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02:00
의의 판단 기준은 충성
1984. 4. 11. 수새
본문: 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크게 하나 깨달을 것 있는 것은, 상반절에는 충성을 말을 했고 하반절애는 불의를 말씀을 했습니다. 불의의 반대는 의요 의의 반대는 불의입니다. 또 충성의 반대는 불충이요 불충의 반대는 충성입니다. 이런데, 여기에 상반절에는 충성을 말했고, 또 하반절에는 불의를 말을 해서 충성과 의를 대조했습니다. 충성 아닌 것이 불의요, 또 충성한 것이 의라, 또 의가 뭐이냐? 의는 충성한 것이라 또 불의는 충성치 아나한 것이라 그렇게 여기에 대조해서 말씀하신 이 큰 뜻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 둘이 있는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정하신 그 뜻을 이루는 것이, 당신이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당신이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의요 또 우리 개인 의는 자기 개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이루는 것이 자기의 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신 그 법칙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서 의라 이렇게 말하는데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 있고 우리가 이루는 것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이 뜻인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예정이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이 예정하신 데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예정하신 대로 첫째로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또 그 위에다 더 크게 말하면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그 목적을 완성할 자가 누군가?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뿐 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목적하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셨으니 예정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일입니다. 또 창조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도성인신하셔 가지고 십자가에서 대속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 곧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이 누구 안에서 목적을 정했느냐 하면 그라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또 사람이 되어서 옻신 분을 가리켜서 또 예수님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그분이 오시기 전에 예정을 하셨고 오시기 전에 창조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지은 것이 그분이 없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분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놓으시고 예정도 이용하시고, 활용을 하시고, 창조도 활용을 하셔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목적하신 뜻을 완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완전히 이루고, 인제 이루어 놓으신 그 이루어 놓은 것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의 목적이요, 교회요.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는데. 이루어 놓으신 이 구원을 개인들에게 다 실상으로 나누어 줘 가지고 개인들이 자기 구원을 만들도록 이렇게 하는 그 역사를 하시기 시작한 것이 중생이요, 그 다음에 성화입니다. 그러면 그 일은 누가 하는고? 그 일은 성령님과 진리가 맡아 가지고서 그 일을 하십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말하면 예수님의 이 대속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의의 뿌럭지를 다 말하면 이제 말한 그대로입니다.
사람의 의는 뭐이 사람의 의인가? 사람의 의는 사람이 자기에게 해당된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정하신 그 뜻, 하나님이 자기 각자들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받아서 행하는 것이 자기의 의입니다.
의는 두 가지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그러면,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를 힘입지 안하면 자기 의를 할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지 않는 것은 마귀와 죄와 사망이 그 사람에게 왕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영원히 어기는 일만 하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일은 할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들은 그것들이 왕 노릇을 하지 못하고 우리 안에 와 가지고서 침노하고 지금도 유혹합니다. 유혹하나 우리가 받아들이면 그놈이 와 가지고, 우리 속에 와 가지고서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날 주장하고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주장했다 할지라도 죽을 때라도 '이놈 내 원수다' 하고서 물러 가라고 쫓아내면 그놈이 쫓겨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왕 노릇 못 하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가 이것이 영생인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는 당신에게 소속한 것들을 영생을 주는 일을 완성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으로서 첫째는 선택을 입은 사람들 그 다음에는 선택입어서 구원이루는 데에 이용된 모든 사물들, 또 그 밖에는 음부에 있는, 지옥에 있는 것들까지도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 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주라고 시인하는지, 성경에 그래 놨기 때문에 그대로 믿는 것뿐이지 어떻게 주라고 시인하는지 구체적인 그 내막 은 짐작은 하지마는서도 그런 것은 잘 발표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의,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뜻 그것을 우리가 받아 가지면 됩니다. 