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22:08
주일
1979. 12. 16. 주일 오후
본문 : 이사야 58장 13절∼14절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늘의 것이 비취어 움싹같이 되어 있고 지옥의 것이 비취어 움싹같이 되어 있어 하늘나라와 지옥의 것이 섞여 있는 세상입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것만 있고 지옥은 나쁜 것만 있지만 세상은 이 두 가지가, 거기는 본체라면 여기는 그림자처럼, 거기는 원둥치라면 여기는 한 움싹처럼 이렇게 비취어 섞여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들이 이렇게 교체되어서 사람들에게 오므로 사람들이 기뻤다가 슬펐다, 또 평안했다가 근심했다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까이 보는 근시자와 같이 장구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인간이 어두워진 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빛을 주셔서 모든 유한한 것을 꿰뚫고 무한에까지 내다볼 수 있는 이런 지혜를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이는 좋은 것이나 보이는 나쁜 것이나 그것만 가지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는 기쁨의 것들이나 슬픔의 것들이나, 다시 말하면 행복의 것들이나 불행의 것들이나 그것에 자기 행동을 가하는 그 가공이 어찌 되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불행스럽다는 그 불행이라도 거기에 행동을 잘하는, 좋은 행동을 거기다 붙여다 놓으면 그 불행이 금생과 내세에 지극한 행복으로도 바꾸어질 수 있고 아무리 자타가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보이는 행복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자기의 행동이라는 이 가공을 갖다가 나쁜 것을 붙여 놓으면 큰 불행과 영원한 불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인들은 보는 그것으로 인하여 지옥을 예상하고 하늘나라를 예상해서, 미리 생각해서 보이는 그것을 상대하여 살지 안하고 보이는 거기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그것이 어떻게 변해지겠느냐, 그것이 좋게 변하겠느냐, 나쁘게 변하겠느냐. 이면을 두고서 연구하고 걱정하고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무지해서 좋은 그것이 양이 많아야 좋을건가, 적어야 좋을건가.
또 그게 있어야 좋을건가, 없어야 좋을건가. 이것 모릅니다. 또 나쁘다는 것도 그것 못 쓸 것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세상에 불행이라는 그 불행, 그것도 있어서 좋을 때도 있고 없어 좋을 때도 있고 나쁜 것이 길게 많이 있어야 좋은 사람도 있고 그것이 잠깐 있다가 없어져야 좋을 사람도 있고 사람도 각각 다르고 그에게 때와 장소와 그 사람에게 따라서 이것은 천태만상으로 변해져야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살이인데 인간은 일방적 지식을 가지고 한 면으로만 생각해서 있는 것 있어야 좋다고만 없어야 좋다고만, 이렇게 외쪼가리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있어야 좋다는 것을 탐하다가 망하고 그것을 더 많게 해서 망하고 없어야 좋다는 것을 면하려고만 하다가 망하고 아주 그것을 보지 안하려고 하다가 망하고 이것이 인생입니다.
크게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죽음은 싫어하고 불행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말하기를 "죽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므로 안 죽으려고 하다가 일생을 죄악에게 종이 되어서 영원히 멸망받는 것이 인간인데 여기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 사람은 만물 중에 영장으로 지음을 받는 인류라는 것이오. 인류 안에서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하늘과 땅의 것을 하나님에게서 대리로 이것을 맡아가지고 영원히 다스리고 그것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이렇게 존귀한 자로 속량함을 받은 것이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알 수 없는, 세상만이 아니고 영계까지 현재만이 아니고 영원 미래까지, 이렇게 광대하게 이 전체를 망라해서 이 전체와 우리 개인 개인이 관련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걸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개인이 수많은 그 존재와 영원한 관련을 지금 맺어가는 것이오. 또 영원한 그것들의 관련을 받고 가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거저 앞집 뒷집만 알고 저, 남 제집만 아는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인생은 아닙니다. 더더구나 그런 성도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무엇이 좋을는지 나쁠는지, 많아야 좋을는지 적어야 좋을는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길을 알려 주셔가지고 영원히 후회할 것이 없는 영생인 이 생명길을 걷게 하시려고 주님이 대속하셨고 또 성령과 진리로 보증인을 세우셨습니다.
요새 말로 보증인 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우리의 보증자요, 진리가 우리의 보증자요. 우리를 책임졌다 그말이오. 이러고 이 세상 한 토막에서 영원을 결정 지우게 하신 것이 우리의 금생입니다.
