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4 15:39
은혜 아래 있음
본문 : 로마서 6장 12절-16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어제 아침에도 이 말씀을 증거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 무오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한 형벌로 더 해 준다고 말씀을 했고, 또 감하는 사람은 이 구원을 감하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하신 일을 다 기록할라면 온 세상에 두는 데도 다 감당치 못한다고 많은 내용을 말씀했습니다. 또 성경 안에는 영감이 내재해 가지고 문서로 계시한 그 양 외에 영감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문자 그대로만 아니고 거기에 사람들이 해석을 가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또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에 문서로 계시해 놓은 것은 강령이라고 할 만치 그렇게 줄기만 기록해 놨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줄기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줄기를 지키는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줄기 속에 내재해 있는 영감의 계시를 차차 깨닫게 돼서 자기 생활이 이 육십육 권으로 인하여 온전한 지식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다 같이 깨닫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은 이런 면에 하나님이 더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면에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깨달음을 종합해 가지고 바른 깨달음을 가지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 본문을 볼 때에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것도 많고 또 아주 잘못 해석을 해서 틀리기도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양심을 가지고 참 이대로 살라 그 애를 써서 행하면서 사는 자에게는 자신이 그 생활로 인해서 차차 변화되기 때문에 변화를 인하여 이 문서 이면에 있는 은밀한 영감 계시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도 이 말씀을 하고 오늘 아침에도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기록한 말씀인고로 또 증거를 더 합니다.
여기에 6절에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면, 우리가 어떤 것에게 순종하든지 순종하면 그것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또 서로 투쟁해 가지고 지면 이긴 자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고, 또 죄에게 져도 죄의 종이 되고, 또 죄를 이기면 죄는 나에게 종이 되고 나는 죄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죄로 더불어 싸워 가지고 내가 죄에게 지면 죄의 종 되고 죄에게 이기면 퍼가 우리의 종이 됩니다.
죄가 종이 된다 말은 죄가 내 시키는 대로 하고 내 자유대로 하고 나는 죄를 잡아 부릴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죄 시키는 대로 하지 안하고 죄가 나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죄가 나 시키는 대로 하다는 말은 우리는 죄의 일을 멸하려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예수님 이 죄의 일을 멸하실려고 하심으로 죄의 일을 완전히 멸하시고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러면 죄가 우리에게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죄를 멸하려고 할 때에 죄가 멸해지고, 죄를 없앨라 할 때에 죄가 없어지고, 죄를 물러가라 할 때에 죄가 물러가고, 죄를 죽일 때에 죄가 죽고 그렇게 하는 그 권위를 가지는 것이 죄를 이긴 자요, 죄가 그 사람의 종이 된 자요, 그 반대로 죄가 이 죄 지으라 하면 이 죄를 짓고 저 죄를 지으라 하면 저 죄 짓고. 죄가 시키는 대로 순종해서 죄의 시키는 대로 해서 이런 죄 저런 죄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사람은 죄의 종이 되니 자신은 멸해지고 죄는 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 한 시간 한 시간 현실이라는 그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현실은 세 가지 싸움을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귀로 더불어 싸워서 마귀에게 내가 순종을 하느냐 마귀를 정복해서 마귀를 내가 다스릴 수 있는, 마귀를 내 종으로 내 소유로 삼아서 마귀는 나를 자유하지 못하고 나는 마귀를 자유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마귀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로 더불어 싸워 가지고 마귀는 예수님을 이기지 못했고 예수님온 마귀를 이겼는고로 이제 마귀는 예수님의 종이 됐습니다.
그런고로, 이 세상에 마귀가 우리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미혹을 시키지만 제가 단독 독권을 가지고 미혹 시키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미혹시키는 일에 이용을 하셔 가지고 그 미혹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온전케 하는데 이용하시는 이제 마귀가 됐고, 마귀가 성도들을 마음대로 해할 수 있는 그런 마귀의 위치에서는 정복을 당해서 이제는 주님의 종이 된 마귀가 됐습니다.
그러기에 죄가 왕노릇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런고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면, 죄가 왕노릇한다 말은 죄가 우리 몸을 제 마음대로 주권을 가지고 이렇게 행사하는 것을 가리켜서 죄가 우리 몸에 왕노릇하는 것이고, 왕 노릇하지 못한다 말은 죄가 우리 몸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서 왕노릇 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주님에게 종이 3고 주님은 죄에 대해서 왕노릇을 영원히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죄의 왕이 되고 죄는 종으로 우리가 정복해서 이용할 수가 있지 죄에게 종이 돼 가지고 죄가 우리에게 왕노릇해서 죄가 우리에게 주권노릇을 하지를 못하도록 우리가 된 것입니다.
