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4 14:01
유일한 소원
1979. 10. 9. 화새
본문 :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소리를 듣고 놀래나 거기서 머물 수 없고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가소리의 원인을 찾는 것이 필연한 것이고 또 무슨 소리라는 것을 찾아 원인을 찾았으면 왜 그것이 그렇게 소리를 내게 되었느냐 하는 원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그것이 필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2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점점 외식으로 껍데기를 향하여서 외부로 나가는 자가 있고 또 하나는 껍데기에서 그 속에 알맹이를 향해서 들어가는 자도 있습니다. 나가는 자는 방종이요, 방탕이요,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드는 진실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것 중에도 더욱 외부가 되어있는 그 색깔을 보고서 달리는 자들이 있고 보이는데에서 보이지 않는 그 원인을 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철학이라는 것은 보이는데에서 보이지 않는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요. 종교라 하는 것은 보이는 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데 찾아가서 종착되는 것이 자기 아닌 타를 향해서 소망을 가지는 것이요.
철학은 같이 그 원인을 찾아가지마는 그 종착이 자기를 향하여 자기에게 소망을 도는 것이 철학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자기가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그를 따라서 들어가고 올라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움직임과 존재의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보이는 존재와 움직임이 하나님의 뜻인 진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진리라는 참된 이치 그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그것이 나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이 자연을 통해서 알려주는 이 알려주심을 배워가지고 또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문서로 계시해가지고 가르쳐 주시는 이 가르쳐 주심에 승격하고 향상해서 이 가르쳐 주심을 받고 또 문서계시로 가르쳐주시는 이 가르쳐 주심을 받아 여기에서 또 향상됙 승격받아 성신의 감화감동을 받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아 따라가고 영감에서 영원 자존자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여기에 도달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외식하는 사람은 껍데기 그 행동만 위주해가지고서 그 행동을 보는 사람의 눈을 향하고 또 움직이는 사람의 입을 행하고 또 사람들의 그 움직임을 향하지마는 이것보다 이것이 하나님 뜻인 이 진리냐 진리대로 되었다, 성경대로 되었다, 성경대로 되었으면 이것이 영감이 인정하느냐? 영감이 인정 한다면 하나님과 동행이냐 이렇게 점저 우리는 온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것이 없으면 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모든 신앙생활하는 그것의 그 목표가 어디 있는고하니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와 자기와 하나가 되는 여기에 있고 그 진리와 자기와 하나 되는 이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과 자기와 하나되는 여기에 우리의 소원과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요3:16 이하의 말씀함과 같이 우리의 소원을 이것을 수정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의 소원, 물론 소원이 여럿이 있겠지만 우리의 소원은 단일소원이어야 하는데 단일소원을 위해서 단일소원을 성취시키기 위한 모든 지엽적 그 소원을 가져야 되지 거져 둥치없이 가지나 뿌리 그것은 둥치에 끊어진 가지와 뿌리는 죽습니다. 둥치에 붙은 가지요 둥치에 붙은 뿌린데 그 뿌리도 둥치를 위하고, 가지도 둥치를 위하고, 둥치는 뿌리와 가지를 위하는 것처럼 우리가 단일소원, 제일 옳은 소원, 이 소원을 가져야 되고 옳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 저것 소원을 해서 그 모든 소원하는 수십 수백의 소원을 가진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인 단일소원 이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가지는 것이지 이 소원을 돕는 이 소원을 위해서 있는 소원, 이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을지라도 소원은 단일소원을 우리가 선택해야 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빛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어둠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어떤 단일소원을 가져야겠는가? 평생 하나님의 뜻과 자기ㅘ 하나되는 이것이 우리 소원이어야 합니다.
"네가 내안에 있고 말씀이 내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얻으리라" 그 말씀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이루시니까 소원 성취하니 좋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 성구는 내가 주님안에 있고 주의 말씀이 나를 주장하도록 이렇게 하면 주님의 의사가 나의 의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사 일치가 되니까 주의 뜻이 추호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이러니까 그의 소원이 곧 진리요 진리가 그의 소원이라 그의 소원이 진리라 그 말씀입니다. 그의 소원이 진리라 이러니까 그의 소원대로 다 이루어져 이것은 어떤 사람은 벌써 자기의 일생 표어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권찰회를 할 때나 늘 임원들이 출근하는 것은 매일하고 권찰회는 대개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이라 하는데 기도 인도는 제가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는 것 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있지마는 딴 것이 없습니다. 늘 기도하는 것이 한가지요 우리를 등용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어쩌든지 주님의 뜻만 이루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 한마디 뿐이요.
