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6:17
주님과 연결
1985. 1. 7. 월새벽
본문 : 요한복음 15장 1절∼8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 비유나 어제 말씀이나 다 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본구원의 구속이고 하나는 건설구원의 구속입니다. 기본구원의 구속은 하나님이신 주님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도록 이미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이 결합은 영만 되어 있고 육은 아직 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심신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이 결합된 이 결합이 없이는 주님과 인생은 결합이 절대 불가능합니다. 영이 기본적으로 주님과 결합이 되어 있는 화친을 이루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화친을 통해서 건설구원, 곧 행위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 연결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지로 자신이 행위하는 그 구원을 가리켜서 행위구원이라, 역사적 구원이라 그렇게도 말합니다. 자기가 친히 역사 해 가지고, 역사는 자기가 일을 해 가지고 이루는 구원이 곧 행위구원이요 그게 건설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본 구원은 이미 우리가 연결되어 있지마는서도 행위 구원의 이 연결은 자신의 노력이 있어 가지고 연결이 되는 것이지 자신의 노력이 없어 가지고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노력이 어떤 노력을 하게 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화친해서 연결을 가지도록 하려고 당신이 애를 써서 연결되게 할려고 하나님께서 온갖 방편을 쓰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또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해서, 또 성경 안에서 역사해서, 이렇게 행위를 할 수 있는, 본인이 행위 할 수 있는 행윈 연결, 역사 연결 그 연결을 가지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 그 노력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공로가 노력을 하고, 예수님의 피공로를 협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공로를 조력하는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서 역사를 하시고, 또 진리 자체가 역사를 하고 이 세 역사가 우리 기본구원 얻은 사람들에게 이 역사 구원, 행위구원, 건설구원 이 구원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와 가지고 역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하는데 기본구원과 다른 것은, 이렇게 역사하실 때에 우리가 받아들이면 됩니다. 받아들이면 되는데 마음이 강퍅해져 가지고 받아들이지 안하고 거부를 하고 반대를 합니다.
거부하고 반대하면 역사 연결이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는 것도 네 모든 보물을 주님과 주님의 진리대로 네가 사용을 해라. 그러면, 주님 생각하고 진리 생각지 쌀으면 주님과 진리, 주님의 명령인 진리대로 사용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주님과 주님의 진리를 생각다 보면 자연히 마음이 보물이 있는 데가 있다 그 말은 마음이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가서 있고 주님의 뜻에 가 있고, 이러니까,-주님의 뜻이 곧 진리인데 -하나님과 진리에 가서 네 마음이 있게 된다. 하나님과 진리에 가서 네 마음이 있으면 네 마음이 밝아진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에게 가서 있든지 어떤 피조물에게 가서 있든지 어떤 뭐 위인이라고, 예를 들면 불교 같은데서는 석가모니를 그를 숭배합니다. 또 유교에서는 공자 맹자를 숭배합니다. 또 선도에서는 노자를 숭배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인물들이 다 위대한 인물들이요 다 유명한 참 특수한 인물들이지마는 그 인물들도 내나 피조물입니다. 그러면, 피조물은 어떤 도덕가든지. 철학가든지, 정치가든지, 절제가든지, 톨스토이 같은 그런 사람이든지 어떤 사람을 자기가 사모하든지, 또 사람을 사모하지 안 하면 무슨 돈을 사모하든지, 어떤 아주 아름답게 되어져 있는 그런 미술품을 사모한다든지 뭘 사모하든지 피조물을 사모하면 사람이 어두워집니다. 피조물을 사모하면 어두워지고 또 인간의 생각을 사모하면 어두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종교는 자기네들 딴에는 자기의 심령이 밝아진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지마는서도 이종교는 그 종교를 시작할 때와 그칠 때와 아주 다르게 점점 갈수록 어두워집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는 하나님이 창조주시요 그분이 근본이신데 그분과는 아주 차차 차차 멀어져서 아주 멀어지고. 그분과도 멀어지고 그분의 뜻과도 멀어지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대적이 점점, 되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고 멸망받을 그것이 점점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종교 어떤 종교든지 그 종교의 독실한 그런 사람들이 지옥의 제일 밑층에 가서 제일 형벌을 많이 받고 있는 그곳에 가는 것이 그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 사람들이 물론 안 믿는 사람이면 다 주님이 없는 사람이지마는 없는 사람 중에도 제일 어두워졌고 제일 죄악이 짙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이 말은, 있는 소유 모든 보물을 주님과 진리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진리대로 쓰는 그것이 하늘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쌓아 두는 거 그게 보배요 그게 썩어지지 안하고 없어지지 안하니까 그것도 좋습니다. 그보다도 더 좋은 것은 자기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이 두 가지를 생각하다 보니까, 이 두 가지를 생각하다 보니까 자기의 심령이 밝아지는 그것이 수입이 더 큰 것입니다. 자기 심령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거게 하나 예를 든 것이 이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온 전신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전신이 밝은 것처럼, 고 심령이 밝으면, 고 마음이 밝으면 고 사람의 전 생애와 사상과 비판과 평가와 계획과 소원과 모든 것이 다 밝아지고, 그 사람이 뭐 소원 하나만 어두워져도 그 사람 신세 갑니다.