이래서 여기에 잘 보면, 12절에 "그런고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그러면 못하게 하여" 했으니까 이 죄가, 우리 몸이라는 것을 육을 가리켜 말합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된 것이 사람인 데 영의 요소와 육의 요소가 있는데 육은 이 고기덩어리만 말하는 것인가? 마음도 육으로 딸려서 말합니다. 마음. 우리가 중생된 영을 가지고 있지만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안하지만 중생된 사람은 하루 몇 십 번이라도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이 범죄하는 것이 아니고 육, 육에 속한 것이 고기덩어리뿐만 아니라 마음이 육에 속했기 때문에 그 육은 하루 몇 십 번이라도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것은 영이지 육은 아닙니다. 영만 중생됐습니다. 육은 중생되지 안했기 때문에 육이 지금 중생 되도록 하려고 영들이 탄식으로서 지금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여기에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했으니까 죄가 우리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우리 심신에 왕노릇하지 못 하게 우리 심신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죄가 우리 심신에 왕노릇하지 못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못 하게 하여"라고 했습니다. "못 하게 하여" 말은 못 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랬는데, 혹 사람들이 "죽을 몸에" 했으니까 고기덩어리에만 왕노릇하지 못 하게 할 수 있지 마음에는 왕노릇하지 못하게 할 수 없다. 마음까지는 여기에 포함된 것 아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해 가지고 마귀의 유혹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 몸이라고 말할 때는 마음과 몸이 다 합해서 육이기 때문에 육을 가리켜 말한 것인 줄을 이래 알아야 될 터인데 그렇지 안하고 마귀란 놈은 거기에다가서 이간을 붙여 가지고 몸 하면 고기덩어리만 말하고 이 마음은 말하지 안하는 것으로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슨 범죄든지 의든지 행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이 먼저하고 몸이 따라가는 것이지 마음 없이 몸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과 마음은 다릅니다. 영은 탄식하면서 안 하려고 해도 이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죄 가운데로 끌고 가 가지고 원치 않는 일을 하 게 된다고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죄가 우리를 왕노릇하지 못하게 된다. "못 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몸의 사욕이라고 하면 어떤 것을 사욕이라고 말하는가? 사욕은, 성신의 소욕과 우리의 이 사욕과 욕심은 두 가지뿐입니다. 크게 말하면 두 가지뿐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의 욕심을 가리켜서 말하고 또 사욕은 하나님의 욕심이 아닌 저 인간 제 욕심을 가리켜서 사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그 소욕으로 제 소욕을 삼아 가지고 살아야 될 자가 제가 자존자와 같이, 독립자와 같이 하나님의 욕심이 아닌 제 사사로운 욕심 그걸 가리켜서, 인간 욕심을 총칭해서 사욕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욕이라면 여기에는 마음이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저 대구에 있는 ○조사님 ○○교회 ○조사님. 여기에 사욕이라고 했으니까 이 사욕에는 고기덩어리뿐의 욕심입니까. 마음에 욕심이 여기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마음의 욕심이 들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을 똑똑히 보고 생각하면 '몸으로 죄에 종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하는 이 몸은 마음까지 다 합한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이 어두워져 가지고 지금 영이 뭐인지를 모릅니다. 영을 지금 세계 조직 신학에서 영이 뭐이라는 것을 영의 정의를 내놓은 조직 신학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영이라는 것을 말하니까 지금 바깥에서 자꾸 이단이라고 이단시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 사람들도 자구 듣고 차차 생각해 보면 알게 돼서 지금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영에 대해서 반박하는 일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일어났고 세계적으로 많이 일어났지만 거기에 대해서 논문을 쓰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논문 썼다가 뒤에 가서 정죄받을까 겁이 나니까 논문을 쓰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논문 쓸 것을 모든 사람이 말하나 제가 논문을 써 놓으면 도리어 그 사람들과 논단이 되기 때문에 아니라고 주장했다가는 자존심상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 그거 내가 말하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욕을 순종치 말고" 사욕을 순종치 말라 하면, "순종치 말고" 이러니까 순종 안 할 수가 있다 말입니까 순종 안 할 수가 없다 말입니까? 양성원 학생 가운데 대답하십시오. "순종치 말고" "사욕을 순종치 말고" 이랬으니까 사욕에 순종 안 할 수는 없다 말입니까 안 할 수 있다 말입니까? 안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순종치 말고" 했으니까 안 할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하지 안해야 될 터인데 안 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는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으면 그 순종치 말고라는 말을 쓰면 그 말이 불법입니다. 순종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데 순종치 말고 하면 그걸 당장 하라는 건설면이 아니고 정죄하는 심판면이 돼 버리고 맙니다.
