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7:56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주의 할 것
1980. 6. 18. (수)새벽
본문 : 갈라디아서 6장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러 시간을 이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게 하라” 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 좋은 것은 어느 하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어떤 피조물에게도, 뭐 천군 천사에게도, 마귀에게도, 불택자에게도, 택자에게도 다 좋은 말씀이요. 이는 거게 나쁜 것은 뽑고 좋은 것은 기루고 갖추고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복되게 하는 말씀인데 이것이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존재한 그 종류의 억억만분지 일도 모르는 것이 인간들인데 제가 암만 식물학 박사라 해도 식물학 박사가 식물학에 대해 식물에 대해서 백분지 일이나 아니요 억만분지 일도 모른다고 하는 말이 바른 말입니다. 제가 식물학 박사로 무슨 이거 한 어떤 그 한 종류의 식물을 연구해서 거기 대한 박사라 해도 제가 그 식물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억억만 배도 더 큽니다. 왜? 세대가 지나가니까 자꾸 새 것이 나옵니다.
옛날에는 이런 거 하는 줄 알았지마는 지금은 이 한 잎사귀 속에 그 수백의 수천의 세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저거들이 지금 그것만 발견했지마는 이 속에 굉장한 조식과 그 문채가 들어 있는 것을 모릅니다. 또 더 놀랠 것은 이 속에 완전자의 그 형상이 여게 들어있습니다. 그걸 모릅니다. 인간들이 하나도 모르요.
이런데 거게 대해서 복되도록 해 되는 걸 제거하고 유익만 되게 하는 이런 말씀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이 말씀이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와 그 영광은 다 없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신 말씀이 곧 너희들에게 전한 이 복음이니라” ‘이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그 말은 그 영광이 있다 권위가 있다 말 아닙니까. 우리 영광 권위 말했으니까 그 영광과 권위 있으면 모든 것이 틀렸다 하면 틀렸다 그말이오.
모든 것이 아 그는 찬성한다 환영한다 좋다 이것이라야 되니까 이 말씀이 무한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무한한 말씀이기 때문에 무한 자라야 이것을 알 수가 있지. 무한 자라야 이걸 증거할 수가 있지. 유한 자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통해서 증거한다 할지라도 그 증거하는 것이 성령이 그 사람을 무한하신 성령이 그 사람을 붙들고 증거해야 그 바로 증거가 되고, 또 이 말씀을 받는 자가 듣는 자가 제가 아무리 명철한 총명이라 할지라도 그 어림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보는 대로는 다른 데도 물론 그럴 것이요. 이 서부교회서도 세상 지식이 높은 사람이 귀가 어둡습니다. 못 듣소. 유식한 사람이 못 알아 들어. 무식한 사람보다 성신의 감화 감동이라야 이 말씀을 듣는다고 말했습니다. 쉽게 예수님이 구주라 인간의 구주라 한 이 말도 성신의 감동이 아니면 들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신의 감화가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라고 시인할 자가 없다. 그 들을 자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 공로를 통해서 모든 존재들에게 다 복되고 유익된 이 참 우주와 영계를 말할 게 아니라 그것들을 다스리고 주장할 수 있는 그것들을 살리고 그것들에게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이 유한한 것들에게 무한한 말씀, 이 피조물들에게 창조의 능력을 가진 이 말씀이, 이 말씀을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사람이 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사람이 이 말씀을 바로 전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전할 건가? 하나님께서 모세의 위치에 세운 사람이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벌써 너를 너거 어머니의 복 중에서 뱃 속에서 짓기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너를 책임지시고 이랬다 이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속에 부정 모혈에 벌써 작용이 시작하기 전에 거게 창조하실라고 했고, 또 이래 가지고 창조한 것이 어머니의 복 중에 태 중에서 나오기 전에 나오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고, 또 나오고 난 다음에 제가 어떻게 방종 어떻게 돌아다녀도 하나님은 하나도 저희에게 필요 없은 거 듣지 못하게, 보지 못하게 해서 죄도 듣고, 의도 듣고 오만 것 들었지마는 봤지마는 실상은 보면 그것이 나중에 하나님의 이 심부름 선지 노릇을 할 때에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그런 필요한 지식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다 거요.
