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0:21
자기를 부인하라
본문 : 빌립보서 2장 1절∼1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들은 말씀을 익혀서 본문을 읽을 때에 본문의 뜻을 우리가 밝히 깨달아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해석 그것은 성경 본문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고 깨닫게 한 해석이기 때문에 그 해석해 놓은 것을 익혀 가지고는 성경 본문에 과연 이런 내용이 있는가, 이 성경 본문이 과연 이것을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게 상고해 가지고 과연 성경이 이와같이 말씀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서 마지막에는 성경 한 권만 들고 다 자기가 생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성경 연경회에서 모두 그 입학을 해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말 들으니까 한 사천여 명이 다 가입을 했단 말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거기에서 답안을 쓰는 것이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성경 전체를 체제적으로 바로 알려는 것이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그 문답을 읽고 묻는 데에 답을 기록할 때에는 성경을 몇 번이든지 읽으면 그 안에 답이 나옵니다. 그렇게 애를 써 가지고 그 답을 기록하도록 그렇게 해야 되지 답만 기록하는 거 뭐 얼마든지 몇 백번 기록해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만일 잘못하면 답을 기록한다고 해서 성경이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답안을 써 놓은 그 답안지를 보고 그대로 베끼는 거야 많이 베끼면 혹 글씨는 좀 늘란가 몰라도 별로 거기에서 효력을 못 가져옵니다.
그 공부한 것을 내놨을 때에 그것을 채점하는 분들이 채점을 매겨서 틀린 것은 줄을 그어, 작대기를 그어서 틀렸다고 표시하고, 점수를 매겨서 주는 그걸 받으면 틀렸다고 하면 누구한테 얼른 물을라고 하지 말고 그걸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다시 조사하고 연구해서 그렇게 공부해야 됩니다. 저도 그 공부할 때에 어떤 문는 쉽지만 어떤 문제는 그 하나를 바로 할 라고 하면 성경 거의 신약이면 신약 성경을 거의 한번 다 읽어야 되고 또 몇 번 읽어야 그 답안이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게 성경 공부입니다.
그래서, 답안을 기록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데 그 답안을 기록해 줄라고 하면 채점하는 그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그 채점하는 직원이 많이 늘어나야 됩니다. 늘어나면 그 용지에 대한 대금이 좀 값이 많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구십 원인데 백 오십 원이라도 채점을 해서 그것을 다 틀린 것은 고쳐서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는데, 모르면 소용 있는가? 알아야 되니까 고쳐 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말을 하고 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고쳐 주면 그것을 또 공부를 해서 익히면 좋습니다. 그러나 고쳐 놓은 거 보면 하나 고치면 그 다음 사람들 주욱 그만 거기 따라서 베껴서 하면 뭐 성경 공부에 참 대마귀가 들어왔습니다. 또, 답안을 게시판에다가 기록해서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걸 공부하고 난 지나간 사람에게는 혹 해 놓으면 그것을 보고 다시 수정해 고칠 수가 있을지라도 함께 나가지 안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공부를 거기에 하지 안한 사람은 그만 그것보고 줄줄 써 버리면 또 공부하는 게 방해이기 때문에 게시판에 답안을 기록하지는 못하고 답안 써 놓은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알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봐서 할 수 있으면 고쳐 주지 안해도 그것을 절수를 기록하는 것을 한번 생각할라고 하고 있습니다. 몇 절부터 몇 절까지에 있다 하는 그것을 혹 틀린 사람에게는 절수만을 기록해 주는 그런 것을 할까 그걸 한 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수를 가르쳐 주면 그 절수를 읽고 읽고 하면 거기에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그것을 다 하고 나면 또 그 공부 해 가지고 외우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공부를 하면 그래도 성경에 대충 어떤 말씀은 있고 없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설교를 들을 때에 저것은 성경대로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하고 있다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과 둘째로는 기도를 하는 것과 세째로는 실행을 하는 거 이 세 가지가 신앙생활에 강령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고 이 둘이 되면 실행이라 하는 것은 저절로 따라서 실행이 되어져 갈 것입니다.
오전에 여게 '그러므로' '그러므로' 말했는데, 이 '그러므로'하는 것은 위에 어떤 이유를 말씀해 놓으시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라는 그런 표시로서 '그러므로'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므로' 하는 것은 그 위에 읽어 보면 세상에는, 그 아이들이 울 때에 여러분들이 기도해요.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데에 분주하면 안 되니까 기도해야 되겠고, 또 그리 되면 내가 은혜 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겠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은혜 받지 못 하니까 기도해야 되겠고, 기도 외에 우리가 딴거 뭐 있습니까? 오전에 보니까 참새가 와 가지고 날라와서 야단지기는데, 그것도 누가 기도했는지 그만 기도하고 나니까 그 참새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소리가 안 나서 고요했었습니다. 뭣이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것을 역부러 일으킵니다. 일으키는 것은 기도하라 하시기 위해서 일으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서 그 모든 걸 정리해 주시기 때문에 고요해집니다.