할 수 없는 걸 하라 했으면 그거는 정죄 아닙니까?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너희 지체라 말은 우리 모든 이목구비 수족, 이 심신의 지체는 욕심이나 주관이나 감정이나 기억성이나 뜻이나 이런 것은 마음의 지체가 되겠 고. 또 눈, 코, 수족 이런 것은 몸의 지체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또한 너희 지체를" "지체를" 할 때에 어떤 사람은 보기를 고기덩어리의 지체로만 생각하고 마음의 지체는 거기에 포함시키지 안하는 그런 해석이 있는 사람은 외나 솔빡 도적은 다 맞고 껍데기만 가지고 날뛰는 것입니다. "너희 지체를" 하는 이 지체라 말은 마음의 지체와 몸의 지체, 이 심신의 지체를 다 포함해서 한 마디로 너희 지체라고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려" '불의의 병기로 드려' 하는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불법의 병기로 드려 불법에게 불법에게 도구로 드린다는 말입니다.
불법에게 드려서 불법의 것이 되도록 하지 말고 그말은 '불의의 병기로' 불의의 병기라 말은 불의를 행하는 도구라 그말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도구 네 마음이나 네 몸을 죄를 짓는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죄에게 드리지 말고" 그러면 죄의 이용물로 그렇게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너희 자신을 어디다가 드리라는 말인가?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죽은 가운데 서 다시 산 자같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려'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가 누구입니까?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가 예수님이시요,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죽은 가운데서 법적으로, 계약적으로, 심판적으로는 다시 산 자입니다. 이런데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하는 것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예수님의 그 심신같이 하나님에게 드려라 이말입니다.
예수님의 심신같이 하나님께 드려라.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는 예수님의 심신은 마귀가 침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죽기 전, 부활하기 전 몸과 부활 후 몸이 다른 것은 부활 전 몸은 마귀가 침노해 가지고 예수님이 범죄는 안 했지만 얼마든지 침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자는 침노를 다시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이와같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우리를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자로 살아라 그말입니다.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자로 살아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산 자로 살면 어떤 자냐?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 부활하실 때에 죄 의 침노를 받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죄에 대해서 침노를 받지 안하고도 살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는 죄와 상관없이 살 수 있다는 그런 것을 여기에 포함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제 똑똑히 말했습니다. 우리를 말했습니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그러면 이 지체라는 해석을 고기덩어리만 지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기 덩어리만 드려라 이런 말로 자기는 믿게 되겠고. 심신의 지체를 다 말한 것으로 믿는 사람은 심신의 지체를 다 하나님에게 다 드려서 의의 병기로 살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것을, 몸이니 육이니 하는 것을 고기덩어리로만 믿는 사람은 그 사람들은 구원을 반 쪼가리를 하고 있는데 반 쪼가리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인간의 성화라 하는 것을 완전히 도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마지막 죽을 때에는 육의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때에 회개를 해서 될지라도 그렇지 않으면 교리적으로는 구원을 다 깨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라" 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그러면, 죄가 주관 못 하면 죄를 지을 수 있다 말입니까 없다 말입니까? 어떻습니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했으니까 죄를 지을 수 있다 말입니까 죄를 안 지을 수 있다 말입니까? 안 지을 수 있다는 걸 요게 똑똑히 말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게 된다. 죄가 너희를 범죄하지 못하게 된다 하는 말을 요게 똑똑히 밝혔습니다. 죄가 주관치 못한다 말은 죄가 너희를 범죄케 하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못 할 수 있다 그 말이오. 죄가 너희를 주관 할 수도 있고 주관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사람이, 죄가 자기의 심신을 주관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서 죄가 자기를 주관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역사에 왔다가 간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예수님 밖에서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뭐 유교에. 불교에, 뭐 회교에 노자교에 뭐 어디든지 종교가 많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마다 종교 창설자까지도 죄를 이긴 자는 한 사람도 없고 전부 다 죄의 종이 되고 갔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죄에게 주관을 받지 안한 사람은 예수 라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할 수가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걸 지금 말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 되는 이유는 어디 있는고 하니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주관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로 주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대속의 공로로 주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까 실상으로 주관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뭐입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이 똑똑히 결정해야 될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이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요 이치뿐이라는 말이요, 또 하나님의 심판적뿐이라는 말이요, 그 논리적뿐이라는 말이요, 법적뿐이라는 말입니까 그 실상 실제로. 실상으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까? 여기에 실상을 말합니까, 논리적으로만 말합니까, 법적으로만 말합니까, 심판적으로만 말합니까, 하나님의 계약적으로만 말하는 것입니까, 실상으로 죄가 주관치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이거 무엇 이지요, 똑똑히 구별됩니까? 실상을 말한 것입니까, 그 이치적으로 따지면 그렇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렇다, 법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이 대속했기 때문에, 대속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그러하다. 또 하나님의 공심판적으로 따지면 그러하다 이걸 말하는 것입니까. 실제로 죄가 우리 심신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까, 뭐입니까 실상을 말하는 것이 뭘 보고 실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네, 실상을 말하기는 말합니다. 실상을 말하기는 말합니다.
