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5:47
장막 생활
1986. 6. 4.수저녁
본문:고린도후서 5장 4절∼7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만물이 다 제가 살라고 해야 살아지는 것이고 자랄라고 해야 자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사는 것도 자라는 것도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리를 첫째로 바로 알려는 그 소원을 가지고 바로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저절로 알아지는 것 아니오. 학교에도 많은 학생들이 있어도 제가 알려고 하는 것만치 알아졌지 저절로 알아지는 지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믿는 것도 꼭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영생이요, 또 곧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대속의 공로요, 뭐 말할 수 없는 모든 영광과 행복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와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나 차지하면 행복의 실상을 하나 차지했고 말씀 하나를 허투리 지내 보냈으면 행복의 실상 하나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역사를 하는지, 하나님의 사람들도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예수님 믿는 일이 제일 중요한 일이건마는 이 일은 예사롭게 등한히 생각하고 필요 없는 일들에 분주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려고 애쓰는 그게 있어야 됩니다. 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아무리 그 말씀에 정 반대가 아니라 그 말씀을 마귀가 사람을 죽일라고 하는 그 해석이라도 그만 해석이면 해석이지 하고 그래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은 그 속에, 영에 있는 생명이 이 심신에는 건너오지 못해서 심신은 생명이 없는 셈입니다.
바로 알려고 애를 써야 되고, 그다음에는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바로 알고 난 다음에 자신이 여게 대해서 어떻게 할까 하는 그 각오가 있어야 됩니다. 어떤 성구든지 알고 난 다음에는 나는 여게 대해서 어떻게 할까 하는 자기 개인의 거기에 욕망이 생겨져야 그게 깨달음인 것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그거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이지.
그라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실행을 할라고 하면은 실행하는 데에 그 능력을 받아야 됩니다. 능력은 깨달음을 따라서 오는 것이고, 또 깨달음은 바로 아는 지식을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4절을 봤는데 한 절수라도 고걸 바로 알려고 애를 쓰면 거게서 시동이 걸리는 것인데, 거게서 구원 이루는 신앙의 능력이 시발이 되는 것인데 바로 알려고 하는 것이 없는 거게서 뭐 아무리 이래 모였다가서 한 시간 지나가 봤자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비었습니다.
이러면, ‘보자. 나는 여게 대해서 어떻게 깨달아지나? 그러면 이 성경을 목사님은 해석을 할 때에 어떻게 하나?’ 또 다른 집회도 어데든지 가십시오.
가서 다른 집회 가서도 ‘여게 강사는 또 어떻게 해석을 하나?’ 해석과 해석이 다를 때에는 자기 혼자 확실하게 알 수 있으면 판정하지마는서도 모를 때에는 비판을 받아야 됩니다. 이 사람에게도 묻고 저 사람에게도 묻고 이런 해석 저런 해석을 가지고 비교를 해 보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바르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됩니다.
차차 그러면 바른 것 틀린 것 바로 가르치는 것 삐뚤어지게 가르치는 것 거게 대한 좀 관심이 있고 중요성을 가지게 되고 거게 대해서 이제는 마음에 아주 신중히 하는 그것이 생겨질 건데 그런 게 없으니까 신앙이 자라지도 안하고, 뭐 앞으로 이렇게 한국 교회가 자꾸 이렇게 게을을 부리고 아무나따나 이래 퍼져 자빠져서 해이해지는 데는 옛날부터 기독 교회사를 본다든지 구약 성경을 본다든지 하면은 하나님 백성들이 풀어져서, 나사 풀린 것 모양으로 풀어져서 해이해질 때에는 다른 방편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징계를 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편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그렇게 큰 축복을 받아 가지고 번성했을 때에 그만 그들은 교만해지고 사치스러워지고 아주 그 마음이 풀려서 아무 긴장이 없는 그런 나사 풀린 거와같은 그런 사람들이 돼졌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뭐 행복을 준다고 하면 자꾸 점점 그런 것 더 됩니다. 이러니까, 부득이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역항을 줘 가지고서 큰 환난을 줘서 그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이 평안함이 자꾸 있을수록 사람들이 해이해지면 그것은 하나님의 그 징계를 초래하는 그것이 필연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신앙 생활을 좀 실질적으로 하도록 그렇게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요 4절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장막에 있다 말은 요새 우리는 천막 친다고 하는데 ‘이 천막에 있는 우리는’ 그말 한가지입니다. 장막에 있다 말은 벽 막추고 기둥 세우고 이렇게 튼튼한 집이 아니고 임시 뭐 베쪼가리로나 혹은 풀로나 이래 이어 가지고서 임시 움막 모양으로 그래 지어 놓고 있는 그게 장막입니다. 집이 아닌 그 천막 생활 그런 것이 곧 장막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장막에 있는 우리라 그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음의 집 고기덩어리의 집, 영이 우리인데, 영이 우리인데 영이 마음 속에서 마음을 집을 삼아 가지고서 마음 속에 거처하고 있고, 또 몸을 집을 삼아 가지고서 몸 속에 거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데 거처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 영 속에 거처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과 몸, 또 이 세상에 이런 모든 자기 환경, 주위, 분위기, 자기의 모든 세상 이런 것을 가리켜서 여게 장막으로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자기가 첫째는 마음 속에 거처하고 있고, 몸 속에 거처하고 있고, 또 자기 방 안에 거처하고 있고, 또 자기 집 안에 거처하고 있고, 또 그다음에는 자기 울장, 담장, 담장 안에 거처하고 있고, 자기 동리에 거처하고 있고, 자기 사회에 거처하고 있고, 자기 군에, 시에, 한국에 거처하고 있고, 또 동양에 거처하고 있고, 이 지구상에 거처하고 있고 이렇게, 그 밖에는 우주라는 커다란 처소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여게 ‘장막에 있는 우리’ 장막이라 말했습니다.