모두가 다 해결이 됩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이 내 기도 소리 들으시고 웅답해 주셨구나. 점점 믿음이 자꾸 자라가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형용 못할 수많은 복잡한 일들이 자꾸 끊임없이 닥쳐오는 것은 우리에게 기도를 재촉하는 것이요. 또 믿음을 길러 주실라고 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닥쳐도 우리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그것을 잘 구원에 이용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는 위에 보면, 신앙 생활하는 데에는 수많은 애로와 투쟁이 있다, 싸움이 있다, 고난이 있다 그것을 위에 말해 놓고 '그러므로' 했습니다. 왜 애로가 있고 투쟁이 있고 이렇게 고통이 있는가? 세상이 힘도 하나요 사상도 하나요 주장도 하나요 목적도 하나이면 투쟁될 것이 없고 서로 핍박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힘도 수많은 종류, 지식도 수많은 종류, 또 목적도 수많은 목적, 이라기 때문에 목적과 목적이 싸우고 지식과 지식이 싸우고 사상과 사상이 싸우고 주의와 주의가 싸우고 행동과 행동이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이 이와 같이 되어 있는데,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세상을 본받아서 모두 다 자기 것을 좋다고 선전을 하고 자기 것을 세울라고 애를 쓰므로 자기를 따르는 사람은 좋아하고. 또 자기를 찬성하고 같이 동류가 되는 사람은 좋아하고, 자기와 대립이 되면 이렇게 싸워서 그것을 정복해서 자기에게로 다 귀속을 시킬라고 하는 이런 것이 세상 전쟁이요, 고통이요, 서로 충돌이요, 고난스러운 일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자들도 이와같이 이 장로는 모든 교인을 자기를 딿은 교인들이 되도록 할라고 애를 쓰고, 또 저 목사는 모든 교인들과 교역자들 이 자기를 딿도록 할라고 애를 쓰고, 이렇게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그 힘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전부 각자들이 다 자기를 중심해서 날뛰는 이 파를 열 파, 백 파, 천 파, 또 당을 열 당, 백 당, 천 당. 왕을 백, 뭐 천, 만 이렇게 왕을 세워 가지고 날뛰는 그런 세상에 속한 생활로 하다가 멸망을 받을 것인가? 그거는 다 멸망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 버리고. 열 명이 한 자리 있으면 열 명이 열 명 가운데에 네가 왕이 될래? 네가 왕이 될래? 그러면 둘이 서로 열 명이 싸울까? 그 가운데에 한 명을 왕으로 삼아 가지고 그를 않는 그런 길을 갈까? 그거 다 멸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백 명이든지 천 명이든지 모두가 다 자기의 사상과 주의와 목적과 방편을 다 버리라. 네가 세상에서 성자라 소리를 들어도 네 것을 버리라. 네가 왕이라도 네 것을 버리라. 네가 어떤 대학자라도 네 것을 버리 라. 네가 어떤 재벌가와 어떤 업주라도 네가 네 것을 버리라. 너도 나도 전부 인간의 생각 다 버리고 예수님 한 분의 생각으로 다 귀속하자. 또 네 소원 내 소원 다 버리고 예수님 한 분의 소원으로 다 귀속해서 통일하자. 목적도 그러해서 그 본질과 본성이 하나로 이와같이 돌아가자. 그러면 누구에게로 누구의 것은 희생시키고 누구의 것을 세워서 그 에게로 다 돌아갈까? 너도 나도 인간은 다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다 버리고 오직 자존하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한 분의 사상으로 다 돌아가서 한 분의 본성으로 돌아가고 한 분의 본질로 돌아가고 한 분의 그 모든 목적으로 돌아가서 그 한 분에게 속하여서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늘나라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 그 다음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한 마음을 품으라. 처음에는 복수를 말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도 복수고, 또 뜻을 합하여 하는데도 복수고, '한 마음을 품으라' 요게는 단수가 됐습니다. 위에 복수로 말한 것은 무엇을 말했다는 것을 오전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거는 개체의 개인이 있으나 개체가 있고 개개인의 그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있지만 수많은 개개인이 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본받아서 그렇게 하나로 소속해 가자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고, 그 다음에는, 그러면 이래 가지고 살 때는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은 전부 이 다 방편적으로 누구를 위하는 듯이 하지만 죽기까지 충성하는 그 충신이라 할지라도 분석해 보면 그 충신이 저 위해 충성하고, 모든 열녀가 다 자기 위해서 열녀하고, 충성된 종도 자기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근본이 다 자기라.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와 가지고 자기를 위하는 방편을 여러 가지를 쓰지만 그 전부는 다 자기 위주라 그런 것이나 그것 때문에 다 사망이 되어 있는 것이니까, 없는 가운데서 창조주, 자존자. 주권자, 완전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분이 계시니까 그 전부는 다 한 분이신 그분을 중심하고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이 되면 모든 것이 다 그분을 위해서 사니 그분은 완전자기 때문에 완전을 위하니까 위하는 것도 다 완전이고, 또 완전을 중심하니까 그 위하는 것도 다 완전이 되어지는 것이고, 그래 가지고 그분을 위해서. 인간에 대해서도 인간 자체를 위하지 말고. 민족을 위해도 민족 자체를 위하지 말고, 국가를 위해도 국가 자체를 위하지 말고, 아무 것도 피조물 그 자체를 위하지 말고 오직 자존주, 창조자, 대주재 주권자 그 분 한 분을 위하는데, 그 분을 위해서 사람을 위하고 그분을 위해서 국가 둘 위하고 그분을 위해서 가정을 위하고 그분을 위해서 남편을 위하고 그 분을 위해서 아내를 위하고, 전부 그분을 위해서 그분 위함이 되는, 그분이 기뻐할 수 있는. 그분의 법에 맞은 그분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하는 피조물끼리는 그것이 내게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위한 것이면 그게 내가 그것을 위할 때에, 또 그게 나를 위해 주면 좋지만 내가 그거 위하다가 그것이 내게 반대하면 위하는 것이 중단되지만 나는 한 분이신 주님을 위해서 그걸 위하기 때문에 그것이야 내게 어떻게 했든지 내가 주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어떻게 변한다 할지라도 내 가 그를 위하는 것은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요렇게 해서 하늘나라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그 본질과 본성을 가지고 또 자기의 본질과 본성을 삼아서, 살고, 하나님의 속성하나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속성을 삼아서 살고, 또 하나님의 그 역사하시는 그 생명 하나를 가지고, 한 생명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다 살고, 하나님의 한 지혜 가지고 모든 사람이 살고, 한 능력 가지고 모든 사람이 사니, 비유컨대는 한 몸에 수많은 지체가 있지만 그 지체는 다 한 생명 가지고 그 사람의 한 생명 가지고 수많은 지체가 살고 있고, 또 그 사람의 한 지혜 가지고 수많은 모든 세포들이 살고 있고 능력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사람 한 사람에게 세포는 수많고 지체는 수많지만 생명도 하나요.