말하는데, 세계 학자들이 요거 실상으로 말한다고 생각지를 아니하고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논리적으로, 이것은 법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공심판, 심판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대속의 공로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실상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의 논리의 법으로 계약적으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다 면제 당했기 때문에 그래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인해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 공로를 입어 실상 우리가 죄에게 주관 안 당하는 거는 아니다. 주관을 안 당하는 거는 아니고 그 공로를 인해서 주관을 당하지 않는다고 믿으면 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세계에 오늘까지의 조직 신학에 공통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지.
이러기 때문에, 여기서 여러분들이 암만 배우고 나가도 나가면 틀려버려요. 그 사람 말 잘하고, 말 잘하고 유식하고 또 그 모든 광문 다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꿰어대고 저 말을 꿰어대고 갖다 꿰어 대면 그만 얼떨떨해 가지고 사람들이 거기에 삼켜지고 만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새들이 와서 주워 먹는다 그말은 다 그만 이런 모든 정함이 없는 인간들의 모든 말 가지고 다 삼켜 버리고 만다 그런 것을 뜻한 것입니다. 실상을 말한 것이지 논리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렇다 그말이 아니고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이 성경 어디를 보고 지금 실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주장할 수가 있습니까? 뭐 어디서 실상을 말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아니, 그것은 여러분들이 배웠기 때문에 지금 열매만 가지고 하는 건데 그게 아니고 이 세계 학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이렇다 하는 말이지, 대속의 공로를 입었기 때문에 이래 된다는 것이지 실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고 있다 그 말이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이것을 하나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이 공로로 인해서 그런 것이지 실상으로 그 심신을 죄가 주관하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지 안하고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공로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그와같이 지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되는 것이지 실상으로는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다 이렇게 주장한다 이거야.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 요한 1서 3장에도 보면 그렇고, 5장에도 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고 죄가 가까이 오지도 못한다' 하는 이 말씀을,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난 자, 중생된 자 이렇게 말할 때에 그것은 죄가 가까이 오지도 못한다. 만지지도 못한다 하는 그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그래 된다는 것이지 실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는 그 변호를 가지고, 그 성구를 가지고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 대항하는 일을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것을 중생된 영이라고 말은 해 놨는데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 말이오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 했고 영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원을 얻었지만 이 몸은 죄를 인하여 죽어 있다 똑똑히 구별해 갈라트려 가지고 육은 죄로 인해 죽어 있다 이라지만 그걸 자꾸 사람들이 혼돈시킨다 그 말이오.
여기서 뭘 보고 실상을 말한 것이라고 우리가 알 수 있느냐 하면 12절 이하에 말하기를 뭐라고 말했느냐?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못하게 하여' 말은 못 하게 할 수도 있다 말이지만 서도 못하게 됐다 말입니까? 아직까지 미결로 돼 있다 말입니까? 예? 미결됐다 말이오, 이미 완전히 결정이 났다 말이오? 미결 아닙니까? 할 수도 있고, 이렇게 종노릇 할 수도 있고 종노릇하지 안 할 수도 있다는 미결이라 말이오. 미결이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다가 끌어다 붙이는 거는 틀리지 안 했습니까, 벌써 이거.
미결이면 어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미결입니까? 대속의 공로는 다 된 것인데.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했으니까 "말고" 했으니까 이것도 완전히 결정된 일이요 미결이오? 미결이라 그 말이오.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이것도 미결입니까 결정된 것입니까? 판단 났습니까. 미결입니까? 이거 다 미결 아닙니까?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이랬으니까 "산 자같이" 했으니 이거는 미결입니까 결정입니까 미결입니까 결정입니까? '같이' 했으니까 이거 벌써 결정된 것 아니오? "산 자같이" 이거는 벌써 죽은 것에서 다시 산 자 아니오? 산 자 아닙니까? 산 자 된 거 아니오? 아직 산 자, '다시 살 자같이' 살 자 같이면 하지만 '다시 산 자같이' 했으니까 이거는 과거사입니까, 현재사입니까.
