것뿐이요.

이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넘어지는 가운데서 시련돼 가지고  튼튼한 자 되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생명이 없다면 그와 꼭같은 공간과 시간을  지나가면은 그 뭉텅이는 썩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연단을  받지마는 생명이 없으면 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일날 부활된 것은 그 심신이 성령으로 부활되고 진리로  부활되고 예수님의 공로로 부활된 이것은 성령이 오면 내것을 가지고 증거하리라  예수님이 죄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이렇게 부활을 시켰소.

진리가 시켰고 성령이 시켰는데 시킨 그것은 그다음 엿새 동안 사는 가운데에  어떤 불연단이 와도 그 사람들에게 주일날 중생된 것은 부활된 것은 안주십니다.

부활된 것은 기어코 그 주일을 통해서 강해집니다. 튼튼해집니다. 주일날  부활되지 안한 거는 헛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다른 말로 말하면 주일날은 거룩하도록 하기 위해서 했다. 모든  걸 다 제거하고 완전이라는 이 성화, 주일날은 성화받는 것과 축복받는 것이  주일날 우리가 받는 것인데, 축복은 뭐이 축복입니까? 축복은 부활된 것. 이  부활체로 살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부활체로 살면 세상 축복도 하늘나라 축복도  받습니다. 부활체로 사는 그것이 계명지키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부활체로 사는 것은 그것이 축복이요. 부활체 그거는 자체가 변화된  성화입니다. 성화를 받는 것과 또 성화된 자로 엿새 동안 시련 중에서는 살 수  있는 그 은혜를 받는 그것이 주일날 우리가 받는 은혜인데 주일날 부활되지 안한  것은 엿새 시련에 불탈 것이고 주일날 부활된 것은 엿새 시련 동안에 불타지  안하고 정금처럼 고것은 뚜렷이 더 나타납니다. 부활된 것은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엿새 동안에서 불탈 것 뿐이니까 엿새 동안에 불이 타고  어떤 자는 엿새 동안에 불타지 안하고 진리와 성령과 주의 피로 거듭난 구속함을  받은 이 산 것, 살아난 것, 부활한 것, 이것이 자기에게 뚜렷하게 이것이 튼튼하게  되는 그 은혜를 엿새 동안에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엿새 동안에 자기의 결심과 각오와 장담과 소원이 엿새  동안에 바짝 불에 타버리고 바짝 타버리고 암만 결심해야 소용없어. 결심도 타고  각오도 타고 장담도 타고 소원도 타고 욕심도 타고 엿새 동안에 타버립니다.

그러나 주일날 성령과 진리와 주의 공로로 이렇게 부활된 것은 다 같이 타는 것  같았지마는 다른 것은 타고 부활된 것은 절대로 안탑니다. 더 완전하여지고  연단해집니다.

그러기에 주일날 부활을 받는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져도 일 년이 지나니까 그  사람이 진리로 살아난 것이, 성령으로 살아난 것이 주님의 이 세가지 공로로  살아난 것이 차차차차 양이 많아지고 커지지마는 주일날 부활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일 년 가도 그만 십 년 가도 그만입니다. 매주간 연단시키다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그 지방교회를 그 시대 교회를 하나님께서 연단시켜서 이  가짜 부활되지도 못한 하나님으로 진리로 주의 피공로로 부활되지도 못한 이것이  부활된 척하고 날뛰면서 그게 큰소리는 더 하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속아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한번 뜨거운 물로 가지고 한번 바짝 꾸어서 금 아닌 거는 다  타버리도록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로 부활되지 못한 거는 타버리도록 이  불덩어리 오니까 다 타버립니다.


선지자선교회 6. 25때도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신앙을 모르지마는 6. 25로 인해서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드러나서 다 같은 사람으로 봤지마는 그 사람은 6. 25를 인해서  확신이 생겨지고 더 하나님과 가까와지고 진리와 가까와졌고 예수님의 공로와  가까와져서 이것이 두렷하고 어떤 자는 6. 25를 만나니까 산산히 부서져서 없어.

그렇게 큰소리한 자들이 아무 것도 없어.

