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22:09
주일
1979. 12. 17. 월새
본문: 이사야 58장 14절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양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여호와는 우리에게 구약과 신약의 이 계약 또 그 뒤에 은밀계약 계약이 문서로 표시된 계약이 있고 또 문서로 표시되지 아니한 수많은 계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계약이 성립되어 있습니다.
있는데 이 계약대로 하나님은 하나도 가감이 없이 이행을 하십니다. 또 우리가 계약을 지키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행하시고 우리가 또 계약을 어기면 어긴대로 또 하나님이 계약대로 처리를 하십니다.
계약을 지키고 어기는 거기 따라서 주님이 계약한 그대로 우리에게 이행을 하십니다. 계약을 지킨 자에게는 축복과 은혜로 이행하실 것이고 계약을 어긴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보응으로 징계와 사망으로 갚으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렇게 계약을 맺어 놓으시고 계약대로 이행하는 하나님이라 그말입니다. 계약을 맺어 놓으시고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계약을 맺어 놓으시고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면 이 즐거움이 계약 이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 은혜와 축복과 상을 받는 즐거움입니까? 이것이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있는 수많은 즐거움들입니까?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하니까 이 즐거움은 계약대로 된 즐거움이요 계약밖에 즐거움이겠소? 계약대로 된 즐거움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똑똑히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진리 말이요. 계약대로 된 즐거움입니다.
계약대로 된 즐거움인데 이 즐거움을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받는다 이랬으니까 이 즐거움은 계약대로 된 즐거움이요.
또 이 즐거움은 제가 가지는 것입니까? 누가 줍니까? 어떻지요? 즐거움을 얻을 것이요 얻을 것이라. 그러니까 즐거움을 제가 가집니까? 즐거움을 누가 줍니까? 얻는다고 하니까 주는이가 있지요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그말은 즐거움을 받을 것이라 하는 말 한 가지지요.
그러면 즐거움을 여호와 하나님이 계약을 맺으시고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약대로 즐거움을 주신다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즐거움을 주시면 즐거움을 주시는 이는 누구지요? 하나님 즐거움을 받는 이는 누굽니까? 받는 이는 누구지요? 즐거움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이 즐거움을 받는자는 누굽니까? 받는자는 자기지요 받는자 자기 아니요 계약대로의 이 즐거운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이 주심을 받는자는 다른 사람입니까 본인입니까? 다른 사람이요 본인이요? 본인이지 다른 이가 아니고 본인이지요 본인이면 우리는 두 사람이 있는데 본인이라면 우리는 두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둘인데 어느 본인이겠습니까? 네? 새사람 본인이겠소? 옛사람 본인이겠소? 새사람 본인이지요 새사람 본인이지요.
그러니까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하는 이 말씀은 네가 주일을 잘 지키면 하는 그말이요 위에 보면은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즐거운 날이라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하면 이게 주일 잘 지키는 것 아니요? 이렇게 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이렇게 주일을 잘 지키면 네가 둘인데 네가 둘인데 참 네가 네가 되어가지고 참 네가 네가 되어가지고 새사람 자기가 되어가지고 새사람이 자기가 되어가지고 계약하신 하나님이 계약대로의 모든 즐거움을 너희에게 주실때에 그 주심을 받게된다 하신 말씀이니 이 말씀이 곧 주일을 잘 지키는 거기서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상급받고 은혜받을 수 있는 자기가 자기된다 말입니다. 그 자기가 자기된다는 말이요.
주일날 자기 아닌 옛사람 자기와 새사람 자기를 바로 찾아가지고 참자기가 자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일날 안 찾으면 찾기 어렵소.
주일날이 아니면 자기를 찾기를 어려워 네가 이렇게 주일을 이렇게 지키면 네가 어떤 네냐?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즐거움아, 저주가 즐겁겠소? 축복이 즐겁지 은혜가 즐겁겠소 하나님이 은혜를 끊어버리는 것이 즐겁겠소? 은혜가 즐겁지 벌이 즐겁겠소? 상이 즐겁겠소? 상이 즐겁지 자기에게 생명이 즐겁겠소? 사망이 즐겁겠소? 생명이 즐겁지 즐거움을 얻을 것이니라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니라.
