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14:04
연보
본문 : 고후 9장 1절∼11절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여기에 이런 질문이 왔습니다.
'목사님. 사람이 태어날 때에 심신은 무색으로 태어나 죄에 접하면 죄에 물이 들고 의에 접하면 의에 물이 든다면 우리가 죄 중에서 태어난 것을 구원하는 역사가 아니고 의롭게 태어났다는 말씀인지 자세히 한번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네 죄가 삼사 대까지 이른다고 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네, 좋은 질문입니다. 이거 모두 누가 이렇게 목사님들이 의논해서 이렇게 했습니까? 네.
사람이 죄 중에 잉태됐다 그렇게 한 말씀도 있습니다. 죄 중에 잉태됐다. 또 사람이 다 정죄함을 받았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영은 정죄함을 받을 수 있는 주격이요 육은 하나의 물질과 같은 것입니다. 정죄 받은 것은 영이 정죄 받았고, 또 죄 아래에서 났다 하는 것을 벌써 태어날 때부터 죄 아래에서 저주 아래에서 태어났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죄 아래에서 저주 아래에서 태어났다 하는 것은 그의 그 주격 영이 정죄 받아 가지고서 죄 아래에 있다는 것이고 고기 덩어리는 그 주격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정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은 하나님께 드리는 의의 병기가 됐다가 죄에게 드리면 또 즉시 죄에게 드리는 것이 됐다가 그거는 우리가 쓰는 무슨 도구 이런 거와 같은 그런 존재의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 중에 태어났다는 말은 아담 해와의 정죄로 부정모혈로 나는 일반 생육법에 난 사람들은 다 아담 해와의 범죄는 아담 해와가 모든 사람을 대표해 가지고서 신인 계약한 그 계약을 위약했기 때문에 보통 생육법으로 나는 사람들은 다 그 정죄를 할 때 같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날 때에 정죄 아래에서 태어납니다. 또 저주 아래에서 태어납니다. 태어난 것은 그 주격이 저주 아래에서 정죄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제 그러면 태어났으면 주격인 영이 정죄해 태어났으니까 그 소유격인 육도 역연 정죄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영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하여서 중생된 그 사람에게는 지금 그 심신의 죄 있는 것이 그것이 감염돼 가지고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격이 있으면 심판을 받지마는 주격이 없기 때문에 영이 다 심판 받았습니다. 심판 받았는고로 그 심신의 육이라는 것은 주격은 정죄 중에서 다 대속함을 받았지마는 아직까지 심신에는 물이 들어 있으니까 그것을 씻으면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벌써 잉태될 때에 그 때에 그 자체가 죄악으로 돼 가지고서 잉태된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지성법에서 정죄함을 받은 정죄 아 래에서 잉태됩니다. 또 저주 아래에서 잉태됩니다. 잉태되니까 그 영이 정죄 아래에서 잉태되고 저주 아래에서 잉태되고 이랬었는데 그 영의 이래하고 저래함에 따라서 육은 따라갑니다.
만일 영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졌다고 하면 벌써 몸은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적인 그것보다도 영이 주격 책임에서 벌써 그 죄의 책임을 다 젊어지고 깨끗하게 되기 때문에 육은 그 죄되는 것을 씻어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영이 어데까지나 주격이고 심판의 대상이 되지 그의 소유는 아무리 육이 깨끗해도 영이 그 사죄함을 받지 못했으면 그거는 소용이 없고, 육이 더러워도 영이 그 모든 것을 다 사죄함 받았으면 육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을 책임지고 사죄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죄함 받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육에는 그것이 죄가 심판적인 저주적인 그런 죄악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이 벌써 대속해서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날 때 그 죄는 순전히 그 사람의 영에게 죄가 부담되어 있고 그 육은 그 영에게 죄가 부담되어 있고 물질이라는 그 육이라 하는 것은 죄를 부담시킬 만한 아무 그런 가치와 자격이 없게 그래 있다가 그 사람의 영이 아무리 중생함을 받은 그 영이 구속함을 법적으로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중생되기 전에는 법적으로는 받았지마는 중생되기 전에는 죄 아래 그대로 있습니다. 죄 아래 있다가 중생 받으면 이제 죄에서 해방되고, 아무리 영이 해방됐다 할지라도 그 육은 심판적인 죄는 없지마는 죄에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죄악의 행사를 벗지 못하는 것으로 그것을 벗으면 되고 또 입으면 입혀지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잉태될 때에는 죄 중에 잉태됐다는 그 말씀이 바로 됐는데, 죄 중에 잉태된 것이 그 죄 중에 잉태됐다는 그 죄를 누가 받고 있으며 누가 책임지고 있느냐 하면 그거는 그 주격인 영이 책임을 지고 있지 육은 책임 질 만한 그런 가치도 없고 또 벗을 만한 가치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육입니다. 그러기에 중생된 사람은 벌써, 그 사람의 주격적으로는 다 완전이 됐는데 그 도구인 심신이 지금 깨끗해지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서 있는 것입니다.
