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22:35
주일날
1988. 08. 21. 주후.
본문: 마 28:1-7, 요 4:24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의 온갖 구원 곧 영의 구원이나 몸의 구원이나 또 금생의 온갖 구원이나 영원 내세의 온갖 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이 대속에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육 금생 내세의 모든 멸망이 다 해결되고 또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금생 내세 육과 영의 모든 생명과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치 안하는 모든 것을 다 소멸하고 해방시켜 해결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근거되어 있고 또 우리의 모든 영육 금생 내세의 온갖 생명과 평강과 행복이 예수님의 대속에 근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대속에서 이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외 사활의 대속을 잡는 것이 자기 영육 금생 내세의 모든 멸망을 벗을 수 있는 그 권세를 잡은 것이고 모든 행복을 잡은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중심한 말씀이요 또 예수님을 중심한 모든 중심의 중심은 곧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인 것입니다. 이를 인해서 모든 존재가 있고 또 이를 인해서 모든 시간과 순서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생사화복 흥망성쇠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근거 되어 있는 이 사실을 알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성령님이십니다. 사람이 모든 것이 여게 기인되어 있는 이 사실을 알고, 기인됐다 말은 그것이 다 원인이 되어 있다 말입니다. 여게 기인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이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고 여기에 자기가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는 다 성령의 사람이요 실패 없을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등한히 여기고 뭐 세상이 말하는 문화나 지식이나 모든 종교들이나 모든 과학이나 모든 인간들의 연습이나 수양의, 또 세상에서 높이 평가하는 모든 번쩍거리는 얼룩거리는 그런 광채 있는 그것이 좋다고 거기에 자기의 심신을 기울이고 그것을 제가 잡았다고 얻었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또 자랑하고 또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날뛰는 사람은 실은 그 사람이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광인입니다.
완전히 미치괭이입니다. 그거는 비정상의 사람이요 미치괭이가 자기의 정상을 잊어버리는 거와 같고 또 귀신들린 사람이 이 바른 것을 가질 수 없는 거와 꼭 같은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 지식에까지 새로와져서 모든 지식이 달라짐으로 모든 존재관도 또 이렇게 나열되어 있는 순서관도 또 그것이 역사하여 조성되어 가고 있는 조성관도 그것들의 모든 가치를 논하는 그 가치관 평가관 보든 논리하는 논리관 이런 것이 완전히 바꾸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꾸어지기 전이는 이 기독자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자기에서 거리가 심히 멉니다.
이래서 사람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택함 입지 못한 사함이요 한 종류는 택함 입어 중생된 사람들인데 중생된 사람이라면 남녀 노소 대소 할 것 없이 다 그 사람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의 사활 대속에 다 매여 있고 거기에 근거되어 있습니다. 거게서 잘못되면 다 헛일이고 거게서 또 바로 되면 아무도 그 바로 된 것을 해할 자는 없습니다. 이래서 거기에다가 자기 전 소망을 두고 거기에다가 자기의 전부를 쏟아 붓는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요 후회 없을 앞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우주와 영계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우리의 모든 것에 화를 멸하는 것의 근거도 되고 모든 생명과 행복을 이루는 데에도 이것만이 뿌럭지라 말입니다. 근거라 말은 뿌럭지라 말이요 기초라 말이요 종자라 말입니다. 이것만이 씨종자요. 또 기초요 또 뿌럭지입니다.
그러기에, 이 가치를 이 도리를 깨닫고 모든 불행 정리에 원인이 되고 모든 행복 건설에 원인이 뵈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그 헤택으로 가질라고 하면 가져지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일날입니다. 주일날은 이것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날 중에 제일 귀한 날이 주일날이요 또 주일 중에 제일 귀한 시간이 하나님의 도를 듣고 가르치고 배우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귀한 역사요 시간입니다. 오전에도 거게 대해서 간단하게 증거를 했습니다. 주일날은 예수님의 사활의 그 대속이 한테 연결된 그 날이 주일날이요 또 이 둘이 한꺼번에 연결이 돼 가지고 하나가 돼 가지고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주시고 성도들을 그것을 받아서 자기 것 삼을 수 있는 날로 하나님이 정했습니다.
