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1:54
인간구원이 주님사귐이다
1988. 3. 23. 수새벽
본문 : 누가복음 16장 9절-10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의 도인 이 말씀은 우리의 지식이 먼저 돼야 되고, 지식이 먼저 돼야 됩니다.
세상에 많은 지식들이 있지마는 이 지식을 둘로만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지식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
사람의 지식은 출처가 배암에게서 나와서 거짓말 반 거짓말 꾀우고 속이고 죽이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살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리라는 그 과학은 옳은 것이지마는 그것도 사용한 것만치 죽지 사는 법은 없습니다. 한 지식 하나님의 지식은 영원히 산 지식이요 또 살리는 지식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두 지식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자기가 언제든지 높여 섬겨 복종해야 하는 지식이고 사람이 귀하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인 이 진리 밑에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위해서 있는 존재지 사람이 진리보다 높아서 진리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 아닙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지식은 높이 섬겨 내가 거기에 속하고 거기에 복종하고 그를 원형으로 삼아서 닮아가고 본받아가야 내가 살지 하나님의 이 지식을, 성경 말씀 하나님의 지식인데 이 말씀을 자기화 시킬라고 자기에게 따라오게 할라 하는 것은 다 그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참람되고 교만한 일입니다.
사람의 이 지식은 통틀어서, 많이 가졌든지 적게 가졌든지 큰 것을 가졌든지 작은 것을 가졌든지 다 그것은 자기의 사용할 하나의 소지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땅 위에서는 평가하기를 인간의 지식을 사람보다 높이 평가하지마는 그것은 잘못돼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통틀어 전부를 말해도 그거는 사람 밑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용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소지물로 되어 있는 것이지 그것이 내 위에서 내가 거기에 속하거나 거기에 지배를 받거나 할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을 할 때에 세상 지식을 이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그 위치를 잘 정해서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 되는 것이고 만일 그 위치를 지키지 안하고 그것을 사람보다 높이 평가하고 거기에 속하고 복종할라 하면은 그때부터 그 지식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우상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로 우리 지식을 삼아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자기 지식을 삼되 자기가 섬길 지식으로, 자기가 높일 지식으로, 내가 거기에 따를 지식으로 내가 모셔 가지고 이 지식 나래 밑에 이 지식의 무릎 밑에 우리는 거기에 속하고 머물러서만 피난처가 되는 것이고 평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먼저 자기의 지식을 삼아야 되고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지식을 삼아 자기를 총 다스리고 거기에 소속할 수 있는, 자기의 영생이 되는, 자기의 생명이 되는,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살리는 것이 되고 사는 것이 되는 이 지식으로 자기가 모셔 가져야 되지 이 지식을 이 세상 지식 모양으로 하나의 소지품으로 하나의 필요한 무슨 자기의 지혜로 이렇게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지식은 꼭 자기가 모시고 이 지식 떠나면 죽는 것을 알고 이 지식을 모셔서 이 지식에게 복종하고 이 지식을 의뢰하고 이 지식에게 자기를 맡겨 놓고 이 지식 나래 아래에서 보호를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대로 내가 행위가 돼야 됩니다. 또 이 지식대로의 사람이 되면 이 지식은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지식대로 우리가 따라서 닮아가고 이 지식화 되어지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지식을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되고 또 알고 난 다음에는 또 더 넓게 알아야 되고 깊이 알아야 되고 더 정확히 알아야 되고, 하나님의 지식을 아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왜 끝이 없는가? 그는 무한함이 들어 있는 무한함의 지식이기 때문에 끝이 없는데 이 지식을 자기가 기억하고 또 이대로 소망하고 실행을 하면 또 한층 더 알아집니다. 또 실행을 하면 더 한층 알아집니다. 평생 이 말씀대로 실행하면 더 알고 더 알고 더 실행하고 더 알고 더 실행하고 더 해서 무한함을 향해 가기 때문에 영원무궁한 하늘나라에서도 끝은 보지 못합니다. 