이 광대하고 영원하고 청원한 이 행인의 걸음을 출발한 우리들에게 우리의 발의 등불이 되게 하셔서 모든 것을 밝히 보고 후회함이 없는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두 빛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섭리와 말할 수 없는 천태만상으로 변해 나가는 인간들의 마음, 이것으로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길을 걸어가야 되느냐 하는 것을 더듬어 알 수 있도록 주셔서 이것을 가리켜서 일반계시라, 자연계시라. '이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래서 이것을 자연계시라 말하고,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둔해서 자기 갈 길을 모르고, '아, 제가 과일나무 한 개를 없는 가운데 심어가지고 길러서 그 과실나무가 자기에게 어떻게 되기를 욕망하고 자기 욕망에 기대에 어긋나면 당장 베어서 불에 태우는 이거 하나만 해도 내가 자존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분이시니 그분이 나를 있게 하셨고 기르셨는데 그분의 목적과 기대가 있지 않겠나? 그게 어긋나면 내가 이 과실나무를 베어서 없애는 것처럼 나를 베어서 없애버릴 것 아니겠느냐? 아, 과실 많이 여는 나무가 불행하게도 박토를 만나서 자라지 못하면 주인이 오만 인공을 들여서 무성하게 자라도록 보토도 할 것이고 토비도 줄 것 아닌가. 이것 모양으로 하나님의 기대에 만족스러운 내가 되면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겠는가.' 이것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연계시에도 빠진 것이 없이 우리에게 거의 알려줬어.
이것 가지고 모르는 자를 하나님이 알려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별계시라고 영감 이치를, 영감 도리를 주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다시 말하면 내게 원치 안하는 것이 왔을 때 내가 거기 대해서 어떻게 하며 원하는 것이 왔을 때 내가 거기 대해서 어떻게 하며 그것이 오고 갈 때에 나는 거기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빠짐이 없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을 간추려서 말하면 십계명입니다. 열 가지 계명인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고 다섯째로부터 열째까지는 인간이 인간에게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되면 모든 사물은 거기서 생산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순위는 그 가치적 순위요. 이계명보다 일계명 가치가 높고 십계명보다 구 계명 가치가 높아 가치적 순위나 우리가 이 계명을 알고 지키고 하는 데에는 넷째 계명이 시작입니다.
넷째 계명이 소개 계명이라 할 수 있고 중매 계명이라 할 수 있고 중심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넷째 계명에서 나머지 아홉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이요 주일인데, 안식일은 일차창조의 것을 하나님이 그 자체를 점점 새롭게 하는 거룩의 은혜와 그것들에게 필요한 구비의 소유적 은혜를 주시는 날입니다. 이래서 거룩과 복을 받는 날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둘째 안식일 이것은 일차창조의 것은 다 변질되고 진동될 것들이요, 또 사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차창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과 생명으로 지음받은 이 새창조 이거는 진동되지 아니할 것들이며 모두가 다 온전하고 영원하고 불변의 본질과 본성들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둘째 창조의 것은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첫째가 하나님의 교회가 하늘나라요, 하늘나라를 둘러싸고 모시고 있는 것들은 영계요, 또 물질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두 가지가 섞여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가공해 가지고 이것이 사망으로 사망을 이겨 생명을 취하고 가난해지는 것으로써 부를 취하고 수치로 영광을 취하고 또 영광으로 영광을 취하고 이렇게 그 인간의 행위에 가공을 바로 해가지고 모두가 다 온전에 이르러서 일차 성공자 예수님과 같은 자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이 특별계시를 우리가 받을 수 있고 사용할 수 있고 이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이렇게 하셔서 십계명을 주시고 이 십계명을 자기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안식일, 이차창조의 것에 대한 주일, 이렇게 주신 것입니다.
이런데 안식일에 대해서는 계약이 뚜렷이 있고 지키는 법칙이 뚜렷이 명문되어 있지만 주일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안식일은 토요일이 안식일인데 어떻게 안식일에 대한 그 법칙을 주일에다가 적용을 하려고 하는가?' 사람들이 이런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이래서 악령은 안식교라고 교파를 하나 마련해가지고 '이 안식교에만 구원이 있다.' 하면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이 안식교는 일반 정통 교회에서 이것은 다 이단이라고 정죄를 했습니다. 왜? 그들은 성경을 전적으로 다 믿지 않습니다. 저거 비위대로 믿습니다.