평생소원이 주님의 뜻, 평생소원이 주님의 뜻에 있어도 가다가 보면 이 뜻을 위한 이 뜻을 소원하는 이 소원을 하나의 가지처럼 뿌리처럼 되는 그 소원도 시작했다가 깜박하면 그 소원이 주체가 되고 이 주체된 이 소원은 망각해서 헐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이 소원 단일소원으로 귀정짖지 못하고 그 소원이 흩어져서 그저 이것을 소원할때는 이것 소원하고 저것 소원할 때는 저것 소원하고 그저 이 소원에서 저 소원으로 뛰고 저 소원에서 이 소원으로 뛰어 현실현실에서 자기의 소원을 이렇게 바꾸어 가면서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기뻐하고 이렇게 사는 생활은 체계없는 생활입니다.
머리도 없고 다리도 없고 팔도 없고 내장도 없고 눈도 없고 귀도 없고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주 생명체 자갈무더기 모양으로 자갈 무더기, 흙무더기 모양으로 그런 주체들이 주어 모아가지고서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있으면 지리외에 자기의 소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역사가 진리외에 무슨 움직임이 있는 것이며 그 움직임이 어떻게 존재할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이 소원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제직회가 모여서 의논을 합니다. 나는 50점짜리를 주장했는데 다른 사람이 51점짜리를 말했다면 냉정스럽게 비판할 때 내것보다 더 한 점이 더 있습니다. 있으면 얼른 50점을 그 앞에서 굴복을 하고서 51점을 자기가 소원하고 거기 들어 붙는다 말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유일의 소원을 가질수 있는 진리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소원하는 것 이것이 있는 사람이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넘어져도 일어섭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거의 일생이라고 할 만한 일생을 대단히 바르게 곧게 살았지마는 뿌리 없는 화초와 같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 넘어지고 언제 썩을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소원을 바로 찾아서 기본적인 소원 둥치가 되는 소원 이 소원의 주체가 되는 소원의 주체, 주체가 되는 소원 이 소원을 바로 정해 가지고 이 소원을 자기가 자기 소원으로 삼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해야 합니다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소원이라면 마치 이 둥치가 있는데 수많은 뿌리가 있지마는 이 뿌리 전부 이 둥치를 돕고 있습니다. 전부가 이 둥치를 돕고 있소, 자기의 소원은 이 주체의 소원을 돕고 있소. 자기의 소원은 이 주체의 소원을 돕고 있고 또 자기의 모든 발산되는 행동은 가지는 전부가 이 둥치에서 나간 가지라야지 둥치에서 나간 잎사귀라야 되지 딴 것은 그것은 이 나무에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의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은 유일한 진리의소원에서 발원되어 가지고서 이렇게 발산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생명에 속한 것이 못됩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뜻이요 이 진리 이것이 우리의 평생소원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평생소원이 되어서 자기의 가장 대적이고 원수에게서 나와도 내가 가진 것보다 앞선 진리라면 그것이 상관없이 그 진리를 마치 갈급한 그 짐승이 물을 당할 때에 앞뒤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물을 달라들어서 마시는 것처럼 그 진리를 흡수 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원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속해서 하나님의 이 뜻으로 움직여지는 이사람이 되도록 해달라는 그것을 평생 기도하고 평생 소원해야 하지 그렇지 아니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의 주체적 소원 둥치적 소원 이 소원은 하나만 가져야 되는데 이 소원은 하나뿐이어야 되는데 유일한 소원이 주체가 되는 이 주체 소원 이 소원이 돈에 있거나 권세에 있거나 자기 가정에 있거나 자기의 장수에 있거나 소원 명예에 영광에 있으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도 진리를 이용하는 자이기 때문에 진리가 그에게 이용당합니까? 진리 이용한 그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사람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농장에 농구 같이 쓰여지고 마지막에는 집어 던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의 소원 그외에 이것도 저것도 소원하는 그것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소원이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그 이루기 위한 소원을 하다가 그 소원이 자기의 주체 소원에 거리끼면 그까짓것 당장에 똥같이 집어 던져 버립니다.
