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선지자선교회 1985년 7월 9일 화새 

 

본문 : 출애굽기 20장 4절∼5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여기에 대한 진리를 우리가 잡지를 못하고 껍데기로 자꾸 미끄러져 탈선되기  쉽습니다.

 여기에 새긴 우상이라는 것과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러면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랬으면 아무 이런 것이나 저런 것이나 아무 것도  만들지 말면 우리는 없어져야 되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이런 거 저런 거  만들어 가지고 우리가 살고 또 만들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그것을 만들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만물에 대해서 하나도 상관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말씀과 꼭같은 말씀이 됩니다. 여기는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이랬지만 이 말씀은 위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는 그 말씀과 다 연결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에나 하늘에나 땅 아래 물 속에나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다만 들수  있고, 또 만들어야 그것이 우리에게 이용이 되어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하도록  만들어 가지고 쓰는 것이지 그 원소를 그거 가지고 원소만 가지고 원소만 쓸  때도 있지만 그 원소만 그거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씁니까? 원소 그걸 뭐 참  요새로 말하면 뭐 기계를 만들기도 하고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또 어떤 그  재료를 만들기도 하고 이렇게 그 뭐이든지 만들어야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고  효력 있게 쓰지 만들지 안한 것은 만물과 나와 상관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말과  같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해 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들지 말라 하는 이 말은, 그러면 무슨 말일까? 그 위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기에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또' 하는 이것이 지금 참 애매한 말입니다. '또.' 하면 새긴 우상 외에  또 다른 거 이런 뜻으로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또' 하는 이것은 다른 데  연맥을 보면 다시 말하면. 다시 말하면 하는 그 다시라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여기에 중요한 뜻인 줄 압니다. 저 원어 아는 사람들, 그 히브리어 원어  아는 사람들이 그 원어라고 하는 것을 원어 학자들에 따라서 그만 다 그래 주욱  유행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하나 깨달아 가지고 그대로 깨달은 것으로 쭉 그래  공부했기 때문에 그 사람대로 그대로의 자꾸 그 번역이고 해석이지 그 테두리를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운 줄 압니다. 그런데 여기에 요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 하면, 무슨 형상 하면 그 안에 있는 형상 다라 말이오.

땅의 형상 다, 또 하늘의 형상 다, 또 땅 아래 있는 형상 다, 다이면 이것을  새긴 우상이라고 이래 말했으니까 그거는 딴 종류고 또 이거는 딴것이라. 그러면  하늘과 땅과 물속에 있는 그 형상 외에 또 무슨 형상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외에 형상이 다른 형상이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요것을 따져서 요걸  바로 깨닫는 데에 우리 참 사는 것이 있고 잘못 깨달으면 우리가 죽는 것인데,  마귀란 놈은 자꾸 이렇게 삐뚤어지게 만들어서 바로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것이 악령입니다.

 뭐 하나님의 말씀은 천하에 둬도 다 둘 곳이 없을 만치 그렇게 많은 양에다가  간추려서 획 하나는 우주보다 그 중량이 높은 그런 권위성의 말씀을 우리에게  간추려서 66권 도리를 주셨는데, 66권은 이 번역물은 그것은 두고 획 하나라  하면 원문, 또 사본 말고 그 원문 그것을 가리켜 서 말씀하신 것인데, 그러면  그런 중량을 가진 이 성구인데 우리는 이 성구를 아주 이것을 가치 없이 여겨서  줄줄 그래 하기 때문에 전부 소화는 안 되고 다 설사해 버리고 말고 이것이  도리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의사가 하나님이지 딴게  아닌데 하나님에게 대해서 범 성죄를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하려는 그것만 자꾸  만들고 우리가 맙니다.

 사람이 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그 사람에게는 절을 하고 존경한다고.

천치 바보나 그 자기 의사를 아주 멸시하고 무시하고 이렇게 입술로 존경하는  그런 걸 듣지 자기 의사나 자기나 자기 발언한 것이나 자기나 다 하나요. 또  자기 행해 놓은 그 행위나 일해 놓은 일이나 그거나 다 자기나 한 덩어리 되고  책임을 지고 있지 그 뭐 이 사람만 존대하면 일하는 그까짓 거 야 아무렇게도  욕을 한다 해도 상관없다. 또 이 사람만 좋아하고 이와 같이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의사 그까짓 거야 어떻게 한다 해도 관계없다 그럴 수 없습니다. 자기  의사나 자기 행위나 자기 해 놓은 일이나 그것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도 다 그래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대할 때에 이 말씀은 심히 참 중요하고  필요하고 만일 이런 책을 세상에 둔다고 하면 세상에 몇 권이나 두겠습니까? 만  권 둘 수 있겠습니까? 만 권 둔다면 이 성경 말씀은 만 가지 중에서 빼 놓은  하나라 그렇게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 권을 둔다면 그만 권  중에 한 권을 빼 놓은 거라 볼 것이고, 억억만 권이라 면 억억만 권 중에 한  권을 빼 놓은 거라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논리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논리가 정확합니까? 이 논리가 정확합니까, 이거는.

 그러면, 억억만 권만 두겠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두겠습니까?  이렇게 심히 우리가 헬 수 없는 수없는 다량 가운데에서 이 신구 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성구 한 성구도 수많은 다 분량 중에서  우리에게 간추려 그저 우리에게 간편하게 간단 명료하게 간추려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그러면 간추려 주신 것이면 그렇게 많은 그 양을 축소시켜서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축소시켜 주신 그걸 어떻게 우리가 그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축소가 있는 것만치 확대가 돼져야 우리가 필요있게 우리의 법전으로 쓸 수가  있는데, 그러면 그 해석을 누가 하며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 해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재적 영감, 성경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그  속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영감이 그 속에 역사하는 영감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그래서 십계명은 신구약 성경의 입문이요, 십계명을  통해서 신구약 성경 그 모든 진리에 들어갈 수가 있고, 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영감의 입문이라. 그러면 영감은 이 성경보다 무한히 크니까 영감은  어디까지 양이 많은가? 이제 천하에 둬도 다 둘 곳이 없다고 하는 그 자. 그  양을 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증거해 주는 것이 영감이요 또 그 영감을  축소해서 강령적으로만 해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이 요 신구약 성경을  강령적으로만 해놓은 것이 십계명이라. 그렇게 우리가 논리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논리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실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상대할 때에 이 말씀이 그라면 어떤 것을 말해  줬는가? 어떤 참 요긴한 것을 말했는가? 그러면 이 말씀의 그 실상을 놔서, 어떤  그 물건을 볼 때에 백 배 보는 현미경도 있겠고 천 배 보는 현미경도 있겠고, 만  배 보는 현미경도 있으니까 없는 걸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내 눈이 어두워  그러니까 그것을 그 많은 양을 볼 수 있는 그런 그 현미경과 같이 우리의 그  심령이 밝아지면 그 모든 것을 확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있는 것을 자꾸  늘여트려서 필요 없는 걸 자꾸 하나를 둘로 늘어트리는 게 아니고 그 속에 있는  그것을 우리가 너무 세밀해서 어려워서 모르는 것을 우리가 그 심령이 밝아짐에  따라서 그것을 보이는 거 이 배가 되는구나 또 백 배가 되는구나, 그 사실을  우리 눈이 밝음에 따라서 점점 확대되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그저 이 성경 말씀을 얼마든지 자꾸 이렇게  쪼개는 게 이것이 우리 할 일이다. 쪼개는 것만 우리 할 일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그거는 다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뭐 쪼개는 것도 우리 할 일. 왜 그걸 쪼개겠습니까, 어떻게.