소망 중에 항상 받아가고 이루어 나아가고 성장해 나아가고 더 점점 온전함을 향하여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너무 업신여기고 멸시합니다. 이래서 땅 위에 인간의 지식은 높이 크게 여기고 하나님의 지식은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은 일반이 다 알 수 있는 이 서민의 말로 기록했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성경 말씀은 그 단어라든지 모든 문장 그런 거는 가장 알기 쉽도록 그런 것으로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렇고 땅 위에는 인간들이 모르는 그건 지식들이 많기 때문에 모르는 것 말하면 유명해집니다. 이러니까 다 하나님의 지식보다도 인간의 지식을 앞세우고 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그것은 깊이 분석해 보면은 벌써 자기가 우상이 돼 가지고 있는, 악이 주인이 돼 가지고 있는 연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자기가 모실 자기를 다스릴 법도요 지식이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렇게 자기가 알고 모시고 이대로 복종하고 이대로의 자체가 되어 지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주님이 우리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말하노니, 성경은 구속받은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지 불택자들에게는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살고 있는 이 불의의 재물, 불의의 물질, 불의의 물질은 이 우주를, 널리 말하면 이 우주가 다 불의의 물질입니다. 이거는 일단 만물의 이 피조물의 대리 주인공이 된 인간이 범죄했기 때문에 전체는 다 하나님에게 저주받아서 한번은 없어집니다. 이 우주도 주님이 재림하셔서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의 이것이 완전히 구별되고 나면 그 작업이 끝나면 이런 것들은 다 불태워 버립니다. 그래가지고 원소로 화해집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다시 지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만물을 다시 새롭게 한다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 때에’ 그러면 이거는 다 없어질 것이라. 아무리 미남이라도 없어질 미남인 줄 알고 아무리 미인이라도 없어질 미인인 줄 알고 아무리 영광스럽고 존귀한 지위, 권세, 실력을 가졌어도 다 없어질 것인 줄 알고, 건강을 가져도, 자기가 어떻게 비참한 자기의 비참한 그 현실을 가져도, 이것도 다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뭐 가장 불쌍한 불구자 병신이 돼 있다 할지라도 이 병신을 확 벗을 날이 있습니다. 벗고 가장 영광스럽고 구비한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좋은 것도 없어질 것들이요 나쁜 것도 없어질 것들이라. 그런데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그것을 잘 쓰면 그것이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이 인생이요.
잘못 쓰면 아주 못쓰게 되는 나쁘게 되는 것도 인생입니다.
이래서, 하나 홍포 입은 부자는 좋은 것을 잘못 써 가지고 그것이 아주 나쁜 것으로 화해졌고 나사로는 아주 못쓸것이지마는 잘 썼음으로써 좋은 것으로 화해진 것을 우리에게 주님이 하나 끌어다가 보여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저희가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라는 것은 하늘나라를 가리켜 말하고 지금도 그것을 가집니다. 지금도 이 없어질 것 가지고서 영원한 것을 바꾸어서 이 심신의 없어질 기능 가지고서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기능으로 바꿔 가지고 꼭 같이 사나 없어지지 안할 그 기능을 가지고서, 그 사는 양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각각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걸음은 첫째는 하나님이 복되게 해주셔야 복되고, 또 다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화된 것이라야 복을 복으로 알고 화를 화로 알지 형상화되지 안한 것은 그것은 복은 화로 보고 화는 복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한 자의 말을 맞다고 인정하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말을 인정하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서,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저희가’ 복수말하고 ‘너희를’ 복수를 말한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에게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과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주인인,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피로 값주고 산 하나님의 종이요 깊이 말하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지체요 하나님의 몸이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세워 놓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입니다.