장막은 불완전한 집이요 또 오랫 동안 살 것 같으면 집을 만들 터인데 오늘 이사 갈지 내일 이사 갈지 모를 때에 장막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 유대인들은 목축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늘 이 골짝에서 장막 치고 짐승을 먹이다가 또 거게 풀이 없으면은 내일은 장막을 저 골짝으로 뜯어 옮겨 가지고서 또 풀을 먹이고 이러기 때문에 장막이라 하는 것은 자꾸 뜯어 옮기는 것이 장막이요, 고정된 처소가 아닌 것을 장막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우리라. 그러면 아까 말한 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장막으로 비유했습니다. 왜? 오늘 그것이 끝날지 모른다 그말이오.
오늘 끝날지 모르는, 참 오늘 끝날란지 내일 끝날란지 모르는 아무런 안전성이 없는 그런 이 세상 자기 세상을 가리켜서 장막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것도 뭐 들으면 그만 압니다. 아는데, 들어서 아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우리 가정은 장막이다, 내가 부모의 품 안에서 살고 있는 이 부모의 품 안은 장막이다, 내가 남편의 품에 살고 있는 이것은 장막이다, 내가 가족의 품에 살고 있는 거는 장막이다, 내가 지금 이런 사업을 하고 있는 이런 사업, 이런 모든 사업, 이런 직장 생활하고 있는 거는 다 장막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남한은 장막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동양은 장막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땅덩어리 생활은 장막이다.’ 이런 것을 자기가 자꾸 느껴 봐야 됩니다.
느껴 봐야.
장막에, ‘참으로 장막이가?’ 생각해 보면 이것은 그런 것들이 변동이 안 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언제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참 하루도 안심할 수 없는 장막입니다.
이렇지마는, 악령이 사람들에게 자꾸 뭣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테레비 앞에서 자기는 지금 숙제할 것이 많아서 숙제를 해야 되겠는데 자꾸 테레비에서 이거 나오고 저거 나오고 하니까 요것만 보고 요것만 보고 자꾸 그라다 보니까 나중에 그만 열두시까지도 그만 거게 빠져 가지고서 자기 할일을 못 합니다.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또 그걸 노립니다. 딱 눈에 대고 시작만 하면 그만 열두시 끝마칠 때까지는 옆눈도 돌아보지 못하고 거게서 거게서 연결해서 연관으로 눈을 딴 데로 돌이킬 여가 없이 그렇게 마구 거게서 그만 그 시간을 다 테레비 보는 데 계속하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자기네들은 능력이요 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악령이 이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을 가지고 자꾸 연속적으로 귀에 들어오는 말, 눈에 보이는 것, 또 닥치는 사건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 ‘이것 참 이 모든 것이 장막이다 하는, 그 장막이다 하는 그것을 생각해 볼 만한 여유의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은 제 딴에는 바쁘게 돌아가고 하니까 어북 쓸모 있는 사람인 줄 알고 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줄로 그렇게 알고 있지마는서도 마귀 그놈이 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을 생각할 여유가 없도록 자꾸 연속시켜서 돈이면 돈, 사람이면 사람, 문제면 문제, 이래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할 여유가 없도록만 만들면 그놈은 죽입니다. 그만 그 인간은 뭐 장관이라도 그까짓 것 죽였고, 왕이라도 죽였고, 대통령이라도 죽였고, 학자라도 죽였고, 영웅이라도 죽였고, 뭐 목사라도 죽였고 그만 죽여 버립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참 삼킬라고 하는 원수가 우는 사자와같이 막 두루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줄을 알아야 되지 제가 하나님 말씀에 잠깐 눈만 떨어지면 죽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기 때문에 자기 믿음의 식구를 기르든지 자기 가족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든지 할 때에 알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그전보다 성경 말씀을 더 생각하고 기도를 더하고 또 예수 믿는 일에 관심을 더 가지면 그만 됐습니다. 그만 그다음에는 오는 것이 축복이오.
그렇지마는, 일이 바빠 그렇다고 하든지 어쨌든지 성경 보는 것이 차차 성글어지고 기도가 성글어지고 또 믿는 데에 마음 기울이는 게 성글어지고 하거들랑은 고 속에 그 사람을 삼킬 그 원수는 와서 있다는 것을 무조건 그거는 그만 그대로 판정을 지우고 단속하십시오.