어리석고 계약의 말씀에 에누리 하는 사람들은 그런 유혹에 빠지지만 안식일을 주일로 날을 바꿀 것, 안식일을 주일날로 바꿀 것을 성경에 말씀해 놨고 날만 바꾸지 그 법칙은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에 말씀해 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온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셨고 "절기와 월삭과 안식은 참 것의 그림자이니 이런 것들은 다 폐해질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을 오전에 성경을 들어서 우리가 상고를 했습니다.
그러면 날은 변해졌지만 지키는 그 법칙과 그게 대한 맺어지는 우리의 구원은 똑같습니다. 첫째 안식일에서는 변동될 것, 썩어질 것, 없어질 것, 보이는 것, 이런 것을 새롭게 하고 거기에 필요있는 복을 받고 둘째 구원의 날, 주님이 주신 이 구원의 날,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부활로 출발한 이 부활의 주일날, 이날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생명과 신령에 속한 것들을 새롭게 하고 그것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날입니다.
이 주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주일을 지켰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신약시대에 속한 큰 행사를 하실 때마다 이날에 하셨습니다.
안식일날 하지 안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도 안식후 첫날에 받았고, 변화산에 가가지고 변화되는 것도 안식후 첫날에 했고,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입성하는 것도 안식후 첫날에 하셨고 또 사도시대에 오순절 성신 강림도 안식후 첫날입니다. 이래서 안식일이 주일로 날짜는 바꿔졌고 지키는 법칙과 이뤄지는 결과는 같습니다.
그러면 주일날은 어떤 일을 하는 날이냐? 주일날은 일반적 일을 버리고 꼭 두 가지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 뭐? 일하지 않는 것도 주일지키는 것 아니요. 예배당 오는 것도 주일 지키는 것 아니요. 예배를 드리는 것도 주일 지키는 아니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일날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원수인 자기와 참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참사람 자기, 이 두 가지를 주일날 구별해야 됩니다. 남은 주일까지에 엿새동안에 자기가 살 자기를 주일날 결정짓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아, 오늘 하루 일하고 하루해가 찬송 기도 설교 지나갔으니까 오늘 예배 드렸다' 하면 별수 없이 그 사람은 내나 옛사람 그대로 삽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 사요.
옛사람은 자기 아닙니다. 자기를 고깃덩어리와 마음을 미혹시켜가지고 범죄케 해서 원죄를 마련해 가지고 육의 주격 책임에서 그 영을 정죄해 죽인 원수입니다. 그는 악령과 자기중심이라는 이 중심과 범죄한 그 습성, 나쁜 습성 이 세 가지가 뭉쳐가지고 된 자기가 자기를 죽인 자기입니다. 자기 아닌 자기요.
원수인 자기요. 이놈의 소원은 두 말할 것 없이 우리를 망치는 소원이오. 이놈이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망쳐놓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주일날 하나님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신, 인간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주관적이 아니요. 순전히 객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받게 하실 때 받아야 되지 자기가 받고 싶을 때 받는 것 아니오. 하나님의 은혜는 뭐라도 다 그렇습니다. 회개도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실 때 회개해야 되지 제가 제 마음대로 오늘하고 싶으면 오늘하고 내일하고 싶으면 내일하고,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객관에게 복종하는 것이 참사람입니다. 주관 행동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일날 자기가 이 주일 지키기 위해서 모든 준비하는 가운데서 성공이 뭐이냐? 하나님이 은혜를 받으라고 거룩하게 하시는 날로 정하신 이날에 하나님의 빛 앞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 앞에서 모든 세상과 좀 복잡한 것을 제거하고 한적한, 제대로는, 제나름대로는 한적한 그 시기를 만난 이 주일에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서 미워할 자기, 사랑할 자기, 원수인 자기, 참자기,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서, 이날에 '내가 앞으로 내 아닌 이놈 나, 내 원수 이놈은 내가 용납지 않겠다.' 여기서 결심하고 확실히 작정한 것이 월요일보다 화요일 약해지고, 나중에 토요일 가면 거의 약해져서 주일에 자기가 미워하던 그놈이 미움은 냅두고 그놈이 주장을 해서 그놈이 좋아하도록 그놈이 울라 하면 울고 그놈이 웃으라 하면 웃고 그놈 좋게 하고 은인이라 하고 그놈 나무라면 원수로 알고 완전히 이렇게 옛사람으로 전부가 바꾸어진 이 사람이 됩니다.
