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의 길


선지자선교회 1985년 4월 19일 오일밤 

 

본문 : 요한복음 14장 1절∼6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는 요 말미암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힘입지 않고는. 예수님을 힘입지  않고는 하는 말이요, 예수님을 인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이요, 예수님으로 발족하지 아니하면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이요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입어 입은 그 은혜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가 갈 수 있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이  아버지는 곧 하나님의 그 본체를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신데, 한 하나님이 이런 격위 곧 이런 직위를  가졌을 때에는 성자라 성부라 성령이라 그렇게 말하고 또 저런 직위를 가졌을  때에는 성자라 성부라 성령이시라 이렇게 발표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성자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의 본체에서 대속의 직책을  맡아서 일하실 때의 하나님을 가리켜서 성자라 그렇게 표시하시고, 또 자손하셔서  은밀히 계시는 이 하나님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이 직책을 하나님이 하실 때에 그  하나님을 말씀이라 그렇게 하시고 또 대속의 일이나 또 성령님께서 이 대속을  우리들에게 완전히 적응을 시켜서 영원무궁토록 대속 입은 자로 입은 대속을 잘  감당하도록 이렇게 보호하시고 협조하시는 그 역사를 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성령님이라 그렇게 표시하시고 또 거기에는 다른 보혜사라 이렇게도  표시했습니다. 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 하나님의 각각 그 맡아서 역사 하시는  그 위, 위가 각각 위라 말은 지위라 말이요 직위라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본체는  하나입니다.

 이런데 그 성자나 성령이나 성부가 삼위일체의 본체, 본부를 본 지위를 말할  때에 아버지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가리켜서  영존하신 아버지라 그렇게도 발표를 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이 중보자 예수님을 힘입지 않고는, 예수님으로 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에게 속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아버지라고 이렇게 표시를 하신 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면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생겨져  나온 그 근본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버지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없는 가운데서 나타내신 분이라는 말이요,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그를  잘 양육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신 것은 일곱 가지의 근원을 말씀을 하셨는데,  첫째가 나를 없는 가운데서 존재케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없는 가운데에서 나를 첫째 아담을 통해서 나를 낳으셨고 또 둘째 아담을 통해서  또 나를 낳아서 우리는 이중 탄생을 한 우리들입니다. 처음에 탄생한 것이  배암으로 인해서 본 지위에서 쫓겨나게 되어 정죄와 저주와 사망 아래에 있게 된  것을 둘째 아담이 이것을 치료해서 새롭게 다시 살리시는 일을 하셨고, 또 첫째  아담에게서 병든 것을 죽은 것을 고쳐서 살리셨고 둘째 아담이 살리셨고, 또 첫째  아담에게 없는 그 모든 요소는 둘째 아담이 하늘에서부터 새로 우리에게 주어서  생겨진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대속의 공로는 우리를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을 살려 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새로 지어지게 한 것들도  있습니다. 영감과 진리도 둘째 아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와 가지고 권위 있는  우리의 능력이 되셔서 우리의 주격 위치에 있고 또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을 영원히 살아 활동하도록 그렇게 역사하시는 역사를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난 두 아담의 자손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원무궁토록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존재케 하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이런고로, 우리를 없는 가운데서 존재케 하셨고, 넓은 범위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신, 존재케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서 아버지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굳게 잡고 여기에  내해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나와 내게 속한 모는 것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이신  이 사실을 의심치 안하고 요동치 아니하고 이 터 위에 굳게 서서 있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요 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 자신의 근원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 아버지  외에 많이 있다고 늘 우리를 유혹시키고 유혹을 받지 안할 때에는 강제 하고 또  여러 가지 박해를 해서 어쨌든지 자기의 근원 나의 근원을 변동시킬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악령과 죄와 사망과 합한 모든 세상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한 말로  말해서 악령 악성 인간들의 생활해 놓은 모든 세상 분화라는 그 악습, 세상 모는  문화를 가리켜서 악습이라 그렇게 표시할 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합해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부인하도록 할라고 애를 씁니다. 다시 말하면 나와 내게  속한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이 근원을 변동하도록, 이 근원을  바꾸도록 이 근원을 요동시킬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요동시킬라고 하는 이 세상은 악령 악성 악습 모든 그런 것들이 다  합해서 세상인데 세상이 요동을 시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단독이 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이 예수님께서 이런 것을 다 주권하시고  통치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경영하시고 운영하시고 주권 통치를  하십니다. 그 세상이 제 마음대로 우리의 근원을 요동하도록 그렇게 하는 권리는  없고 하늘과 땅에 있는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에게 권세를 얻은 주권, 권세를  얻은 그 범위내에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시험할 때에 이 근원을 변동하면 그것이 나로 말미암는다는 그 내라는 주님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요 주님을 힘입지 못하고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됩니다.

부인하지 안하고 자기에게 어떤 박해가 나도 나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  사실을 굳게 잡고 놓지 안할 때에 세상을 이긴 사람이요 그 사람은 그 일로서 그  현실에서는 세상을 이긴 사람이요 아버지 하나님을 자기가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요것을 부인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나로 말미암는다고  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놓지 않기를 힘을  써야 됩니다. 놓으면 헛일입니다.