지혜도 하나요, 능력도 하나요, 희로애락도 하나라. 이러기 때문에 발꿈치가 근심하는 거 머리도 근심하고, 또 어리카락도 근심합니다. 발꿈치가 근심하면 사람들이 벌로 봐 몰라 그렇지 발꿈치가 근심하면 머리 끝이 주삣하게 고만 머리끝까지 다 표가 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한 희로애락을 가지고 전신이 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시요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그 모든 속성 가지고 하늘나라에 살게 되기 때문에 땅 위에 있는 동안에 네 속성을 다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 한 분의 속성으로 네 속성을 삼아라. 이래서 하늘나라 갔을 때에 하나님의 그 속성으로 자기 속성을 삼아서 하나님의 속성 화된 것, 하나님의 본질화된 것, 본성화된 것, 또 하나님의 지능화돼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다 모든 것이 원형이요 원형이요, 사람은 그 원형은 아니지만 원형과 꼭 같은 모형이라.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늘나라는 전부가 하나이기 때문에 어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사망의 이 마귀가 꼬아서 멸망케 하는 것인데, 자기 주장하고 자기 위주하고 자기 중심하는 그런 걸 어서 속히 버려라. 그거는 다 사망하는 것이다. 그런 거 다 버리고 하나님 한 분의 것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한 분의 것으로서 내것을 삼아서 그렇게 사는 이 개조하는 것을 어서 정리하고 정돈하라.
이래서 하나님의 것을 새로 받아 가지고 내 새것으로 점점 많게 하고. 또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은 하나님과 정반대 돼 있기 때문에 반대되어 있는 이놈을 죽여서 하나님과 꼭 같은 동질 동성이 되도록 이렇게 변화를 시키는 이것이 죽은 것이 살아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 가지고 하늘나라 가기 전에 어서 준비해서 전부 하나라는 한 성품뿐입니다. 한 뜻뿐입니다. 한 지식뿐입니다. 한 지혜뿐입니다. 한 능력뿐입니다. 희로애락도 하나뿐입니다. 어떤 일이 하나라도 한 사건이 났으면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하느냐 할 때에 억만 명이 와서 판단해도 꼭 같은 판단입니다. 한 판단입니다. 또, 여게 대해서 이걸 어떻게 평가하는 이 가치가 얼마나 되느냐? 한 열 명이 오면 열 명 평가가 각각 다른 게 아니라 억억억억만 명이 다 와도 그 평가가 꼭 같은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영생이요 하늘나라의 그 본질과 본성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 위에서 자기를 나타낼라고, 지기를 위주할라고, 자기를 왕으로 삼을라고 자기를 주인으로 삼아서 자기에게 모든 것을 속하게 할라고 하는 그것은 전부가 다 자멸 행위입니다. 자멸 행위. 이것을 말아야 합니다.
탄식되는 것은. 요새 그 어느 교파에서도 그 교파가 자기 교파를 세우기 위해서 다른 교파를 욕질을 하고. 또 거짓말로 이렇게 모략 중상을 하고, 이렇게 자기 교파를 세워서 자기 교파로 돌아오면 그만 그날에도 좋다고 이렇게 환영을 하고, 자기 교파와 교파가 다르면 그만 헐뜯고 욕하고 하는 그것이 전부이 자멸하는 행위요 그것이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죽었다는 증거.
그런고로, 하늘나라는 하나이라. 그러기 때문에 말도 서로 거기에는 다른 말이 없기 때문에 시비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늘나라는 말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소리 들었어 말이 없습니다. 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이라 하는 것은 이건 저 사람은, 갑이라 이 사람은 을이라 이래 시비를 하지만 아. 모든 견해가 꼭 같은데 말할 게 뭐 있소? 뭐 하나 여기 떡 있으면 아는 사람은 말이지요. 이라면 모르는 사람은 와 가지고 '야, 그거 똑 배같이 생겼다. 그거 똑 감같이 생겼다. 그거 똑 주먹같이 생겼다,' 자꾸 이라지만 아는 사람은 이 사람도 보고 다 보고 말할 필요가 없어. 물을 필요도 없고. 아, 종이라. 종으로 아는 사람은 볼 때에 다 견해가 다 같고 평가가 같으니까 말할 필요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고 다 보면 다 알아, 피차가 다. 이래 가지고 이것으로써 하늘나라의 것과 땅의 것이 우주와 영계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으로 통일이 됩니다.
