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6:36
잃은 양의 정의, 회개는 피동
1983. 4. 10. 주후
본문 : 눅15:3-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신 주님과 또 하나님의 뜻인 우리 구원의 도리를 기록한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이루는 실지의 신앙 생활과는 너무도 그 양이 차이 있습니다. 육십육 권 해 봤자 얼마 안되는데 우리가 생활할 때에 모든 봉착되는 일은 그 책에 기록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 안에는 성령의 역사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모든 세밀한 것이나 또 양적으로 많은 것을 충분히 우리에게 다 알려 주시기 때문에 충족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도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요 또 알기 쉽게 조직화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하는 사람이 설교를 세밀히 하고 구비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설교의 증거한 그대로 실제로 우리가 살아보려고 하면 설교는 너무 성급니다.
이 세상 과학들도 논리적으로 과학을 발표해 놓은 논리 연구가 먼저 되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실제로 실험 연구가 뒤를 따르게 뒬 때에 실험하는 가운데서 그 논리로 문서화시켜 놓은 그것은 너무도 성글고 실지의 실험과는 그저 비슷한 것이고 강령이나 말했고 근방에 가까운 정도로 말한 것이지 그게 다 구비하고 완성된 그런 이치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논리 학자와 실험 학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을 때는 반드시 논리 학자가 실험 학자에 대해서 안내는 하기는 했지마는 실질적 결과에 가서는 논리 학자에게 머리를 숙여야 되고 거게 따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로 들을 때에 사람들은 그 설교하는 것이 암만 세밀히 해 봤자 실상을 자기가 당해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해 나가려고 할 그때와 비교하면 어림도 없는, 대충 말해 놓은 아주 성근 그런 논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성경도 그러하고 설교도 그러하고 실제로 자기가 구원을 이루는 실행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가르쳐 놓은 것만 가지고 만족이 안 되기 때문에 허덕거리고 헤매다가 영감을 만날 때야 비로소 그 인도를 안심을 하고 또 설교에 대해서도 자기가 실지로 생활하려고 하는 데에 열 가지의 구비 요건이 있는데 다섯 가지 구비를 말하는 것보다 여섯 가지를 말할 때에 더 마음에 안심이 되고 또 일곱 여덟 점점 자기가 실지 생활을 하려고 할 때에 일치되는 그런 점과 또 자기가 설교에서 듣지 못한 일들이 툭툭 불거질 때에 근심하고 방황하다가 거게 대해서 가르쳐 주고 또 가르쳐 줌을 받은 그 도리를 가지고 자기가 실지의 실행 생활하려고 하니까 그게 잘 맞아서 일치가 되어질 때에 마음에 안심을 하고 담력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모든 일이 형통하고 매사에 성공을 본다.' 그러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 그 율법책을, 신구약이 다 율법이라면 율법인데 신구약 성경 말씀을 외우면 될 터인데 뭐 묵상은 뭐하려고 묵상하겠습니까? 묵상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에서 가르쳐 놓은 그 강령에 소속한 모든 구체적인 그 세밀한 도리를 자기가 묵상하고, 또 대외의 것을 명상하고, 또 거게서 조직하고, 자기가 실상으로 둬 것을 예산해서 미리 기도할 것 기도하고 준비할 것 준비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형통하다 그 말입니다.
그저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눈감고 천번 만번 외운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에 관련되고 그 말씀 안에 영감이 주는 그 영감을 지금 받으려고 묵상하고 있고, 그 영감은 자기가 읽은 바의 여호와의 말씀을 자기가 세밀한 그 실지의 생활할 때에, 생활의 그 실상을 미리 가르쳐 주는 그것을 자기가 깨달으려고 애를 쓸 때에 '아, 내가 이 말씀대로 살려 하면 이런 사건이, 이런 또 형편이, 이런 사회가, 시대가 봉착되겠구나.' 하는 것을 하나씩 둘씩 연상해 나가는 그것이 성신의 감동이요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말씀을 외우고 아무리, 고함을 지르면 사람은 어리석어서 그저 일시에 그 말을 하면 참 그저 당장에 뭣이 된다는 그걸 생각하니까 이것 뭣이 세밀히 모든 조직과 순서를 밟아 가지고 된다고 하니까 그 사실을 듣기만 해도 지저분하고 애터지고 복잡한데 그걸 또 생각하려 하니까 더 머리 아픕니다. 그럴 것 없이 그만 얼렁뚱땅으로 '이러면 되어진다' 하니까 '그렇게 예수 믿기 쉽고 좋은데' 해서 기뻐하고 뛰지마는 그 사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 현실이라는 그 실상에 봉착되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때 자기가 듣고 배운 그것은 그 현실과 비교하면 이 현실과 상관이 없는 거리 먼 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가 바른 길 걸어가는 데에 자기가 받은 바의 그 도가 아무런 인도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꾸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기에 ''세미한 음성 가운데 주님이 계셨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전에도 제가 이 말씀을 증거하고, 이렇게 말을 거튼거튼 해도 그 말 하나만 하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걸 똑똑히 들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지마는 다 전부 그만 마구 꿀떡꿀떡 삼키기를 원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데 거게다 실지로 예수 믿을 때의 그 실상에 봉착되는 것을 말하면 다 듣기 싫어하고 다 자버립니다. 그러니까 부득이 설교자가 설교를 받는 자에게 따라서 서로 조화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온 교인들이 다 세상을 원하니 부득이 세상 설교를 안할 수가 없는 것이오.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예수 믿는 이 복음이 땅에 속한 복음도 있고 하늘에 속한 복음도 있습니다. 땅에 속한 복음은 병낫는 것, 땅에 속한 생명이 생명 보존되는 것, 또 돈 성공하는 것, 또 지위나 권세 성공하는 것 그것은 암만 잘돼 보고 형통해 봤자 내나 땅에 속한 것이니까 이름만 달랐지 그것은 천국이 아니고 세상입니다.
그것을 말하면 교인들이 잘 듣습니다. 땅에 속한 복음을 말하면 활 기가 띕니다. 왜?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땅의 말을 하니까 됐고 소원도 되고 기쁨도 되고 '이것이 내 것이라'하지마는 땅에 속한 그것은 우리가 들어서 잘 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미혹이 되고 맙니다.
하늘에 속한 복음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복음은 첫째로 하나님을 자기가 가까이 해서 하나님에게 대한 성공이요, 그러면 거게서 모든 좋은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잡아 하나님에게서 나에게 좋은 것이 오는 그것을 성공하게 하는 것이 하늘의 복음이오.