아무리 못나도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그런 것을 알고 이렇게 연합시켜서 우리가 상대해야 되지 하나님을 떼놓고 사람만을 상대하는 것은 이것은 다 땅에 있는 지식으로 어두워진 까닭이지 하나님의 지식대로는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런 점을,‘저희가’ 이 복수한 이것을 기억해서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강하게 굳게 견고케 만들어야 되고, ‘너희를’ 할 때 대접을 한 것도 자기 혼자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혼자 한 게 아니고 주님하고 같이 했고 대접을 받을 때도 나중에 자기 혼자 했기 때문에 혼자 받을 줄 알았는데 보니까 주님하고 같이 받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구속받은 자이기 때문에 주님과 나눌 수 없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 위에 우리의모든 행동이 주님을 상우는 행동 또 주님을 돕고 위하는 행동 그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내가 뺨을 맞을 때에 주님이 같이 맞습니다. 만일 내가 의로 인해서 내가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고난 곧 주님이 당신의 일로서 이 인간의 모든 범죄를, 그뭐 범죄 형을 당신이 받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그런 의로 인해서 당하는 그 형은 주님이 당신이 당하는 것이니 당신의 일을 하는 것이요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요 당신을 돕는 일입니다.
또, 내가 불의를 행함으로써 만일 매를 맞았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에게 짐을 지워 주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고 의로운 일로 그러면 주님의 짐을 벗겨 주는 것이고 주님을 돕는 일이 되는 요것을 우리가 깊이 해석해서 가지고. 언제든지 나는 독립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대접하라 말이요 도우라 말이요 위하라 말이요 그를 유익되게 하라는 말이니 그 대접한 거 친구를 사귀는 그 사귄 것은 없어질 거 가지고서 사귑니다. 없어질 거 가지고, 안사귀어 봤자 없어집니다.
사귀는데, 안 쓰고 재가 악용해도 없어집니다. 이 친구 사귀는 데에 써도 없어집니다. 친구 사귀는 데에 쓰면은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바뀌어지고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으로 바뀌어지고 죽은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이것이 친구 사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이것을 친구 사귀는 거 이외에 달리 쓴 것은 그것이 다 영원한 멸망으로 화해졌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고통스러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현재의 고통과 친구 사귀는 이 생활 하지 안한 사람이라면 현재에 세상에서 어떻게 제일 비참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지옥에 제일 존귀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고 높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존귀하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나라에 제일 낮은 것도 이보다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한 자들은 이 세상보다 못지 안할 자는 없고 불택자로서는 이 세상보다 좋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없어질 때에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없어질 거 가지고서 영원히 있을 거 만든다. 무가치한 거 가지고 영원한 가치 있는 거 만든다.
불완전한 거 가지고 완전한 거 만든다. 유한한 거 가지고 완전한 거 만든다.
일시의 것 가지고 영원한 것을 만든다. 천한 것 가지고 존귀한 것으로 만든다.
모든 사람들에게 욕얻어 먹을 거 멸시 천대받을 거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존재들에게 존대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만들 수 있다 하는 것이 우리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을 항상 잊어버리지 안하고 살고 있는 것이 그런 것이 다 깬 생활이라.
자는 사람이 무슨 생명이야 있으니까 살기야 살았지마는 자는 사람은 자기의 호신도 못 하고 유익할 것도 못 하고 의무도 못 하고 책임도 못 하고 그거는 죽은 송장과 다른 것은 생명만 붙어 있는 것뿐이지 아무 작용은 꼭 송장과 같은 생활 하는 것입니다.