미래사입니까? 과거사 아니오? 이걸 똑똑히 구별해야 돼요.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하는 이것은 과거사요 미래사요 현재사요? 예? 미래사 아니오 미래사요 현재사지. 틀립니까? "드리며" 했으니까 지금 이 시간에 드릴 수 있다 말이오.
현재사이면서 미래사지요. 현재사이며 미래사이지요. 과거사는 여기 아니지요.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거는 미래사입니까 과거사입니까? 미래사 아닙니까?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하는 이것은 과거사요 미래사요? 이거 미래사 아닙니까? "못하리니" 했으니까 미래사 아니오? "못하리니" 그러면 못 한다는 거는 완전히 결정, 이미 결정이 된 일입니까, 아직까지 못 할 수 있는 가능하기는 가능하지만 아직까지 미결로 있습니까. 완전히 심판 결정난 일입니까? 미결로 있지 않소? "못하리니 이는" "이는" 이렇게 못 하게 되는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그라면 하나의 상상적이요 논리적이요 예수님의 대속적이 아니고 실상을 말한다는 것이라는 것은 위에서 봐 내려왔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실상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 의심이 없습니까? 확고합니까? 양성원 학생들. 확고해요? 요게서 죽고 사는 게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해도 보면 폭탄에. 폭탄에 다른 거는 다 구비해 놨는데 구멍이 뚫려 있어 놓으니까 그거 때려서 폭발해 봤자 피 그러고 말지 퍽석 그러고 말지 폭발력이 없다 그 말이오. 이 성경 말씀을 이걸 구별해 가지고 확신을 가져야 생명을 능히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인데 전부 이렇게 저렇게 해 가지고 흐실 므실 이것도 저것도 하는, 모든 것을 확정적인, 진실에 도달한. 하나에게 도달한. 이리도 저리도 못 하는 그런 하나에게 도달한 그런 확정적인 그런 교리로 믿지 않기 때문에 전부 힘이 다 빠져 버려서 아무, 목회도 못 하고 성공도 못 하고 다 못한다 그거야 승리도 못 해. 그렇기 때문에 환난 오면 다 져 버려요. 오늘도 지금 그런 교리 가진 사람들은 오면, 환난 오면 다 집니다. 왜? 하나님이 지도록 만듭니다. 왜? 교리가 틀리기 때문에 틀리게 믿는 사람을 그 사람을 이기도록 하나님이 해 주시지를 않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이 이기지 못한다면 그 바로 믿는 게 깨지지 않습니까?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법 아래 있지 않는다 말은 법에 속하지 아니하고. 법 아래 있지 않다 말은 법에 소속해 있지 안하고. 은혜 아래 있다. 은혜에 소속해 있다 그말입니다. 은혜에 소속해 있다.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러면 법 아래 있지 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이 말이 논리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적으로, 그 공로의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과거에 속한 과거적으로 법 아래 있지 안 하고 은혜 아래에 있다. 이 과거적으로 말한 것입니까 현재적으로, 과거와 현재적으로 말한 것입니까?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했으니까 여기에 과거뿐입니까 현재는 없습니까, 과거와 현재가 있습니까? 법 아래 있지 안하고 했으니까 과거뿐입니까, 현재는 없습니까? 법 아래 있지 아니하였고 하면 어찌 됩니까? 과거가 되지요. 또 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니 하면 어찌 됩니까? 미결사 아닙니까?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니까 요게는 뭐이 들었습니까? 과거가 들었습니까. 현재가 들었습니까, 미래가 들었습니까? 이 뭐이 들었습니까? 과거만 들었소. 현재만 들었소, 미래만 들었소, 셋이 다 들었소? 아, 이걸 똑똑히 알아야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했으니 과거 들었소 안 들었소? 그러면 현재 들었소 안 들었소? 그러면 미래가 들었소 안 들었소?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했으니까 미래도 다 돌지 안했습니까 그거? 다 들었지. "은혜 아래 있음이라" 은혜 아래 있음이라 하는 이것도 내나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랬으니까 이것도 과거에만 그렇다는 말이요 현재에만 그렇다 말이요, 미래만 그렇다 말이요,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은혜 아래 있다 말입니까?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은혜 아래 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은혜 아래 있다 말은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은혜 아래 있다 말은 은혜라 하는 것은 내가 하지 않은 것 공짜배기로 받은 것을 가리켜서 은혜라 말합니다. 공짜배기로 받은 것을 은혜라 밀합니다. 공짜배기로 받은 것 그러면 공빛배기로 받는 것인데 위에 뭘 말하는 것인가?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죄를 이기고 죄를 범하지 안한다 말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
털끝만한 것도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 부활하신 자와같이.