 마치 비유로 말하면 식물은 흙이 그의 근원이요, 또 고기로 물고기로 말하면  물이 그의 근원이라, 물로 모든 각종 어류를 내라 할 때에 거기에서 나왔고,  땅에게 각종 모든 식물들, 열매 맺는 모든 그런 채소나 식물들을 내라고 할 때에  냈습니다. 그러기에, 흙을 떠난 식물이 살수가 없고 또 물을 떠난 어류가 살수가  없는 것처럼 인생은 근본인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일 첫째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나를 없는 가운데서  존재케 했고 또 내게 필요한 모는 것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서  여기에 아버지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그러면 나를 과거에도  사랑했고 현재에도 사랑하시고 영원무궁토록 사랑하실 수 있는 이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시라는 것을 이 안에서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복되게 유익되게 하다가 그 복되게 유익되게 하는  그일이 중단이 되면 그사랑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모든 면으로  복되게 유익되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존재가 천상 천하에 있는가? 있다면 그는  전지자라야 되겠고 전능자라야 되겠고 영원 불변자라야 되겠고 완전자라야  우리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데 이런 자는 자존하신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사랑하실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신 것을 여기에  나타내서 아버지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완전한 사랑에 나아가는 데에는. 완전한 사랑을 접선하는 데에는.

완전한 사랑을 자기가 받는 데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안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는 이 사랑을 변동하지 안해야 됩니다. 이 사상을  자기가 영접하고 이 사랑을 내어버리고 하는 것은 다 우리의 현실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처음에 첫째 것을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둘째 순서인 이 사랑에  대해서도 온 세상은 이 사랑을 부인하고 사랑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 가지고  사랑의 이 아버지를 변동시킬라고 이 세상은 백방으로 노력을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사랑을 변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 이 한 분반이 사랑을 나에게 이미  주셨고 현재도 주고 계시고 영원히 주실 수 있다고 이 사실을 요동치 아니할  때에 그 사람은 세상을 이긴 사람이요 또 시험하시는 주님에게 시험에 합격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 이 택자들은 이 세상이 뭣 하는 세상인고 하니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마련하고 있는 세상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은 벌써 예수님의 대속으로 통과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하나님의 공심판의 해를 벗어난 우리들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사심판 앞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심판은 예수님의 대속 범위내에서 이루는 역사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부인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을 주님이  시험하셔 가지고 부인치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심판에 합격자가 되고 부인하면  정죄받아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동치  않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 일곱가지 은혜를 시험하실 때에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하느냐 하면은 그렇지 아니하고 사람마다 시험하는 시험의 도수가 각각 다릅니다.

그 도수는 각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중생된 자라면 중생된 자에게 하나님이  선물을 주신 것이 있으니 그 선물을 많이 받은 자에게는 그 시험의 중량이  무거울 것이고 적게 받은 자에게는 시험의 중량이 가볍습니다. 이래서 두 냥쭝과  닷 냥쭝 한 냥쭝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이 시험을 통과하는  데에는 주님께서 각자들에게 나눠 주신 시험을 이긴 은혜의 그 분량을 받은 대로  다하면 합격입니다. 다하면 승리하지마는 다하지 안하면 승리를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 사실을 굳게 잡고  빼앗기지 안해야 됩니다. '네가 이미 잡은 것을 굳게 잡고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도록 해라'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그 굳게 잡은 것이 이런  것을 다 굳게 잡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셋째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안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모든 면에서 잘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안보, 이 안보도 하나님 아버지만이 우리를 이런  모든 여러 가지 종류의 종류의 그 환난에서 안보해 주실 수가 있지 다른 것들은  안보 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모는 것은 다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또 시간의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안하고  영생하는 것이라도 모든 권한이 다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지 안한  권세가 하나도 없는데. 받지 않는 능력이 하나도 없는데, 그 받은 것이 다  제한되어 있는데 우리의 안보는 무제한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어려움이라는  환난은 영원하다 무한하다 할 수 있으니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이 모든  어려움에서 안보해 주실 수가 있지 다른 데서는 안보해 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 홍수에서도 이분만이 안보했지. 사람들이 뭐 과학을. 물질을, 자기를,  인간을. 나라의 정권을 이런 것들을 의지해서 그것들이 안보해 주리라고 생각해서  그때도 튼튼한 안보 정비를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나님이 홍수만  내려도 그 모든 홍수 속에 다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셋째로는 우리를 영 육, 금생 내세, 또 내 소유, 내 마음과 몸의 이런  요소 저런 요소, 이런 부분 저런 부분 이런 저런 모든 형편 사정에서 우리를  절대성 있는 안보를 해 주실 이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안보를 우리가 이미 주님의 은혜로 받았는데 이 안보를 놓지  아니하고 이 안보를 가지고 있을라 하면은 온갖 시험이 많이 옵니다. 온 세상은  다 달라들어서 이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의 안보만이 참 안보라는 이 사실을 믿는  자를 믿지 못하도록 안보가 수천 수백도, 형편 사정을 따라서 이런 사정에는 이런  안보 저런 사정에는 저런 안보 안보의 수가 수많이 있다고 우리를 유혹시키고,  수많은 현실에서 우리를 유혹시킵니다. 그러나 이 안보를 바꾸지 안해야 됩니다.