성경이 한 절수를 말했는데 그 절수가 우리에게 보여지는 그 절수의 그 내부를  우리가 봐야겠습니다. 그 절수의 내부가 얼마나 넓고 양이 많은가 하는 것을  봐야 되는데, 그 내부를 누가 가르치고 있는가? 그 내부를 담당하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내재적 영감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이 그 안을 담당하고 있으니  내나 기록할 때에도 영감으로 기록했고, 또 그 기록된 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알려 주는 것도 영감으로 알려 주니까 그것의 그 내용의 그 많은 양을 보는  데에 십 배 보는 사람, 백 배 보는 사람 천 배 보는 사람 예를 들면 그렇게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명문되어 있는 그것만 보고하는 사람은 명문대로의 행위가 될 것이고  명문을 그것을 내용이 이 배가 되어 있는 그 이 배를 보는 사람은 이 배를  상대해 가지고 자기의 법전으로 삼아서 그대로 살라고 애를 쓸 것이고 그 십  배가 내부돼 있는 그 십 배의 내용을 보는 사람은 자기가보 고 깨달은 그 십배나  되는 그 내용을 자기 법전을 삼아 가지고 거기에 맞추려고 애를 쓸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뭐 괴수 죄인이라 점점 살아갈수록 자꾸  죄가 많아지고 자꾸 커지는 것을 사도 바울이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심령이 밝아져서 이 성경 말씀을 탈선해서 그런 게 아니고 성경 말씀 안에 자꾸  깨달아지니까 다른 사람보다 성경 안에 있는 고 내용을 더 넓게 보고 세밀히  보고 그렇게 보니까 그의 보고 말한 것이 더 다른 사람보다 양이 많아진 것이지  그분이 무슨 타락해 가지고 양이 많아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말을 왜 하는고 하니 우리가 성경을 아무나따나, 성경은 자꾸  해석해야 되니까 성경은 해석해야 되니 성경을 이리저리 자꾸 주 쪼개 가지고  자꾸 해석을 해야 이게 되어진다 이래 가지고 성경을 쪼갤라고 하는 그것도 참  천지를 모르는 그 기막힌 행위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1장 2절. '예언은'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가리켜서  예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언이라면 우리가 또 잘못하면 미래사를 말해 놓은  것이 그것이 예언이라 이라는데 예언이라는 이 발표가 우리말로는 예언이라  이랬지만 예언이라는 이것을 전체를 연구해 보면 그 뜻이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열어 보여 준 그 계시한 모든 것을  가리켜서 예언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모세 오경 쓴 것은 모시가  있기도 전에 과거 것을 모세가 기록했는데 그러면 모세가 기록한 그것은 예언이  아닙니까. 과거사를 기록한 것 과거사는 뭐 그거는 모세가 기록한 오경은 예언이  아닌가? 그것도 예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려 준 그것이 예언입니다. 그러면 2절에  '예언은' '모든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는 말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언제든지라는 이 말 한 마디에 언제든지라 말은  무엇에게든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하는 말 한 마디에 그 장소도 다 들어갔고  종류도 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니까 언제든지 하면 이것은  그저 한 시간으로만 보기 쉬운데 그 어느 현실이라며 그 시간만 가지고 현실이  됩니까? 언제든지 하는 거는 그 현재란 말 아닙니까? 언제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요 시간을 말했는데, 그 시간에는 그 시간은 뭐인가? 우리로 말하면 당면하는  현실같은 것인데 현실이라는 거기에는 시간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들이 다 관련됐고 또 거기에 장소도 거기에 다 관련돼 있습니다. 이 장소나  저 장소나 이 시간이나 저 시간이나 이 종류에 대해서나 저 종류에 대해서나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언제든지라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언제든지니까 그 어느 시간에든지 어느 장소에든지 어느 사건에  대해서든지 거기에 대한 그 하나님의 뜻은. '예언은' 고 위 20절에 보며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이랬으니까 그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으로 냈다.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해석은  사람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낸 것이니까 그 뜻의 주인인  하나님대로 해석해야 되지 하나님에게 배치된 해석은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 위에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사사로이라 하는 그 사사로 라  말은 그 말은 무슨 말인고 그 다음에 말하기를. '성신의 감동받은 자들이'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이라니까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들이라야  되지 입지 안한 사람들은 여기 근방에 상관이 없다 그말이오. 그러면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을 입지 안 한 사람은 이 예언의 말씀 곧 경의 말씀 이 말씀은 풀이  못 한다.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그말이오. 깨닫지 못한다. 풀이 못 한다.

