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준비

 

1987. 7. 20. 새벽 <월>

 

본문:베드로후서 3장 11절∼13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홍수 심판도 악한 것들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심판이요 또 불심판도 악한 것들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물심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그 속에만 생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그 속에만 생명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한 데는 전부가 사망뿐이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만일 노아가 방주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 한 조각만 대지 안했어도 그배는 다 침몰되고 말지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심판도 꼭 그러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모든 재료들을 가지고 말씀대로 배를 모으라 했는데, 재료도 말씀대로의 재료, 또 조성도 말씀대로의 조성, 이래 가지고 노아의 구원 방주가 됐습니다.

이것은 곧 말세에 신약 교회의 이 구원을 하나의 예표로, 상징으로, 모형으로, 하나의 거울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방주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신약 시대에 불심판이 임하는 이것은 우주의 종말인데, 홍수는 하나의 예고요, 심판 예고요 불심판은 실상의 심판으로서 우주의 종말과 종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이 불심판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이 악한 자들을 소멸하는 악한 날에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이기고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아니하고 만일 전신갑주에 거기에 한 군데라도 구멍이 뚫혔으면 원수의 화살은 그리 들어와 가지고서 절단을 내는 것입니다.

전신갑주가 뭐인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룩한 행실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열한 가지 대속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우리기 때문에 열한 가지 대속을 입고 사는 것이 거룩한 행위요, 예수님의 열한 가지 대속에 배치되고 위반된 것들을 다 제거하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요, 열한 가지 이 대속으로 사는 것이 곧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잠수복이라고 해서 혹 말을, 단어를 모르는지 몰라서 말합니다.

물에 잠길 잠자, 물에 잠기는, 물 수자, 물에 잠기는 옷이라, 물 속에 들어갈 때에, 그거는 일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그 말을 쓰는지 몰라도 나는 내대로는 물 속에 들어갈 때에, 보자기가 물 속에 들어가는 거와 같이 물 속에 들어갈 때에 입고 들어가면 물이 들어오지 안해서 물의 해를 보지 않는다. 물 속에 아무리 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루고 열흘이고 다녀도 관계 없다.

그러면 숨은 어찌쉬느냐? 숨 쉬는 것은 호흡기를 위로 통해 놨기 때문에 공기를 위에 공기를 마셔서 쉬기 때문에 그 산소가 들어가니까 아무 일이 없습니다, 위에서 산소를 넣으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서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깨끗한 거룩함과 경건을 이렇게 가지고 살 때에 그때에 마치 호흡하는 산소 통하는 것이 이 공기 가운데에 장치돼 가지고 있어서 그리로써 산소를 통해서 상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는 주님과 우리와의 연결돼 가지고 있는 그것이 곧 우리의 생명 호흡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요 또 우리의 생명의 호흡이신 곧 기도요 모든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연습을 하자, 지난 주간에는 우리가 거리끼는 것을 회개하자는 그 회개의 주간으로서 회개를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아마 엔간히 다 모두 힘을 썼지마는 그래도 이 회개라 하는 거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뜰 때까지 자꾸 회개에서 회개로 계속해서 나아가지 안하면 안 됩니다.

또 그전 주간에는 세 가지를 우리가 연성하는 주간으로 삼았습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 또 우리에게 자기에게 대해서는 단점만 봐야 되는데 단점은 뭐이 단점인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지 못한 것, 낫게 여기는 행동을 하지 못한 그것이 단점입니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것, 낫게 여기는 그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이 단점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장점만 봐야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보는 장점은 어떤 게 장점인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행동과 모든 지식 가진 그것이 그에게 장점이라 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세 가지를 연습을 했습니다. 세 가지 강조 주간으로 지켰고, 지난 주일은 회개 주간으로 지켰는데, 이번 주간은 이 거룩과 경건을 연성하는, 연성이라 말은 연습해 가지고서 성공하는 것을 가리켜서 연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거룩과 경건을 이것을 연성하자.

거룩이라는 것은 주님 만나는 데에 거리끼는 그 모든 것을 다 정리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거룩이요 또 경건은 그 모든 깨끗한 것이나 모든 전부 자기의 전부가, 자기 언행심사나, 자기의 영이나, 마음이나, 몸이나 그 모든 것이 다 주님 위하는 것이 되어진 것이 그것이 경건하게 된 것입니다. 경건은 주님을 위한 깨끗이 경건입니다.