주일을 잘 지키면 네가 어떤 자기라 말이요?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자기란 말이요 주일을 잘 지키면 네가 그러면 이 네가 하신 이 너는 새사람 네입니까 옛사람 네입니까? 새사람 자기지요 주일을 잘 지키면 주일날 새사람 네가 네가 된다 주일날 새사람 네가 네가 된다 그러면 그 너는 누군데? 네라고 하신 그 자기는 누군데?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 받을 자기라 이것이 주일난 잊어버린 자기를 찾을 수 있고 또 새사람 자기가 강건해지는 것을 말씀하신 성구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이 성구에 맞소 안맞소? 여러분들이 이제는 띄어놓고 설교하고 띄어놓고 설교하고 띄어놓고 보다도 성구 하나를 하나를 가지고서 그 진리를 깨달아져야 됩니다. 이걸 깨달아지지 아니하면 암만 그 사람은 열심있어도 어디 삼켜질지 모릅니다.
이단은 하나님께서 그 이단을 내놓는 것인데 마귀를 시켜서 이단을 내놨소.
이단을 내어놓은 것은 택한자라도 그 사람이 진실을 가지지 아니하면 이단에 빠지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진실을 가지지 안한자는 이단에 빠지도록 해 가지고 택한자라면 그 사람이 진실을 가질 때에는 이단에게 빠졌던 것만치 돌아서서 그만치 달음질을 해가지고서 구원에 빨리 이루어진다 그말이요. 끝까지 이단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택한자가 아닙니다. 택한자라도 이단에 빠지지 안할 수 있고 빠질 수 있소.
이단에 빠지나 빠지면 그만치 돌아서서는 떨어진 걸음을 빨리가서 오히려 자기의 그 성화가 거룩하게 변화되는 그 성화가 더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단을 두신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택한자로서 진실치 못한 사람들은 이단에 빠집니다. 진실치 못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진실치 못한 사람이냐? 진실치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든지 신중히 생각한다 조심을 한다 주의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 이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까? 아니요 진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계약 요 계약은 파고 들어가 가지고 요 계약에 합당하도록 애쓰는 그거 하나만이가 진실합니다. 그 외에는 진실이라는 것이 없소.
그러면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다 다 위에 사람이 밑의 사람을 쓸 때에는 제대로는 전부 진실한 사람을 가려 씁니다. 진실하다고 보는 사람을 쓰기 때문에 세상에는 진실한 사람이 가득찬 세상 아니요.
그러나 실은 성경을 떠난 사람중에는 진실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 수천 년 내려온 역사 가운데도 하나도 없고 지금도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마는 하나도 없습니다.
진실은 성경이 뭐라고 하느냐? 성경이 뭐라고 하느냐? 성경에 이렇게 말씀해 놓은 이 이치가 뭐이냐? 이 성경이 가르치는 이 이치가 뭐이냐? 요 성경이 뭘 가르치고 있느냐? 성경을 가지고서 파고 들어가서 성경대로 안 맞으면 다 그것은 거짓뿌리요 다 사망하는 것이요. 심판받는 것이요. 성경대로 해야 된다. 요것을 자기가 잡고 성경대로 맞추어 나갈라고 하는 요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요게 진실이요.
그러기에 진실에는 성경을 찾는 것이 진실의 시작이요. 성경대로 그대로 하는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 외에는 진실이 없소.
이러기에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사람들 보기에 사람 좋다, 의인이다, 거룩한 사람이다, 성자다, 성자다, 성녀다 이렇게 해도 인간을 붙들고 인간들의 귀에 맞춰서 인간들의 눈에 맞춰서 인간들의 입에 맞춰서 인간들 거머쥐고 돌아가면서 인간들을 상대해서 이래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예수 암만 잘 믿어도 그 사람 구원은 헛일입니다. 만일 그 사람의 구원이 헛일 아닌가 그건가 환란이라 보십시오. 예수 당장 팔고 다 돌아갑니다. 그 환란으로 그 사람이 예수 판 것 아니요. 그 환란으로 인해서 거짓뿌리하 하는 것을 자타가 알도록 그를 인해서 드러난 것이요.