깬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해할 것을 방어하고 자기에게 유익된 것을 마련하고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자기 의무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라.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 이런 것을 다 지식하고 믿는 것이 그것이 다 깬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빚 탕감해 주는 것이 그것이 친구 사귀는 것인데 빚을 탕감해주는 거, 사귀는 것은 뭐이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요, 대속을 돕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보혜사성령이 계시니까 성신의 감동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요 진리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과 성령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우리에게 중보자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중보자 돼가지고서 사활의 대속으로 인해서 성령도 오셨고 진리도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셋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거 외에는 인간을 사귀는 것이 없다, 주님을 사귀는 것이 없다, 대우하는 것이 없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홍포입은 부자가 그 형제들에게 지옥에 가 가지고서도 생각한 것을 보면은 형제 우애가 굉장히 많은 사람인데 세상에서 그 동생들에게 많은 것을 줬겠습니다. 많은 것을 줬다 우리가 추측 추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유익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가지고서는 여기에 오지 않도록 연락해 달라고. 그 모든 것이 다 필요 없고 인간의 영원한 문제는 이 점에 있었기 때문에 이 나 온 이 자리에 오지 않도록 나 생활 하지 안하고 이 자리 오지 않도록 그렇게 해 달라고서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없어질 때에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대우한다는 말인데 이것을 자꾸 새기고 새겨서 얼마든지 새겨서 이렇게 가져야 되는 것이지, 자기 지식을 가져야 되고 그 사람이 돼야 되고 그 행위가 돼야 되고 욕심과 그 소원이 돼야 되는 것이지 이 성경 말씀은 성경 말씀대로 자기는 자기대로 나눠져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셋으로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제에는 대충 말하면 서너가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감화 감동, 인간의 이 주관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감화 감동으로 그 사람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출되는 것은 감화 감동이라는 그 방법 가지고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어떤 모로서도 그 사람을 감화 감동시켜셔 감동이 돼야 구출이 됩니다.
감동이 돼야 구출이 되고 하나는 또 감동이 아니고 그 사람이 위엄에 눌려서 두려워서 구출되는 것도 있습니다. 두려워서 회개하고 구원되는 것도 있습니다.
두려움은 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생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행복될라 하는 것이 본능이고 멸망하지 안할라고 하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에 생의 본능을 움직여 가지고서 그 사람을 구원시키는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 가지고서 그 사람을 두렵게 만들어서 회개시키는 것도 있고, 또 내가 실지로 하늘나라의 심판이라든지 무궁세계에 비참하고 비천한 것이라든지 무궁세계에 존귀한 것이라든지 이런 것을 그 사람에게 보여 줌으로 나의 그 거짓과 참에 대해서 두려워하면서 거짓과 불행을 피하고 행복을 가질라고 하는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이 두려워서 또 회개하는 일 있고, 하나는 우리에게 강한 거 하나 있으니까 이것은 소욕입니다. 욕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화로, 그 사람을 감화시키고 그 사람에게 욕심을 소생시키고 그 사람에게 두려움을 소생시켜 가지고서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 있으니 이것은 이 세 가지,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세 가지로 그 사람을 감동을 시키든지 그 사람을 두렵게 하든지 그 사람에게 욕심이 나게 하든지, 서장에 어떤 사람은, 서장은 비밀국인데 거기 들어가면 다 죽는 곳이요 외국인은 그렇게 출입을 못하는 비밀국인데 그 문 앞에 가서 일생 동안을 나오는 사람을, 혹 일 년에 하나 나오거나 몇 해 하나 나오면 하나 나오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서 복음을 전할라고 거기 기다리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묻기를 그 뭣한다고 여기 이와같이 기다리고 있느냐? 이 나라에는 들어가면 대번 죽고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람에게 복음 전할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보기에 ‘그 뭐 할라고 기다리고 있느냐?’ 그 하늘의 소망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서 그 사람이 이상해서 ‘자기가 누구에게 이 사상을 받았느냐?’ 후란시스가 그 사람이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고서 하는 그 생애에 욕심이 충격돼서 그도 이것을 위해서 전 소욕을 여기에만 두고 있으니까 나도 이제 인간 구원하는 여기에다 욕심 두고서 이 안 하고 있는 모든 사람 안 하고 있으니까 이거라도 해 가지고 나는 하늘나라의 소망인 이 욕심이 들어서 그걸 하고 있는데 그 욕심은 누구한테 전염 받았느냐 하면은 후란시스에게 전염 받았다고 말하더랍니다. 거기에서 전감을 받아가지고서 피동된 그 소욕에서 생겨진 것이라 하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활의 이 복음과 영감과 진리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인데 구원하는 그 구원의 실효가 있는 방편은 감화와 소욕과 두려움 그것입니다.