죽어 가지고 부활한 자와같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했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매장해서 장례 지내서 죽어 가지고 다시 세례 받아서 우리가 다시 중생돼서 산 자이니까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은 송장과같이 되고 송장되고 산 자 됐으니까 죽은 송장이 죄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죽은 송장이 죄 짓소? 죄 안 짓는다 말이오. 죽은 송장이 죄 안 짓는 거와같이 우리도 죄 안 지을 수가 있다 말이오. 죄 안 지을 수가 있고,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님이 부활 하신 몸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은혜 아래 있다 이 말은 이제 무슨 말인지 이것을 지금 여러 분들이 단단히 잡아야 되지 요거 단단히 잡지 안 하면 안 됩니다. 마귀란 놈은 여기에 지금 자기의 죽고 살고 성공과 실패하는 게 여기에 달렸기 때문에 마귀란 놈은 이걸 혼돈시킬라고 전력을 기울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계 성경학자들이 모든 목사들이, 모든 교역자들이 이 성구를 확정하지 못하면 요게서 다 삼켜져 버리고 맙니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이 말은 법 아래 있지 않고 법에 속하지 안 했다. 내가 법을 내가 법을 지켜야 되는, 법 아래 있지 않다 말은 법에 속해서 내가 법을 지켜야 될 자가 아니고 그 말이오. 내가 법을 지켜야 될 자가 아니고 법 아래 있지 안하다 말은 내가 그 법을 지켜야 되는 그런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안하고, 법을 지키는 책임을 기지고 있지 안하고 은혜 아래 있다.
은혜 아래 있다. 하나님께서 공짜배기로 주는, 하나님께서 공짜배기로 주는, 공짜배기로 받는 거기에 속해 가지고 있다. 공짜배기로 받는 거기에 속해 가지고 있다. 요게 대해서, 공짜배기로 받는 거기에 속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짜배기로 받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이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공짜배기로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해석이 세계에 거의 뭐 백의 99나 될란지 그렇게 돼 가지고 있고, 공짜배기로 받기는 받는네 공짜배기로 받는 것이 그 위에 보니까 공짜배기로 받는 것 같으면 네가 뭐 힘 쓸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고 그렇게 종노릇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할 것도 없고 가만히 있으면 그거 다 공짜배기로 다 주는 것인 데 그 공짜배기로 받지 안하고 요게 네가 이렇게 애를 써라, 힘을 써라, 요, 죄를 짓지 안하도록 힘을 산라고 말했습니까 힘 안 써도 된다고 했습니까? 힘을 써야 된다고 말했소 쓰지 안해도 된다고 말했소? 써야 된다 말이오 힘을 써야 된다고 말했는데 뭣 때문에 또, 공짜배기로 받는다고 또 은혜에 속했다 했습니까? 이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힘을 써야 합니다. 힘을 써야 하는데, 죄를 이길라고 우리가 힘을 써야 하는데, 힘을 써야 하는데 죄를 이기는 것은 순전히 공짜배기로 죄 이김을 받지 우리가 죄 이기는 건 아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뭣이 나옵니까? 그러면, 우리는 죽자껏 죄를 이길라고 애를 써도, 인간이 죽자껏 죄를 이길라고 애를 써도 죄를 이길 힘은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는데, 다만 우리가 있는 힘을, 죽도록 충성하는 이런 충성의 힘을 다 쓰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시리라' 생명의 면류관은 무슨 말입니까? 면류관이라는 말은 승리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준다. 생명이 승리하는, 생명이 승리하는 그 승리를 네게 주겠다. 생명이 승리하는 승리를 주겠다.