‘네 속에 마귀가 들었다’ 또 그렇다 하면 `네가 어떤 계집에서 빠졌다'. 또 ‘네가 어떤 나쁜 동무에게 빠졌다’ 또 `네가 어떤 남자에게 빠졌다' `네가 돈에 빠졌다’ 빠지면 죽지 뭐. 물에 빠지면 죽는데 세상은 바다입니다. 물에 빠지면 죽지 제가 별 수 있소? 그렇게 판정을 지우고, 판정을 지우고 때려 눌러도 됩니다. 때려 눌리면 그게 뭐 안 그렇다고 떠 들고 하지마는서도 얼마 안 돼서 후벼 파 보면 환하게 나와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믿는 일에 대한 그것이 차차차차 더 짙어지고 더 뜨거워지고 강해지면 그만 문제할 것 없고, 그것이 차차 성글어지면 제가 취직을 했든지 무슨 사업을 하든지 어쨌든지 그게 성글어지면 그만 그 사람은 지금 속에 자기를 삼킬 원수가 와서 지금 속에 암병 같은 병이 들어 있기 때문에 시간 문제지 마지막에는 꺼꾸러져 죽습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요 말씀 한 말씀도, ‘이게 뭐꼬?’ ‘이것도 장막이다' `장막이라니?' `오늘 이 장막 뜯을란지 내일 뜯을란지 모르지 않느냐?’ 오늘 내가 이거와 인연을 끊을 것인지 내일 끊을 것인지 오늘 떠날 것인지 내일 떠날 것인지 모른다는 것, 이게 마귀란 놈들은, 말하면 ‘사람에게 자꾸 낙망을 줘 가지고 되나? 이 시간 죽어도 너는 천 년 만 년 산다 이렇게 소망을 줘야 되지 안 죽는 사람을 백지 오늘 죽을지 모른다 내일 죽을지 모른다 이래 가지고서 낙망을 줘 되느냐?’ 그게 마귀 새끼의 말입니다.
‘너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하는, 너는 죽는다 하는 거는 줘 가지고서 그 사람에게 절대로 백의 하나도 손해가 없습니다. 너는 산다는 거게서 사람은 망하고 맙니다. 그거 참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살이 철통같이 제가 무슨 계획을 하고 ‘나는 지금 공부하기 시작했으니까 공부를 해서 앞으로 크게 출세를 하고 입신 양명을 하고 참 아름다운 따뜻한 가정을 이루겠다’ 해도 이게 장막이라, 이게 장막 생활이라 하는 걸 잊어 버리고 공부하면 그 사람은 그것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자는 죽은 자입니다.
또, 신혼 결혼해 놓고 ‘참 재미있다. 이거는 장막 생활이다. 언제 끝날란지 모르니 우리가 조심해서 오늘 끝나도 피차에 미안할 것 없고, 피차에 내가 속인 것 없고, 잘못한 것 없고, 오늘 끝나도 마음에 미안할 거나 후회할 것은 없다.’ 이렇게 그날이 끝나는 줄 알고 준비해 살면 참 그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이지마는서도 그만 일 년이라도 일 년 동안이야 안 죽지 하고 살면 그 일 년 동안은 완전히 죽은 생활하고 맙니다. 요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요 한 마디라도 똑똑히 알아요. 알면 그만 돼요.
짐진 것같이 탄식한다. 탄식한다 말은 잘될 때 탄식이 나옵니까 안될 때 탄식이 나옵니까? 탄식은 안될 때에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됐을 때에는 그 사람은 참 행복이다, 만족이다 하고서 잘될 때에는 흥이 나오고, 잘될 때에는 기쁨과 흥이 나오고 잘 못됐을 때에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짜든지 기쁘게 살라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여게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그러면, 성령의 사람들은 기쁨보다도 탄식이 늘 계속되는 것이 그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는 또 항상 기뻐하라 하더니마는 어째 또 인제 여게는 또 믿는 사람이 탄식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말하는가? 고걸 모르면 헛일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은 탄식하는 그 탄식으로 인해서 탄식 고개를 넘어 가지고서 오는 기쁨 그 기쁨을 가져야 되지 탄식도 없이 막바로 기쁘다고 하는 그 기쁨은 다 자살 행위입니다. 그거는 다 못쓸 행위요. 탄식을 하면 탄식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탄식 속에 기쁨이 있어요.
탄식은 뭐인데? 탄식은, 잘못됐을 때 탄식이지. 뭐이 잘못됐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대로 지식이 갖추어지지 못했어,성경대로 행위하지 못했어, 성경대로의 사람이 되지를 못했어, 오늘 종일도 밤에 계산하고 보니까 성경 지식을 떠나서 마귀 그놈 지식에게 끌려 가지고서 살았지, 마귀에게 끌린 행동 했지, 마귀와 같은 사람으로 살았지 하나님과 같은 사람으로 살지 못했지 이러니까 옳은 것을 다 실패하고 잘못된 그것을 발견하고 보니까 탄식이 된다 말이오.
그러면, 이 시간에 잘못된 것을 깨달아서 탄식을 하고 탄식함으로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 보겠다’ 하는 그 탄식에서 겸손한 결심과 각오가 나오고, 결심과 각오가 나와 가지고 힘써 일해서 됐다 싶었는데 또 생각해 보니까 ‘이 점이 또 미비하고 또 잘못됐다’ 또 탄식이 꼬리를 물고 들어옵니다.
이래서,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한다’ 그러면 이 짐진 것 같은 탄식, 짐진 것 같은 탄식은 이 탄식이 있어 갈수록이 그 탄식이 더 무거운 탄식이 되는 것입니까 그 탄식이 갈수록이 가벼워지는 것입니까? 짐진 것은 짐은 처음보다도 갈수록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짐진 거와같이 탄식하는 것은’ 그말은 그 탄식이 갈수록 자꾸 탄식이 많아집니다. 탄식이 더 많아지고 탄식이 더 커지고 그 탄식이 내 마음을 더 누르고 있습니다. 요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탄식에 마음이 눌린 것은 벌써 이 세상에 장막 생활, 오늘 벗을지 내일 벗을지 모르는 땅에 있는 장막 생활 그것에 갈급해서 그것이 부요하지 못하게 그것을 더 많이 가지지 못해서 그래 탄식이 아니고 이 탄식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그 온전한 그것이 자기는 이 현실에서 이루어야 될 터인데 참 온전하고 깨끗하고 가치 있고 없어지지 안하고 죽지 안하는 이 옳은 것 이거는 할라 하니까 안 되고 엉뚱한 것이 원치 안하는 자꾸 죄가 되어집니다. 원하는 의는 이루어지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 죄가 되어집니다. 이러니까, 마음이 눌리고 자꾸 탄식이 되어지고 그 탄식이 갈수록 자꾸 마음이 더 눌려집니다.