또 둘째는 진리를 잡아 진리로 내 진리가 되어 진리와 하나되게 하는 그것은 모든 심판을 면하게 하는 것들이오.
또 자기가 그로 인해서 이 세상도 바로 알게, 세상을 염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천국 위해서 이용하고, 나는 주를 위해서 이용하고, 현실은 무궁을 위해서 이용하는, 그러면 이 세상이 보배는 보배지마는 무엇 때문에 보배냐? 하늘 때문에 보배인 이 세상관을 가진 것이 그것이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환난에 대한 설교하는 그것도 그것이 땅의 복음이 아니고 하늘의 복음입니다. 왜? '환난에서 하나님과 진리를 빼앗기기 쉬운데 빼앗기면 안 된다. 이런 이런 환난에서도 하나님과 진리를 빼앗기면 안 된다. 그 연결을 빼앗기면 안 된다.' 하는 그런 것이 그것 하면 돈 나오는 것 아니오. 그것 하면 지위 나오는 것 아니오. 그것 하면 세상에서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영광 나오는 것 아닙니다. 하늘의 것을 아는 사람 숫자가 적소. 욕하는 사람 숫자가 천 명 같으면 알고 칭찬하는 사람의 숫자는 한 몇 명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폭넓게 잘 생각해서 걸어가야 되겠는데 그러면 아무래도 우리 눈이 있고 하나님 인도가 있어야 되겠는데 우리 눈이 소경이 돼 놓으면 인도를 받지를 못합니다. 우리 눈은 우리의 양심을 가리켜서 우리의 눈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절대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게 비유는, 비유는 실상이 아니오. 실상은 비유보다 더 정확하고 그보다 더 참됩니다. 비유가 그러하면 실상은 더 그러합니다. 여게 이 비유에 보면 양 백 마리에서 한 마리를 잃으니까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는 데에 전심 전력을 기울입니다. 한 양을 찾는 데에 전심 전력을 기울입니다. 이러니까 여게 있는 목자는 말할 것 없이 애수님이시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또 거게 속한 모든 성도들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막 얼렁뚱땅, 그러기 때문에 강단에 벌로 세우지를 안하려고 합니다. 강단에서 마구 뛰고 고함 지르면, 아무 허풍선이고 예수 믿는 이치에 실지로 살려 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내나 세상 살이인데. 겨우 하늘나라의 복음을 먹도록 억지로 길을 들여놓은 걸 그만 세상을 퍼 먹여 버리니까 좋아서 그것 몇 끼 먹고 난 다음에는 하늘의 복음은 쓰워서 못 먹습니다. 쓰워서 먹지를 못하요. 안 떠먹소.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강단에 자꾸 이리 저리 갈라 세우면 안된다. 졸졸 하늘의 도리를 배우다가 다른 세상 것이 들어와 버리면 어린 교인들은 그만 그것 다 잊어버리고 세상으로 기울어진 그것을 다시 그리 길들이려고 하면 심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아이들도 제 몸에 유익한 식물을 이렇게 안 먹으려 하는 것을 배를 곯리고 이래 먹이면 근근히 그걸 먹어서 입맛을 달아 놓으면 그것도 잘 먹는데 그러다가 몸에 해로운 무슨 간식 잡된 못된 것 그런 것을 몇 끼 먹고 나면 그만 입맛이 딱 끊어져 가지고 안 먹으려 합니다. 꼭 그와 같소.
여게 문제가 되는 것이 이게 문제가 됩니다. '백 마리 양떼에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 또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아흔아홉 의인보다 하늘에서 기뻐한다.' 이 한 죄인이라 하는 것을 어떻게 볼 건가, 잃어버린 한 양떼를 어떻게 볼 건가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한 양떼라면 예수 믿지 않는 안 믿는 불신자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했으니까 한 죄인은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으러 교회에 나온 그것을 말하는 것인가? 또 그렇지 아니하면 아흔아홉 마리 가운데에 잃은 하나를 찾는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한 개인이라도 그에게 아흔아홉의 조건은 다 회개를 해서 깨끗해져 있다고 하나 아직까지 하나가 깨끗해지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함으로써 그 문제를 들어서 말하는 것이다, 또 한 죄인이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다른 것이 다 의인됐다 할지라도 하나 회개하지 못하면 그것으로써 죄인 됩니다. 죄인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 한 양, 한 죄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이 이제 문제입니다. 한 양은 예수 이미 믿는 사람들 외에 잃어버린 양,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잃어버린 한 양입니다. 또 안 믿는 그 사람도 회개하지 아니한 죄인 한 죄입니다. 그렇게만 이 비유를 적용하고 달리 안 하면 이 복음은 우리에게 실상의 구원은 건설구원은 행위구원은 주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물론 안 믿는 사람도 잃어버린 양이지마는, 또 안 믿는 사람도 회개하지 아니한 죄인이지마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조건을 회개하지 아니함으로써 죄인되어 있는 그것도 회개하지 아니한 한 죄 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택한 자 중에 예수님 안 믿는 사람도 잃어버린 양이요 회개하지 아니한 죄인이요, 또 믿는 사람이 회개한 것은 둬 두고 회개하지 아니한 요소 부분 그것이 또 잃어버린 한 양이요 또 한 죄 인에게 속한 것이라 하는 이것을 이렇게 우리가 이 비유를 우리에게 적용시켜야 되지 이것을 그렇게 일방적으로만 해석을 해 가지고 자기네들이 그만 그렇게 제한해 버리면 헛일입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 아주 그 사람 잘 믿는 집사나 장로나 목사가 됐다 할지라도 다른 도덕면이나 모든 면이 다 깨끗한데 그 사람이 물질면에 부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정한 그 물질면에 부정한, 물질면에 부정한 그 한 죄인입니다. 그러면 한 죄인 그것이 잃어버린 양이요 그것이 회개해야 될 그 죄인입니다.
그런고로 잃어버린 한 양과 회개를 한 죄인이라는 이 죄인에 대해서 이렇게 두 가지로 우리가 보고 깨달아야 이 성경이 우리의 복음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안 됩니다.