이러기 때문에 자기는 그럴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보면 아, 그 사람에게 만나 그 한 마디 들은 그것이 그저 예사롭게 지나간 거 아니고 그것이 뒤에 보니까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지식이었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세웠기 때문에 됩니다.
그런데 여게서 간단하게 전하는 간단하지마는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편에서 주의해서 가져야 될 것이 두 가지요. 또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가져야 될 것이 두 가지입니다. 오늘 아침 요 두 가지. 자기들 두 가지 요것만 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모세의 자리에 세웠다 하는 이것은 소위 요새 모두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말을 말하면 그것을 가리켜서 은서 교권이라 이러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기본 교권이라 이라는데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 가르치는 자는 누가 가르치는 자입니까?
여게서 오늘 아침에 가르치는 자는 백 목사입니다. 또 구역 식구들에게 가르치는 자는 구역장입니다. 또 자기 몇몇 식구에 가르치는 지권찰입니다. 또 주일학교 학생이 자기가 전도 할 때에는 그 주일학교 학생이 가르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누구며, 가르침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자 가르침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가르침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가르침을 받는 위치에 버뜩 들어요. 시간 없으니까. 네 나도 가르침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네 우리가 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소. 이 양면 위치를 우리가 가진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이런데 가르치는 그 위치에서 주의할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뭐이냐? 하나님을 생각하느냐, 사람을 생각하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생각하느냐, 자기를 생각 하느냐? 고거 하나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 하느냐, 자기를 생각하느냐? 또 하나는 이 말씀을 함으로 하나님으로 역사하게 하느냐, 사람으로 역사하게 하느냐? 요거 요거만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요것만 가지면 됩니다. 요거 아주 쉬운 말 같지만 어려운 말이요. 요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합니다. 그 통에 탈이요.
자기가 가르칠 때에 자 하나님이 가르치는 걸 가르쳐야 되지 하나님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가르치는 걸 가르쳐야 되지 자기가 가르치는 것 가르칠려고 하는 것, 자기 이렇게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이들에게 나타내서 소개해야 되지. 또 사람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나타내는 소개를 해야 되지. 이 가르침으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까와져야지. 이 가르침으로 나와 이 사람들과 가까와져야지. 이렇게 가르침으로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유명해져야지. 내가 유명해져야지. 이것입니다.
여게서 모세의 자리에 세웠기 때문에 이 좋은 말씀, 이 참 무한하신 보배로운 지극히 우주보다 큰 이 말씀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할 수가 있고 자기를 생각할 때에 그때에는 같은 말이지마는 좋은 말이 아니라 사람을 미혹시켜서 멸망시키는 그 말이 나오게 됩니다. 요것을 여기 양성원 학생들이 있는데 그것을 구별해요.
내가 볼 때에 그 사람이 목회를 잘할 때는 좀 목회에 흥왕이 있을 때 는 하나님 생각하고 저 생각지 않는데, 그만 목회가 침체되서 부흥되지 않고 고대로 있고 제 딴에는 잘난체 하는데 교인들은 전부 불만 불평을 품고 그럴 때에는 두 말 할 것 없이 그만 고것 뿐이요. 네가 설교할 때에 목회할 때에 하나님 생각 않고 너 생각한다. 그 진찰은 그만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맞습니다. 교역자들이 그래 망합니다.