이래서,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은 아내의 그 전도하는 말을 듣고는 그 남편이 회개하지 안했지마는 아내의 두려움을 인해서 그 남편이 회개했다 이랬습니다.
아내의 두려움이라 말은 아내가 그 남편 두려워서 절절 매는 그것 말하는 게 아니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뭐 절절매고 높이고 이렇지 실상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두려운 듯 하는 것은 그 사랑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혹 오해를 하고 구원에 방해될까 싶어서 절절 매지, 그러면 예수 믿는 목사가 제일 두려운 것은 쪽 믿음으로 믿는, 안 믿는 남편에게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까짓 거 아무것도, 발로 차 버리면 뭉케 질 것도 두려워합니다.
왜? 내가 잘못해 가지고서 그것으로 충격돼 가지고서 아내의 구원을 방해할까 싶어서. 구원을 방해할까 싶어서. 그 가정에 구원이 방해될까 싶어서 막 상전같이 모시고 벌벌 떠는 것이지 그까짓 걸 두려울 게 뭐 있소? 장관이고 대통령이고 땅 위에 뭐 하나님 외에는 두려울, 게 하나도 없어. 죄를 지으면 두렵지만 죄 없는데 뭐 두려워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래서, 두려워함으로써 그 남편이 회개했다. 그 사람이 그 아내가 똑, 처음에는 미치괭이로 봤는데 죄짓는 걸 두려워해서 지옥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모든 걸 알고 계시니 그분의 보응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거스릴까 싶어 두려워하고 사람들의 눈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마는 그분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못 보는 데에서도 불의를 벌벌 떨고 하는 그걸 보고서 그 남편이 회개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현 생활에서 이 세 가지 구원을 하기 위해서 내 언행심사, 내 입으로 증거하는 거, 내 행동하는 거, 내가 소망하는 거, 내가 가진 사상, 내가 노력하는 거, 내가 가치로 삼는 거, 뭐 가치로? 땅에 것을 가치로 삼지 안해.
땅의 것의 가치는 없어질 가치인 영원한 없어지지 안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없어질 가치 그거 가지고서 없어지지 안할 가치를 위해서 자기는 투자할 이것을 본다 그거요.
내가 말로 행동으로 내 모든 소망으로 사상으로 평가로 비판으로 판단으로 그런 거로 해서 사람을 감동으로 또 욕심을 내도록 하고 두렵게 하도록 해 가지고서 어쩌든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고 마귀의 형상을 벗도록, 이 멸망을 벗고 구원을 차차 입어 가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땅 위에서 있는 것 가지고 여기에 투자해서 여기에다가 이비용으로 쓰는 거, 자기의 젊음도 자기의 건강도 자기의 모든 기능도 지위도 권세도 여기에 이 자본으로 삼으면은 그 사람이 지혜 있는 청지기라. 지혜 있는 청지기 뭐 돈도 자기가 쓰고 나면 이 구속에 쓸 게 뭐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라.
자기가 어떤 높은 권세 있어도 그 권세를 자기가 써먹어 버리면은 그 권세 가지고서 인간을 구원하는 친구 사귀는 일은 못합니다. 자기가 마땅히 쓸 권세지만 그 권세를 안 쓰고 그 권세를 인간구원하는 여기에 자본으로 투자를 해야 그래야 거기에서 그것이 친구사귀는 일이 된다 그거요.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 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것이 뭐이야? 작은 것에 충성되다, 작은 것에 불의하다, 것 그거 뭐입니까? 것 그거는 뭐입니까? 사람입니까 짐승입니까 물질입니까? 것 그거는 뭐이요? 것 그거는 뭐입니까? 작은 것 큰 것 말했습니까? 것 그것은 내나 친구 사귀는 그것 말입니다. 친구 사귀는 그것. 이 세 가지로 인간을 구출하는 그것.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클 수 있다 그말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자기가 이 불의의 재물 가지고서 친구 사귀는 일 인간을 구원하는 일, 처음에는 자본이 하나 있었는데 한 개밖에 없는데 하나 있는 거 가지고서 이 사업에 투자하는 자는, 하나 가지고 투자하는 자는 뒤에 억억만도 더 가지고 투자할 수 있는 억억만도 더 가지게 되고 억억만으로 투자해야, 억억만의 자본이라야 능히 달성할 수 있는 그 일도 달성시킬 수 있다 그말입니다.