예를 들어서 여기 칼이 있는데 이 칼, 쇠가 여물고 좋은지 하찮은지 여문 나무를 삦으니까 칼이 푹 쭈그러져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나물를 삦으니까 푹 쭈그러져 들어가 버리니까 나무를 삦으니까 그런 칼이 됐소. 나무 삦기전에 그런 칼인데 나무를 삦으므로 그런 칼이라 하는 것이 발표가 됐소? 뭐입니까? 네? 나무 삦으므로 그런 칼이 돼 버렸소? 나쁜 칼이 됐소? 나쁜쇠가 됐소? 나무를 삦기 전에 그런 칼인데 여문 나무를 삦어 보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이거 좋은 칼이라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러면 좋은가 안좋은가 보자 여문 나를 베니 이러니까 이가 전부 푹 다 쭈그러졌소.
아, 무슨 칼이 이런 못쓸 칼이 있나 이제 그겁니다. 하나님이 환란을 주시는 것은 그 환란에서 시험 여러 가지 뭐 환란이나 평안이나 여러 가지 시험을 주시는 것은 그 시험으로 인해서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있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모르고 공연히 지나치게 인정하고 평가하는 그것을 똑똑히 알도록 자타로 하여금 그 사실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하시는 것이요.
이러니까 시험을 인해서 아이구 그 사람 참 허무하게 봤더니만서도 이번에 시험에 보니까 아주 그 사람이 믿음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 그 사람은 믿음의 실력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시험을 보니까 아무짝도 아닌것이로구나 이걸 안다 말이요.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의지하며, 어떻게 두려워하며, 어떻게 순종하는가 하는 것을 어려움을 고통의 어려움을 하나님이 하나 턱 줘 보면 압니다. 고통의 어려움을 줘 보면 그만 하나님을 껍데기로 저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시지만 저만치는 못 사랑해서 그 어려움을 인해서 자기가 절단나든지 하나님이 절단나든지 누구를 위하든지 둘중에 하나를 위해야 되는 그런 경우를 딱 만나면 그만 하나님 척 버려버리고 저 위해서 나가는 그것으로 표가 난다 그말이요.
또 어려움에는 이 사람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기가 하나님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서 하나님을 섬겨 나가는 것으로서 그 어려움에서 그 사람 참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구나 참된 이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이로구나.
이랬는데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을 한 번 닥치게 했다 그말이요 좋은 것을 닥치게 하니까 어려움을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이 믿음을 보존했지마는 좋은 것 닥치니까 그만 그때는 하나님 내놓고 저 좋을대로 달음박질 해 버리요. 그러면 또 그것으로서 나타난다 이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통해서 그 보이지 않는 속에 든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왜정말년에 신사참배 어려운 문제가 났을 때에 우리 한국에서는 제일 많이 믿고 잘 믿는 고을이 어느 고을이었소? 저 이북에 평양에 선천고을 선천이라는 선천군이 있는데 그 선천군에서는 말 듣기에 안 믿는 가정이 넷 가정이 있다더니만 넷 가정이 아니고 안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 뒤에 말 들으니까 안 믿는 집이 하나도 없어 다 믿어요.