이래 통일된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우리들이 가서 살 것이요, 그 나라에 가 가지고 하나님 한 분 위에 모든 피조물과 그 사이에 있는 것이 교회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제일 많이 닮았고 하나님과 제일 같고 그 다음에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통치하고 이와 같이 양육해 나가는 것이 교회인데. 여게서 뭐 김가는 김가 제대로, 이가는 이가 제대로, 또 박가는 박가 그대로, 나는 지방 정실로 우리는 호남 사람이라, 우리는 경남 사람이라 우리는 강원도 사람이라, 우리는 평북 사람이라, 우리는 충청도 사람이라. 이렇게 각각 종류의 그 썩은 거 더러운 거 그런 거 가지고 하늘 나라에 가겠습니까? 그거는 순전히 마귀 운둥이요 복음 운동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제가 한 삼십 년 전에 서울 어떤 교회 가서 집회 인도를 하니까 거기에 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전부이 순천 사람들입디다. 거기에는 전부 보니까 전부 장로도 순천 사람, 뭐 집사도 순천 사람, 그런데 목사는 순천 사람이 아니고 이북 사람 그 ○○○목사님의 동생이 그때 거기에서 목사로 시무하고 있습디다. 내가 그때 설교할 때 '여게는 위험한 것이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지방 정실 운동을 기독교 복음 운동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것이 하늘나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뭐 그런 거나 뭐 이거 천 년 성이나 별 다른 게 없기 때문에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는 그것을 조금 몇 시간 들어서 말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그 속성. 그 한분의 신성 고 신성을 닮은 우리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성의 모형인 인격성, 그러기에 예수님은 신성도 가졌고 예수님은 인격성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격성과 꼭 같아서 신성과 그렇게 조화가 딱 들어맞고 서로 이질적인 점이 없고 충돌이 없고 서로 배치되는 일이 없이 그렇게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양성 일위의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이렇게 여기서는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이 각각 다르지만 거기에서는 열 사람이 다 소용이 없고 예수님 한 분의 것으로써 자기 것 삼은 것만치만 가서 살게 되기 때문에 전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 한 분의 그 신성을 따라, 속성을 따라, 그 인격성을 따라, 그의 지식을 따라, 그의 목적을 따라. 그의 소원을 따라, 그의 방편을 따라, 이래서 희로애락이 그분과 같아서, 희로애락이 그 분과 같은데. 그분과 같은데 그분과 같은 희로애락을 나도 가지고 있느냐? 그분의 희로애락이 그것이 피동되어서 거기에 피동되어서 나의 희로애락이 되어지는 이것이 우리의 희로애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입기를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힘을 써야 됩니다. 그걸 닮지 안하고, 뭐 보면 말해 보면 요게서도 자기를 나타내고 저게서도 자기를 나타내고 그래 가지고 자기를 나타내서 모두 잘났든지 못났든지 자기 나타내 가지고 자기 말 한 마디라도 해서 자기 말을 따라오면 좋아서 이래 하고 또 자기 말 나타낼라고 뭐 핏대를 올려 가면서 뭐 역설을 하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다 모두 미친 놀음이요, 다 미친 놀음이요, 정신 없는 놀음인 것입니다. 하거나 말거나 이제 주님 완전히 변치 않는 분 주님 한 분 계시니까 그 분 한 분을 따라서 어서 어서 변화되고 변화되어 가지고 나아갈 것뿐인 것입니다.
그것을 오전에 말씀을 했고. 또 말씀하나 한 것은 하늘나라는 자기를 위하는 그런 것은 다 지옥에 가는 것이지 하늘나라는 가지 못한다. 자기를 위하지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모두는 다 하나님 한 분을 위하는 전부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 한 분을 위하면 하나님한 분을 위하니까 하나님께서 저거 위하라고 하면 저거 위하고, 저거 위하라고 하면 저거 위하고, 하나님 한 분을 위함으로 그분이 위하라고 하는 것만 위하기 때문에 그 분 한 분을 위하고, 그 분 때문에 위하고, 그 분 시키는 대로 위하고, 그 분 위하는 것을 그가 위하고, 이라니까 위하는 것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자기를 위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자기 위함이 되고.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위함이 되는 이웃 위하는 것, 원수를 위하면 원수 위하는 것, 원수 위한 그것이 원수를 위했는데 주를 위함으로 원수를 위했는데 나중에 위하고 나서 보니까 얼마 지나고 난 다음에 보니까 그것이 뭐이 돼 버렸느냐 하면, 주님 위하고 주님 위하기 위해서 주님이 위하라고 하는 원수를 위했는데 원수 위한 게 보니까 나중에 순전히 자기 위한 것으로 되어지는 그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이요 오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제일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 위할라고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는 벌거벗은 사람이요.
아무것도 자기 위함이 없는 그런 거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주님 한 분을 위할라고 하니까 그 분 한 분을 위할라고 하니까 그 분이 오늘은 요거 위하라 하면 그거 위하는 것이 주님 위하는 것이요, 저거 위하는 것이 주님 위하는 것이니까 주님 한 분을 위함으로 모든 위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원수도 위하게 되고 타인도 위하게 되고 대적도 위하게 되고 했는데, 위하는 그것을 주님이 하라 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기 위해서 그 대적과 원수를 위했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까 대적과 원수를 위한 그것이 순전히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되어 있는 이것이 하늘나라의 자유의 법이요, 완전 법이요, 불변의 법이요, 영생하는 생명의 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자기밖에는 위하지 못하는 자 자기 위하는 자, 자기 위하는 자의 그 결과는 뭐이냐? 자기를 위한다고 했는데 그거는 자기를 멸망을 시켰고 자기 위하는 것은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고 주님을 위함으로 모든 이웃을 위한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위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자기를 많이 위하는 자, 하 늘나라에서 제일 자기를 많이 위하는 자, 자기를 많이 위하는 자가 어떤 자가 자기를 많이 위하는 자인가? 주님을 많이 위하는 자, 주님을 많이 위하는 자가 누군가? 주님을 많이 위하는 자는 주님이 위하라 하는 모든 원수까지 모든 만인간을 위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많이 위하는 것이니, 원수까지 모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그것이 나중에 보니까 전부 자기 위함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인 것을 우리가 깨닫고 이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굽니까? 접촉해 보면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을 모르는 그 사람이 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말 한 마디라도 자기 위해서 하고 노력 하나도 자기 위해서 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은 모든 걸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감옥 속에 들어서 아주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오. 자기밖에는 위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위할 줄 모르는 사람. 모든 사람을 위할 줄 안다 할지라도 제일 크신 분을 위하지 못하니까 그것도 멸망 가운데 있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제일 크신 분을 위하고 크신 분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은 크신 분을 위하고 보니까 그 분 위하는 게 뭐이냐? 모든 이웃을 위하는 게 그분 위하는 것으로 그분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것이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이요. 자기 위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그말은 나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했는데, 사도 바울이 자기 기쁨을 충만케 하라 하는 말했는데. 사도 바울이 사람 보기에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경을 기록했지만 실상은 빌립보 성경을 기록한 것은 성령님이 기록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말은 사람 보기에는 사도 바울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하는 말이오. 고 속에 실상은 성령님의 기쁨이 충만케 하라는 말씀이요, 곧 자존하신 하나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서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가 기쁘시게 할 것도 알 수가 있고, 어떻게 자기를 위할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이웃을 위하는 것도 어떻게 알 수가 있고.