그러나 이 주체 소원을 위한 소원이라고 제가 시작은 했지마는 스 소원이 이 주체소원에 털끝만치라도 거리끼는 것이 발견될때에 그때에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면 던지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벌써 선악과로 바꿔졌습니다. 빨리 거기서 아무리 주체 소원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집어 던지고 다시 그 소원의 주체인 이 주체 소원으로 달려가서 이 소원을 향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유일한 소원을 우리는 이성비판으로 지성으로 가질것이 아니라 유일의 소원 이 소원 이것이 차차 차차 지식으로 되었던 것이 이것이 본능화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능화 되어서 자기의 본능이요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가 자기의 소원이라 옳고 옳은 것이 소원이고 바른 것이 소원이고 깨끗한 것이 소원이고 어쨋든지 구별해가지고서 참을 찾는 것이 소원이고 꼿 하나님의 속성대로 바로 아는 것 미래에 대해서도 바로 아는 것, 사랑은 진리입니다. 진리에서 나온 것이 사랑이요. 사랑이 진리를 통해서 역사하요, 사랑의 그 모든 윤곽과 세포 전체의 조직은 빈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소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 소원을 바꾸어야 된다는 이것을 바로 깨닫고 자기가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지 어떨대는 이 소원이 주체되고 어떨때는 저 소원이 주체되고 그 주체된 소원이 많애 소원이 둘이고, 셋이고, 열이고, 이렇게 소원이 여러개가 되어가지고 있어, 그사람은 항상 허탄한 방탕의 걸음을 걸어 그는 아무리 세월이 가도 자라지 않습니다. 성장이 없습니다. 진전이 없습니다. 향상이 없습니다. 이 소원이 유일한 소원이 되야 됩니다. 유일한 소원 하나님의 뜻은 곧 참된 이치인데 하나님의 뜻 이것이 이 소원 하나만이 자기 소원이 되어야돼요. 이 소원 하나만이 그러기에 우리가 움직이는 것은 움직임보다 먼저 소원이 있고 그 마듬에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움직일라니 유일한 소원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잘못하면 유일한 이 단일 소원을 잊어버리고 단일 소원을 위해서 필요하고 소원이라 할지라도 단일 소원을 잊어버리고 다른 소원을 가졌다고 하면 그사람은 벌써 향방을 잊어버림 사람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소원이 자기를 끌고 허탄한 길을 걷게 할것이요. 모든 자원을 다 허비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그사람이 아주 생활이 허무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그사람이 유일소원, 단일소원 그 유일소원과 단일소원이 하나님의 뜻인 진리에 있다고 하면 그 사라믕ㄴ 환경이 평탄하기 때문에 그렇지 어떤 역경을 닥치면 멀리 그 순풍을 인해서 돌아섭니다.
그러나 이 소원이 이렇게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그사람이 아무리 평소에 성자라는 말을 들어도 마지막에는 예수님 팔고 맙니다.
왜정때에 신사참배로 극단, 6.25 인민군에 극단 이렇게 다 마지막에 극단에 이르렀을 때에 최종에 이르를 때에 최고에 도달 할 때에 그때에 그가 딴데로 탈선되고 기울려지는 것은 그 유일한 소원 진리에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소원이 진리에 있지 아니하고 유일 소원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소원이 악령은 그렇습니다. 유일소원을 이루기 위한 좋은 소원일지라도 유일소원은 잊어버리고 그 소원을 자기의 소원으로 가지게 해서 그 소원에 얼마 발탁하고 저 소원 모든 소원 그 소원을 유일소원과 연결했다면 유일소원 이것 위한 이 소원이다. 이것 위한 소원이지 이것 아니면 이 소원을 가질 필요가 뭐 있느냐? 언제든지 유일소원이 뿌리이고 유일소원 그 위에 이 소원이 있어서 이 소원을 한번 가지면 유일소원은 두 번 생각해야 됩니다.
