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1:25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할 것
본문 :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 도달해서 하나님의 그 요소, 피조물의 요소가 아니라 신적 요소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요소 그것을 붙들어 자기 것을 삼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의 목표는 하나님이시요, 믿음의 소망도 하나님이시요, 믿음의 결과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목표하고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으로 자기에게 이루어져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는 유한한 사람인데 무한하신 하나님을 소망하기 때문에 그 소망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그러기에 목표 소망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끝이 없음을 말해서 모든 것은 다 끝이 있지마는 소망은 끝이 없다.
그러면 끝 없는 이 소망을 무엇으로 이루어 갈 건가? 믿음으로 이루어 갑니다.
믿음도 끝이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됩니다.
무한한 소망을 이 믿음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이 믿음으로 그 소망을 이루었을 때에 이루어 놓은 것은 무엇인가? 이루어 놓은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도성인신과 모든 거기에 따라 뒤따른, 대속은 사랑의 역사요 사랑이 조성해 놓은 것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생명, 화친의 능력입니다. 이 사랑을 이루게 됩니다.
사죄를 이루었다 말은 첫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것과 삐뚤어짐이 없이 삐뚤어진 것을 고치는 것이 사죄의 은혜입니다.
또 칭의의 은혜는 뭐인고 하니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서 움직인, 최종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무한하신 움직임을 하시는 거기에 따라 움직인다면 무한한 움직임을 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칭의입니다.
화친의 새생명은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 하나님의 그 모든 충만하시고 무한하신 그 능력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화친의 생명은 순전히 이제는 객관성화되는 것이요. 칭의는 객관에게 주관이 복종하여 주객이 일체로 움직여지는 것이요, 사죄는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의 잘못된 것을 고쳐 삐뚤어짐이 없게 하는 것이 이것이 사죄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소망 없는 믿음은 허공을 치는 것이고, 또 믿음의 결과가 사랑이 안 되면 그것도 다 잘못된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나님 형상화, 하나님에게 동화, 하나님에게 감염, 이것을 이루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시발이 뭘로 되는고 하니 선물입니다. 우리의 중보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신 이 노력,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의 그 공로로 인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허락되었고 이 믿음이 왔습니다.
이종교는 모두가 다 인간의 소망, 인간의 힘, 인간의 노력 그 한계 안에 들었으나 믿음은 이 중보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초월한 비 인간의. 비 인적 요소의 신적 요소로 되기 시작한 것이 허락된 것이 이 무한의 소망과 소속과 역사에 시발된 이것이 믿음의 종자입니다.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로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우리가 가지는 것이 내 지식으로 믿음을 찾아 만날 수 있고 내 능력으로 믿음을 찾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지식을 다 할 때에 지식을 쓰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가 연결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있는 힘을 쓰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가 만나는 것입니다.
지난밤에, 다이나마이트는 폭발력이 있지마는 그 도화선에 불이 붙어서 불이 접하지 않으면 폭발하지 못하는 것이요 또 도화선은 폭발하는 다이나마이트가 없으면 아무런 성과를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 무한하심이 택한 자들에게 주어져서 하나님의 목표를 달성하는,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이것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충만케 하시는 이 역사를 계대해서 할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지어 보시기로 정하신 것이 당신의 목적이요 곧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크심이 우리의 자체요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한다 그말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통치하는 것을 말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그 왕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 제사장에게 연결해 가지고 우리가 제사장 노릇 하고, 그 선지자에게 연결해서 선지자 노릇을 하는, 하나님의 목적인 그것이 감당할 그 의무와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이 필요하고 우리의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식은 마음의 소유인데 우리의 마음의 소유가 필요하고 우리의 몸의 소유가 필요합니다. 뭣 때문에 필요한가? 우리가 가진 지식은 뭣 때문에 필요한가? 그 지식 그것만으로써 무슨 가치가 있는가? 가치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어떤 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 연결시키는 이 힘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능력에 연결시키는 가치와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주겠다' '네가 연약한 힘을 가지고 내 말과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열린 문을 두노니 아무도 닫을 자가 없다' 하는 그말은 연약한 힘이라 말은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지식과 보잘 것 없는 우리의 힘을 가리켜서 말하는데 보잘 것 없는 마음 작용의 이 지식과 몸 작용의 이 힘이 이것이 어떤 피조물도 흔들 수 없는 지극히 견고한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들 수 있는 것을 가리켜서 '네가 지켰다' 그렇게 말했고 그러면 이걸 가지고 아주 극히 작은 지식으로 무한의 지식을, 극히 작은 능력으로 무한한 능력을 가져오는 데에는 그 도수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이루어진다'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것을 삼는 이 지식에 도달하는 그 방편이 무엇인가? 그 방편을 가리켜서 '값은 안 되지마는 사라' 값은 안 되지마는 사라 말했습니다. 사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을 주고 내게 없는 상대방에 있는 것을 내가 가져오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네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에게 다 바쳐라. 네 지식이 많든지 적든지 네 지식을 다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가 하나님의 지식에게 복종을 해라. 하나님의 지식에게 소속해라. 그것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바쳐라.