망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아무리 해도 너무 어둡기 때문에 그걸 잘 못 듣습니다.
사람이 안 가질 욕심 하나 가지는 그것 가지고서 일생을 망하는 사람 많습니다.
얼마든지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안 가질 소원, 또 안 가져야 할 취미 안 가져야 할 재미나 기쁨, 안 가져야 할 지위, 안 가져야 할 영광. 안가져야 할 권세 이런 것을 하나 자기가 가져 가지고 그것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경험한 사람들 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는, 사람이 허영과 허욕이 있으면 망한다.' 자기가 허욕 하나를 잠깐 품었는데. 몇해 동안 허욕을 한번 품어 가지고서 그 허욕을, 헛된 욕심을 이루어 볼라고 하다가 그만 그게 잘못돼 가지고 일생을 헛일 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러니까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눈이 어두워도 온 전신이 어두운 그것도 참 어두우니까 그 전신이 어두워서 눈 하나 어두우니까 손도 소경, 놀음 하고 발도 소경 놀음 하고, 여기 디더면 쿡 빠져 죽을 데를 모르고 푹 디딜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소경들은 반드시 작지를 가지고 갑니다. 작지를 가지고 다닙니다. 작지를 가지고 이래 더듬어서, 이래 두드려 환경을 봐야 그거 뭣을 이래 좀 빠질 것인가 안 빠질 것인가 알지.
이러니까, 눈으로 척 보면 그만 환하이 다 보고 멀리도 환하이 보고 전부 다 보는데, 눈이 없으니 작지를 두드려 보니 작지 그거 두드려 봤자 자기 발 걷는 데의 그거나 보지 원수가 자기를 권총을 가지고 지금 겨누고 있는지 칼을 겨누고 있는지 기다리고 있는지 그런 건 안 보인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합니까? 이것도 그런데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얼마나 그 어두움이 크겠느냐' 네 마음이 어두워 놓으면 그 어두움에 대한 그 해독과 참 불행이 얼마나 크겠느냐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밝게 할 수 있느냐?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주님과 주님의 뜻인 뜻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 다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네게 명하는 것을, 명하는 거 뭐이냐? 하나님이 현실 줄 때에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요 현실에는 요 성경 말씀이 해당된다 하는 고 말씀을 자기가 찾아서 행하는 고것이 주님의 명령 행하는 것이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러니까. 네 마음이 주님과 주님의 뜻 곧 성경 말씀에 있으면 네 마음이 밝아진다. 네 마음이 밝아져서 생각도 옳은 생각만 하고 소원도 옳은 소원만 하고. 욕심도 옳은 욕심만 품고, 정신도 옳은 정신만 가지고. 이러니까 모든 행동도 옳은 행동만 하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어두워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게 포도나무 비유에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절로 마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마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주님과 연결이 되면 뭘로 연결이 되느냐? 주님과 연결시키는 그 연결 방편은 주님의 이 말씀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를 주님과 연결시키는 제일 외부적인 중매쟁이가 뭐이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주님과 나와의 결합을 시키는 중매쟁이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결합하는 중매쟁이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중매쟁이입니다.
