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1 22:52
예수님의 사활
1984. 4. 22. 주일오후
본문: 로마서 6장 5절∼11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오전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로 살아야 하고,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자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두 가지 죽으심인데 두 가지 죽으심을 우리가 연합해서 죽어야 하고, 예수님의 살으심은 한 가지 살으심인데 그 살으심에 연합해서 우리도 한 가지로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심의 하나는 죄를 멸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출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 하나는 죄를 멸하시고 죄의 형벌을 멸하시고 죄 짓는 자를 멸하시기 위해서 한 가지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 죽음에 연합해서 우리는 옛사람 내게와 또 모든 이웃에게와 모든 이 공중의 죄 짓는 자와 죄 짓게 하는 자와 죄의 그 모든 권세를 죽이는 그 일을 우리가 계속 하다가 죽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이는 일을 계속하다가 세상을 마치는 죽음을 가져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죽이는 일을, 죄를 죽이고 죄 짓는 자를 죽이고 죄 짓게 하는 악령의 그 모든 역사를 멸하는 그 일을 우리가 계속하다가 죽어야합니다.
우리가 오전에도 말한 대로 죽음이라는 것은 늙어 죽는 것도 있고, 병들어 죽는 것도 있고 또 무슨 사고로 죽는 것도 있고, 또 순교로 죽는 일도 있고 별별 죽음이 있지마는 그 죽음은 외부의 껍데기 외형입니다. 외형의 죽음이 어떻다 할지라도 그 내부가 죄를 멸하는 그 역사를 하다가 세상 생활이 끝나서 생명이 끝나는 그 죽음이라야 우리는 후회가 없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순교자 기념이라고 모두 순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대마다 많이 있고 과거에 왜정 때도 순교자가 많고 6.25때도 순교자가 많고, 이래 순교자라 하면은 죽음 중에는 제일 값진 죽음이요 또 늙어 죽는 것이나 병들어 죽는 것이나 혹은 변사로 죽는 그런 죽음은 다 그것은 가치가 적은 것이라고 이렇게들 말을 하지마는 변사로 죽든지 뭐 물에 빠져 죽는 그런 것도 다 변사 익사라 하겠습니다. 그런 죽음이든지 늙어서 죽는 죽음이든지 병들어 죽는 죽음이든지 순교의 죽음이든지 우리는 죄 짓는 자를 죽이는 그 일을 계속하다가 끝이 마쳐진 그 죽음이라야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순교를 했다 할지라도 이 죽이는 일을 그 사람이 자기 직책인 줄 알고 주님이 맡기신 자기의 본분이요 생애인 줄을 알고 죽이는 일을 계속 하지 아니하고 엉뚱한 일을 하다가 무슨 정치 운동이나 자기의 사욕 운동이나 공명 운동이나 모험 운동이나 이런 걸 하다가서 마지막 주의 이름으로 죽었다 할지라도 그 죽음은 가치 없고, 그 죄를 멸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악령의 그 모든 것을 멸하고 또 죄짓게 하는 것을 멸하는 이 죄와 원수가 되어서 죄를 죽이는 그 일을 자기 일로 알아서 계속해서 죄로 더불어 싸우고 죄를 죽이는 일을 하다가 늙어 죽어도 가치 있고 물에 빠져 죽어도 가치 있고 병들어 죽어도 가치 있고, 이 일을 하지 안하면 주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순교라고 무슨 그 존대를 받을 만한 그런 순교의 죽음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빈껍데기요 속에 알맹이는 없는 그 죽음이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죽이는 일을 세상 끝 시간까지 하다가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또 하나는 주님이신 죽으신 죽으심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죽으셨고, 또 당신 주장대로 하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그 생활을 하시기 위해서 죽으셨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주관대로 살지 안하고 순전히 객관의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그 생활.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을 이루는 요 세 가지 생활을 결사적으로 해서 요 생활을 죽기까지 하다가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전 생활은 있는 전부를 다해서 이 세 가지를 죽도록 충성하라. 이 세 가지를 결사적으로 이 세 가지를 치명적으로 이 세 가지를 하는 이 순생, 자기의 사는 것은 죽는 생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대로 순생 생활, 주님이 이 세 가지를 처음에는 말하기 위해서 그 정반대의 세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한 이 순생의 생활로 계속하다가 마지막을 마쳐야 할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도 늙어 죽어도 병들어 죽어도 또 무슨 차 사고에 치어 죽어도 또 순교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세 가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행하는 일, 하나님에게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일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하는 이 세 가지를 죽을 힘 다해서 사는 생활을 가리켜서 순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순생, 순생이 없는 순교는 거짓부리요. 