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7 21:59
주일
본문 : 계 1:9-16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지난번에도 이 주일에 대해서 종종 말씀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일에 대한 뜻을 바로 알고 바로 지켜야 모든 구원이 다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1계명으로부터 열째 까지의 계명이 있지마는 열 가지 계명 중에 제일 으뜸되는 계명이 4계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 4계명이라는 것은 4계명을 잘 지키는 데에서 1계명으로부터 10계명까지 지킬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우리에게 오지 4계명을 바로 지키지 못하면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올 수가 없습니다.
또 이 4계명에는 안식일이라고 그렇게 기록을 하고 안식일 날짜가 변경된 것을 성경에 많이 말했고 또 변경해서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신약 성경에는 더우기 많이 말했고 구약에도 다 폐해질 것들을 많이 말씀했지마는 사람들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연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제칠일 안식일로만 생각하고 그날이 변경되어서 제팔일이 새로 완전한 안식일이 되고 그전의 안식은 참의 그림자로 되어 있는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늘 많이 말을 했습니다.
안식일을 폐했다는 말을 여러군데 말씀하셨고 여러 또 형편에 따라서 말씀을 했지마는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일을 지키기는 지키지마는 모두 다 지키니까 지킨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어째 안식일이라고 제 4계명에 기록되어 있는데 안식일은 제칠일 토요일이 안식일인데-안 믿는사람으로 말하면-어떻게 주일날을 안식일이라고 지킬까 이래 가지고서 확정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데에서 악령은 지금, 산업 전도에서는 뭐 산업을 위주로해서 전도는 그 부업으로 삼아 가지고, 주일을 하필 제칠일이 안식일인데 제팔 일을 안식일로 지키나 구일을 안식일로 지키나 상관이 없다 이래 가지고, 지금 외지에 외국에 가 가지고 모두 업체들을 가지고서 일하고 있는 그런 이민 업체들에게서는 대개는 다 산업이 위주기 때문에 금요일날 지키는 회사도 있고 또 토요일날 지키는 회사도 있고 화요일날 지키는 회사도 있고, 또 여기서도 또, 두 주일은 지키고 두 주일은 또 지키지 않는 그런 회사들도 있고, 또 어느 두 주일 어느 한 주일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작정을 해서 그랬으나 이것은 성경이 정죄합니다. 그리고 또 안식일을 이것을 고집해 가지고 안식교라는 교는 안식일을 변개 해 지키는 것은 그것은 다 비성경적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있다 해 가지고서 안식교라는 교가 있습니다. 그 안식교는 기독교와 비슷한데 그 중에 제일 단점이 안식일을 가지고 구원의 근거로,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이 있지 안식일을 변개해서 주일날이나 그래 지키는 사람들은 구원이 없다 하는 그것이 안식교의 변질된 잘못된 이단 사상입니다. 그래서, 정통 교리에서는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그렇게 정죄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는 두 가지 토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일이 있고 또 우리를 대신해서 사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죽으심에 대해서는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고 그저는 대단히 우리가 존경하고 감탄하지마는 우리를 위해서 사신 일에 대해서는 뭐 사는 거야 좋지 죽는 게 안됐고 나쁘지 사는 것이야 뭐 나쁠 게 뭐 있나 그러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사신 데 대해서야 그렇게 큰 희생이 아니다 해서 사람들이 별로이 생각을 안 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축하가 일반적으로 대단히 성대했었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 대해서도 그 기념이 성대했었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얼마 전까지도 뭐 부활에 대해서는 별로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라다가 요즈음에는 지금 부활 주일이라는 것도 정해 가지고 또 부활에 대해서 기념하는 그런 축하를 성대히 합니다. 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람되어 내려 오신, 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까지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대속의 공로에 반토막입니다. 반토막. 또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이 우리를 위해서 구속하시는 그 공로에 대해서 반토막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의 절정은 어디 있는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골고다에서,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까지가 예수님의 구속의 절정이라 그렇게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죽으심은 그저 삼십 삼년 사 개월 동안 사시다가 십자가에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셨으니까 죽음에 대해서만 그렇게 사람들이 좀 실감적으로 느끼고 마음에 감격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되어 오신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이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그것은 아직까지 지식이 편벽되고 어린 까닭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당신이 지으신 인간 중에 하나인 피조물같이 되어 가지고 오신다는 그것이 큰 희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하늘에 있는 지위와 부요와 모든 영광을 내어 놓으신 거기에서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의 그 공로는 우리를 대형 대행하신 공로입니다.