어제 말하기를. 마치 그 심신이 죄 없는 그 무색의 존재라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잘 모르거든 처음에 갓난아이에게는 그 죄악의 기능이나 그런 구습이나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생애 본능밖에 없다. 본능밖에 없으나 그게 차차 자라가는 가운데에서 죄의 그 기능이 있다. 그러면 영은 벗었는데 죄의 기능이 있는 것, 또 그것이 영이 정죄 아래에 있는데 그 심신의 그것은 아무것도 죄에게 아직까지 지금 접하지 안했기 때문에 죄의 기능적인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와 같다. 그러나 그것이 차차 자라면서 이제 죄악에 물들어 가지고서 그와 같이 된다 이런 것이니까 고걸 좀 생각 할 때에, 영이 주격이라, 총 그 책임이 영에 있지 딴 데 있지 않다 하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저 중생된 사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날 때 어린 아이가 날 때에 그 심신이 무색으로 났다 하는 그거는, 모르거든 어린 아이의 그 심신을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는 그걸 말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는 갓난아이가 아니고 우리는 다 중생돼 가지고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은 어떠냐? 우리의 심신은 지금 빨간 죄, 푸른 죄, 붉은 죄를 다 듬뿍 씌워서 전부 다 붉고 푸르고 죄 덩어리지마는 실은 들여다 보면 그 속에 그 심신이라 하는 것은 그 죄악이 물들어 있는 것이지 그게 심신이 죄악 된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탈색하려면 탈색할 수가 있고 염색하려면 염색할 수가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격은 언제든지 영이 주격이지 육은 주격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중생된 사람은 그러면 그 죄악이 물들어 가지고서 있는데 죄악이 물들어 가지고 있으면 이미 있는 그 죄의 책임이 있지 않느냐? 그 죄악을 벗는다고 되느냐? 죄악이 있으면 죄악의 심판이 있을 터인데 어떻게 죄악의 물을 뺀다고 탈색을 한다고 그 심신이 죄에 물들어 가지고 죄 아래에 있고 죄가 벌써 그 심신에게 있는데 그 심신이 벗기만 하면 그게 되느냐? 벗는다고 어찌 그 심판까지 면해질 수 있느냐? 혹 그런 이의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벌써 우리의 심신은 물들어 있는 그것만 벗어버리면 됩니다. 아무 심판이 없습니다. 우리의 심신은 아무리 죄뭉텅이로 되어 있을지라도 죄만 살살 빨아서 그만 죄만 없애 버리고 탈색만 시켜 버리면 하얗게 되어지는 것이요 심판 문제는 없습니다.