이 안보를 바꾸지 안하고 끝까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해서 이 안보를 뺏기지  안하고 이 안보를 변동하지 안할 때에 비로소 이 안보는 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두고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사심판.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서 이 일을 하니, 예수님이 대속해  놓으시고 대속해 놓은 자들이 이 대속을 아느냐 모르느냐, 이 대속을 믿느냐 안  믿느냐, 이 대속을 저희가 가지느냐 버리느냐 하는 이것을 시험하는 것이 중생된  자들의 재세의 기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는 악령이나 죄악이나 사망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다  제한적 시험입니다. 제한적 시험. 그리스도께서 제한시킨 이 구속을 위해서 있는  모든 시험들이지 구속을 방해하는 시험은 하나도 없는데 다만 이 구속을  손해보는 것은 그 본인이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멸망한 거와 같이 믿지 않는 불신 그것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지 이 계획을 한  대주재의,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의 계획은 손해되게 계획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안보를 변동안 할 때에 이 안보의 능력이 우리에게 옵니다. 근원을  변동안 할 때에 근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고 이 사랑을 변동하지 안할 때 이  사랑의 실효가 우리에게 오게 되고, 안보를 요동치 안 할 때에 이 안보의 실제의  효력이 우리에게 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은혜를 힘입어서 살려고 할  때에 이 은혜를 배반하게 하는 역사들이 많이 일어날 때 배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그때가 어떤 때인고 하니 신랑이 찾아오고 있는 밤중입니다. 그때가  주님 만날 고 시기입니다. 그때가 최고로 어려운 때요 그때가 주님 오시는  때이니, 그럴 때에 '빛을 들고 등불을 들고' 하는 말은 그럴 때에 하나님의 뜻인  진리 영감을 들고 요동치 안하고 바른 진리를 가지고 유혹시키는 유혹에 빠지지  안하는 것이 등불 드는 것이요 그럴 때에 신랑되신 주님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현실이 몰아쳐 오면 그  뒤에 사랑하시는 주님이 따라오시는 밤중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을 하고 소망을  굳게 서서, 잠시 잠깐 후면 주님 오실 터이니까 굳게 서서 요동치 안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굳게 서서 요동치 안하면은 우리는 어떤 비용을 계산 해야 될  건가? 있는것을 다 팔아서 이 하나를 살 그런 계산을 가지고 나가야만 되지  무엇이든지 가지고는 갈 수 없고 있는 것을 다 이를 위해서 포기하지 안하면  되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네째로는 우리를 모든 면으로, 우리의 영이나 우리의 혼이나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모든 기능이나 또 활동면이나 영광면이나 지위면이나 권세면이나  모든 사업면이나 쾌락면이나 뭐 우리는 백도 천도 넘은 성장을 가져야 하는 그런  요소를 구비해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밥 먹고 키가  크면은 키 크는 거 이것만 자라는 줄 알고 한 자 두 자 알아서 지식이나  기술이나 그런 것이 자라면 그런 것만 자라는 줄 알지마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모르는 부분이 자라가고 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자라갈 것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데, 이 모든 면을 우리는 길러 가야 될 줄도 모르고 또 어떤 요소들이  있는가 그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금생 내세. 영 육. 하나님을 대한 면  모든 영물을 대한 면, 죄를 대한 면. 마귀를 대한 면, 사망을 대한 면, 인류를  대한 면. 모든 것을 대하는 그면 그 면이 점점 성장되고 향상되고 전진되고  완전히 성화돼 가는 이 양육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우리를 양육해 줄 이가 없습니다. 양육해 주고 싶은 자도 진정  없고 또 줄 수 있는 자도 없고 우리에게 준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양육해 좋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양육하는 도구로 기관으로서  가지고서 이런 것 저런 것을 통해서 우리를 양육해 주셨지 우리를 양육해 주신  모든 걸 분석하면 하나님 아버지 그 한 분이 우리 양육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과거를 믿고 현재를 믿고 미래를 나를 양육해 주실 이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확고히 잡고 요동치 아니하고  변동치 않는 것이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도 뭐 자라는 별별 면이 다 있는데  우리는 그 면에서 자라는 것이 곧 깨달은 것은 일부분이 고 깨닫지 못한 것이 그  현실에서 자라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자라게 하실 분은 주님 한  분뿐이신데 그때마다 자라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해 가지고서 나를  육성하고 나를 양육라고 나를 성장시키고 이렇게 해 주는 것이 뭐 얼마든지  세상에 많다고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그것이 나를 성장시킨다고 인정을  안 하면 그게 삐꾸기도 하고 위협도 하고 협박도 하고 오만 것 다 합니다. 그러나  나를 양육하실 이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시라 하는 것을 놓지 않는 그  사람에게, 양육의 아버지는 그 사람의 아버지십니다. 그러므로 요것을 우리가  놓지 안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다섯째로는 우리를 모든 면에 책임을 지시는 하나님 아버지. 영원 전  목적에서부터 우리를 책임지셨고 예정에서 책임지셨고 창조에서 책임지셨고 또  하나님의 섭리에서 책임지셨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책임을 지셨고.

금생과 내세의 모든 면에 우리를 책임지신 하나님 아버지.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과거에도 책임졌고 현재에도 책임지셨고 영원 미래에도 책임을  지시는데, 이 책임지실 이도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시니 책임을 질라고 해도  책임을 질 만한 실력가가 없습니다. 이 한 분 외에는 책임을 질 자가 없습니다.

석가모니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석가모니는 고 사람은 죽은 후가 어찌 되는지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랬는데, 영원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 생명에도 자유가 없는  분이 어떻게 우리를 책임 질 수가 있습니까?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가 책임지시는 그 면은 몇 면을 책임졌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모르는 면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무수한 면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천군 천사를 뛰어난  존재입니다. 천군 천사를 뛰어난 존재로서, 영원히 우리를 책임지신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시니 이분을 깨닫고 이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이분이  책임지시기 때문에 이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다만 그분을 따라서 동하고  정하는 이 일을 요동치 안해야 책임을 질 수가 있습니다.

