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0:42
자기의 존재목적을 알고
본문 :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기독자는 생사화복이 회개를 근거로 합니다. 여기에 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여기에 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둘째 사망의 해 곧 구속을 입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택자에게 일차 세상을 떠나는 죽음, 원죄로 죽는 죽음, 그 다음에는 심판으로 유황불 구렁텅이의 죽음을 둘째 죽음이라도 둘째 사망이라고 하고 기독자들에는 일차 사망의 해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기본적 생명을 얻는 자가 육의 기능의 생사가 자기 생활에 근거되어 있는데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구속입지 못하여 산자로 살 것이 살지 못하고 구속의 기능을 입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말합니다.
또 화와 복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영광을 빼앗기는 것을 화라, 또 의롭게 자연은총을 받아 가질 수 있는 것을 빼앗기는 것을 화라, 복은 이런 것들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돈하면 안됩니다.
또, 거기에 회개는 그리스도인 들에게만 있다 하는 것은 이것도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죄와 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원히 해결 지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놓은 것이 원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해결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기독자에게만 있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고 또 이 기본구원을 가진 자가 기본구원 대로의 생애를 이루는 것이 영생인데 이것도 전지전능의 하나님과 진리의 전적 도우심으로만 영생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에 기독자에게만 있는 회개라는 것입니다.
또, 이 회개의 효력은 금생, 내세, 자체, 활도, 소유, 전부에 미치고 충만해지는 효력입니다. 간단하나 강령을 말 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개한 수많은 변증의 문제, 또 유혹의 갈래길의 문제, 이런 것을 다 논리 할려면 책이 수십권이 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러기에 강령이 하나 바로 되고, 삐뚤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강령이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책 몇 십권이 있어도 거기 뼈대는 한 둘입니다. 그것을 많은 말로 이리 저리 복잡하게 해 놓으면 사람들은 이 강령되는 것과 거기에 하나의 지엽되는 이것을 구별 못해 가지고 분명히 사망이나 생명처럼 유혹받아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부분적으로 알지 아니하고 전체적으로 알도록 전면적으로 알아야 하고, 또, 거기에 체계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일방적 지식은 유혹의 것이오. 사망의 결과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바꾸는 것이라, 방향을 돌아서는 것이라. 옮기는 것이라.
갈아입는 것이라.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단순히 말로는 쉬우나 그 속뜻은 심히 범위가 넓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키우고 좁히고 또 각양의 희로애락의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는 내 자체 위에 내 자체 위에 하나님과 진리와 이웃을 모시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들은 다 나보다 큽니다. 이 위에 있는 셋과 나와 결합되어 움직이는 것을 가르쳐서 일이라 합니다.
이렇게 움직일 때에 이용되는 것들을 가르쳐서 만물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요 또 산물들이요. 또 필수의 것이라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요? 필연적 산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지요? 불가 불리의 것들이라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지요? 나눌 수, 나눠 질 수 없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네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 진리, 이웃, 나, 이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거는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필연적 소산이라는 것은 이 넷이 있으면 반드시 역사가 있고, 역사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건이 나옵니다. 일이 나오요.
어떤 행동을 했든지 행동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필연적 소산이요. 또 필수적 요소라는 것은 여기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들입니다. 이것은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안됩니다. 반드시 사용하게 됩니다. 이 네 가지 중에 세 가지는 나보다 크기 때문에 내가 그를 위하는 그것이 나의 생애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는 그것이 나의 생애요. 나의 천직이요. 또 나의 직책인 것입니다.
내라는 말은 자기라는 말입니다.
또 나는 자기는 그의 것을 받아 가지고 그의 것을 받아 가지고 그의 것으로 자기의 소유를 삼아야 합니다. 그의 것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야 합니다.
또 이 셋을 위한 이 셋을 위한 결과를 맺은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이것이 회개요, 자원은 그 셋의 것으로 나의 자원을 삼고 목적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지는 것이 목적이요 방편은 그를 위하는 것이 방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법칙이요,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다 사망인 것입니다. 평강은 이 네 가지의 지위를 바로 가지는 것이 평강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지위 혼란의 소산이요. 사망은 지위 변동의 결과인 것입니다. 지위는 하나님이 제일 크시고 그 다음에 진리가 크고 그 다음에 이웃이 크고 그 다음이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는 받아 가질 자로 되어있고,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로 자라가고 그들을 위하는 것으로 생의 법칙과 방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 사는 자는 멸망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진리를 배우는 자는 멸망입니다. 인간을 대적하다가 진리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것이 악령의 궤휼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사망은 무엇이뇨? 사망은 자원적인 사망, 목적인 사망, 결과적인 사망이란 말입니다. 결과적인 사망, 또 방편적인 사망이 있습니다. 자원적인 사망은 위의 셋에게서 위의 셋에게서 얻어지지 아니한 것을 자원으로 삼는 것이 사망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위의 세 가지에게 필요 없는 것들이 사망입니다. 방편적 사망은 이 셋을 위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자기 자원으로 자기 필요로 자기 위하는 이것이 자원적, 목적적, 방편적,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자아를 똑똑히 발견해야 됩니다. 이것이 참 자기입니다. 이것이 참 자기요 이제 여게 반하여 있는 사망에 속한 그 자기는 자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원수가 누구뇨?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자는 악령이 원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자들은 모든 책임이 자기의 자유에 결부됐습니다. 그러기에 원수는 자기의 자원이요. 이 말,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지 들어야 모릅니다. 그저 써 놓기만 써놓고 하나님이 언제 가르쳐 줄 때가 있으면 배울는지 모르겠소. 둘째, 셋째, 원수는 자기를 유익되게 자기에게 필요있게 하려는 것이 원수요. 마지막은 자기를 위하는 그게 원수입니다. 그 외에는 원수가 없소.