이렇지 아니하면 유일소원이 이것이 멀어지고 지엽소원 그것의 혼돈되어가지고서 마지막에 유일소원이 가려지고 그것이 혼돈되어가지고서 마지막에 유일소원이 가려지고 지엽소원으로서 이래 나가면 차차 차차 지엽소원 이것이 둥치가 크면서 유일소원보다도 자기를 많이 점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때 넘어집니다.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왜 육체로 마치느냐 왜 목회자가 처음에는 생명 내어 놓고 죽든지 살든지 주의 뜻만 뭐 빈부귀천 고락 상관없다 어쩌든지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주 만 위해서 살겠다고 주장한자가 무엇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세상 사람과 꼭 같이 자기중심 자기위주로 그 자기 아닌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좋은 것 자기 유익한 것 자기 편한 것, 자기 영광스러운 것, 자기 좋은 것, 결국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하나님으로 시작했다가 자기로 끝마치는 것이 무엇이냐.
이 소원을 정리하지 않해서 그렇습니다. 이 소원이 당장에 하나님의 뜻이 자기 소원이 되어지는 이것이 되는 것 아니요. 평생소원이 이 유일소원 이것을 노래 부르고 어떤 것을 한토막해도 이루는 것이 유일소원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 연결이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인 진리 이것이 자기의 유일소원으로 되어진 사람이면 진리는 그 사람을 자유 할 수 있습니다. -한번 더- 진리는 그 사람을 사는데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소원이 진리가 되어있지 않는 그 사람은 진리가 그 사람을 끌고 가나 그 사람 좋아 하는 대로 끌고 가는 것은 생명이 없소. 그 사람 좋아하는데 그 끌고 가는 그 목적이 무엇이냐 그 사람의 싫어하는데 끌고 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왜 그 사람 싫어하는 데라야 자기가 죽고 하나님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인 진리로 진리란 말은 옳은 것으로 참된 것으로 자기의 소원을 가지고 이 사람은 어두워도 언젠간가 바른 것이 나옵니다. 그 눈에 보여요 그 위에 들어요 그러면 빨리 따라갑니다. 보이고 들리면 아! 이것이다 빨리 따라 갑니다.
그러나 유일소원 이것 여러분들에게 말해야 여러분의 귀에 안들어오요, 이것이 무엇인지 유일소원 단일소원 하나님의 뜻인 진리에 이 소원이 되어 있지 않는 자는 이 뜻이 아닌 것이라도 이것은 100점짜리 이것은 80범짜리라도 80점 자리에 거기에 부과되어 있는 모든 것이 조건이 좋으면 그리 택하여 갑니다.
유일소원을 가진 사람은 유일소원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은 뜻이지마는 이에 속한 조건 이것은 전부 전체가 나쁘다. 이것만 못한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만 그것만 못하지 다른 조건 다 구비되어 있다.
천하가 다 구비되어 있어도 나는 진리를 원한다, 이사람이라야 이것이 유일소원을 가진 사람이고 최고의 승리를 한사람이지 그렇지 아니하면 승리 못합니다. 자신도 반성하고 자신을 반성하기 어렵소 자신을 반성하기 어려우나 다른 사람을 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보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 이사람을 정말로 유일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보다 옳은 것이 나타날때에는 다른 모든 부가조건을 그것을 문제시 안하는 구면, 그 사람을 여러분들이 볼 수 있을 것이고, 아! 이사람은 하나님의 뜻인 이 참을 좋아하지마는 이것이 저희의 단일소원이 되어 있지 않다. 소원이 많이 있다.
이러니까 이소원도 있지마는 이 한가지 참을 소원하는 이소원보다도 다른 것 소원하는 소원이 10개나 20개나 좋으니까 중수를 다니 그것이 무거워서 그리간다.
그러면 그사람은 이것도 소원하고 그것도 소원하는 사람이다. 소원이 여럿이다 단장 판별할 수 있소, 유일소원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석해도 목사가 될수 있소.