 책임져 주실 때에 옆에서 '네가 믿는 예수가 책임지지 못한다' 이렇게 말할 때에  책임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의심했기 때문에 주님은 배반을 당했습니다. '너를  능히 불 가운데에서 구원할 수 있겠느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으나 그분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합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은 주권자시기 때문에 그분의 주권에 따랐지. 뭐  능력 없어 못 하지를 안하고 능력 있어 할 수 있는데 그분의 주권에서 이 불에서  구원 안 하는 게 좋으면 안 하실 것이고 하는 게 좋으면 하실 것이고, 그분이  우리 좁은 생각대로 불에서 구원해야 되겠다는 그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이렇게 믿습니다.' 할 때에 그분은 만족하시고 그 책임의 대상이  됐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현실에서 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이 책임을 지고 계시는 이 책임  지우는, 책임 지우는 것이 맡기는 것인데, 모든 염려는 다 주님께 맡겨라 하는 그  맡기는 것이 이 책임 지우는 것인데, 이 맡기는 것이 변동되지 안할 때에 전지  전능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시고 우리가 의심할 때에 이 책임지신  것은 할 수 없어서 손을 떼야 되는 것이고 우리가 그 책임자를 바꿀 때에는  의례히 하나님은 배척하고 마는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요동치를 안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여섯째는 우리 영 육 또 금생 내세, 우리의 소유, 우리의 활동 우리가  미쳐지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에게 온갖 필요한 것을 다 은혜로 주실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과거에도 은혜로 주셨고 현재도 은혜로 주시니까 받았고  영원무궁토록 은혜로 주실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은혜로 주시는 것은 이것은 천해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다 그것이 인간  요소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 댓가를 낼 만한 그런 것이 아닌  인간을 초월한, 유한을 초월한. 불완전을 초월한, 이런 것들을 초월한 다 완전  무궁한 영원성. 이것은 다 인간에게 있는 인간과, 공통성 있는 것들이 아니고  인간의 공통성 없는 비공통적인 하나님만이 가지신 여기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런 것을 구비해 줄 수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십니다. 너무 귀해서 은혜로 주십니다. 우린 그 댓가를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일곱째는 우리를 영원무궁토록 참 기쁘게 해 주실 하나님 아버지, 이 하나님  아버지 이분만이 이 일곱 가지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러면, 여기에 영생은 안보  속에 다 들었습니다. 또 대속은,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은 다 사랑 속에 다  들었습니다. 이래서, 요 일곱 가지 이 종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 이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종류 그 하나를 범위를 넓히면 그 안에  많은 것이 다 포함되었으니, 그러면, 이 일곱 가지면 우리 금생 내세, 영 육 나와  내 관련된 모든 것에게 필요한 것은 다 내포 포함된 것을 우리가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첫째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만이 이를  가지고 계시고 또 우리에게 베푸실 수 있고 또 이미 베풀었고 앞으로 영원토록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이 일곱 가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요동하면 안 됩니다. 견고히 잡는 것이 이것이 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만이 일곱 가지를 가지고 계시는 주권자시요 대주재자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시요 자존자시요 창조 예정자시라, 이분의. 이분의 이  속성을 믿지 못하면 이분의 가진 것을 얻지 못하고, 이분의 속성과 이분의 가지신  것을. 능력이나 지혜나 가지신 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가 바라보고 믿는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곱 가지를 요동치 안해야 됩니다. 일곱 가지를 빼앗기지  안하면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님이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말은 마귀를 이겼다는 말이요 죄를 이겼다는 말이요 사망을 이겼다는  말이요 모든 하나님의 저주 심판을 다 이겼다는 말입니다. 다 그 전부를 이겼다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겼기 때문에 모든 진 것은 주님의 종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도 주님의 심부름. 사망도 주님의 심부름 생명도 주님의  심부름, 모든 저주도 주님의 심부름. 모든 징계도 주님의 심부름 전부 주님께서  당신의 이 구속하신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다 관할하고  이용하고 계시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일곱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가지고 계신다 그분 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하는 이것을 요동치 안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다가 다른  것이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삐쭉 삐쭉 나서 가지고서 날뛸 때 그 때에 환경을  몰아쳐 가지고서 꼭 그게 날 줄 수 있지 딴거는 줄 수 없다 하는 것이 여러  수백의 수십의 변증이 들어와 가지고서 '아, 이제 하나님 아버지가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꿈꾸는 소리이고, 하나 이거는 꿈꾸는 소리이고' 저 먼저 ○목사님이  꿈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잡지를 보고 어떤 이거 기독자가 내놓은 설교를 보고  그런 말을 쓰는 것 같은데, 꿈이라는 말은 절대 못 씁니다. 우리 기독교는 꿈이  아니고 과학보다도 정확한 '요렇다' 하는 그것을 가지고 지금 향해 나가는 것이지,  뭐 기독자에게는 모험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앙은 모험이라,  신앙은 모험이라는 말이 그럴 듯 한 것 같지마는 모험이라 말은 대마귀 말입니다.