다른 말로는 네 지식 가지고 네가 하나님 대항하고, 네 지식 가지고 만사를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대항해 싸우는 그 행위를 버리고 이제는 네 지식 전부는 네 지식만으로써는 사망밖에는 이루지 못하니 지식이 많이 있든지 적게 있든지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찾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영접하는 지식으로, 하나님에게 완전히 바쳐 그의 것이 되어 그에게 쓰여지는 지식으로, 이렇게 네 지식이 주권성을 가지지 말고 네 지식이 바로 찾아 하나님의 지식의 것이 돼라.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도 그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해 보겠다 하는 그것이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지극히 작은 것도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제게 있는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요 망령된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있는 지식은 무엇을 하는가? 자기에게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가 하나님의 지식을 영접하려는 이 노력 외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다 죽는 일입니다. 자기의 가진 힘도 이 힘으로 무엇을 하리라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자요 피조물의 위치를 벗어난 자요 그것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존자, 주권자, 제가 창조주라는 그 망령된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힘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됐기 때문에 그 능력을 찾아가는 이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힘은 힘을 찾아가고 지식은 지식을 찾아가는 이것이 믿음 생활이요 중보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큰 권세로 열려진 것인데 이것을 그 일면으로 자기 지식 자기 힘 가지고 무엇을 해 보겠다는 그 면을 죽이기 위해서 그 면을 죽이는 말을 가리켜서 '부인해라' 그렇게 말했고, 또 이것을 들이되 네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영접하는 데에 다 들이고 네 힘은 하나님의 능력을 영접하는 데에 다 들이라 하는 그 방편을 가리켜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십자가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 그 모든 신적 요소가 우리의 인적 요소에 들어와 가지고 신적 요소가 직접 일하시지 아니하시고 신적 요소가 우리 인적 요소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이 역사를 하는 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을 신구약 성경 말씀에 기록된 소망도 있고 또 신구약 성경 안에는 무한하신 영감이 있어 영감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소망이 있으니 우리가 소망도 우리의 지식 범위 내에 주관화된 소망도 있지마는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소망이 무한히 있습니다. 또 우리가 안다는 것도 우리의 지식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존재들도 있지마는 우리의 지식의 범위를 무한히 초월한 무한한 존재들도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존재를 지식하는 것도 믿음으로 지식할 수 있고 또 무한한 소망을 실상화하는 것도 이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 접선되고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에 접선된 그것이 믿음이요, 접선이 되도록 하려고 하는 그것이 믿음의 시발이요 접선해 가지고 움직여지는 영원한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접선된 그 믿음은 뭐이냐? 내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긍정할 자격이 있습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긍정할 때에 자기의 지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하라는 말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실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내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긍정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모시는, 내 힘이 내 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로 모시는 이 역사를 지식과 힘이 할 때에 이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우리가 실상으로 내것을 삼을 수 있는 것이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우리가 지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결과는 이런 결과라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것이 믿음이라, 모든 소망을 실상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환하게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 아브라함이 인간으로서는 죽음만 알았지 죽음에서 부활한다는 부활을 인간은 몰랐는데 아브라함이 이 믿음을 가지고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인데 이 믿음의 요소는 지식과 힘 이것이 그 내부에 요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이 우리에게 연결돼 있습니다. '계시의 정신을 주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있는 연결성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또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능력에 연결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그 지식과 능력에 연결된 그 연결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니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라' 이렇게 말씀했어,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라.