자기는 어떤 그 인간성을 가지며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가질 것인가? 자기는 어떤 그 모든 속성들을 가져야 할 것인가? 그것을 여게서 간단하게 똑똑히 알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5절에 말씀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제 이 마음을 우리에게 품으라 하는 것은 우리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가지라 말씀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가지라 말은. 이 마음을 가지라 말은 이 마음을 가지고 이 생활을 해라 그 말입니다. 이 행동을 하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이 무슨 싸움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너희들이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마음 가지고 이 행동해서 지극히 존귀하여 모든 피조물 위에 탁월한, 아버지 우편에 앉게 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존재들이 다 살아나게 됐고,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원수까지도 다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도 이 마음을 품으라.
너희들도 제 이 예수가 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너희들도 제 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열매요 너희들은 거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 열매가 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가질 수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동을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앞에서 존귀함을 받는 거와 같이 너희들도 존귀함을 받게 됐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은 거와 같이 너희들도 이 일을 성공하면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았으니까 우리는 예수님 우편에 앉는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우리가 그 마음을 품어 봤자 품지 못할 것을 품으라 하는 거는 아니고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할 수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대함을 받는 거와 같은 이런 받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절수를 보고 아주 뭐 기뻐서 며칠 동안을 기뻐서 혼자 뛰고 굴리고 기뻐서 참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뭐 할라고?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을 우리가 품을 수 있는데, 예수의 마음 품으면 뭐 할라고? 예수의 마음 품으면 예수의 행동할 수 있다. 예수의 행동해서 뭐 할라고? 예수의 행동하면 아버지가 지극히 높인 거와같이 너희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지극히 높여 주심을, 받아서, 높여 주심을 받으면, 세상 권세와 같이 높아지면 모든 사람이 시기해서 다 대적합니다. 세상은 높을수록 이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다 놔 죽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뭐 이 세상에 높은 사람 쳐 놓고는 소리 없는 총으로 싸 죽일라 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거는 세상적으로 그런 높임이 아니기 때문에 높은 거는 이것은 평가적으로 높으기 때문에 요만치 높으면 모든 사람이 요만치 존대하고 요만치 높으면 요만치 존대하고, 모든 사람이 존대하고 환영하고 만물들이 다 존대하고 환영하는 요 평가적인 존귀, 평가적인 존귀, 모든 존재들이 그 본능적으로 이렇게 존대할 수 있는 요 평가적의 존귀히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어떤 마음인가? 어떤 마음이며 어떤 사상이며 어떤 주의인가? 어떤 행동을 나타낸 마음인가? 하는 것을 고 다음에 나타냈습니다.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본체라 말은, 하나님은 본체는 하나십니다. 위는 서이지만 본체는 하나님이라. 한 분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막바로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성부와 동등 될 것을 취할 것으로 생각지 안하고. 동등될라고 하지 안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라 하나님과 동등이지만 동등될 생각을 가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그 자기를 비어' 자기를 양보했다 말입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오히려 하나님의 종의 형체같다. 그 종이 됐다 말이오. '종의 형체를 가져' 그러면, 예수의 마음을 품는데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리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과 우리와 동등이라는 이거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동등될 걸로 여기지 말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본체지만 둥등될 걸로 여기지 안했는데, 우리는 피조물인데 동등 될 걸로 여기면 안 된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내 의견은 어떤가? 뭣이든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거기에서 맞서 가지고 마주 서 가지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만 내 의견은 이렇다, 내 주장은 이렇다, 내 욕심은 이렇다, 내 사상은 이렇다. 내 목적은 이렇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대해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자기와 하나님과 오히려 동등으로 삼을 게 아니라 하나님보다 위에 가 가지고 하나님을 제게 복종시킬라고 하지 제가 하나님에게 복종할라고 하지 안하고 하는 그것이 완전히 멸망받을 행위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안하시고 자기를 완전히 비워서 아, 나는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그런 자가 됐지 동등되게 여기지 안 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과 나와 맞설라고 하나님과 나와 비교할라고, 하나님이냐 내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느냐 내 뜻을 행하느냐? 하나님의 소원대로 하느냐 내 소원대로 하느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재가 제라는 존재를 가지고 어짜든지 뭣을, 자기 주장을 해 볼라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 앞에 무조건 븍종하는 자로 무조건 낮아져서 그렇게 자기를 완전히 비어 자기를 완전히 양보하라.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라.
뭐 하나님이 성경 말씀에 이렇다고 하면 그 말씀대로 할라고 하면 목이 달아나는 뭐 생명이 끊어지는 일이 있어도 '내가 생명이 끊어지는 일인데 주님의 말씀대로 행할라고 하면 생명이 끊어지는데, 그런 데는 좀 생각해 봐야 되지, 내가 죽어도 해야 되나 안해야 되나? 죽어도 해야 되나 안 되나 내가 목숨 문제기 때문에 어찌 되나?' 이렇게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래도 자기를 좀 내세우는 것이고 자기를 좀 세워서 자기를 좀 주장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시지만 동등될 거로 여기지를 안했다.