왜 심판 문제는 와 없는고 하니 벌써 중생될 때에 그 영이 주격 책임으로서 그 육이 영원히 범죄할 것을 영이 다 책임지고서 정죄 받아 가지고 또 사죄 받고 또 칭의 받고 그라고 난 다음에 중생의 새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벌써 육의 범죄, 육의 범죄의 죄의 심판적 그 문제는 영이 중생되기 전에 다 대신으로 책임져 가지고 정죄 사죄 칭의를 받고 난 다음에 중생된 것입니다. 주격을 좀 생각하면 조금 알 것입니다. 뭐 이해가 됩니까? 고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를 말했는데 집에 돌아가서 중생함을 받기 전에 사람은 그것이 영이 정죄받아 있기 때문에 그게 소유까지 다 정죄를 받아 가지고서 정죄 아래 있는 것이지마는 벌써 중생함을 입은 그 후의 사람은 죄가 그게 물드는 것이지 죄가 거기에 박혀서 죄의 형벌을 받지 안하면 안 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영이 주격 책임에서 죄의 형벌을 다 받았습니다. 정죄를 다 받고 죄의 형벌을 다 받았는데 죄의 형벌을 다 받기를 어떻게 받았느냐? 정죄받고 정죄받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죄를 받고 대속으로 칭의를 받고 이랬기 때문에 죄와의 심판적 관련은 그 심신은 중생된 자의 심신은 없습니다. 중생된 자의 심신의 물들어 있는 그 죄는 심판적 아무런 그런 문제는 다 이미 영이 책임을 지고 중생됐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하는 그 문제를 사람들이 다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의문을 가지고 있는 거는 뭐이냐? 그것도 영이 범죄한 줄로 이렇게 알았는데 영은 범죄하지 안했다. 안하나 육이 범죄했기 때문에 육의 범죄를 주격 위치에서 책임을 지워서 책임상 정죄 받아 가지고 영이 죽었다. 그러면 중생되고 난 사람들도 자꾸 죄를 범하는데, 그러면 중생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죄를 범하니까 그 영이 범하지 안해도 육이 범죄 했으니까 그게 영의 주격 책임에서 또 범죄를 정죄를 받아야 되지 않느냐? 그런 문제를 가지고 말하는데, 죄라 하는 것은 한번 정죄 받고 거기에서 형벌을 받으면 그것으로서 끝나 버리는 것이지 한 죄를 두번이나 정죄하고 두번이나 형벌 받고 그런 법이 없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자가 육으로 범죄하는 그 범죄는 벌써 그 영이 중생되기 전에 그 죄를 당겨서 다 하나님께서 그 영에게 죄를 당겨서 네 육이 앞으로 이런 이런 죄를 지을 것을 다 끌어 당겨 가지고서 영에게 부담을 시켜서 영이 정죄 받았습니다. 정죄 받고 그래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죄 받고 그 다음에 칭의 받고 그라고 난 다음에 새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돼 다시 불절의 끊어질 수 없는 연결이 있는데 연결이 정죄나 저주나 그런 거 있어 가지고 못합니다. 그 죄도 없다고 되는 것 아니고 의로워야 됩니다. 죄가 없어야 되고 의로워야 되고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결합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합된 새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벌써 결합 이전에 다 해결을 짓고 그 후에 결합이 됐다 하는 것입니다.
뭐 또, 또 생각이 납니까?
그러기에, 심신이라는 자체, 심신이라는 이 자체는 이 자체가 죄 뭉텅이라.
그래서 심신 이것이 나쁘다. 그만 이게 본질 본성으로 나쁘다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러면 물질 개악설로서 이단이 되고 맙니다.
물질이 악하다 하는 그것은 우리의 심신은 물질인데 물질은 악한 것이 아니고 악한 자에게 붙들리면 악하고 선한 자에게 붙들리면 선하고 그것 뽑아 버리면 따버렸으면 또 없어지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죄를 받고 이렇게 노력을 하는 것이지 그래 안 하면 그게 안 됩니다. 또 집에 가서 많이 연구해 가지고 뒤에 말하면 또 거기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번에 이 증거를 할 때에 우리의 심신의 그 자체는 무색이라 하는 그것을 말한 것은 지금 뭘 말하려하느냐 하면은 벗어버리면 된다.
입으면 된다, 입고 벗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심판적인 그 책임적은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영에게 다 부담이 됐기 때문에 심신 이거는 벗으면 되고 입으면 되고, 벗었다가 또 입으면 또 더러워. 금방 더러워지고 금방 좋아지고 더러워져 깨끗해지고 얼마든지 중복적으로 이래 될 수 있는 존재다 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는데 이 말을 하면 또 무슨 복잡한 말이 나지 않느냐 그런 걸 미리 예상했었습니다.
아마 이거 교계에 나가면 많이 떠들 것입니다. 많이 떠드나 조금 그 물질은 악하지 안하다 우리의 심신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알 것이고, 또 우리 사람이 그 본질상 악한 것이라. 본질상 악한 것이라 하는 것은 그거는 뭘 가르치느냐 하면은 벌써 영이 자유 없어서 정죄 아래에 있다 그 말입니다. 정죄 아래.