이런데,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라 하니까 그만 자기 부인이 아름다운지 그만 그 부인 뺏길까 싶어서 안색이 달라지는 사람 있어요. 어리석어 그래. 저거 남자 여자 부부되는 그 부부 그까짓 거는 주님이 차지 하지 않습니다. 그건 상관 없어요. 그거는. 그거는 저거끼리 부부하고 주님과 부부되는 것은 고 인격과 그 신격이 서로, 서로 밀접하게 친교되다 그말이오.
이래서, 신구약 성경 말씀은 외부적인 중매쟁이요, 또 그 안에 있는 내 부적인 중매쟁이는 누가 내부적인 중매쟁인가? 그것은 성령의 감화 감동이 내부적인 중매쟁이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성령과 진리가 우리에게 어떻게 왔습니까? 우리에게 온것은, 뉘든지 성경 가지면 되는 줄 압니까? 이 영감과 진리가 우리에게 온것은 예수님의 피공로를 돕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공로를 돕기 위해서 오다니? 예수님의 피공로를 우리가 법적으로는 기본적으로는 입고 있지마는서도 행위적으로는, 활동적으로는 우리가 입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활동적으로 우리에게 입히기 위해서 온 것이 성신의 감화 감동과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역사의 순위를 말하면 예수님의 피공로가 주인이요 그다음에 성령의 감화는 주님의 하시는 일을 도와서 주님과 우리와를 연결을 시킬라고 하는 역군이요. 또 그다음에 마지막에 제일 말단 역군은 뭐이냐 하면은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고는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을 가지지 못하고, 또 진리와 연결 됐다고 해도 외나 알맹이 속 중매는 성령이 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그 중매가 역사해야 그래야 주님과 우리와의 완전한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과 연결 가지면 어떻게 연결 가지는데? 주님과 연결 가지는 것이 세 가지 면으로 연결됩니다. 사죄로 연결됩니다. 죄 없는, 죄가 없는 연결이 되고 의로운 연결이 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연결이 됩니다. 의로 연결된다 말은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하는 그 일을 하도록 하는 그 연결입니다. 또 하나님과 화친의 생명이라 말은 하나님이 이제는 내 안에 계셔서 내 주인이 되고 내 생명처럼, 우리 육신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있어 가지고 우리 몸을 다 움직이고 있지 앉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생명이 되셔 가지고서 역사하도록 고런 연결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화친의 연결이라 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되는 것이 사죄로 연결되는 것이니 사죄로 연결되는 것은 우리의 더러움이 없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더러움이 없는 그 연결을 가지고 더러움이 없어야지 더러움이 있으면 멸망 받습니다. 더러움이 없는 연결을 가지고, 그다음에는 주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그로 인하여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연결을 가집니다. 그 연결보다도 더 완전 연결을 뭐라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우리 안에 생명이 되셔 가지고서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이 있으니까 우리 전신 전체를 이 생명이 들어서 움직입니다. 내가 지금 이 손을 움직이는 것도, 여러분들이 이 새벽에 나온 것도 육신의 생명이 들어서 움직여서 나왔지 육신의 생명을 딱 떠나 버리면 그만 시체 돼 버립니다.
그다음에 그만 썩어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연결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주님은 하나님이신데, 주님은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신데,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을 시켜 줄라고 연결시키는 그 중매쟁이가 왔는데, 제일 착수하는, 제일 먼저 착수하는 중매쟁이의 이름이 뭐입니까? 뭐이지요? 신구약 성경 말씀 진리입니다. 진리. 진리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해 놓은 계약이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예언이라고 해도 되고, 또 교훈이라고 해도 되고 진리라고도 해도 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해도 되고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일차적으로 주님과 나와의 연결을 시키고 고하고 난 다음에 이제 제일 처음에 연결하는, 뭐 건축하는 데는 보니까 공굴하는데 처음에 뭐 시다지 넣는다 하던가? 그거 일본 말인데 시다지 넣는다 그라고, 또 이제 처음에 연결시킬 때에는, 집을 지으면 처음에 이거 뭐 다 아시바를 만들지 않습니까? 이거 만들고 또 인제 그다음에는 합판으로 가지고 판자를 이래 만들고 그라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이제, 그래 만들어 놓고 나면 그다음에 세멘이 그 안에 들어가 가지고서 딴딴하게 굳어지는게 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경 말씀은. 건축할 때 보니까 건축한다는 사람들이 전부 합판을 가지고서 다 집을 만듭니다. 합판 가지고 집을 만들 고 집을 만들고 난 다음에. 그것만 가지고는 안 돼요. 합판 가지고 집을 만드는데 그 속에 세멘이 들어간다 말이오. 세멘이 들어가면 합판 만드는 것은 마치 성경 말씀으로 우리가 깨끗해지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거와 같고. 그라고 난 다음에 세멘을 집어 넣으니까 이제 딴딴해. 그다음에 세멘을 집어 넣으면 그다음에는 성령님이 와 가지고 영감으로 우리와 연결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이제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됩니다.