그러면 네가 언제 하나님 앞에서 뭐 이렇고 저렇고 너를 나타내는 너를 세울라는 그런 행동을 전혀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을 그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가라 하면 가고, 말라 하면 말고, 하나님이 가장 천하게 되라 하면 천하게 되고 할 일이지 안할라 해 봤자 그대로 됩니다. 공연히 우리가 죄만 짓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이 구원 이루는 데에는 동등으로 여기지 안하고 자기를 비워서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졌는데 너희들이 하나님 대할 때에 이 동등으로 생각지 말고, 하나님과 너희와 거리는 천 리 만 리 하늘과 땅과 같이 높으기 때문에 아예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고 저렇고 이의가 없고, 거기에 대해서 뭐 이러니 저러니 너를 털끝만치라도 내세우지 말고 완전히 너를 부인하고 그분에게 복종하라 그말인 것입니다.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말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느냐?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하면 예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분인데 당신이 만드신 사람같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뭐 같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만든 거와 같이 된 거 아닙니까? 우리가 뭣 만드요? 우리가 뭐 만드는 게 뭐 있습니까? 우리는 요런 풀 포기 하나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거 가지고 요거 조거 주 떼 가지고 뭐 그림도 만들고 뭐 또 연장도 만들고 그런 거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이런 거 저런 거 하나 가지고 뭐 물건이든지 뭐 도구든지 그런 거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만든 도구를, 내가 만든 도구를 내가 그것을 불에 태운다고 그게 이유를 합니까? 똥구덩이 집어넣는다고 이유를 합니까. 몇 십 년 쓰지 안하고 썩혀 버린다고 이유를 합니까? 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돼야 된다 그 말이오. 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돼야 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같이 됐다, 그러면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서 네가 만든 네 조작물과 같은 그런 것이 되기까지 너는 하나님 앞에서 너를 부인하고 낮아져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출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를 낮추지 못하면 볼 일 다 봤습니다. 헛일이요. 어디서든지 뭐 여게 대해서는 내게 어떤고, 네게 어떻다니? 네게 어떻다고 너를 어디 생각하노? 이라면 내가 죽는데, 죽고 사는 것이 네게 뭐 그런 건 지금 문제시하느냐? 문제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하나님 본체시지만 하나님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으심이 그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한 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우리를 대행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복종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칭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우리 대신 죽으시는 그 형벌올, 죽음의 형벌을 받으셨지만 이의 없이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형의 사죄가 된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그러면 이러므로는 뭐입니까? 이러므로는 뭐입니까?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 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을 가지고 사람의 모양같이 되어 가지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이러므로' 이렇게 했으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고 하나님 한 분으로 전부를 삼아 가지고 그로 동하고 정하고 그를 위하여 그에게 피동되는 거, 죽는 것이나 뭣 이나 어디든지 어떤 것이라도 이유하지 안하고 그저 죽기까지 복종해서 순전히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 양보하고 하나님에게 동하고 정하고 그분에게 완전히 소속이 되어지니까 이제 이러므로 지극히 높여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이렇게 돼야 천국 될 거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는 둘이 없습니다. 둘이 없고 단일인 하나에 전부가 복종돼 가지고 그이로 말미암아 동하고 정하고, 이러기 때문에 전부 단일성이라.
전부 통일이라. 이러기 때문에 거기는 다른 의사가 없어. 다른 주장이 없어. 서로 저 사람 대해 삐쭉하고 삐꾸는 그런 게 없어. 이 세상에 더럽고 썩어지는 그런 사상이 없다 그 말이오 요새도 보면 뭐 칠 년이면 칠 년 동안, 오 년이면, 오 년 동안 대통령 내 놨으면, 그만 그 사람 정치 만들어 놨으면 그 정치가 자기가 정견대로 한 번 자신있게 소신대로 한번 하도록 그만 냅두고, 해도 뭐 그까짓 거 그거 가지고 다 갑니까? 어디 뭐 칠 년 가지고 다 돼 버립니까? 칠 년 지나고 난 다음에 안 됐으면 안 됐다고 때려 주기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이런데, 아, 칠 년 동안 또 소신대로 하도록 냅둬야 됴 건데 공연히 방해를 해 가지고 무슨 트집을 잡아야 그게 가치가 있는 줄 알고, 그 야당은 트집이나 잡고 자꾸 뭐 자꾸 이렇게 간섭을 해서 옳은 일 하는 것도 다 하지못하고, 자꾸 이와 같이 야단을 지기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보니까, 이렇게 모두 다 외국에 부채가 많으니까 이 부채가 많으니 이거 어떻게 할란가 그렇게 한다는 말은 내가 직접은 못 들었고 그렇게 한다는 말 들었는데 뭐라고 하더노?' 그래 하니까 그 말을 대답을 뭐 못 했대요. 듣는 사람이 잘 못 들었는가, 저는 몇십 년 전부터 말했습니다. 아 차관 줄라거든 차관해라. 차관해 가지고 그거 가지고 뭐 떡을 사먹으면 그 많은 차관해 가지고 떡 다 사먹겠나? 안 빌려 줄라 해 그렇지 빌려 줄라면 자꾸 빌려라. 빛이 사람 살릴 수도 있습니다. 빚을 엉뚱하게 어리석은 것이 이 빚도 내고 저 빚도 내고 이래 가지고 그렇지 빚만 많이 지면 빚 그게 살림살이요. 빚 그것 때문에 그거 죽이지도 못하고 못 합니다. 그저 차관해서, 부자나라 미국 나라의 돈, 뭐 소련의 돈. 일본의 돈 그 돈을 다 빌려 가지고 우리나라의 땅덩어리든지 산이든지 집이든지 심지어 골목 하나라도 물건 하나라도 만들어서 금방석을 만들어서 세계에 제일 살기 좋도록만 떡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거기 뭐 사는데 우리 밀어내고 살겠습니까? 우리가 또 우리 우리 땅인데, 역사에 봐도 그거는 아무 한국 땅이면 한국 땅이지 뭐 딴 거 없다 말이오. 그러면 그래 놓으면 우리는 평안히 살기도 할 것이고, 또 빚 못 물면 이거 차지해라. 차지하면 우리 어떠노? 차지하면 그 주권이야 정권이야 누가 가졌든지 우리 거기 잘 먹고 잘 입고 평안하게 살면 됐지 뭐 간보 적게 그런 소리하고 있어. 그거 전부 티 뜯는 소리야. ○정권 때도 뭐 바다를 팔아먹었느니, 뭐 팔아먹었느니 어짜고 쌓는데 그거 다 쪼부라운 생각이오. 뒤에 잘못 됐으면 얼마 안가 나타날 거 아닙니까? 그래 가지고 공연히 학생들을 충동시켜 가지고 데모를 해서 자꾸 어지럽게 만들고, 이라며 거석해.