다른 날도 여게 대한 은혜가 약간 있기야 있겠지마는서도 그래도 근거적으로 씨종자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날은 주일날입니다.
그러기에, 이 주일관을 우리가 바로 가져야 합니다. 주일날은, 주님의 대속이라면 전부인데 주님의 대속의 이 씨종자, 주님의 대속의 이 씨 종자적으로 우리가 받아 가지고 그것을 엿새 동안에 잘 먹어 소화하여 자기가 자라서 그것을 엿새 동안에 잘 길러 장성케 해서 주일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것을 씨종자적으로 받는 날이요 월·화·수·목·금·토는 받은 그것을 내가 그대로 생활해서 실상화시키는 것이 그것이 엿새 동안에 할 일인 것입니다.
이래서, '엿새 동안은 자기 모든 일을 힘쓰고' 이랬는데 그러면 힘쓴다 하니까 사람들이 해석을 하기를 엿새 동안은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옷도 입고 이렇게 하니까 그런 일 하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다 자기 일이지마는서도 자기 일 한다 말은 이 주일날 우리가 받은 그 은혜를 실상화시키고 자기 것 만들고 이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모든 은혜를 받는 그것이, 이 주일날 자기가 받은 은혜로 인해서 그와 관련된 수많은 축복, 수많은 은혜, 수많은 치료, 수많은 성장, 수많은 개량 이런 것을 엿새 동안에 그를 가지고 그 자본을 가지고서 이것저것 하는 그것이 자기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을 직장에서 하고 또 학생들은 자기 학업에서 하고 또 어떤 종업자는, 어떤 노무자는, 또 어떤 포로되어 있는 포로자는, 어떤 형으로 구금되어 있는 자는 구금되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그날도 거게서 자기는 예수님의 대속을 대속의 혜택을 이루어 가는 그 일 하는 것을 가리켜서 자기 일 하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날은 뭐 예수님의 대속과 관계없는 일이 되고 주일날만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래서 그건 여러분들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뭐 말하지 안해도 생각하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저 주일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온갖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는 받게 되는데,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 자기가 해석을 하면 다 알 터이니까 - 죽으심으로 사죄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또 죽기까지 하심으로 칭의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죽기까지 하심으로 화친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대속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주일날 새벽까지에 예수님이 죽어 계시는 그것으로써 우리에게 대속을 완료하셨고 또 새벽부터 다시 하나님이 이 피조물의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하는 이 구원을 얻게 됐고, 또 우리가 진리와 영감으로 영생하는 이 생애를 얻게 됐고, 또 이로 인해서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더러워지지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는 산 소망과 산 기업을 우리가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받은 구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받은 구원이 어떠한 것을 각자 자기대로 이것을 지식하고, 지식하는 것은 귀로 듣고 또 눈으로 읽고 함으로 알겠습니다. 지식하고, 지식하는 여게서 인정하는 데로 뿌리박고, 자기 지식한 것을 자기가 많은 노력으로서 인정하는 인정에 뿌리를 박고 또 인정한 그것이 많은 노력으로 실지로 느끼는 실감에 뿌리박고, 또 실감이 자기가 그대로 행동하는 행동에 나아가서 뿌리박고, 또 그 행동으로 인하여 자체가 변화됩니다. 사죄로 변화되고 칭의로 변화되고 화친으로 변화되고 또 새 생명으로 변화되고 영생으로 변화되고 자체가 완전히 그리스도화 되는 것으로 이렇게 변화가 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는 그 신령은 성신의 감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성신의 감화가 내 예배에 동행하지 안하면 그 아무 소용없습니다. 