그것을 하나 기억하고, 그러면 목자의 그 신경이, 목자의 신경이 어데 기울어졌는가? 아흔아홉 마리에게 신경이 기울어졌는가 잃어버린,한 양에게 기울어졌는가? 잃어버린 한 양에게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해석을 할 건가? 예수 믿는 사람 다 냅두고 예수 안 믿는 사람, 택한 자 중에 아직까지 예수 안 믿는 사람 거기에 하나님의 그 모든 신경은 다 거게 기울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많고 그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로되 그 사람에게 대해서 잘 믿는 그 부분 다 냅두고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한 그 한 부분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전신경을 다 기울이고 있다, 근심 걱정이 다 거게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의 심려가 거게 집중돼 있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목자라면 한 사람이지마는 그 다음에는 말하기를 뭐라고 말했는고 하니 "하늘에서는" '하늘에서는' 말했고, '이웃을 불러서 벗들이라' 이렇게 말했고, 그 다음에 드라크마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하늘의 사자들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게 한 목자는 크게 말하면 예수님이시요, 성령님 이시요, 또 하늘의 일꾼들 천사들이요,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이요, 하늘의 일꾼 전부가 이 목자인 셈입니다. 하늘의 일꾼 전부가 이 목자인 셈이라.
이러니까 이 목자는 마음에 근심 걱정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 그 집중돼 있는 것이 잃어버린 한 양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늘의 일꾼이라고 하면, 하늘의 일꾼이라고 하면 나는 마음의 근심 걱정이 어데 집중돼야 뒬 것인가? 안 믿는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에 집중될 것과, 또 예수 믿는 사람이 잘 믿으니까 열 가지 중에 아홉 가지 회개해서 잘 믿었으니까 안심할 게 아니라 회개되지 않은 그 하나에 거기에 집중돼야 그 사람에게 대해서 천국 일꾼이 됩니다. 그게 없으면 천국 일꾼이 아닙니다.
암만 목사가 자기 밑에 있는 잘 믿는 후배나 장로나 목사가 잘 믿는다 할지라도 그가 잘 믿으니까 모든 데 대해서 안심을 한다면 그에게 대한 목자는 아닙니다.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면 아무리 잘 믿는다 할지라도 그에게 지금 회개할 그 죄인, 하나님에게서 떠나가서 잃어버린 한 양 그 양을 찾는 그 부분을 찾아서 거게 대해서 자기의 심려가 기울어질 때에 하늘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하늘에서 기뻐하는 기쁨은 어데 있는가? 기쁨은 한 죄인이 회개할 때에, 또 잃어버린 한 양을 찾았을 때에, 온 식구들이 벗들이 기뻐했고 하늘에서 기뻐했다. 그 다음에는 보면 드라크마에 대해서 "이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을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여게 믿는 우리들에게는 첫째 말한 그것은 우리가 근심해야 할 하나님의 일꾼 입장에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회개해야 할 그 한 조건 거기에 우리의 마음이 다 집중되어야 할 위치에 우리는 있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양떼의 입장에서는, 양떼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사들과, 모든 복음 운동의 사역자들과, 이 기도하고 모두 다 복음 운동하는 그 전 운동은 내게 회개할 것이 열 가지 다섯 가지 뭐 스무 가지가 있다 할지라도 지금 내가 회개하여야 뭐 그 당면된 한 건 거기에 하나님도 모든 성도들도 천사들도 근심 걱정이 거기에 집결되어 있다. 또 모든 하늘의 복음 역사에 사역자들, 주님, 성령, 천사, 모든 성도들, 교회들, 이 전체의 지금 역사, 노력, 노력도 여게 집결돼 있다, 그러면 이 전부가 기뻐할 수 있는 그 기쁨도 여기에 집결되어 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여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요 세 가지를 단단히 배워서 기억하고 지나갑시다.
껍데기로 덜렁덜렁하는 것 암만 그래야, 그러기 때문에 신앙 행위는 없습니다.
내나 예수 믿는 사람의 세상 살이나 안 믿는 사람의 세상 살이나 세상 살이 그거야 다 안 믿는 사람들은 못합니까? 다 잘합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 아니오.
세상이 모르는 생활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세상에 없는 생활하는 게 신앙 생활이오. 세상이 망할 때에 같이 망하지 않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 입장에도 있고 또 하나님의 일꾼들의 일거리가 되어 있는 그 부분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꾼들의 일거리가 되어 있는 그 부분도 내가 그 위치도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하나님 일꾼과 함께 일꾼이 되어 있는 그 부분도 되어 있습니다.
일꾼이라면 이 세 가지에 마음이 집중되어야 할 것이요, 만일 일거리가 되어 있다면, 일거리가 되어 있다면 이 전체가 내 요 회개하지 아니한 요 한 건에 성령도, 주님도, 모든 교회의 복음 운동도, 그 천사도 전체가 나 요 한 건 요것 회개하지 않는 여기에 지금 근심 걱정 다 기울어져 있고 전심 전력이 다 여게 기울어져 있고 요게 회개될 때에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은 전부가 제일 기뻐한다.
요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회개에 대해서 양을 찾는 것을 양이 목자를 찾아서 목자에게 왔습니까? 물론 그가 목자를 떠나니까 갈급도 생기고 고난도 닥치고 하니까 목자가 그리울 것이고 후회도 되기야 되지마는 저는 목자를 찾아갈 그런 아무런 실력이 없습니다. 이 비유에 분명히 나타난 것은 목자가 양을 찾아갔습니다.
양을 찾아 가지고 기뻐서 어깨에 메고 자기가 다시 그 목적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가 능동적인 것 아니고, 우리가 능동적으로 회개하는 것 아니고 회개는 언제든지 피동의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 가지로 집결돼 있다고 했지요? 근심 걱정이 집결돼 있다, 모든 노력이 집결되어 있다, 이것이 잘되면 기쁨도 거게 집결된다. 이런데 이렇게 나 회개하지 아니한 요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큰 세력이 큰 능력이 내게 필요한 목자가 찾아서 전심 전력 기울여서 이렇게 집결하여 주력하고 있으니 자기가 목자가 왔을 때에 목자를 보고도 망치면 그것은 어짤 수 없어. 목자를 보고 도망을 치면 양이 도망을 칠 때에는 목자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도망을 칠 때에는 잡을 도리가 없어.
그저 양을 찾아서 왔으니까 목자를 반가이 목자가 아듬을 때에 안기면 돼.
