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02:19
이차 방편을 써보자
1986. 9. 5. 금새벽
본문:누가복음 5장 5절∼11절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아무런 저희에게 별 재미있는 일이 없고 늘 교훈을 들어도 자기들에게 해당 없는 그런 교훈이고 그저 공중에 집 짓듯이 다 모두 자기네들 듣기에 허망하고 또 뭐 거짓말 같은 그런, 모든 자기들에게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말씀만 하시니까 처음에는 따라다니다가 나중에는 낙심하고 그만 다시 옛날 그 고기 잡는 업을 하는 데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밤새껏 이제는, 뭐 예수 따라다녀야 소용 없고 이러니까 고기나 잡아 가지고 옛날과 같이 그렇게 뭘 성공을 해 봐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을 버려 두고 고기 잡으러 가서, 고기를 잡는 데는 옛날 그 고기잡던 솜씨가 있으니까 그 솜씨대로 지금 고기 잡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해도 아무런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도 고기를 잡지를 못했습니다.
만일 그 시몬이가 예수님 따라다녀도 별 재미있는 일이 없고 해서 그만 돌아가 가지고 안 믿을 때와 같은 그런 업이라도 해 가지고 뭣을 좀 자기 소원을 이루고 해 보자 하는 그런 의욕이 없었더라면 그 참 더 낭패였을 것입니다. 안 된 의욕은 옛사람의 의욕이라도 의욕을 가진 그것이 이 시몬에게는 이렇게 영광스러운 최고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한 동기가 되었고 시발이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제일 희망 없는 못쓸 사람은 어떤 사람이 희망 없는 못쓸 사람인고 하니 그저 아무런 의욕을 가지지 못하고, 되는 대로 뭐 될 대로 되라 하고서 의욕을 가지지 못하고 방탕하고 게을하고 이렇게 사는 그 사람이 제일 힘들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런 이 세상적인 의욕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욕을 가져야 뭐이 되겠는데뜻과 욕심이라 말입니다, 의욕이라 말은.가져야 되겠는데 그거 아무것도 없이 뭐 될 대로 되라 하고서 그와 같이 지금 방종, 방탕, 낙망하고서 있는 그런 사람들은 참 제일 그것이 골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우리의 할 일은 기도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뭘 보이는고 하니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적인 의욕이라도 가지고 제가 뭘을 좀 해 보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의욕을 안 가지는 사람보다는 그 사람을 구원하기가 쉬운 사람입니다.
그런 의욕도 가지지 안한 사람은 어쨌든지 의욕을 가지도록 해야 되겠고, 또 의욕을 가지는 데는 땅에 속한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런 의욕을 가지도록 해야 되겠고, 그런 의욕을 가진 사람은 이제는 예수님이 주시는 그 소망과 방편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돼야 되겠고, 거게서 삼계단으로 이렇게 올라갑니다.
일계단, 이계단, 삼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인데 일계단 없는 사람이 그 사람이 제일 힘드는 사람이고, 일계단 있는 사람은 이계단으로 바꿔야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고, 그러니까 우리가 일계단 있는 사람은 이계단으로 바꾸도록 우리가 자꾸 그렇게 노력을 해서 믿든지 안 믿든지 이계단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우리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일계단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이계단 소망과 이계단 방편으로 바꾸도록 이렇게 우리가 권유해야 되고, 또 자신도 그렇게 해야 되고, 어쨌든지 그 일계단 소망과 방편 없는 사람보다는 일계단 소망 방편이라도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유망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이것은 아주 이것도 저것도 안 하고 방탕하고 의욕을 잊어버리고 뭐 절망 상태에서 그저 될 대로 되라, 뭐 뭐 무슨 뭣이 뭐 있느냐 하고서 마구잡이로 살라 하는 그 못쓸 사람 그 사람이 제일 구원하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런 소망과 의욕이라도 가지도록 우리가 인도를 해야 되겠고, 또 안 믿는 사람의 소망과 의욕을 가진 그 사람에게는 그저 그것만 가지고는 밤이 도록 헛일했습니다.
여게 밤이라는 것은 그때 우리에게 계시로 구원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 밤이라는 그 밤은 하루밤은 하루밤인데 우리의 육체로 사는 일생 동안을 뭐 칠십 년을 살든지 백 년을 살든지 다 그것을 가리켜서 하루밤 나그네 생활이라, 하루밤 생활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밤이 도록 수고해도 얻은 거 없게 된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이 세상 사람과 같은 일계단의 의욕과 소망을 가진 그것도 낙망하고 마구잡이로 이렇게 절망 상태에서 방종 생활하는 사람보다는 조금 고치기가 낫지마는 그 사람도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 소망과 방편 그것 가지고는 밤이 도록 해도 하나도 제 구원은 이루지 못하고 다 헛일하고 그만 죽기 쉬운 것입니다.
요거 여러분들이 자꾸 말했는데, 일계단의 소망과 일계단의 방편 그거는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진 소망이요 방편이요 예수님 배반하고 안 믿는 사람같이 돼 가지고 지금 이름은 믿는다 하고 옛날 믿은 거는 생각이 있기는 있지마는 안 믿는 사람과 같이 돼 가지고 지금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런 방편을 가지고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런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은 뭐인가? 제 욕심대로 이거 해 보자 저거 해 보자 하고서 욕심에서 이래 소망을 결정한 것이고, 또 자기의 생각과 주관과 경험 체험 이런 거 가지고 지금 그 방편을 삼아 가지고 하는 생활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 생활이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그 생활이 있는가 없는가, 그 생활이 뭐 백의 한 구십 이상이 그 소망과 그 방편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뭐 이해가 됩니까? 그게 성경대로 해석이라는 그것이,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자기들에게 깨달아집니까, 그저 자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주 대서 말을 꾸며대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들려집니까, 성경에 참 일계단의 그 소망과 방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뭘 할라고 하지 안하고 그만 믿어 봐야 소용 없다 하고서 세상 사람과 같은 그런 방편과 욕망을 가지고 사는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그것을 인정이 됩니까? 자기 개인이 자체가 인정이, 자체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각단지 한번 물어 보면 좋겠는데, 그저 여게 어북 잘믿는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데 ○○○선생이지 ? ○○○선생은 지금 어떤 방편을 가지고 있어요? 일계단을 가지고 있는가, 이계단을 가지고 있는가, 일계단과 이계단을 겸해 가지고 가지고 있는가 어떤 거 가지고 있어요, 지금? 냉정스레 한번 비판해 봐요. 일계단? 아마 일계단이라는 말이 거석할 거고 이계단이 없지는 안하지요. 이계단은 거게 조금 섞였지요.
이계단은 섞였지마는 거의가 일계단일 거라.
○○○선생은 일계단이야 이계단이야? 중간반 반사 노릇을 하고 있지마는 일계단이 대통 많을 것이고 이계단은 조그매 섞여 있을 것입니다. 섞여 있을 것입니다.
자, ○○○장로님, 일계단입니까 이계단입니까? 예? 일계단? 나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일계단은 아마 조그매 섞여 있을 것이고 대폭이 이계단일 것입니다.
이계단으로 뭐 지금 하는데, 그 이계단 일계단이 반반이나 섞여 있는지 혹 이계단이 좀 많을란지, 나는 생각이 이계단이 좀 많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을 가지는데.
여게 따져보면 다 그렇습니다. 얼추 보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일계단의 소망과 일계단의 방편에서 헤매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이제는 내 방편은, 내 생각대로, 내 주장대로, 내 뜻대로, 내 경험대로, 체험대로 내가 모든 사람을 보아서, 남을 보아서 깨달은 그 모든 거 이거 깨달음 내 지식 ‘내 지식대로 내가 해서는 이것은 전혀 이거는 헛일이다.
이거는 전혀 헛일이다.’ 하고서 자기 생각, 자기 지식, 자기 주관, 자기의 경험, 체험, 방편, 꼭 안 믿는 사람이 가진 거와 같은 그런 지능을 가지고 그 계획을 가지고, 자기의 지능을 가지고 이렇게 해 볼라고, 자기 지능으로 뭘 해 볼라고 하는 그것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이 많지를 못합니다. 우리 서부교회도 그것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이 아마 별로이 많지를 못할 것입니다. 목사들도 그렇습니다.