받아 가지는데 받아 가지도록 받아 가지는 방법을 안내하시는 분이 누구냐? 안내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성령님께서 문서 계시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셔 가지고서 안내하시고, 또 친히 당신이 안내를 영감으로 하십니다. 이 안내 하시는 이 안내를 잘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현실을 주어 가지고 현실 현실마다 그 작용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현실에 우리 구원을 이루는 일이 우리 일인데, 우리 현실에서 우리 구원을 이를라고 하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 예정도 우리가 사용해야 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도 우리가 사용해야 되고,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그 섭리도 우리가 이용을 해야 되고 모두 다 사용하고 이용하고 이렇게 모든게 좋은 결과를 맺도록 하는 데에는 먼저 앞잡이로 문서 계 시가 유리에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문서 계시대로 해서 대충 맞추고, 그 다음에 문서 계시대로 맞춘 그 속에 아주 복잡하고 비밀하고 세밀한 참 온전은 성령님의 인도로서 우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와 충성이 대조라 이것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완전합니다. 하나님의는 완전하지마는서도 인간의 의는 뭐냐? 여기에 말하기를 '작은 데,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 하고' 지극히란 말이 다 거기 붙었습니다. '지극히 충성되면 지극히 큰 데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지극히 큰 데도 불의하다' 크다 말은 다 붙어 가지고 있는 것을 한 마디로써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들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다 의인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이루어 놓은, 이루어 놓은그 자체에게 가치를 두느냐? 요것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룬 그것이 오십 프로 이루었다, 혹은 육십 프로를 이루었다, 구십 구 프로를 이루었다. 백 프로를 이루었다. 그러면, 이루어 놓은 그것의 완잔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치를 정하는 것안가?아주 요거 중요한 것입니다. 가치를 정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가치를 정하는 거 아니라 말이오. 아니고 다만 그 사람의 충성을 가지고서 가치를 정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 백분의 일밖에 못 이뤘습니다. 백분지 일밖에 못 이루어도 그 사람의 이룬 그것을 하나님이 의라 인정하실 수 있다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백의 구십 구를 이루었는데, 백의 구십 구를 이루었고 이 사람은 백의 일을 이루었으니까 구십 구를 이룬 사람은 백의 일을 이룬 사람을 볼 때에 깔볼 것이고 참 그거는 뭐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저는 백의 구십 구를 이루었으니까 굉장하게 이룬 줄로 이렇게 알지마는서도 백의 구십 구를 이룬 사람도 '불의라' 하나님 앞에 정죄를 받을 수 있다 말이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됩니까? 요게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지금까지 이 모든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깊이 파묻혀 있는 것을 지금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의 주관성과 아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백 명이 있는데 이 사람은 아주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 그거 뭐 형편없이 백분의 일밖에 이루지를 안했다 그말이오. 안 했는데, 그 사람은 '너는 의인이라, 잘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 가지고서 아주 상급 받는 자리에 놓고. 이 사람은 백 명 중에, 그 한 사람은 백의 구십 구를 이루었는데 그 사람은 의례히 잘했다고 칭찬하고 상을 줄 줄 알았는데 구십 구를 이루었는데 쫓아냅니다. '이놈 너 불의했다. 이놈, 게을뱅이 같은 놈 불의한 놈.' 쫓아낸다 말이오. 그러면, 이게 모순입니까' 이치에 맞습니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그러면 이치에 안 맞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이치에, 우리 사람들 말로 하면 이치에 안 맞지요. 이치에 안 맞지 않습니까? 왜 백 가지 하라 했는데 아흔 아홉 가지를 한 사람은 잘못했다고 쫓아내고 한 가지만 한 사람은 잘했다고 상급을 주는가? 이거 모순된 일. 이치에 안 맞지 않습니까? 안 맞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문으로 선포를 해 놓은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취급을 한다.' 당신이 계약 선포해 놓고 그대로 처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계약을 행하기 전에 선포를 해 놓고 '요게 준해라. 요게 어기면 안된다' 이러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약 선포를 했기 때문에, 이치에 안 맞는게 아니라. 당신이 선포해 놓은 그 계약 이치에는 맞다 그거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래 하시는가? 하나님이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는 이루어 놓은 그 사건 자체, 물건 자체 그것의 가치에 다가. 그것에다가 가치를 두지 안하고 '너는 이렇게 일을 많이 했다. 너는 참 뭘 물건 하나 만들어라 했더마는서도 백의 구십 구나 잘 만들었구나.' '너는, 만든다 하는게 백의 일밖에 못 만들었으니까 이렇게 더럽게 만들었구나.' 집어던져 버리고 이럴 건데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 그말이오. 다만 그 가치를 삼는 것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한, 성심 성의를 기울인,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기울여서 한, 다해서 기울였느냐? 네가 다 기울이지 안하고 백분지 일만 기울였느냐 백분의 구십 구만 기울 였느냐? 너는 하나밖에 안 해도 너로서는, 백의 백을 다 기울여도 하나밖에 못할 사람도 있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백의 하나밖에 못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그렇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주신 것이 그래. 잘 나고 한 사람 제가 잘난 줄 알고, 아니오.