그런고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복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을 내 지식과 내 능력을 가지고 접선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이 점점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충만케 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는 지식이 많고 적은 것이 필요하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많든지 적든지 자기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향하여 찾아가서 하나님의 지식을 영접하는 그 역사를 하면 시간 문제지, 그러기 때문에 인간 지식이 적은 사람과 인간 지식 많은 사람이 같이 나서서 그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을 찾는다면 그는 시작한 시간은 같았으나 그 성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러니까 다 같은 시간에 시발해도 인간 지식 인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인간 지식 인간 능력이 극히 작은 사람과 동시에 출발했다고 하면 적고 작은 사람은 따라가지를 못하게 크게 이룹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적든지 많든지 있는 그것을 다해서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 그 지식에게 바쳐 그 지식과 화합이 되고 그 능력과 화합이 되어 이것이 당신의 것이 될 때에 그분의 것이 될 때에 그분의 모든 것이 내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면 적고 많은 데에 다소의 차이는 있지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적든지 많든지 그것으로써 충족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신 것을 비유해서 두 냥쭝 닷 냥쭝 맡은 그 비유에 두 냥쭝 맡았지마는 완성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지식이 인간 능력이 많고 적은 것이 다 바로 써서 바칠 때에는 차이가 있지마는, 차이가 있어 많은 것이 적은 것보다 보배롭고 큰 것이 작은 것보다 보배롭지마는 이것이 같이 역사할 때는 가치가 그러하지마는 정반대로 인간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가는 이 일 외에 엉뚱한 일을 하고, 인간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가서 그분에게 바쳐, 이것을 댓가로 낸다 말은 이것을 그 분에게 바침으로 그분의 것이 내것이 되어지는, 이렇게 이 결합이라면 결합이고, 교환이라면 교환이고,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면 찾아가는 것이고, 성경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 다 한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면 가치가 있는 것이지마는 이것이 들어서 이것 가지고 되리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그 지식의 종이요 지식을 측량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 분수에 넘은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 분수에 넘은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지식을 제가 바로 측량하지 못했고, 바로 평가하지 못했고, 바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지식이 큰 줄 알고 그 지식 가지고 무엇을 할 줄로 아나, 그 지식을 자기가 완전히 파악을 했을 때에 그 지식에 종이 되지 않고 그 지식을 완전히 자기가 참 지식해서 그 지식에 대한 실존을 실존대로의 자기가 확실히 알아서 그것을 다 통과하고 그것을 능가하고 소유로 가졌다고 할 때에는 어떻게 많은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 지식에 대해서 자기가 확실히 소유하고 그 지식에 지금 종이 돼서 지식이 움직일 때에 얼떨떨해서 뭐인지 모르고 그 지식에게 붙들려서 지식의 종이 되어서 날뛸 때가 아니고 그 지식을 똑똑히 파악해 가지고 해부해서 그 지식을 올바로 확실히 바로 알았다고 하면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가는 데에 쓸 것 외에는 다른 데는 용도가 없다는 것을.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가는 용도 외에는 용도가 없고 그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가는 그 외에 것은 전체가 사망이라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지식을 많은 능력을 사람들이 파악하기에는 연약하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 지식과 능력에 대해서 파악을 바로 하지 못하는고로 일생 동안 속아서 이것이 어떤 그 실력이 있으리라 어떤 결과를 조성할 수 있는 것이 의문이 되고 아직까지 거기에 대해서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지식 대신으로 하나님의 능력 대신으로 바라보고 의지하다가 망하는 것이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 이용하면 도로 역효과가 난다 하는 그것을 표현해서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이 옳소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인간은 다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산다 말은 객관으로 산다 하는 말라 같은 말입니다. 날 때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는데 인간이 나 가지고 받은 지식이 전부 남의 지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것도 다 그것이 객관에 피동, 인류에게 피동, 역사에 피동, '문화에 피동이라' 문화에 피동이라 하는 그것이 곧 죽을 믿음, 썩은 믿음, 해독이 있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크게 분류하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여지는 만들어진 믿음이 있고 인간의 지식과 피조물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믿음이 있으니 믿음이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두 종류 외에는 없다.