목사가 왜 안 되느냐? 저도 이렇게 일 계단의 소망 그런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하지마는 그래도 뭣인가 구름이 끼어서 능력이 안 나타날 때에는 그때는 나도 모르게 일 계단의 방편과 일 계단의 소망으로서 벌써 나도 모르게 옮겨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기도 가운데서 ‘아, 내가 이제 일 계단 소망과 일계단을 방편을 내가 하고 있는 사람이로구나.’ ‘내 힘, 내 능력, 내 열심, 내것 가지고 하면 되겠다.' 또 자기가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마는 전적 주님이 주시는 방편과 주님이 주신 그 소망에만 딱 집중하지 안하고 일계단 이계단이 섞여 가지고 있는 그런 때가 많다 말이오. 이계단의 소망만 가지면 좋은데 이계단의 소망에 일계단의 소망이 가끔 가다가 끼어 들어올 때 있다 말이오. 끼어 들어오면은 그것으로써 어두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다 보면 그만 주님이 주신 욕심대로 하지 안하고 제 욕심대로 하기가 쉽다 말이오. 주님의 주신 욕심대로 하지 안하고 제 욕심대로 하는 그것은 내나 제가 가진 일계단의 소망이지 이계단의 소망이 아니라.
이계단의 소망은 어떤 게 이계단의 소망인고 하니 주님이 주신 소망이라, 주님이.
주님이 주신 소망이 이계단의 소망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정이 됩니까? 처음에는 ‘내가 고기 잡아 가지고 좀 해 보겠다’ 한 그것은 일계단의 소망인데 안 믿는 사람의 소망이지마는 예수님께서 ‘저 깊은 데 가서 그물 던져 고기 잡아라’ 했으니까 그 잡으라는 그것은 이계단 소망은 베드로가 그 방편인 주님이 시키는 대로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던져서 이렇게 그물을 쳐 가지고 고기 잡을라고 하기는 했지마는 그 이계단의 소망은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소망을 줬는데 그 소망 줄 때에 그 소망을 시몬이가 그 소망을 가졌습니까, 중심으로 가졌습니까, 가지지 안하고 억지로 순종했습니까? 억지로 순종했습니다.
하도 따라다니니까 주님이 하는 말씀은 자기에게 거슬리는 것마 자꾸 말하고, 왜? 거슬리는 말 하는 것은 하늘의 소망을 자꾸 두고서 가르치는데 땅의 소망을 하니까 맞을 리가 있습니까? 안 맞는다 그거요.
거슬리는 말만 자꾸 말하고 있는데, 또 이 고기 잡는 데 와 가지고 또 이래 하는 것 보니까 ‘이제는 됐다, 야나지게 됐다, 이제는 이제 밤새도록 고기 못 잡았으니까 고기가 밀리지 안하고 고기가 지금 어만 데 가 가지고 있고,’ 고기가 오는 때가 있습니다. 고기도 말이지요. 고기가 시기를 따라서, 그 절후를 따라 가지고 오는 때도 있고, 또 밤낮을 따라서 고기가 오고 가는 것도 하고 있고, 또 이 육지에서는 모르지마는 바람 따라서 고기가 오고 가고 하는 것도 있고, 바람 아무것도 안 불어도 바다 속에 있는 모든 온도, 바다 속에 있는 온도에 따라서 그 고기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다 합니다.
시골에서는 날이 궂을라 하면 그 구리라고, 구렁이. 큰 배암 그 배암이 나오면 ‘이거 날이 궂겠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라면 모두 노인들이 말하기를 저 참 미물의 짐승이지마는 아주 저 배암이 날이 궂고 또 일기가 좋을 것을 똑똑히 안다고서 아주 그만 그래 가지고 거기다가 절을 하고 그래 복을 비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생긴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용이 지큼이라 해 가지고 자기 집에 큰 구렁이가 있으면은 그것을 아주 기뻐합니다. ‘아, 우리 집에 지큼이, 우리를 복을 지켜 주시고 주는 지큼이 왔다.’ 이래 가지고 뭐 거기다가 뭘 차려 놓고 절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것만 그런 게 아니고 이 지네 같은 것도 말이요, 지네 같은 것도 그것이 유달스럽게 이거 땅 속에서 나와서 설칩니다.
나와서 이래 보면은 지네 같은 것도 저도 봤는데 한 몇십 마리가 되는지 뚤뚤 뭉쳐 가지고 이래 바깥에 나와 가지고 그 안에 굴에 있는 것이 나와 가지고 이렇게 뭉쳐 가지고 있는 것을 봤다 말이오. 그거 나올 때 있고, 또 개미는 여러분들이 잘 봤을 겁니다. 개미도 개미 이사 간다고 또 나와 가지고 그거 설칩니다. 그저 뭐 줄줄이 이래 가지고 쭈욱 개미 이사 간다, 또 개미 장가 간다 뭐 이라면서 뭐 그거는 수천 마리가 쭈욱 잇대 가지고 자꾸 줄을 따라서 자꾸 나옵니다. 저거 있던 집에서 나와 가지고 자꾸 딴데로 이사를 가요.
그런 것이 뭐 때문에 그러냐? 그게 뭐 알아 그런 게 아니고 그 본능을 가지고, 생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땅 속에 있는 기후가 변동이 되니까, 기후가 변화되니까 거기서 떱떱하든지 혹은 갑갑하든지 이 기후가 변동되니까 기후 변동에 따라서 못 견뎌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 속에 있는 고기도 그렇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아예 밤새껏 고기 잡을라 해도 고기가 안 잡히는 거 보니까 지금은 고기가 그들이 어데로 몰렸나 그걸 모르도록, 몰린 데만 보면 가서 뭐 막 주워도 주울 만치 고기가 몰려 가지고 분명히 있는데 거게는 고기가 없으니까 예수님이 ‘고기 잡으라, 깊은 데 가 고기 잡으라.’ 하니까 낮이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안하지 깊은 데라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안하지 다 이치에 맞지 않는 방편이니까, 저거 이치에 맞지 않는 방편이니까 비꼬웁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거 될까 싶어서, 될까 싶어서 이거 그물 던지는 거 아닙니다.
선생이 말하기 때문에 선생 말하는 그말에 의지해서 던집니다.’ 책임을 딱 주님에게 딱 전가를 시키고 주님에게 딱 책임을 지워 놓고 저거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 그물 던져서 깊은 데 가서 그물 던져 고기 잡는 것은 이 고기가 잡히고 안 잡히고 우리에게는 책임 없습니다. 우리는 될까 싶어 하는 게 아닙니다. 순전히 당신이 책임을 지십시오.’ 이렇게 하면서 지금 그렇게 던졌던 것입니다. 그거는 주님이 주신 소망이요 주님이 주신 방편이라 그말이오.
주님이 주신 소망은 그라면 우리에게는 뭐 주님이 음성으로 말해 줍니까 환상으로 말해 줍니까? 음성으로 말해 주고 환상으로 말해 주지 안해도 신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주신 소망은 다 주님이 주신 소망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에 주신 소망의 종류를 말할라고 하면은 그 종류가 한정 없지마는 간추려서 말하면은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과 나와의 밀접한 그 관계가 되는 방편을, 그 소망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밀접해져서 하나님으로 부요해지는 소망, 그거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으로 부자되는 소망 말이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자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체로 우리가 부자되는 것. 그러면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진리로 충만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이제 성경이 주는 소망이라 말이오.