그러면 안기고는 목자가 안고 가는 대로 안겨서 이제는 목자 만났으니까 그 기쁨과 만족을 가지고 안겨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회개는 능동이 아니고 언제나 피동입니다. 그러기에 해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회개하라 하든지, 성경 말씀을 제가 읽을 때에 회개할 마음이 나온다든지, 이렇게 회개에 대한 생각이 사람을 통해서든지, 성경 말씀을 통해서든지, 자기가 홀연히 있을 때에 스스로 자기 속에서 회개할 그런 마음이 생겨지든지 하는 그것이 바로 목자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하는 게 아니오. 이러면 딴것 되고 저러면 딴것 됩니다.
여게 분명히 회개는, 여기 잃어버린 양이 어깨에 메여 가지고 돌아가는 비유를 해 놓고 그 다음에는 회개라고 바로 따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면 양을 목자가 찾는 것은 회개를 시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요 안겨 가지고 가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라. 그렇게 해석 외에 어떻게 하겠소? 이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통해서든지 회개할 마음이 생겨지는 그것이, 회개해야 된다는 그런 소리가 내 귀에 들려지는 그것이, 내 속에서 생겨졌든지, 누구가 내 귀를 통해서 나에게 말하든지, 내 눈을 통해서 말하든지, 뭘 어짜든지 해 가지고 나에게 회개라는 이 회개에 관한 것이 시작이 되거든, 이 회개에 관한 것이 나에게 내 생각에서 시발이 되고 내 마음에서 '회개해야 되겠다' 하는 요것이 있을 때에 그때에, '회개를 능동으로 본다,' 회개는 자기가 능동이요 하나님은 회개하는 데 따라서 피동이라.' 회개를 능동으로 보는 것과 '회개는 능동이 아니다. 회개는 피동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회개를 시키실 때 회개가 되어지는 것이지 안되는 것이다. 요렇게 보는 요 믿음의 확정되는 것이, '나에게 지금 회개할 마음이 나고 회개해야 된다는 생각이 나고 회개라는 이 생각이 내게 난다. 이것은 내 환경에 따라서 나는 내 마음이다.' '이게 막바로 만유의 주, 만유 주 대주재이신, 주권자이신, 전능자이신, 십자가의 대속주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찾아와서 나를 이 멸망에서 지금 건지시려고 나를 찾아오신 것이라.' 요것이 회개는 피동적이라 하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요것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에 '내가 회개할 마음이 있으니 회개해야 되겠다.' 회개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찾아온 목자를 내가 영접하는 것이오. 그것을 회개하려고 달려드는 그것이, 회개하려고 그렇게 자기가 회개하려고 힘을 쓰는 그것이 뭐냐? 그게 피동인데, 내 힘이 아니고 순전히 하늘의 힘인데, 여러분들! 우리는 회개하려고 힘쓰는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전적 부패한 죄인들이오. 완전히 썩은 것뿐이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는 그게 우리에게 있다 말이요?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셔서 지금 나에게 찾아오셔 가지고 회개를 시켜 주시니 내가 회개를 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회개시켜 주시는 회개를 영접하는 것이요, 그것이 목자가 아듬을 때에 빼고날을 쳐서, 아듬으니까 마다고 홱 튀어 달아나 가지고 이리에게 잡아먹히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고 아듬을 때에 반가와서 울면서 그 목자에게 안기는 그것입니다. 내가 회개하려고 애를 써 회개하는 것이 안기는 것이오.
그래 가지고 이렇게 회개해서 그걸 회개하는 것이 목자에게 안겼소.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 또 한 순서에 회개할 것이 자기에게 나타나서 요것 회개하고 나니까 그 회개하고 나니 기쁘고 평안하니까 또 회개할 것이 생각나서 '요것도 회개해야 되겠다' 또 그것 회개를 하고 하는 그것이 목자에게 안겨서 지금 자기의 영원한 처소인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가다가 회개 생활을 하다가 사람들이 왜 그러면 회개하는 것을 저버리고 도망을 치느냐? 오전에 말한 대로, 가다 보니까 이리떼가 우 하게 와 가지고 뛰어가는 걸 보고 양이 놀라서 저 혼자, 목자를 잊어버리고 저 혼자만 생각하고 이리 보니까 겁이 나서 획 뛰어서 튀어 가는 그것이 이리에게 삼켜서 죽는 것이라 그 말이오.
자기가 회개의 걸음을 걷다가 '이것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다, 가정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다.' 회개하려고 하니까 회개의 걸음을 걸으니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자기에게 봉착될 때에 그때 두려워서 그만 그 회개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 목자의 틈 안에서 자기가 탈출하는 것입니다. 튀어나는 것이오. 탈출하는 것이오. 탈출하면 저를 삼킬 맹수 외에는 딴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럴 때에 사람들이 회개하는 걸음은 절대자이신 이 목자에게 안겨서 어깨에 메여서 이래서 안보 되어 걷는 걸음이라 하는 요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요것을 믿다가 그만 자기 주관으로 돌아가면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풍랑보고 빠져들어 가는 것이나 꼭 같은 것이오.
믿으면 되고 안 믿으면 안됩니다. 병이 들었는데 믿으면 병이 낫고 안 믿으면 병이 안 낫는 그것이 뭐냐?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 보여 주기 위해 하는 것이오. 절대자가, 내가 이 회개의 걸음은 절대자의 능력의 안보를 받고 가는 것이니 아무도 해할 자 없다. 믿으면 안보가 됩니다. 믿지 않으면 자기는 그 걸음을 걷지 못하고 거기서 탈출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목자가 찾아온 그것이 뭐냐? 요것 잘 알면 그것 알 수 있는데, 거게 잃어버린 양이라 하는 것이 내나 범죄에 빠진 것이라 그말이요, 범죄에 빠진 것. 그러면 요것 목자가 찾아온 것은 잃어버린 양 찾지 아니했습니까? 잃어버린 양 그걸 가리켜서 그 밑에는 해석하기를 죄인이라 또 하지 아니했습니까? 회개라고 또 하지 아니했소? 이러니까 자기에게 요것을 내가 회개해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이나 생각이나 그것이 생겨지는 그것이 절대자가, 절대자이신 목자가 나를 구원하려고 찾아오신 것인 것을 요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것을 믿어야 돼요.
그러면 그때에 '이 회개를 주님이 회개케 하려고 나에게 지금 회개할 이 마음을 주시는구나. 내가 회개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목자의 품에 안기는 것이오.