이렇게, 탄식을 하고 근심 걱정을 해서 근심 걱정 탄식한 고 끝에는, 참으로 탄식을 하고 근심 걱정한 고 끝에는 무엇이 움돋아 올라오느냐 하면은 고 끝에는 든든하다 안심이다 하는 그 기쁨이 거게서 움터 올라옵니다. 요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돼야 됩니다.
자기가 직장에 가면은 내가 과거 이 직장에서 인인 관계를 할 때에 남의 눈만, 남의 눈가림 하고서 남의 눈만 맞춰서 살았고, 눈만 속이는 일 했고, 또 내가 일할 때에 양심에 참 후회 없는 그런 생활해 보지 못했고, 또 할 때에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을 잊어 버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모하면서 기도하면서 살지 못했고, 믿음으로 살지 못했고, 모든 사람에게 화평의 사랑으로 덕으로 이렇게 진실되이 살지 못했다 뭐 이런 것, 자꾸 잘 산 것만 나오는 게 아니라 잘못 산 것만 자꾸 이래 나오니까 ‘어제는 내가 그래 살았는데 오늘은 내가 그래 안 살겠다’ 하는 이것이 지금 탄식으로서 ‘왜 내가 이렇게 살지 못하고 이 모양이 되는가’ 하는 그 잘못 산 데 대해서 탄식이 되는데, 그 탄식이 어제보다 오늘 더 되고 오늘보다 내일 더 돼야 그 탄식으로 인해서 그 사람에게 기쁨이 더 돼지고 참 알속 있는 구원이 이루어져 가지 그 탄식이 차차 가벼워지면 안 됩니다. 탄식이 점점 무거워져야 그 사람은 점점 온전한 사람으로 돼 나아가는 것입니다.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여게 무슨 탄식인가 요게 다 말해 놨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말은 장막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말입니다. ‘장막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직장 생활, 가정 생활, 부부 생활, 이 세상 생활 이런 것을 아이 그만 귀찮다 이런 것 그만 없어 버리면 좋겠다 하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어서 이 뭐 직장 생활이고 사회 생활이고 가정 생활이고 부부 생활이고 모든 윤리 생활이고 도덕 생활이고 하는 이런 것 귀찮으니까, 이런 모든 세상 생활 말이오, 세상 생활 세상에 속한 모든 생활을 그만 이것 다 집어 치워 버리고 이 세상 생활 안 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게 아니요 그말입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장막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 벗지 안하고, 이것을 벗어 버리면 다시 못 입습니다. 알겠습니까? 이 장막 생활 벗어 버리면 다시 못 입습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해 가지고 부부 생활 하는데 부부 생활을, 그만 부부 생활을 벗어서 부부 생활이 끝나 버렸으면 그것으로 끝나 버리지 다시 그 부부 생활을 새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암만 살아 있어도 하루 부부 생활, 하루 직장 생활 했으면, 하루 직장 생활 했으면 하루 직장 생활로서 끝나 버립니다. 하루 직장 생활로 끝나는데 끝나고 난 다음에 뒤에 다시 그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있느냐?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내가 직장 생활을 했는데, 오늘 하루 직장 생활 했는데 직장 생활이 이제 다섯시 마칠 시간이 돼서 오늘 직장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끝이 났으면 다시 오늘 직장 생활한 그 직장 생활을 다시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내일 하는 것은 내일 직장 생활이지 오늘 직장 생활은 끝났기 때문에 다시 못 하는 것입니다. 다시 못 합니다.
못 하는데,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늘 직장 생활로 오늘 직장 생활하는 직장 생활이, 오늘 가정 생활하는 가정 생활이, 오늘 사회 생활하는 사회 생활이 무슨 생활이든지 이 세상 생활하는 이 생활이 오늘 한 것은, 오늘 세상 생활한, 세상에 속한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생활하는 이 세상 생활이 끝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다. 끝나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제가 오늘 이런 세상 생활 저런 세상 생활 세상 생활 하는데 벌써 열시, 열한시, 열두시, 한시, 두시, 세시, 네시, 다섯시 땅 치면 그날 직장 생활은 그만 끝나지 안했습니까? 끝났는데, 그러면 「벗고자 함이 아니요」 요거 여러분들이 잘 모르면 안 됩니다. 아무나따나 그래 배워 가지고 안 돼.
「벗고자 함이 아니요」 모든 사람이 오늘 하루 세상 생활 하면은 세상 생활은 끝이 납니까 끝이 안 납니까? 끝이 안 나게 할 수 있는 조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끝이 안 나게, 오늘 무슨 세상 생활이든지 하는 그 세상 생활이 끝나지 아니하도록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하루 세상 생활, 직장 생활이든지 가정 생활이든지 공부하는 학업 생활이든지 정치 생활이든지 또 어떤 예술 생활이든지 뭐 문화 운동 생활이든지 무슨 생활 하든지 말이오, 그게 다 합해서 세상입니다.