그 공로가 대속의 공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두 가지 죽음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그 죄값, 또 우리 인생이 제 자율대로 주관대로 제 사욕대로 산 그 모든 자율 행위 그 값,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배반 한 배신한 그 행위, 이 세 가지 죄값으로 영원히 멸망받는 우리들을 구출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권자시요 주재자시지마는 그분은 스스로가 진리요 지공이요 지성이기 때문에 당신이 내신 그 법칙,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죄 값으로 사망된 자를 사망의 댓가를 내지 않고는 거기에서 구출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지성이요 지공의 법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 되어 오셔 가지고서 인간이 받을 형을 영원히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영원히 받을 형을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받으신 것은, 그분은 무한하신 분이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과 그 분의 비교할 수 없는 피조물의 영원한 형도 그분은 일시에 받아도 무한한 형이기 때문에 담당을 할 수가 있어서 그것도 다 지공법에 딱 합당하게 담당을 하셔 가지고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죽으심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죽으심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하나님의 그 자존하시고 지존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당시의 그 무한한 부요도, 영광도 지위도 권세도 한없이 부요하신 그분이 부요를 내어 놓으신 그때부터 우리의 대속은 시작하셔 가지고서 우리의 모든 잘못된 그 형을 대신하시는 그 대신은 하늘에 있는 부요를 내어 놓는 거기에서 부터 시작돼 가지고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데에서 완성이 됐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내가 영원히 죽을 죽음을 대신 하셨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너무도 부분적으로만 생각을 해서 전체면에는 상관이 없는 그런 생각을 좁게 가지기 쉽습니다. 우리를, 우리 형을 대신하는 데에는 지극히 높으심도 권세도 부요도 영광도 평강도 자유도 쾌락도 다 내어 놓으셔서 우리의 대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생각할 때마다 내 높음이나 내 지위나 권세나 내 부요나 내 평강이나 쾌락이나 그런 것들을 좀 연관시켜 생각해 가지고서 감히 그런 것을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취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주께 다 내어 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 한 가지 죽으신 것은 우리를, 우리의 형벌을 대신해서 아무리 죽으셔서 형벌은 없다 할지라도 무죄라고 해 가지고서 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제는 형은 대신하시고 우리에게 죄가, 죄를 짓지 안할 수 있는 자 또 의로운 자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된 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행하신 그 행하심으로 죽은 죽으심이 있습니다. 행하심으로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그 전부를 기울여 가지고 행하시되 남은 것이 있기까지만 행하고 끝난 것이 아니고 남은 것이 없기까지 다 들여서 우리 대신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사죄가 이루어졌고 칭의가 이루어졌고 화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두 가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인데 하나는 이미 잘못 저질러 놓은 그 형을 담당하시느라고 그 형으로 죽으셨고 하나는 우리의 잘못은 이제 담당했기 때문에 없지마는 우리를 옳은 자로 의로운 자로 바로된 자로 세우시기 위해 가지고서 우리가 행 할 모든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다 완수하기 위한 대신 행하신 그 행하심을 위해서 행하시되 행하다가 행하다가 마자막에는 생명을 다해서 행하지 안하면 안될 것이기 때문에 다해서 행하게 되어도 생명을 다해 가지고 행하시고 생명을 애끼지 안하고 다해서 행하셔서 예수님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를 두 가지 면으로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우리의 생활에서 생각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또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것은-아무리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에서 우리의 형을 대형해서, 대형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공심꽈, 그 공심판에서 우리는 죄가 없는 자라 할지라도 의로운 자로 세우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대행하므로서 당신이 우리를 공심판에서는 완전히 죄가 없는 자로 온전한 자로 그렇게 대속을 하셔 가지고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완전자로 우리가 대속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책에 기록됐다 말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흠이 없는 생명을 가지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두 가지 죽으심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공법 지성법에서 그 무죄자로 또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그렇게 