이래서. 그렇게 연결시키기 위해 가지고서 역사를 얼마나 하느냐? 성령이 와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하는 그 역사가 몇 면으로 역사하고 있느냐? 제일 처음에 성경을 기록한 것이 누가 기록했습니까? 성신의 감동이 기록했습니다. 성신의 감동이 성경을 기록했어. 그래서 기록 영감이라 영감의 종류 가운데에 기록 영감이라 이랍니다. 성경에 기록한 영감이 있다. 기록 영감이 있고, 또 그다음에는 성경에 기록할 뿐만 아니라 성경 안에서 성신의 감화가 성경을 보는 자에게 깨닫게 해 주는 성경을 읽는 자에게 깨닫게 해 주는 성경 요 진리 안에서 성신의 감화가 역사하는 감화가 있으니 그것을 가리켜서 내재적 영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 안에, 안 내(內)자 있을 재(在)자. 성경 안에 있어 가지고서 영감 시킨다 해서 내재적 영감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내재적 영감이 있고, 또 중생시키기를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가 우리를 중생시킨 기본 구원을 얻을 때에 우리가 성령의 감화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영이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습니다. 주님의 피공로를, 없는 사람은 안 되고 주님의 피공로를 받은 사람은 성령과 진리로 살아났습니다. 이러니까 중생된 자 속에 마음을 환하게 밝게 하는, 환하게 밝게 하는 그 성신의 감화를 말하기를 그 사람에게 조명의 영감이라, 비출 조(照)자, 비출 조자 밝을 명(明)자, 조명의 영감이라. 그 사람 마음 속에서 성신의 감화가 그 사람 마음을 밝게 한다 말이오. 불을 켜면은 어두운 게 달아나지 않습니까? 어두운 거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은 다, 세상과 죄는 어두운 것입니다. 그라면, 성신의 감화가 그 속에 비추어서 자꾸 어두운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세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멸망할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지혜와 능력 가지고 무엇을 해 볼라 하는 그게 전부 어두운 것인데, 그래 가지고 전부 사망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렇게 조명의 영감을, 조명의 영감은 중생된 사람 속에서 지금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또 그다음에는, 비취니까. 그다음에는 역사적 영감이 있습니다.
역사 영감. 자기 속에 '아. 이대로 해 보겠다. 해 보겠다' 하는 역사 영감이 있는데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요대로 해 보고 싶다. 하고 싶다' 하는 고것은 자기 중생시킬 때에 안에 와서 계시는 역사 영감을 받아 가지고서 역사 영감이 자기를 감동시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영감도 하나님이요, 역사 영감도 하나님의 역사요. 조명의 영감도 하나님의 역사요, 또 성경 안에 있는 내재적 영감도 하나님이시요, 성경을 기록 한 기록 영감도 하나님이시라. 막 하나님의 사랑 속에 우리가 막 싸여 가지고 있어. 마치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전체가 쌓여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속에 우리가 싸여 가지고 있어, 이렇게 우리가 돼 가지고 있는데도 믿지 않는데서 능력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자 품안에 있으니까 다른 것이 뭘 해하겠습니까? 이러니까, 양이 아듬고 돌아올 때에는 목자의 품에 안겨 가지고 오니까 이리가 와도 상관이 없는데 오히려 이리가 올 때에 조롱할 것입니다. '아나, 날 먹어라.