세상 생활을 하는데 오늘 하는 이 세상 생활 이것이 끝나지 아니한 사람이, 오늘 세상 생활 그 하루 세상 생활한 그 세상 생활이 끝나지 안한 사람이 이 역사 세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구 두루뭉싱이로 이 보기 때문에 이게 안 되는데. 한 사람도 없어요.
‘이 장막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세상 생활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러면 세상 생활 벗고자 함이 아니니까 세생 생활을 안 벗을 수 있는 길이 있다 말입니까 없다 말입니까? 녜? 있다 말이요 없다 말이요? ○○○ 목사님. 예? 안 벗을 수 있다 말이요? 안 벗을 수 있다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오늘, 장막 생활은 세상 생활이 장막 생활인데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세상 생활이 끝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끝나기를 원하는 게 아니오.
그러면, 모든 세상에 왔다 간 사람들, 세상에 왔다 간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하루 장막 생활 했으면 그 장막 생활이 다 끝이 났습니까 안 났습니까?예? 다 끝이 났습니다.
끝 안 난 사람은 역사에 수억억만 명도 많이 왔다 갔지마는 한 사람도 하루 장막 생활 하면은 그 장막 생활이 끝이 나지, 그 벗어져 버리지, 그 장막 생활이 이제 벗어져 버리지, 그 장막 생활 그거는 끝나 버렸지 끝나지 안하고 그 장막 생활을 벗지 안하고 그대로 입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입고 있을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입고 있는 일이 되겠습니까? 만일 안 믿는 사람들이 그 장막 생활을 벗지 안하고 입고 있을라고 하면은 어떻게 하면은 입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로 말하면? 저○○○ 예? 없어? 그러면, 하루 스물 네 시간 아니요? 한시에 두시 딸칵딸칵 가는데 이 시간 가는 이 시간을 대못으로 탕탕 때려 박아 가지고 이 시간을 못 가구로 딱 시간을 중단시키면 될까요 안 될까요? 시간을 중단시키면 그 장막 생활이, 하루의 장막 생활이 끝날 수 있소 안날 수 있소? 시킨다면 안 날 수 있지요. 그날그날 그 시간을 다시 가지 못하도록 고 세월을 딱 붙잡아 맨다면은 그날의 장막 생활은 스물 네 시간 지나가도 끝나지 안하지요. 그럴 수 없다 그말이오. 그럴 수 없어.
이런데, 여게 말하기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장막 생활을 하루 지나가니까 하루 다 벗어 버리고 하루 지나가니까 그 하루 장막 생활한 것은 다시만나 보지 못하게 휘떡 벗어 버렸고, 또 그 이튿날 장막 생활하면은, 시작했으면 또 그날 지나가면은 다시 만나지 못하게, 시작하고 생활하는 장막 생활은 벗어서 다시 그만, 벗어 버려서 다시는 만나보지를 못하도록 그렇게 착착 지나가고 있는데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러면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러면 안 벗을 수가 있나 말이요? 안 벗을 수가 있나? 그런데,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요것 잘 알아야 됩니다.
요것을 똑똑히 요 말귀를 알아 들으면 심령의 눈이 열리는 사람입니다. 요걸 좀 알면 요새 이 설교에 뚱딴지같은 그런 설교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요걸 반사들이든지 여게 전도사들이든지 장로님이든지 요걸 똑똑히 아십시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것을 벗어 버리면, 벗어 버리면 다시 입지 못하는데, 벗어 버리면 다시 입지 못하는데, 벗지 아니하고, 이 장막 생활을 벗지 아니하고, 요것만 알면 그만 다 돼 버렸어요. 요것만 알면 더 많이 배워야, 이것만 알면 그만 요것 하나만 해 돼요.
「벗지 아니하고 덧입고자 함이니」 덧입는 것은 그러면 이 벗고 입는 것이 덧입는 것입니까 벗지 안하고 입는 것이 덧입는 것입니까? 벗지 안하고 입는 것이 덧입는 것입니다. 벗지 안하고 입는 것이 덧입는 것이오.
그러면, 하루의 이 장막 생활이, 오늘이 며칠입니까, 유월? 유월 사일 열 두시가 지나가니까 다시는 유월 사일에 입고 살던 이 세상살이,내 고기덩어리나 마음의 요소나 고기덩어리의 모든 진액이나 요소나 내 사회나 내 분위기나 내 환경이나 그런 거 다시 두 번 만나보지 못합니다. 열 두시 되면 벌써 오늘의 생활은 다 끝나 버렸습니다.
이런데, 열 두시가 지나가도 오늘의 생활이 끝나지 안하고 영원히 끝나지 안하는 길이 있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안하는 길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벗지 안하고, 벗지 안하고 영원한, 영원한 처소를 덧입고자 함이니, 이 장막을 벗지 안하고 영원한 것을 덧입고자 함이니, 영원한 것을 덧입으니까, 영원한 것을 덧입으니 이 장막을 벗겨갈 자가 없습니다. 이 장막을 아무도 벗겨갈 자가 없습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니」 우리가 하루 이 장막 생활 하는 이 생활을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루가 지나가면 그 하루의 장막 생활은 다시 만나 보지 못하게 끝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두 번 만나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에 하루의 장막 생활한 이것이 오늘이라는 유월 사일의 오후 열 두시가 지나가도, 이 시간은 지나가도 오늘에 해당된 내 장막 생활은 끝이 나지 안하고, 장막 생활은 끝이 나지 안하고 없어지지 안하고 이 장막 생활이 끝이나지 안하는 그런 길이 있습니다.