이런데 주일날 이런 각오 없이 이 깨달음 없이 내나 옛사람으로 살던 자가 주일날 와가지고 멍청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저 망칠 자인 줄 모르고 옛사람 그놈이 나와가지고 이것 저것 생각하니까 예배 볼 시간도 없이 몸뚱이는 여기 와 앉았지만 마음은 그놈이 들고 양사방 끌고 다닙니다. 이것이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영은 구원얻지만 건설구원이라는 자기 심신은 아무짝도 못쓰는 부활만 했지 아무 지능이 없는 판단이 없는 옳은 정신이 없는 미치괭이 뚱보와 같은 것이오.
이런 자로 부활합니다. '이 주일날, 아, 내가 아무 장소에서 누구하고 말하던 그는 누구인가? 그놈이 나아닌 원수 그놈이로구나. 그러면 그놈이 나라고 그놈이 교제하고 경영한 것 그걸 한 번 성경적으로 평가해 보자. 전체가 나망치는 것이요 남 망치는 것이로구나. 누구를 만날 때 누구와 말하니까 기뻐던 그놈이 그놈이로구나 누구가 나를 책망할 때 듣기 싫어서 반발했던 그놈이 나 아닌 원수 그놈이로구나.' 여기서 모든 데에서 자기 아닌 자기를 찾고 여기서 진리와 성령으로 거듭난 영생을 가진 하나님의 참 양자가 되어있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여기서 찾아서 '아, 내가 언제 큰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때에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됐었었다. 그때에 세상이 허무하다는 것 정가를 한 때가 있었다. 내가 그때에 땅의 것을 생각지 안하고 위의 것만 생각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부럽고 천하의 세상이 영광이라 하는 것은 배설물같이 여겨졌지 부럽지 않더라. 아, 그 사람이 그립다. 그게 내로구나. 누구와 말할 때에 그때에 이상스럽게 보고 그 사람을 만날 때에 나는 가셔져서 없어지고 만나는 가운데서 이상하게도 나는 변화가 돼가지고 내가 모든 정상적인 사람으로 그때 될 때가 있었다.'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자기를 찾으려고 애를 쓰서 '아, 이것이 참 내로구나.
이것이 중생된 새사람이로구나. 이것이 영생을 가진 자로구나. 그 사람으로 될 때는 보니까 성경이 비위에 다 맞고 나도 그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천하에 모든 것보다 예수님의 형상이 부럽고 성자와 성녀가 부러웠고 그 사람이 되었을 때는 사욕이나 나쁜 온갖 욕심, 교만, 원망, 시비, 불평 이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이 자기 것이 아닌 사람들이 있더라. 그런 것이 내것이 아니었다. 그때 그 사람으로 된 내가 됐을 때는 뭣 때문에 그런 것을 가지고 화냈을까? 어떻게 그랬었을까? 이상하게도 그렇게 살던 그 사람이 자기가 아닌 것과 그와 상관이 없는, 완전히 이거는 참 별개의 사람처럼 이것은 무슨 이상적인 하나의 구상의 사람처럼 한 논리의 사람처럼 내 자체가 그런 사람이 되어졌더라.' 이 사람을 찾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이 주일날 찾아 이 사람을 예수님이 평가하시기를 "이 자기를 자기가 온 천하를 얻고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그는 자기하고 온천하하고 바꿨다 할지라도 저는 손해갔다." 이 참자기는 온천하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잃는다 말은 참자기를 누가 찾습니까? 마음이 참주인을 모시는 것이오. 마음이 찾소. 마음이 제 주인공을 찾는 것이오. 고깃덩어리가 제 주인공을 찾은 것이오.
이랬는데 자기의 주인공 산 영은 마음 제게는, 고깃덩어리 제게는 천하보다 유익한 데 천하보다 보배인데 이 어리석은 마음과 고깃덩어리가 세상 것 취하려고 날뛰다가 자기를 잊어버렸다 그말이오. 이거는 제가 부주의해서 제가 버렸다 말이오. 잊어버렸다 말이오. 돈 취하려다가 잊어버렸소. 세상 이런 것, 저런 것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렸소.
