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얻는 우리 준비

 

1988. 1. 23. 토새벽

 

본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율법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말합니다. ‘구약 성경을 네가 어떻게 읽었으며 또 네가 배웠느냐?’ 그럴 때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 하셨나이다’ 이래  대답하니까 주님이 ‘네 대답이 옳다. 네가 깨닫기는 바로 깨달았다. 알기는 바로  알았다. ’ 고다음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이를 행하면 살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다한다면 우리의 전부는 다하는 것인데 이 네 가지를 다해서  뭘 할 건가? ‘네 대답이 옳다’ 네 깨달은 것이 옳다 바르다. 옳은 깨달음을 가지는  이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 아니고 이 네 가지를 다해야 옳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는 이것을 말씀한 것이고, 또 옳은 깨달음을 가지기는 가졌다 할지라도  행하기도 이 네 가지를 다해야 행할 수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깨닫는 거야 그렇게 뭐 힘들게 뭐 있는가?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다릅니다. 아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지식적으로 상식적으로  ‘그렇단다’ 그렇다 이렇게 하는 것이지마는 깨닫는다는 것은 아는 고것을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가 해야 될 고걸 깨닫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기에, 아는 것과 깨닫는 것 그 둘이, 아는 것은 그것은 외모고 깨닫는 것은  자기와 관련성 있는 그 중심입니다.

자기가 바로 아는 것도 참 평소에 알기는 쉽지마는서도 자기가 그걸 바로 알라고  하면은 마음을 다 기울여야만 알아질 그런 때도 있고 딴데에 마음이, 마음이 거게  다 집중하지 안하면 그 마음을 다른 것이 빼앗아 가서 고만, 알 수 있는  것이지마는서도 거게 마음을 붙이지 안하니까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바로 아는 데는 내 마음을 다른 데 아무데도 안 뺏기고 여게다가  집중시켜야 된다는 것이요, 또 자기가 그것을 알라고 할 때에 어떨 때는 참 자기  생명이 걸렸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 언제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 깨달을라고 하는 이것이 자기 목숨보다 중하다는 그것을  느껴지는 그때가 가장 수입 많은 중요한 때인데 그럴 때 되면은 ‘하,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있고 지금 내게 죽음이 닥쳤는데 이 헤치고 살아나는  것이 문제이지 뭐 바로 깨닫는 것이 이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게 하기 쉽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목숨을 다해야 네가 바로 알고 바로 깨달을 수 있다. 이 바로 알고  깨닫는 데에는 자본을 얼마나 들여야 된다는 이것은 목숨까지 다해야 되는데  그저 자기 잠 다 자고 볼 일 다 보고 교회에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이나 그리  안 하면 대예배나 보고 또 새벽기도 보면 다 됐다 이게 아니라! 일하면서도, 자기  재미 있는 유흥에서도 어데서든지 외모는 어떻다 할지라도 여기에 이 전부를  다해야 된다는 이것을 우리가 어누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뭐 구원이면 다 구원이지 건설구원이니 행위구원이니 하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그 사람이 건설구원을 해 보지 안한 사람이라. 해 본 사람이라면  ‘아, 이거 바로 아는 것도 알라 하니까 이 모든 장애물이 많아서 내 마음을  빼앗아 가네. ’ 또, 이걸 바로 알고 깨달을라고 하니까 꼭 이때는 참 자기가 생명 문제가 있을 때  그때에 ‘생명보다 중하다. 내 생명이 여게 달려 있다. ’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가지고 깨달아 본 그 사람은 ‘바로 알고 깨닫는 데에도 생명 안 바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경험과 체험한 사람은 이 말씀이 귀중한 걸 알지마는 그걸 해 보지  안한 사람이야 이거 다 뭐 그저 말쟁이가 말한 걸로 알지 거게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 힘을 다하지 안하면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다하는 것, 자기가 바로  알라고 할 때에 참 성경을 보고 바로 아는 것도 그렇고 또 자기가 기도하는  명상하는 가운데서 바로 아는 것도 그렇고 할라 하면은 그거야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뭐 잠 오는 것도 잊어버리고 피곤한 것도 잊어버리고 나중에 그거  알고 나면은 쭉 뻐드러지고 늘어질 만치 자기의 힘도 다하지 안하면 알아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알아 놓은 것을 말해도 그냥, 그걸 말하니까 이거 문채 좋고 광채 좋은  모든 문장으로나 모든 술어로나 연단한 수사들로나 이런 걸로 하는 것만 가치  있지 속에 이치를 가치 있는 줄로 모르는 그자는 희망이 없어. 이 길을 가지  못해.