하나님 소망, 영감 소망, 진리 소망, 또 무슨 소망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어떤 사람은 알기만 알지마는 억만분의 일도 써먹지 못하지마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달성해 가지고 대속의 공로가 부강해서, 대속의 공로를 사죄를 어떤 사람은 억만분지 일도 못 입었는데 어떤 사람은 사죄를 다 입고 칭의를 다 입고 화친을 다 입은 사람도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죄에 부자가 됐기 때문에 그 사죄를 아무도 뺏지 못하고 사죄가 그 사람에게 없어지지 안해요. 그러면 그런 것 다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 진리에 대한 소망, 또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소망, 그다음에는 자신이 온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그 소망, 또 자신의 권위 소망, 권위 소망, 이제 “모든 군왕은 네 양부가 되고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되고 너와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어깨에 메고 오고 네 발의 티끌을 핥으리라” 하는 이것이 뭐이냐 하면은 자기의 영광의 소망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네가 이렇게 존귀해져서 땅위에 있는 모든 세력들이 막 너를 이래 높이고 우러러보고 네게 따르고 네 자체가 인격적으로나 또 권위적으로나 대우적으로나 영광적으로나 존귀적으로나 모든 사람이 나를 멸시한다, 천대한다, 반대한다, 나를 해친다, 대적한다 할 때에 그런 것을 내가 한번 직접으로 내 힘으로 가지고 한번 대결해서 악을 악으로 대결하고, 이거 제가 나한테 모략 중상하니 나도 저한테 모략 중상을 하고, 제가 내게 대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이렇게 나를 해치니까 나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한번 해 보자 하는 그것은 누구의 방편이요? 주님이 주신 방편입니까, 그거 일차 방편이요 이차 방편이요? 일차 방편이라 말이오. 일차 방편이라.
이차 방편은 “네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긴 것만치 사람들이 너를 존귀히 여긴다.
또 네가 하나님에게 복종한 것만치 사람들이 네게 복종하게 된다. 네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서 하나님에게 권위를 돌리는 것만치 사람들이 너에게 권위를 인정하고 돌리게 된다. 네가 하나님 후대하면 사람들이 너를 후대하고, 네가 하나님을 박대하면은 사람들이 너를 박대하고, 네가 하나님을 천대하면 사람들이 너를 천대하고,” 이렇게, 네가 사람에게서 닥쳐지는 그런 모든 일을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지 말고 하나님과의 네 관계가 잘못된 그걸 가지고 가르친다는 그것을 깨닫고 너는 사람과 무슨 관계 있으면 직접 관계할라고 하지 말고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또 “모든 사람이 네발의 티끌을 핥기까지 이렇게 존대할 것이다” 이러니까 그 방편을 이 인간 일차 방편 쓰지 말고 이차 방편을 써서 너를 존귀해져라. 그러면 자기 존귀해지는 것도 주님이 시키는 방편이 있다 그거요.
또 성경에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는다, 위에 있고 아래 있지 않다,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된다.” 하는 이런 것은 전부 자기 자체에 대한 소망이라 말이오. 성경이 주는 자기 자체, “네가 이렇게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되고 머리되게 된다, 모든 군왕들이 너를 이렇게 막 어깨에 메고 돌아다닌다, 모든 군왕들이 네 발의 티끌을 핥기까지 된다.” 주님이 주시는 인간에 대한 소망 이것을 달성해 볼라고 주님이 시키시는 그 방편대로 하면은 이와 같이 된다 말이오.
이와 같이 되고 난 다음에야 “과연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래 되고 난 다음에는 ‘참, 주님의 말씀대로 하니까 과연 이렇게까지 되는구나.’ 그때사 깨닫지 지금은 암만 깨닫는다 해도 못 깨닫는 것이라 말이오. 자꾸 한 것만치 사람이 깨달아져요.
또 물질에 대해서도 이제 “다른 사람에게 꾸어 주지 꾸지 안한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미국 나라가 제일 다른 나라에게 많이 구제하고 빌려 주는 게 많습니다.
제일 부자요. 뭐 일본 사람들 저거 그래 쌓아도 일본 사람 저거는 남한테 구제하는 것 안 해 주는데 미국 사람 구제한 거 삼분지 일만 해도 저거가 거지가 돼 버립니다. 아무것도 없어져 버려. 미국에는 그만치 구제한 그것이, 구제한 것이 일본 재산의 지금 몇십 배 되는 재산을 다 구제했다 말이오. 그만치 했습니다.
이러니까, 물질적으로도 그리 되지, 또 모든 소유적으로도 “여러 배 백 배가 네가 더 부강하게 되어지리라” 이게 다 예수님이 주신 소망이라, 예수님이 주신 소망이요.
모든 원수와 대적들을 대하는 데에서 어찌 되느냐? 맹수와 같은, 사자와 같은 대적이 맹수가 있고 불구덩이와 같은 그 혹독하고 잔인한 그런 모든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를 바라보면은 모든 것이, 사자구덩이에 들어가도 사자가 하나도 해하지 못하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불 내음새도 나지 안하게 되는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다 소망이라 말이오.
소망인데, 주님이 주시는 이 소망이 성경 가운데 많이 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우리게게 영생도 주님이 주신 소망이요, 완전자 되는 것도 주님이 주신 소망이요,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것이 다 네것이 된다는 그것도 예수님이 주신 다 소망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 소망을, 성경이 주신 이 소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 그거요. 성경이 주신 소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데 그 소망 가운데에는 두 가지 소망이라 말이오, 두 가지 소망.
소망 가운데는 주님이 주신 소망 가운데는 두 가지 소망인데 이차 소망은 뭐입니까? 이차 소망은 땅에 속한 거야. 이차 소망은 땅에 속한 것이고 삼차 소망은 누가 줬습니까? 삼차 소망은 누가 줬지요? 그것도 주님이 주지 안했소? 삼차 소망은 그것은 이 물질에 속한 소망이 아니고 물질을 초월한, 자체가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고 천상 천하의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꼭 같은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삼차 소망인데 주님이 주신 소망이라 그거요.
이차 소망을 주님이 주셨는데, 믿는 사람들이 땅에 있는 물질 문제, 땅에 있는 인인관계 문제, 이 모든 시비 문제, 이 모든 자기를 천대하고 멸시한다는 이 멸시 천대받는 이런 모든 문제 이런 문제의 해결을, 이런 문제 해결을 성경이 주는 그 소망을 가지고 문제 해결할라고 하지 안하고 성경이 주는 “네가 천한 사람이 이렇게 존귀한 사람이 된다, 멸시받던 사람이 이래 막 존대하고 이래 환영하는 사람이 된다.” 주님이 주시는 그 소망을 가지지 안하고서 세상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이 소망을 가지고 이 일을 해 볼라고 하고 또 방편도 그 방편을 쓰는 사람은 암만 써봤자 가면 갈수록 더 어두워지고 점점 고통이 심해지지 밤이 도록 수고해야 얻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 간단하지만 요 말씀 가운데는 뭐 얼마나 우리에게 구원 얻는 이치를 전부 다 간단 명료하게 다 보여 주고 있다 그거요.
그러면, 그런 데 대해서도 주님이 주신 그 방편을 써. 주님이 주신 그 방편을 쓰니까 이차 소망이 달성이 됐습니다. 알겠습니까? 이차 소망 그것이 성공이 됐는데 이차 소망을 처음에 주님이 주신 그 소망을 그 시몬 베드로가 인정했어요 인정 안 했어요?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인정 안 했습니다.
인정 안 하고 그러면 어떻게 했습니까? 그거는 누구에게 책임 지웠소? 전부 주님에게 다 책임을 지웠다 말이오. 주님에게 책임 지웠어. 이것이 이 성경이라 말이오. 주님에게 책임 지웠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보지요. 해 보는데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해 보는데 주님이 이것은 책임을 져야 됩니다.’ ‘주님 시키는 대로 하면 설마 되고 안 되고 이거는 주님이 책임지겠지’ 그거 주님에게 책임지우는 그게 원리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이 주는 이 소망을 가지면서, 그 소망을 가지면서 내가 시키는 대로 그 방편대로 하면서 내가 그 방편대로 하니까, 그 방편대로 내가 하니까 방편대로 하는 내 방편으로 인해서 되어진다 그렇기 쉽습니다. 이차 소망을 이차 방편으로 하면서 ‘그렇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된다 하는 그 소망을 시몬이는 그 소망을 가졌어요 소망을 행동하지마는 가지지 안하고 부인했어요? 그러면 부인한 게 잘했어요 못했어요? 부인한 게 잘됐어요 못됐어요? 부인한 게 잘 됐어. 요거 여러분들이 또 알기가 힘이 듭니다. 부인한 게 잘됐습니다. 부인해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 가운데 있는 이 소망 여러가지 있지 안해요? 그 소망을, 우리가 소망을 예수님이 ‘이 소망을 가져라’ 하고서 ‘네가 이렇게 한번 해 봐라, 성경대로의 방편으로 해 봐라.’ 이럴 때에 `그라면 틀림없이 된다’ 하는 그 소망, 그 소망을 자기가 가지는 것보다도 이런 우리 속에는 그 소망을 가지지 않는 것이 그것이 필연적이요, 그게 자연적이요, 그거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거는 뭐 하나님이, 되고 안 되는 건 하나님께 매였지, 하나님이 하시면 되고 안 하시면 안 되지.’ 이렇게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지우는 사람이라야 그게 이루어집니다, 그 이상하게도. 이러지 안하고 이래 하니까 되겠다는 책임을 제가 진 것만치 방해가 됩니다. 제가 진 것 만치 방해가 되고 그 책임을 저는 안 지고 하나님에게 전적 다 지우니까 놀랠 만치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거요.