 풀이라 말은 엊저녁에도 말했지만, 푸는 것은 그러면 주석을 쓰는 사람들이  거기에 풀이를 한 것입니다. 설교하는 사람들이 풀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석이 풀이하고 설교 풀이하고 그 풀이가 아무리 있다 할지라도 그 이가 우리의  그 실지의 행동에 상관이 없다면 그 풀이가 우리에게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석을 읽는 것도, 또 설교를  듣는 것도 그것이 무슨 그런 지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고 내 실지의 행동에 필요 없다면 그 지식은 우리를 괴롭히는  우리 두뇌를 번민케 하기 때문에 그거는 원수 중에 원수가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나 또 듣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은 그 성경  해석을 주석을 우리가 보는 것이나 설교 말씀을 들은 것이나 듣는 그것은 우리가  뭐할라고 듣느냐? 듣는 것은 우리 실지의 생활에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  필요 있도록 생활에 그 말씀을 적용을 시킬 게 아니라 그 말씀에 적용하는 우리  생활을 할라고 그 말씀에 딿는 생활을 할라고 우리가 그 주석이나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기에 푼다는 것은 어떤 풀이입니까? 그러면 이 성경은 66권 한  권뿐인데 66권으로 된 신구약 요 합부 한 권뿐인데 이 말씀 이 우리 실지의  천태만상의 모든 생활 천태만상의 모든 그 생활을 하나 하나에 세밀한 그 생활이  이 성경 풀이대로 우리 생활하기 때문에 이 풀이를 가리켜서 주석, 우리 행동과  상관없는 주석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그 주석은  우리 행동에 상관없는 주석이라면 그 불을 태워 버리지. 우리 원수입니다. 우리  그 두뇌만 번민케 하는 것이지 복잡하게 하는 것이지 아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생활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 풀이라 그  말은 신구약. 이 신구약 성경 합부 한 권뿐인데 이 합부 한 권을 가지고 그 내가  현실 당했을 때 이래 행동하나 저래 행동하나 그것을 여기서 찾아 가지고 내는  그것이 성경 풀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 풀이라고 하는 것을  주석가에게만 해당된 말이고 또 설교자에게만 해당된 말이지 우리 생활에 해당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외식이고 외식이고 너무도 가짜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이제 풀되 사사로이,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그러면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하면 사사로이라는 이 정의가 뭐인가? 사사로라 말은 어떤 걸  가리키는가? 사사로란 말은 인간 제맘대로라. 내나 그말은 그말인데, 인간 제  맘대로라면 그 범위를 어디까지 둘 건가? 그 다음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여기 범위가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했으니까 이 사사로움이라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입지 안한 것은 전부  인간 사적뿐이라 말이오. 인간 사적뿐이요, 사적이라는 말은 자기 개인 단독을  말하지 않습니까? 인간 저 혼자라 그말이오. 저 혼자 저 혼자 푼 것이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하나님께  하나하나 받아 가지고 말한 것이니라. 하나님께 하나하나 받아 가지고서 이걸  기록했으니까 이게 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을 만큼 많은  양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아주 종자적으로만 우리가 볼 수 있도록만 움싹으로  이렇게 표현은 이렇게 해 놓은 것이니까 하나의 표현의 그 속에 광대하기는 몇  억억억억만 배 광대인지 모르니 표현한 그것을 우리가 마구 먹을 수가 있겠는가?  마구 먹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그게 우리 생활에 그대로야 되겠는가? 이러니까  거기에 대한 내용을 아는 것은 성신의 감화라야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  기록한 것도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성신의 감동 받은 사람들이 그러면  다 기록한 것인가? 그러기에 어찌 성경 기록에 대해서 영감 기록이니, 또 축자  영감이니, 뭐 이렇게 하는 의사 영감이니, 그 하나에 그 윤곽 영감이 그 영감도  다 말하는데 그 영감인데 그 축자적 영감이라고 하는 그 영감이 다냐? 그저  영감으로 기록했다 하는 것 보담은 축자적 영감이 더 낫습니다. 그거는 획 하나  하는 거기에다가 깨달아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축자적 그 감보다도 그만  하나님께서 정확 무오하게 우리를 붙들고 어떤 방편으로든지 그분이 우리를  붙들고 역사해 가지고 성신의 역사로 이 성경은 기록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영감,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성신의 감동 받은 사람이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한다. 감동이라면 그것은 좀 단순하고, 축자라고 하면 더  복잡하고, 축자보다도 축자적 그 안에 얼마든지 들어가서 그거라야 돼지지,  이러니까 그게 아니면 안 된다 말이오. 그러면 그 양을 우리가 많이만 불리면  되는가? 많이 불릴 수도 없어. 불리든지 말든지 고 실상대로 우리에게 알려 주실  이는 성령 밖에는 없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성신의 감동 받은 그것으로써 하면  도매금과 같은 논리니까 이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고 다 할 수 있느냐?  성신의 감동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받아. 하나 둘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이러니까 이렇게 된 성경이니까 우리가 성경을 깨닫는 것도 내나  그와 같이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하나하나 해석해 주는 것을 이렇게  깨달아라 저렇게 깨달아라.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하나 깨닫게 해 주시는 그대로  깨달아야 돼지지 깨닫는 그것을 자기 맘대로 깨달아서 될 건가? 그래 그걸  말해서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사사로이 풀지 안하고 그라면 성신의 감동 받아 가지고 하나님 이  이렇게 요 해석은 이렇다 저렇다 또박또박 우리에게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그대로 받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 마땅한데 우리가 그것이 가능성이 있는가?  성신의 감동 받으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깨닫게 해  주시는 해석해 주시는 것을 우리가 그 해석을 받을 수 있다. 성령 감동 받으면  받을 수 있다. 감동됐을 때는 할 수 있다.

 그러면, 성신의 감동을 우리가 다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그러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어두운 거는 우리 몸 밖에도 어두움이 많고 우리 몸  안에도 어두움이 많습니다. 그러면 어두움이라는 것은 모두 다 빛 은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 빛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대로  그것이 빛이요, 어두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는 나왔으나 그것이  변질된 것을 가리켜서 다 어두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어두움이라고 말한 것은  변질을 말하는 것이고, 빛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에게 나온 그대로 변질되지  안하고 고 형상 그대로 고 본질 본성 그대로 있는 것을 가리켜서 빛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그 예언은 어두운 데 비춰는 등불 같으니' 모든 변질된 것들을  다 소멸하는 것과 같으니, 이거는 비유입니다.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그러면, 등불이 오면 어두움은 다 소멸 돼 버리지 않습니까. 어두움은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이 성경 말씀은 인간에게 모든 변질된 것을 다 없애 버린다. 변질된  것을 없애 버린다. 이러니까 그 모든 인간의 속성들이 변질됐고 욕심은 변질됐고  취미도 변질됐고 지식도 변질됐고 모든 변질된 이 변질된 것을 다 없애는 것이  이 예언의 말씀이라. 그러면 예언의 말씀의 자체의 능력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우리 인간에게 준 말씀이기 때문에 이말씀은 모든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어떤 종류의 천 종류나 만 종류나 억억만 종류의 그 모든  변질된 것을 다 소멸하고 하나님에게서 주신 그 본질 본성 그대로의 것만 남기고  그 나머지기는 없애는 그런 능력을 가졌다 그말이오. 그런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가 가능하다 그말이오. 그런 능력을 가졌다.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날이 새어' 하는 것은 네가 그 있는 것 날샌 다는  말은 자기 안에 말이 아니고 자기 몸 밖에 있는 환경과 주위가 자꾸 변질된 것이  소멸되고 본질 본성대로의 그 모든 것이 자기 환경, 주위, 분위기가 다 그와  같이 돼진다 그말이오. 자기 몸 밖에 있는 주위, 환경 분위기들이 다 그와 같이  되어지고, 이제는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너희 마음 이제는 그 마음을  말했습니다. 이런 네 분위기가 돼서 자꾸 이래 말씀을 이렇게 접촉을 하면.