그러면 주님 위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피조물은 주님 위하는 그것이 피조물의 생명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사람으로 생각하면 만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면 자기에게 대해서는 허술할 것 아닙니까, 전부 남만 위한다면?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시기 때문에 그분은 아무리 위할라 해도 우리의 것이 털끝만한 것도 그분에게 가 가지고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털끝만한 것도 보태지도 못하고 덜지도 못하고 가감을 못 하는 불변하는 완전자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완전자를 위하는 것이 자기 위하는 것이 됩니다. 옳은 것을 위하는 것이 자기 위하는 게 된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옳은 것을 위하는 것이 자기 위하는 것이요 바로 되는 것을 위하는 것이 자기 위하는 것이라. 바로 되는 것을 위해서 어짜든지 바로 하면 저 유익이지 누가 유익이겠습니까? 참을 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요 거룩을 위하는 게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 생명을 위하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거룩은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다 정리해서 깨끗해지는 것이요, 주님 만날 수 있는 깨끗해지는 것이요 경건은 주님만을 위하는 그 모든 옳은 것, 제가 옳은 것을 준비해도 그 옳은 것 준비하는 것이 명예 위해서 준비하는 자도 있고, 공로 위해서 준비하는 자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인기 끌기 위해서 깨끗을 준비하는 자도 있고, 또 어떤 다른 것을 노려서, 소욕을 노려서 또 하는 거 있어.

뭐 우스운 말이지마는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아주 열심히 믿었는데 집사 선택할 때에 교역자가 알고 그 사람 집사를 안 내니까 그만 그다음부터는 새벽기도 나오지 안하더라고. 집사 예수 믿는 것, 우스운 소리지마는. 또 그 사람은 아주 열심히 믿었는데 그만 그 처녀가 다른 데 결혼하니까 그만 안 나오더라고. 장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 자기가 뭐 이렇게 저렇게 사람은 마귀가 들어가면 고약해지기 때문에 이중 삼중 십중의 둔갑을 얼마든지 합니다. 정상인 그 외에는 전부 둔갑한 것입니다. 다 비정상의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회개를 하고 깨끗하게 하되 그 소망과 목적이 다른 것 있다 그말이오. 이 경건은 그 소망과 목적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그것이 경건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거룩과 경건이 이루어졌나 안 이루어졌나 하는 그것을 무엇을 봐야 알 건가? 거룩과 경건이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그것을 표시하고 있는 그 표시는 어떤 것이 표시인가? 그 표시는 몇 가지가 표시판이라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 손가락 들었어? 뻐뜩 들어야지 숨어 가지고 살며시 들면 내가 아는가? 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두렵지 안하고 자꾸 기달펴지는 것, 기달펴지는 것. 또 하나는 마음과 간절과 생각이 항상 주님 구름타고 오시는 거게 가 있어.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는 것은 그 소망이 거게 있어. ‘주님의 날이, 어서 주님 오셨으면 좋겠다.’ 하는 그 기다리고 오시기를 고대하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이루어졌는지? 또 내 마음이 항상 재림하시는 그 주님의 재림에 내 사모도 간절도 거게 있는지? 그것이 표시판입니다.

또 오늘 아침에는 그러면 내가 주님의 재림하시는 것이 고대되어지고 주님의 재림하시는 것이 사모되어지고 간절해지는지 안 간절해지는지 그것은 뭘 보고 알 겁니까? 공연히 사람은 거짓되기 때문에 간절치도 안하면서 간절한 줄 알고, 또 주님의 재림만 사모하지 안하면서도 사모하는 줄로 이렇게 알고, 또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지 안하면서도 고대하는 줄로 이렇게 자꾸 자기가 자기에게 속기 쉽다 말이오.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서 스스로 위로받고 이렇게 속기 쉬워.

속기 쉬우니까, 그러면 거룩과 경건이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는 거룩과 경건인데 거룩과 경건이 바로 돼 가지고 있나 안 있나 하는 것이 그것이 표시판이 두 가지로 된다 하는 것을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표시판인 고대와 간절한 이 사모 이것이 바로 되어 있나 안 되어 있나 하는 것은 또 둘입니다. 뭐 둘인가? 그것은 노아의 식구들이 그들이 그 뭘 둘을 가졌던가? 그들은 방주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것이 잘돼야 되겠다 저것이 잘돼야 되겠다 욕망도 근심도, ‘이러니까 이것은 잘됐다’ 자기의 그 소망의 노력도 또 근심 걱정의 이 모든 고치는 것도 노아가 고치는 것과 또 만드는 것, 노아가 근심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 근심과 기쁨 또 만드는 그 조성과 모든 그 고치는 것, 그거 어데 있습니까? 노아가 고치는 것이 어데 있었으며 만드는 게 어데 있었습니까? 또 그가 근심하는 것이 어데 있었으며 기뻐하는 게 어데 있었습니까? 노아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 전부가 근심하는 것이 다 홍수에서 멸망받을 것 그것들입니다. 거게 대해서 모두 근심하는 것이 ‘이게 안 되면 안 될 터인데.