그러면 그걸 회개하면, 회개한 걸음을 걸으면, 그걸 회개하면 거게서 다 그런 건 아니지마는 회개함으로 환난이 부딪히는 것도 있고 환난 안 부딪히는 것도 있지마는 대개는 환난이 부딪힌다 그래 봐도 좋다 그말이오. 회개하려 하니까 어려움이 올 때에 그 어려움을 보고 놀라지고 '이 회개하면 큰일나겠다' 하는 그런 해석이, 그런 비판이, 그런 판정이 자기에게 생겨집니다.
'이것-목자에게 안겨 가면서-이것 회개하면 이것 큰일나겠다 싶은 그 마음과 그 생각이 그것이 무슨 마음과 무슨 생각이냐? 그것이 목자를 떠날 때에 경험과, 체험입니다. 목자의 떠날 때의 경험과 체험이오.
죄 가운데 빠질 때의 경험과 체험입니다. 죄 가운데 빠지게 한 그 지식이 들어서, 그놈이 들어서, 나를 죄 가운데 빠져서 범죄케 한 그놈이 들어서, 그 악령 그놈이 들어서, 그 지식이 들어서, 그 이치가 들어서, 그 내 주관이 들어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여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것을 극복해서 꺾어서 부인해 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가 '전능자의 품에 안겨서 내가 지금 가는 걸음이니까 문제없다.' 요 비유 하나라도 믿고 요동치 안하고 어떤 것이 와도, 모세가 모든 사람은 놀라서 다 죽을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솜씨 보자.' 기뻐서 '구경하자.' 하는 것처럼 요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면 '내가 이 회개하는 데 이런 큰 애로가 봉착됐는데 말씀에 요렇게 해 놨기 때문에 회개하면 하나님의 솜씨가 어떤고 보자.' 하는 자는 볼 수 있다 그말이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자기가 회개에서 회개로 걸어오는 그 걸음은 절대자의 그 능력의 보호를 입고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 두려움이나 그런 염려를 하나도 가지지 아니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회개를 하는 것은 요것은 내게서 난 것이 아니고 회개는 하나님에게 피동이라, 요것은 이 비유에서만 아니고 다른 모든 성경에서 다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회개를 시켜 주셔야 되지 회개 안 시켜 주시면 안 됩니다.
바로를 하나님이 강퍅케 하시니 강퍅해졌지 안 됐습니다. 회개는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에 어떻게 된다 이렇게 말했지마는 자세히 찾아보면 하나님이 회개 운동을 시작해 가지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이래서 회개하라 회개하라 애터지게 해 가지고 하나님이 회개의 은혜를 주시면 휘딱 회개를 하고, 또 아무리 그렇게 외쳐도 회개의 은혜를 안 주시면 강퍅해서 회개를 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는 피동이요 능동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회개할 그 깨달음이나, 그 마음이나, 그 생각나는 그것이 나 위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내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빠진 죄악에서 나를 구출하시려고, 내가 주님을 떠나서, 아무리 그 집에서 살고, 그 집에서 살고 그 직장에서 살고 거게서 살아도 범죄 했으면 주님 떠나고 주님하고는 멀어지고 주님에게서 떠난 것이요 주님을 잊어버린 일이 되는 것이고 거게서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의 품 안에 안긴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기에게 회개할 그런 마음이나, 그런 생각이나, 그런 말이나 들으면 막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신인양성 일위이신 내 선한 목자가 나를 이 멸망에서 구출하려고 왔다 하는 요것을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이것을 믿어야 능력이 나오지 요걸 믿지 않으면 능력이 안 나옵니다. 백 번 알아야 소용없어.
자기에게 자기가 어떤 그 죄악에 빠졌든지 자기는 과거에 그 죄악인 줄 모르고 이래 하다가 '내가 상업을 해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또 내가 이런 말을 그저 상습적으로 하는데 이건 안되는 것인데.' 무엇인가 자기에게 안된 요것을 고쳐야 되겠다 하는 고것이 깨달아지고 그 마음이 생길 때에는 고것이 자기 마음이 아니라 선한 목자가 나를 찾아와서 나를 구원하려고 선한 목자가 내게 온 것입니다.
내가 요걸 회개해야 되겠다는 고 마음이 '내 마음인데 뭐 내 마음 이런 마음 먹을 때도 있고 저런 마음 먹을 때도 있으니 마음먹었다가 버리면 되고 또 마음먹으려면 또 마음먹을 수 있지.' 어림도 없소. 제가 마음먹고 싶다고 마음이 먹어지는 줄 압니까? 안 됩니다.
막바로 고것이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선한 목자가 찾아온 것입니다.
고것이 영감이라면 영감이요, 성령이라면 성령이요, 그리스도의 영이라면 영이요, 주님이라면 주님이요, 대속하신 신인양성일위이신 내 구주라면 구주입니다.
바로 나에게 회개할 마음을 줄 때에 고 마음을 주는 고 마음 그것은 내 마음이 주님이 아니라 내 마음에 주시는 그것이 주님이라 그말이오. 그게 영감이라 말이요 그것이 내 선한 목자라 말이오.
그럴 때에 내가 그 마음을 주는 그 마음을 이렇게 주는 것을 그 감동을 내가 받았으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 감동을 저버리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버리는 것이요 그 감동을 받아서 내가 그대로 회개하는 것이 선한 목자의 절대자의 능력의 보호 안에 안기는 것입니다. 요것을 꼭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신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라" 우리가 알아듣기에는 성신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라 그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해라, 주님을 배척하지 말아라.
그걸 계시록에는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노니 문을 열어 달라" 또 그렇게 거게는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내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된 마음인데 내 마음에 회개할 그 감동을, 회개할 그 깨달음을, 회개할 마음으로 이렇게 조그마치라도 변화가 돼서 회개할 마음이 생기고 회개해야 되겠다는 그것을 느껴지는 그것이, 느껴지게 한 그것이 바로 성령이요, 바로 주님이시요, 바로 선한 목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시요, 지극히 크신 분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능하시고 피조물을 만드신 분이시오.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 감동을 받아 가지고 자기가 그 회개를 할 때에 그것이 목자의 어깨에 메여지는 것이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자의 품 안에 안긴 것이니 안심하고 회 개에서 회개로 걸어가면 되는데 가다가 큰 낭패 당하겠다 해 가지고 놀라서 탈출해 가는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자기를 목자 떠나게 했던 내나 자기 아닌 옛사람,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요 강도라는 것, 모든 인간 지식,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 모든 부패성, 원죄, 본죄, 그 뭉텅이들이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주를 영접하는 것, 영접해서 내가 목자의 어깨에 메이는 것은 어떤 것이 메이는 것인가? 그것은 회개할 감동을 나에게 주실 때 내가 회개하는 것이, 회개하는 그것이 주님의 어깨에 메이는 것, 내가 이 회개한 걸음을 걸어가는 것은 절대자의 어깨에 매였기 때문에 아무도 해하지 못하고 그분도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데 변동되는 것은 '이렇게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싶어서 제가 잘못된 생각 가지고 그 품 안에서 훅 튀어서 도망을 쳐버리는 그것이 뭐냐? 회개를 버리고 자기 생각대로 나가는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멸망이오.