그러면, 영이 죄 아래에 있는 영이기 때문에 사람이 잉태할 때에. 그러면 잉태할 때에 육체는 부정 모혈로 합해질 때에 비로소 육이 잉태되는데, 영은 언제 잉태되느냐? 그러면 동시에 육이 창조함을 받을 때에 영도 창조함을 받느냐? 영은 그러면 그간에 사람을 몇 천명 몇 만 명 내기로 하면은 벌써 그 숫자대로 영은 한몫, 다 만들어 놓고 그때 하나씩 하나씩 이렇케 잉태될 때에 하나씩 하나씩 내서 영을 떼어 쓰느냐 하는 그런 주장도 있습니다. 그 영의 전제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우리 육이 창조될 때에 그때 한꺼번에 영이 같이 영육이 창조됩니다. 그러면 영육이 창조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창조될 때 그리 된다고 하니까 그것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했느냐? 또 그런 질문들이 나옵니다. 죄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죄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창조를 하시는데 그것이 법적으로 저주 아래, 창조는 깨끗한 것인데 창조는 깨끗한 것인데 하나님과 신인 계약하는 계약에서 정죄 받았기 때문에 이 깨끗하게 창조되는 것이 창조되는 그 즉시에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창조되는 그 즉시에 정죄를 받아서 죄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정죄의 것을 정죄 아래에 죄의 뭉텅이를 죄의 그 영육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창조를 깨끗이 하는데 깨끗이 하는 동시에 이 정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창조와 정죄와 동시에 되는 것인데 논리적 순서로 말하면 창조가 먼저고 정죄가 그 다음입니다. 또 뭐 생각납니까? 네. 그런 걸 좀 자꾸 생각해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라고 어제 어떤 사람이 묻는데, 영이 죽었다 하는 것은 여기 성경에 죽었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영이 죽었다 말은 영이 없어졌다 말이 아니고 영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생되기 전에는 죽은 영과 심신과 이래 가지고서 영육이 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중생된 때는 산 영과 우리의 심신과 이래 합해 가지고서 된 것입니다.
이러니까, 영이 법적 문제는 다, 중생된 사람은 영이 육체가 어떻게 한 것은 법적 문제는 다 책임을 졌기 때문에 그 중생된 자의 육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중생된 자는 심판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중생된 자의 그 심신에 대해서 네가 죄 지었다 이렇게 정죄할 권리가 없어 정죄를 못합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영은 다 정죄 받았지마는 이제 이 육이 아직까지 탈색되지를 안하고 죄에 감염된 그 대로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자꾸 벗길라고서 그 벗기는 데에는 중생 된 영이 앞서서 벗길려고 하고 그 배후에 응원하는 것은 그 배후에 응원 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의 피 공로와 진리와 성령이 합해서 협조해 가지고서 자꾸 이것을 씻어서 벗겨 냅니다. 자꾸 씻으면 없어집니다. 씻으면 없어지고 또 그 사람 자꾸 물이 듭니다.
그러기에, 이 심신은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서 정죄가 아니고 사심판 그리스도 앞에서 네가 영은 구원을 얻었지마는 이 육으로 말하면 아직 네가 죄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어서 그것을 벗어버리고 떨어버리고' 새로워져라 하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떨어버리고, 의에 감염된 의에 감동되어서 변화된 그것이 부활할 때에 새로운 자기 기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러니까 그만치 하고, 뒤에 한번 더 해서 의문 되거들라걸랑 저한테 편지로든지 하면은 좀 답을 하겠습니다.
그라고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대구의 무슨 공업사에 있는 직원인데 대구 집회 때 와서 참석을 하고 그런 몇 가지 질문하는 것을 했는데 그 뒤에 내가 답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뒤에 생각이 나서 답하려고 보니까 편지는 있는데 그만 그 봉투가 없고 편지는 주소가 쓰이지 안해서 그것을 답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그분의 질문한 것이 사람이 죄에 속할라면 죄에 속하고 의에 속할라면 의에 속하고 죄에 안 속하면 의에 속하고 의에 안 속하면 죄에 속하고 그런데 그 둘인 줄 아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끼어 셋이라고 말하는데 그 셋이 뭐입니까? 그것을 말했는데 그것은 제가 그런 말했는지 몰라도 그렇게 셋이라는 그런 것은 제 알기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내가 그때 뭐라고 말해놨지? 어? 아 그렇게 뭐라고 말했지? 그것이 하나 있고, 또 예수님께서 그것이던가 모르겠습니다. 그때 그 뭐이지? 삼십 년 뭐라 삼십 삼 년 뭐 사 개월을 말했는데, 고것도 그것은 예수님이 삼십 년 동안이나 무엇이 안 됐는데 그러므로 됐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이 그 일을 시작한 그 역사 기록이 혹은 잘못됐는지 역사적으로 삼십 년이 덜 됐는데 삼 십 년이 됐다고 이렇게 하는 그런 것으로 말을 해 놨읍디다. 