이게 돼야 될 터인데.’ 전부 썩을 것 홍수에서 멸망받을 것 그것이 잘못되면 근심 걱정하고 고칠라고 애쓰고 그것이 잘됐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아의 근심과 기쁨은 모든 그때에 있는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기쁨이 달랐고 근심이 달랐습니다. 기쁨이 달랐고 근심이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기쁜 것이 어데 있던가? 기쁜 것이 전부 홍수에 멸망할 것, 다 홍수에 완전히 매몰될 것, 홍수에 매몰될 것, 홍수에 다 파묻혀 멸망받을 것 거게 전부 기쁨이 있었어. ‘하, 이거 됐다, 기쁘다. 저거 됐다, 기쁘다.’ 우리가 그렇기 쉽습니다.

또 근심은 그 사람들이 어데 근심됐던가? 전부 오늘이라도 홍수 내리면 다 없어지기는 한가지인데 뭐 이게 잘못됐다고 전부 근심도 다 홍수에 멸망을 받을 거기에 근심도 거게 다 있고 또 기쁨도 거게 다 있고, 이러니까 ‘이게 잘못됐다 고쳐보자’ 고쳐보자 하는 노력도 거게 있고 또 이것을 만들어 보자 하는 노력도 거게 있고, 근심 걱정도 거게 있고 또 고치는 것과 조성하는 것도 다 세상에 있었어.

노아는 어데 있었겠습니까? 노아는 어데 있었겠소? 노아는 근심이 어데 있었겠습니까? 근심이 어데 있었겠소? 어데? 말씀? 어데 있었겠지? 녜, 말씀에도 있겠지마는 ‘이거 배가 만일 잘못됐으면 지금’ 배 잘못된 데에 거게 근심이 있었어. ‘이거는 말씀에 요렇게 했는데 요거 잘못됐다’ 그게 그의 근심이요 고칠 것이라. 또 그가 기뻐하는 것은 뭐입니까? 기뻐하는 것, ‘요거는 됐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한테 경고하신 대로 그대로 됐다.’ 그거 기쁠 것이고 그 사람의 노력은 뭐이겠습니까? 노력은 말씀대로 배를 모으는 데 거게 노력일 거라 말이오.

그러니까 완전히 근심과 걱정이 멸망받을 그 사람들과 노아가 달랐습니다. 또 고치는 것과 만드는 노력이 이것이 그 사람들과 노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노아는 순전히 방주에 있었습니다. 근심도 방주에 있었고, 기쁨도 방주에 있었고, 고치는 노력도 방주에 있었고, 만드는 노력도 다 방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멸망받을 사람들은 전부 근심도 멸망받을 세상 것 거게 있었고, 또 기쁨도 거게 있고, 그까짓 거 기뻐해 봤자 얼마나 기쁠 것이며, 근심해 봤자 다 소용 없는 근심 또 제가 고쳐봤자 뭐 얼마나 고칠 것입니까? 고쳐봤자 홍수를 꿰뚫고 올라가구로 고치지는 못할 거라 말이오. 또 만들어 봤자 그럴 것이라.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과 간절한 사모 이 둘이 바로 돼 있나 안 됐나 하는 표시판은 뭐이냐? 이 두 가지의 표시판은 곧 두 가지입니다. 내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거게 있지 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전부 예수님 재림을 맞이하는, 불심판을 가지고서 재림하실 때에 불심판 이거 면할 이것에 대해서 근심도 여게 있고 또 기쁨도 여게 있고 ‘내가 이 면이 모자란다.’ 고치는 것도 여게 있고 또 자기가 만드는 것도 여게 있고, 노아 때에, 노아 방주 때에 노아는 순전히 방주에 일편단심이 다 있던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심판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고 이 불심판에 해를 받지 안하고 주님 맞이할 거기에 우리의 근심도 기쁨도 또 ‘잘못됐다 요거는 고쳐야 되겠다.’ 또 건설의 노력도 다 거게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와 같이 내가 이렇게 참으로 다른 사람과 같이 꼭 같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있고 뭐 다 있지마는 내 근심 걱정과 기쁨이 어데 있느냐? 내 근심과 기쁨 어데 있나? 요걸 봐서 알 수 있습니다. 근심과 기쁨 이것을 보고, 내가 그러면 뭣이 잘못됐는가 지금 자꾸 조사하고 살펴 가지고서 잘못된 게 있으면 그거 고칠라고 애를 쓰고 바로 할라고 애를 쓰고, 바로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라든지 잘못됐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든지 근심하는 것이라든지 기뻐하는 것이라든지 그것이 어데 있는가? 그것을 봐서 내가 주님의 불심판으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하는 고대가 내가 이 바로 됐는지? 또 간절한 사모가 바로 됐는지? 우리는 이거 참 속기 쉽습니다. 자꾸 자기를 자기가 자기를 인정한다는 게 거짓부리라. 이러기 때문에 부득이 자기 마음으로 자기가 인정한다는 그 인정을 할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내가 인정하나 요게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것을 그 표시판을 바로 보고 결과를 바로 보고, 표시판을 바로 봐서 ‘이거 보니까 바로 됐다. 이거 보니까 엉터리다.’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하지마는서도 믿나 안 믿나? 믿는지 안 믿는지 그것은 뭘 보고 압니까?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그것은 지금 그 유일한 방법인 거룩과 경건을 연습하고 있나 안 하나? 거게 전력을 기울이고 있나 않나? 그거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과 경건이 바로 됐는지 안 됐는지 그것 무엇 보고 알겠느냐? 그거는 주의 날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그것 보고 알 수가 있어.