날 먹어라' 조롱을 할 것이오. 왜? 목자가 이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목자가 이리를 그만 때리든지 창으로 찌르면 당장 죽기 때문에 우리는 이리를 보면 겁을 내지마는 그 사람들은 연습을 해서 그저 이리마 보면 창을, 먼데 있는 걸 창을 던져도 그만 찍혀 죽어 버린다 말이오. 이런데 이 목자한데 안겨 가지고 있으니까 겁이 안 나고 평안하지마는서도 과거에 놀라던 습성이 있어 가지고서, 목자 없이 돌아다닐 때에 그놈한테 해받은 그게 습성이 돼 가지고서 놀랜다 말이오. 그러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래서, 영감이 기록 영감이 있고 내재적 영감이 있고 또 조명 영감이 있고 또 역사 영감이 있어 가지고서, 우리 속에서 있어 가지고 역사하고 또 지금 오늘 아침에 이 설교하는 것도 그 영감이, 이 네 영감이 다 역사합니다. 여러분들 안에 들어 있는 영감이 몇 영감이냐? 그러면 여러분들을 살린 영감이 있고, 살렸고, 그다음에는 조명을 비추고, 그다음에는 역사 영감이 있고, 여러분들을 살린 영감이 있고 조명 영감이 있고 역사 영감이 있고 여러분들 안에 영감이 셋이 있고, 내 속에도 영감이 셋이 있습니다.
셋이 있는데, 내 속에 영감이 셋이 있는데 내 안에 내 생명이신 주님께서 내안에 계시면서 나를 통해 가지고서 내게 영감을 이렇게, 영감을 이렇게 주니까 내 마음이 밝아지니까, 밝아지니까 성경을 알게 됩니다. 또 성경 아는 영감이 나에게 또 성경을 또 깨닫게 해 주십니다. 깨닫게 해 주니까 이것을 역사 영감이 들어서 이거 전해야 되겠다 해서.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역사 영감이 지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 영감이 전하면, 전하면서, 한쪽머리는 내 안에서 역사 영감이 전하면서 한쪽 머리는 여러분들 마음을 열어 가지고서 이 영감 도리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 깨달을 수 있도록 이렇게 또 역사하시고. 그라고 난 다음에 이 말씀대로 지켜 행하고 싶은 그런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는 그 역사 영감이 역사하시고, 이래 가지고 되고. 또 옆에 어떤 사람을 통해서 이리 이리 해 가지고서, 모두 다 우리를 주님과 진리와의 이렇게 영감과 연결이 되도록. 진리와 연결되면 영감과 연결되고 영감과 연결되면은 이제 주님과 연결이 됩니다. 이거 다 중매쟁이로 이래 자꾸 할라고 애를 쓰니까. 애를 쓰는데 우리가 그렇게 애를 쓸 때에 내가 따라서 받아들이면 돼요. 받아 들여서 순종하면 돼. 순종만 하면 되는데 내가 거절하면은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에 현실에서, 현실에서 거게 해당되는 주님의 말씀을 그 명령을 복종하는 것은, 그 명령을 복종하는 것은 복을 끌어오는 것이요, 복종하는 것은 지극히 큰 능력을 내가 끌어오는 것이요. 하나님을 내 하나님 삼는 것이요 내가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는 것이니까 이것이 참 영생하는 것이요 완전을 이루는 것인데, 마귀란 놈이 꼬와 가지고서 '그것보다도 네 욕심대로 세상에 이런 거 저런 것이 좋다' 이래 가지고 자꾸 미혹을 줘 가지고서 진리의 사람이 되지 못하도록, 영감의 사람이 되지 못하도록. 주님의 대속의 공로의 사람이 되지 못하도록.