말을 해 놨는데 그것은 그때에 예수님이 무슨 무슨 사건이던고 그 일이 삼십 년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생 생애에서 다만 해결된 거는 그때 그 걸로 해결됐지 그게 아니면 해결이 안 된다 하는 그걸 내가 그때 말한 것이고 또, 배타고 가면서 하는 거, 배를 타며 노를 젓는 것은 필연한 일인데 노를 안 저어도 갈 수가 있다 하는 그것은 하나 예를 들면은 그들이 노 젓는 것은 하나 외부의 방편인데 그들이 가게 되는 것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능력으로 믿고 난 다음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수가 있었지 그 두 가지 능력을 잊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노를 암만 젓어도 못 간다. 그 능력만 속에 가득 차면은 노를 젓지 안해도 갈 수가 있다. 그 능력으로 간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노를 젓지 안해도 갈 수가 있다 하는 그런 말을 한 것은 하나 더 강조해서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그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서 가지 못하게 된 것은 주님과 주님의 음성을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과거에 있는 그 모든 기술과 노력만 가지고 했기 때문에 안 됐다. 이러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 안 됐는데 그것을 만일 안 한다 할지라도 예를 들면 안 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가라 하셨다 하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명령 순종만 한다는 고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그 배가 노를 안 저어도 갈 수가 있다 하는 그런 말 한 걸 가지고 노를 안 저어도 어찌 갈 수가 있습니까? 그런 질문이 왔습디다.
네, 그것은 뭐 노를 안 저어도 물위로 걸어가기도 갔고, 또 다른 데 보면 주님이 올라서니까 배가 흔연히 목적지에 갔다 하는 그런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가는 힘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 같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데에는 순전히 주님과 주님의 말씀 이 두 가지의 능력으로만 가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믿기 전 어떤 기술이나 방법이나 그것 가지고서 믿은 후에 갈릴리 바다의 건너가는 거와같은 생활을 할라 해서는 안 된다. 옛날 방법은 소용없다. 새로운 방법은 주님과 주의 말씀이면 다다 하는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조금 깊이 들으면 해결이 될 문제입니다.
그때에 물었는데 하나는 둘인데서 이라는 말은 뭐이요? 나는 그 서이라 그 말을 말을 했던가 내가 인식하기로는 그 셋을 인식 안하고 있습니다. 둘로 안 그때 무엇을 둘로 말했지? 내가 ○○○씨한테 한번 내가 말을 했는데 그때.
그것을 편지 답을 못 해주는데 그분이 여기에 왔으면 여기에 왔으면 다시 나한테 와 가지고서 그것을 말을 하면은 다 내가 아는 대로는 잘 설명을 해서 말해 주겠습니다. 또 여기 와서 그동안에 배우고 들으면 다 그런 것이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과학적 소산이 아닙니다.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 된다는 과학적 소산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저 참 허무한 거 같지마는 그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분과 우리와 관계이기 때문에 이 과학적인 이런 것을 초월해 가지고서 비합리적이요 비과학적이요 비불변적의 것도 다 이루는 그것은 그의 선포한 약속대로 다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꼭 요 과학으로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요것이 그 인간에게 인본적인데 그렇게 자꾸 하는 그 사람은 대개 신신학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물위로 걸어올 수가 있느냐? 없다. 이러니까 거기에는 밑에 암석이 있어 가지고서 암석에 받쳐서 암석을 타고 온 것 같이 사람을 물위로 걸어올 수가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그런 거와 같은 그런 실례의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우리가 대개 보면 우리 남한에 있는 교인들을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월남한 교인들과 또 남한에서 난 교인들과 둘로 나눌 수가 있는데 월남한 교인들은 경제력이 다 풍성하고 또 본래 남쪽에 있던 그 교인들은 항상 경제에 빈곤을 느낍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때에 내가 여러 군데 몇 군데를 물어봤는데 여러 가지로 말을 합니다. 월남한 사람들은 그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돈이라 하면 사지를 못 쓰고 마구 마구잡이로 있는 것을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돈을 붙든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말은 제게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이 뭐 이남 사람들도 돈벌라고 애쓰기는 다 같이 애를 쓰고 있고 혹 북에 월남한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이남에 있는 사람들은 게을하다 하는 그런 말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봐서 월남한 사람들은 그 하나님 앞에서 경제면 행사에 대해서는 그 남한에 있던 교인들보다 훨씬 성경적으로 삽니다. 남한에 있는 사람들은 경제에 대해서 그렇게 다른 경제 수입하는데 대해서 계명을 지키는 거 그런 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받은 경제를 그 하나님이 주시는 것 만 받아야 된다 이랬는데, 그것은 월남한 사람들이 그렇게만 한다 그렇게 나는 보지 않습니다.