끝이 나지 않는 그 길은 덧입으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뭘로? 하늘의 처소로 덧입어 버리면은, 하늘의 처소로 덧입어 버리면 이것은 영생으로 덧입었기 때문에 이 사망이 이걸 없애지를 못해. 소멸하지 못해. 사망이 없애지 못하고 소멸되지 안합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요거 여러분들이 자꾸 생각해 집에 가서 자꾸 생각하고 해서 알송달송하고 자꾸 요라면, 요라면 이치에 맞고 안 맞고 그만 요렇게 좀 고민할 줄 알아야 될 터인데, 좀 눈이 밝아져야 될 터인데 그거 하나도 없습니다.
요 우리 진영의 교역자들도 두루 뭉싱이라. 거게 대해서 속에, 요라면 살고 요라면 죽고 요게 대해서 아무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이 말한 이거는 해석을 어떻게 할 건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니」 덧입는 게 뭐인가? 고다음에 해석합시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죽을 것이」 없어질 것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기를 말이요, 예를 들면은 고기를 한 마리 잡았는데 좋은 물고기 한 마리 잡았습니다. 그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았는데 그 물고기 그대로 두면은 그 고기가 잡아 죽었으니까 그다음에 썩을 것 아닙니까? 썩을 것 아닙니까? 썩지요? 썩는데, 그 고기를 그 만일 산 사람이 먹었으면 그 고기는 뭣 되겠습니까? 산 사람이 먹었으면 그 고기는 죽은 것 됐습니까 산 사람의 피와 살과 기름과 영양이 됐겠습니까? 녜? 생명이 삼켰으니까 그 삼킨 그 생명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것이 살아 있을 것 아닙니까? 고기는 죽었지마는서도 그 고기가 산 것이 돼 가지고서, 산 것의 밥이 돼 산 것의 살이 되고 산 것의 피가 되고 산 것이 되어 가지고 있는 그런 것으로서 비유를 했습니다, 이거는. 비유를.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은 뭐인데? 생명은 뭐인데? 생명은 뭐이라고 배웠습니까?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죽을 것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그런 것들이 하루라는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것으로서 영원한 사망이 됐습니다.
하루 지나갔으면 그것은, 한번 이 세상에 지나갔으면 그것은 조물주와 완전히 끊어지는, 저는 조물주와 완전히 절단되는 그 끝마치는 시간 아닙니까? 오늘 하루 지나갔으면 하루 동안 살던 거는 조물주와 완전히 끝이 절단난, 끝이 났습니다.
끊어진 게 끝이 났습니다.
끝이 났는데, 그러니까 조물주와 끝이 났기 때문에 다시는 살아날 수가 없고 영영히 망하는 것인데,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는 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으로서 끝장나는 것 있고, 우리가 하루 사는 생활이.
창조주와 끊어지는 그 일이 절단 완성, 절단 완료, 절단 완료가 될 수도 있고, 절단 완료도 될 수가 있고 창조주와 결합 완료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절단 완료도 될 수 있고 결합 완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하는 말은 이 내 심신이 이 세상살이 하루 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존재가 끝장나고, 조물주와 끊어지고, 다시 사는 생명이라는 것은 끝이 나 버리고 이제는 사망으로 시작되어서 영원한 사망으로 시발되고, 사망으로 시발되고 생명으로서는 끝장나는 요것을 원하는 게 아니요, 「벗고자 함이 아니요」 요것을 원하는 게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뭘 덧입어? 이것이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완료되는, 끊어짐이 완료되는 이것 하기를 원치 안하고, 하나님과 끊어짐이 완료되는 이것을 원치 아니하고 「벗고자 함이 아니고 덧입고자 함이니」 하나님과 완전 연결 완성, 완전 연결 완성되기를 원하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끊어져서 영원 멸망받을 그것이 하나님과 영원한 연결이 돼 가지고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에게 삼키워져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연결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안 늙고 안 죽으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것은 안 늙고 안 죽습니다. 하나님은 늙지 안하고 죽지 않는 거게 그 완전 연결 되어지기를 원한다. 끊어져 멸하기를 원하지 안하고 완전 연결로 영생되기를 원한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말하고 있습니다.
이런데, 그러면 이 일에 대해서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탄식한다. 자기가 하루 생활을 이렇게 가만히, 뭐 이런 일 저런 일을 이래 하고 하며 생각해도 또 금방 ‘하나님과 끊어진 생활 또 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생각 또 했다, 하나님과 끊어진 말 또 했다, 하나님과 끊어진 이 인인 관계를 또 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생각을 또 했다, 하나님과 끊어진 말을 또 했다, 하나님과 끊어진 이 웃음을 웃었고 했다.’ 이거 뭐 탄식이라 말이오.
‘또 이랬다. 다시!’ 탄식하면서 ‘이제는 내가 하나님과 끊어진 말도 안 하겠고, 하나님과 끊어져 가지고 내가 말하고, 하나님과 끊어져 가지고 일하고, 하나님과 끊어져 가지고 보고, 하나님과 끊어져 가지고 듣고, 하나님 떼 내버리고 내가, 아무리 좋은 거라도 내가 하나님 떼 내버리고 내가 내 단독이 듣고 보고 생각하고 접하고 누리고 내가 그짓 않겠다.’ 않고, 하나님과 연결해서 연결돼 가지고, 하나님하고 둘이, 나하고 하나돼 가지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기뻐하고, 성내는 것도 하나님과 나하고 함께 해서 하나님이 성내면 내가 성내고 하나님이 기뻐하면 내가 기뻐하고. 하나님과 나와 하나의 연결된 그 희로 애락, 연결된 이목구비 수족의 이 생활을 내가 할라고 하니까 해서 되는 것도 있지마는서도 이게 마음대로 백 프로 싹 다 할라고 했는데 하고 보고 또 안 되고 이러니까 탄식이 자꾸 갈수록이, 할라고 애를 쓰니 안 되는 것이 더 보여집니다.