내가 언제 한번 공과를 가르치는데 공과 이거는 이 공과가 아니고 이거 그때  한번 ○○교파 또 ○○교파하고 또 ○○교파하고 대니까 ○○교파의 공과가 제일  낫아, 고 총중에.

그래 우리도 그러면 다른 공과도 한번 해보자 하고서 그 공과 공부를 시켰는데  자꾸 변해 나가는 말 내가 그까짓 걸 내가 그렇게 중하게 여기지 안하는데 그저  말만 알면 되는 것이지 시대마다 자꾸 이거는 표준어니 뭐 한글의 맞춤에 뭐  어짜니 하는 거 따라갈 수가 있어야지. 그래 내가 짐작은 하지만 ‘이게 무슨  말이고?’ 이라니까 그 집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잘 알아요. ‘이거  무슨 말이냐?’ 그거 무슨 말이라고.

내가 고걸 물으며 보니까 대답을 하면서 그 사람의 피부에 속에 마음이 보이는데  ‘이 말도, 이 단어 이것도 모르는데 이 사람한테 배울 게 뭐 있느냐?’ 하는 그것이  그 피부에 보여져. 고다음 공과할 때에 또 내가 물었어. 또 물으니까 고게 확실히  보여져.

그래 내가 ‘너희들이 이 구원 도리에 대한, 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것이지 인간의  그 무슨 단어나 수사학을 공부하는 것 아니다. 이거 몰라도 좋다. ’ 이래도 그  사람이 아예 거게서 탁 돌아서 버려요. 그래 가지고 여기 있다가 가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목사가 됐습니다.

그 뒤에 여게 올라고 애를 써도 올 수 없는 것은 와야 벌써 때가 늦어서, 그  사람이 대우받는 것이나 명예는 한 중등 이상이 됐는데 여기 오면은 제일 하빠리  발치에 가 가지고도 설교가 모자라서 사람들이 배척을 할 모양이니까 그게 여기  있을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래서, ‘그거 내가 그렇다’ 그러니까 와 봐야 자기가 아무래도 돌아다녔는데  배척밖에는 안 당하고 말 터이니까 못 오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목회하기는  하지마는서도 목회가 시원찮아.

그러기에, 우리가 이 예배드리는 데도 가치를 어데 두느냐? 단어에다가 가치를  두느냐, 수사학에다가 가치를 두느냐, 그 문장에다 가치를 두느냐, 문법에다  가치를 두느냐, 태도에다 가치를 두느냐, 그 간판에다 가치를 두느냐? 이는, 주님이 우리를 살릴 때에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렸기 때문에 참된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참된 이치에 가치를 두고 고보다 나은 것은 성령에 가치를 두고  보다 나은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내것 완전히 삼아서 대속 안에서 내가 사는 이  완전을 가치로 둬야 되는데 이거는 가치 두지 안하고 저 엉뚱하게 세상 사람들이  가치 두는 것과 같은 그런 것만 가치로 두니까 뭐이 되겠소, 되기를? 자기가 바로 알고 깨닫는 데에도 자기 힘을 다하지 안하면 안 되는 그것이  고비입니다. 그게 고비라. 거게 좌우가 결정되는 그 절정이라.

자기 뜻을 다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뭣이든지 깨닫고 생각하고 고것을 이행하는  것을 가리켜서 의지라 뜻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기가 모든 것을 이행하는 우리에게 이행 요소의 마음 부분이 있는데  고것을 가리켜서 뜻이라 하는 것인데 고 계속하는 것, 시작해서 계속하는 고것을  뜻이라 하는데 시작하고 계속하는 고것을 다하지 안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게 사랑하는 건가? 형제를 사랑하는 게 어떤  게 사랑하는 것이냐? 어제 아침에도 그 말씀을 했는데 주님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계명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 하는 거 가지고는 소용  없어. 사랑하는데 주님을 사랑하여 실상으로 실질적으로 그 계명지키는 것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이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계명 지키는 게 사랑하는 것이지  주님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하는 것이 천 가지 만 가지 갈래길로 탈선될 수 있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소용 없어.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계명을 지키는 것, 이웃을 제몸같이 사랑하는 건 어떤 것인가? 그것도 이웃을 사랑함으로 내가 그와  관련될 때에, 그에게 보일 때에, 그와 접할 때에 하나님의 계명지키는 것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거라.