그러면 그 믿음의 내부의 요소는 몇 가지 요소냐?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는 지식, 하나는 능력, 지식과 능력으로 되어있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수많은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 믿음이 인간의 지식과 피조물의 힘으로 움직이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요 인간을 살해시키는 해독이 강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지식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지식은 그 사람의 희로애락이 다 지식에서 나왔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비판과 평가가 다 지식의 소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요소가 지식이라 말은 인간이 한자리에서 이 사람은 기뻐하고 저 사람은 슬퍼하는데, 창기에게 홀켜 있는 그 청년을 보고 청년은 기뻐하는데 그 청년의 부모는 탄식하는 것이 왜 같은 사건에 하나는 탄식하고 하나는 기뻐하는가? 그건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지식이 다른 데에서 소욕이 다르고, 평가가 다르고, 취미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게 어데서 나왔느냐? 다 지식에서 나왔다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은 지극히 보배로운 것이 믿음인데 믿음은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한 가지는 지극히 보배이지마는 정 반대로 한 가지 믿음은 지극한 해독이 가득 찬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뭘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차이가 있고 정반대이냐? 그것은 믿음은 지식과 능력으로, 지식과 힘으로 된 것이다. 지식과 힘으로 된 것인데 하나는 인간 지식과 인간의 피조물의 힘으로 된 것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그것이 요소가 달라 그 믿음은 다른 것이다.
그러면 믿음을 심사할 때 어떻게 심사할 것인가? 믿음을 심사할 때에는 여러가지 심사 방편이 있어서 심사 방편을 많이 쓸수록 정확해지고 심사 방편을 적게 쓸수록 그 정확성이 적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을 심사할 때에 심사하는 방편이 그것이 그 내부 요소를 가지고 심사하면 대개는 정확한 그 심사가 된다. 그것 가지고 안 되면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향방을 조사해 보면 어데로 향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소망을 조사해 보면 그 소망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알 수가 있다.
진찰을 할 때에 한 기계만 가지고 진찰할 게 아니라 이 면으로 진찰하고 저 기계로 저 면으로 진찰하고 이런 경험으로 진찰하고 이런 통계로 진찰하고 모든 것을 진찰해서 여러 방핀으로 진찰할 때 더욱 더 정확성이 나오는 것처럼 믿음의 심사의 정확성을 가지려면 거기에 심사 방편에 있어서 여러가지가 있으니 그 여러가지 심사 방편을 다 사용해 가지고 믿음을 심사해서, 지극히 보배로운 믿음이라면 이는 가치가 무한하고 잘못된 믿음이라면 해독이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큰 줄로 알지마는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들이 다 나왔다' 하는 말이 다 이런 각도를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면으로 심사하다가 그래도 모르겠거든 그러면 그 이루어진 조성품이 뭐이냐? 조성품을, 네가 조성품을 가지고 조사해 보면, 이 조성품이 뭐인가 그걸 조사해 보면 조성품이 나타날 터이니까 그 조성품이 사랑이라면 그것이 바로 된 것이다.
다른 건 다른 면으로 보니까 다 잘됐는데 그 조성품이 사랑으로 그 결과가 되어 있지를 않고, 사랑으로 되어 있다 말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으로 되어 있다 말이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 말이요.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져 간다 말이요, 하나님의 기업이 되어져 간다 말이요 영광의 찬미가 되어져 간다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믿음은 보배다. 모든 사람은 다 믿음으로 산다. 믿음은 보배이지마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한 믿음은 지극히 보배이지마는 한 믿음은 지극한 해독이 가득 찬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의, 믿음이 이렇게 가치가 다르니 하나는 죽는 것이요 하나는 사는 것이니까 이 믿음을 무조건으로 믿음이라면 가질 것이 아니라. 마귀란 놈은 자꾸 이 보배로운 믿음이 아닌 이 믿음을 인간들에게 줘 가지고 '믿음은 믿음이라. 믿음은 믿음이라. 이 믿음이나 저 믿음이나 믿음은 믿음이라.' 해서 믿음을 혼돈시키고 혼합시키려고 하는 것이 말세에 악령의 고등 술책입니다.