그게 전능자의 품에서 탈출하는 것이오. 그런고로 "성신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라" 하는 것이 성령을 배척하지 말아라, 그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뭐 큰 것을 많이 말하면 다 거짓부리 사람들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큰 걸 말하면 아주 굵닥굵닥 큰 일을 성사한 것같이 말하지마는 큰 데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 있소.
천국의 역꾼들, 천국의 역군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국의 역군들이요,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역군들이요, 또 모든 성도들의 기도가 다 역군들이요, 또 천사들이 역군들이요, 또 하나님의 진리도 독자적 권위성을 가지고 여게 일하는 모든 능력들이오. 이런데 이 전부는, 전부의 정신은 어데 집중돼 있는가? 이 전부의 정신은 어데 집중돼 있는가? 하나님의 하늘나라에 속한 이 모든, 주님도, 천군 천사도, 성령도, 아버지도, 성도들의 기도도, 모든 교회 복음 운동도 이 전부가 내게 대해서는 지금 어데 그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가? 어데 그 마음이 집중돼 있습니까? 여기 남반에 말 좀 해 보십시오, 큰 소리로 누가? 어데 집중돼 있습니까? 어데 집중돼 있습니까? 한번 말해 보이소.
잃어버린 양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에게 집중돼. 잃어버린 양이 뭐입니까? 내게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그 부분에 집중돼 있습니다.
내게 내 부분 중에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그 부분에 집중돼 있소. 그러면 죄 가운데 빠진 것이 만일 열 개나 스무 가지나 있다고 하면 그 스무 가지에 집중돼 있다 말입니까 대번 현재 당면한 죄 하나에 집중돼 있다 말이요? 하나에 집중돼 있소? 여러 것에 집중돼 있소? 하나에 집중돼 있습니다. 요걸 믿어야 합니다.
하나에 집중돼 있어.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진리와, 성도들의 모든 기도와, 모든 교회 복음 운동, 천군 천사 이 전부는 내게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고 죄가 열 가지가 있다 할지라도 열 가지 상관없어. 내게 지금 현재 회개할 게 있어, 현재 회개할 것, 현재에 회개해야 될 그 일호가 있다 그말이오. 당면된 회개할 거기에 전 마음은 집중돼 있습니다. 또 전 노력은 어데 있소? 노력도 거게 집중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부가 기뻐하는 기쁨은 무엇입니까? 다른 걸로 입니까? 다른 것 아니오. 그것 회개해야 돼요, 그것 회개해야 해. 그걸 회개하는 거기에 기쁨도 집중돼 있습니다. 그러면 요것도 그저 보면 도매금으로 이래 떠들면 거짓부리 사람들은 다 듣기 좋아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어. 우리 회개가 이 순서가 돼 있으면 요게 회개할 순서라면 요것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가 딴것 이것 거머쥐고 아무리 뛰어봤자 하나님이 회개 안 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제마음대로 하도록 하지 아니하시오. 요것 회개하면 그 다음에 요것 회개됩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 요것 회개돼요.
회개가 제 마음대로 하는 줄 압니까? 아니오. 회개가 하나님께 순종 중에는 제일 일호 순종입니다. 요것 고치라 할 때 그것 고쳐야 돼요. 그래야 회개 그게 믿음이지. 이러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모든 정신도 집중되어 있고, 능력도 집중되어 있고, 이래 가지고 그 일이 성공이 되면 기쁨도 거게 집중됩니다.
요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저 이 복음을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하니까 예수 믿는 제게는 아무 이 복음이 상관이 없습니다. 또 이는 회개할 걸 망라해 가지고 이와 같이하기 때문에 다 헛일입니다. 그 밑에 드라크마에도 보면 그 잃어버린 하나 그것 찾는 그것 찾고 나야 그 다음이지 전부 망라한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각자에게 회개할 순서가 있으니 지금 회개해야 될 당면된 것, 당면된 것, 본인이 압니다.
알려 줍니다. '아, 요것 회개해야 되겠다.' 알려 주는데 알려 주는 그 알려 줌이 누굽니까? 알려 줌이 누구요? 요걸 요렇게 믿어야 돼요. 덩더꿍이로 그래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 마귀란 놈들이 장난하기 쉬워서 전부 교회가 다 마귀의 것이 되고 망하고 있다 그말이오. 그것 떠들고 그래 가지고는 안 돼요. 자기가 어떤 것 하나 뭘 '요것 회개해야 되겠다' 하면 그 마음이 생겨지면 그 마음을 생기도록 역사 하는 그것이 뭐입니까? 그게 뭐 이요? 그게 뭐입니까? 성령 아니오?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 아니요? 주님이오.
성령이오.
이러니까 요 세 가지의 집중되어 있는 요것을 우리가 믿어야 되고, 믿을 때에 마귀 역사는 깨집니다. 믿고 행하면 자기에게 체험이 생길 것이오. 그러면 이래 집중되는데 집중은 어데 왔는가? 그 사람에게 죄가 열 가지 있으니까 열 가지에 집중돼 있습니까 한 가지에 집중돼 있습니까? 한 가지에 집중돼 있는 요걸 알아야 돼요, 한 가지에 집중된 것. 그저 이래 가지고 마구 과거 뭣 들추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 눈물이나 한 방울 흘리고 '과거에 잘못됐다 앞으로 이래 하겠습니다.' 하면 되는 줄 알아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과거 잘못된 것 암만 말해야 소용 없어. '미래 어쩌겠다' 아무 소용 없어. 현재에 당면된 고것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 현실이라는 고것 외에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우리 시간이 아니요, 장소도 우리 장소 아니요, 모든 종별도 우리 종별 우리의 것 아닙니다. 이런데 마귀란 놈은 요리 미끄러지고 조리 미끄러지게 해 가지고 사람들을 전부 다 헛일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하나에, 내가 회개 지금 해야 될 것 그것 하나에 그 천국에 있는 모든 전부의 역사도 마음으로 집중되어 있고 힘도 집중되어 있고 있는데 그게 하나가 될 때에는 그 기쁨도 전부 다 거게 다 달렸다. 그러면 전부 성패가 거게 달렸다.