그러면,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계명지키는 것,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명령  순종하기 위해서 형제 사랑함으로 계명지키는 것, 이게 뭐이냐? 이것이 곧 그 계명지키는 것이 어떤 것이냐? 우리 앞에는 좁은 문  넓은 문, 또 평탄한 길 험한 길, 또 악령 성령 내 인도자가 둘이 있고 그러면 그  결과가 하나는 사망되고 하나는 생명된다. 사망으로 가는 것은 처음은 좋고  뒤에가 나쁘다. 생명으로 가는 것은 처음은 좁고 험하니까 시작할 때는 안  됐지마는서도 마지막에 결과는 좋다.

그러면, 이 일을 자기가 연구하고 찾는 데에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야 되는 것인데 어데다가 다할 건가? 이런데, 자기 모든 생활 다 해 놓고 나머지기 찌꺼기, 제 욕심 다 차리고 명예 다  차리고 주관 다 차리고 자율 다 차리고 심지어 자기와의 관련된 것 모든 땅에 것  준비할 대로 다해서 참 오바 옷이 열 두 개라 한다 하더니마는서도 자기를  위해서 방어선을 만들 대로 다 만들고 이제 할 일 없으니까 이제는 다 됐으니까  이제는 다 했으니 잘 먹고 잘 입고 쉬라 할 때에 그날밤에 끌어가 버렸습니다.

그날밤에 뒈졌어.

이거 다하고 나머지기 찌끄러기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향하는 그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못나도 좋습니다. 무식해도 좋습니다. 무능해도 좋습니다.

자기 있는 것만 다하면 의라 했소.

이러기 때문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지, 침노한다 말은 힘쓴다 말입니다.

자꾸 힘을 쓰는 자가, 계속 힘쓰는 자가 뺏지 힘센 자가 뺏든다는 그 성구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 그 이루는 그 방편과 힘드는 정도가  어떤가 하는 요것을 바로 성경에서 배워 가지고 요것을 바로 가져야 될 터인데  오늘 사람들은 이거 이상하게 그저 은혜라. 믿음이라. ‘믿음으로 얻지 은혜로  얻나?’ 착각하기 쉬워.

믿음이, 자기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것,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행하는 것과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어느 것이 힘듭니까? 어느 것이  힘드요. ○조사님, 뭐이 힘들어? 믿음으로 얻는 게 힘들어,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을 다해 가지고서 얻는 것이 힘들어 뭐이 힘들어? 그게  힘들어?○○○목사님, 똑 같다? ○○○목사님, ○○○조사님, 봐 이렇게 모르니  말이지.

이래 놓고도, 뭐이 똑 같아, 어데?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런 것 다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줘 도와 주셔서 믿음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지 그거 다한다고 믿음 되는 게 아니야! 믿음이 그렇게 쉬워? 어때? 그것 다하는 것과 믿음과 어느 것이 어렵고 어느 게 쉬워? 어느 게  어렵지? 믿음이 어려워! 믿음이 어려워! 믿음은 전지 전능의 완전자에게 딱  들어맞아서 그분과 일치되는 것인데 그게 인간들이 인간 요소 다하면 돼! 믿음이  뭐인지도 모르고 믿음으로 얻지 은혜로 얻지, 은혜로 얻는 것은 당신이 주시마고 선포해 놓은 법칙에 맞아야 주지 그리 안  하면 당신은 공평된 분이기 때문에 안 줘. 은혜는 은혜인데 우리 받는 준비는  인간에게 법칙을 말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법칙이 돼야  돼.

이러기 때문에, 지난밤에 보니까 재독할 때 내가 들었는데 펠라기우스주의라 하는  주의가 있는데 그 주의를 제가 진실히 행하면 어데 가 도달하느냐? 그라면  알미니안주의에 도달합니다. 죽자껏 정말로 자기가 있는 힘 없는 힘을 다해서  자기가 실행을 하는데 ‘하면 된다’ 하는 데까지는 아직까지 멀었소. 갈 남은  여분이 많습니다.