내가 어제도 어떤 사람 만나 가지고 말하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누구에게는 많이 줬고 누구에게는 덜 줬기 때문에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적게 준 자에게는 적게 요구하신다.' 그것을 내가 거기서 이야기 가운데 슬쩍 지나갔는데, 알아들었는지 안 알아들었는지 모르기는 모르지마는서도.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어데까지 의롭다고서, 어데까지 권위있다고서 사람 앞에 교만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고 사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보다 모자라는 사람을 볼 때에는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주셨고 내게는 많이 주셨기 때문에 나는 더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이고 책임이 무거우니까 더 두려워 떨 일이지. 저 사람이야 저만큼 저래 행동했고 나는 이렇게 행동했으니까 나는 의인으로 인제 천당에 가면 번쩍 번쩍할 것이고 저 사람은 참 허무랄 것이다' 그럴 수 없다 말이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인지 내게 주신 은혜가 얼마인지 모른다 말이요. 나는 불충성, 내게 있는 걸 다하지 안했다고서 꾸중을 들을런지, 그사람은 그렇게 허무하지마는서도 제 딴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하나도 남기지 안하고 있는 대로는 전심전력을 다 기울였다 그말이오. 자기에게 은혜 준 대로는.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 주신 사람은 생명까지 다 바칠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이 은혜를 겨우 예수 믿으면서, 내치 예수 믿는 것을 반대 하고 이라면서 가끔 마음 좀 좋으면 조금 믿는 것 그거야 뭐 가면은 '저거는 천국 가도 제일 벌거벗은 자로 갈 거다' 싶어지마는서도 꼭 그것만도 아닙니다. 그이에게 그것밖에는 예수믿는 은혜를 주지 안했기 때문에 고만침밖에 못 믿게 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구원을 측량할 때에, 자기 구원을 측량할 때에 자기가 마음을 다했느냐, 뜻을 다했느냐, 성품을 다했느냐, 힘을 다했느냐, 목숨을 다했느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참 '너는 일생 동안 목회를 하면서 참 충성되이 목회를 했기 때문에 상을 받아라' 이렇게 하실 사람도 있을 것이고, '너는 왜 그렇게 목회를 게을리 했나? 네가 적은 일에 게을리 했기 때문에 내가 큰 것을 맡기지 못하겠다.' 이런 사람도 있을 터이니까 그것이 무엇으로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평가하셔 가지고서 정하겠느냐? 그게 충성이라는 요것으로 딱 명문을 해 놨다 말이오. 충성으로 딱 명문을 해 놨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저는 늘 생각하기를 어떤 교역자 보니까 이는 참 목회 한다고 뭐 있는 힘 다 들이는데, 일편단심 있는 힘 다 들이고 이라는데 도 교회는 부흥이 안돼. 있는 힘 다 들여도 또 설교는 참 못해. 그러니까, 항상 목회해도 작은 교회로 이리 저리 천대로 돌아다니지 그 뭐 대우받는 게 없어. 이런데, 저는 가만히 생각할 때에 이렇게 참 설교 준비하는 데도 그들에 비해서 설교 준비도 그렇게 하지도 안하고, 그렇게 뭐 기도도 하지 도 안하고, 있는 충성도 그렇게 하지도 안하는데 이렇게 설교도 하고 목회도 이렇게 해 나가니 내가 충성으로 따진다면 내가 그런 사람에다 비교 못하겠다. 충성으로 따진다면 비교 못 하니까 하늘나라 가면은 내가 인제, 거기 가면은 참 다른 사람이 아는 대로는 '아, 백 목사는 여기 있는 줄 알았더마는 '아, 여기 백 목사 여기 없다. 저 밑에 있다. 저 밑에 가서 찾아 봐라' 그렇게 될 자가 내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니 이 성구가 나에게 제일 자극을 주고 내게 제일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 부담 주고 있는 것은 내가 그전에도 몇 번이나 선포했지마는서도 과거에는 한 가지 행했으면 열 가지나 행했다고 이렇게 칭찬이 돌아오고 자꾸 이래 돌아왔는데, 이게 내가 많이 받았으니까, 행하지 안한 대우를 많이 받아, 내가 안 받을라 해도 사람들이 그래 한다 그말이오. 대우를 받았으니까 '앞으로 남은 것은 많이 행하고 대우는 조금 받는 그 일이 내 미래일 것이다. 