순생이 마지막 끝날 때에 순교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 순생하는 자에게 주님이 죽을 힘을 다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이세 가 지를 이루는 그 생애를 하는 그 자가 주님이 죽으심으로 사랑하신 그 죽음의 사랑의 교제를 맺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 그것이 순교입니다. 순교는 주를 위해서 그저 목숨 버린 그것이 순교가 아니고 목숨이야 그까짓 것 아무나따나 다 사람은 버리는 것인데 한 번 버려야 될 그 목숨 버리는 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주님이 하신 일, 주님이 이 모든 인간들이 자기 주관대로 사는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고 인간의 이 모든 법칙대로 사는 것을 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간 중심으로 사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이 사죄를 우리에게 입히셨고 칭의를 입히셨고 화친을 입혔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순생적으로 그 모든 날마다 죽는 죽음에 생명을 바쳐서 이 세 가지를 하는 순생 생활을 하는 그 자에게 자타가 알기에 생명 바쳐 주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기회로 마지막 죽음을 그렇게 변화시켜서 죽을 때에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죽는 그 교제를 맺도록 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순생자에게 대우한 그 순교의 순애 교절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순애, 죽음 순(殉)자 사랑 애(愛)자 - 언제 순애보라 하는 그런 잡지가 한 번 나왔다 갔는데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죽음을 해야 되겠습니다. 두 가지 죽음 하는 이것이 제일 우리 신앙생활, 신앙의 인격 생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인격 생활인데 신앙 인격 생활에 제일 외부가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들여서 이것을 멸하는 생활, 이것으로 더불어 싸우는 생활 이세 가지를 멸하는 생활 이것이 우리 신앙 인격의 외부요, 마치 말하면 몸이 제일 끝이요 몸 안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 안에는 영이 있는 것처럼 삼중으로 우리가 되어서, 이분설 말한 사람도 있지만 삼분설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삼분설이 알기 쉽고 삼분설도 장단점이 있고 이분설도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간편하게 이분설을 말하지마는 이분설 말하는 사람들이 삼분을 모르면은 이분설이 틀린 것입니다. 또 삼분설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분설을 말해야 될 그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면 삼분설도 틀린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영이 삼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인 것처럼 신앙 인격이라 하는 것은 외부적으로 죄로 더불어 싸워서 (저 ○양 눈 떠 눈 떠. 돈벌이 하는데 전심전력 다 기울이고 예배볼 때 꾸벅꾸벅 졸면 무슨 수입이 있는고?) 외부적으로는 죄로 더불어 싸워서 죄를 멸하는 것이 자기의 그 천명, 하늘의 명령 천명인 줄 알고 이 일을 죽도록 해 나가는 이것이 우리의 신앙 인격의 가장 외부면이요 그 이면에는 우리는 사죄를 의를 하나님과 화친을 이것을 건설하기 위해서 이것을 보수하고 이 일을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생적으로 사는 그것이 그 속에 이면이요, 그 다음에 마지막에 제일 안에 있는 내부는 주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 가지고 우리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으로 사는 이 생활로 영생합니다. 우리가 이 다음에 가서 영생을 얻는게 아니라 지금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이 사람이 새사람인데 이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중생될 그때부텀 영생해서 영원히 영생하는 이것이 참 사람이요 참 자기요 이것이 새사람입니다. 이것이 속사람입니다. 이 속사람으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주를 따라 사는 이 생애를 우리가 하여야합니다.
그러기에, 속사람 겉사람 그 겉겉사람-사람이, 나는 그 이야기를 잘 모르지마는, 외부의 피부가 있는데 피부 그것도 어느 정도의 그 양이 넘어 가도록 피부가 벗겨지면 죽는답니다. 뭐 피부가 몇분지 일이 남아 있으면 죽는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 피부가 있어야 그 안에 있는 근육과 모든 관절들이 있고, 또 그것이 있어야 그 안에 육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 신앙 인격의 사람도 외부적으로는 죄로 더불어 싸워서 죄로 더불어 죄는 몇 가지 죄인데? 세 가지 죄입니다. 세 가지.