그러나, 주님이 주신 그 소망을 속으로 인정은 안 했지마는 그 소망을 베드로가 소망을 달성하는 그 방편, 그 방편은 행했어요 안 행했어요? 그 방편은 행했어요.
그 방편은 행했는데, 그러면 그 소망을 자기 속으로 인정 안 했지만, 인정은 안 하지마는 그 소망은 가졌어요 안 가졌어요? 그 소망은 속속들이 인정은 안 하지마는 그 소망을 가졌습니까 안 가졌습니까? 가졌습니다. 소망, 인정 안 하는 소망으로, 인정 안 되는 소망으로 가졌어. 인정 안 되는 소망을 가졌고, 또 그 방편은 인정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방편은 인정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인정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저 왜 또 확신이 없노? 인정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안 됐어. 이제 안 된 방편을 주님에게 책임지우고 복종합니다. 안 되는, 믿어지지 않는 소망을 주님에게 책임지우고 그 소망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그랬는데, 그 깊은 뜻은 여러분들이 또 알라면 좀 힘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가서 자꾸 명상해서 생각하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요 쉽게 껍데기로 나옵시다. 그러면 시몬이가 일차 소망 방편에서는 헛일했는데 이차 소망 방편을 주는데, 주님이 주셨는데 그 주신 것을 시몬이가 실행을 안 했다고 하면은 어찌 됩니까, 가정으로 해서. 만일 시몬이가 ‘공연히 되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하고서 그 소망을 억지로라도 그 소망을 가지지 안하고 또 그 소망을 이루는 방편을 사용 안 하고, 소망도 방편도 자기 속으로 마음으로는 그랬지마는 외부로 형식으로서는 다 가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외부로는 가졌지마는 속으로 안 가지고 해 봤습니다. 속으로 안 가졌지지마는 해 봤소. 속으로는, 소망도 가지지야 안하지만 속 중심에는 가지지 안하고 지금 주님 한번 콧방 줄라고 지금 하고 있다 그말이오. 그러나 외부에 행동은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행동은 했습니다.
만일 그때 시몬 베드로가 외부적인 그 행동을 안 했다고 하면은 시몬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요? 만일 행동을 안 했다고 하면은. ‘뭐 공연히 뭐, 낮에 무슨 고기 잡아? 선생님 가서 도나 전하시이소. 저는 그런 헛일 안 합니다.’ 안 할라 하면 주님이 그물을 던지겠소 어짜겠소? 안 할라 하면 말이지. 베드로가 안 할라고, 만약 주님이 던질라 하면 ‘그거 그물은 내 그물인데 뭐 자꾸 손을 댑니까?’ 이래 가지고 아주 던지는 걸 반대하고 허락 안 하고 안 했으면, 어, ○○○! 자기나 은혜 받아. 건방졌어. 처음부터 내가 보니까 벌써 자꾸 뭐 그쪽 보고 야단지겨? 자기가 인도해 가지고 온 사람이라도 안 돼. 자기가 은혜 받아야 되지 예배 보면서 얘기하고 자꾸 옆에 사람 간섭하면 그 본뜨면 뭐하구로? ○○○ 저거 어떻게 교만하고 강퍅한지 저거는 좀 대패침으로 찌르든지 좀 이런 커다란 칼로 찔러서 좀 난도질해 만들어야 되지 저거 언제 뒈질란지 몰라, 저거.
지금 나이가 몇 살이요? 예? 나이 몇 살이야? 몇 살? 육십하나? 육십하나인데 처녀 같애, 어찌 건강한지.
사람은 이상해요.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하고 이래 하는 그런 것이 건강하고 수명은 해. 사람이 정신이나 좀 깨끗하게 좀 이렇게 뭐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책임이 무겁거든. 그러니까 마음의 활동이 많고 책임이 무거우니까 밥맛도 적고 잠도 잘 안 오고 이런데 ○○○씨는 그러니까 건강하기는 해. 건강하기는 건강한데 요새 지금 어데 좋은 데 들어갔어, 내가 보니까. 거기 가 좀 죽도록 해 좀, 죽을 때까지. 딴거 하지 말고. 저 또 강퍅합니다. 뭐 불량하기는 얼마나 불량하고. 여기 지금 깡패 한가지라. 그 깡패 노릇은 나서 놓으면 아무도 당하지 못하요. 어떻게 강퍅한지. 지금 인제 구원 얻을 자리 들어갔어. 거게서 꼭 배워.
이렇게, 이 말하는 것도 설교라. 그런 사람 다, 그런 사람 여기 많아요. 그거 자꾸 자꾸 고쳐요. 안 고치면 안 돼.
그런데, 이 베드로가 만일 그때에 속으로는 믿어지지 안하지마는 그래도 껍데기로 소망을 가지고 껍데기로 행동은 했다 말이오. 그 껍데기로 행동하고 소망하는 그걸 안 했더라고 하면은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 내가 생각할 때 ‘이런 사람이 되지 안했느냐?’ 그거 그라니까 자, 주님이 그랬는데 예수님이 시키는 그와 같이 말 안 하고 했으니까 주님 앞에 안면이 있겠소 없겠소? 그래 주님하고 사이가 떡 벌어질 거라 말이오. 벌어지지.
또 돌아가 가지고는 예수님 훼방할 것이라 말이오. ‘공연히 남 밤새도록 고기도 못 잡아서 부애 나는데 와 가지고 뭐 통통 무식한 소리 가지고 뭐 대낮에 고기 잡으라고, 또 엉뚱이같이 깊은 데 가서 던져 가지고 고기 잡으라, 등신같이 물이 깊으면 고기 많은 줄 알고 깊은데 가서 던지라, 이런 얼토당토 안 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그거 재수 없구로. 밤새도록 고기도 못 잡아 부애나는데 또 와 가지고 쓸데 없는 소리 하고 있다.’ 하면서 뒤에 가 빈정빈정하면서 훼방하는 사람 될 거라 그말이오.
오늘 이 서부 교인 가운데서도 그 설교 듣고서 빈정거리고 훼방하는 사람 많습니다. 훼방하는 사람 많아. ‘공연히 말도 같잖은 소리, 그뭐 끌기는 뭐 할라고 끌어?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잔소리 자꾸 한 소리 또 한다.’ 한 소리 또 합니까? 이 설교를 며칠 했어? 여러분들이 모르기 때문에 자꾸 한다 그말이오.
이거는 요 말씀대로 안 해 본 사람은 어찌 돼요? 이 설교한 말씀대로 안 해 본 사람은 훼방합니까 돌아가서 설교한 사람을 존대합니까? 훼방하요. 또 예배 볼 때에 감사가 나옵니까 짜증이 나옵니까? ‘에이구 시간은’ 이랍니다. 이래이래 머리 긁어.
그전에 내가 어떤 권찰 하나 있는데 세상 떴어. 제게 대해서 안된 말을 고치라고 말하면은 그만 그래요. 그거는 그냥 뭐 그냥 안 하고 막 못 견뎌. 속에 그놈이 폭발나서 막 내 앞에서 막 머리를 막 이래요, 막. 이래요, 막. 머리를. 나한테 주먹은 못 내고 하니까 머리를.