또 진정이라 말은 내 인격의 그 진수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니 곧 내가 지식하는 것도 좋지마는 지식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알고 아주 멸시 천대하는 것입니다. 제딴에는 지식으로 알면 하나님을 참 대속을 이와 같이, 알고 믿는 줄 알지마는서도 자기가 지식한 그것을 인정치 안하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되고 또 자기가 인정한다 할지라도 거게 대한 실감을 자기가 가지지 안하면 자기는 외식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그렇게 아주 멸시하는 푸대접하는 일이 됩니다. 또 자기가 실감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실감이 행함에 도달치 못했으면 그 실감은 있다가 없어진 실감이요 그 실감은 다 외식된 실감입니다. 또 자기가 그와 같이 행함을 했다 할지라도 그 행함이 아무리 여러 차례 하고 많이 한다 할지라도 그 행함으로 인해서 자체가 변화되지 안했으면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 말은 영이시라 말은 이 물질계의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계의 것이 없는 그 영 이시기 때문에 무형의 존재인데 다만 우리가 그분과 관련을 가지는 데에는 영감으로 관련을 가질 수 있고 우리의 전 마음을 다하라 목숨을 다하라 힘을 다하라 뜻을 다하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의 고 진수를 말합니다. 인격의 진수. 인격의 진수를 말하는데 고 인격의 진수 고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지식하되 인정 있는 지식, 인정하되 실감 있는 인정, 실감 있되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실감. 또 그 행하되 행함으로 인해서 자체가 이제 마음도 마음의 각 요소도 몸의 요소도, 변화되는 그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이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그 대접을 받을 수 없다 하는 그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제 어떤 학생이 서울대 학생인데 자기가 그 반에서 제일 일등을 해 가지고서 칭찬받고 장학금과 뭐 모두 받아서 돈이 안 들게 됐다면서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부탁하기를 '하나님은 머리 떼서 바치라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라, 또 제일 먼저 추수한 걸 바치라 자꾸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분이 지극히 크시고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곧 수지를 당신이 받을 수 있지 자기로서 제일 귀한 거 그것이라야 당신이 받을 수 있지 그 외의 거는 받을 수 없는 것은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몰라 그렇든지 알고 그랬든지 어쨌든지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그 범성, 거룩을 범하는 것이요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용납지 아니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그 수지를 아나 모르나 이래 물으니까 자기 어머니는 안다 하고 자기는 모른다 하기 때문에 설마 가면 잘 가르쳐 주겠지. 수지라 하는 것은 자기가 준비한 것 중에 제일 으뜸 가고 시간적으로 으뜸 가고 가치적으로 으뜸 가고 자기의 좋아하는 그 정성으로 으뜸가는 고걸 가리켜서 수지라 그랍니다.
수지. 수지. '수지라야 하나님은 받지 수지 아니면 받지 않는다. 그런 걸 네가 깨닫고 수지를 네가 바칠 때에 그분은 너를 멸시하지 안할 것이요 네가 수지 아닌 딴것을 바치면 네가 주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도 너를 멸시하게 된다.' 고것을 내가 그 사람에게 말을 해 주고 잠깐 기도하고 그쳤습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말은 무형의 존재라 그말입니다. 영이라 말은 무형의 존재요 뭣 보이는 걸 가지고 이렇게 드려봐야 그분에 대접도 되지도 안하고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시니' 그분을 예배하는 자는, 그분을 섬기는 자는, 그분을 섬기는 자는 신령으로 섬기라.
성신이 너의 섬기는 일에 동행할 수 있는 섬김으로 해라. 네 섬기는 것을 성령이 찬성하고 인정할 수 있는 섬김으로 섬기라 하는 것을 신령으로 섬기라 말한 것입니다.