그래 언제. 언제 한 몇 해 됐어요. ○○대학에 내가 친척인 아이가 있는데 '너거 뭣 때문에 데모하노?' 그때는 데모가 얼마나 심했던지, 데모가 얼마나 심했던지 세상에 제일 지성 있는 학생이오. 모든 것을 정당한 판단하는 것은 학생이오.
학생이 제일이라 해 학생이 뭘 압니까? 여기 학생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뭐 아는지? 인간이 오십이 돼야 비로소 분별할 수가 있다 하는 것인데 스물 두어 살 먹은 게 혈기 방종으로 뭐 하나라도 옳게 분별한다고 그 학생이 지성인이고 학생이 제일이 돼가지고 있어. 그래 가지고 이라면 나라 망한다. 얼마 동안 망하지 안했습니까? 저 안 돼요. 그러면 다른 사람 하면 얼마든지 그대로 하는대로 하도록 하고. 아주 틀린 거나 말하고 자기가 정치에 야욕을 가지고 분요하는 거는 틀렸어. 참으로 틀린 거 있으면 틀렸다고 할 수 있지요. 나쁜 거 있으면 나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여게서는 하나도 복종 안 해요. 그런 나라. 하늘나라가 그 나라 아닙니다. 죽기까지 복종했어. 악에게 복종하면 틀렸지만 옳은 데 복종하면 좋지 않습니까? 완전자에게 복종하는 요 하나로 통일되고 단일 되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 세상만 보고 사는 게 아니라 영원 무궁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들인데, 영원 무궁을 마련하는 게 우리들인데,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권세나 지위나 위하는 그 방법이 뭐이냐? 자기를 위하는 것을 하면 그것은 자존자 대주재를 위하지 안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니까 자기가 완전자가 됐으면 좋지만 완전자 아닌 것을 위하니까 그거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위하는 거는 어떤 것이 자기 위하는 것이냐? 완전자를 위하고 완전자에게 속해서 완전자에게 피동되어서 그분이 동하면 내가 동하고 그분이 정하면 내가 정하고 그 분으로 인하여서 움직이는 요 일을 잘 만들어야 됩니다. 요 일을 잘 만들면 하늘나라의 권세가 되고 하늘나라의 지위가 됩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에게 잘 피동되는 자 하나님 한 분이 자존하고 계시고 그 다음의 제 이 권위자가 누구며 제 이 권위자가 누구며 제 이 환영자가 누구며 제 이 시은자가 누구냐? 이것은 누구겠습니까? 제 이 시은자가 누구며 제 이 환영자가 누구며 제 이 권위자가 누구며 제 이 성결한 자가 누구며 제 이 온전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그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제일 제일 피동되는 그 자가 그 자입니다. 하나님에게 제일 피동되는 자가 그 자가 그 자요 하나님 제일 닮은 자가 그 자가 그자요 하나님과 제일 많이 같은 자가 그 자가 그 자입니다. 제일 많이 같은 자, 제일 그분으로 더불어 정확한 동하고 정하기를 제일로 동하고 정하기를 하나님과 꼭 같이 하는 그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자가 하나님 다음으로 둘째로 높을 자이니까? 그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목사님 몰라요? 알면 뻐뜩 들어야지, 그래야 다른 사람 들지. 몰라요? 다 모르는데 여기 좀 아는데 누구요? 예수님. 백 점이라 예수님이야. 예수님이 그 분이 자기 뭐 위신 올리려고 어짜든지 준비하고 야심 꿈꾸고 이와 같이 안 했어.
하나님 한 분으로 전부를 삼고 보니까 하나님 다음에 존귀한 자 됐고, 우리 하늘나라의 지위와 권세가 다 그런 것입니다. 다 그대로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많이 닮은 자. 예수님으로 많이 동하고 정한 자, 정확하게 동하고 정하는 자 이것이 하늘나라의 지위요 권세입니다. 하늘나라의 지위와 권세는 악의 지위와 권세가 아니오. 하늘나라의 지위와 권세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많이 끼치고, 모든 사람들에게 많이 유익이 되고, 모든 사람을 많이 복되게 하고, 모든 존재를 좋게 해서 모든 존재가 그거 아니면 살 수 없는 모든 존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요, 제이 필요한 것이 예수님이요, 제 삼으로 필요한 것이 잘 믿는 성도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러니까 거기에서 환영이 높은 것입니다. 뭐 세상 거 모양으로 그런 것으로 높아지는 것인 줄 압니까? '이러므로' 9절에, 이것이 우리도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받아요.