그러면, 생명은 무엇을 가리키지요? 하나님과 연결을 생명이라고 하지 안했습니까? 우리 그래 배우지 안했소? 이것도 여러분들이 단단히 알아야 되지,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것을 그래. 그렇게 아는 사람들도 많지를 못합니다. 이 일반 교파서는 그거 잘 모르요. 요거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이라 하는 그것은 ○○교파에는 알고 있습니다. ○○교파에는 알고 있는 것은 누가 가리켜 ○○교파에는 아는고 하니 ○○○목사님이 가르쳐서 알고 있지 다른 박사들이 가르쳐 아는 것 아닙니다. 박사들은 그거 몰랐습니다. ○○○목사 한 분이 알았습니다. 알아 가지고 그걸 말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이란 말은 생명이 승리하는 승리를 주겠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이 승리하는 승리를 주겠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은혜 아래에 속했다 말은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도리를 지켜서 의롭게 살고 죄를 짓지 안하려고 하면, 안 하려고 하면 안하는 정도가 인간의 실력의 정도가 천층만층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실력 이 천층만층이 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안하고 의롭게 살라고 있는 전심전력을 기울이면 그 층어리도 천층만층 되겠습니까 한 층어리밖에 안 되겠습니까? 저 ○조사, 여기 저게 ○○교회, 예? 천층만층이지요. 여러 층 될 것 아닙니까? 여러 층 되면, 그러면 이 죄를 짓지 안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이것이 천층만층이 되겠습니까? 천층만층 일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런데, 천층만층이 되지 안하고 다 드린 사람에게는 한 층입니다. 다 드린 사람은 꼭 동등입니다. 다 드린 사람은 동등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준다 했으니까 죽도록 충성 하는 것은 인간들의 실력이 천층만층이니까, 그러면 충성도 천층만층이 된다는 말입니까 자기의 있는 것을 다 드렸으면 동등이라는 말입니까? 어떻소? 동등입니다. 동등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모든 말씀을 이 성구 볼 때는 요거 본받고 조 성구는 조거 본받지 이 전체, 성경 전체를 뭉쳐 가지고 하나로 봐서 이렇게 통하는 이 깨달음을 가지게 되면 이런 걸 다 알 수가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 힘을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서 죄를 범하지 안하고 의롭게 살라고 하면 우리 힘을 다 기울여도 절대 죄는 범하지 안할 수가 없고 의는 행할 수가 없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는 없다. 없는데 다 된다. 이거는 하나님이 공짜배기라고 해서 주셔서 된다. 그러면 공짜배기로 해서 주는데, 공짜배기로 해 주면 뭐하려고 우리가 그렇게 힘을 쓰라고 하지 안할 터인데 죽도록 충성되이 힘을 써서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고 다 해야 된다고 했으니까, 우리 힘을 다 써야 된다고 했는데 우리 힘으로써는 되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이거 모순되지 않습니까? 다 드려야 하는데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는 그 말은 뭐이냐 하면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다. 아버지의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 하는 그 말씀을 했는데, 우리 힘으로 다 드리면 자기 가진 실력이 많든지 적든지 있는 대로 다 해서 죄를 이길라고 의를 행하려고 이렇게 자기 있는 것을 다 드려면 하나님께서. 다 드려도 절대 할 수는 없는 건데 다 드리는 그것은 하나님이 해 주시도록 계약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렇게 다 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해 주시도록 계약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 주셔야 되고, 다 드리지 안할 때에는 하나님이 해 주시기로 계약을 안 했기 때문에 안 해 줘야 되고, 이러기 때문에 다 드리는 잣은, 다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다 공으로 당신이 대신해서 죄를 이기게 의를 행하게, 그렇게 완전 행위를, 신구약 성경 말씀 한 절도 빠지지 안하고 완전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하신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에 있는 성구, 많은 성구대로 우리가 다 행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 한 절도 범하지 안하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행할 수 있는 그런 길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걸 믿어야 돼. 있습니다. 있는데 이것을 믿는. 이것을 이렇게, 있다는 이 사실을 믿는 그 교리가 세계에 나오지를 안했다 그 말이오. 세계에 나오지를 안 했어. 이것이 나오지 안했기 때문에 마귀란 놈은 지금 마구 독수입을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 행할 수 있는데, 그러면 다 행할 수 있으면 우리 힘 가지고 할 수 있느냐? 우리 힘 가지고는 절대 안됩니다. 자기 있는 것만 다해서 죽도록 충성해서 있는 것만 다 기울이면, 기울이면 그 있는 것 기울이는 것은 하나님이 이제는 너 할일 다 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인계해서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 하는 하나님이 인계맡는, 인계맡아 주도록, 인계 수속이 다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계맡는 이제 시작이 된다 말이오. 우리는 다 드리는 것이 우리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 모든 절차와 준비가 완료된 것이고 완료된 거기에, 죽도록 충성해 완료된 것이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인계맡아 가지고 그 일을 해 주시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모든 믿음 말하는 것이 다 그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서 그는 하나님을 전적 믿고 자기 있는 힘, 자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전부다, 의심이 하나도 없으니까, 의심 하나도 없으니까 자기 마음 다했고 뜻 다했고 성품 다했고 하나도 의심 없이 하나도 없이 전부 다 하니까 다 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와 일할 수 있는데, 다 하다가서 의심했으니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바람 보고 두려워했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다 믿소 부인했소? 부인이라 말이오.