주님의 대속의 공로의 사람이 되면은 벌써 하나님의 사람이 됐으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체가 됐고 하나님의 성전이 됐고 하나님의 뫄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전능자가 그 안에다, 지극히 큰 능력이 너희 안에 와 가지고 역사하실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런고로, 여게,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에도 여게 보면, 오늘 아침에 말할려는 것은 그것입니다. 여게도 보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안하면 절로 마르고 소용이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과실도 맺고 자라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자랄 때에 잎사귀도 자라고 또 그 줄기도 자라고 꽃도 자라고 열매도 맺고 이라는데 그 모든 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어디서 나왔습니까? 줄기에서 나왔습니까? 다른 데서 받은 것이 혹 있습니까? 녜, 원둥치에서만 나왔습니다. 포도나무 둥치에서만 나왔지 딴 데서 나온게 아닙니다. 포도나무 둥치에서 나온 것만 그 가지에 잎사귀도 되고 눈도 되고 꽃도 되고 열매도 됐지. 둥치에. 포도나무에서 받지. 안한 것은, 포도나무, 포도나무에서 자기가 받지 안한 것이 붙어 있지 안해요? 붙어 있는 그거는 뭐이냐? 해충이오. 그는 반드시 포도나무에서 나온 것만 그 포도나무 가지를 유익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꿎 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지 포도나무에서 나오지 안한 그것은, 그것은 전부 가지를 망치는 것뿐입니다. 망치는 것뿐이오. 요것을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입니다.
망치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주님에게서 얻은 것 고것만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지 주님에게 얻지 안하고 다른 데서 얻은 거, 우리가 고렇게 행하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면 복 받는다는 그복이라는 것을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은 뭐이라고 했지요? 예? 지극히 큰 능력, 복이라 하는 것이 지극히 큰 능력이라 말이오.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 그것이 복인데.
그러면. 지극히 큰 능력이 와 가지고서 우리에게 필요있는 것을 차근차근 이렇게 순서 있게 요렇게 해서 해 주신다 그거요.
이러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둥치에서 나온 것만 저희에게 유익 하지 둥치에서 나오지 안한 것이 붙어 있는 것은 반드시 그거는 해충이든지 그리 아니면 먼지가 붙었어도, 먼지 붙었어도 소용이 없어. 먼지가 붙어 있어도 그게 포도나무 가지에는 손해고 버러지가 붙어 가지고 있어도 손해고 다른 뭐 끄내끼가 와 가지고서 짜매져 가지고 있어도 손해고 다 손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다만 포도나무 둥치에서 진액이 나와 가지고서, 속에서 진액 이 나와 가지고서 이 가지가 속에서 커 나온다 말이오. 그 속에서 진액이 나와 가지고 이 가지가 이래 커 나오는, 겉으머리에서 들어오는 거는 다 손해입니다. 겉에서 들어오는 건 다 손해요. 속에서, 포도나무에게서 나 오는 거, 주님에게서 우리에게 나와 가지고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마음에서 나온 생각,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용기, 우리 마음에서 나 오는 의. 이것이 바로 돼지는 것이지 밖의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에게만 받은 것이 그것이 자기가 되어지고, 참 자기가 되어지고 영생하는 자기가 되어지고, 새사람 자기는 주님에게 받는 고걸로만 자라지고 외에 세상 것으로는 자라지를 안하고 성공도 그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외에 딴데서 오는 것은 다 원수라. 적 이라, 다만 주님에게서 받는 것만이 우리에게는 옳고 참된 것이라 고것을 우리가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외에 딴것을 생각하면, 딴거 생각하면 그 거는 다 죽는 것입니다. 주님의 힘으로 아닌 뭐 제 힘으로 제 지혜로 하는 것은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라 말은 자기의 지혜와 총명과 명철 그게 필요있다 말 아니오. 그거 다 던져 버리라 말이오 자기를 부인하라 말은 자기의 지혜나 총명이나 뭐 그런 것을 다 부인하라 그말이오. 또 십자가 지라 그 말은 네 몸뚱이까지, 몸뚱이와. 몸뚱이 그 생명까지 다 버리라 그말이오. 십자가 지라말은 버리라 말이오. 버렸는데, 버렸는데. 나는 버렸는데 주님이 버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당신이 새로 개조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부인하니까 당신의 지혜와 총명이 와 가지고서 내게 지혜와 총명을 일으켜 가지고서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거는 다 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외에 딴데서 받은 것은 다 우리를 망치는 것뿐이다. 요 사층에 내가 화원에 그걸 보는데, 보면서 '아.