구세군 그 창설자 월리엄 부드는 이런 진리를 깨닫고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 빈몸 두 부부가 나서 가지고서 그는 물질로 인간을 돕겠다하는 그거 나섰는데 거지라 하나도 없어.
이랬는데, 자기에게 있는 거 다해 가지고서 이 친구 사귀는 일 하니까다하고 나니까, 하나 다하고 나니까 둘이 왔고 둘 다하고 나니까 열이 왔고 열 다하고 나니까 천이 왔고 천 다하고 하니까 만이 왔고, 이래서, 그 어떤 사람이 통계를 맞춰 놨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지금은 아마 더 그럴 것이오. 통계를 맞춰 놨는데 ‘역사상에 물질로 인간을 구원한 그 물질의 액수는 구세군 창설자 월리엄 부드가 그 액수가 제일 높았다’ 하는 그런 통계 것을 제가 언제 봤습니다. 그것이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 큰 데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 큰 데도 불의하다는 요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우리 진인에서는 지금 청빙제가 했기 때문에 청빙제 되기 전에는 그걸 다 내가 혼자 책임지고서 내게 하나님 이 지능을 주신 대로 그것을 다 비판해서 이래 하기 때문에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따라오고 불평해 따라왔지마는 결과는 다 좋아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 그걸 봤대요. 이 교회 보고서를 떡 보면서, 보고서를 보면서 보고서에 거기는 전부 교역자 이름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교역자를 낱낱이, 처음에 보니까 처음에 참 미꾸라지가 용됐다 하더니마는 처음에 그거는 참 헌신짝 같은 것이 아주 존귀한 것이 됐습니다. 처음에 이 도에 들어와 가지고 시작할 때와 지금과 그것이 천해진 자 하나도 없고 말할 수 없는 몇 십 배 몇 천 배 존귀해졌어, 존귀해지지 안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예수 믿으면 다 그런 줄 압니까? 아니오. 다 믿기 시작해 가지고 천해지고 멸해진 것 많습니다. 이 진영에는 천해지고 멸해진 것이 없어, 한쪽만 보면 그런 거 아닌 것 같지마는 모든 면으로 이 전면적으로 이와같이 다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이 보고 ‘우리 진영에 보자. 하나님의 축복이 있나 저주가 있나? 여기에 우리 진영에서 하나님에게 몸 바쳐 산, 다른 사람들은 다 모르고 하니까 이 교역자들을 보자.’ 교역자 보니까 그까짓 거 똥덩이 같은 것이 금덩이가 다 됐더랍니다.
그래 봐요, 안 그런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지 안해요. 금덩이가 되고 나니까 이거 교만해 가지고 우쭐해 가지고서 망령을 부려서 제욕심대로 하면 하나님 떠나갑니다. 물러가요.
보면 알아.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짓이 없습니다. 인간이 실수해 거짓말 할 수 있지만 거짓말인 걸 알고 나면은 어떤 손해가 가도 그거는 실행해서 고치지 이해로 가지고서 자기를 더럽히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청빙제가 됐는데 그 사람이, 내가 저게, 무슨 교회인고? 나는 이름을 불러서 나는, 이름을 안 하고 그 사람을 보고 기도하는데. 저게 그 뭐꼬? 야로에 있는 우리 O 조사님이 거기 가 있어요. O 조사님을 내가 보낼 때에 내가 그 사람이 설교 한 번 하는 것 보고 조만하면 싹수 있다 한 설교가 뭐이냐 하면은 빌라델비아 교회설교를 하면서 ‘거룩하고 진실하사’하는 거룩을 해석할 때에 뭣이든지 우리는 따져야 된다. 옳고 그른 거 뭐이든지 따져야, 자기에 대해서도 따지고 남에 대해서도 따지고 크나 작으나 모든 것을 따져서, 구별해가지고 따지고 따져 가지고 살아야 된다. 고것만 하면 됐소. 고것만 하면돼. 이러기 때문에, 내가 그때 삼년 동안을 거기에다가 기한하고서 참 년 동안 거기에 있으면서 고대로만 살면 나중에 하나님이 같이 하면 능력이 나을 것이다 하고서 보냈었는데 저 먼저께도 싹이 안 나서 아직까지 싹수가 안 보인다 내가 이렇게 말했어.