한 가지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요 하 나는 인간이 인간 주관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죄요 한 가지 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저 위주로 사는 그것이 죄니 이 세 가지 죄 이 세 가지 죄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 우리 신앙 인격으로 말하면 우리의 피부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외부의 피부처럼 필요한 것이요, 이제 주님이 이것을 다 멸하시고 우리에게 그 대속의 공로를 입혀 주신 우리를 죄 없는 자로, 또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의로운 자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자를 이렇게 해서 해 줬으니 이것을 옷 입듯이 입고 이것을 입고 이 사람으로 계속 살기 위해서 이 사람으로 사는 이 사람으로 성장되는. 마치 말하면, 죄 없는 자로 성장되는 의로운 자로 성장되는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자로 성장되는 이 성장되는 이 일에 전심전력 다 기울여서 살다가 세상 끝을 마치는 이것이 마치 육체로 말하면 우리 근육. 골수 모든 이런 내장 이런 것들이 이와 같이 되겠습니다. 이제 이것이 있으면 그 속에 신비한 육의 생명이라 하는 것이 그 안에 있어 그 생명이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을 잘 관리하고 운영하고 이용해서 그 생명도 몸도 유지되고 튼튼히 성장돼 나가는 그와 같습니다.
비슷하이, 비유컨대.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일로 죽어야 하고 두 가지 일로서 두 가지 죽음을 죽어야 하고, 또 한 가지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한 가지 삶은 이것은 중생될 때부텀 우리에게는 영생하는 생명이 와서 있고 이 생명을 사는데, 우리가 영생하는 자기로 살았다가 또 죽을 자기로 살았다가 또 죽이는 자기로 살았다가 이렇게 합니다. 죽을 자기를 다시 살리는 자기로 살 때도 있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자 안 죽을 수 있는 자를 죽이는 일로 사는 것도 있고 이래서 성경에 여러 가지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요 세 가지, 이 세 가지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세 가지 이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죄를 멸하는 것은 형을 받아야 죄를 멸해지지 형을 받기 전에는 그 죄가 멸해지지 않습니다. 왜? 그 죄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배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형벌 받기 전에는 그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그 형벌을 받으심으로서 죄를 멸했습니다.
그러면, 죄를 멸하신 이 공로를 우리에게 입혀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제 구속을 공심판에 구속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죄로 더불어 싸우는 이 일을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연성해서 죄로 싸우는 이 일을 연성해서 죄로 더불어 싸워 죄를 멸하는 이 일에 자기의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 죽기까지 노력하는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에 우리가 연합한 자입니다.
또, 주님의 한 가지 죽음은 주님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칙의 지공 지성법에 만족을 이루시는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그 죽으신 죽음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죽음에 또 우리가 연합해서,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해서 하나는 싸와서 죽이는 죽이는 그 일을 죽기까지 하다가 죽이는 그 일을 죽기까지 계속하다가 끝을 마치는 그 생활을 해야 되겠고, 또 하나는 살리는 그 일을 살리는 그 일을 건설하는 그 일을 죽을 힘 다해서 끝까지 하다가 세상 끝을 마쳐야 되겠고 한 가지는 다시 이런 거와는 죽이는 거 살리는 거 이런 거와는 상관이 없는 완전히 진리와 영감으로 사는 이 새사람으로 자기가 살아 이 두 가지 꺼풀 속에서 새사람으로 영생하는 사람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생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다 합해서 한 믿음입니다. 이 세 자지가 다 합해서 한 믿음이라 말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일이라 말이요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일이라 말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 일이라 말이요, 하나님을 본받는 일이라 말이요, 하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라 말이요 또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이루어 가는 일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내부는 이러하고, 그러면 이 모든 게 다 믿음 생활인데.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 때에는 그 믿음 생활이 어떻게 되어야 그 믿음 생활이 바로 되느냐 하는 것을 잠깐 말하겠습니다.
믿음 생활이 어떻게 해야 그 믿음 생활이 바로 되느냐? 녜 성경 다른데 많이 말했지마는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말씀해 놓은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그 4절에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이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하는 것이 이제 두 가지 죽음, 한 가지 영생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그 동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그것이 다 믿음인데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좀 바로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
여기에 믿음의 외부를 여덟 가지로 말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팔 덕이 그리고 그렇게도 말합니다. 여러 가지 여덟 가지 덕이라, 여덟 가지 신덕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믿음,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또 하나는 경건 또 형제 우애, 사랑을 그 위에 공급하라.