빼앗긴 것은 자기가 놓지 안하려고 애를 썼지만 강한 객관 세력에게 힘이 모자라 빼앗긴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제가 버리면 그다음에는 강한 세력이 와가지고 자기로 살려고 해도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 강한 세력으로 인해서 자기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대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를 잃고 난다음에는 세상 세력이, 옛사람의 세력이 와가지고 이 강한 세력이 새사람을 찾지 못하게 합니다. 덮어 가루어 숨겨 놓고 내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일날 자기가 하나님의 빛 앞에서 성신의 감화 감동 앞에서 고요히 자기 아닌 자기와 참자기와 자기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참자기요, 하나는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요.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는 마귀의 자식이요.
하나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가 예수님의 공로와 진리와 성령으로 살아난 자기요, 하나는 옛날 자기를 죽였던 원수인 자기인데 이놈이 왕권은 빼앗기지만 패잔병으로 내 안에 숨어가지고 기회만 있으면 내 마음과 정이 들었기 때문에, 내 마음과 정이 들었소. 내 고깃덩어리와 정이 들어소. 기회만 있으면 이놈이 내 마음과 내 고깃덩어리를 꼬와가지고 달콤한 것을 마음에게 주고 고깃덩어리에게 줘가지고 참사람 자기에게 향했던 것을 배반하고 이것에게 향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살고 새사람을 찾아 새사람으로 살던 자가 즉시 옛사람으로 바꾸어지기를 어떻게 급속히 민활하게 바꾸어지는지 찰나를 두고 바꾸어집니다. 이 말을 할 때는 새사람으로 했는데 그 말 한마디가 끝나기 전에 옛사람으로 바꿔질 수 있는 이렇게 능한 교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속에 두 자기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능히 우주를 제가 모든 것을 한몫보고 통치할 수 있는 이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들이오.
이러기에 주일날 자기를 찾아서 '내가 내일부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사는데에는 내가 이 사람으로 살겠다. 자기를 찾아가지고 내가 이 나로 살겠다.' 그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자기도 좋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자기도 싫고 하나님이 보시는대로 모든 것을 근시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전체면을 보고 영원면을 볼 수 있고 이 사람 잊어버리고 나니 눈 앞에 있는 것, 코 앞에 있는 것, 좁고 좁아서 자기에게도 일부분밖에 안되는 이렇게 감옥가운데 갇히는 생애가 되는 것을 자기가 봅니다.
이래서 자기가 참사람으로 바꾸어져 가지고 이 참사람이 강해지고 확실해지고 든든해지고 이래서 '나는 이렇게 살겠다. 나는 이 사람으로 살겠다. 내가 변해지지 않을란다. 나는 이 사람으로 살란다. 이렇게 이 시간 보니 내가 이렇게 귀하고 내가 이렇게 좋고 이렇게 완전하고 이렇게 참되고 이렇게 깨끗하고 누구에게라도 자랑할만한 이 내인데 이 나로 살지.' 이것이 변할 때는 아무도 싫어하고 지금보니까 내가 어제 산 것이 만물보다도 더럽고 어리석고 추하고 미련하고 가증스럽고 참 보기 흉해서 만물보다 진실로 거짓되기가 짝이 없는 이런 자기를 발견하고 미워하고 이 참자기로 살려고 하는 이 강한 각오와 깨달음을 가지고 '내가, 이 사람이 변해지면 죽는 게 낫지 살 필요 없다. 만일 이 사람이 변할 때에는 나는 밥을 굶겠다 이 사람이 변할 때는 두말 할 것이 이것 다 치워버리고 문 딱 잠궈놓고 방안에 들어 앉아 이 사람 찾겠다. 이 사람을 잊어버리고 나 아닌 나로서 날뛸 때에는 나는 모든 것 두고서 내가 한적한 산으로 기어올라 갈란다.' 이렇게 주일날 찾은 참자기를 안놓으려고 별별 각오와 계획을 세워놓고 이것이 변해질 때에는 즉시 '세상에 천하보다 이것이 귀하다고 했으니까 크고 작은 일이 무슨 일이 있느냐?' 집어던져 버리고 다시 자기를 찾기 위해서 이렇게 발동을 친 이 사람들이 승리 생활을 했고 이 사람들이 구원을 이루어 가고 세상이 모르는 십자가의 미련한 길을 걷고 세상이 모르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보고 모르는 것을 소망삼고 모르는 것을 상대해서 모르는 것을 모르는 방편으로 모르는 것을 수입해서 모르는 것들을 저축해가고 모르는 것들로 자라가고 있지 이런 노력 없는 자로서는 된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세상의 도덕가들도 있고 철학가도 있고 예술가도 있고 정치가도 있고 온갖 문화인들도 다 있고, 있는데 그거 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루는 것 아닙니다. 그거 하는 그 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어느 사람으로 하느냐? 새사람이 한다면 정치하는 것도 구원이요, 예술도 구원이요 과학도 구원이요 농업도 구원이요 다 거기서 구원 이루지만 요는 새사람 자기냐, 옛사람 자기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찾아서 이 사람으로 강해지는 것이 이것이 주일날 주님이 주시는 것 받는 날이오. 이날은 거룩케 하는 날입니다.