이 잎사귀가 어떻게 요렇게 깨끗하냐? 오층에 있는 것은 보니까 그거는 그만 시커머이 뭐이 끼어 가지고서 고만 그게 안 되고 보기도 싫고 뭐 아주 그만 병든 것같이 이래 돼지는데 요거는 어떻게 요래 깨끗하냐' 그라니까 '시커먼 것은 여기 낙진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이 모두 공해의 이거 모두 연기,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연기가 떨어져 가지고, 떨어져서 시커머이 더러워지는 건데 이 걸 안 씻어 주면 이게 죽습니다.' 그래 '이거는 어찌 돼 그러냐?' '이거는 다 이거 낱낱이 씻었습니다.' 그걸 씻어서 그거. 딴데서 온 그것도 씻어야. 암만 잎사귀에 붙어 있어도 그걸 씻어 버려 버려야 그게 유익하지 붙어 있어 가지고 유익된 게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에게 얻어진 거 그것만이 유익이지 주님이 주시지 안한 그런 것은 모두다, 주님이 주시지 안하고. 이거 뭐 이 세상에 공부 하는 그런 거다, 공부하는 그게 뭐이냐 하면은 그것이 세상이 순 것이지 주님이 준 것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런 것은 다 씻어 버려야 된다. 공부를 실컷 해도.
공부를 하는데 공부한 그 공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공부 가 말하는 대로 고대로 해야 됩니까 고것은 씻어 버려야 됩니까? 요게 아마 이해가 안 될 거라. 자기가 세상 공부를 하는데 세상 공부하는, 공부하는 고것을, 세상 공부 했으니까 세상 지식이 자기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까. 자기 행동에 있어서는 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까, 고것은 버려 버리고. 암만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 요렇게 하라 한다 해도 고거는 버려 버리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까. 고거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까? 예?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데. 고것도 부인이라 말이오.
부인하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박사들에게 말하기를 '박사 지식을 그걸 부인해라. 박사 지식 이까짓거 가지고는 사람을 죽이는 것뿐이지 하나도 하지 못한다. 이러니까 박사 지식이 너를 시키는 대로는 하나도 하지 말아라. 박사 지식 그것이 너를 시키는 대로 하면 너는 죽고 망한다. 그러니까, 박사 지식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시키는 대로 하고 박사 지식은 네 종으로 잡아 부려라.' 그러면. 세상 지식은 내가 거게 상전으로 모셔야 돼요, 종으로 가져야 돼요? 종으로 가져야 되고, 또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상전으로 모셔야 돼요. 내가 종으로 가져야 돼요? 상전으로 모셔야 됩니다. 고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거 외에는 다 우리를 망치는 것이라. 해로운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삼가 듣고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지켜 행하라. 삼가 듣고 오늘날 네게 명하는 명령을, 명이라 말은 두 번 했어.
명령은 안 지키면 벌이 있는 것입니다. 명하는 것을 지켜 행하라 고렇게 말했습니다. 그라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 가지만 힘을 쓰면. 두 가지 힘쓰는 것은 뭐인고 하니 밑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둥치에 있는 진액을 빨아올리는 역사라 말이오. 삼가 듣고 명하는 대로 할라고 애쓰는 그것은 뭐이냐 하면은 포도나무 가지가 저 아래에 있는, 둥치에 있는 그 진액을 빨아 당기는 빨아 당기는 역사라 그말이오. 빨아 당기는 역사. 빨아 당기는 역사가 언제든지 산 나무에는 그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 나무를 그렇게 해요.
어떤 군대 갔다 온 사람이 말하기를 버드나무가 열 십(十)자로 돼 가지고 있는 게 있다. 가지가 두 군데 붙고 이래 하는 거 있으면 거게를 딱 끊어 가지고 우물을 여게 팔까 저게 팔까 어데 팔꼬 그 우물 되는 것을 지금 점을 치는데, 우물 파는 것을 점을 치는데 어데 팔지 모르나 요래 딱 그래 놓으면은 방아처럼, 방아 모두 모르제? 디딜방아, 찧는 방아. 방아 양쪽에 쇠 요래 가지고 요래 그래 놓으면 콩닥 콩닥 찧는 거 있지 안해요? 요래 가지고 딱, 열 십자로 돼 가지고 있으니까. 요래 가지고 다닙니다. 요래 가지고 요리 조리 살살 요래 다니면 어디든지 가면은 요 버드나무가 가만히 있지 안하고 방아를 찧어요. 자꾸 방아를 요래 요래 찧어, 자꾸. 방아를 찧어서 뿌리를 이랬다가 또 이랬다가 자꾸 이래 뿌리가 내려갔다가 또 위가 내려갔다가 이래 방아를 찧어. 고라면, 또 저 갔다 보면은, 또 몇 번 오면 저게서 이리 와도 거게 오면 방아 찧고 저기서 와도 방아 찧고 저기서 와도 방아 찧고 그러면 '이 밑에는 수분이 있다 물이 들었다 여기 우물 파라' 그래 가지고 판다고서. 그거 맞습니다. 그거 맞아요.