이게 여러 가지 여덟 가지를 말씀을 했는데, 우리의 이 두 가지 죽음 또 한 가지 영생하는 거 이것이 다 한말로 말하면 믿음 생활이라 그렇게 표현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 생활이 언제든지 믿음이어야 됩니다. 믿음이어야 되지 믿음으로 되어야 되지 믿음으로 안 되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돼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과 하나님과 요렇게 관련이 돼 가지고 돼야 되지 하나님과 관련돼서 돼야 되지, 하나님과 관련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련이 끊어지고 달리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련,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의 관련 하나님의 그 뜻과 관련, 소원과 관련, 하나님의 지능과 관련 전부이 완전하신 하나님과 관련을 맺어 가지고서 하나님과 연결돼 가지고서 하나님이 본체는 우리가 되지 안하지마는 하나님의 그 본체의 모든 작용적으로는 하나님의 그 작용이 전부 우리와 연결돼 가지고서 그분이 원동이 되고 우리는 거기에 피동이 돼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작용되는 그 모든 것으로써 우리가 되어지지 안하면 다 사망이요 그것은 다 헛된 것이요 다 불탈 집들이요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첫째는 하나님과 관련을 바로 가져야 되고, 또 그 다음에는 그 덕을 말했습니다. 덕은 덕이라 말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유익된 거, 하나님이 아무리 기뻐하셔도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안하는 그 일이라면 그 거는 좀 오산이 돼 그런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사람들에게 유익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다 덕이 되지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신의 감화를 별스럽게 이렇게 생각해서 잘못 하면 치우쳐 가지고 성신의 감화라고 하는 그 성신의 감화는 자기 주관이 아니고 객관의 감화인데 객관의 감화라고 이렇게 하면서 잘못 되면 자기 주관의 그 감화 주관을 가리켜서 객관으로 착각 오산을 해 가지고서 가장 주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생활한다고 하는 그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을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져 가지고 실패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신의 감화는 알기 쉽습니다. 성신의 감화의 내부를 말하면 성경 도리를 바로 잘 깨닫게 넓게 깊게 이렇게 세밀히 잘 깨닫게 하는 것이 성신의 감화의 은사요, 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그 인정의 도수를 강하게 하는 것이요 또 성경 말씀대로의 살기를 원하는 그 소원하는 그 소원을 강하게 하는 것이요, 성경 말씀대로 또 행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강하게 하는 것이 성신의 감화요 이거는 다 내적 증거입니다. 이거는 다 내부적 증거 다 내적 증거요.
외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들이 좋아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감동받게 되는 그것이 곧 성신의 감화입니다. 사람들이 감동받게 되는 그것 이 성신의 감화요, 아무리 그 사람이 이거는 하나님의 진리라 이렇게 말을 하고, 또 성경을 갖다 대면서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되지 안한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오산되고 착각 돼서 잘못된 것입니다. 성신의 감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물론 세상이 다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이 선한 것을 이해할 리가 없고 죽은 것이 삶을 이해할 리가 없고 환영할 리가 없지마는 그래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은 죽었지마는 그 마음도 영의 모형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모형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악하니까 이해는 안 한다 할지라도, 또 속으로 이해되는 것이라도 모든 대외면을 생각해서 이해가 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척 하고 환영하는 것도 대항하는 것도 대항하는 척 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외식을 잘 하고 약자기 때문에 이 처세술로써 이렇게 되는 일이 있지마는 그 깊은 속에 양심은 감화를 받아야 됩니다.