아무리 공심판에서 인정이 됐다 할지라도 실상으로 그러 실력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공심판 대속을 완료하신 그것만으로서는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옥이 형벌받는 그 형벌에서 나온 것이니까 마치 감옥에 들어 있는 시체를 끄내니까 시체가 감옥에서 나오기는 나왔지마는 감옥 안에 있는 시체나 감옥 밖에 있는 시체나 뭐 시체는 시체지 그것이 살아서 생명이나 그런 무슨 작용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만 하고 다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 대속이 없었다고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만 우리가 면제됐지마는 우리는 다 죽은 자로 실상이 무감각한 자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공심판 대속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없는데, 다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시 이 공심판에서 판정되 자와 같은 그런 실상의 자가 우리가 되도록 이렇게 하시는 일을 할라고 할 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의 두 가지 죽으심으로 설정해 놓은 이 대속의 공로가 없으면은 우리는 다시 새생명에 관한 것을 가질 수가 없는고로 그때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의 대속을 우리에게 주시는 데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의 대속이 필요가 있지 그게 없었다면은 예수님도 아무 성공 소용없고 우리도 아무 소용없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산 자를 만들고 산 실상의 자를 만들어 가지고서 우리를 산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그 두 가지의 설정의 공로가 없으면 그 일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두 가지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의 자본을 설정하신 것입니다. 기초를 설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구원이라고 말 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는 자본적 구속이 되겠고 다시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부활은 건설의 구속이 됩니다. 만일 터가 암만 있어도 건설 없으면 아무 소용없고 터가 없으면 건설할라고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어서 무덤 가운데에 장례 되어 있는 그 예수님의 죽으심, 그 죽으심과 또 삼일 만에 부활하심과 이 두 가지가 연결된 그 절정이 예수님의 사활입니다. 예수님의 죽고 사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곧 표시되기를 주일로 표시됐습니다. 주일은 예수님의 두 가지 죽으심으로 근거를 설정하셨고 자본을 설정하신 것이 주일의 설정이요 그 다음에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로 이제 우리의 영원히 삶을 건설하는 즉시 건설을 시작한 이 건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은 사람이 죄값으로-무엇이 피조물 뭐이든지 하나님의 법칙에 죄값으로-죽는 것은 영원히 죽는 죽음인데 영원히 죽는 죽음을 예수님께서 그 형을 대신하셨기 때문에 죽음에서 면제는 됐습니다. 죽음은, 죽음에서 면제는 되어서 죽일 자도 없고 죽일 권세도 없고 사망의 권세가 없어서 죽지는 안하지마는 살아나지를 못 합니다. 죽지는 안할 자로 돼 가지고 있지마는 살아나지를 못합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그 길이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만 다시 이 죽음에서 살아나는 이런 길을 열 수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시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대형해서 대행하시고 대행하셔 가지고 죽으시고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당신은 사셨기 때문에 당신이 이 모든 죽음에서 살아나시는 이 부활의 길을 예수님이 여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의 길을 열지 안 했으면 이제 인생의 부활이라 하는 것이든지 만물이 다시 재생되는 일은 없습니다.
못합니다. 그거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라든지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라든지 이 모든 만물이 다 이것이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라든지 또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다시 사는 이 부활이라 하는 것은 인생에게도 모든 다른 피조물에게도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을, 이 부활의 길을 여는 데에는 또 하나님께서만 이것을 열라면 열 수가 있는데 하나님이 여실라고 하면 여기에 대한 보증을 해야 되기 때문에 보증을 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을 여실라고 하면 하나님이 다시 처음에 대속하실려고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내어 놓으심과 같이 이제 다시 그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시고 하나님이 사람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지 안하면 이 부활을 길을, 부활의 길을 열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주가 피조물을 입은 것을 두 번째로 입은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신 것입니다. 그래 입어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시고 이제 사람되셔 가지고 이 부활의 길을 여셨으므로 우리에게 다시 법적으로 살아난 이것이 실상으로 산 자가 되는 그 길을 열었습니다.