여게 대해서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하루 종일 하나님 잊어 버리고 살아도 잊어 버리고 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라고 할수록이 하나님 잊어 버리고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고 사는 그것이 자꾸 더 보여지니까 자꾸 탄식이 더 많아진다 말이오.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은 탄식이 자꾸 더 많아져.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탄식이 더 많아진다 그말이오.
많아지는 것은 탄식할 만한 탄식거리가 많아서 많아집니까 탄식거리를 보는 눈이 밝아져서 많아집니까? 많아서 많아지는 걸로 보는 사람 손들어 봅시다. 눈이 밝아 많이 보여서 그런 줄 알고 있어.
바울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는 것은 많이 보여서 그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처음에는 하나만 봤는데, 요 면만 봤는데 이 면도 보니까 또 그렇고 그렇고, 이러니까 내가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탄식이 된다. 점점 탄식이 더 많아진다.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탄식하는 것은 내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장막 생활에서 이 안 믿는 불신자와 같은 이 세상살이 하는 그것으로서 그만 이 세상살이 하루 하고서 ‘오늘은 하루 지나갔다’ 어리석게, 오늘은 지나갔지마는 제딴에는 언제든지 있는 줄 알지마는 오늘 한번 지나갔으면 다시 못 봅니다.
인생이 하루 살았으면 그 살이는 영원히 다시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언제 만나 보느냐? 영원한 심판 너머에서, 지옥에서 나중에 거게 대한 보벌이 오고 복수가 오는 그때에 만나보지 그전에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렇게 하루 살고 제가 ‘뭐 새털같이 많은 날인데 뭐 하루하루 오늘 하루 뭐 허비해 봤자’ 또 하루 생활 또 지나가 버리고, 그만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면 끝났고 이런 생활 내가 원치 않는다. ‘벗고자 함이 아니다’ 오늘 하루 생활한 이 생활이 이것으로서 끝나는 이런 생활 내가 원치 않는다. ‘벗고자 함이 아니다’ 끝나는 이걸 원치 안한다.
‘덧입고자 함이다’ 덧 입고자 함이라니? 뭘 덧입어? 뭘 덧입어? 영원히 벗지 아니하는 하늘의 장막, 영원히 벗지 않는 하늘의 장막, 영생, 오늘 하루 생활이 영생하는 생활이 되기를 내가 원하고 있다. ‘벗고자 함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에게 끊겨진 그것이 오늘 열 두시가 지나가면 영원히 끊어지는 것으로서 오늘 것은 오늘 가면 그거 끝나 버리는데, 끊어지는 것으로서 이거는 완료가 돼 버리고 마는데, 끊어지는 걸로 완료되는 이거 원치 안하고 이제는 하나님과 연결된 것으로서 영원히 완료돼 완성되는 하나님과 연결 완성되기를 내가 원하고 이것 때문에 무거운 짐진 것같이 탄식을 한다 그렇게 여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내가 오늘 하루 사는 생활이 이거냐 저거냐, 그저 제가 돈을 많이 집어 넣고, 공부 세상 지식을 많이 얻었고, 또 이 권세를 많이 얻었고 뭐 어떤 걸 많이 얻었다 할지라도 오늘 하루 생활이 이 생명의 법과 조물주와,ㅡ안 믿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ㅡ조물주와 완전히 인연이 끊어지는 오늘 하루의 것이 되느냐, 끊어지는 오늘 하루의 것이 되느냐?ㅡ안 믿는 사람은 그것밖에 안 돼.
불택자들은 그것밖에는 안 돼요.
택자들은 하나님과 끊어진 오늘 하루의 것이 되어지느냐 오늘 하루가, 이 끊어질 것이 끊어지지 안하고, 그냥 끊어지기를 원치 안하고, 끊어질까 뻘뻘 떨면서 끊어지지 안하고, 오늘 하루로서 끊어질 이것이 끊치지 안할, 영원을 덧입어, 영원을 덧입어 영원의 것이 되어서, 영원의 것이 되어서 영원과 연결돼서 영원의 것이 되어서 이 오늘 하루의 이 생애가 영원히 없어지지 안하고 영원히 끝나지 안하고 영원히 계속되도록 ‘하늘에 오는 장막을 덧입기를 원한다’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원한다’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처소가 오나니 이는 영원한 집이로라’ 말한 거와 같이 영원한 집을, 영원한 집을 덧입기를 원한다. 이제는 영원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서 영원토록 내가 살 수 있는 이 살이로 오늘 하루의 살이를 이걸 완전히 죽지 안하고 하늘나라의 것을 덧입어 가지고서 하늘나라의 것이 되도록, ‘영원한 처소’ 영원히 내가 살 수 있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내 처소, 영원히 살 수 있는 내 환경 주위, 영원히 살 수 있는 내 따뜻한 아름다운 재미 있는 가정, 영원히 살 수 있는 내 사업, 내 활동, 내 작용 이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짐으로 끝장날 것이 하나님과 완전히 연결되는 것으로 끝장 나기를 원한다’ 요것이 성도의 탄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거 저런 거 분주해 가지고서 정신 없이 하루 종일ㅡ 하루의 생활이 이것으로서 끝장나 버리느냐, 이것이 끝나지 안하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것으로서 완전히 이것이 변화돼서, 끊어져서 영원히 죽을 것이 연결로서 영생하는 이 두 갈래길이 우리에게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이 점을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고대로 못 산 요 면을 탄식하는 요 탄식이 주먹덩이 만치 탄식이 되면은 고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좀 나오고 이렇게 탄식이 많으면 더, 허탄한 생활 하지 안하고, 무너지는 벗는 생활하지 안하고 더 덧입는 생활이 더 많아지니 탄식이 많을수록이 덧입는 생활이 더 많아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이입니다.