그게 뭐이냐? 우리는 몰라도 식물은, 식물은 자기가 밑에 있는 수분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수분이 제 생명이기 때문에. 지금 끊어 놨으니까 끊어 놨으니까 이놈이 죽을 지경이니까 지금 수분을 막 빨아 당길라고 애를 쓰고 수분을 찾아서 애를 쓰는데 수분 있는 데 가면은 뿌리가, 뿌리가 그게 그게 말이지요, 당기는 힘이 얼마나 있던지 뿌리가 밑에 수분을 당기는 힘으로써 뿌리가 아래로 내려가니까 위에 끝이 높으니까 아래로 갔다가는 또 저리 가야 뒬 것 아닙니까?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방아를 찧는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나무를 뭘 이래 심어 보면 마치 호롱에다가 기름불을 켜 놓고 불이 까물까물 할 때에 기름을 치면은 그만 불이 확 살아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무를 끊어 놔서 말라질 때에 끄때 물을 주면은 대번에 쭉 빨아 당겨 가지고서 그만 쏵 그만 기어올라 버립니다. 이러니까 고걸 딱 보고서 나무를 많이 꽂아 놓고서 물을 얼마 딱 한정해서 딱 부어 버리면 조금 있으면 물이 쪽 빨려 올라가 버리고 하나도 없다 말이오. 쪽 빨아올리면 쪽 올라가 버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식물이 둥치에 있는 진액을 빨아 당길라고 애를 쓰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에게 있는 무한한 지극히 큰 능력을 우리가 빨아 당길라고, 하나님이 해 주시는 그 축복을 빨아 당길라고 하는 그 노력이 뭐이냐 하면은 삼가 듣고 오늘날 네게 명하는 명령을 지켜 행하는 그것이 그 진액 빨아 당기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빨아 당기면. 그렇게 하면은 주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오는데 그 능력을 가리켜서 복이라 이랬다 말이오. 그 능력이 와 가지고 모든 걸 해 주면 다 돼요. 이러니까 성경을 알고 보면은 전체가 하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대로 행해야 됩니다. 안 행하면 안 돼요. 그 명령을 행하는 것은. 그 명령은 두 가지라고 했지요? 그 명령은 두 가지. 명령에는 몇 가지라고 했습니까? 저 뒤에도 한번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녜. 두 가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해라 하나는 하지 말아라 하는 이 두 가지가 가치가 꼭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해야 힘이 나오고, 하라는 걸 해야 힘이 나오지. 하라는 것만 자꾸 한다고 애를 쓰고 해도 힘이 안 나옵니다. 그만 힘이 안 나오거든 고장이 났어. 그럴 때는 하지 말라는 거 뭐 있으니까 하지 말라는 거 고걸 안 해야 돼요. 이러니까, 죽는 날까지 우리가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요 둘이 자꾸 같이 다 나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가 하라는 것을 아무러 뭐 충성하고 생명을 바쳐 한다 해도 하지 말라는 고걸 안 해야 돼지지 고거는 안 하고 이걸 하면은 어쩌 됩니까? 어제 구원을 이루는 데에. 구원을 이루는데 그 사람의 단점 따라 구원 이루어진다 했습니까 장점 따라 구원 이루어진다 했습니까? 단점 따라 구원 이루어져, 단점 따라서. 이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알도록 가르쳐 주시는 거니까, 단점 따라 구원 이루니, 하지 말라는 거 하나 안 했으면 그거는 단점인데 고 단점을 해결짓지 안하면 아무리 충성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말이오. 하나님은, 당신이 외면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