이래서, 만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었으면 죽은 자가 사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사는 일이 없으나 예수님께서 살아나심으로 죽은 자가 사는 길을 열어 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공심판에서 정죄해서 죽이는 그런 세력에, 그런 법에 걸리지 안한 자는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법에 걸리지 안한 자들이 다 되어 있었지마는 살아나는 길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나는 그 길을 마련하는 데에는 이는 그것은 예수님만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그 길을 마련할 수가 있지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살아나는 데에는 인성만은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신성이 다시 인성을 입고 와 가지고서 신인양성일위가 되어야 이 부활의 길을 열수 있는 이 공로를 비로소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신인 양성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는 인성을 벗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제 영원히 인성을 못 벗습니다. 근본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이 피조물의 그 피조물 성을 영원히 벗지 못합니다. 이거는 영원한 가난이요 영원한 낮아짐이요 영원히 창조주가 피조물 꺼풀 입기 때문에 피조물로 행동하지 안하면 안 되는 이런 지극히 큰 희생을 가지시고 이 부활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 부활의 길은 부활해 가지고, 만일 부활해 가지고 부활한 자가, 부활한 자가 그 자가 다시, 범죄한다면 그 범죄는 부활의 모든 책임을 지고 부활하신 부활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부활의 길을 개척하신 주님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로 그렇게 따로 객관적으로 계실 수가 없고 창조주가 친히 피조물 되어 가지고서 피조물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서 피조물로하여금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죄를 받지 안할 수 있는 그런자로 보증하는 그 보증을 해야 이 부활의 길을 열고, 또 의례히 부활의 길을 열면 하나님의 공심판 지성법에서 이거는 책임을 겨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책임을 지시고 다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만 모든 희생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아직까지 도가 옅어서 깨닫지 못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나 그나 다 무한입니다. 꼭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했습니다.
거기 말하기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비로소 거기에서 죽은 것이 새로 살아나는 길이 열렸습니다.
'거듭나게 하사' 이래서 영이 중생되는 길이 열렸고 또 이 심신의 기능이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열렸습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났다, 부활.
이 부활이라는 것, 중생이나 부활이라 말은 꼭 같은 말인데 영이 부활한 것은 중생이라고 그렇게 구별하기 위해서 표현을 했고 또 육의 심신이 살아난 것은 이것은 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그렇게 말을 했고 또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이 형체가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또 부활이라 그렇게 말해서 부활이라 다시 살아난다 또 중생이라 이 세 가지 방언으로 표시를 했지마는 속 뜻은 다 죽은 것이 살아난다는 한가지 뜻입니다.
이래서 다시 죽은 가운데에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알아 우리에게 '거듭 나게 하사' 우리를 다시 중생, 부활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심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산 소망을 있게 할라 하니까 이 산 소망을 있게 하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다 보증물을 내놔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다시 내놨습니다.
과거에는 우리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내놨고, 앞으로 우리를 영원히, 당신의 모든 부요를 내놓지 안하면으 우리에게 와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공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그 분의 법을 어기지릍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어 가난해진 것은 당신이 있는 것을 내놔야 우리에게 채워 줄 수가 있지 그렇게 없이는 채워 주지를 못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서 창조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창조하시지마는 일단 창조된 그것이 다시 복귀되는 데에는 댓가가 없으면은 절대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지공법입니다. 이래서, '산 소망을 있게 하시나니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럽지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는 것' 이런 것을 우리가 이제 우리 소망으로 우리 기업으로 가지게 됐습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들, 썩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금도 썩습니다. 금이 안 썩는 줄 압니까? 사람이 수명이 짧아서 금이 안 썩지 그 금은 무한히 있는 것 아닙니다. 썩습니다. 그게 다 썩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라는 이 우주에 이 모든 수많은 별들이 있지마는 그게 다 썩습니다. 썩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꾸 새롭게 한다 했습니다. 