주의 날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는 그것이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것은 내 희로애락 근심 걱정 노력이 전부 재림에 거게 기울여 있지 안하면 거짓부리라 그말이오.

이래서 우리가 자꾸 진실됨으로 요번 주간에는 이것을 연습합시다. 연습해 보면 아요. 연습해 보면 손양원 목사님이 지은 고대가인데 그 고대가가 이해가 될것입니다. 뭣 때문에 눈물 머금어? 머금는 그거는 그렇지 않겠소? 어제 내가 춘향이를 들어서 말했는데 춘향이가 자기가 춘향이가 지방의 군수, 지방에 지금으로 말하면 군수고 그때는 원인데 원이 들어서 그 춘향이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자기가 취할라고 애를 쓰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안하니까 오만 그 항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문과 고형을 다 했다 말이오. 고문과 고형을 자꾸 해도 자기는 정조를 지켜서 이도령을 기다리고 있다 말이오. 있으니까 자꾸 고문 고형이 심하니까 고문 고형이 심해지니 기달피기는 더 이도령을 더 사모돼지고 기달펴질 것 아닙니까? 왜 고문 고형이 심해집니까? 고문 고형이 심해지는 것은 자기가 정조를 팔지 안하고 정조를 지킬라고 하니까 고문 고형이 심하다 말이오. 고문 고형이 심해.

고문 고형이 심하니까 어서 이도령 만나기를 이도령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거요.

그래서 춘향전은 남원에서 나왔는데, 나는 여자는 전라도 여자를 제일 나는 존경해요. 왜 존경해? 그 사람들이 정조가 있어. 절개는, 절개는, 그래도 그런 그 소설을 지었지마는 그런 소설을 지은 것이 전라도 사람이 지었다 말이오. 그거는 그만치 뭘 그리 생각이 있기 때문에 지어. 뚝뚝하기는 경상도 사람이 제일 뚝뚝해서 뚱 하고 좀 무겁기는 좀 경상도 무거운 데는 아마 혹 일등이 될란지 모르겠어.

이래서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자기가 있으면서 어떤 가족이라도 자꾸 이 사람이 자기 남편만 기다리고 공부하러 간 남편만 기다리고 일편단심 그라고 있으니까 옆에서 자꾸 침노를 하고 자꾸 이래 지금 흐트러져서 자기네들과 같이 될라고 자꾸 이렇게 할 때에 같이 되지 안하고 깨끗하게 지낼수록이 자꾸 외로와지고 박해가 많아지고, 외로와지고 박해가 많아질수록이 그 자기의 남편 오기가 자연히 고대해지고 이거 남편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오고 이러니까 자꾸 이 세상에서 자기가 깨끗하게 살려고 하므로서 외로와지니까 눈물 나오고 외로와지니까 남편 기다리는 것이 더 심하게 기다려지고 또 남편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오고 이게 필연한 일이라.