자기대로 정말로 있는 힘을 다해서 행함으로 구원 얻을라고 ‘행하면 된다’ 하는  것을 전심 전력 기울여 가지고서 할 대로 다 하고 보니까 어데 도착하느냐? ‘안  됐다. 하나님의 도움 아니면 안 됐다. ’ 그게 발견됩니다. 펠라기우스주의로  시발한 자가 알미니안주의에 도달이 돼야 비로소 그것이 자기 갈 데로 간 것이고, 알미니안주의로 ‘하나님하고 합동하면 된다’ 했는데 합동을 할 대로 다 해서  정말로 진짜를 하고 보니까 인간에게는 하나님 은혜를 방해하는 악령 악성  악습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그때에 발견했습니다. ‘인간이 반대 안 하면 된다’  여게 발견했습니다. `반대하는 요소만 꺾으면 된다. ’ 여게서 갈 대로 다 가서 절정에 도달하고 보니까 ‘이는 절대 하나님의 주권의  의지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방해도 못 하고  이루지도 못한다. 그분의 주권의 그 은혜다. ’ 여게 도달하는 거라. 그 넷이 똘똘  합해야 비로소 이 구원에 정상적인 성장이 돼 가는 것인데, 이래서, 우리가 시발은 어데서 해야 됩니까? 배웠지, 시발은 어데서 해야 돼요?  그거 처음 배우면 잘 모르지만, 펠라기우스주의에서 시작해야 돼.

펠라기우스주의에서 시작해야 되고 고다음에는 알미니안주의로 전진해야 되고  고게서는 루터주의로 전진해야 되고 고게서는 칼빈주의로 전진해야 돼.

이런데, 이 건설구원 이루는 것을 공짜배기로 따먹을 것으로 이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안 돼.

이러니까, 이 네 가지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네 가지를 다해서 바로  알고 깨닫는 데에 전부를 다해야 되고 바로 알고 깨달은 것을 이행하는 데에  전부를 다해야 된다.

어릴 때는 다하니까 ‘이것 가지고 됐다’ 하는데 그것 가지고 안 되고 그것은 다만  하나님이 공으로 주시는 그것을, 공짜배기로 주시는 그것을 내가 받는 내 준비라,  받는 내 준비.

공짜배기로 주는 것을 내가 찍해야 받는, 정상적으로 받는 자의 할 그 모든  준비하고 행동하는 그 정도지 그 이상의 것이 하나도 없어. 그게 나중에 가서는  칼빈주의로 ‘전적 하나님의 은혜다. 궁극적 은혜다. ’ 하는 데에 도달하게 되는  건데, 요새는 구원 이루는 걸 어떻게 시쁘게 보는지, 이래 놓으니까 뭐 말하면,  말하기를 모두 비쭉거려서 이 교계에서 날 비쭉거리기를 ‘그 율법주의자다’  율법주의자다 그렇게 말하더래. 율법주의가 뭐인지도 모르고, 율법주의가  뭐인지도 모르고 ‘율법주의자다’ 율법주의자는 이것은 중생이 없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도를  믿는 자들이 율법주의자입니다. 중생된 새사람으로 살지 안하고 옛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율법주의자요. 은혜주의자는 예수님의 것이 돼 가지고 믿는  것이 은혜주의입니다. 율법주의가 뭐인지 은혜주의가 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율법주의자와 은혜주의자를 알고 깨닫고 말하는 이  오종덕 목사 하나뿐이 없었습니다. 다른 이는 말한 게 다 헛되게 말해 보고 있어,  뭐인지도 모르고. 은혜는 공짜배기라는 것만 아는 것이지. 은혜 아래 있지 안하면  율법 아래 있어.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 은혜 아래 있어.

그런고로, 우리가 이 건설구원 이루는 것이 힘든다는 걸 알아야 돼요. 이  세상에서 조그만한 나라의 대통령되는 것도 힘이 드는데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됐을 때에 통일된 그 나라를 하나님 대리자로 통치하는데,  첫 아담은 우주를 대리 통치했지마는서도 우리는 영계와 우주를 대리 통치할 수  있는 우리들의 실력을 기르는 것인데 우리가 실력 없이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실력 없는 자에게 주님이 주십니까? 그 실력이 뭐이요? 영계와 물질계를 다 대리 통치할 수 있는 그 실력이  뭐입니까? 그 실력이 뭐이요? ○○○조사님, 믿음이 뭐인데?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거라, 하나님께 피동되는 것. 피동되는 것.