이러니까 아예 주일날은 뉘가 상점문을 열라 해도 살 사람이 없으니까 열지도 안하고 시장도 안되고 그렇게 우리나라 중에 제일 그 군이 선천군이 제일 잘 믿고 많이 믿고 이렇게 한 줄 알았는데 왜정말년에 신사참배라는 그 어려움이 오니까 선천군내에 이긴 사람이 하나도 없이 평신도고 목사고 장로고 집사고 신사참배를 죄인줄 알았지마는서도 그 죄를 이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말이요 그게 뭐이냐? 쭉정이라 그말입니다. 쭉정이 알곡이 하나도 없다 그말이요 그런 사람들이 어째서 그리되느냐? 예수 믿되 그저 껍데기 맞춰서 사람들 좋아하도록 둘둘 이래 가지고서 그저 이 세상에 도덕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도덕대로 믿고 이 사회에 따라서 믿고 또 모든 지방의 풍속에 따라 믿고 거기 맞추어서 믿었지.
요 계약 말씀 계약 말씀을 딱 따라서 계약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성경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도 저렇게 해석해도 같지 안하요.
그 사람은 이렇게 해석했으면 그 해석을 그것을 놓고 따지고 따지고 해 가지고 이것은 성경 해석이 틀렸다. 성경 해석이 틀리면 무엇이 틀려지지요? 성경 해석이 틀리면 뭐이 틀리요. 성경 해석이 틀리면 그 해석대로 아는 사람 배우는 사람의 그 지식이 틀려지요 안 틀려지요? 안 틀리요 지식이 틀리요 안 틀리요? 지식이 틀려지지요. 지식이 틀려지면 그 사람의 모든 생각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경영하는 것이나 이게 좋다 이게 더 좋다 이게 덜 좋다 이게 나쁘다 이 모든 것 그게 평가인데 평가나 비판이나 소원이나 그런 것이 틀리겠소 안틀리겠소? 지식이 틀렸으니까 그게 틀리겠소 안 틀리겠소? 그게 틀리지요. 지식이 틀렸으니 틀린 것 아니요? 사람의 평가는 지식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평가가 틀렸으니까 그 사람의 행동이 틀리겠소 안틀리겠소? 행동이 틀리지요. 행동이 틀리면 그 사람의 그 구원이 틀리겠소 안틀리겠소? 구원이 틀리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좋은 것 나쁜 것 이런 환경을 자꾸 바꾸어 갈아서 바꾸어지는 현실 현실을 닥쳐질 때에 그 현실에 대한 자기 생활이 바로 되겠소 잘못되겠소? 어찌 되지요? 잘못 되지요. 잘못될 수밖에 더 있겠소? 이러니까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잘못되면 전체가 절단나 버리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깨달음을 지금 자기가 바로 가질라고 또 성경에 성경이 말씀한 그 깨달음 그것은 깊이 들어가야 되고 깨달음 전에 성경에 뭐라고 무슨 말씀이 있느냐? 이렇게 성경에 명문되어 있는 이 명문되어 있는 것을 자기가 알아야 이대로 할 거 아니요? 명문대로 되어있는 것을 알고난 다음에는 이 명문이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또 이걸 파고 들어가야 또 알 거 아니겠소? 잘못 깨달으면 안되고 또 그 사람이 성경이 백 가지 말해놨는데 오십 가지만 알고 오십 가지는 모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행위가 조심해서 힘써하면 몇 가지가 성경대로 되겠소 백 가지가 되겠소? 오십 가지가 되겠소? 오십 가지밖에는 안되지요. 오십 가지밖에는 안되지요.