나는 무식해도 목사 장립 시키겠소. 목회자로 보낼 수 있소, 유일소원을 가진 사람이면 유일소원을 가진 사람이면 진리는 그 사람을 책임집니다. 진리는 그사람에게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그 사람을 자유할 수 있소. 이 참인 진리로 유일소원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진리가 그 사람에게 알아 들어야 디지 진리가 그 사람에게 알아 들어야 된지 진리가 제맘대로 그사람에게 해 어림없소 그사람의 비위 섞어질라, 비워라 가르쳐서 맞춰서 조심있게 해야 되지 잘 못살면 그사람에게서 진리가 쫓겨 나오요. 자유 못합니다. 진리가 나에게 자유해야지, 진리가 나를 저의 맘대로 쥐고 흔들고 주물고 만들대로 만들지. 내가 나를 바치지 아니했는데 내소원을 바치지 아니했는데 어떻게 진리가 나를 자유할 수가 있겠오. 진리가 나를 자유해야 이제는 내가 진리의 것이 되어 가지고서 내가 진리로 자유하지 못 깨달으면 죽습니다.
그러기에 성자라하는 유명한 성지의 전기를 나는 그전에 읽었는데 그전에 읽은 전기와 지금 읽은 것과 달라 성자의 전기라는 그 전기를 가만히 회상해서 보면 그분은 성자가 아니야 그분은 도덕가는 되지마는 성자는 아니야 그분은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인데 성자는 아니야. 그는 종교의 위인은 위인이라도 그는 성자는 아니야 유일소원을 가진자는 아니라 그러므로 유일소원 이것은 무엇 때문에 가지느냐 이것은 중심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소원을 이소원을 가지고 평생 노력하면 중심이 바꾸어집니다. 중심이 바꾸어지요. 중심이 바꾸어지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자유합니다. 하나님은 그사람을 책임지요. 그사람이라야 하나님은 그사람을 책임지요.
이제 내가 그사람을 의탁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알기 때문이라고 주니이 말씀했습니다. 몸도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소유도 영광도 안돌보고 하나님을 책임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그사람을, 그사람에게 하나님의 것을 맡기지 맡겨주지, 좋을 때는 알랑거리다가 가서 하나님 맡겨 놓으면 하나님 팔아 먹으려고 하나님 죽일려고 한다고 하나님 죽습니까? 우리가 외식을 버리고 바로 참을 들어가 찾아야 됩니다. 모두 껍데기 이래 가지고 전부 혈육의 사람들이요.
혈육의 사람들, 혈육이 그것이 하나님보다 진리보다 중생된 영보다 강해 이러니까 8월 추석이 지나면 그 정체가 어떤 것이라는 것이 환하게 나온다 그거요, 정체가 어떤 것이라는 것이 모두 혈육의 사람라 암만 진리라도 혈육에 걸려 놓으면 없어 혈육 더군다나 우리 동양은 단위가 가정단위입니다.
가정단위란 말이 이것이 아주 좁고 혈육 단위란 말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에 나아가기가 어렵소, 이런고로 다른 민족에서 없는 학습이 있어, 학습이라는 6개월 거쳐가지고 그다음에 또 6개월 거쳐야 세례를 줘 다른 나라에서는 당장 믿으면 세례줘요. 즉시 믿는 그 시간에 세례받아 그만치 허무합니다. 가정단위 어떤 나라는 그보다도 좀 크게 사회단위로 되어있는 나라 있소 어떤 나라는 그보다도 좀 크게 사회단위로 되어있는 나라 있소. 사회단위 미국나라 저런 나라는 다 사회단위요, 이러니까 그것이 우상이라 좀 그것을 초월한 위인이라 하면 인류단위라 인류를 단위로 삼아 가지고 있어 그것도 다 죽는 것이야 하나님과 진리로 단위로 삼아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법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한분에게서 그 방편은 진리 하나로서 어서 언덕을 떠나야 돼요.
어서 벗어야 돼요.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는 그에게 나타내리라" 그러기에 제 수단 방법 능란한 기술이라도, 조직이라도 아주 명철이라도 제가 저만 속이고 저만 죽였지 하나님 손해 하나도 않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