요셉이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 정치를 했기 때문에 전무 후무한 정치를 했어.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께 피동될라 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가 하면 나도 가, 다  하면 다, 전지자가 당신이 평하고 일컫는 데에 그대로 했는데 흠점이 있을까?  당신의 능력에게 붙들려 가지고 하니까 내 능력같이 보여지지마는서도 실상  근거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면 능치 못할 게 뭐 있어? 이게 돼야  하늘나라의 예수님의 대리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그렇게 쉽게 돼! 세상에 이거 뭐 학위도 하나 딸라 하면, 인간들에게 인정받는 노벨상도 받을라  하면 힘이 드는데! 대주재인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게 그렇게 쉬워! 마귀가 하는  것이라, 마귀가!es-2! 어떻게 쉬워, 쉽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거 다하는 것이 주님의 당신의 주시는 은혜를 공짜배기로 받을 수 있는,  우리로서는 그것밖에 할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당신이 귀엽게 보시고  그렇게 허락해 주실 걸 약속한 거게 따라서 되는 것이지 인간이 그거 다한다고  되면, 다하면 된다 하는 것이 펠라기우스주의라. 너는 다해 보지 못했어. 다해 보면은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안 된다. ’ 알미니안주의에나아가.

알미니안주의로 또 자꾸 이렇게 나아가서 이렇게 하고 보면은 나중에 루터주의에  도달해. 루터주의자들이 있는 데는 정말로 정상적으로 힘쓰고 보면은 ‘이거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다’ 궁극적인 구원을 자기가, 아무도 방해하고 방해받을 수  없는 그런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펠라기우스주의에 출발을 해야 돼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한다면 그 위에 아무것도 없어. 이래야 이 되는  것인데 자꾸 쉽게 보기 때문에, 이 장로들이 새벽기도 안 나와. 심판 클 거라!

장로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이라는데 이 목사 이게 권위가 있어서 이거 내 말만  들으면 확 해 가지고 그만 바딱 들어서 사례도 안 주고 나가라 고만 이래 버리면  좋겠는데 나가라 할라 하니까 오히려 있는 게 좋다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저거  힘을 못 쓰지. 이래도 내 말이 죽을 때는 감사할 걸? 장로 명예 가지고,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장로라고 볼라 하는데, 어째 믿는고  보자 보는데 ‘장로는 새벽기도 안 나간다’ 아, 몸이 좀 불편해 안 나가겠다.

장사는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놀러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자기 직업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마는 예수 믿는 데는 취미 없다. 고 힘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매밖에는 만드는 게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다  이 장로들에게 요렇게 하면 좋을 것인데 이거 이래 놓으니까 뭐 장로라 하면  장로님이라고, 저 애양원에 가 보니까 여기 장로석이라고 있어, 앞에. 장로석이라고. 거게 한번  앉는 게 장이라. 새벽기도 오면 거게 앉고 주일날도 보면 거게 앉고, ‘저거는 무슨  자리요? 이라니 내가 `장로석 아닙니까? 모두 다 장로가 아닙니까?’ 이래 가지고 내가 집회할 때에 예수님의 인성을 피조물이라 하니까 장로 하나가  빠딱 일어서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 나가. 이라니까 모두 온 애양원 교인들이 벌벌  떨어. 아이고 장로님 저래 나가니까 장로님 나가니까 큰일 났다. 저거 어째 저거  나가는고! 이래 가지고서, 나가거나 말거나, 저게 뭣 때문에 나간다는 거 알았지. 네가  진리를 반대하고 나가기 때문에 마귀 장로다. 네까짓 게 회개 안 하면 네까짓 게  어짤 것이고! 이래 가지고 그라고 나니까 하루가 지나고 나니까 나중에 와 자복을 해. ‘내가  잘못 알고 그랬습니다’ ‘너무 손양원 목사님은 참 부드럽게만 그래 했는데 그런  거 회개해야 됩니다. 장로가 평신도만치 못 깨달았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며 얼마나 자기가 월권하는 그 지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 내려  앉아야지. 저 밑에 끄트머리 앉아야 되지 장로석에 앉을 자격이 없어요. 그거  압니까?’ ‘녜, 압니다. ’ 한번만 가도 고런 걸 바로 주는 걸 주님이 기뻐하셔. 사람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 좋게 하면 뭐이라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 종이 아니라! 조금 가 놓으면 이 교인들 전부 제것만 만들어 가지고서 제것만, 제 사람만  만들어, 만들기를! 이래 가지고서 옳은 것도, 그 당시에 당회장이 결의한 것도 그  당시에 총당회장이 결의한 것도 그다음에 그때 생겨나지도 안 하고 근방에  오지도 안한 그런 사람이 와 가지고서 그걸 척 변동해, 이름 저거 것이라고 ‘우리  산이라’ 저거 산이면 저거 산 하지 뭐.