사람도 다 각각 제대로는 자기로서 거게 동참할 수 없는 그런 거짓부리의 외식의 행동은 제대로는 동참 안 할라 합니다. 아무리 평신도라도 평시민이라도 그 사람이 아주 자기로서는 거리 먼 그런 흉측한 그 일에 같이 가담해라 하면은 그것은 자기 인격에 모욕도 될 뿐 아니라 자기 또 그 처세에 수치도 되고 자기 위치에 많이 욕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안 할라 합니다.
또 만일 그 사람이 세상으로서도 참 조심해서 남한테 그래도 사람답다고 하는 그런 만일 인정을 주먹덩이만치 받는 사람이라고 하면은 요 주먹덩이 요것이 깨어질 수 있는 그 일에는 제가 동참 안 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제 위치와 지위가 주먹덩이만침 생긴 것이오. 다 그렇게 해 가지고서 이제 산더미만침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그래 생기지를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완전자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욕이 되고 거리낀 그것은 당신이 거기에 동참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최소한으로, 최소한으로 성령이 인정할 수 있는, 성령이 동행할 수 있는, 성령이 찬성할 수 있는, 찬동할 수 있는 그 정도가 돼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예배가 시발된다.
또, 너로 말하면 진정이라. 진정이라 말은 네 인격에 뿌럭지에 외나 예를 들면 인격이 여게 껍데기, 속에 겉뿌럭지, 그 밑에 뿌럭지, 그 밑에 뿌럭지, 그 밑에 뿌럭지, 맨 밑에 뿌럭지 인격의 본질 본성 이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인데 그절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지 네가 알아도 저기서 제일 수지는 남겨 놓고 제이도 남겨 놓고 제삼도 남겨 놓고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 그거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그것이 네가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써 자꾸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지마는 화를 받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하다가 말았으면 마지막에는 그것은 하나님이 복수로서 그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유황불 구렁텅이에 중생된 사람의 심신의 기능이라도 사정없이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영원히 태워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성을 동정하시되 어느 기간까지 동정하시지 끝까지 그 행세하는 것은 유황불 구렁텅이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어떨 때에는 한없이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 어느 시기가 지나가면은 한없이 잔인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하나님이 영이시라' 그말은 영물이라 말 아니고 영이시라 그말은 그분은 완전이라 그말이오, 그분은 완전이라. 완전이기 때문에 형상이 있을 수 없어. 또 완전이기 때문에 완전이 아닌 자는 볼 수가 없어. 당신은 당신만 당신을 보지 다른 이는 볼 수가 없어.
'영이시니'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섬기는 것은 적어도 성신이 인정할 수 있는 그 섬김이라야 되고 또 너로 말하면 네가 못났든지 잘났든지 어쩌든지 하나님이 너에게 주셔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두 냥쭝도 관계없고 한 냥쭝도 관계없고 닷 냥쭝도 관계없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그대로 남김 없이 다해서, 그것을 해석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그말은 남김없이 전 수지를 바치라 그말입니다. 이래야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망에 속한 것을 해결하는 것도 주님의 사활의 대속에서 됩니다.
모든 생명과 행복도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서 됩니다. 사활의 대속은 주님이 주일날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주일날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반동가리 부활하심의 반동가리 둘이 합쳐 된 그 은혜의 날로 우리에게 주시는 날이 주일날입니다.
이러니까, 주일날 우리가 받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자기 지식대로 얼마든지 해석을 해서 깨달아지면은 어떤 사람은 하나 깨달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열을 깨달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백을 깨달을 터이니까 네가 어데까지 자랐던지, 어데까지 자랐던지 그대로 자라가라. 빌립보 3장에 어데까지 네가 자랐든지 그대로 자라가라. 너는 그 자리에서 오만하지 말고 그대로 자라가라.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주님이 사죄해 주시는 데는 얼마나 힘들여 해 줬는가? 그것도 네차 알고 알고 또 알고 또 알고. 또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는가? 알고 또 알고 또 알고. 연구하면 또 알겠고 연구하면 또 알겠고 또 알겠고 더 그 깊이가 무한하게 자꾸 알 수가 있고 칭의도 그러하고 화친도 그러하니, 네가 여게 대해서 먼저 지식 해서 지식으로 자라가고 지식에서 네가 인정으로 자라가고, 인정이라 말은 이 지식으로 아는 것을 '아, 사실이다.' 사실로 자기가 인정하는 인정으로 자라가고, 인정에서 자기가 실감으로, 자기가 참으로 느끼는 그 실감으로 자라가고, 그 실감이 이제는 행하지 안할래야 안 할 수 없어.