이것은 부활된 것으로 되지 안하고 부활 안 된 것이 인본으로 가지고 꾸며  가지고 이렇게 날뛰었던 것이 불이 오니까 쇠도 타고 구리도 타고 주석도 타고  돌도 타고 은도 타고 금만 남는 것처럼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로 거듭난 이것만  남고 나머지기는 다 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오후에 말하는 증거의 교훈의 목적은 어디 있느냐? 엿새  동안 이런 저런 생활 가운데서 연단받는데 연단받는 거기서 제가 안 넘어지려고  각오하고 결심하고 열심하는 것도 좋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절대 안됩니다.

주일날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주일날 부활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주일날 부활된 것이면 엿새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그거는 남습니다. 그것만 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이레 중에 주일날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에게  거듭나는 은혜를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이 날을 우리에게 부활한 날로 주신 이날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활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서부교회서 주일날 새벽에는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토요일날은 오전만 일하고 오후에는 주일 준비를 하도록 해 가지고 이렇게  주일을 예배를 드리면 벌써 주일을 지키는 그 앞에 거의 하루라는 날이 준비가  됩니다. 하루가 토요일날 오후, 또 밤 열 두시로부터 또 그 오전 예배 때까지  이렇게 되어지니까 거의 하루라는 날이 준비가 되어지지마는 주일날이라고  내일은 일 못 할 터이니까 오늘날 일하자 해 가지고 열 두시 땡 것도록 까지는  마구 일하던 일까지 다 해서 골이 쪽 빠져 가지고 주일날 오니까 전부 쓰러져서  존다 그말이오. '서부교회 가니까 전부 자는 사람 뿐이더라' 좋은 빛을 보였소. 그  벌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부득이 토요일을 이렇게 하니 할 수 없어. 주일날 아침에는 좀 푹 자고  하나님께서 오전 예배 때에 하나님이 부활시킬 때에 부활을 하라. 주일날 성화를  받아라. 네 자체가 변화가 돼야 된다. 성화를 받아라. 부활을 하라. 이렇게 한  것인데 이것도 하지 안하고 주일날 고기덩어리만 와 가지고 자리만 차지하고 똑  앉았다 가니까 주일 지킨 줄로 알고 다닙니다.

신앙생활은 주일날에 있습니다. 이레 동안 신앙생활하는 그날 중에 주일날이 제일  으뜸되는 날입니다. 주일 중에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내 인격과 심신의  전부가 하나님과 접선될 때에 여기서 폭발이 됩니다. 여기서 폭발이 됩니다.

하나님 은혜가 접선할 때에 변화가 되고 진리를 접선할 때에 변화가 되고  예수님의 공로를 접선해 변화가 되는데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진리와 하나님  우리가 접선 못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접선할 수 있는 중매쟁이가  됐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진리와 하나님과 접선될 때에 거기서 부활의 변화가  와야 됩니다. 부활의 변화가 왔으면 엿새 동안에 제가 결심 안해도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안 넘어져도 넘어지면 결심이 더 됩니다.

그러나 껍데기가 넘어지면 속에는 힘이 더 강해지고 속에 힘이 강해지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껍데기까지도 일어나게 되고 일어난 데에 잡탱이가 들어서  일어나 가지고 교만해지면 또 넘어지고 넘어짐으로 속에는 더 강해지고 어쨌든지  부활을 한거는 죽지 않습니다. 부활한 거는 죽지 않는데 부활하지 아니한 것은  엿새 동안에 암만 날뛰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말만 하지 강하게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 주장을 하면 내게 또 오는 바람이 셉니다. 내게  불어오는 바람이 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안하지마는 나 혼자는 그래 믿고  있습니다.

성화도 주일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요소도 주일이다. 왜? 예루살렘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들어가신 입성 그날이 주일날이다. 변화산에서 변화된 것이  주일날이다. 성령강림도 주일날이다. 할례도 주일날 제 팔일날 받았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도 우리 대신 세례 받으신 것도 주일날이다.

왜 안식일을 지킬 때에 이렇게 안식일 그 다음날로 이 모든 생명의 역사들이  일어났던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주장하는 것은, 그것은 많이 대립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약한 자들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까 그저 이렇게 말하나 나는  그대로 믿습니다. 나는 주일날에 부활해야 된다. 주일날 부활 안된 거는 헛일이다.