이러나 이런 이 고등 술책이라 하는 것을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분별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믿음과 믿음을 구별하는 것이 이것이 중요하다. 왜? 죽는 것이 아니면 사는 것이요 사는 것이 아니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죽고 산다 말은 일시 죽고 사귈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에 좌우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심사하라. 믿음을 심사하는 데는 그 요소를 심사해라. 그 믿음의 목표를 심사해라. 그 믿음의 소망을 심사해라. 그 믿음의 결과를 심사해라.
그러기에 이 믿음은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느냐? 가질 수 없는 것인데, 이러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공짜배기로 준 것이라.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서 믿음이 우리에게 온 것이라.
그러면 이 믿음을 심사해라. 네가 믿음을 가졌으면 믿음을 심사해라. 네가 이 믿음을 네가 가지려거든, 믿음을 네가 가지려거든 믿음은 네가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는 것이 믿음의 반쪽을 가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지는 것이 믿음의 반쪽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고 이 댓가를 내고 가지겠느냐? 네 지식 전부가 하나님의 지식을 찾는 이 노력 외에는 필요가 없다.
만일 네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부정하고 지식 제 독단으로 무엇을 한다는 그것은 그 지식이 믿음의 요소가 된 요소가 된 그 믿음은 다 사망의 해독이 들어 있는 것이라.
네 지식으로 지식을 찾고 네게 있는 피조물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가는 일을 하라. '내가 이렇게 순종하는 것이 순종 이것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그 능력이 와 가지고 일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내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가는 이 노력 외에는 하는 것이 없다.' 요렇게, 지식과 자기가 체내에 있는 힘이든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힘이든지 '모든 힘은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가는 데에 역사할 이 외에는 할 일이 없다. 이것 외에는 다 나를 죽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다. 이 지식도 그러하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확고히 잡고,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되다' 무슨 충성? 지식이 지식을 향하여 찾아가는 충성, 능력이 능력을 향하여 찾아가는 충성, 찾아가서 만나면 왕으로 모시고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종이 되어 들어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들을 열고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라' '네가 값 없어도 사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믿음 사랑 소망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은 이제 목적 달성의 조성품은 사랑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믿음을 당장에 큰 것을 할 수는 없고 지극히 작은 것에서 지극히 큰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에 힘 써라. 그말은 현실 현실은 일생을 두면 몇만분지 일이 될런지 몇천 만분의 일이 될런지 토막이라 하는 것도 극히 작은 것이요 또 개체의 모든 면의 능력이나 가치나 중량이나 모든 것도 지극히 작은 것이지마는 여기에서, 요것이 현실에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네가 네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부인하는 역할을 하지 말고 네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영접하는 요 역할을 해라.
그래야 네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찾아, 네 현실은, 네 현실은, 네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찾는 그 노력만 하고, 노력을 하여 현실은 하나님의 지식을 모셔서 하나님의 지식이 네 현실을 주권하는 요 일을 해라. 네 힘은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 하나님의 능력이 네 현실을 주장해서 역사하도록 요 일을 해라.
그것이 뭐이냐? 그것을 충성이라 말했습니다.
충성은 대상이 없는 충성은 아닙니다. 충성은 반드시 댓가라는 전제가 있고 원인이 어떤 관계가 맺어진 그 전제된 관계가 있는 그 관계에 연결돼서 그 관계에 배신하지 않고 그 관계에 배치되지 아니한, 그 관계에 합당한 정당성 있는 움직임을 가리켜서 충성이라 그렇게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충성하라. 그러면 지극히 큰 것도 이루어 갈 수가 있다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믿음의 보배성을 깨닫고 '믿음으로 행치 않은 것은 죄라' 믿음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요 순종인데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본체는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지마는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하나님의 살아 있음으로 중생됐습니다. 살아 있음이 우리의 힘이라 그말입니다. 살아 있음에 연결이라 그말이오. 항상 있는 말씀이라 말은 말씀은 하나님이 움직일 때 하나님께 나온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한 그 역사가 말씀으로 나와 가지고 그것이 진리로 모든 피조물로 이렇게 퍼져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이시는 그 움직임에 연결된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연결된 그것이 우리의 중생입니다.