말하면 이 말씀을 접선을 하게 되면 이 모든 만물관이 달라지게 된다 그 말이오.

만물관이 달라지게 된다. 만물관이 달라지게 된다. 네가 보는 만물관이 달라질  뿐 아니라 만물의 움직임이 달라지게 된다. 만물 이 네가 어두움에 있을 때에는  만물은 너를 전체를 다 소멸해서 멸망시키는 만물이지만 네가 이렇게 접해서  네가 변화되게 되면 모든 만물의 그 지식도 달라지고 또 만물의 행동도 달라져서  모든 만물을 너를 돕는 일이 된다.

 그래서 그게 그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네 안에 영감이 역사  하기까지, 그러면 영감이 역사하면 그거 비유인데 다. 샛별이 떠오르면 그  태양이 돋아 오르는 것입니다. 샛별은 태양의 앞잡이요 안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샛별이요, 샛별이라는 말은 새벽별이라 말인데 새벽별이 오면  해가 돋는다는 그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기 위해서 해가 돋는 앞잡이로 오는  것인데, 그렇게 영감이 오면 너희들은 햇빛을 볼 수 있다. 영감이 오면 하나님께  받은 말을, 받은 해석을 가질 수 있다. 영감 오면 하나님에게 받은 해석할 수  있다. 영감 오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할 수 있다. 받아서 말하는 영감, 그 기록  영감은 그 기록 영감은 했지만 우리는 기록 영감과 다르지 않는 내나 그 기록  영감이 그때는 기록 영감을 했지만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슨 영감 하는가 하니까  우리는 그 깨닫게 하는 풀이하는 영감 우리는 풀이하는 영감을 해서 그 풀이하는  영감 그 하나님 이 풀이해 주는 그 영감대로 하면 그 영감은 하는 그거는  뭐인가? 그것은 전지 전능 전지 전능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변동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그 말이 무슨 말일까? 그 말이  그게 어떤 말이냐? 신구약 성경 이 본문 이것을 말한 것일까? 내말 이 네 안에  있으면 그 말이라고 하는 것은 본문도 들어 있지만 본문을 풀이한 본문을 풀이한  그것도 다 포함해 가지고 주의 말씀이니까 내 말 주님이 고 풀이를 해 가지고  요리 해라 조리 해라 하는 그것은, '내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원하는 것은 그거 있어 가지고, 원하는 대로 구하라 하면, 구하라 그라면  다 이루리라. 원하는 대로 다 되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그 자기의 소원이  뭐일까? 그 자기 소원이 뭐이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그 소원이 어떤  소원이겠습니까? ○○○목사님 그 소원이 만일 자기 소원, 자기 사적 소원인데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그거는 전체가 죄가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그라면 죄를 짓는다는 말이 됩니다.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 원함이 뭐인가?  성경 바른 풀이라 그말이오. 성경 바른 해석대로의 풀이라 그말이오. 그게  뭐이냐 하면 다지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그 뜻은 다 이루어지지 하나님의 뜻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활은 다 어기든지 안 어기든지  하나님의 예정대로 됩니다. 뜻대로 됩니다. 뜻대로 되는데 하나님의 예정을  자기가 현재 현재에서 알고 자기의 인격이 원하고 원하는 그 원하는 자에서,  입장에서 하는 것이 의가 되는 것이고, 반대한다고 그대로 안 됩니까? 반대해도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도 다 하나님의 예정대로  됩니다. 믿는 사람 하나님의 예정대로 됩니다. 믿는 사람의 행위에 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 그것을 원해 가지고 그대로 되는 것이고, 또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 그것을 반대해 가지고 제 주장대로 해서 하다가  멸망받는 것이고. 택자들의 의는 하나님의 주장 하나님의 소원대로 제가 소원해  가지고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다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록한 것이 하나님에게 받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니까 기록만 그럴  거냐? 기록한 그것도 그만 기록한 명문 그것뿐 이라면 이제 거기에서 해석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해석할 필요가 없는데 그만 명문 그것뿐이라면 명문은  그 근본. 근본 그 실상은 천하에 둘 만한 그만한 천하에 둘 만한 그 다량의  실상을 명문으로 나타낸 것은 신구약 성경 한 권으로 딱 나타냈기 때문에 '그  속에는 많은 실상이 있으니 그 명문 그것만 가지고 한다면 우리는 그물로 말하면  그 벼릿줄, 그물에 벼릿줄만 가지고 고기 잡을라고 하는 거와 한가지 기 때문에  벼릿줄만 하면 되겠는가? 벼릿줄에 많은 그물고가 있으니까 그 그물고가 바로  달려 있어야 고기가 잡히지 그래 안 하면 될 것인가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데는 우리가 그 명문을 하나님께 받아 가지고 명문한 거와 같이 우리는 또  명문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에게 받아 가지고 우리가 풀이를 해서 먹고살아야  되겠다 그말이오. 풀이를 해서, 풀이해서 우리 양식으로 먹어야 되겠다 말이오.

 풀이해서 먹고살아야 되는데 그 풀이를 어찌 하느냐? 그 풀이하는 것은 이  말씀을 네가 주의하면 날이 새고 네 모든 만물관이 달라진다. 네 주위는 전체가  다 달라진다. 네가 이렇게 되는 데서 만물은 너를 집중 사격해 가지고 만물은  너를, 전체가 너를 유혹시키는. 그 유혹시킴을 받는 모든 존재들이 자기를  유혹시키는 그 유혹에 전심 전력 기울이는 유혹으로 주력하는 그 만물이  자기에게 상대되는 사람도 있고, 만물은 자기를 유혹시키는 만물로 주력하는  그런 만물이 될 수 있고. 만물은 자기를 옳고 바르게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또  바로 행하게 하는 그런 만물로 자기에게 상대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에서 얼마든지 체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시간에 한 그  존재를 봐도 같이 봐도 그 보는 데 대해서 느끼는 것도 다르고 깨닫는 것도  다르고 거기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도 다 다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심령에  감동으로 변화되는 데 따라서 모든 우리 눈으로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은 다  변해지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 요 주의한 다는  말이 무슨 조심한다는 말로 보지만 그런 것 아닙니다. 조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주의한다는 말은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 네 있는 전부를  여기에다가 다 기울이라 하는 그런 뜻을 가리켜서 여기에 주의라고 말했어.