옛사람은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죽여야 됩니다. 사정없이 죽이라고 했소. 배반하라고 했소. 이러기에 이 주일날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찾아서 강하게 모시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다.' 이렇게 설교는 한 사람이 하고 몇십만 명, 몇백만 명이 모였다 할지라도 설교는 한 사람이 하지만 성령은 그 모든 사람에게 능히 개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설교하는데 거기에 주일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 복은 화를 면해지는 게 복이요. 좋은 것을 마련하는 것이 복입니다.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다. 이날은 참 즐거운 날이다. 이날의 가치를 아는 자는 이날에 받을 것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날이 이렇게 형언할 수 없는 귀한 자체를 이루고 귀한 난제를 해결짓고 필요한 귀한 축복을 구비하는 실제의 하나님이 계약으로 주시는 이 산 날, 이 날로 알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는, '주여, 오늘 나에게 이 모든 어려움 이것이 벗어야 될 것인지 이대로 꾹 참고 있어야 할 것인지 벗으면 어떻게 벗어야 될 것인지 참고 있으면 어떻게 참고 있어야 될 것인지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이 있는데 이걸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얻어서 좋을는지 안 얻어서 좋을는지 오늘 당신에게 소극적, 적극적의 복을 얻기 위해서 갑니다. 오늘 주시옵소서.' 하고 오는 자에게는 한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에 천인 만인의 형편과 사정이 다 다르고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에게 마다 그의 갈 길은 따로 있습니다. 그에게 대한 생명의 길이 따로 있고 그에게 대한 복이 따로 있습니다.
이러기에 성령님께서 한 설교를 할 때에 그 설교를 인해서 거기는 얼토당토 안한데 그 설교를 듣는 가운데 성령이 직접 그 사람을 감동시켜 '아, 내가 이것은 버려야 되겠다. 아, 이 어려움은 내가 벗으려고 애를 쓸 게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두고 참고 있어야 되겠다. 아, 내가 이 좋은 걸 원했는데 이거는 내가 이면이 잘못돼가지고 오다가 지체하고 있으니까 이면을 고쳐서 오도록 해야 되겠다. 이래야 영광이 되겠다.' 이렇게 성령이 각자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이게 있습니다.
이게 막바로 화에 대해서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화를 멸하는 것이오. 복에 대해서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복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이외에 없습니다. 자기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그것이 모든 원치 안하는 것을 면하는 그 실지의 면하는 것이오. 그걸 받아가지고 자기가 그대로 하면 면해져.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할 때 그대로 하면 그게 바로 그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그 실상으로 주시지 않습니다. 실체로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뜻으로 줄 때 그것이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없는 가운데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당신이 손으로 무엇으로서 재료하여 상대하지 않았소. 말씀할 때 그 뜻이 만물이 창조됐소. 그 뜻이 창조했소.
이러므로 이 주일날 이 두 가지를 자기가 받아야 되는 것인데 주일을 만나기 전에도 그 꼬라지, 망할 그 꼬라지, 주일 지키고 난다음에도 그 꼬라지 제가 망할 이치를 하는데 어떻게 안 망하고 되겠소. 안 망할 이치가 어디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은 간추려서 강령적으로만 말했고 윤곽적으로만 말해서 이는 울타리와 같소.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 계시오. 은밀 인도요, 영감 인도요. 자기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아무리 성경 말씀을 읽어도 안됩니다. 알아도 외어도 안되요. 거기에 그 속에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 그것이 자기에게 생명이요. 그게 영생입니다.
이것을 받아서 가져야 이 주일을 지키는 것인데 주일 보기 전에 그 사람이 주일날 와가지고도 이게 생동생동하게 옛사람 이제까지 일생을 거머쥐고 망쳐온 그놈이 몸치도 안하고 여기서 죽여도 다시 재생하여 살아나오는데 몸치도 안하고 그것이 그대로, 가증스럽게 그대로 하나님 말씀은 제가 귀에 들려서 세상 학문처럼 그렇게 아는 것으로 되는 줄 알고, 아니오.