이 중생 하나만 해도 오늘 말세에 이것을 중생의 정의를 바로 냈었으면 천하에 오늘에 있는 모든 조직신학도 모든 학위들도 필요하지마는 그 위에 썩 위에 능가 해 가지고 이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가져야 됩니다. 아는 것도 믿음으로 알아야 됩니다.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내놓고, 믿음으로 배우고, 모든 것을 믿음으로 움직여야 됩니다.
믿음으로 움직인다 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님의 지식으로 움직이라.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라. 네 지식으로 지식하지 말아라. 네 지식이 주장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지식이 지극히 작은 것도 하나님의 지식이 주장하고 네 지식이 주장하지 말아라.
지극히 작은 것도 네 힘으로 '요까짓 거야 하면 된다' 하지 마라. 지극히 작은 것도 네 힘으로 시작하는 것이지 그것을 이루는 능력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이루어진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생명에 속한 것은 지극히 작은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망에 속한 것은 크나 작으나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지 않으신 것은 하늘나라 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지 않으신 것은 하늘나라에 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하지 아니한 것은 하늘나라에 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판을 통과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이라는 것은 다 이 믿음으로 된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지극히 작은 데, 작은 것. 그러기에 비판도 모세가 믿음으로, 믿음으로 권세관을 가졌습니다. 믿음으로 권세관 가졌고 믿음으로 바로의 딸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지극히 큰 권세요. 한국 나라의 대통령 되는 이런 정도의 권세가 아니오. 지금 미국 나라의 대통령 되는 이런 정도의 권세가 아닙니다. 지금은 소련과 미국이 반반이지만 그때는 애굽이 제일 강한 때요. 그런 권세, 이 권세를 그는 믿음으로, 이 권세를 믿음으로 그 권세를 던져버렸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던져버렸다 말은 모세가 이 권세를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왔기 때문에 던질 수 있었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 힘이 있는데 피조물 힘 있는데 피조물의 힘을 주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꿨기 때문에 던질 수 있었다 그말이오.
믿음으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는 요것을 우리가 모든 권세관에서 요대로 믿음으로 가져야 되는데 이 권세관을, 믿는다 해도 몇잎푼치 안 됩니다.
그까짓 거 인간이 볼 때에 도덕 행위를 어떻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감화를 하고 봉사를 하고 아무리 해 봤자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 속에 무서운 쓴뿌리가 들었을 수도, 무서운 하나님의 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보배는 뭐이냐? 믿음으로 된 것뿐이오.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권세를 판단했습니다. 권세를 봤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으로 모세는 권세를 봤기 때문에 그 권세를 정가했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행복이라는 쾌락을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세상의 모든 쾌락을 봤기 때문에 그는 정가를 했습니다.
오늘은 인간들이 모든 쾌락이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의 지식 가지고 그것을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이 평가는 다 거꾸로 돼 가지고 있소. 정말로 피조물의 능력을 능력으로 아느냐 하나님의 능력을 능력으로 아느냐? 뭘 보고 있느냐? 피조물의 능력은 어떤 능력이 있어도 이것은 보배롭습니다. 보배나 무슨 보배냐?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가는 면에서 보배이지 하나님 능력 없이 독단으로 한다는 그것이 뭐이냐? 자기에게 있는 살해의 독을 가진 그 능력인 것입니다.
그는 애굽의 많은 재물을 고난과 바꾼 것이 왜 그러냐? 믿음으로 그랬어.