주의라 하는 것이 여기 자기 뜻만 하나 가지고 조심하면 된다는 그런 걸로  생각하면, 여기 주의라는 이게 원어에는 모르겠지만, 원어가 지금 말하는 것  원어는 미개어입니다. 원어로 말하면 야만어요 미개어입니다. 원어는 야만어요  미개어인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그 다음에 발달에 따라서 한 가지 물건이  '형태를 요리도 하고 요리도 하고 조리하면 그 물건에 대한 그 지식을 백 가지로  지금 표현할 수 있으면 원어는 그때는 한 마디로 밖에는 표시를 못 하기 때문에  이거는 고전어요 옛날 미개어가 돼요 한 가지 말로 밝혔기 때문에 얼마나  껍데기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지금 그래 해석하는 것이, 여기 주의란 말은  자기의 심신이 전력을 여기에 기울이라 하는 그런 뜻을 표현한 것입니다. 요  주의라는 고 뜻은  그러면, 주의하면 어떻게 되기까지 주의를 하겠느냐? 주의해서 모든 네 가 듣는  대로 보는 대로 모든 환경 모든 그 존재관이 모든 만물관이 이것이 다, 인간의  모든 만물관은 인간의 지식 가지고, 인간의 지식은 만물관을 다 막 변질시켜  놨다. 인간의 지식은 모든 변질시킨 지식이다, 변질시킨 지식. 그 아담 하와가  변질 안 됐습니까? 원죄와 본죄는 인간이 변질된 것 아닙니까? 변질된 인간들이  내놓은 지식이라. 그러나 오늘 이 지식은 다 이거는 죽은 지식이라 하는,  지혜로운 말하고 있지만 이게 지금 아직까지 다 모두가 다 종합이 되지 안하고  이게 통계가 되지 안했기 때문에 인간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 죽이는 지식이라  하는 말은 지금 여기에 저게서 용납하고 있지 마지막에는 열 뿔이 하나가 됐을  때에는 어떻게 인간 모든 지식을 죽이는 지식, 죽은 지식이라 할라 하느냐? 인간  지식을 죽은 지식이라 죽이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사람, 저 ○조사님 이게 이게  이걸 듣고 눈이 확 떨어져 아. 이 별세계가 있구나, 이거 참 큰 막이 이거  뚫리는구나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로서도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이 주의해 가지고 보면 날이 샌다. 모든 네 환경이나 네  배경이나 너와 관련되는 하늘에도 관련되고 땅에도 네가 네라는 존재의 실력이  커지면 커진 것만치 범위가 커진다. 예를 들면 그 불이 등불이 크면, 등불이  밝으면 밝은 것만치 그 범위가 넓게 가서 비취고 범위가 넓고, 불이 작으면  작을수록 범위가 좁지 않습니까? 자기가 변화되면 변화된 것 만치 변화의 그  양에 따라서 자기 주위 환경과 모든 세계는 넓어진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네가 있는 그 모든, 날이 새고, 모든 만물관이 차차 차차 그것이 변질된  만물관이 되지 안하고 그 본질대로의 만물관이 된다. 또 변질되어서 너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본질대로의 너를 접촉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접선이  본질대로 되고 또 네가 아는 것도 본질대로 알게 되니까 이 어두움이 물러간다.

날이 새면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 아닙니까? 이게 전부 다 비유입니다. 이러니까,  어두움이 물러가고, 그러면 그걸 환경에는 그런데 환경에는 보니까 내가 볼 때에  '아, 이것은 참 나에게 없으면 안 되겠다. 이게 제일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정권을 잡았는데 '정권이 제일이라' 이랬는데 성경 말씀을 자꾸 보니까 이제  변질이 물러가서 '아, 성경을 보니까 온 천하 한 나라에 대정권 잡는 것이나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그 사람이 낫다. 아, 나는  천하보다 나은 내로구나. 또 자기를 빼앗기든지 잃든지 하면 아, 내가 지금 현재  빼앗기지 안하고 수입할 게 있구나. 내가 지금 수입할 그것도 이 천하보다  가치가 높구나.' 이렇게 봐진다 말이오.

 이렇게 만물관이 이렇게 자꾸 봐지고, 또 그 만물이 내게 대해서 역사하는 것이  그렇고, 상관되는 것이 그와 같이 돼지면 거기에 따라서 너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른다. 너희 마음에 영감이 차차 차차 이제 그 샛별 떠오르는 것, 영감이  떠오르겠는데 영감이 네 속에서 너를 주장하게 된다. 영감이 너를 주장하게  된다. 영감이 네 마음을 차차 주장하게 된다. 네 영감이 주장하기 전에는 양심이  네 마음을 주장해서 양심이 네 소유나 네 몸이나 네 행동이나 네 모든 생명이나  양심이 주관하게 되고, 양심이 주관하고 나면 양심이 주관이 뭘 원하느냐? 양심  주관이 그것이 양심은 하나님이 와 가지고 주관하기를 원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영감을 원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그러면 이제 영감이 네 속에 들어와서 성신의  감화가 네 전부를 주장하게 된 다. 양심이 주장해도 어둡고 어두침침했는데 그  다음에 영감이 와서 너를 주장하니까 환하게 밝게 된다.

 그러면, 내나 하나님에게 받아 가지고 기록한 그 사람들은 받아 기록했는데  너는 받아 가지고 해석한다. 받아 가지고 너는 행동하게 된다. 받아 가지고  행동해야 되기 때문에 그 성경 말씀은 사람들에게 배우지만 네가 어떻게 행할 네  현재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거는 아무도 너를 가르칠 자가 없다. 네 속에 기름  부음이 너를 중생시킨 그 성령이 너에게 옳고 바르게 너에게 가르쳐 준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런데, 우리는 얼마나 껍데기로 지금 예수를 믿고 전부 이거 외식으로  자기입니다. '너를 위하여'하는 요것을 여기서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요  하나라도 여러분들이, 이 수박을 뭣을 예를 들면 이걸 봉해 놨습니다. 종이를  봉해 놨으면 한 군데 봉한 걸 똑 떼면, 요걸 똑 떼면 똑 뗀대로 그대로 딱 이와  같이 벗기면 고 꺼풀은 다 일어납니다. 고 꺼풀은 다 일어나요. 그러면 설교도  그거라 말이오. 저 사람은 몇 꺼풀을 더 벗겨 가지고 지금 하고 있구나. 고 꺼풀  벗긴 그것은 말읗 하면 다른 사람은 고거는 암만 말해도 장 처음 듣는 소리라.