모험이 없습니다. 기독자는 꼭 요렇게 알고, 알고 인정하고 믿고 그대로 나가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험성이라 하는 것은 기독교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모든 것들이 다 마구 움직여 가지고서 이 일곱 가지를 우리 아버지  한 분에게만 있다는 이 사실을 인정치 못하도록 흔들라고, 흩을라고 이렇게 애를  씁니다. 그럴 때에 놓으면 안 됩니다. 그럴 때 놓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요걸  굳게 잡아야 되지. 신앙이 하나님에게 뿌리를 박은 신앙이 있고 뿌리박지 못하고  껍데기에 달려 가지고 흔들리는 신앙이 있으니까 그런 신앙은 암만 가도 승리는  못 합니다. 나중에 가서는 인본주의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 과거에 왜정 말년에도 신사 참배를 이긴 기독자가, 번연히 그거는  우상 종교 아니오? 이긴 자가 많지를 못했습니다. 그거 다 하나님께 뿌리박은 자,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박았다 그 말은 예수님의 대속에 뿌리박았다 말이오. 이런  것을 모르면, 일곱 가지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주권하여 있는 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그 사람은 뿌리 끊긴 나무와 같기 때문에 햇빛 쪼우면 다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주의해야 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는, 전도할  때에는 '아, 나는 술을 먹습니다.' '예, 술을 먹어도 예수 믿으십시오. 술 먹고 교회  나오십시오.' '나는 담배 피웁니다.' '담배 피우고 교회 나오십시오.' '나는 이중  생활 하고 있습니다.' '예, 이중 생활 하면서 교회 나오십시오.' '나는 지금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예, 사창업을 하면서 교회 나오십시오.' 그것은. 그것은 어데  속했느냐 하면은 안 믿는 사람에게 예수 믿는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어야 되지, 믿고 난 다음에 회개가 있지 믿기 전에 무슨 회개가 있습니까?  이것을 보고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발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전도의 냉랭 끄트머리 제일 끄트머리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끄트머리는  예수 믿는 끄트머리 세상 끄트머리이기 때문에 고 조금만 나가면 안 믿는  사람이라 조금만 나가면, 조금 나가면 안 믿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예수 믿어라'  예수 믿어야 차차 차차 안으로 들어올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전진적인,  전진적인 범죄는 해도 회고적인 범죄는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발단은 그렇지마는 그 속에, 겉으머리는 세상하고. 마귀하고  세상하고 접해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마귀하고 세상하고 접해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와 이렇게 접해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는  좁습니다. 심히 좁고 여기에는 심히 넓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을 혼돈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다가 두고 한 말인지 여기에 두고 한 말인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기에가 바로 서지지 안하고 여기에를 여기에라고 하면, 대개 선교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선교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하기 때문에 그거는 '아,  간음하고도 예수 믿어라' '나는 지금 뭐 이중 생활, 첩이 몇이고 남편이 몇인데'  '아, 그래도 예수 믿으십시오' 그래도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의 절정에  거기에 합당하다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을 가져도 전체적을 모르고  이렇게 하는 그 지식은 지식에게 삼켜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요 일곱 가지를 굳게 잡지 아니하면 우리는 기독교의 뿌럭지가  흔들리기 때문에 결국은 타고야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저서를 볼 때도 그 책을 볼 때에 이 책은 어느 위치에서 쓰고  있는 책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고  경계에서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에게 지금 전도하고 있는 그 위치에서 쓴  책인지, 이 책은 이미 믿는 사람에게 대해 가지고서 쓴 책인지, 이 책은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지금 그 관련성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 최고 절정인  거기에서 쓴 책인지 그걸 알아야 되지 그걸 모르고 책은 다 같은 책이라 해  가지고서 그것을 이 말단의 전도의. 전도 발단, 전도 발단에 냉랭 끄트머리에  거기에 있는 그것을 하나님과 연결되는 여기 갖다가 쓰는 날이면 기독교 박멸을  시켜 버립니다. 그런 위험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요 일곱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주권하고 계시고 또 이 분 만이  일곱 가지를 행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셨고 또 이분만이 지혜를 가지셨고 이러기  때문에 이분 외에는 아무도 가진 이도 없고 할 만한 실력도 없고 또 이것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해 주실 이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이것을 가지신 분도 한 분뿐이시오 또 행하실 분도 한  분뿐이시오 우리에게 주실 분도 한 분뿐이시니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굳게 잡고 변동 안 해야 됩니다. 이 일곱 가지를 나에게 주실 이  구주를 변동 안 해야 됩니다. 이 구주를 변동하는 것이 그것이 배신이요 그것이  음행이요 창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에. 요한계시 18장에 음행의  포도주로서 다 취해 가지고 망한다 그 말은 분석해 들어가면 이 일곱 가지  구주를, 구주를 바꿨습니다. 변동해서 구주를 바꿨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리오왕이 그렇게 거머쥐고 신강할 때에도 다니엘은 요동을 안  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요동 안 하고 마지막에는 하도 그래 쌓아니까  애가 터져서 '왕은 우리가 여기에 절하지 안할 줄을 아십시오. 그만 이것으로  끊읍시다. 암만 해 봤자 안 합니다. 안 할 줄을 아십시오.' 구주를, 변동 안 했을  때에 책임지신 하나님 아버지는 책임을 지시고 그 이를 구출해 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이 일곱 가지를 가지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뿐이신데 이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다 말씀하신 것은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올 자가 없다고 말씀을 했고, 우리는 지금 이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할 때는 갈 자가 없다 이렇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 예수님이 을 자가 없다 말씀은  우리로서는 갈 자가 없다 이렇게 우리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뭐이기에? 예수님이 무엇이기에 이 일곱 가지를 가지신 이  대주재이신. 만주의 주이신, 이 대주재이신. 모든 것을 창조했기 때문에 피조물은  이분과의 다 창조주와 피조의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분이신데 이분을 어떻게 꼭  예수 한 분이 아니면 이분에게 가지 못한다 하는가? 어떻게 이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을 예수님 혼자 독차지 해 가지고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고 이렇게 말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갈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은 이 일곱 가지를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는  길입니다. 가는 길이 이 길 한 길뿐입니다. 가는 길입니다. 또 빛이십니다. 빛  광채. 빛. 햇빛 같은 빛. 예수님이 빛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내가 진리라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시요 진리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라 또 생명이라  말씀했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기 위해서, 잘 기억하고 뒤에라도  새김질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대형의 면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대형했기 때문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 내가 진리라는 말씀은 내가 대행했기 때문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 내가 대화친의 생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 이 일곱 가지를 가진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이 화친의 세 가지 대속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렇게 혹 생각을 가지기 쉽겠습니다. 고거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 가는 데에는 죄가 가리고 있기 때문에 이 죄를 꿰뚫을 수  죄를 꿰뚫을 수 있는 이 자가 아니면 못 갑니다. 죄를 꿰뚫을 수 있는 죄가 일곱  가지를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과의 그 사이를 가로 막고 있기 때문에 그  세계를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 세계를 들어 갈라면 죄를 이겨서 죄를 꿰뚫어야  됩니다. 죄를 꿰뚫어서 죄를, 죄를, 죄를, 죄에게 제재 받지 안하고 아무리 죄가  있어도 죄에게 제재 받지 안하고 죄에게 자유해서 얼마든지 자유로 들어갈 수  있어야 됩니다. 죄라는, 죄라는 이 방어망에, 죄라는 이 방어망에 걸리면 안  됩니다. 죄라는 이 방어선에 걸리면 안 됩니다. 죄라는 방어선에 걸리지 안하고  죄가 상관 없이 암만 들어가도 죄가 그를 해할 수 없는, 죄를 뚫고 들어가는  이것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생명의 좁은 길입니다. 휘장 가운데로, 휘장이  갈라진 것은 택자들의 죄의 장벽을 깨트려서, 택자들의 죄의 장벽을 깨트려서  택자와 하나님과 그 사이에 죄의 장벽을 깨트린 그것을 하나 나타내기 위해서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갈라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생명의 길로 너희들은 담대히 아버지 하나님에게 찾아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래서, 이 죄의 장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자라야 아버지 하나님에게 갈 수  있지. 또 하나님의 저주. 저주와 사망을 이것을 뚫고 들어가야 하나님 아버지에게  갑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저주와 사망을 꿰뚫고 들어가야 되는데  예수님을 힘입지 않는 자는 아무도 하나님의 저주를 뚫고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또 사망을 뚫고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저주와 사망을 꿰뚫고 들어가야 되고  하나님의 대심판을 뚫고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대심판을 뚫고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통과시켜 놨습니다.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이 세 가지를 통과했으니 이 세 가지 통과는 예수님의 대형의 이 모든 속죄로써  이 세 가지 길을 열어 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세 가지 길을 여신 대형의 이  속죄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또, 내가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는 데는 진리를  가져야 됩니다. 진리. 진리를 가진 자라야 됩니다. 진리를 가져야 들어갑니다.