나한테 주먹내면 그때는 내가 좀 힘이 있었기 때문에 한 주먹 때리면 꼬꾸라질 것이니까 주먹은, 막 이래 그래요. 그래 내가 흉내를 냅니다. ‘너는 고치라 하면 고치지는 안하고 대가리는 왜 쥐뜯노, 뜯기를? 왜 이리 쥐뜯노, 막?’ 이래도 그것이 참 고치기가 힘이 드는 모양이오. 그래 가지고 고치는듯 해도 나중에 다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도 그랬을 것이라 말이오. 만일 그때 순종해 보지 안했으면, 속으로야 안 믿어지지. 속으로 믿어지지 안하고 이 헛일한다, 그물 던진 것은 예수님을 한번 코가 납작하구로 한번 해대 볼라고 지금 그래 했지만 어쨌든지 행동했다 말이오. 속 마음이야 어찌 됐든지 행동을 했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속 마음이야 어쨌든지간에 계산이야 제가 어떻게 했든지, 무슨 목적이나 욕망은 무슨 욕망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을 한번 콧방 줄라고 했다든지, 그리 안 하면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보지요’ 시키는 대로 해 보면서, 해 보면 ‘해도 공연히 되지도 안한 것을, 목사라 하는 사람은 되지도 안한 소리를 강단에서 자꾸 그래 가지고 다른 사람을 꾀우고 속이고 이러고 있다. 자, 내가 한번 해 가지고 안 되면, 내가 자, 꼭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시키는대로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시키는 대로 해서 안 되면 ‘자,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또 뭐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까? 또 시키십시오.’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안 되면 ‘그래.
당신은 사람을 속이는 사람 아니요? 내가 당신이 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다 해도 안 됐어.’ 이래 가지고 지금 이 목사를 그때는 멱잡이로 한번 내꽂아 버리고 ‘이놈의 새끼 사람을 속이고 기만쟁이 모양으로 착취해 먹고 연보나 받아 가지고 뭐 착취나 해 먹고 이런 도둑놈. 이런 놈은 죽여야 된다.’고 한번 좀 끌어엎어서 한번 그랄라고라도 한번 해 보라 그말이오. 그렇게라도 한번 생각해 보고, ‘자, 안 되면 이제 이거 목사를 한번 끌어엎어서 한번 골병을 들이고 한번 이 도둑놈이라고 한번 해 대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라도 방편을 시키는 방편대로 한번 해 보라 그말이오.
‘성경 가운데 있는 소망을 가지라고 해도 다 헛일이지마는 그러면 그 껍데기라도 그 소망을 가지고 방편대로 한번 해 보자’ 해 보라 그말이오. 안 해 본 사람은 점점 욕하는 사람 됩니다. 안 해 본 사람은 점점 목사와 멀어집니다.
옳은 설교하는 사람과 멀어지요. 점점 주님과 멀어지요. 성경과 점점 멀어집니다.
이 도와 멀어집니다.
이러니까, ‘물에 넣어도 붇지 안할 말을 한다, 얼토당토 안 한 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요 예수 선생을 한번 납작 한번 꺾어 주기 위해서라도 한번 해 보라 그말이오. 베드로는 꺾어 주기 위해서 했어. 이렇게 이제 설교하는 이 목사를 한번 꺾기 위해서라도 한번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보라 그말이오. 무슨 마음을 가지고라도 한번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봐요.
시키는 대로 안 했으면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대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높으시고 지극히 크신 분이고 자기는 말할 수 없는 죄인, 자기는 말할 수 없는 못쓸 인간 삐뚤어진, 죄인이라 하는 거는 삐뚤어진 인간이라 말이오.
자기는 모든 면을 봐도 삐뚤어지고 못쓰고 아무짝도 못쓸 인간이고, 주님은 감히 자기가 주님 가까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존귀하신 분이라는 것을, 주님은 높아지고 커지고 자기는 못쓸 인간이 됐습니다.
그 답안이라는 그 결과라는, 그 결과에 자기는 못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과 주님은 우러러볼 수도 없는, 같이 있을 수도 없는 그런 높은 분이시라는 이 주님이신 것을 깨달은 그 깨달음이 이차 방편과 이차 순종을 안 했으면 그것이 생겨지겠습니까 안 생겨지겠습니까? 그 생겨지겠습니까 안 생겨지겠습니까? 안 생겨지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저 뒤에는 자신 없는가배.
새로 들어 봐요.
순종을 안 하고 ‘공연히 헛된 말’ 순종 안 했으면은, 자, 순종 안 했으면 예수님을 욕하는 사람, 훼방하는 사람, 조롱하는 사람 ‘공연히 사람을 따라다니며, 내 배까지 와 가지고, 대낮에 엉뚱스럽게 저 깊은 데 가서 그물 던져 고기 잡으라고 하지 않나? 밤새도록 고기 못 잡아 가지고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저 뒤에 열심쟁이 오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 말귀를 알아들어야 돼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헛일입니다. 요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은, 왜? 자꾸 설교하는 사람이 말이요, 저 뒤에 사람이 그럴 거라, 뒤에 사람. ‘우리 뒤에는 좀 보지도 안하고 자꾸 앞에만 보고 하네’ 앞에만 보고 하는 게 정한 이치라. 여러분들도 가 심방해 봐. 세 사람이 있는데 그 말씀을 증거하면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꼬박 듣고서 까딱까딱 하며 듣고 이래 자꾸 듣고 있고 두 사람은 이라면은 증거하는 사람의 그 눈과 마음이 어데 가 있어요? 듣는 사람에게 가 있어요 안 듣는 사람에게 가 있어요? 목사도 사람이야. 그래.
이러니까, 듣는 그 사람만 자꾸 보고 설교한다 그말이오. 그렇지 안해요? 안 듣는 그까짓 거는 보기도 싫고 자연히 안 보여져. 그러니까 저 뒤에는 듣는지 안 듣는지 모르지만 내 눈에 안 보이거든. 이러니까 앞으로 와요. 앞으로 오면 자꾸 듣는 걸, 하나 듣는 거 둘 듣는 거 자꾸 이래 듣고 보면 나도 재미있고 자꾸 주고 받고 이렇게 자꾸 깨달아진다 말이오. 저 뒤에 있으니까 뭐 듣는지 안 듣는지 보여져야지.
이 시몬 베드로가 이차 방편과 소망을 믿지 안하고 했지마는 형식으로라도 외부로 실행을 했다 말이오. 그 방편을 행하기는 행해 봤어. 행해 보지 안했으면 예수님은 시몬에게 대해서 통통 허무한 소리했고, 또 거짓말했고, 속이는 말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훼방하고 욕하고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그리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시몬이가 예수님이 시키시는 그 말대로 순종해 보지 안했으면 예수님에게 대해서 대립이 되겠소 안 되겠소? 조롱하겠소 안 하겠소? 욕하겠소 안 하겠소?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그렇게 인정하겠소 안 하겠소? 인정하게 되지요. 그러나 억지 순종이라도 순종했다 말이오.
순종하고 보니까 어찌 됐습니까? 순종하고 보니까 이제 자신이, 자신이 잘난 체 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죄인으로 자신은 죄인이 돼 버리고 말았고, 주님은 우러러볼 수 없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주님도 좀 바로 보였고 자기도 바로 보였으니까 이것이 어데서 나왔습니까? 자기를 바로 알고 주님을 바로 아는 것이 무슨 행위에서 나왔습니까? 순종 행위에서 나왔습니다. 알겠습니까? 순종 안 하면 안 돼. 순종 행위에서 나왔고, 또 그렇게 주님이 주신 그 소망에 고기 많이 잡은 그것이 순종 안 했으면 그런 고기가 잡힙니까 안 잡힙니까? 안 잡힌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순종하면 다 잡히요. 알겠습니까?
순종해서, 자, 이제 대충으로 십계명을 가지고. 십계명을 순종해 봐요. 순종해 봐요. 주님이 제일 높으시고, 일계명은 주님이 제일 높으고 크신 분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크고 높으다’ 이 비교해, `대통령보다?' ‘대통령보다 무한히 높으다’ `우리 상관보다?' `우리 상관보다 무한히 높으다’ ‘미국 대통령보다?' `미국 대통령보다 무한히 높으다' `이 한국에 민족?’ ‘한국 민족보다 무한히 높으다’ ‘세계 인류보다 무한히 높으다' 자꾸 주님이 무한히 높은 것을 자기가 자꾸 인정을 해 봐요. 이게 일계명 지키는 거라.