요라면 또 여러분들이 또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그러면 세상은 염세주의로, 세상은 집어 치워 버리고 세상은 염세주의로 살 것인가, 염세주의로 살 것인가! 이래서, ‘백 목사 설교는 뭐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은 다 염세주의로 살아서 다 그만 세상은 포기해 버려야 되겠더라.’ 염세주의 생활로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염세주의 생활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보면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도록 지금 자꾸 하고 계시고,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령이 이 일을 성공하도록 도와 주는 책임자로 나섰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 그러면 공부도 믿음으로 하고, 장사도 믿음으로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그만 다 그러면 이래 얼핏 설교 들으면,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일은 다 포기해야 된다, 염세주의자다.’ 염세주의라 말은 세상을 싫어한다 말입니다. 염세주의 아니오, 기독교는 염세주의가 아니요. 왜? 이 세상은 보배입니다. 이 세상 한번 지나가면은 다시 이거 찾지 못합니다. 지나가기 전에 이걸 요리를 잘해야 됩니다. 지나가기 전에 요리를 잘해야 돼요.
이러는데, 믿음으로 행하고 보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한다 말은 내 눈에 보이는, 내 눈에 보이는 옆에 보이는 사람, 사회, 국가,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 보이는 것 이 모든 피조물 이런 것들로 인해서 내가 움직이지 안하고, ‘보이는 것으로 하지 안하고 믿음으로 행함이라’ 보이는 이런 것들, 보이는 것에게 내가 피동되어 하지 안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에게 피동으로 내가 하고 보이는 것들에게 피동으로 하지 안한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 공부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장사할 수 있어요 없어요? 저 ○○○ 집사, 예? 뭐라 하노? 큰 소리 해 봐.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뭘로 해? 믿음으로 하지. 믿음으로 하다니?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지.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면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잘 될까 마귀가 시키는 만물보다 거짓된 제 지혜대로 하는 게 잘 될까,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게 잘 돼요 인간 제 생각대로 하는 게 잘 돼요?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잘 돼요.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한다면 뭐이 잘 돼요? 바로 시켰기 때문에 잘 돼요. 시키신 그분이 책임지기 때문에 잘 돼요.
고다음에 계속해서 지금 하겠습니다. 이거 뭐 성경을 가르칠라면 얼마나 알아야 되는데 인간들이 눈이 어두워 가지고 이래 놓으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새벽으로 이만치 쫙 이래 나오면, 와 가지고 가르쳐 주면은 여러분들 막 살아서 거석할 건데, ‘히히 그저, 암만 그래도 목사님도 만날 거리면서 기침을 거리고 자꾸 그라고 뭐 그래도 나이 많으니까 뭐 늙어지고 뭐 이라는데’ 예, 그것은 늙어지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늙어지는 것이. 그것이 항상 청청하게 있으면 땅에 있는 소망하지 하늘의 소망을 그렇게 동경하겠습니까? 그래 안 해요.
나는 이 거리는 데 또 하나님의 구원 이루는 묘한 뜻이 있어. 여러분들이 근방에 오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런 구원이 또 내게는 지금 이루어 가고 있어요. 이런데, 어짜든지 배워야 됩니다. 오늘밤에 그저 장막 생활 벗는 것, 벗지 안하고 덧입는 것, 벗지 안하고 덧입는 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은 금방 듣고 딴 데 보다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생각하니까 나오고 나오고, 그러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 세상을 이기는 능력, 세상을 지도하는 지혜, 세상을 이기는 모든 지능이 옆에서 옵니까 위에서 옵니까 아래서 옵니까 어데서 옵니까? 이 지능이 어데서 옵니까? 예? 이 지능이 어데서 오요? 속에서 와. 알겠습니까? 속에서. 생각하고 생각해 보니 여게서 오만 게 다 와.
뭐이 와? 하나님의 지능이 다 오지. 다 와. 만 가지 성공이 다 오지.
‘아따, 그러면 목사님도 그러면 목사님이 하나 장관이나 하지.’ 녜, 장관도 좋지마는 나는 할 자격도 없는지 그거는 모르기는 모르지마는 아마 나는 할 자격 없습니다. 장관도 할 자격 없고 여기 동회장도 할 자격 없어요. 왜? 나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나를 만일 동회 갖다 놓는 날이면 내가 전부 예수 믿는 일만 하게 될 터이니까 그 동이 안 되구로.
그러나, 온 천하를 줘도 이 직분을 바꾸지 않습니다. 정말로 바꾸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공연히 저래 하지?’ 그렇게 여러분들 날 안 믿으면 손해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짜든지 새벽으로 이만큼 나와요. 나와 가지고 여러분들이 배워야 돼요. 배우면 영도 육도 다 행복스러워져요. 어짜든지 새벽기도 다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