그러나 고 꺼풀을 지나가지? 내나 고 꺼풀에 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고 한  꺼풀 들으면 그만 고 꺼풀에 속한 거는 쫙 다 일으켜 버립니다. 네.

 이러니까, ○○○목사님이 그전에 말하기를 '백 조사님' 내가 조사로 있을 때  '백 조사님 설교 하나 들으면 나는 설교 삼십 개 사십 개를 하다! 고대로  일으키면 쪽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처음에 똑 떼어서 한 꺼푹 일으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꺼풀 일으킨다는 그게 문제야. 그것만 일으키면 그대로 다  일으키면 일어나. 지금 ○○○목사님이 그래서 그 설교록을 전부 다 거석하면서  '내가 거석한 책도 이렇게 다 거석해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그 책이 전부 자기  설교한 그 전집이 다 붙여 왔읍디다. 나는 뭐 내가 달라 소리 안 했는데 그 분이  날 참 위해서 다 가져오고 또 그 다른 뭐 거기에 소속한 모든 서류들도 와서  그래 와 가지고 내가 들라 하면 못 들 만치 내 짐으로 한짐될 만침 그만치  보내왔읍디다. 왔는데 그 분이 이 설교록을 보고 감탄해서 좋아서 한다 하는데  좋아하는 것은 그 분은 그 설교록에 이거 저거 다 보지 않습니다. 고 하나 똑 뗀  것, 한 꺼풀 똑 뗀 것. 고 꺼풀 뗀 것 그걸 볼라고 하는 것이오. 고거 보니까  그거보고 내가 일으키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고 다음에 또 한 꺼풀 두 꺼풀 세  꺼풀 그러면 그 꺼풀 열 꺼풀 있으면 열 꺼풀 떡 있으니까 한 꺼풀 떼는 그걸  말하면 책이 여러 수십 권이 되어 나올 수 있습니다. 또 두 꺼풀에 일어나니까  그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다 볼라고 하는 거 아니라 거기에 한  꺼풀씩 껍데기를 일으킨 그것을 볼라고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 들어가면 여러 수십 가지를 알 수 있다는 거 이걸 익척  가야 되는데 자꾸 그렇게 이 성경 말씀을 자꾸 파고 들어가 가지고 날이 새기를  노력하지 안하고. 또 그 샛별이 떠오르기를 노력하지 안하고, 또 하나님에게  받아서 하라는 요걸로 하지 안하고 자꾸 껍데기로 '보자. 이 사람의 방편은  어떤가, 저 사람의 방편은 어떤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방편을 다 끌어 모아  가지고 이 방편 한번 쓰고 저 방편 한번 쓰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원숭이  놀음이라. 흉내는 잘내지만 그전에 그 사람은 그거 가자고 효력을 봤지만 저는  그 모양 가지는 그것 가지고 효력을 못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서 계시와 그 안에 있는 내재적 영감 계시 또 이  계시 말씀과 같이 하는 능력. 또 내재적 영감과 같이 하는 능력 그러면 이  능력을 파고 들어가면 뭐이 나옵니까? 문서를 파고 들어가면 영감이 나오고  영감을 파고 들어가면 뭐이 나옵니까? 뭐이 나오지요? 문서를 파고 들어가는  것은 진리입니다. 문서가 진리입니다. 진리를 파고들어 가면 영감이 나오고  영감을 파고 들어가면 뭐이 나옵니까? 피가 나옵니다. 피가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피를 위해서 영감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피를 위한 영감입니다. 피의  심부름하러 영감이 왔습니다. 영감의 심부름하러 진리가 왔습니다.

 이래 자꾸 들어가 가지고 뭘 할라고 안 하고 껍데기로 자꾸 이와 같이 하니  이게 외식이로구나. 그래 가지고 암만해 봤자. 그 여러분들이 젊음 있을 때 그  기운을 가지고 이래 파고 들어가서 그저 여기서 딱가리만 떼주면 그걸 가지고  여러분들이 연구하면 얼마든지. 똑 요 설교록만 네가 설교 한 요것만 할 것  아니라 고 껍데기를 뗀 것이기 때문에 고 껍데기를 뗀 걸 가지고 그대로 자꾸  일으켜 나가면 얼마든지 세상이 듣지 못한 걸 자꾸 나옵니다. 사람이 백 미터  올라간 사람이 밑에 있는 십 미터 올라간 그 사람 보다 백 미터 올라갔으니까  넓게 보일 것 아닙니까? 백 미터 올라간 사람은 '아, 저기는 저 산이 있다요.'  이라면 밑에 있는 십 미터 올라간 사람은 '산이 있다. 거짓말하고 있다. 어디  산이 있어?' '저기 또 물이 있다' '또 거짓말하네' '저게 또 강이 있다' '또  거짓말하네' '저게 뭐 저게는 들판이 있다' '또 거짓말하네' 안 보이니  거짓말이라 하지만 그 사람은 뭐 사람들이 모르는 소리하는 것이 힘이 들지  않는다 말이오. 백 미터 올라갔으니까 백 미터 올라가 가지고 보는 대로 다 그  모든 삼라 만상을 다 말하니까 밑에 사람은 새것 듣는다. 새소리 듣는다. 새소리  듣는다 이라지만 그 백 미터 올라간 사람은 올라간 그 차원에서 말하니까 다  그래 된다 그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식으로는  껍데기로 나가지 말아라. 자꾸 안으로 기어 들어가라.

 이런데, 안으로 기어 들어가지는 안하고 자꾸 지금 뭐 어떤 사람이 '이  부흥사의 방편 중에는 뛰는 게 제일 장점이다' 뛰는 것 하나 배우고, 저 사람  부흥사는 주먹 때리는 것이 그 장점이니까 주먹 때리는 것 하나 배우고, 저 사람  부흥사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 말의 높고 낮은 고저 청탁을 하는 그것의 고저  청탁을 배우고, 저 사람은 아, 그 사람은 가다가서 이 세상의 역사 사학을 한번  말하면서 말하니까 그걸 배우고, 아. 저 사람은 말하는 데 무슨 세상 현재의  소식통을 전하니까 돼지고 이 전부 막 비빔밥으로 주 종합해 가지고 이와 같이  되려는, 그러기 때문에 내가 언제도 내가 어떤 사람, 아, 양성원에 가 가지고  내가 그걸 말했습니다. 인간이 뭐이냐? 그 확대식이 있고 목회도 확대식이 있고,  종합식이 있고, 성장식이 있다. 성장 식은 그거는 아무가 해할래도 해할 수 없이  나가지만 인간들이 허영과 허욕, 자꾸 확대해 나가는 것. 또 종합식으로 이거  종합하고 거 종합하고 주 모아 가지고 하는 것 그게 다 외식하는 목회지 절대로  올바른 목회는 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전원 수가 반대가 돼 가지고 자꾸 이래 하는데 반대 역사에 어찌  하겠습니까?  출애굽기 33장에 '너희들이 지금 너거 조상으로 더불어 약속한 가나안에 가라.