이계명은 ‘주님만이 우리 생사화복과 흥망성쇠를 주권하시지 주님 외에는 뭐 조건이나 물질이나 과학이나 인간이나 아무것도 주님 외에는 우리 생사 화복을 해 줄 자 없고 우리의 흥망성쇠를 주관할 자는 아무도 없다, 주님만이 흥망성쇠를 주권하고 계시고 생사화복을 주권하고 계신다.’ 요것을 확실히 믿어서 주님에게 ‘살고 성공하고 흥왕하고 하는 것을 주님만이 해 주실 수 있다’ 해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그것이 이계명 지키는 거라 말이오.
삼계명 지키는 것은 그 무슨 우연이나 자연이나, 자연이라든지 그 모든 이 하나님의 섭리로써 자기 이런 형편 저런 형편, 개인 섭리 이것도 주님이 하신 역사라. 흉년들고 풍년들고 하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역사라.
이러면 거게서 원망 불평하는 거,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는 것이 삼계명이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라. 자기에게 무슨 배고픈 일이 생겨지고 불행스러운 일이 생겨졌으면은 그거 불행스러운 일이 생겨졌으면은 ‘왜 나는 이거 팔자가 이렇고 불행스러운 일이 생겼는고?’ 불평하는 그것은 삼계명 범하는 것입니다.
삼계명 지키는 자는 어떤 자가 삼계명 지키는 자인고 하니 자기에게 불행스러운 일이 닥쳐왔으면은 ‘내게 왜 이 불행스러운 일이 왔노? 이러니까 뭣인가 이거 하나님이 내게 이와 같이 하고 계시니까 불행스러운 게 왔으니 내가 여기서는 뭐 할 거냐? 불행스러운 일이 왔으니까 불행이라 하는 것은 죄지은 값이니까 내가 죄가 있는가보다.’ 죄를 회개하면은 삼계명 지키는 사람이라 말이오.
‘내가 뭐 실수한 일이 있는가 보다. 내가 앞으로도 조심 안 하면 큰 탈 날 일이 있는가 보다.’ 그래 가지고 자꾸 자기를 깨우쳐서, 왜? 불행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걸 생각하고 자꾸 이걸 고쳐서 이래 할라고 하면 그 삼계명 지키는 사람이라.
사계명, 주일을 지키는 것을 뭐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이 ‘너 지금’ 나 지금 어데 지금 전화 한번 내가 해 봐야 되겠는데 저아래 전화를 하니까 전화가 안 돼요. 전화가 안 되는데 무슨 일이 났는가 지금, 일이 나거든, 일이 나거든 목사에게 와야 됩니다. 옳은 목사라면, 하나님의 종이라면 일이 나면 목사에게 와야 돼. ‘이거 어떻게 해결해야 됩니까?’ 이래야 되지 뭐 일이 났는데 목사에게 오지 안하고 엉뚱한 데 해결 지우러 가면은 헛일이라. 하나님이 작대기 그어 버리고 말아요. 하나님께 가야 되지.
이러니까, 주일 지키면 지금 직장이 떨어져, 주일 지키면 자기 모가지가 날라간다, 주일 지키면 무슨 생명이 절단난다 그게 무슨 상관 있어? 그거 우리가 깨달을 수 있어. 예? 머 자 하고 마 자 하고? 버마? 아, 버마. 아, 좀 버마 하면, 뭐 하면 나는 내가 귀가 그런지,아, 내가 말하는 건 잘 듣겨. 버마, 버하면 이거 잘 할 건데, 머, 머마 머마 하니까 뭐인지 알아야지?} 버마 사건 그런 것도 이제 주일 지키는 거, 그는 다 이계명 지키는 거, 그러니까 ‘이계명 지키기 때문에 암만 위에 대통령이라도 못 한다’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것인데 그걸 못 한다 그말이오. 사계명을 엄격히 지켜 봐요.
또 오계명 지켜 보고, 육계명 지키고, 육계명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게 육계명 지키는 거라.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있으면 복이 안 와요. 미워하는 게 있으면 복이 안 옵니다. 살인하는 게 뭐이냐 하면 사람 살인을 대번 합니까? 미운 것이 모아 가지고 살인이라. 그러면 살인의, 살인의 그 쪼가리는 뭐이냐 하면 미운 것이라. 사람을 미워한 걸 다 버리고 사람을 사랑하지.
또 칠계는 뭐이요? 칠계명 음행 이거 고치면 하나님이 막 복 주시오. 뭐 우리 서부교회도 이 음행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꽉 찼어. 뭐 껍데기는 이렇게 하지마는 에미하고 자식하고 들어붙는 일이 얼마나 많으며, 형하고 동생하고 들어붙는 일이 얼마나 많으며, 뭐 사촌간이니 뭐이니 하며 그런 더러운 죄가 얼마나, 이것은 성경에 육체를 범하는 죄라. 음행죄가 육체 범한 죄이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해서 벌이 굉장히 커. 이런 죄를 두고서 무슨 복을 지금 구해 될 거라 말이요? 또 그라고, 그 사람이 ‘내가 안 했는데’ 내가 안 해도 우리 서부교회에 그런 것이 있으면은 우리는 뭐입니까? 우리가 개체입니까 공동체입니까? 공동체야.
공동체에 그런 게 있으면은 그것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복을 못 받는다 그말이오.
요 속에서 이런 더러운 걸 가지고 있으면서 껍데기로 요래조래 하기 때문에 밉다 그말이오. 그만 이 세상에 형법만 아니면 주먹으로 치박으면 싶어, 암만 내가 힘 없어도. ‘이놈의 새끼 어데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놓는 그따위 행세하고 있느냐? 회개 안 하나!’ 이라지마는 그거 내가 똑똑히 내가 뭐 똑똑히 모르니까 그런 말을 말도 하지도 못하지, 지금 말로만 하고 있다 말이오. 말로 하면 고쳐야 될 터인데 안 고쳐. 이런 것 때문에, 이 칠계 때문에 이거 전부 교회가뭐 이 사회나, 사회는 다 더러우니까 다 그대로 되지마는 이 교회가 더러워집니다. 칠계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축복은 절대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이 계명은 뚜렷한 계명인데 사람을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그거 가지고는 복을 절대 못 받습니다. 살인하면 복 못 받아요. 살인해 가지고는 복 못 받아. 또 부모에게 불효하면 그거 고쳐야 되지 불효하면 고치지 않으면 복 못 받아요.
내가 어느 누구에게 말했어. ‘너 그라면 네가’ 내가 그걸 좀 알겠는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돈 집은, 사돈 집하고 변소간하고는 멀어야 돼요? 가까와야 좋아요? 멀어야 좋다고 들은 사람 손 들어 봐요. 멀어야 좋아요. 왜? 변소간은 가까우면 꾸룽내 나. 그거 모양으로 서로 사돈 집이 가까우면 이러니 옥신각신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그 꾸룽내가 나. 그래 사돈 집은 멀어야 됩니다.
모두 저거 사위니 뭐이니 가까이 갖다 놓고 하면 좋은 줄 알아도 실을 꾸룽내가 거기 많이 나는데 꾸룽내 나는 그걸 그뭐 그대로 소화하면 좋기는 좋지마는 소화하는 것이 잘 소화되는 것이 없고 잘못하면 여권이 세어 가지고 남권이 여권에게 복종하든지 남권이 세어 가지고 여권이 복종하든지 하나 종이고 이렇지 그 아롱아롱하게 반반하게 이게 잘돼 나가기는 어려워. 이러니까 뚝 떼는 게 좋다 그말이오.