이남 사람이나 월남한 사람이나 경제에 들어오는 경제에 들어오는 입문은 둘 다 모두 깨끗지 못하고 텁텁하이 모두 추잡하고 더럽지 입문은 둘 다 부정하지 깨끗하다고는 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요것을 일단 들어오고 난 다음에 이것을 보관하느냐. 또 이것을 지출을 하느냐, 또 내가 어떻게 쓰느냐? 이렇게 세 가지 보관하고 지출하고 또 자기가 쓰는 거 요 세 가지면 이북 교회서 월남한 사람들의 신앙이 훨씬 깨끗하다고 그렇게 봅니다. 왜 그분들은 꼭 아무리 들어온 것이라도 요거는 내가 꼭 보관해야 된다, 내가 똑 내것으로 가져야 되겠다. 그렇지 않은데 이 남한에 있던 사람들은 그 면에 있어서 제가 한번 들어가 놓으면 주먹에 들어가 놓으면 남이 구경할 수 없습니다. 한번 주먹에 들어가 놓으면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딱 거머쥐고 그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암만 말씀이 내놓으라 내놓으라 해도 안 내놓고 꼭 거머쥐고 있습니다. 고 면이 이남에 있는 신자들과 월남한 신자들과 아주 차이가 많습니다.
그 교회들 교인들 하나 하나 따져봐도 다 그래요. 고 면이 월남한, 이북에서 남쪽으로 월남해 내려온 교인들의 그 생활과 이남에서 있던 교인들의 생활이 보관면에 대해서 아주 차이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어떻게 어렵게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일단 네가 보관하지 말고 내놔야 된다 할 때에는 그들은 아낌없이 내놔 버립니다.
이번에 내 말 들어 보니까 저게 ○○교회 ○○교회에서 뭐 얼마를 가지고서 몇십억을 가지고서 예배당을 짓는다고 짓는데. 그 모두 다 돈 내놓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인데 거기에서 어떤 사람은 뭐 칠십억을 한 사람이 내 놨다 그렇던가 얼마가 내놨던가 이래 내놨다 하던데 아마 고 사람이 월남한 사람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 모두 다 연보한 내용을 들여다보면은 월남한 사람들이 연보를 잘 냅니다. 이남에서 자란 사람들은 연보를 안해요. 딱 거머쥐고 보관 보관법을 하나님이 보관하라 할 때에는 보관하고 또 하나님이 내놓으라고 할 때에는 내놔야 되는데 꼭 제것인 줄 안다 그 말이오.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관시킨 것이니까 아, 보관했다가 내놓으라면 내놓고 또 보관하라면 보관하고 이런데 이남 사람들은 제것인 줄 착오를 하고 그것을 한번 거머쥐면 놓지 안하는 그런 일이 있어요.
또, 둘째로는 지불하는데 대해서 지불하는데, 하나님께서 지불하라 할 때에는 월남한 사람들은 아낌없이 지불해 버려요. 하나님의 뜻이다 하면은 자기 있는 대로 톨톨 털어서 지불해 버립니다. 이남에 있는 사람들은 그 걸 못 해요. 고만 제게 들어오면 보관만 하지 지불할 줄은 도무지 모릅니다. 이래 놓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경제법을 어겨서 곤고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 교인들이 이남 사람만 모이느냐, 이북 사람들이 모이느냐? 물으면 이북 사람이 모이면 물을 것 없이 '경제는 넉넉하지?' '넉넉합니다.' 이남사람이 모였다고 하면은 '그 경제는 어렵지?' '연보는 적게 나오고 어렵습니다.' 그거는 판벽이 돼 가지고 있어요. 또, 제가 쓰는 거 자기가 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쓰는 그것도 하나님이 요거는 네가 쓰고 요거는 내놔라.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준다' 심을 것은 심으고 네가 먹고 살 거는 네가 먹고 사는데 그만 닥치면 전부다 제가 먹을 것인 줄 알지 도무지 심우지를 안한다 말이오. 심으지 안하니까 하나님께서 씨를 안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남한 성도들의 그 경제력과 남한에 있는 성도들의 경제력에 강약의 차이가 있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연보법을 잘 지키지 안한 그 결과라 나는 그렇게 봅니다.