나는 가지를 못하겠다. 사자들을 보내겠다.' '아, 하나님이 안 가시면 우리가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갈 수가 없다.' 너희들은 목이 곧은 그 강퍅한  자들이기 때문에 내가 너거하고 같이 가다가는 도중에 가다가 전멸할 터이니까  애굽에서 인도해 가지고 전멸됐다고 그런 말 들을 것 아닙니까? 전멸할 터이니까  너거가 목이 곧으니 내가 전멸하기 때문에 전멸 안 하면 안 됩니까? 하나님은  전멸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랩니다. 우리가  전멸을 당할 수 있는 내 심지, 전멸을 당할 수 있는 내 말, 전멸을 당할 수 있는  내 행동이 될 때에는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전멸을 당할 수 있는 그것이 나기  전에 당신이 피해 버립니다. 당신이 피해 버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당신에게 거리끼는 내가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나 소원이나 욕심을 가질 때는  당신은 얼른 피해 버립니다. 안 피하면 나는 전멸시켜야 되기 때문에.

전멸시키면 그것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에 피하신다 말이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고 싶어서 얼마나 그라는데 뭐 하나님을 우리가 찾아서 만날라고  애쓸 필요 없어. 당신에게 거리끼는 것만 없으면 당신은 얼른 들어와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 어떻게? 얼마나 주의를? 날이  새고 너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 그러면 네가 영감  받으면 뭐 할래? 영감 받으면 하나님에게 들어서 발할 수 있고 들어서 네가  행동할 수 있다. 그러면 기름 부음이 네게 옳고 바르게 지도한다. 그게 뭐인가?  그것이 하나님에게 바로 들어 가지고 지도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외식을 버립시다. 요거 꼭 이 계명에 너를 위하여 하는  요거 엊저녁에도 내치 해도 그 모두 통하지 안하니까 자꾸 이래 말 하다가  말았는데 요거 여러분들이 자꾸 가 가지고 명상해 가지고 요거 깨달으면 하나만  깨달으면 그대로는 쏵 일어납니다. 이러니까 일어나 가지고 이렇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지. 우리 목회하는 것은 자꾸 무슨 방편을 써야 되겠다.

뭐이 돼야 되겠다, 또 교회도 큰 교회 가야 되겠다, 뭐 이제 경제도 좀 나은 데  가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좋은 데 아주 큰 교회 가면 입이 벙긋거리고 아주  어려운 그 가난한 교회 가면 실쭉하고 하는 그것도 참 그거 답답한 일입니다.

답답한 일. 어디가 성공하는 곳이며 어디 가 실패하는 곳입니까? 실패와 성공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의 뜻에 지금 어디든지 당신의 뜻에 가라는데 거기 가야  성공이 있지 아무리 큰 데라도 거기서 큰 데 갔으면, 하나님 뜻을 어겨서 큰 데  갔으면 크게 망하고, 작은 데 갔으면 작게 망하고, 큰 데도 필요 없고 작은 데도  필요 없고 당신이 가라 하는 데에 가서 하는 그것이 제일 자기에게는 큰 일이요  대성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요 정확하게 이런데, 그러기 때문에 누가 그렇게  살수가 있는가? 아.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건설 구원 이루는 것은 우리 행위로써  건설 구원을 이루는데 건설 구원이 되는 그 행위는 어떤 행위라고 주님께서  평가를 해놨습니까? 행위라고 했습니까? 네. 온전한 행위라고 했습니다. 우리  건설구원이 되는 행위는 온전한 행위라 했어. 사데 교회에 너의 행위 네가  죽었다. 어째 죽었나? 너의 행위에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 온전한 것이라야  네게 건설구원이 되는데 온전치 안 한 거는 암만 사이비하게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다 인정해서 이게 찬양하고 뭐 노벨상을 준다 할지라도 온전치 안하면 안 된다.

온전한 행위는 뭐인가? 하나님이 동행하는 행위.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하나님을 항하여 찾아간다 그 말은 우리가 양심은 그  신구약의 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내딴에는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그 양심 생활입니다. 그 신앙 양심 생활 은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 양심 생활은 인적 요소다 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이  들어가 가지고 말한 것이지만 그냥 외워서 외우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사실이 왜 그런가 그걸 모른다 그말이오. 신앙 양심 생활은 인적 요소나 자기  주관으로 하는 것인데, 주관으로 그렇게 애를 썼을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됐다  인정을 하시면 그 일에 영감이 동참해 가지고 영감이 동행하십니다. 영감이  동행하면 그게 전지 전능이 동행하는 것이라. 영감이 동행하면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뜻에 딱 들어맞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한 행위인데. 온전한 행위  그걸 가리켜서 뭐이라 합니까? 온전한 행위 그걸 뭐이라 합니까?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게 믿음이라 한다. 하나님에게 피동된 것이라 그말이오. 하나님에게  피동된 것. 그 하나님에게 피동 된 믿음은 그거 믿음은 어떤 능력을 가졌다  했습니까?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능력을 가졌어.

 이거 껍데기 말만 줄줄하지 속에 실상을 깨닫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라면  다른 데 야단지길 것 없어 이라면 돼지니 사실 그걸 지금 알라고 배울라고 하기  위해서 양성원에 말하는 것이지, 양성원 학생들이 말하기를 '아, 여기에 오면  다른 데 보다 뭐 우리가 다른 데 다 신학교를 졸업했고 뭐 이리 저리 다닌  사람들이 다 여기 왔는데 여기 오면 성경이나 좀 배울려고 이렇게 왔었는데  여기서 성경을 가르치지도 안하고 그만 이렇게 하니까 이거 좀 들을 때보다 좀  다르고 우리 허송 세월하는 것 같다.' 너거가 듣는 귀가 없고 보는 눈이 없어  그렇지 배운 것만 해도 그것이 얼마나 지금 복습을 해 가지고 알아 가지고 해야  될 것인데 암만 말해야 모른다 그말이오. 몰라. 껍데기야. 껍데기로 줄줄 훑어서  자꾸, 뭐이든지 소화 안 되면 그 몸에 해독을 끼치는 거 아닙니까? 이래 가지고  이것 때문에 망해서, 지식으로만 가지고 자기 교만만 가지고 지식으로만 가지고  허영 허욕만 가지고 이렇게 사람 못쓰게 완전히 버렸는데 이것을 치료하는 그거  말해야 하나도 옳게 먹어서 소화를 시키지 안하기 때문에 안 된다 그거요.