말씀에 자기의 전부를 기울여 거기에 자기 기울인 것이 성령이 인정될 때는 그 속에서 깨달음을 줍니다. 거기서 깨달음이 움싹이 나와야 돼요. 묵은 둥치에 무슨 꽃이 피며 열매가 맺습니까? 둥치에 새움이 나와야 꽃도 피고 열매도 맺지요. 성경 말씀을 자기가 이렇게 들어서 배울지라도 이 말씀을 배울 때에 거기에 성신이 감동이 자기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깨닫고 이대로 살고 싶은 확정하는 힘이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일생동안 예수 믿어서 옛사람만 기르는 자 있고 옛사람을 참으로 원수로 삼아가지고 옛사람하고 일생동안 싸우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옛사람 이놈을 암만 이기려 해도 이놈을 처치하지 못하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놈을 결국은 이기고 만다.' 여기서 해결짓고 일생을 자기로 더불어 싸우는 이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일생동안 옛사람을 북돋아서 세상에서도 제가 옛사람을 길러주고 교회 와가지고도 옛사람을 떠받쳐 옛사람이 자라 이것이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목사도 되고 이래 되가지고 옛사람을 누구든지 밥을 먹이고 물을 마셔서 길러주면 좋다고 옛사람 그놈을 갖다가 '네가 속는다 옛사람이다.' 말만 하면 원수로 삼아가지고 제 수단 다 해가지고 복수하려고 애를 쓰고 하니까 개에게 누가 진주를 던지겠소? 여러분들, 대체 지금 어느 사람으로 삽니까? 옛사람과 새사람 둘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옛사람으로 살면 멸망을 거두고 새사람으로 살면 영생을 거두는데 옛사람과 새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줄을 아는지. 자기가 지금까지의 희로애락을 가지고 욕망하고 경영하고 일생동안 살아나온 그것이 옛사람이 주장해서 살았는지 새사람으로 살았는지? 이 구별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이것을 찾아 구별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지.
옛사람을 똑똑히 원수로 삼고 새사람을 자기가 찾아 마음에 주인공으로 몸의 주인공으로 이 내 마음은 새사람에게 죽든지 살든지 복종할 자로 이렇게 사는 생활을 맛본 사람이 있는지. 새사람을 잃고 잃은 줄을 아는지. 무엇 때문에 새사람을 잊어버리고 빼앗겼는지 그것을 아는지. "온 천하를 얻고도 참사람, 새사람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자기는 다 무익한 일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자기 속에 참사람, 새사람이 우주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아는지? 새사람은 이 사람이 자라면 영계도 그 사람의 것이오. 물질계도 그 사람의 것이오. 영계와 물질계는 새사람으로 장성한 그의 통치물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로 말하면 새사람이오. 타락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그 사람으로 살았소.
그 사람은 피조물인데 그 사람은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것이 그에게 속했소! 그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요 모든 피조물은 교회의 발등상입니다.
이렇게 주일날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을 이것을 찾는 것이 복있는 사람이고 자기 아닌 자기를 원수로 못박아서 자다가 일어나도 이놈이라는 것. 묘한 기회, 묘한 입장에서라도 자기 아닌 옛사람을 누가 치면 기뻐해야 할 터인데 그때에 싹 올라와서, 옛사람 그놈을 옆에서 치니까 좋아해야 할 터인데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그것이 자기가 되어가지고 '이게 나를 공격하는 말 아닌가, 나를 해치는 것 아닌가? 나를 멸시하는 것 아닌가?' 이것을 찾아서 '오, 이 멸시하는 것은 옛사람 그놈 나 아닌 그놈 멸시하는구나.
박해하는 것은 그놈을 박해하는구나. 공격하는 것은 그놈을 공격하는 것이구나.