엿새 동안에 승리의 생활은 주일날 받지 주일날 엿새 동안 승리의 능력을 받지  안한 그것이 엿새 동안 결단코 승리 못한다. 암만 승리해봤자 인본으로 돼봤자  마지막에 큰 불이 내려와 가지고 신앙없는 거는 그때 다 도망 다 친다. 왜 수십년  동안 신앙생활 한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제 이계명을 범하는 신사참배에 다  넘어지고 쓰러졌던가?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지지 안했기 때문에 죄가  삼킬 수 있었지. 불의가 삼킬 수 있었지. 마귀가 삼킬 수가 있었지. 이 셋이  둘러싸고 이 셋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이 어떻게 그런 것이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지 맙시다. 우리의 구원은 날로서는 주일날 된다, 주일날. 우리 구원은  구원의 씨를 받는다. 주일날 우리는 부활된다. 엿새 동안은 부활된 것이 연단받는  생활을 한다. 영은 단번 부활이지마는 우리의 마음과 몸은 수없는 요소를 가졌기  때문에 수없는 차례로 부활받는다. 부활은 하나님으로 부활되고 진리로 부활되고  주님의 공로로 부활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지키시기 때문에 그거는 다시 죽지를 않는다 요것을 믿고  싶은 자는 믿으십시요. 주일날 부활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주일날은 등한히  하고 제가 엿새 동안에 암만 골빠지게 힘써봤자 거기는 안됩니다. 주일날 우리의  심신은 부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시대 시대마다 자던 성도들이 깨는 큰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은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은혜 역사가 일어난 때마다 다  주일날입니다. 다 주일날이요,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고집을 피우고 반항을  하면 저만 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생활하는 날이 이레 다 신앙생활하는 날이지마는 이레 중에  월 화 수 목 금 토 주일 이 이레 중에 제일 중요하고 생명되게 요긴한 날이  주일날입니다. 주일날 중에도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예배터서 변화받는 이것이  주일날 부활되는 것입니다. 이 주일날 부활돼야 그때 돼 놓은 그것이 엿새 동안에  이런데 저런데 시련받는 그것이 넘어져도 살아나고 자라가지 생명없는 것이 엿새  동안에 시련 받으면 썩지 뭐 됩니까? 왜 우리가 엿새 동안에 뭣 때문에 썩는  일이 되어지고 생명역사가 있지 않느냐 그건 주일날 부활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의 심신을 구원시킬려거든 엿새 동안 힘쓰는 것보다 주일날 하루 힘을 다  써서 어쨌든지 주일날 부활돼야 됩니다. 부활되면 엿새 동안의 시련은 저절로  받아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일날은 우리가 조그만치라도 다른데 마음을 기울이면 땅에 있는  일이야 이중 삼중 할 수 있습니다. 손으로는 이 일 하면서 입으로는 저 일 할 수  있고 마음으로는 저 일 할 수 있고 또 소원으로는 딴데 소원할 수 있고, 우리가  여러 갈래길로 역활할 수 있습니다마는 부활은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몸도 이 기능 부활은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피공로와 인해서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 만족히 되고 그거 돼야 됩니다. 주님의 피로 된  것은 사죄와 칭의 새생명 받으셨기 때문에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자기는  죽고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 받은 자기가 돼야 되고 이래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통한 그 진리, 요 하나님 말씀을 통한 그 진리의 소개를 받아  가지고 그 진리의 소개를 받아서 예수님의 피공로로 나는 죽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나만 돼 가지고 있는 이것이 진리의 중매쟁이로 소개받아 가지고  하나님과 딱 들어붙어서 폭발이 돼야 됩니다. 불이 일어나야 됩니다. 부활이 돼야  됩니다.

이래야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지 제 본인으로 오만 꾀 다 쓰고 세상 것을  점령하는 것같이 그렇게 꾀로 수단으로 방법으로 자기 인격 다 주고 다른 것  갈라 놓고 그 중에 하나나 둘이나 찌끄러기 가지고 대하는 그 자는 저만  속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에게 심신을 부활시키는 날로 주셨습니다.

주일날 심신의 요소가 부활을 받은 그것이 엿새 동안에 시련받지 주일날  부활받지 못한 그것은 엿새 동안 하는 것이 그다음 주일날 부활받을 준비는  될지언정 생명의 연단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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