그렇게 양떼를 기르면 받을 심판이 큽니다. 진리를 이길 자가 어데 있어, 있기를!  주님의 대속을 거역할 자가 어데 있어, 있기를! 어떤 자가 강한데! 어림도 없는  소리. 어리석지 말아요. 똑똑히 알고 예수 믿어야 돼.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 때에 신사 참배를 이긴 사람 몇  사람이 돼, 몇 사람 돼? 숨은 거야 많지, 숨은 거야 많지. 그들과 대결해 가지고서  매일 시비하면서 이긴 자가 얼마나 돼? 6.25 때 6.25에 그 인민군 속에서 신앙과  신조를 버리지 안하고 굽히지 안하고 신앙 생활한 사람이 얼마나 돼? 노아 때나  꼭 같애.

그런고로 지금도, 하루 삼십 분 기도하라는 거 비웃고 있습니다. 어느 조사가  한다 하더라? 내가 이름은 말 안 해. 하루에 삼십 분 기도니 뭐 그래 뺄쭉나는  그런 소리 그거 다 소용 없는 소리라고서. 소용 없는 거 제가 하나님 앞에 보장할  건가? 그게 철이 없어 벌로 하는 소리라. 그건 철이 없는 소리라. 하루 삼십 분  기도 잊으면 안 됩니다.

반사들이 요 공과를 꼭 외우고 명상해 가지고서 자기가 실행하는 가운데서  체험하고 경험하고 고 사람이 돼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젖을 먹이는 것이라. 어린  아이가, 어머니가 무슨 음식이든지 미리 먹고 난 다음에 소화돼서 피가 돼 가지고  고다음 순서에 젖이 되는 것입니다. 소화돼서 영양이 돼 가지고 몸에 피가 돼  가지고 피가 그다음에 젖이 돼 나오는 거라. 이런 순서를 거치는 것인데 바로  먹이면 그 아이가 죽지 어짤 거라.

이 반사들이 자기가 외우고 명상하고 실행하고 이래 가지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속에‘ 하, 이거 아니면 안 된다. ’ 하는 그것을 느끼고 난 다음에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이지 그냥 앵무새 모양으로, 그럴진대야 테이프로 하지. 뭣  때문에 반사가 있어, 있기를?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796 은혜 아래 있음/ 로마서 6장 12절-14절/ 850930월새 선지자 2015.12.14
1795 은혜 아래 있음/ 로마서 6장 12절-16절/ 851001화새 선지자 2015.12.14
1794 은혜는 준비와 충성으로 받는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87073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4
» 은혜로 얻는 우리 준비/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880123토새 선지자 2015.12.14
1792 은혜베풀 때와 구원의 날/ 이사야 49장 8절/ 85072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4
1791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26절/ 841114수야 선지자 2015.12.14
1790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 830706수야 선지자 2015.12.14
1789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7절-9절/ 841114수새 선지자 2015.12.14
1788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 841118주새 선지자 2015.12.14
1787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 841117토새 선지자 2015.12.15
1786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6절/ 841113화새 선지자 2015.12.15
1785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9절/ 841110금새 선지자 2015.12.15
1784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26절/ 841111주전 선지자 2015.12.15
1783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26절/ 1984. 11. 11.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15
1782 은혜의 댓가는 감사/ 사도행전 3장 1절/ 800514수새 선지자 2015.12.15
1781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5절/ 841112월새 선지자 2015.12.15
1780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2절/ 841111주후 선지자 2015.12.15
1779 은혜의 댓가는 감사/ 시편 136장 1절-26절/ 1984년 23 공과 선지자 2015.12.15
1778 은혜의 때/ 이사야 49장 8절/ 850927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5
1777 은혜의 말씀/ 사도행전 20장 32절/ 801003금새 선지자 2015.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