진리를 가져야 된다 그 말은, 잘 안 들으면 모릅니다. 진리를 가져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진리의 것이 된 사람이라야 된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진리의  것이 돼야 되지 진리의 사람이 돼야 되지 진리의 사람이 아니면 딱 막아  가지고서, 천군 천사들이 딱 막아 가지고서 진리의 사람 아니면 못 들어갑니다.

'네가 뭐이라고 들어갈라고 하노?' '나는 진리의 소유입니다. 진리의 소유입니다.

나는 진리를 가졌습니다. 진리와 나와 하나입니다.' 이 진리를 능력을 힘입어  가지고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갈 수 있습니다. 또 그 다음에 들어가면 영감의  것이 돼야 됩니다 영감의 것. 영감의 사람이 돼 버려야 됩니다. 또 영감을 소유한  자라야 됩니다. 영감을 자기가 가졌고 영감의 사람이 됐고.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가 지킴으로 자기는 하나님의 명령의 사람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것이  됐어. 하나님의 명령의 것이 됐어. 자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졌어. 하나님의 그  지극히 크신 분의 명령을 가졌어. 이 명령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명령이라고 이  명령을 가졌으니까 이 명령을 내 놓을 때에 그 천군 천사는 가로막지를 못합니다.

통과라. 이것이 예수님의 대행으로 된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이며 영감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명령은 뭐이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으나 성경에 진리도 영감도 하나님의 명령도 이렇게 뚜렷이 나타나  가지고 각각 따로 나타나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는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문서  계시를 가리켜서 진리라고 말하고, 영감은 문서계시 안에 은밀히 계셔서 우리에게  영감시켜 주시는 그 성령의 감화 감동을 가리켜서 영감이라고 말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명령하시는 그 명령, 그 명령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명령이라. 그러면, 십계명도 그 명령 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명령을 지켜서 이 명령을 자기가 차지해야 됩니다. 명령을 차지해야  되고 명령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명령의 사람이 돼. '네가 어데라고 들어갈라고  해?' '아, 막을라면 막아 보십시오. 내가 들어가는 건 하나님의 명령이오. 내가  들어가는 거는 하나님의 영감이오. 영감이 지금 날 들어서라 해요. 진리가 나를  들어 가라 해.' '네가 뭐인데?' '나는 진리의 사람이오. 나는 영감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사람입니다.' '네가 뭘 가지고 들어가?' '나는 진리를 가졌습니다.