하나님 생각 않고 저 생각하는 거, 또 둘째는 뭐인고 하니, 이래 전하면 그 다음 뭐이라 했소? 뭐이라 했지. 역사라. 작용이라. 하나님 작용 생각하고 하든지, 또 인간 작용을 생각하든지 요 둘입니다. 인간 작용을 생각하다니. 자 이러면 이 사람이 감화를 받겠나, 안 받겠나? 대단히 좋은 거 같습니다. 감화를 받겠나, 안 받겠나? 이 사람이 마음에 어떻게 생각하겠노? 기분이 좋겠나, 안 좋겠나? 이 사람이 듣고 결심을 하겠나, 안 하겠나?
그 사람이 결심 하는 거, 그 사람이 감동 받는 거, 그 사람이 오해하는 거, 그 사람이 곡해 하는 거, 그 사람이 기뻐하는 거, 그 사람이 나와 가까와지는 거, 그 사람이 나를 따를 거 자 이것이 하나님의 작용이요 인간 작용이요? 뭐입니까? 네? 이게 하나님 작용이요, 인간 작용이요? 인간 작용이요 인간 작용.
설교를 하든지 전도할 때에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떻게 작용할까 그거 생각해 가지고 그 사람이 좋은 작용하도록 이렇게 생각하는 거, 그 사람이 자기에게 좋은 작용 하도록, 또 그 사람이 무슨 좋은 작용을 해서 좋은 감동을 받아 가지고 자기에게 예물이나 바치고 양복이나 해주고 돈 봉투나 갖다주고 뭐 선물이나 갖다주고 저 환영하고 저를 딸고 이래 하도록 고 전부 인간 작용입니다. 인간 작용. 고기 인본이요.
거게서 하나님의 역사가 역사하도록 하는 데에는 이래 설교해서 그 사람이야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내가 증거하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속에서 역사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하나님이 그를 감동시키든지 그를 책망하든지 또 그를 결심케 하든지 어쨌든지 하나님이 가 가지고 그 사람을 붙들고 이 작용을 해야 썩지 안할 것 영원한 것이 작용이 돼지지.
그 사람 썩은 제까짖 게 암만 결심하고 암만하면 어쩔 것이요. 제가 혈서를 쓰고 결사에 무슨 생명을 건다 해도 아무 소용 없소. 인간이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한다 해도 죽고 망할 것 밖에는 못합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못 해. 하나님이 가서 일해야 되지.
그러면 증거를 할 때 가르칠 때에 자 이렇게 가르치면 하나님에게 어떻게 되겠느냐? 이 사람과 하나님이 어찌됐느냐? 하나님이 또 어떻게 하시고 어떻게 됐느냐? 이것 생각지 안하고 이래 가르치면 이 사람이 나하고 이 말하면 이 사람하고 나하고 어찌 될까? 내가 불리해질까, 유명해질까? 수치를 당할까, 배척을 당할까?
이러기 때문에 인본 말할 것 있으면 고런 말은 그 대중 있는데 말하지 말고 대중이 없는데 가만히 불러 가지고 말하면 좋겠는데, 그게 인심공격 아닌가. 그까짓 거 그거 저한테 그런 말을 언제 불러 가지고 언제 기억해 가지고 그거 할 여가 어데 있소. 그 시간 그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그것도 지금 바쁜데 그말 대중이니 뭐 제게 유익되는 한 마디 해줬으면 됐지 언제 시간 가리고 장소 가리고 그렇게 제까짓 게 뭐인데 그렇게 대우해서 해준다 말이오.
이러니까 착착해 버리면 인심공격이라. 그 신본자와 인본자는 다릅니다. 가르치는 자가 자기는 그만 생각지 못하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자기는 생각하려면 내가 여게서 거리낌이 될까 거리낌이 될라 고것 생각할 수 있는데 고것도 위험합니다. 고것도 위험하요. 실은 그것도 아니요. 하나님만 생각해서 생각하고 자 이게 하나님이 첫째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냐? 하나님이 원하시느냐? 여게 하나님이 능히 같이 하느냐? 이 사람과 하나님이 어찌 되느냐?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대해서 이 말을 통해서 어떻게 지금 붙들고 착수를 하시겠느냐?