이런 것인 것을 우리가 알고, 그러면 이 집중된 것이 무엇이냐?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되겠다는 그 마음이 나에게 생겨진 것이 독사와 시랑이와 강퍅하기가 쇳덩이 같은 내 마음에 '이것 아무래도 고쳐야 되겠다 회개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한없는 힘을 써 가지고서 나에게 찾아와서 지금 회개시키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버리지 안하고 그 감동을 영접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 영접이요, 전능자 영접이요, 나를 대속하신 주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영접해서 내가 그것을 고치려고 하면은 거게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깨에 메고" 했다 말이오. 여러 가지가 문제가 있지마는 이것은 하나님이 찾아온 것이니 내가 회개하는 것은 당신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다 원수가 많이 있고 대적이 있지마는 품 안에 안기면 전능자의 품 안에 안겼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품 안에 안기는 것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요 도리를 믿음을 인해서 회개를 착할 때에 전능자의 품에 안기고 어떤 일이 닥쳐도 당신이 처리를 하리라 하고 내비두고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러면 깨져 좋을 것은 깨지고, 안 깨져 좋을 것은 안 깨지고, 깨질 뻔하다가 안 깨지는 건 안 깨지고, 다니엘 같은 사람이 죽는 그런 것은 죽음 당했으나 안 죽어야 될 것이기 때문에 죽을 뻔하다가서 안 죽고, 그 모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하는 것이 초자연적이고 하나님의 역사 전부는 인간의 생각, 인간의 욕심, 인간의 비판 이것을 박살을 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만이 참되다 요것만 나타내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그런 거슬리는 역사를 끌어 가지고 그것을 통과해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이 생명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접하는 것이며 그분의 어깨에 메여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메여지는 것인가? 그럴 때에 닥쳐지는 모든 어려움은 어떻게 해서 문제가 없는가? 회개는 전능자의 품 안에 안기는 것이기 때문에 전능자가 책임을 지는고로 그런 것들이 암만 있어봤자 소용이 없다 하는 요것을 가지고 우리가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그러면 여게서 목자의 어깨에 매여 가니까 해가 없다 말 아닙니까? 목자의 어깨에 메여 가니까 아무 손해가 없다 말 아니요?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 아니요? 그런데 피해에 대해서 마귀란 놈들이 또 미혹을 준다 말이오.
피해에 대한 성경대로의 정관을 가져야 뒬 터인데 성경대로의 피해관을 가지지 안하고 마귀가 주는 피해관을 가지면 내나 예수 잘 믿어 가지고 나가다가 '어깨에 메고 간다 하더니마는 어깨는 무슨 어깨? 망하기는 더 망하고 손해는 더 손해보는구만.' 이래 가지고 넘어진다 그말이오.
마귀는 어쨌든지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볼 때에 거짓말하고 속삭거려서 요래 꾀우고 조래 꾀우고 사람을 이간 붙이고 하는 그것이 막바로 마귀 형상입니다.
마귀를 모르거든 인간들의 그 마음의 구조, 비 인간적인 하는 인간들의 그 모든 행동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서 다 나온 것이요, 마귀에게서 나온 것.
그러면 우리가 보호로 손해를 안 본다는 것 오전에 네 가지를 말하는데 무슨 손해를 안 봅니까? 무슨 손해 안 보지요? 하나님의 심판에 손해 안 봅니다.
심판에 손해보지 않아요. 심판에 걸리지 않소. 심판에 걸리지 아니해. 그게 좋지 천하 인간이 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턱 걸리니까 노아 홍수 때 다 멸망 받지 않았소?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지 아니해.
또 무슨 해 안 받습니까? 마귀의 해 안 받아. 마귀의 해 안 받아. 그놈이 뭐라 하고 마귀가 어떻게 해도 마귀 그놈이 이용을 당했지 해는 하나도 못 준다 말이오. 마귀의 해를 하나도 보지 않아요.
또 무슨 해를 보지 않습니까? 죄의 해를 보지 아니해. 죄 지으면 망하는 것인데 죄의 해를 보지 아니해. 죄 그놈이 와 가지고 오만 것 하지마는 죄 그놈이 상관이 없어. 죄의 해 보지 아니해.
죄의 해 보지 않으니까 죄 없는 것을 어떻게 사망시킬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망의 해를 보지 않는 것이라.
이런 참 근본적인 완전 해를 보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이 보호한다 하더니마는 사자구덩이에 들어가기만 들어갔다. 잡혀 들어가기만 잡혀 들어갔다.' 잡혀 들어가도 그 이튿날 살아나오니까 더 좋지 나쁠 것 뭐 있겠소? 그런고로 우리는 참 깨달아야 되는데, 또 아무리 명철한 사람이라도 소용없습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면 무식한 사람이라도 다 깨달아 지요. 양심을 안 가지고 그 욕심이 딴데 있으면 안 됩니다.
지남철을 가지고 이렇게 가리킬 때에 아무리 지남침은 바로 돼 있는 지남침이라 할지라도 그 옆에 지남침에게 자극을 줘서 그 정남을 가리키지 못하도록 하는 자극 주는 그 자극물이 옆에 있으면 헛 일입니다. 여게 쇠가 있으면 이리 가리킬 것이 쇠가 있으면 이리 댕겨서 이리 가리킵니다. 조금 틀렸지마는 갈수록 얼마나 많이 틀립니까? 이것 모양으로 양심이 돼야 바로 깨달아지지 양심을 저버리면 바로 깨달아지지 못해. 절대 바로 깨달아지지 못해. 제가 무슨 욕심, 명예욕이든지 지위 욕이든지 권세욕이든지 뭐 자기 중심이라는 악의 무엇이든지 이런 악이나 저런 악이나 어떤 종류의 악이든지 악이 들어 있으면 암만 성경 배워봤자 자기 중심 그놈 때문에 자기 구원도 안 되고 다른 사람 구원도 하지도 못하고 바른 길이나 걸음이나 깨달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은 오후에 또 한번 더 말해서, 그것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여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우리 죄에 대해서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가지를 간섭을 합니까 하나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습니까? 하나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것 알아야 됩니다. 하나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소.