믿음으로 그랬다 말은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그렇게 됐다 말이오.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 인간의 지식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비판하고 평가했고, 피조물의 능력을 제 능력 삼지 아니하고 창조주의 능력을 제 능력으로 삼고 보니까 바꿔버렸다 그말이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능력이 나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리석지 맙시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자기 현실 현실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그 능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지혜요 이 외에는 사는 길이 없습니다. 모두 다 가치 없소. 어떤 피조물의 배경의 힘을 가지고 움직여도 그는 불쌍하고 가련한 자요 크게 속는 자요.
힘이 있느냐? 그 힘은 다 전용할 데가 있다. 그 힘을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 만나는 거기에 쓰는 것 외에는 쓸 데가 없다. 다만 그거는 전용물이요 여기에 전용되지 않는 것은 다 헛일이다. 우리 성도들이 가진 지식과 능력은 하나님이 지식을 찾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찾아 만나는 여기에만 전용물이지 딴데는 쓰면 안 된다. 이 외에는 쓸모가 없고 이 외에 쓰는 것은 사망을 이루는 것 외에는 하나도 없다! 여러분들.
참 어리석소.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 이 지식을 가지고 네가 모든 존재를 비판하고 평가하면 정견 정찰이 될 것이다. 정평 정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을 떠나서 다른 지식 가지고 뭘 알겠다고! 인간의 말을 들을 것이 어데 있소? 어리석소. 그러기에 지식을 바꾸고 능력을 바꾸지 않으면 생명 역사는 없습니다.
새벽예배 마치고 봉사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전 오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꾸 비가 지금 내릴 것 같은데 우리가 일을 못 해도 비는 내리기를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공사 보니까 비 안 왔으면 좋겠다' 하면 그것은 삼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이렇게 비를 내리지 아니할 그 기회에 비 달라고 우리는 필요하니까 집짓는 것보다 비가 더 필요합니다.
이러니까 비를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우리가 해야 되겠고 비를 내리지 않는 그 동안에 빨리 이 지하실을 해야 되겠어.
이러니까 봉사원이 필요합니다. 목수들도 잘 하는 목수들 얼마든지 필요합니다.
해서 오늘 당장이라도 전부 이것 가라이다까지 전부 다 해야 되겠고 또 그 사이에 잔토 넣는 것도 잔토를 실어다가 여러 차로 실어다가 자꾸 넣어서 그 위에 비니루든지 뭐이든지 깔고 공굴한 데 공굴하고 흙하고 배합이 안 되도록 그렇게 잘 구별시켜 놓고 그 안에 잔토를 막 넣어야 돼. 넣어서 채우면 밑에 스끼다를 안 깔고 밑에 스라브를 할 수가 있고 그리 안하면 밑에 전부 판자로 대야 됩니다. 이래 깔고 이래 놓으면 뒤에 가서 이래 뜨기는 뜹니다. 떠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오늘은 봉사원이 많이 듭니다. 목수들도 많이 필요하고, 뭐 철근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됐는지 그것 제가 모르지마는, 그렇게 해서 그만 위에 이 일층 스라브 스끼다까지 깔면 그다음에는 믹사기를 갖다가 자꾸 이렇게 넣고 믹사기 가지고 모자라면 레미콘도 하고 이래 가지고 할 수 있으면 밤일이라도 해 가지고 바짝 해서 마쳐 버려야 됩니다. 이러니까 봉사원이 필요합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공사장에 있는 분들 빨리 아침에 베쪼가리 가지고 푸른 베쪼가리로 요만하게 해서 길이 요만씩하게 한 삼 센치, 광은 한 일 센치쯤 해 가지고 그것을 많이 만드십시오. 수십 개를 만들어 가지고 봉사원들은 전부 봉사원이냐 물어 가지고 요 전부 표를 딱딱 꽂아 주십시오. 봉사원은 많이 해도 되고 적게 해도 되고 자유로 하지마는 삯을 받고 일하는 이는 그 삯의 댓가를 될 만치 일을 해야 되는 것이라. 봉사원들이 슬슬 노니까 품으로 일하는 사람도 슬슬 놀고 그래 되면 안 되니까 그것을 구별하도록 해서 어쩌든지 봉사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오늘이 토요일인데 와 가지고 전부 다 그걸 해 놓으면 그만 월요일날 새벽부터 시작해서 공굴 넣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