진리는 내 진리입니다. 영감은 내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내 명령입니다.

내가 이 명령을 가졌고 이 명령을 지금 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행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께서 이 진리를 어떻게 소유하셨는고 하니 예수님은 순종 하나 가지고 다  소유했습니다. 진리에 순종할 때에 예수님은 진리의 것이 됐고 진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감에 복종했기 때문에 영감은 예수님을 점령했고  예수님은 영감에게 점령을 당해서 영감의 것이 됐고 영감은 예수님의 것이  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도 그러합니다.

 이래서 이는 기본구원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  기본구원을 가진 우리들이 오늘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우리는 내가 진리의  것이 되고 진리를 내가 잡아야 됩니다. 내가 진리의 것이 되면 진리는 내 진리가  됩니다. 내가 영감의 것이 되면. 영감의 것이 되면 영감은 내 영감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의 것이 되면 하나님의 명령은 내 명령이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처음 들으면 잘 모를 거고 많이 들은 사람들은 다 알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가 진리를, 제가 진리를 아무리 입으로 외치고 뭐 어떤 짓을  한다고 해도 안 됩니다. 내가 현실에서, 현실에서 이 진리가 요구할 때에 진리냐  불법이냐, 불법이라 하는 것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 외에 모든 지식은 다  불법입니다. 모든 지식은 다 불법입니다. 배암의 지식이요 다 불법입니다.

불법이기 때문에 이 불법은 다 정죄만 하고 저주만 하는 것이지 이것이 사람을  구출하는 지식은 인간 지식에는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요거 알아야 됩니다. 이거  혼돈돼 가지고 인간 지식에도 생명 있다 없다 벙벙하이 널럴하이 이래 가지고서  뭐 팔방 미인으로 하는 그거 다 신앙적으로 다 정조 판 자요. 그런 자들은 환난  오면 다 팝니다. 왜정 말년에도 무엇 때문에 신사 참배를 다 해서 정조를  팔았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오늘은 천주교에 미사 드린다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인데,  그것도 양심이 썩었기 때문에, 해가 기울어지고 그림자가 갔으니까 검은 거 흰 게  꼭 같애. 아무 음지와 양지, 그늘과 볕이 없어. 그게 말세입니다.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그 말은 네가  세상이 아무리 썩어도 너는 썩지 않는 그 봉우리로 너는 하나님과 연결한 그  기도의 봉우리에서 너는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현저히 천주교는 이렇게 하고 있어서 불교와 꼭 같이 돼 가지고  있지마는 이걸 기독교라 '기독교가 하나라. 이러니까 요거 구별하면 안 된다'  이것은 선교의 발단은 이래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선교의 발단은 이러나 속에  들어가면. 그렇지마는 속에 들어와 가지고는 자꾸 지금 구별해서 나가야 되는데,  이미 구별해 가지고 되어서. 아닌 것을 구별해서, 구별하고 구별해서 아니라는  것으로 이래 가지고 점점 구별돼 나가는 이것이 다시 뒤로 후퇴해 가지고서 지금  범벅 타령으로 나가는 것이니까 완전히 부패한 것입니다. 요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이 바로 되지 안하면 그거는 다 혼탁이오. 그러기에, 일본에  있는 기독교는 비빔밥 기독교입니다. 비빔밥. 비빔밥 기독교이기 때문에 아무  정조 없습니다. 왜정 말년에 일본에서는 신사 참배 이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본 신자로서는 신사 참배 이긴 사람이 한 사람이 없었어. 일본에서는  유명한 사람이 뭐 내촌감삼이니 하천풍언씨니 하는 그런 사람들인데  하천풍언씨가 인도의 간디를 면접하러 가니까 간디가 '하천풍언씨가 와서  면접하려 왔습니다.' 그라면 간디가 막 발 벗고 나와서 영접할 줄 알았는데  면접을 거절했습니다. '하천풍언씨가 올 리가 없다.' '아니 일본의 하천풍언씨가  왔습니다.' '아, 그러면. 내가 아는 하천풍언씨가 아니고 딴 하천풍언씨가 왔겠지.

내가 아는 하천풍언씨라면 벌써 뭐 일본에서 구금을 당해서 감옥살이를 하든지  그리 안 하면 순교를 당했든지 했지 여기까지 살아 가지고 올리는 없다.' 그  간디가 그렇게 신앙가입니다. 여러분들, 신앙가 됐으면 사형받았든지 그리 안  하면 감옥에 갇혔든지 했지 자유 활동할 수 있습니까? 신사 참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 하다가 이리 나갔지? 어데 말하다가 했지?  녜, 우리가 자꾸 속화를 막아야 되는데. 속화를 막지 못하고 자꾸 속화 돼  나갑니다. 이러기에 기독교의 저 불신자에게 전하는 기독교 저 발단. 아주 냉랭  끄트머리 발단과 기독교 근원과를 구별해야 되지 근원인지 저 끄트머리인지  모르고 이거는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인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는지, 하나님을 대할 때 '아, 이중 생활 해도 상관없다. 술 담배 먹어도  상관없다. 사기 횡령해도 상관없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 접합니까? 못 합니다.