다른 것은 다 냅두고 하나 집중해서 그것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이 소용이 있지 소용이 없어. 이런데 그 하나는 내비두고 그 다음에 입술로 가지고 막 청산유수로 오만 말 해 봤자 하나님은 가증스러워서 근심할 것뿐입니다. 하나에 집중돼 있어요. 그것하고 나면 그 다음이 또 나옵니다.
그러면 거게서 잃어버린 양은 안 믿는 사람도 잃어버린 양이지마는 내 심신의 기능의 수많은 요소, 수많은 분자, 수많은 세포, 이것과 같이 그런 분자가 있는데 한 분자가 죄 가운데 빠진 그것도 잃어버린 양입니다. 잃어버린 양.
나는, 과학자들은 참 좋겠어요, 예수 믿으면. 그래 내가 언제, 이번에 양성원에서 공부하는 데 보니까 OOO장로님이 와서 가르치는데 그것 가르치데.
'과거에는 이 세포가 많이 있는데 세포가 뭐 하려고 있는 줄 몰랐고 이랬지마는 이 세포 한 개에도, 예를 들면 세포 한 개에도 이목구비 수족과 같이, 우리 전신 전체에 만일 백체 백 지체가 있다고 하면 세포 하나 그것도 백 지체를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전체 요것과 같은 그것의 구비한 꼭 한 분자다.' 그리는 말 안해도 그 비슷한 것을 말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그런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심신의 육의 구원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수많은 기회를 통해서 된다는 것이 그것 보면 하나 하나 개체가 되어 있으니 똘똘 뭉쳐 한 전체가 돼 있어. 우리 한 몸이지만 한 몸 속에 우리 이목구비 수족 가진 요 전신과 같은 요런 새끼가 천도만도 모아 가지고 그게 됐답니다. 그 하나 작은 새끼 그것도 보면 눈 있고 코 있고 귀 있고 감정 있고 뭐 신경 있고 정신 있고 그것 다 있대요. 한 사람에게 백 지체가 있다면 그 세포 속에도 백 지체를 가져, 꼭 그와 같은 것이.
그렇게는 말하지는 않지마는 벌써 그게 발명이 돼 가는데 사실 그래 돼야 돼요.
그것이 그래 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육체는 그 하나씩 그것이 회개를 해서 그것이 살아나야 되고, 성장해야 되고, 그게 성장 다 돼 가지고 한 몸의 온전함을 이루고 한 지체를 이루고 그것이 뚤뚤 뭉쳐 가지고 한 교회를 이루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얼렁뚱땅으로 자꾸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씩이 라도 철저하게 해서 그것을 실질적으로 고쳐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신의 전부, 하나님의 힘의 전부 이것이 어데 가서 집중돼 있는가? 다른 사람 다 냅두고 내게 집중돼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집중돼 있소. 각자에게 집중돼 있는데 각자에게 집중돼 있으면 내게 대해서는 그러면 어데 집중돼 있는가? 회개할 것 거게 집중돼 있습니다. 회개할 것. 회개할 것이 열 가지면 열 가지에 집중돼 있는가? 아니오. 그렇게 하나님은 그렇게 떠 둘러매고 많은 몌꿩에 매 놔 가지고 헛일하듯이 그래 하지 않아요. 하나에게 집중돼, 하나에게 집중돼 있다. 요걸 기억하십시오. 하나에 집중돼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내가 기쁘시게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 하나 고 쳐지면 하늘에 있는 전부가 다 기쁨이 다 된다. 그것을 알고 그런 '내게 지금 하나 봉착돼 있는 그게 있으니까 그게 어느 것인가?' 그것을 찾아서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형체를 가지고 나타납니까 소리를 가지고 나타납니까? 뭘 가지고 나타납니까?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감화로 나타납니다.
성경을 가르쳐서 깨닫게도 하고, 옆에 사람이 말해서 깨닫게도 하고 또 지나가는 일에서 깨닫게도 하고, 모든 걸 그런 것 깨닫게 해. 오일 날 테레비를 누가 와 가지고 켜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 사람들은 딴것 보지마는 나는 또 거기 딴것 봤어.
그 간신들 역적들 일어나는 것,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은 있는데, 하나님의 일은 있는데 마귀란 놈들이 그 역적 모양 해 가지고 하는 것, 그러니까 모든 세상은 다 자연계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부는 내 한 죄에 집중돼 있다, 그것 기억하고. 그러면 회개할 마음 그것이 나에게 생겨지게 하는 그 감동이 바로 십자가의 대속하신 주님이요, 창조주 주님이시요, 구속주 주님이시요, 선한 목자 시다. 그럴 때에 그 감화를 영접해서, 그 감화를 영접해서 그것을 내가 고치는 것이 절대자의 품 안에 안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 회개해서 회개하는 그 걸음에는 여러 가지 마찰의 어려움이 온다.
그러나 전능자의 품 안에 안겼다는 것을 자기가 믿고 안심하고 회개에서 회개에 걸어가고 그 회개에서 떠나지만 안하면, 회개에서 떠나지 않는 건 요것 회개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또 오는 것 회개하고 그 다음에 하고, 회개의 선, 회개의 요 줄에서, 회개의 계통에서 떠나지만 안하면 전능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니 아무 피조물도 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시온의 대로다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 우리가 실질적으로 어짜든지 회개합시다. 우리 서부교회는 회 개라는 말을 많이 듣고 요새 늘 많이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오. 주님이 찾아오신 것.
주님은 모든 사람 누구 '서부교회 모든 교인들 다 회개하라'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너 아무것이 너 회개해라. 아무것이 너 회개하되 아무것이 너 어느 것 그것 회개하라. 너 말버릇 그것 회개해라. 너 욕심 그것 회개하라. 너 행동 그것 하나 회개하라.' 요렇게 하고 계시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마음이 드는 것이 전능자가 찾아온 그분 영접하는 것이라.
회개에서 탈선만 안 하고 이탈만 하지 않고 회개 속에 회개에 계속 회개에 있는 것이 전능자의 품 안에 안긴 것이라. 그러면 회개로 죽는 날까지 계속하는 것은 전능자의 품 안에서 세상 끝날까지 그대로 안겨서 무궁세계에 가는 것이라.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고 놓지 않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