왜 지방정실을 말하느냐? 왜 혈육정실을 말하느냐? 왜 동류정실을 말하느냐? 왜 지식을 말하느냐? 왜 물질을 말하느냐? 왜 세상을 말하느냐? 이것이 자기의 원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원수로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에게 있어서 보배로운 가장 보배로운 것이지만 자기 없으면 모든 것 없어, 보배로운 것이지마는 자기를 잘못 가지면 자기는 원수 중에 원수입니다.
그러면 그 자기, 저 자기, 자기가 다른 것이 아닌 그 자기라도 자원과 목적과 그 방편이 잘못된 것을 가진 자기는 그 주체라는 자기 그것이 원수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워, 눈이 밝으면 환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육덩이가 하나님보다 큰 자가 많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진리보다 큰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이웃을 자기 위해서 이용물로 사용하는 자 많습니다.
진리를 주는 것보다 혈육을 주면 좋아하고 진리를 주는 것보다 자기를 주면 높이면 좋아합니다. 진리를 위하여 자기가 깨어지기를 싫어합니다. 진리를 인하여 자기가 희생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가 깨어지므로 하나님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거는 용납지 않습니다. 똑똑히 알아서 자기라는 존재는 지름을 받을 때부터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요. 진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이웃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위하는 것으로 자라가는 것이요. 위하는 그 위함이 자기 위함이 되게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에게 필요한 그 필요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하도록 되어 있는 법칙이요. 그의 것으로 자기의 것을 삼는 그것이 미약한 자기의 것은 모든 존재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하나님에게 이용은 당하지만 망령은 부리지 아니합니다. 집집마다 작대기도 이용물 모든 것은 이용물입니다. 그러나 귀하게, 귀한 그릇도 있고 천한 그릇도 있다고 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은 움직여 돌아다니는 자는 언제든지 그깁니다. 이 회개를 완전히 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의 구원은 이루어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되풀이 해봤자 세상이요. 아무리 되풀이 해 봤자 육이요. 아무리 되풀이 해 봤자 항상 죽은 것뿐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여러분들이 이걸 깊이 연구할라 하면 여러 해 걸립니다. 탈선은 되지 않게 탈선은 되지 않게 종목은 말해 놨소. 깊이 깨달아 질려고 하면 사람이 바꾸어지기전에는 안됩니다.
존재의 목적을 바로 찾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생의 목적을 바로 찾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자기를 바로 찾으면 위의 셋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위의 셋에게 받아야 할 가난한 자요 약자요 그에게 영원히 이용을 당하여야만 존재 할 수 있는 위치를 가진 자이요. 유익 없으면 절단납니다.
내집에 필요없는 것은 당장에 청소해서 집어던져 버립니다. 그렇소 유황불 구렁텅이가 하나님에게 필요없고 진리에게 필요없고 그 사람에게 필요없는 그것들을 다 모아서 불태우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입니다.
하나님에게 얻은 자원도 아니고, 진리에게 얻은 자원도 아닌고, 이웃에게 얻은 자원도 아닌 그 자원이 다 불탑니다. 거기에서 얻은 것은 불타지 아니합니다.
셋은 하나이요 또 넷은 하나입니다. 셋은 하나이요 넷은 하나입니다.
셋은 하나라니? 하나님에게 얻은 것이 진리에게 얻은 것이요. 이웃에게 얻은 것이. 그 셋이 하나라야 그것이 하나님에게 얻은 것이요. 인간은 어리석게 하나님에게 얻은 것과 진리에게 얻은 것과 인간에게 얻은 것이 같은 것인데 다른 줄 압니다. 하나님에게 필요있는 그것이 진리에게 필요하고 그것이 이웃에게 필요하고 나에게 필요하면 그것이 바로 된 것이요. 이에게만 필요하고 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에게 필요하고 저에게 필요한 것은 저에게 필요하고 아니요.
단일의 하나님이 단일성으로 창조된 것들입니다. 단일성의 것들이요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 믿소, 어데 올바른 조직 신학이 있소? 어리석소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이 도에는 상관도 못하고 참관도 못하고 얻을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