이것은 그런 자라도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어야 그걸 회개할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이걸 여기에 갖다 쓴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선교학을 가지고서 복음  운동을 말단에서 하지 대목에 와 가지고서 대목의 그 사상을 여기 넣어 가지고서  예수를 이래 믿어야 된다 하면 그 사람은 완전히 썩어 버립니다. 완전히 썩어  버려. 속화 돼 가지고 완전히 썩어 버리고 속화되고 맙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들을 줄을, 들을 귀가 있어야 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누가? 성령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라 했어. 성령이 '성령이  너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문서 들으라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들으라는 거. 문서 암만 해도 영감이 찬성 안 하면 아무 소용없어. 알겠습니까?  그러기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진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이  진리를 점령했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진리가 됐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진리가  된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진리를 점령했는가? 예수님이 진리의 것이 완전히  됐으니까 진리는 예수님의 것이 됐고 예수님은 진리의 것이 됐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한 것이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셨기 때문에 대신해서 행했기 때문에 이  대신해서 행하신 것을 내가 믿고 놓지 아니하고 그대로 살면은 예수님은  진리이신데 이 진리를 힘입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일곱 가지의 은혜에 접선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라면 됩니다.

 내가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소멸  하셨습니다. 죽으심으로 소멸했습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화목의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비로소 이 하나님 아버지와 결합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됐습니다. 이래서, 죽기까지 하심으로써.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므로 그를 삼일 만에 다시 살려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거기에 속한 모든 자들을 다 중생하도록 이렇게 하셨다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길을 말한 것은 대형의 대속을 말하고  진리라는 것은 대행의 대속을 말하고, 생명이라는 것은 대화친의 대속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이니까 이 예수님이 신인 양성 일위로서 이 대속을 했는데 신인 양성  일위가 없으니까 이 대속을 할 만한 자격도 없고 또 신인 양성 일위로서 이렇게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해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 통하지  않고는 이 구원에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곱 가지 은혜는 이 예수님을 통하지 안하고는 못  가는 것이니 이 일곱 가지 하나님 아버지의 이 일곱 가지 은혜를 우리가 입는  방편은 예수님을 믿는 방편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방편. 예수님을 믿는 방편은  무엇이 예수님을 믿는 방편인가? 예수님 믿는 방편은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을 자기가 확실히 믿음으로, 이 세 가지 대속을 자기가 입은 이 사실을  자기가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말고 확실히 믿고 이 세 가지 대속을 벗지 않는  이것이 믿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대속을 입은 것을 믿지 안하고 이 대속을 벗지  않는 행동 암만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입고, 먼저 입고 그 다음에 벗지 안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입고 그 다음에 벗지 안해야 됩니다. 입는 것은 이 세 가지  대속을 자기가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벗지 않는 것은 이 대속을 범하지 안하는 것이 벗지 않는 것이니까 입고 난  다음에 벗지 안해야 되는데, 우리가 입은 것은 하나님께서 객관의 능력으로 입혀  주시니까 이 세 가지 대속을 입은 자인 것을 확실히 의심하지 안하고 믿고 믿는  그 믿기를 어느 정도 믿을 것이냐? 믿는 그것이, 믿는 그것이 벗지 안할 수  있도록 믿는 것이 믿는 것이니까 벗지 안하는 그것이 입은 것을 믿는 것이요  믿어서 입어서 입은 것을 자기가 믿어 입은 것을 믿을 때에 입은 것을 인해서  지극히 큰 능력이 자기에게 와서 역사하니 벗을 수 없는 사람이 돼. 안 벗을라고  하는 게 아니라 벗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거만이 일곱 가지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중복적으로 입었다가 벗었다가 입고 벗지 안하다가 어떤  사람은 입지도 못하고 건너다 보고만 가는 사람, 말로만 하고 있는 사람 이런데,  기독교는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하면 진실이 중요합니다. 진실이 중요합니다.

진실이 중요하다 말은 실지가 중요하다 말이오. 실제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실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굳게 잡읍시다. 올 자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는 다 아버지에게로 다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일곱 가지를 놓지 말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길이기 때문에 이 길 밟지 않고는 못 갑니다.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길을 밟지 않고는 못 갑니다. 여기에만 뚫렸어 휘장 가운데 여기에만 열려 가지고  있어. 이 하나님 아버지와 이 통로가, 통로가 예수님이 통로가 됐어. 예수님이  통로가 됐어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를 멸하셨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저주와 사망을 깨트렸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대심판을 이겼어. 이  길 외에는 없어. 이 길을 누가 만들어? 어떤 이종교 창설자가 만들어?  기독교가 뭐인지도 모르고 기독교가 종교 통일하니까, 요새 전부 종교 통일 뭐  '선교 백 주년이니까 모두 다 이래 합해 가지고 둘둘 뭉치자' 요렇게 하나님의  도를 적으로 삼은 그런 자들이 많애, 이래 가지고 널펑해서 우리 진영에도 이  널펑한 길을 걸어가고서 이런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절대로 그  길 나가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없어지고 산 자는 없고 자꾸 죽은 자만  나타납니다. 전부 인본화, 세상화 만드니까 다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내버려  두지 안해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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