하나님이 생각하는 거 첫째는 자기 생각 말고 하나님 생각하는 거 인간 생각 말고 하나님 생각 하는 거 인간이라면 다 들었소. 인간 생각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가르칠 것, 둘째로는 이 말을 그 사람이 받아 들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작용을 하느냐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에게 가 가지고 무엇을 착수를 해 가지고 작용하느냐 이것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냐? 이 말씀을 설교를 하면서 인간 작용을 목표로 하느냐, 하나님 작용을 목표로 하느냐? 이 가르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가르치느냐, 자기를 생각하고 가르치느냐? 요것이 판정이 돼야 되는데 이러니까 목회가 가지고 한 서너 달 동안 한 뭐 한 삼 년 동안 한 일 년 동안 은혜가 있다는 그것도 해석해 보면 그거라. 그거 같으면 고만 석 달 목회 일 년 목회 뭐 이래 가지고 뭐 변동이 되져.
이 어북 잘한다 싶은데 교회가 그만 부흥이 안 되고 그만 침체가 되버려 붙들어 보면 내가 그거라. 설교하면 아주 저를 나타내서 척척 이래 이래 이래 뚱 뚜드리고 뭐 아주 척척 이래 높이고 낮추고 하는 이게 전부 저 생각 가지고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뭐이냐? 이 시간 이 설교 하면은 듣는 그 사람의 작용이 어찌되느냐? 인본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거 하나님 생각하고 거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그러기에 내가 말하는 것이 지혜 있는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 있기를 원한다. 또 듣는 자들이 두 가지 가질 것은 어떤 것을 가질 것이냐? 듣는 자들은 나도 듣는 사람이요. 여러분도 다 듣는 사람들입니다. 듣는 자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아 저거는 백목사 말이다. 아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들어 보니까 그 사람이 말해도 순전히 마귀 말하고 있다.
아 보니 성경 말씀에 진리에 딱 맞는 진리 말씀을 하니까 이거는 비록 말은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집사가 말하고 조사가 말하고 목사가 말하고 장로가 말하고 주일학교 반사가 말하지마는 속에서 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여게서 가르치는 자를 사람을 사람이 가르치는 것으로서 저가 사람 보는 자 주님을 보는 자
이러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고 가르치는 것은 다 지켜 행하라. 왜? 모세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들으면 들어서 마귀 말이든지 다시 말하면 인간 말, 인간 말이든지 성경 말씀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아무것이가 성경 말씀을 가르친다. 아무것이나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 아무것이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다. 하나님이 아무것이를 통해서 지금 나에게 가르치고 있다.
어느 것입니까? 아무것이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요것 좋은 것 같지마는 요것도 망하는 것입니다. 요것도 망하는 것이요. 아무것이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요거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것이를 붙들고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고 계신다. 하나는 인본이요 하나는 신본입니다.
그러면 아무것이가 하면 고것이 말하는 주체요.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 가르치고 있소. 그거는 사람이 주장입니다. 아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들고 가르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은 잘 말하면 하나님의 입이요. 또 그석하게 말하면 스피카라. 그 사람은 스피카요 말하는 이는 하나님이라. 받는 자는 이렇게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것 때문에 지금은 내가 그 말 안해도 이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네가 집사로 집회 다닐 때도 늘 말하기를 이 시간에는 하나님게서 무슨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으로 이 시간에 찾아 오셔서 가르치신다. 제가 꼭 고 말을 하면서 설교를 했지 그냥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와서도 몇 해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그것은 인식했다 해서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조롱을 했소.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으로 찾아오시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을 제가 집사로 있을 때에는 집회할 때에 꼭 말했고 조사되고 난 다음에도 말했고 여게 서부교회 와 가지고 그것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것을 그 고런 명사를 설교할 때마다 사회하면서 소개할 때마다 한 것이 십수 년 간을 강단에 설 때마다 한번도 안 빠지고 고대로 했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그 말씀을 배울 때에 이게 마귀말인가 그때 말이요 마귀 말이가 사람말이가 이래 구별을 해야 돼. 무조건 강단에 가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럴 때에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위반되지 안한 진리의 말씀이라면 그 다음에 나 할 일이 뭐입니까?