내가 이 시간 그 소리를 들을 때 섭섭한 그것이 바로 내 원수 이놈이로구나.' 거기서 돌아설 수 있는 이것이 능력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자와같이 공중하고 손내며 뚜드리면서 싸우는 이 자와 같이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원수를 똑똑히 발견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서 내가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옛사람 이놈을 복종하고 새사람으로 살고 옛사람을 이놈을 꼼짝 못하게 쫓아내고 마음과 고깃덩어리가 새사람에게 복종하는 이것으로써 살아. 내 마음과 고깃덩어리를 옛사람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싸워서 물리쳐서 이놈을 쫓아내고 난다음에는 내 마음과 고깃덩어리를 새사람, 영감된 나에게 복종시키는 이것이 나의 전투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두 자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구원에 멉니다. 이 두 사람을 구별해서 하나를 죽여야 합니다.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엿새동안 앞으로 살 자기를 살 마련하는 날이 주일날입니다. 다른 일은 못하게 했소. 이 주일날은 엿새동안을 영생으로 살 자기를 찾아서 강하게 하는 것이 주일날 하는 일이오. 엿새동안 영생하는 사람으로 영생으로 살 자기를 지금 찾아 강하게 하는 것이 주일날 하는 일이오.
그다음에는 자기에게 있는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에 해결의 실상이 되는 주님이 나에게 알려주시는 것. 깨닫게 해주는 것, 다시 말하면 엿새동안에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되느냐 무엇을 해야 되느냐? 엿새동안에 할 일꺼리, 그것을 나에게 깨달음으로 주는 그것 받는 것이 주일날 할 일이오. 이것이 우리가 주일날 할 일입니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말하려고 하니 시간이 다 지나갔소.
우리가 이것 굳게 잡읍시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안 믿는 사람 많소. 예배당에 예수 안 믿는 사람 많소. 예배당에 안 나온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 많습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고 난다음부터 예수 믿는 출발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자기를 원수 삼아 이것을 죽이고 부인하고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기로 사는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아무에게도 아니고 자기에게만 단독, 자기에게만 각자가, 주님이 자기에게만 주신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것을 받는 것이 실지로 천국 수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지키는 것이오.
그것 못받고 제가 성경 말씀대로 한다고 성경 말씀대로 하므로 예수 죽였습니다. 그들이 다 성경보고 안식일을 지키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안했소?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거기에 성령이 "너는 참되다. 간사함이 없다. 외식으로 나를 꼬울 것처럼, 하나님과 진리도 네가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그런 악이 네 속에 가득히 찬 그것을 이제 회개하고 너는 참으로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구나." 인정할 때 성령이 그의 행함에 도와주시고 그의 행함에 따라서 뜻을 그에게 주어서 인도하여 주시고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입니다.
여기서부터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것처럼 일생동안 유명하게 살았지만 가보니까 다 심판에서 불타 버리고 말았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서 심판 앞에 가도 타지 안할 것은 영감으로 된 것만입니다. 성경 말씀은 영감에 도달하게 하는 중매쟁이요. 영감까지 인도해주는 인도자요 예수님을 만나게 한 세례 요한과 같은 자입니다. 주님을 믿도록 전도하는 사람과 같소. 전도 받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은 상관이 없소. 주님과 단둘이 붙어야 되지.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여전도회에서도 말했는데 많은 사람을 빛으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은 영원토록 별과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일을 지켜 주일날 얻은 하나님의 깨달음, 주일날 찾은 자기, 이 사람으로 사는 사람이 별처럼 뜨묵뜨묵 나타나야 됩니다. 교회는 이 사람이 필요해요.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천 사람도 만 사람도 살아납니다. 이 사람이 필요해요. 교회 밖이나 안이나 세상 것가지고 암만 날뛰어도 안 됩니다. 그거는 필요 없소. 이와같이 별과같이 반짝거리는 이런 사람들이 나와야 될 것입니다.
이 날에 참자기를 찾아가지고 다시는 이 주인공을 마음이 놓지 안하도록, 배척하지 안하도록, 빼앗기지 안하도록, 세상 어떤 것에게 유혹받아 가지고 내어주지 안하도록 아, 천하를 얻어도 그만 못하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얻어봤자 한국밖에 더 얻겠소? 한국은 천하의 억억만분의 일도 안됩니다.
<기도> 감사합니다. 여기 모인 성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기와 자기와의 이 투쟁이 계속하게 하여 주시고 마음과 몸은 어떤 귀한 것을 줄지라도 참자기를 배반하는 이런 일이 없고 어디서나 참사람, 새사람 자기로 살아 주께 영광을 돌리며 세상에 빛이 되며 많은 사람들이 이 빛 보고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영원 무궁토록 궁창의 별과같이 빛날 이 생애를 이루어가는 이 한 가지에 욕망을 두고 달리는 깬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