이제 본문 있는 대로 잠깐 좀 설명을 하겠습니다.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 둔다 하는 말이로다' 그러면 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심고. 또 이 세상에서 그 추수를 본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하는 것은 이것은 세상에서 심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복음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심는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복음 사업에 많이 투자한 사람은 투자한 그 투자의 값을 세상에서 받기 때문에 적게 투자하면 적게 받고 많이 투자하면 많이 받아서 적게 심은 사람은 적게 추수되고 많이 심은 사람은 많이 추수된다 하는 그런 말이로다 하는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기 쉬운데 그거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심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심는 것은 심는 것입니다. 심는 것이나 여기에 많이 거두는 것은 언제 거두느냐 하는 것은 무궁 세계에 가서 거둡니다. 거두는 것은 무궁 세계에 가서 거두지 이 세상에서는 거두지 않습니다. 사람이 복음 사업에 일단 투자해 논 그 투자해 놓은 댓가를 그 투자한 것은 벌써 생명에 속한 것으로서 생명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에 있는 재물을 이렇게 투자한 것은 벌써 그것은 생명에 속한 운동이요 생명에 소속이 돼 버렸습니다. 생명에 소속한 그것은 썩은 것으로 댓가를 주지 않습니다.
이것도 얼추 이렇게 생각하는데 많이 연보하면 많이 준다. 이렇게 사람이 생각하는데, 벌써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물질이든지 자기 몸이든지 무엇이든지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자기에게 있는 무슨 어떤 기능이라든지 어떤 권세라든지 어떤 지위라든지 물질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기술이라든지 뭐이든지 그것을 복음을 위해서 바치면 바친 그 값을 세상에서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줄 수 없는 것이 왜 그러냐? 그것은 다 살아 버렸는데 산 것이 돼 버렸는데 산 것이 되었는데 산 것의 댓가를 죽은 것으로 줄 수가 없습니다.
산 것을 댓가를 죽은 것으로, 뭣이든지 주의 복음을 위해서 바친 것은 그것은 그 추수는 언제 하느냐 하면은 부활 심판 너머 무궁 세계 가 가지고 추수하지 여기에서 추수되는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무슨 그걸 심고 난 다음에 육적으로 이 세상적으로는 한 내끼도 안 오니까 자기는 심어 놓은 그것이 허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심은 거는 심어 놨으면 그 추수는 죽음 너머 무궁 세계 가 가지고서 없어지지 안하는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완전한 것으로 자기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안할 것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안할 것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둔다는 그 심은 것은 복음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요 거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댓가로 보응으로 그렇게 많이 준다 그런 해석을 가지면 그거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 그거는 그래 줄 수 없는 것이 산 것을 죽은 것으로 줄 수 없습니다. 산 것의 댓가를 어떻게 죽은 것으로 줄 수 있습니까? 산 것의 댓가를. 의로운 것의 댓가를 불의한 것으로 어찌 줄 수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산 것의 댓가는 무궁세계에서 나온다 그렇게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말씀에서 사람이 마음 없이 연보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를 않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마음이 그 연보에 먼저 있어야 됩니다. 그 연보에는 마음이 같이 들어가야 되지 마음 없는 그 연보 그 껍데기 그런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뭐 안 받아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정성 그 인격에 있는 그것을 받을라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그게 아닌 이 물질 그런 것을 받을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마음 없이 연보하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는 열납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 받아들이는 것이 안 된다,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안하면, 그 허비만 안 됩니까? 다 허비하면 됐지. 혹 그것이 어떻게 했으면 구제가 됐으면 구제됐으면 구제된 그것으로서 또 그 댓가나 그 혜택이 뒤에 무슨 몇 프로가 나올는지 몰라도 나오지마는 연보는 안 됩니다.
그 연보에는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 그러면 마음이 고 연보와 꼭 같이 있어야 된다 하는 고것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아야 된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 안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그 연보도 헛 연보입니다.