나를 대속하신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완전자이신 주님이 모든 것을 주권하신 주님이 이 시간에 오셔서 아무것이를 통하여 주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우주와 영계보다 크신 말씀이요. 이 말씀은 전지 전능의 말씀이다. 요것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대해서 생각하는 요것을 바로 생각해야 됩니다.
고 다음에 하나 생각할 게 뭐이냐? 아 내가 이 말씀을 받아 가지고 내가 이 말씀을 어쩌든지 내가 놓지 않고 잘 사용해야 되겠다. 이 말씀을 놓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고 이 말씀을 잘 사용해서해야 되겠다 잘 사용해야 되겠다. 자 요것은 이 말씀을 잘 써 먹어야 되겠다. 요것은 뭐이냐? 요것은 신본입니까, 인본입니까? 요거 신본이라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 보십시요. 인본이라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네 그만 들지마 인본입니다. 대개는 고게 떨어집니다. 대개는 고게 떨어지요.
자 이 말씀을 하셨으니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말씀에게 붙들릴까. 이 말씀은 나보담 큽니다. 이 말씀은 나보담 크요. 내가 이 말씀을 사용할 그런 자격 있는 인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나 요랑하면 억억만 배가 아니라 무한히 큰 그 권위의 말씀입니다. 아 내가 이 말씀을 모시고 떠나지 안해야 할 건데, 내가 이 말씀에게 내가 붙들려 이 말씀의 종이 되야 될 터인데, 내가 이 말씀에게 복종해야 될 터인데, 이 말씀을 떠나지 않고 이 말씀 슬하에 있으면, 이 말씀 나래 아래 있으면, 이 말씀 그늘 아래 있으면, 내가 이 말씀을 모시고 이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이 나를 지켜서 거룩한 자 가운데서 업을 얻겠다고서 말씀했는데,
이 말씀이 나를 붙들도록, 이 말씀이 나를 사용하도록, 이 말씀에게 내가 종이 되도록, 이 말씀에게 사로잡히도록, 내가 이 말씀을 모시고 떠나지 안하도록, 이 말씀을 자기가 모셔서 이 말씀이 자기에게 작용을 하도록, 이 말씀이 자기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과 제가 이 말씀을 사용하는 여게서 신본 인본이 갈라집니다.
이 말씀이 자기를 이제는 사용하도록 내가 이제는 이 말씀에게 쓰여져야 될 터인데 이 말씀이 나를 붙들라 해도 때구노를 치고 요리 불거지고 조리 불거지고 못됐는데 이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되겠고, 이 말씀에게 내가 종이 돼야 되겠고, 이 말씀에게 붙들려야 되겠고, 이 말씀에게 매야 될 터인데 이 사람이 되고, 이 생각을 가지고, 이 말씀을 모시면 이 말씀은 전능의 말씀이라.
내가 이 말씀을 지키는 것 아니요. 이 말씀이 나를 지키지. 내가 이 말씀을 지켜 큰 자가 작은 자에게 지킴을 받아. 그러나 아주 어린 사람에게는 이걸 말해야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네가 말씀을 써 먹어라. 말하나 그것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요. 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걸 알면 구원이 이루어질 때는 이 말씀에게 사로 잡혀서 이 말씀이 자기보담 큰 것을 인정하고 이 말씀에게 붙들리고 이 말씀을 하나님 다음으로 의지하고 이래야 구원이 이루어지지.