성신의 감화되는 일은 그 속에 양심은 감화를 받아야 되고 그 과도기가 지나가서 언젠가 고요히 생각해 볼 때에 아무래도, 그 일이 옳다 그의 하는 일에 감화가 되고 존경이 되고 인정이 되어지는 그것이 되어져 야만 우리의 그 신앙생활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돼야 되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을 말하고 둘째로는 사람과의 관계가 바로 돼서 모든 사람이 지금 몰라도 이 다음에 심판대에 가든지 그 사람이 어떤 그 최면술에 걸려 가지고서 있을 때는 반항을 하고, 혹은 못 된 유혹에 빠져 가지고서 정신이 착란 됐을 때는 반대를 할 지라도 그 뒤에 평가적으로 깊이 깊이 정신 차려 생각할 때에는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을 할 수가 있고 감화를 받을 수 있는 이런 것이 되어지지 안하면 그 성신 감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바로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덕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됐다 할지라도 또 탈선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됐다 할지라도 덕의 지식을 말했습니다. 지식이라 말은 성경 지식을 가리켜서 주로 말씀하신 것이고, 또 인간들 지식은 타락한 사람들이지 마는 타락한 사람으로서 물질에 대한 지식은 바로 되어 있고. 인간들의 지식은 다 육백 육십 육으로서 잘못된게 있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에 맞는 하나님의 지식적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대로 된 것이어야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지식대로 된 것이야 되지 하나님의 지식대로 되지 안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잘못하면 하나님 생각하다가 사람 생각지 못하기 쉽고, 하나님과 사람만 생각하다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이 진리 말씀에 일치가 되나 안되나 그것을 우리가 또 등한히 하기 쉽고, 하나님의 진리 지식에 일치가 되는데, 또 인간들 지식 가운데는 이 과학의 물리라 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되어 있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것도 바로 되지 못한 것은 물리를, 물리를 사람과의 적응 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에 과학 지식도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과학 지식이 과학 그대로는 맞았지마는 그 과학이 사람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데 그 과학과 사람과의 그 조화가 바로 된 그 조화를 바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물리도 틀렸다 그렇게들 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괌도에 원자탄을 던지게 발명한 그 발명가가 그 후에 사 년인가 근신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물리는 받았지마는 인간과의 조화성에 잘못 된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지친 사 년간 근신하면서 회개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지식 성경 지식적이어야 되고. 또 이 과학적이어야 되고,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이 통계도 그 참고를 삼아 가지고서 거기에도 다 존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 대개는 됩니다. 하나님 말씀과 둘이 대립돼서 말씀에 맞으면 거기에 틀리고 이럴 때에는 그걸 배척하고, 하나님 말씀이지마는 하나님 말씀에 모든 인간들의 그 자기들의 사상에 모든 이 물질의 이치에다 그것이 바로 맞아서 되어지는 이것이 제일 우리는 안심하고 갈 수 있는데 이것이 다 맞지 안하고 혹은 둘이 맞거나 하고 하나가 틀리거나 이럴 때에는 우리는 고민스러워서 그것을 쉽게 그만 통과해 버리지 말고 그런 것을 깊이 깊이 생각해 가지고서 그것이 마지막에 바로 깨달아서, 인간 지식을 다 부인해도 하나님의 지식에 맞으니 이거는 인간 지식이 틀려 그렇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음으로 나가야 됩니다. 요거는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확실하다 하는 그 믿음으로 나가지 않으면 다 죄가 된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식에 절제를 이렇게 우리 믿음이 다 구비하고 바로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조절이 돼야 되지 너무 지나가도 안 되고 너무 모지래도 안 됩니다. 그 절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절제는 조정을 한다는 말입니다. 조정, 조정 조절을 해야 된다는 말인데 그 모든 것이 다 지나치면 안 되니까 모두가 다 조절해서 서로 상호 견제가 바로 돼야 되고 다시 말하자면 비유컨대 우리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마는 그게 다 분량대로 원만한 체계를 이루어야 되지 원만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그것이 어느 지체가 커서 기형적으로 되면 안 됩니다. 기형적인 그런 신앙이 되면 안 되니까 기형적인 신앙이 되지 안하도록 그이의 신앙으로서는 그것이 고르고 모든 면이 고르다, 한 면만 크면은 그거는 기형적이기 때문에 이 절제가 필요하다 말하는 것입니다.
절제에 인내를 이 절제해서 그것이 아무리 잘 됐다 쉴지라도 계속을 해야 무엇이 필요가 있지 그만 그 하루하고 끝나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일 년을 계속해야 될 일이 일 년에 한 날만 모지래도 안 되겠고 백 에. 하나만 모지래도 백 마리 양떼에 하나가 모지라니까 아흔 아홉을 데리고 찾으러 다니시는 것은 백 마리 양떼는 되지 못하고 이제 아흔 아홉이지 백 마리는 깨졌기 때문에 한 마리 양을 찾아 다녔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인내, 이 계속해야 된다 말이오. 이 계속 할 것은 그 계속이, 그래 우리가 기도 제목에서 끝없는 기도를 하자고 그리 하는 기도의 제목을 낸 것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인 데 신앙생활하다가 하나님께서 그 신앙생활의 방향을 변개시켜 줄 때에는 날 이리보고 갔는데 하나님이 똑똑히 이리 변개시킬 때에는 그 길로 이제 그 길을 두고서 이 길로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길로 가다가 하나님의 그 능력이 나타나 가지고서 다니엘이 사자 구덩이에 들어감으로 끝을 맺은 것처럼 그 기적이 나타나 가지고 그 중단이 되든지 하나님이 변개시켜서 중단이 되든지 그렇게 해야 우리의 무엇이든지 신앙생활 시작한 것을 중단하지 그렇지 않으면 중단이나 변개를 하지 못한다 하는 것을 가리 켜서 끝없는 기도를 하자 하는 그 끝없는 신앙으로 나아가자 하는 것을 기도 제목에 넣은 것입니다.