 저 아래도 내가 '여러분들이 목회를 하든지 진리 연구하든지 이래 할 때에  확대식을 가지지 마십시오.' 확대는 엿가락을 늘어트리는 것. 엿가락을  늘어트리면 그게 심히 늘어트리면 뚝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 확대식은 허영과  허욕을 뽑기 전에는 그 사람은 암만해야 제가 확대식입니다. 하나 있으면 둘  있는 양으로 하고 뭐 저도 단속 안 한 것이 남 단속할라 하고 또 저는 지금  자체는 지금 멸망인지 그것도 생각도 안하고, 다른 사람 감화 받으면, 다른  사람이 감화 받는 것보다 네가 먼저 감화 받아라.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아야,  다른 사람 은혜 받는 것보다 저 은혜 받는 거는 생각지도 안하고, 그게 전부 다  확대식이라 말이오. 그 외식이라 말이오. 그게 다 허영과 허욕에서 나온 것이라.

그것이 허영과 허욕에서 나왔는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 위함에서 자기를  사랑함에서 나왔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위함이 내나 그 짓하고 있다  그말이오. 그 확대식을 하지 말아라.

 또, 여기저기 어디든지 돌아다니면서 좋은 거 장점만. 그 사람을 내가 ○무슨  목사인데, 그 분은 나는 진리는 여기 와서 배우고, ○○○목사와 저 하고 이래  있는데 진리는 여기서 배우고 불은 어디서 받고, 또 모든 그방편은 또 어디가서  거석하고. 그 분이 그래 가지고 종합을 하는데 그거 다 못씁니다.

 녜? 어쨌든지 길러야 됩니다. 산 것은 자라가야 됩니다. 자라가야 되지 그런  것은 다 생명 없는 것이요, 종합식도 생명 없는 것이요, 또 확대하면 생명은  죽어 버리고 맙니다. 생명은 자꾸 쪼불트리는데 커져야 되지.

 이러니까 내가 그 세 가지 식을 양성원에 가서 말했어. 말했지만 그 무슨 저런  별스러운 소리하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아, 나는 지금 확대식을 가지고 있나  나는 여기에 저게 남산 부스러기 북산 부스러기 끌어와 가지고 이렇게 막 집합식  집합식을 내가 가지고 있나, 나는 성 장식으로 지금 내가 목회를 하고 있나?'  거기에 대해서 실지로 느끼면 뭐 그 공부고 뭐고 다 그만 중단하고 지금 거기에  대해서 지금 막 울고 불고 거기에 막 파고 들어가야 될 터인데 그걸 지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거 가지고는 배가 차지 안한다. 그 배가 차지 안하는 그거  원하는 그 배는 채워 줄 것이 없습니다. 채워 줄 것이 없어. 암만 말해야 또  말하면 그거나 가르쳐 주고 또 그라지, 모르는 사람에게 자꾸 이래 말만 구경만  시켜 가지고 교만해서 망치도록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좀 외식하지 말고 좀 진실됩시다. 진실돼야 됩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것, 뭣?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이 예언의 말씀이  그라면 무슨 가치가 있는데? 어두움에 비취는 등불이다. 이 말씀은 모든 변질을  다 소멸시켜서 변질을 다 이것을 완전히 정질화 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변색된  것을 다 탈색을 시키는 것이다. 탈색을 시키고 정색으로 만드는 것이 이 예언의  말씀이다. 이러기 때문에 자꾸 이렇게 거기다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이렇게  하면 네가 모든 만물관이 다 달라진다. 만물관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만물이  너를 접촉하는 것이 다 달라지고 네가 만물을 상대하는 것도 달라진다. 만물과  너와의 관계가 달라진다. 그러면 네 주위 환경 세계가 달라진다. 달라질 뿐만  아니라 또 네 속에도 그 어두움을 멸하는 그 샛별이 네 속에 떠올라서 그  어두움을 다 물리쳐 버린다. 그러면 샛별이 떠오르면 그 샛별은 뭣 하는 것이냐?  주님이 너를 주관하시도록 하는 그 앞잡이로서 그와 같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러니까 여기서 뭘 할라고 해야 되지 자꾸 껍데기로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공과를 만들 때에 내가 공과 만들라면 요번 공과는 내가 못  만듭니다. 이 교역자회 때문에. 공과 만들라면 적어도 사흘 동안은 내가 김치를  담습니다. 이래 가지고 만드는데 그 공과 만든 걸 줄줄줄줄줄 읽어 버리고 말지  그 공과가 그 근원이 어디며 어디까진가, 그 범위가 어디까진가 하는 그런 것을  자꾸 생각지 안하기 때문에 참 알고만 있지 뒤에 언제 얼마나 알고 효력을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라도, 한 가지만 알면 그 다음에 다른 것 다 압니다. 다 알 수가  있어.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알고 행하는 것으로 배워지는 방법이 제일 좋고.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돼. 행할 때에 그때 깨달아지는 것이 그것이 제가 아는  것만 가지고는 책상에서는 일생 동안 해도 못 깨달아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체험과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러기  때문에 '더 확실한' '더' 하는 거는 뭐이냐? '더' 하는 것은 다 주관 신앙, 경험  신앙, 체험 신앙, 또 그 모든 환상 신앙. 또 꿈 신앙, 음성 신앙, 하나님의 섭리  신앙 거기서 깨달은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 더 확실한 우리가 진리에  삐끌어져 탈선되지 안하고 확고하게 정확하게 가기 쉽도록 하나님이 해 놓은 것  있으니 그거 뭐이냐 하면 문서 계시다. 문서 계시는 문서 계시만 자꾸 읽으면  지식으로 늘어서 교만하게 되는데 문서 계시 속에는 영감 계시가 들어 있다.

영감 계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영감 계시는 그 영감은 곧 하나님이시다.

이러니까 우리가 외식을 버리고 어짜든지 진실에만 나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도 지금 이래 늘어놓기만 늘어 놨지 결말을 지우지를 못했어.

결말을 지우지 못해. 이러니까 그걸 다 간추려서 하나라도 알면 간단하게 가르칠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어제 아침보다 오늘 아침에 조금 낫게 알아듣는 것,  어제 내가 교역자 회의 때 하는 것보다 조금 낫게 알아듣는 것 같애. 알아들어도  실효 실감으로 느껴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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