새롭게 안 하면 썩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나 이 지구 땅덩어리도 별의 한 조그만한 한 개수 중에 한 개로 되어 있는 것이 지구 땅덩어리인데 지구 땅덩어리를 자기들이 조그만한 머리로 생각해 본다 해도, 지질학자들이 말하기를, 지질은 이렇게 변질돼 나갔다 이것을 알 것이고 또 역사를 가진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꾸 변해 나간다는 것을 저희들도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썩지 않는 것이 없는데 우리에게는 이제는 썩지 않는 것 쇠하지 않는 것 더럽지 않는 것 낡아지지 않는 것이런 것을 우리가 다 가지고,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같은 완전성으로 살았고 영원한 자로 이렇게 영원성 불변성의 것으로 우리가 완전히 살아난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관련되어 있는 모든 소지품 모든 필수품 이런 것들도 전부다 영원 불변의 존재로 우리의 기업으로 줘 가지고서 산 소망을 있게 했다. 이제 그래 놓고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이 보장이 돼 가지고서 지극히 큰 능력의 보호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것을 연단 시켜서 입히기 위해서, 입히기 위해서 이런 연단 저런 연단 이런 환난 저런 환난에서 이런 모를 죽이고 저런 모를 살리고 이런 것을 연단해서 잡것을 제하고 다시 또 새롭게 하고, 이래 가지고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실려고 하나님이 하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일이라는 것이 날로 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예수님이 우리를 공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죽으심, 또 우리를 사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부활, 이제 이 두 가지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공로가 똘똘 뭉쳐서 요 주일이라는 주일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날이냐 하면은 주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관련,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까지의 거기에 관련된 은혜를 우리가 입는 날이 주일날이요 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원에 관련된 그 은혜를 입는 날이 우리의 주일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날은 우리도 준비하는 것이 두 가지 죽음으로 준비해야 됩니다. 두 가지 죽음으로 준비해야 되고 또 우리는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일을 준비하는 것은 두 가지 죽음으로 준비해야 되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가난해지는, 이 모든 가난해지는 이 가난으로 우리가 주일을 우리가 지켜서 우리가 다시 새 소망의 것을 이루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주일은 이 뜻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이 주일은 자기가 의례히 두 가지 죽음으로 이 주일을 준비할 것을 각오하고 있고 또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은, 가난해지는, 이 가난해지는 이 가난으로 가지고서 주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유혹을 받지 안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죄를 범죄케 할라고, 범죄케 할라고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죄 없는 자 되기 위한 참 희생이 있어야 됩니다. 죄없는 자 되기 위해서, 또 죄를 범하지 않는 자 되기 위해서, 우리를 죄있는 자로 만들라고 할 때에 죄 없는 자로 그와같이 죄없는 자로 우리가 그대로 보수할라 할 때, 죄없는 자로 보수할라 할 때에 그것도 생명 내놔야 됩니다. 우리는 지금 연습하는 중에 있지 우리가 죄없는 자로 유지돼, 죄없는 자를 유지 한다는 것은 생명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왜? 그들은 생명까지를, 이 세상은 우리 생명까지를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권세는 가지고 있지 안 하지마는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얼마든지 위협을 할 수가 있고 얼마든지 우리에게 박해를 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무죄를 보수하기 위해서도 생명 나놔야 되고, 또 죄를 범하라고 할 때에 죄를 범할라고 하지 안하는 데에도 생명 내놔야 되고, 또 우리가 인간 뜻대로 하자고서 이와같이 강제할 때에 거기에 휩쓸리지 안 할라고 할 때에도 생명 내놔야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라하는 데에 생명 내놔야 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배반하라고 할 때에 배반하지 안할라고 하는 데에도 생명 내놔야 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런지 모릅니다. 그저 하나님을 내놓지 안할라고 하는 데에서, 제가 처음에는 내놓을라면 내놓고 안 내놓을라면 안 내놓고 하는 이것참 초보지마는 마지막에는 저는 내놓기 싫지마는 내놓지 안하면은 안 되는 그런 강제가 올 때에 우리는 생명을 내놓으면 그 이상 저들은 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치 않기 위해서도 생명을 내놔야 되고 또 하나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데에도 생명을 내놔야 되고, 예수님이 이 두 가지 생명을 내놓음으로서 우리를 공심판에서 구출하신 이 구출을 우리가, 구속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양이 많든지 적든지 이런 면으로 저런 면으로 어떤 종자로든지 우리는 두 가지 죽음을 취하는 그 성격의 것을 가지고 라야 주일을 바로 준비합니다. 주일을 준비할라 할 때에는 그것을 내가 자원 해서 자꾸 그런 것을 스스로 만들 것은 없지마는, 그것은 다 자살 행위지마는 서도, 내가 주일을 바로 지킬라고 하면 반드시 이 두 가지에 거리껴서 두 가 지를 내놔야 주일을 바로 준비할 수 있는 그런 일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을 바로 지킬라고 생각해 보면은 반드시 그런 일이 됩니다.
그런데, 온 가정이 믿지 않는 가정으로서 주일을 지킬라 하면은 이런 박해가 있는 그 박해 중에서 주일을 지키는 사람도 있는데 (안내원들 저 밖에서 말씀 안 듣고 저 뭣하고 창밖에 가 있소 저 소리를 듣나요). 자기가 이 주일을 지킬라고 하면, 자기, 참 간단한 데에서도, 이것도 큰 게 아니라도 생명적이다 이거는 조그만한 희생이라도 생명적 희생이다 이거는 지위적 희생이다 이거는 소유적 희생이다 이거는 명예적 희생이다 이거는 신체적 희생이다 뭐 그런 종류가 한꺼번에, 큰 거는 아니지마는 보스라기라도 그렇게 반드시 이 두 죽음을 각오하고 이 두 죽음을 들여 가지고라야 이 주일을, 두 죽음을 가지고서 만들어 놓으신 이 반 쪼가리의 이 주일의 기초를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두 가지 죽으심으로서 우리에게 죽음의, 이 주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자본을 마련했는데 우리도 이 두 가지 죽음의 요소적인 그런 기초적 그런 준비가 없이는 그 사람이 제 일을 바로 지키지 못 합니다. 사람마다 주일 지키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반드시 자기에게는 그런 것이 옵니다.