내 장래는 이것이 나의 장래일 것이다' 이래서, 그 일이 오리라고 자꾸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내가 참 옳았는데 틀렸다고서 말할 것이고, 일을 잘했는데 못했다고 할 것이고, 이거는 내 행함에 대해서 대우라는 것이 십분의 일이 아니라 이제 받은 것 요랑하면 하나 행했는데 백 배도 십 배도 대우를 더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내가 한한 것의 백분의 일도 십분의 일도 대우는 없을 것이라.' 그것이 내 앞에 다가을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일이 오리라고 그전에는 내가 몇번 선포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가 제일 큰 것을 우리가 오늘 아침에 깨달을 것이 뭐이냐 하면 인간의 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의 의는 이루어 놓은 그 일의 양에 대해서 가치를 하나님이 평가하시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이에게 주신 은혜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에게 있는 것을 다했느냐 안 했느냐. 충성을 가지고서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더할래야 더할 수 없이. 마음이나 힘이나 생각 이나 뜻이나 더할래야 더할 수 없이 다해서 한 그것이 우리에게는 제일 안 심되는 길이지, 자기의 무슨 기능이 있다고 해 가지고서 일해 놓은 것이 잘 됐다고 거기에 대해서는 안심을 못 하겠다 그말이오. 왜?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내게 은혜를 주신 양이 많은지 적은지 그걸 모르겠다 그말이오. 많은데 그 많은 양을 십분지 일만 썼는지, 내가 주신 양을 내가 있는 힘 다 해서 닷 냥쭝은 닷 냥쭝을 다 했고, 두 냥쭝은 두 냥쭝을 다했는지 내가 그 걸 모르겠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면서 우리가 회개할 것을 회개하고 가도합시다. 지금도 중간반 여반사 선생님들은 여기 꽃마을에 가 가지고서 단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5월 집회를 위해서 단식기도를 하고 있고, 또 남반사들은 저 금정산에 가 가지고서 단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밤 훈련하실려고서 하나님이 비를 내리셨는데 그때 비를 어데 바위 밑에 피했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마음에 염려되는 것은 없어. 왜? 저거가 그렇게 담에서 비 피하고 어짜고 하는 그런 비를 우리는 더 많은 비도 피했고 많은 비도 겪어 봤기 때문에 저거에게 말 할 수 있다 말이오. 비가 와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어.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걷지 안한 걸음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힘이 없습니다. 자기가 걸은 걸음을 말할 때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거기에서는 모두 그렇게 힘을 쓰고 있으니까 우리들은 여기에서라도 우리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5월 집회를 위해서 기도를 우리가 열심히 합시다.
어짜든지 우리가 이 충성과 의라는 요 문제를 단단히 기억하고 기억하면, 지극히 작은 불의가 뭐이며. 지극히 작은 충성이 무엇이며 큰 충성이 무엇인가 고게 대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저녁에 수요일 밤이니까 혹 수요일 밤에 이 말씀을 증거하게 할런지 공과를 증거하게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에 증거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금 기도회에 등록된 분은 오천 삼백 팔십 삼 명이 등록하고 지금 기도를 합니다. 어짜든지 기도에 대해서, 신앙 지도하는 분들은 기도에 대해서 재촉을 합시다, 기도하도록, 바로 기도하면 회개도 되어지고 또 하나님의 은혜도 있게 되고 그 뭐 참 이 기도는, 만병통치라디마는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만병통치의 약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호흡. 숨쉬는 호흡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권면을 하도록 하시고, 오늘 아침에는 이 충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따진다 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자기를 살펴서 깨끗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