인내에 경건을, 그러면 이렇게 모든 것이 구비하게 이와 같이 돼도 경건이 아니면 헛일입니다. 경건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경건인가 하니 두 가지가 합한 것이 경건입니다. 하나는 자존자, 우리의 구속주 대주재이신 이 주님을 위하는 이것이 이 요소가 하나 있어야 되고, 또 하나의 요소는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이 계약의 법칙대로 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가 합할 때에 경건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하지 안하는 것이라면 뭐 성경 말씀대로 진리에 아무리 딱 들어맞아도 중심이 딴것이면 헛일입니다. 또 하나님을 위하는 중심이 맞다 할지라도 그 세부적으로 법칙이 틀리면 안 된다 그 말이오. 그것을 가리켜서 경건을 가져야 된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이게 다 됐다 할지라도 이 하늘나라는 나만 좋으면 됐지 하는 거 가지고는 헛일입니다. 내가 좋은 것도 내가 좋은 것도 다른 사람을 내가 좋지 안하면 내가 바로 안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터이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좋게 하고. 또 내가 나를 좋게 하는 것,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좋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가 좋게 하는 이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원하시는 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가 병 없어야 되겠고, 내가 건강해야 되겠고, 내가 남에게 누가 끼치지 안해야 되겠고, 짐이 되지 안해야 되겠고, 남에게 그 부담을 주지 안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으로써 자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제 우애 자기 단일 자기로 생각지 말고, 자기는 많은 자기에게 속하여 사는 자인데 많은 자기인 이 다아(多我) 많은 자기, 대아(大我) 큰 자기 큰 나에게 속한 한 분자인 줄 알고 이 적은 분자지마는 이 분자가 하나 잘못 되면 많은 이웃을 해가 되고, 또 자기 하나가 바로 되면 많은 이웃에게 기쁨이 뵈고, 또 도움이 되어지고 그리하면 많은 전부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의 것으로서 효력을 준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했고. 또 우리에게 일용 할 양식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라고 전부 우리를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개인이 단체의 자기가. 단체가 자기가 될 때에 단체 아(我)를 가리켜서 우리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개체라는 내가 복수의 자기인 우리가 돼야 되고 우리가 마지막에는 단수의 자기가 돼야 됩니다.
모든 전부가 다 모든 전부가 그건 내라. 이러기에 개체가 전체 아(我)가 되고 전체 아(我)가 마지막에 종말에는 개체 아(我)가 되어지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도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제 사랑을 공급하라. 마지막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이 말은 마지막으로 사랑은 어떤게 사랑인가? 사랑은 모든 삐뚤어진 데에서 다 삐뚤어진 것을 다 방어해라. 삐뚤어진 것을 다 방어해서 네가 이렇게 노력하고 상대하는 그것을 모든 삐뚤어진 것이 해 하지 못하도록 모든 삐뚤어진 것을 방어해라. 삐뚤어진 것을 방어한 그것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에게 피동된 그것이 되어져서 의가 되어지도록 하나님과 피동되어서 당신이 없어지면 없어지지, 당신이 없어지기 전에는 당신의 특수한 안보를 할 수 있는 이 의가 되어지도록 네가 노력하라. 의가 되어진 이것이 암만 의가 되어져도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과의 결합되는 이것이 되게 하라 하는 것을 가리켜서 사랑을 공급하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우리는 두 가지 죽음 한 가지 삶. 두 가지는 죽이는 일을 죽는 날까지 하다가 죽을 것, 또 이 살리는 일을 죽는 날까지 하다가 죽을 것 끝마칠 것, 하나는 중생된 새사람으로 사는 이 새사람으로 영원히 살 것 이것이 우리의 속사람, 겉사람, 겉겉사람 이렇게 된 우리 신앙의 인격 생활인데 이것을 할 때에 이 여덟 가지의 덕을 참고로 하면서 우리가 하며 이리 저리 치우치는 그런 것을 잘 조절해 가지고서 바로 균형이 같게 체계적인 그 신앙을 가지고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