이제 주님이 두 가지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두 가지 구속을 했습니다. 하나는 말 하자면 잘못된 것을 우리를 멸망에서 건져 주신 것이고, 우리는 다시 멸망시킬 자가 없도록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의롭다.
완전하다 이렇게 산 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 법적으로 산 자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공심판 심판장부에서는 이는, 이는 다 멸망에서 다 삭제됐다 이는 완전히 산 자에게 속했다 생명록에 딱 등록이 됐습니다. 우리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걸 두 가지 죽음 가지고서 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 두 가지 죽음의 성격이 아니면 자기가 실상으로 자기 현실에서 자기에게 해당된 자기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자기가 지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다 있고야 되는 것인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이 주일 기초적 준비를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차차 차차 신앙이 자라 갈수록이 이 봉우리는 커집니다. 커져서 마지막에는 이제 참으로 자기의 생명의 몽땅, 생명 전부를 몽땅 내놓지 안하면은 주일 지킬 수 없는 그 절정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몽땅 내놓고 주일을 몽땅 지킵니다.
그런고로, 그것이 반 주일을 지키는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제 대형을, 형을 벗은, 형을 벗은 그 공로를 입게 되고 거기에서 또 대행의 공로를 입게 되고 화친의 공로를 입게 되어서 거기에서, 다 생명을 걸었을 때에 생명을 의례히 내놓고 애끼지 안하고 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 공로가 내게 법적으로 입혀진 것이 실상으로 입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주일을 지킬라고 할 때에는 자기에게 여러 가지 반드시 내놔야 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 오늘 주일 지킬라고 하면 이거 무엇이 희생이 되는데 무슨 부요가 희생이 되는데 무슨 지위가 희생이 되는데 무슨 권세가 희생이 되는데 무슨 영광이 희생이 되는데 내 권위가 희생이 되는데 영광이 희생이 되는데 모든 환영이 희생이 되는데 무엇이 무엇이 어쨌든지 총칭 말하면 한 말로 부요입니다. 부요 자기의 가진 것의 그 부요가 희생되어서 가난해지는 이 가난을 가지고라야 주일을 바로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은 자기에게 있는 모든 소유가 다 없어져도 주일은 지켜야 합니다. 없어지면서 주일 지키는 것이 지키는 것입니다. 없어지면서 주일지키는 것이 주일 지키는 것이요 낮아지면서 주일 지키는 것이 주일 지키는 것이요 천해지면서 주일 지키는 것이 주일 지키는 것이요 가난해 지면서 주일 지키는 것이 주일 지키는 것이요 욕되면서 주일 지키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이런 저런 희생에서 이런 저런 죽음으로 죽으면서 지키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주일을 지키고 이 지킴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삼일 만에 부활한 이 부활의 은총을 입는 것이 또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주일 지키는 이것을 예사롭게 할 것이 아니고 주일은 의례히 주님이 두 가지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구속을 기념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두 가지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하신 것을 우리가 기념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또 주님이 모든 가난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건설을 베풀어 주신 그 건설을 우리가 받는 것이 이 주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대속의 공로로 우리가 입는 데도 이제 죽음으로 입어야 되고 또 이 영원한 건설을 입는 것도 우리가 내놓음으로 입습니다. 내놓음으로, 내놓음으로, 썩어진 걸 내 놓음므로서 다시 산 것을 입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놓음으로 주일을 지킨 자가 주일을 지키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얻어지게 되는 것이, 이게 주일날 소망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 이치를 여러분들이 모르고 우리가 주일 지킬라 하면은 힘듭니다. 요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뭐 예수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뭐 형통하는 그런 땅에 속한 것만 말하면 잘 듣는데 그게 소용없습니다. 암만 해봤자 아무 소용없소 아무리 기분이 좋아봤자 아무 소용없소. 아무리 흥분돼봤자 아무 소용 없어. 아무 소용없습니다. 땅에 걸 천하를 다 차지하면 뭐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법에 딱 들어 맞아야 됩니다. 안 들어 맞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요 진리에 맞추어서 딱딱 해 나가야 됩니다.