필연적이라, 다. 행함으로 자라가고, 행함으로 인해서 자체가 사람이 변화되어지는, 변화되어지면 어떻게 변화되어지는가? 변화되어지는 것이 사죄대로 변화되고, 칭의대로 변화되고, 화친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사망과 모든 멸망을 벗어나는 것이오. 전형은 다 멸망이요 변화는 그 멸망의 전형을 벗고 새로와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평생 이 일에 힘을 써서 나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알고, 또 앎으로써 그만 아니라 아는 것을 가지고 자꾸 자기가 노력할 때에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안한 이 사실을 자기가 믿어지게 되고, 인정하게 되고 믿어지게 되고, 또 믿음에서 자기는 자꾸 노력해서 그 마음에 실지로 실감, 자기가 실지로 실감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실감에서, 실감에서 필연적으로 안 행할 수는 없고 행하게 되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자체가 변화되어지는,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시작하면 시작에서는 전부 필연성입니다. 필연이오. 필연적이라.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이 알게 되고. 안 것만치 그 사람은 믿어지게 되고, 믿어지게 된 것만치 실감에 나아가게 되고, 실감에 나아가는 그것이 자기의 기능은 전부 총출동했습니다. 마음의 기능은 전부가 움직여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실행에 나아가는 것은 자기 몸의 기능은 총출동 해 가지고 총동원 해 가지고서 거기에 다 순응하게 된 것입니다.
그라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마음도 변화되고 몸도 변화돼서 마음과 몸의 기능은 필연적으로 변화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성화인데 어떻게 성화되는가? 사죄로 성화되고, 칭의로 성화되고, 화친으로 성화되기 때문에, 이제는 변화된 것이 죄는 죽어도 죄를 범할 수가 없는 자 되고, 의는 죽어도 양보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화친한 것은 죽었으면 죽었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는 것으로 자꾸 이와같이 변화되어 나간 이것이. 성화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모형이요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노력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이제 안 들으면 모릅니다.
먼저 지식해야 되고, 지식에서 자기가 확신하는 확신으로 성장돼 나가야 되고, 확신에서 자기는 실감으로 나가야 되고, 실감에서 행함으로 나가야 되고, 행함에서 자체가 변화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되면, 변화되면은 또 알게 되고 변화되면은 또 알게 되고, 알면 또 믿고 또 자기가 믿는 거 인정하고. 그라면 실감 가지고, 그 다음에 행함 가지고, 그 다음에 성화되고, 성화되니까 또 말고 자꾸 그래 가지고서 이와 같이 자라가는 것이 이것이 기독자의 구원이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는 데서 구원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를 다하지 안하는 데는 기독자외 구원은 안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선천 후천에 명철해도 소용없고, 천재가 돼도 소용이 없고. 세상 학문을 다 통달해도 소용없고 하나님은 그 모든 걸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가치로 여기지 안하요. 당신이 준 대로 다하는 그것만을 가치로 여깁니다. 알겠습니까? 당신이 주신대로 다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면서 소망하는 그것만을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필연적으로 쫓겨남을 당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에누리하지 맙시다. 자기가 입술로 중얼중얼한다고 되는 것 아니오. 참으로 믿어져야 하요. 참으로 실감을 느껴서 그 실감에서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게 돼야 참이오. 아무리 행한다고 해도 자체가 변화되지 않으면 그것도 가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