이래서, ‘그거 너희들이 그러니까 좀 이사를 해라’ 이랬는데 저 아래 물으니 이사 안 했대. ‘이사를 해라’ 이사 안 했대요. 이사를 하면은 너 부모에게 효성하겠나?’ 부모에게 효성하겠다고. 그러면 이사 시켜 놓고 부모에게 불효하거들랑 그놈이 죄인인 줄 알아야 될 터인데 이사를 시키지도 못하구로, 권찰이라 하는 게 이사 못 하구로 운동을 하고 있어. 저거 누이라 하는 것이 동생 이사 못 하구로 운동하고 있어. 왜 복받지 못하구로 왜 망하구로 하고 있느냐 말이요, 있기를? 왜 해, 하기를? 네가 건강하면 당장 병신이 안 될 줄 아느냐? 저주하면 당장 병신이 돼 버려. 대번 뻐드러져 버려. 그걸 못 해 그렇지. 안 해 그렇지.
이래 가지고 그래 놓으면 그런 거 하면 그만 복종하고 순종해. ‘예, 그렇습니까? 그라면 이사를 한번 해 봅시다.’ 해 보고 이사를 해서 그래도 부모에게 불효하면은 ‘이사해도 네가 부모에게 불효하노?’ 책임지고 고칠 수 있지 안해? 이 복받을 일을 시켜도 복받을 일도 못 하게 하는데 그놈의 것이 뭐이냐 하면은 한 말로 말하면 인정이라, 인정. 인정 속에 뭐이 들었는지 나는 똑똑히 몰라도 내 짐작으로는 ‘뭐이 인정이 속에 뭐이 들었나?’ 지금 그 의문이 하나 있다 말이오. 인정 속에 뭐이 들었는가 말이지. 이래 모두 다 닭잡아 먹고 뭐 오리발 내놓는 격으로 이래 가지고 껍데기나 술술 맞추면 모르는 줄 알아? 다 알아요, 알아요, 다. 모르는 게 아니고.
이런데, 이거 칠계명을 고치지 안하면 절대 축복 못 받습니다. 저주 외에는 아무것도 못 받습니다. 고거 아십시오. 반사들이고 다 그거 알아요, 다. 나는 그걸 똑똑히 모르지만 반사들도 남녀 반사들도 ‘심방 간다’ 해 가지고 자유 시간 있으니까, 이건 공장에 일정한 장소에 있으니까 다 알지마는 심방 간다 하며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몰라, 돌아다니기를? 한참은 중간반 반사들이 이 돌아다니기를 국제시장에 ‘아, 싼물건. 나는 요거 백 원 주고 샀는데 천 원짜리 백 원 주고 샀다.’ 요거 찾아 돌아다녀. 그래 가지고 ‘아무것이는 그 묘한 거 하나 사 가지고 있네. 아무것이는 머리를 요래 하니까 좋으네.’ 이러니까 머리 얄궂게 꾸미는 그것이 경쟁이라. 더러운 놈의 경쟁도. 또 국제시장 돌아다니며 물품 뭐 거석하는 그것도 그 경쟁이라.
‘아무것이도 부부 동행해 가지고 시장 돌아다니니까’ 언제 동행해 가지고 돌아다닐 여가가 어데 있어요, 있기를? 다 각각 직분을 맡았으니까 지금 언제 뭐 밥 먹을 여가나 뭐, 잘 때나 퍼뜩 만나지 만날 여가가 없을 만치 분주해야 일이 될 터인데 언제 둘이, 아주 중간반 행락 많이 누렸습니다, 반사들. 부부 동행해 가지고 뭐, 장 동행해 가지고 돌아다니는 걸, ‘손의 귀가 장대 귀라’ 손의 귀, 장대 귀라 말은 멀리 들린다 그말이오. 이 나는 장대 귀를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이래 놓으니까 조금 후면 다 알아들어, 내가 말 안 해도. ‘아무것이는 보니까 그 사람은 새벽에도, 아침에도 예배 마치고 나서 뭐 심방한다고 뛰어 돌아다니더라’ 이것이 보여지는데 그런 거는 안 하고 엉뚱한 거, 볼 거는 안 보고 어만 거 보고, 그 경쟁할 거는 안 하고 어만 거 경쟁하고, 욕심 낼 거는 안 내고 어만 거 욕심 내고, 그라면 네가 망하고 만다 그거요.
그 칠계 요거 회개하기 전에는 안 됩니다. 칠계 회개하기 전에는 안 돼. 점점 그게, 대번에 가면은 다른 사람 때문에 그거 죽이면 안 되기 때문에 이래 냅두는 그게 있어서 나중에 가서 그놈에게만 본인에게 똘똘 뭉쳐서 짊어지게 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 하나님 말씀이 하는 것은 고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즉시 고쳐 버리면 돼. 과거에 어떻게 진홍같고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고쳐 버리면 돼.
‘목사님은 자꾸 그런 소리만 한다. 그뭐 목사님은 자꾸 그런 소리만 한다.’ 이래 가지고 내가 반박 들은 소리가 얼마나 있는지. 반박은, ‘네 눈구멍이 어두워서 반박을 하고 있다. 네가 보고 있나?’ 어떨 때는 속으로 욕을 해서, 속으로 ‘네가 눈구멍이 어둡기 때문에 소경이 돼 가지고 때문에 그걸 지금 그런 소리 한다. 막 전부 그것이 껍데기만 발라 맞춰 가지고 다 이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 행세를 하고 있느냐?’고.
칠계를 요걸 고쳐 봐요. 칠계 ‘이제는, 이제, 내가 이걸 내 영육을 금생과 내세를 망치는 것이 요놈이 망치기 때문에 요게 나를 망치는 요걸 원수라.’ 그걸 깨닫고 그것을 고쳐 봐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오는가 안 오는가? 나는 그래요. 뭐 결혼하라 하면 뭐 뒤로 미루고 요래 미루고 어짜고 하는 거 ‘네가 양다리 뻗어 놓고 있구나, 네가 지금 어데 연애하고 있구나, 너는 지금 애정적인, 이성적인 그런이성이라 말은 성교 말이라 말이요, 그만 쉽게 말해서.
쌍놈 말 해야 알아들으니까 쌍놈 말 해야지 어짤 거라?네가 이성적, 이성적인 그런 문제가 있어서 지금 그따위 행세하고 있구나.’ 이렇게, 내가 추측하는 게 꼭 그렇다는 말 아닙니다. 꼭 그렇다는 말 아니지마는 내 속에 그런 추측이 돼진다 그말이오. 추측이 돼져. ‘네가 껍데기로는 먼들먼들하지마는 속으로는 지금 네가 그거를 끊었느냐?’ 이래 여긴다 말이오.
사람이 추측이라는 거 이상해요. 내가 지금 여기 거석한 잘 믿는 사람들도, 내가 이제, 이거 회개해 엔간히 돌아오고 지금 인제 잘 믿어 보겠다고서, 통신과도 거의 초등강을 다 했대요. 초등강 다 했대요. ○○○집사님 저 와 가지고 처음에 그럴 때 ‘저 사람이 칠계에 부정하지 안한가? 혹 그런 게 없는가?’ 내가 그걸 자꾸 살펴서 생각했어. ‘그거 없는가?’ 요새 보니까 그거 없는 것 같애, 인제. 없는 것 같은데 아직 내가 똑똑히 몰라요. 없는 것 같애요.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없으면 앞으로 장로를 시키면 우리도 복받고 자신도 복받고 그런 거 있는데 장로를 시켜 놓으면 결국 우리 교회도 망하고 본인도 망하고 만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래 말하는 것은 다 회개를 했으면 내가 말하지만 회개하기 전에는 내가 말 못 해요. 회개하기 전에 말 못 해.
이러니까, 자, 칠계를 똑똑히 회개해서 우리가, 자, 어짜든지 그뭐 이거 이 칠계범이라 하는 것은 네 마음으로 생각만 가져도 그거 범죄라 이렇게 말했어.
마음으로만 생각을 가져도 범죄라 이렇게 말했어.
요 ○선생 요 지금 고통당하고 있지? 고통당하지? 고통당하는데 그 고통이 어떤 고통이냐? 네가 그때 이혼한 그것이 네 고통의 원인이라는 걸 네가 알아야 돼.