사람들이 이 선이라고 말하는데 선은 ○교에도 선도 있고 이종교마다 선이 다 있고 이방에도 선이 다 있습니다. 그 선이 다 지옥 갑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 위주 그것이 선이라 하는 그말을 예사로 듣고 듣기를 싫어합니다. 아, 저 도무지 지금 치우쳐서 아무것도 아닌 억설을 갖다 댄다 이렇게 말합니다. 땅위에 선이 많지마는 그것을 따져 보면 하나님 중심이 다 아닙니다. 하나님 위주가 아닙니다 자기 중심 뭐 다른 위주 중심 다르지 그거 하나님이 심판에서 용납하시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선은 하나님의 중심이다 위주다 악은 하나님외에 피조물 중심 위주가 그게 악이다 선은 하나님 중심 위주가 선이다 요게 천하 영원히 가도 변하지 안할 정의인데 요걸 예사로 여긴다 그 말이요.
이러기 때문에, 그런 말하면 몰상식하게 생각하고서 뭐 이종교 거나 주 많이 말하면 말하지마는, 여러분들, 기독교 외에는 선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이 그게 바른 말입니다. 바른 말이요. 만일 그 사람이 일생 동안 희생해서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중심 위주가 아니면 헛일입니다.
○○○○는 그는 도덕가 중에 위명한 도덕가 ○○○○에게는 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는 선이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은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없습니다. 다 인정하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구주 탄생을 부인하기 때문에 구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생과 연결된 것인데 인생과 연결줄을 부인하니까 그 사람에게는 사망뿐이지 아무 소용없습니다. ○○○○가 택한 자면 하늘 나라 갔지마는 그 사람의 땅 위의 생애는 하늘 나라의 공로는 털끝만치도 없을 것입니다. 택한 자면 하늘 나라에 가서 있기는 있지마는 그 사람의 공로라 하는 것은 털끝만치도 하늘 나라에 옮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요렇게 똑똑히 알고 성경을 근거해서 믿어야 되지 딴거는 소용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은 그저 주님이 두 가지 죽으심으로서 설정해 놓은 자본이 들어 있는 주일이라 두 가지 죽으심으로서 설정한 자본이 되어 있는 것이 주일이라 주님이 무한한 그 부요를 내놓으시고 낮아지시고, 하나님이 피조물되신 이 큰 희생으로 이 큰 가난으로 이제 주일을 내놓으므로서 주일의 건설을 베푸신, 공로를 베푸신 이 건설 주님이 하나님으로 그 모든 부요를 다 내어놓아서 인자로 건설한 이 건설이 있는 것이 주일이라 그러니까, 두 가지 죽음의 자본이 있는 주일이요, 또 하나님의 무한한 그 희생의, 하나님이 피조물 되어 희생의 건설로의 건설이 있는 이 주일이라. 그러기 때문에 주일은 큰 자본과 큰 건설이 들어 있는 것이 주일이기 때문에 이 주일날 우리는 이 자본으로 넉넉해지고 이 건설로서 충만해지는 것이 주일날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을 안 지키면 헛일입니다. 주일 안 지키면 헛일인데 무교회 주의자들은 그 사람들은 주일이 필요없습니다. 교회가 필요없어. 언제든지 모이면 하나님 계시고 언제든지 섬기면 되지 뭐 주일날 모여 가지고 섬길 게 뭐 있느냐? 성경에는 그날이 가까올수록이 모이라고 했는데 주일을 지키라고 주일을 깨끗이 지켜라하고 주일지킬라고 하다가서 순교 당한 사람들 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그저 학만 많이 해 가지고 말만 많이 말만 잘하면 그만 된 줄로 압니다.
믿는 것은 성경 법칙 외에는 법칙이 없습니다. 이 성경 법칙은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요대로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런고로 주일 준비는 우리는 죽음을 각오해야 됩니다. 우리는 주일 준비를 죽음을 각오하고 주일 지키다가 죽어야 합니다. 뭐 살고 주일 지키는 것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첫째는 죽어야 합니다. 둘째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에 다 가난해지고 낮아지고 가난해져야 됩니다. 낮아져야 됩니다. 천해져야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요해지고 부활해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여기에서, 다 인본은 깨어지고 신본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만이 바라보는 것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