부인이기 때문에 능력이 가 버렸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전부를 하나님께 다 기울이는 데서 하나님의 전부는 내것이 되고 다 기울였다가도 내가 자기 주관대로 조금만치라도 그게 남아 있으면 다시 그것은 거기에 대해서 중단이 되고 만다는 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녜.
이래 말로만 듣고도 안 돼요. 안 되니까 기도하면서 오랜 시간을 걸척 자꾸 명상을 하면 우리 이 자체가 밝아집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천국을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하고, 지옥을 생각 하고, 인간이 죽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잡된 것이 다 불에 타집니다. 뭐 이거 아니면 죽겠다 하는 것도 오늘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까짓 게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오늘 죽는다는 걸 생각할 때에 또 이 세상 하룻밤 나그네와 영원 부활, 영원 무궁세계가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까짓 거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겠습니다. 예수님 피를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생각하고, 성경 생각하고, 영감 생각하고, 내 양심 생각하고, 세상 생각하고, 죽는 거 생각하고, 모든 걸 자꾸 생각하니까 세상은 차차차차, 세상에는 막 이렇게 우주 같았는데 세상은 나중에 조그만하게 돼서 나중에 세상은 뭐로 보여지느냐 하면 풀과 같이 보입니다. 세상이 풀로 보이고 세상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보여진다 말이오. 아, 요거는 풀과 같다. 확실히 믿어진다 말이오. 그러니까 오늘 마를지 내일 마를지 모르는 그까짓 걸 보고 일생을 바칠 리가 뭐 있습니까. 있기를? 하나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인데 왜 사람이 가치 있는 걸 내 버리고 가치 없는 걸 취할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생의 본능이 그렇지를 않습니다. 몰라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는 많은 명상을 가져야 됩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도 눈을 감아야 명상이 아니고 눈을 뜨고 일을 하면서도 항상, 피와 살을 먹어라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라 그말은 죄라는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요, 창조주가 당신의 뜻에 순종 안 하면 그거 멸할 것 아닙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물건 하나 만들어도 내 뜻대로 필요가 없으면 바짝 때려 부숴 버리는데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짐 승 한 마리를 먹여도 내 소용에 닿지 않으면 그거 없애 버리지 많습니까? 아, 돼지를 그렇게 열심히 먹이던 사람들이 자기소용에 수지 계산에 안 맞으니까 돼지, 언제는 돼지 새끼 다 공으로, 다 죽일 수 없고 다 공으로 가져가라고 다 그렇게 하지 안했습니까? 잡아먹을 수도 없고 이러니까. 조그만한 일에도 그 주인에게 소용없을 때는 그게 폭이 다르고 패기가 다르다는 걸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아, 당신이 조물주가 돼 가지고 모든 거 입히고 먹이고 다 만들어 내고 했는데 그분에게 필요 없어 그분에 반대하는 그거 냅두겠어요? 유황불 구렁텅이가 그거라 말이오.
유황불 구렁텅이는 다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것들을 다 소제해서 쓸어서 영원히 불태워 버리는 것이 그게 유황불 구렁텅이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꾸 명상해야 돼요. 명상해서, 일을 하면서도 자꾸 생각해 요. 일을 하면서도 생각하면 성경 말씀이, 자꾸 내가 생각하면 성경을 보지 안할 때에는 성경 말씀은 무시가 됐고 이 세상 말들은 이래 크게 보였는데 자꾸 성경을 생각하고 인간이 양심 써서 모든 걸 생각해 보니까 성경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뚜렷하게 보여지고 이 인간의 말은 그게 뱀의 말이라, 반 거짓말이라 딱 정죄돼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 세상 지식은 뱀의 지식이요, 다 죽이는 지식이요, 죽은 지식이요, 다 반 거짓말 지식이요 다 거짓말 지식이라, 생명 없는 지식이라 하는 그 말하는 것은 그들이 다 깨닫고 느낀 사람이 그말 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느낀 사람이.
세상 사람은 뭐라고 쌓아도 이 세상 지식은 죽은 지식이나, 하나님의 지식이나 동등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지식은 이게 죽은 지식인 줄 알 때에 그 세상 지식 가진 것이 자기에게 가진 것만치 효력을 주지 죽은 지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 나는 삶을 얻을 거 있고 그것에 하나라도 순종해야 된다는 이것을 가지고 산 지식으로 아는 것만침은 그것은 자기가 구원 얻는 데에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도하라는 것이 명상하라 말이요, 성경에 대해서 생각하라 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