그거 네가 고통을 당해야 돼. 그러니까 네가 고거 거머쥐고 네가 그것을 싸워서 네가 이겨야 돼. 고거 네 지금 고통된 거 이성 때문에 그렇다. 네 정신 자꾸 그런 것도. 다른 게 아니고. 이러니까 그게 처음에 그 이혼한 그게, 그걸 거부했거든.
이러니 그게 지금 독을 돋궈서 지금은 인제 뭐 거기 대해서 갈급이 생기지, 갈급만 아니라 온 정신이 돌아갈 만치 돼져. 그 뭐이든지 원인이 다 있어요.
이러니까 이 하나 말하면 다른 사람도 다 고쳐야 돼요. 이거 뭐뭐 다 정신 이상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거 다 독신으로 사는 게 좋지마는 이제 범죄하는 그것 때문에 독신으로 살지 못하게 한다, 독신으로 살 수가 없다. 그걸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은 똑똑히 기록해 놨습니다. “사나이마다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으나 음행하는 연고로 인해서 이제 다 결혼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그런 거 다 마음으로만 범죄하면 그만 범죄가 되고 말아, 마음으로만. 이러니까 그런 것을 깨끗이 해 보고, 또, 그다음에는 이제 물질에 대해서 깨끗이 하고, 말에 대해서 깨끗이, 거짓말 하지 말고 깨끗이 하고, 또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고 요렇게 해 보라 말이오.
요것만 해도, 요것만 해도 그만 돼져. 그라고 새벽기도 잘 나오고, 주일 잘 지키고, 어찌됐든 하나님의 시키시는 대로 성경에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이 행동하는 그 행동을 내 행동인 줄 알고 그 행동대로 해 봐요. 해 보면 삼 년 안 돼서 막 우리가 전부 뭐 성공 다 되고, 부자 다 되고, 다 존귀한 사람 다 되고, 다 전부 사업을 하는 사람은 뭐 사장 다 돼요. 요거 안 하기 때문에 안 된다 그말이오.
죄를 회개해야 되지 죄를 두고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주님 주시는 이차 방편을 써보자 그말이오. 주님이 주시는, 이차 방편은 주님이 주신 방편인데 우리에게는 이차 방편 주님이 주신 방편이 뭣이 주님이 주신 방편입니까? 예? 뭣이 주님이 주신 방편입니까? 저 뒤에도, 뭐이 주님이 주신 방편입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이 주님이 주신 방편입니다.
또 주님이 주신 소망은 뭐입니까?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것이 주님이 주신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세상 소망만 못합니까? 세상 것은 죽은 거 썩은 거 더러운 소망이고, 그 소망은 옳고 바르고 참되고 영광스러워서 영원토록 있는 영광의 소망 아닙니까?
새벽기도 다 나와요. 오늘 아침에 또 적게 나왔구만, 보니까. 죽어야 돼!! 그것도 못 하는 게 무슨 성공을 볼 거야? 무슨 축복을 받을 거라, 새벽기도도 옳고 못 하고 그렇게 죽은 인간이. 의지가 뭐 있어, 결심이 뭐 있어? 하루 종일 죄만 짓고 있는데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올 거요, 오기를? 이러니까 개적으로는 망하지 안하고 나중에 공산주의로 와 가지고 끌어붙여 가지고 망쳐 버리요.
기도하고 회개한 사람은 공산주의 속에서도 해와 같이 빛납니다. 절대로 털끝만치도 손해 못 보이요.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했는데 공산주의에게 죽은 줄 압니까? 아니오. 죽을 때가 되니까 공산주의로 말미암아 보배로운 순교시킨 것뿐이라.
내가 손양원 목사님 밑에 부목사로 있던 사람에게 내가 물었어. 그 시체를 그 사람이 주관했는데. ‘그라면 그 총에’ 내가 그거 뭐 이치만 듣지 오른손인가 왼손인가 그거는 못 들었어. 손에 요게 맞아 죽었대요. ‘딴데는 안 맞았더나?’ `예, 안 맞고 요게 맞고 죽었어요.' `그러면 맞았으면 그 피를 많이 흘렸는가?’ ‘아니오.' 내가 듣기에는 거게서 피가 나와서 모두 뭐 성도들이 빨아먹고 어짜고 뭐 이렇다고 하기 때문에 피가 많이 났는가 싶어서 ‘그 깊이 들어가서 피가 많이 났던가배, 혈관이 터졌던가배?’ 부러 내가 그래 물었어. ‘혈관이 터졌던가배?' `아니오.' 찍해야 비지껍데기 벗겨졌어. 비지껍데기가 벗겨진 것뿐이라. 혈관 하나도 안 터졌어. 비지껍데기 그래 가지고는 그런 뭐 백 배 맞아도 안 죽는데 거게 맞아 가지고 죽었어. 그러니 꼭 죽을 때가 돼서 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 죽은 것만 되고 말았지 한 시간도 덜 살고 죽은 것은 아니라 그말이오.
나는 그걸 성경을 깨닫기를 그래 깨달았기 때문에 자꾸 짐작해 물었어요. ‘어데 복장에 맞았던가요?’ ‘아니오. 손에 맞았어요.' `손에 맞았으면 아마 혈관을 맞아 피가 많이 흘렀는가배요?’ ‘아니오. 요 비지껍데기만 그저 맞은 표만 있지, 총 맞은 표만 있지, 비지껍데기만 살짝 벗겨졌지 그래 가지고 뭐,’ ‘그러면 사람이 죽을 만치 그래 맞았던가배?' `아니오. 그래 가지고는 뭐 여기 열 배, 열 방 맞아도 그런 거 맞아 가지고는 사람들 몸치도 안 합니다.’ 하나도 죽을 만치 맞지 안했는데 죽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기한이 돼서 주를 위해서 생명 바친 것뿐, 제딴에는 주님을 위해서 생명 바쳤고 실은 살 대로 다 살고 마지막 죽는 시간에 주를 위해서 생명 바친 것으로서 죽음의 가치만 있게 한 것이지 순교자들이 조그매라도 한 시간 덜 살고 죽는 줄 압니까? 없어. 요걸 똑똑히 깨달아야 돼요.
그래, 새벽기도 오늘 아침에 보니까 헐빈하구만. 안 나왔어. 이제 어짜든지 그만 그동안에 좀 하라 하니까 전화 심방을 하다가 그만 다 그만 버렸다 그말이오.
이거 들으니까 뭐 어째? ○권사님은 자꾸 이러니까 그 피곤해서 막 이라는데 보니까 얼굴에 피곤이 가득 찼어. 헛일이야. 안 돼요.
요 말씀을 들으면 ‘주여! 아멘! 아멘! 주여! 옳습니다.!’ 막 속에 힘이 나와야 돼. 전능의 힘이 나와야 돼. 진리와 영감과 피가 전능이라. 전능의 힘이 나와 가지고 ‘주여! 주여! 뭐 공산주의 한번 와 보면 좋겠다.’ 이게 자꾸 이래 돼지고, ‘뭐 어떤 일이라도 내가 한번 박차고 나가 봐야 되겠다.’ 속에 들을 때에 힘이 나와야 되는데 이게 안 나오면 헛일이라 그말이오. 나는 할 때 힘이 나와, 지금 힘이 나와! 속에 힘이 나와요. 여러분들이 그 방편을 쓰지 안하기 때문에. 방편만 쓰면 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라고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인도하는 거 전도 부지런히 해요. 전도 안 하면 하나님이 축복 안 하요. 사람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도 없는데 뭐이 돼져요? 어짜든지 회개합시다. 죄 두고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실행 안 했으면 사람도 변화 안 되고 그런 기적도 보지 못해. 순종해 보면은 깜짝 놀래는 하나님 말씀대로 된 것 보고 난 다음에는 야, 된 것 보고 그거 가지고 우물거리지 안했어.
된 것 보고는 ‘주님의 말씀대로 뭐이든지 다 되는구나, 이제 나는 인간이 한번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람 한번 돼 보겠다.’ 이 소망으로 나중에 바꾸게 됐어요.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순종에서 발 떼놓습니다. 순종에서 발자국을 떼놓기 시작해요. 순종 안 하면 발자국이 떨어지지 안하고 그대로 앉아 있다가 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