'이러므로' 우리가 이러므로만 되면, 우리도 이러므로만 되면, 위에 5절로부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같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거 했어. 이거하고 나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높였어. 우리도 이거 하면 이렇게 높아져요.
그러면, 5절에, 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안한 거, 또 오히려 자기를 비운 거,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된 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한 거, 요 일곱 가지 요거하고 나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제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영계와 물질계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 이거는 음부 가운데 있는 자들,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 운동에 다 복종해 가지고 무릎을 곯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 강제 굴복이 아닙니다. 강제 굴복 아니요. 그 다음에 11절에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아, 저 분밖에는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다.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사는 방편이 이는 완전한 방편이오 이는 참으로 생명 된 방편이요. 이 세상에는 모두 다 사망의 방편인 걸 환하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둘이 싸우면 물고 뜯으면 서로 망하지 뭐 딴게 뭐 있겠습니까, 있기를? 그 둘이 있으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지 둘이 있으면 어떻게 안 싸울 수 있습니까? 하나가 권리가 있어야지, 부부도 둘이 똑 세력이 같으면 언제든지 그 부부는 싸웁니다. 뭐이 하나 남편이 머리가 되든지 아내가 머리가 되든지 뭐 돼져야 되지.
그러니까, 우리는 요 말씀에서 단단히 깨닫고 각오를 가집시다. 이 세상과 같이 천이면 천이 다 뒤죽박죽해 가지고 서로 싸워 가지고 제 잘난 척 하며 제올라갈라 이라다가 망하는 거와 같은 그런 사망의 방편을 취하지 말고 우리는 내것도 다 집어 던져, 썩은 거니까. 내 것도 집어 던지고 네 것도 집어 던지고 뭐 장로 것도 집어 던지고 목사 것도 집어던지고 다 집어 던지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완전한 이것을 가지고 너도 예수의 마음 나도 예수의 마음, 너도 예수의 뜻 나도 예수의 뜻, 너도 예수님의 사랑 나도 예수님의 사랑, 너도 예수님의 지혜 나도 예수님의 지혜 다 예수님의 한 분의 것을 가지고 요와 같이 한 몸같이 요와 같이 되어지고, 저는 저만 위하는 연구하지 말고, 전부가 다 하나님 위하고 하나님 한 분만 위하니까 하나님을 위하니까, 하나님 그 분을 위하니까 그 분이 있다가서 이거 위해라 저거 위해라 시키는 대로 그 분을 위해서 그 분 시키는 대로 위하고 보니까. 그 분 시키는 대로 위하고 보니까 그 상대방 그까짓 게 뭐 악을 발하든지 뭐 무슨 행위를 이래 하든지 그거 위하는 것 같으면 '에히 안됐다.
치워 버려라.' 이렇지만 주님 위해 하기 때문에. 네 보고 하는 거 아니라 주님 위해하기 때문에 저야 뛰든지 굴리든지 악을 행하든지 거기 갋을 것이 없어. 주님 한 분 위하기 때문에. 그가 내가 그를 위하는. 것을 몰라주든지. 알아주든지 감사하든지 말든지 나는 주님보고 하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이리 저리 변하지 안 해.
그러니까, 주님보고 사랑하는 부부는 절대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파괴가 안 됩니다. 다만 건설 운동에서 이렇게 저렇게 건설적인 모든 이런 거 파괴 건설 이런 건 돼 나가지만 절대 거기에서 영원한 파괴는 없는 것입니다. 현재도 그런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수고하는 수고는 결단코 낙심되지 안하고 끊쳐지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지 않고는 상대방이 암만 좋아도 인간이 변하기 때문에 변해질 수 있고, 또 무슨 영리적으로 서로 여수, 주고 받는 그런 거 좋은 것 같지만 그까짓 것도 다 변해집니다. 주님 위해서 하는 것은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불변의 인격으로, 완전한 사이로, 영원한 참 든든한 하나님처럼 온전한 그런 인격자로 살게 하려 해서 하나님께서 이 법칙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죽기까지 복종함이라. 내 전부가 당신 한 분으로 동하고 정해서 이것으로 끝을 마치면. 이러므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 가지고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 시인하면서 '아, 당신 없으면 우리는 못 살겠습니다.' 모든 존재가' 나 없으면 못 산다고 하면서 이 모든 존재가 다 나 없으면 못 산다고 하지, 나는 모든 존재에게 다 필요한 은혜를 다 줄 수가 있지, 내게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지인데 하나님하고 나하고 연결됐으니까 하나님에게 무한한 것이 다 있으니까. 하나님께 받아 가지고 하나님께 받아주고 하나님께 받아주고 하니까 받아주고 하니까 그들이 나를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필요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받아 가지고 주니까 받아 가지고 주는 것이 없으면, 받는 게 없으니까 내가 하나님께 받지를 못하니까 그거 좋고 나 좋고, 그거 좋고 나 좋고 하나님 좋고 이 다 좋아. 이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확고히 잡읍시다. 우리는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꾸 눈을 뜨면 그만 현상 세계에 미혹을 받습니다. 눈만 뜨면 현상 세계에 미혹 받으니까 눈을 뜨고 있어도 항상 마음의 눈은 주님을 향하여서 계속 사귀고 있고. 그저 보이는 눈은 이래 떠도 속으로서 속눈은 항상 주님하고 연결해야 됩니다. 잊어버리면 죽습니다. 주의 말씀을 언제든지 가지고 새김질하고 놓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이 내 마음을 다 독차지 해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