이러니까 성경에 있는 종목을 덜 알면 그 사람이 덜 아는 것만치는 그 사람의 생활이 그것은 하지 못하고 거기 대해서는 모자랄 수밖에는 없다 그말이요 그러면 한 성구가 있는데 그 성구에 대해서 잘못 깨달으면 그 사람의 모든 구원이 잘못되니까 그 깨달음을 끝까지 깨달아 나가지 아니하고 조금 깨닫다가 말았으면 그 사람의 그 구원이 다 이루어집니까 좀 이루다가 맙니까? 다 이루겠소 좀 이루다가 중단이 되겠소? 이루어 나가다가 중단되지요.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 진리에 대해서 깨닫는 것을 한꺼번에 다 깨닫게 해 주시겠소? 그 사람 정도에 맞춰서 요거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조금 더 깨닫게 더 깨닫게 더 깨닫게 높게 깨닫게 넓게 깨닫게 이렇게 그 사람이 깨달음을 지켜서 자기가 성화되는데 따라서 하나님이 차차 차차 사람됨에 따라서 깨닫게 해 주시겠소? 한몫 다 깨닫게 해 주시겠소? 서서히 깨닫게 해 주시겠소? 그 사람됨에 따라서 깨닫게 해 주시겠소? 한몫 다 깨닫게 해 주시겠소? (자며 대답하는 사람은 그 대답할 정도로 알면되는 게 아니고 그 영감을 받아야 돼 잠이 안올만치 강하게 자기가 감동을 받아야 돼 그게 아니면 구원은 안돼 율법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됨에 따라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앙이 행동은 우리가 잘 보지 못합니다. 왜? 다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인 행동속에 그속에 마음의 행동이 있으니 그걸 우리가 보지 못하지. 마음의 행동속에 그 사람의 각양 성품의 행동 욕심의 행동 그 속에 있는데 그것도 모르겠다 그말이요 마음의 행동속에 그 속에 성질, 성품의 행동이 있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모르겠고 성품의 행동속에 그 사람이 무엇을 향해서 무엇으로 지금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어있는지 동기와 목적을 그거 우리가 더 모르겠다 그말이요 모르나 이 사람의 신앙이 지금 자라가고 있는가 자라가지 안하고 있는가 하는 그것을 구역장이 아는 방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서 잠깐 가서 얘기해 보면 그 사람이 자기 현실에 대해서 깨달은 깨달음 그 깨달음이 차차 차차 이것이 깨달음이 더 밝아져 가고 자라져 가느냐 또 자기가 자기에게 대한 자기행동에 대해서 깨달음이 달라져 가는 그걸보고 또 그보담 앞선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성구에 대해서 깨달음이 어떤고 보자 보면 그 깨달음이 점점 자라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 신앙이 자라가는 것이요.
보니까 깨닫는 것이 옛날보다 더 어두워집니다. 더 어려지요. 또 성구에 대해 깨달음이 어려집니다. 이러니까 도무지 아는 것 같지마는 거기서 새로운 깨달음 고것에 대한 느낌 요게 없다는 말이요. 없으면 그 사람 신앙이 자는 신앙입니다.
자꾸 떨어지는 신앙이요. 이래서 자기가 이제 갓 믿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주일날이나 혹은 성경을 보거나 보면서 자기가 고것을 깨달으려고 애쓰는 것이 있으면 희망이 있소.
또 주일날 설교를 듣고서 깨달을려고 애를 쓰고 이 사람 설교 듣고 저 사람 설교 듣고 또 이 교회 가 가지고 설교 듣고 저 교회 가 가지고 설교 듣고 설교를 들어 가지고서 어느 게 성경적이냐 또 이 성경에 대해서 어느것이 더 깊게 넓게 깨달아서 우리 생활을 깊게 넓게 성경 깨달은 것만치 자기 생활의 범위는 넓습니다. 성경 깨달음 높은만치 자기 생활은 높아집니다. 그만치 밖에는 변화가 안돼.
이러니까 이 면에다가 딱 눈을 기울이고 요대로 하는 사람은 마귀의 미혹에 들지 않습니다. 시험에 안들고 이단에 안빠지요. 요게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요게 성경이라는 요 진리에 성경속에 들어있는 이 영감에 요게 접선이 돼 가지고 하는 사람은 도덕의 시험으로 그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안하요. 환란의 시험에서 시험에 들지 안하요.
어떤 향락의 시험에 시험에 들지 안하요. 혈육적인 정실이나 지방적인 정실이나 동류적인 정실이나 그런 정실로 인해서 시험에 들어서 죄짓지 안합니다.
이 사람이라야 죄를 이기요. 이 사람이 아니라면 죄를 이길 수 없는 거라.