그 전에는 이제 그들에게 인식 해서 알도록만 하는 것이요. 성신을 받아라. 성신을 받기는 뭐 성신이 받아 성신은 완전자이신데. 완전자가 완전자가 제 속에 제 아람 속에 들어가면 제 아람은 깨져 버립니다. 조그만한 접시 속에 태산이 들어갑니까. 그 말은 성령을 받으라 말은 네가 성령에게 분들리라 말이오. 성령에게 붙들리라. 성령에게 사로 잡히라. 성령의 것이 되어져라 그 말인데, 이간이 그걸 모르기 때문에 아주 세상에서 나오게 하는 말에서 성령을 받으라 그렇게 말하는 거와 같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네가 각오하고 결심하고 써 먹으라 하는 그것이 어릴 때에 그렇게 말하나 실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는 인간보다 크고 하나님은 진리보다 큽니다. 얼마나 크냐? 무한힌 큽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지고 써 먹으라 하는 그것은 그대로 발동을 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작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은 그에게 일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됐으니까. 자기를 부이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자기가 서지 말고 자기를 비워서 진리에게 복종하라 그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복종하라 말이오.
받는 자가, 받는 자가 두 가지 생각할 것, 전하는 자가 두 가지 생각할 거, 오늘 아침에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전할 때에 두 가지 생각할 것, 하나님을 생각 하느냐, 자기 생각하느냐? 자기 생각하면 망합니다. 또 제가 가르치면서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그 인간이 어떻게 작용하도록 인간이 작용하는 인간 작용을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거기 어떤 작용을 하시도록 할 것이냐? 하나님의 역사 말이요.
인간이 제가 이 말을 들으면 그 사람들이 모두 ‘이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야 될건데’ 그러면 그거는 인간 작용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하나님 작용을 기다린 것입니다. 네? 인간 작용 고거 사이비해서 알기 어려워. 비슷해서. 인간 작용 그거 안 돼. 그 사람이야 감동을 받든지 말든지, 감동을 받든지 말든지, 반감을 품든지 말든지, 원수를 품든지 말든지, 어쨌든지 하나님만 바로 소개했으면 됐다.
이러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말하는 것이 냉정하고 또무자비하고 인심 그거를 생각지 안하요. 왜? 그때 빠져놓고 뒤에 말 못하면 자기가 지금 파수군의 정죄를 받기 때문에.
이러니까 듣든지 아니 듣든지, 반감을 품든지 말든지 다만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뭘 원하시고 어떻게 하실 건가? 하나님만 생각하고 전하는 거, 또 전해 가지고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하나님이 그에게 착수할 수 있도록 내가 바로 성령으로 진리로 전해 버려요. 그것이 전하는 사람의 소행입니다.
받는 자도 내나 그것이요. 사람을 생각하느냐, 하나님을 생각하느냐? 또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느냐, 그 인간 역사를 생각하느냐? 인간 역사 제가 하나님 말씀 듣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진리를 가지고 자기를 붙들어서 하나님께서 붙들리고 하나님 자기를 쓰이지도록,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유하고 자기는 자유를 하나님께 박탈이 되도록 요렇게 하는 역사, 요 네 가지를 기억합시다. 네 앞으로 계속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 권찰회 없습니다. 아 이거 내가 자꾸 이 시간을 지키지 못해서. 내가 이걸 고쳐야 되겠는데 오늘도 시간이 많이 지내갔는데 그래도 종을 쳐요. 안 치니까 종을 쳐서 이게 이게 어리석은 일이라. 손해입니다. 이러면 뒤에 오던 사람이 낭파가 되면 와지지 못해요.
하루 아침에 한 시간 가르치는 것보다도 이틀 아침에 반 시간씩 한 시간 가르치면 사흘 아치에 한 시간 반인데 그 다음에 안 오면 헛일이라. 자꾸 권면해서 이 지금 때가 가까왔습니다. 어쩌든지 배워서 알아야 되요. 참 “내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할 만큼 믿음을 볼 수 없는 이 믿음이 귀한 때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