그래 내나 고대가에 ‘눈물 머금고’ `쓸쓸한 빈들판에서' 하는 그 말이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이 쓸쓸한 빈들판이 돼. 진리대로 살라고 하면 세상에 아무것도 의지할 것도 없고 친할 게 없어. 친해, 사람하고 친하기는 얼마든지 좋아하고 친해야 되지마는 요 꼭 걸리기는 진리 때문에 걸리고 주님 때문에 걸립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이라.

‘희미한 등불을 밝혀 놓고’ 그러면 희미한 등불이라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 빛의 생활, 진리 생활, 이 세상 어두운 세상에 속화되지 안하고 깨끗한 생활한다고 해 봤자 그까짓 거 몇닢푼치 안 된다는 것을 겸손한 마음으로 그 흐미한 등불이나마 밝혀 놓고 자기 힘대로는 빛을 나타내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이번에는, 이번 주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 구름타고 불심판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이 불심판에 해를 받지 안하고 맞이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려니와 너희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의는 뭐입니까? 예수님의 구속인데 예수님의 구속을 입고 예수님의 구속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이 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꼭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미 속에 들어갔으나 불 내음새가 나지 안한 거와 꼭 같은 것이오. 그것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도 해하지 안한 것은 그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주님이 말씀하신 요 말씀을 우리가 믿고 그대로 순종해서 준비하면은 이런 것들이 해하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오늘 올지 내일 올지 어찌 압니까?

내가 사모하는 이 성도가 떠나버렸어. 이복순 구역에 그 처녀가 세상을 떴습니다.

이래서 열한시까지 교회로 오시면 상가에 가서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늘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었는데 저아레 너무 심하게 해 가지고서 아파서 나를 한번 만나보자고 이래서 그래 그때에 만나 가지고서 내가 한번 대화를 해 봤지 그전에 내가 대화를 못했습니다. 그날 가 대화를 하는데 아주 믿음 준비를 잘해요, 보니까. 믿음 준비를 잘해서 그 믿음 준비를 잘하는 걸 보니까 마음에 어떻게 거석한지? 그거 그분이 가는 데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 그만치 생각이 났어. 주님 사모하는 것이 어떻게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지? 이래서 모두 다 거게 간 사람들은 다 은혜를 받는답니다. 아주 믿음 생활을 잘하고 갔습니다.

열한시에 장례식 있습니다.

또 종전과 같이 교회 주변을 겸손한 마음으로 덕을 세워서 청소를 하도록 합시다.

또 권찰회는 오늘은 이 하기아동 성경학교 때문에 못하고 내일 아침에 권찰회를 하겠습니다.

또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그 외운 것을 또 외우고 또 외우고, 외워 보면, 외워 보면은 처음에 외워 가지고 나중에 외운 것이 깜깜하게 못 외우게 됩니다. 외웠던 것이 그다음에는 깜깜하게 못 외우게 되고 못 외우게 된 것을 또 뚫어 가지고 또 외우고 한 몇 번 못 외우는 것을 또 외우고 이렇게, 외워 놓은 게 잊어버려져 버리고 또 잊어버리고 난 다음에 새로 외우고 자꾸 외운 것이 잊어버려지고 잊어버린 게 또 새로 외워지고 이렇게 여러번 겪어야 그 외워지는 것이지 한번 외워진 그거는 소용 없어.

시험칠 때 사람들이 시험치는 그걸 하루밤 이틀밤에 공부해 가지고 쭉 외워 가지고 시험치면 백점 맞기야 맞지마는 그거 잊어버려져. 잊어버려지고 난 다음에 다시 외우는 거듭거듭하는 중복이 몇 번 있어야 돼요.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꼭 이 공과를 외우도록 노력합시다.

그라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중요합니다. 지금은 다 들어도 예사로 들어. 노아 방주 때와 같이 예사로 듣지마는 하루 삼십 분 기도 하지 안한 사람과 기도한 사람이 앞으로 환난을 당할 때에 아주 다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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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811216수야 선지자 2015.12.17
1442 전능의 역사/ 다니엘 3장 13절-18절/ 851204수야 선지자 2015.12.17
1441 전능자와 한 덩어리 되는 비결/ 로마서 6장 14절/ 860818월새 선지자 2015.12.17
1440 전능한 믿음/ 디모데후서 3장 15절/ 870125주새 선지자 2015.12.17
1439 전도/ 히브리서 5장 11절-6장 8절/ 860601주전 선지자 2015.12.17
1438 전도/ 누가복음 19장 10절/ 811220주전 선지자 2015.12.17
1437 전도/ 요한복음 3장 16절/ 860706주새 선지자 2015.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