아무리 그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잘 믿어도 성경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그걸 모르고 옳고 그른 것을 모르고 거기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이러니까 권찰님들이 심방을 가면 원권찰이든지 지권찰이든지 심방을 가면은 그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는 가운데서 그걸 똑똑히 배워라 가르치라 이걸 안해도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에서 그 사람 행동에서 이 사람이 무엇을 좀 깨달았나 안 깨달았나 그것을 좀 살펴봐야 됩니다. 얘기를 해보면 그 사람이 깨달은 깨달음인지 깨닫지 못한 깨달음인지 알 수가 있소.
이래서 자꾸 그 사람이 성경에서 깨닫도록 성경보고 깨달을려고 애를 쓰고 설교 듣고 깨달을려고 애를 쓰고 이 깨달음과 자기 생활과 대조를 해 가지고서 이 깨달음대로 자기 생활을 고쳐서 이 깨달음에 맞춰 나가야 되지 이 깨달음에 맞춰 나가지 않으면 다 절단난다 그말이요 눈 앞에서 아무리 성공이 될까 싶어도 소용이 없어 여기에 보니까 뭐라고 말했소?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준다는 말 아니요? 땅에 높은 곳에 올린다 또 올려준다는 말 아니요?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또 길러준다는 말 아니요? 여러분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이 줄 수 없소.
인간이 아무리 준다해도 하나님이 안주는 것은 그것은 공연히 소리뿐이지 소용없습니다. 와도 자기것이 아니요. 자기에게 유익되도록 이용이 안된다는 말이요. 하나님이 안주는 걸 인간이 주면 오기야 왔지마는서도 그것이 자기에게 결과적으로 해독을 끼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안 얻은 것만 못하다 그말이요 우리에게 필요있는 것은 하나님외에는 주실이가 아무도 없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줍니까? 그 사람이 바른 정신을 바른 마음을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바른대로 할려고 하는 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이 주시지 나쁜 것을 악을 품고 있는 독을 품고 거짓을 품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면 그것 가지고 악용을 하니까 도리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더 망치는 것이 되지 않겠소? 아무리 그 사람이 믿는다해도 진리에 대해서 어떠냐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눈을 보고 인간의 귀를 보고 인간의 입을 보고 다른 사람의 이미 좋은 소리 들을라고 다른 사람의 눈에 좋게 보일라고 다른 사람 귀에 좋게 들려질라고 인간을 아듬과 인간을 상대해서 날뛰는 이 사람이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은 희망이 없소 그 사람은 팔방미인 창기처럼 때를 따라서 변해집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 요 하나님이나 진리나 하나요.
진리만을 향해서 하나님만을 향하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이 어찌된다 해도 그 사람 변해지지 않해. 인간에게 대해서도 꼭 진리대로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람은 변하지 안하고 그 사람의 진실은 변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의 정직은 변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의 의는 변하지 안해요. 그 사람의 약속은 변하지 안해요. 왜? 하나님과 진리를 보고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진리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인간으로 더불어 맺은 약속은 변해질 수가 없다 그말이요 변하면 변한 대가를 제가 내지.
내일은 우리가 무슨 일 합시다. 약속을 했는데 그날 못했다 말이요. 못했으면 못한 손해배상을 암만 안받을라 해도 제가 줘. 그러기에 요게 여인의 뒤에서 강물과 같이 입에서 토해내 버리는데 사람들이 다 거기 빠져 죽습니다. 누가 안빠져 죽었소? 땅에 있는 자들은 안빠져 죽었습니다. 그게 뭐이요? 그것이 성경 도덕심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도덕심 이렇게 세상이 막 변해져 나가지마는 하나님과 진리를 상대해서 인인관계를 가진 그 사람은 그거 하나 가지고서 멸망을 받지 안합니다. 거기서 모두 구출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사는 것이 하나님 보고 살고 진리 보고 살고 하나님과 진리에게 거리끼지 안하도록 인간 생활하고 인간만을 상대해서 생활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나에게 암만 변해도 나는 하나님 보고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나에게 변하지마는 나는 그 사람에게 변할 수가 없어. 왜?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했기 때문에 .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