지극히 작은 산골에 아무도 모르는데, 아무도 모르는데 셋 집이 사는 고 셋 집 사는 고 마을에서 자기가 고게서 요 복음 가지고서 셋 입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셋 집 사람을 구원할라고 합니다. 구원할라고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큰 것도 된다. 고것은 그랬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제 천 명 있는데 세우고 만 명 있는데 세우고 그 사람이 온 세계를 제일 이것으로 구원할 수가 있는 데까지 하나님이 성장시킨다 하는 요것을 요게 계약으로 선포해 놓은 것이오.
조그만한, 아주 시골 조그만한 교회에서 요 방식대로 하는 사랑은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데까지 크게, 고 방식만 하면은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어데까지 커진다.
네가 조그만한, 오계명 지켜 부모에게 순종해 가지고서 양제 먹일 때에 지극히 작은 양 먹이면서 믿음 지키는 요 믿음 지키니까, 양 먹여서 믿음 지키니 그 믿음 가지고서 사자도 찢고 이렇게 했으니까 그 믿음이면 골리앗 대장을 넉넉히 죽일 수 있겠다 하기 때문에 그 사람 불러다 세우니까, 그 사람 딴 거 안 했어.
저거 내나 물맷돌을 가지고서 항상 짐승들 하는 그거 가지고, 물맷돌 거석하니까 그 짐승들 다 물리쳤으니 이거는 자기가 믿음으로 할 때 물맷돌에 하나님께서 같이하는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곰과 사자를 물맷돌로 태려서 죽인 그 능력이 물맷돌과 함께 골리앗 대장을 쳐주십시오 하고서 물맷돌 한개 때리니까 그 이스라엘 전체가 뻘뻘 떨고 있는 대장이 퍽 꺼꾸러지지 안했소? 이게 성경이라, 성경.
어데서 크게 될라고 하고 있어? 크게 될라고 소원하지 마라, 크게 될라고 소원하지 말아요.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데도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지극히 큰 데도 불의할 수 있어. 이것이 양성원 학생들이 나아가는 길이라.
뭐 지금 큰 걸? 벌써 그 사람이 있다가 ‘나는 하나님이 실력 길러주니까 내가 보니까 이 지혜든지 지능이 있는데 내가 시골에 내가 묻힐 필요가 없다. 나도 도시 가 가지고 내가 살아야 되겠다. 여기에는 작은 곳이니 큰 곳에 가 살아야 되겠다. 우리 총공회는 무대가 좁으니까 큰 무대에 나가 살아야 되겠다.’ 벌써 큰 병이 들었소. 성령이 아니고서 그거는 순전히 사욕이요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키우는 것은 주님이 키우시는 것이오. 자기는 지극히 작은 데 충성하는 그것이 자기 커져 나가는 그 방편입니다. 어리석어. 암만 배워야 몰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양성원 학생들도 허욕을 가지지 말아요. 어데서든지 주님 보고 살아. 주님은 사람에게 피동되지 안해. 사람에게 천거 안 받아도 주님이 천거하면 돼.
요셉이가 사람 천거로 됐습니까? 그 사람이 자기 높일라 하다가 됐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니까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에, 그 동안 자꾸 연단시켜 하나님 쓸모 있으니까 됐어. 우주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수 있는 제사장, 선지자, 왕의 이 직책은 가졌는데 충성이 없기 때문에 헛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