억지로 하는 연보, 아주 아까워서 인색함으로 하는 연보 그런 연보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기뻐 받으시지 아니하시니까 혹 그거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만 원을 연보했으면 하나님이 기뻐해서 기뻐 받으시면, 그렇지 않소? 기뻐 받으신다고 하면은 그 세상에서도 여기 흰죽뺌이라고 있어요. 흰죽뺌이 이 흰죽뺌이라고 있는데 그 흰죽뺌이는 뭐이냐? 그 사람이 참 어디 가다가 아주 기진맥진 해 가지고서 어려움을 당했는데 재산은 넉넉한 부자인데, 지나가니까 어떤 가난한 사람, 아주 가난해서 밥은 해 주지 못하고 '내가 좀 시장 한데 좀 요기를 시켜 주십시오' 이러니까 자기 집에 있는 쌀을 톨톨 털어 가지고서 밥은 못 하고 이제 멀거이 죽을 하나 끓여서 한 그릇 줬는데 자기 집에 있는 걸 톨톨 다 털어 가지고서 흰죽을 한죽 쑤어 주더라 그거요. 그러면 그 죽 한 그릇 얻어먹고 집에 가 가지고서 '그 사람이 내가 죽을 때 자기 재산을 다 털어서 그 기사를 주려 죽는 기사를 면케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내가 어떻게 갚을고?' 이라면서 자기 재산의 한 모때기를 끊어 가지고서 아주 좋은 논, 큰 논뺌이 아주 좋은 논 참 요새 말로 말하면 아주 많을 거, 제일 값비싼 거 그런 거 한 마지기를 가지고, 한 마지기가 아니라 그 저 위에 성지에 가면은 아홉 마지기 뺌이 있어요 아홉 마지기 뺌이 있는데 그 뺌이가 흰죽뺌이라 이렇게 그 유전이 돼 가지고 있어요. 그 아홉 마지기는 그 들에 제일 상답이요. 와 가지고 그들의 제일 좋은 논을 아홉 마지기의 뺌이 아홉 마지기를 턱 사줬다 그거요.
이제 기뻐하면은 기쁘면 그 끝이 없소. 그럴 거 아니겠소? 사람이 기쁜 거 물 한 잔 얻어먹고 기뻐서 그 사례할 때에는 뭐 그 댓가만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 댓가 몇 십 배 몇 백 배도 치를 수가 있다 그거요. 이런데 인색함으로 억지로 이래 하니까 하나님이 치뤄 주면은 고대로 딱 댓가를 일 원이면 일원 십 원이면 십 원 고 댓가로 딱 주지마는 하나님이 감사해서 이제 그에게 은혜 베푸시는 그 부는 없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그 부는 없소.
그러니까 한 뭐 그대로야 땅에 두고 갈 거 없어지지 안하지. 만 원 연보 했는데 그대로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지마는 그 감사함으로 만 원짜리 연보했는데 당신은 '야, 네가 나를 기쁘게 이래 만 원짜리 냈으니까 내가 억만 원을 너에게 대접하겠다.' 하는 이런 무슨 횡재수는 없다 그 말이오. 이런 횡재수는 없어요.
이러니까, 연보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이 거기에 함께 드려야 되고 마음으로 깊이 따지고 따지고 해 가지고 해 볼까 말아 볼까 그것도, 해 볼까 말 아 볼까 이래 저래 따져 가지고 아무래도 내가 이거는 해야 되겠다. 하는 데는 주님이 나에게 이와 같이 하셨으니 주님이 피흘려 구속하시는 이 일을 나도 요 거나마 바쳐 가지고 해야 되지 않느냐? 나중에 그래 자꾸 해석을 해 가지고서 처음에는 인색하지만 마지막에는 원하는 마음. 딱 마음에 작정하고 요거는 해야 되겠다.
그라고 억지로나 또 아까워하는 것이나 그런 거 없이 참 감사함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낼 때에는 그 작은 연보가 뭘, 끌어 올는지 몰라요 흰죽뺌이를 끌어 올는지 모른다 그 말이오 우리가 조그만한 연보를 냈는데 뒤에 뭐 따라 올지 몰라. 그것을 성경에 말씀하신 걸 보면 연보궤 옆에 주님이 서셔 가지고 과부의 엽전 그 연보 한 그것을 보시고 말하기를 모든 부자들이 연보한 그것보다도 이 과부의 엽전 두 푼 연보한 것이 더 크다 이랬다 말이오. 그게 더 감사해서 이다음에 댓가는 모든 사람들이 연보한 수많은 금액보다도 그 엽전 두 푼의 댓가를 당신이 아낌없이 푹 주실 것이라 그거요. 이제 연보의 성격은 이것이 있어야 되지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보를 억지로 시키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면 혹 그런 일 해요. 교회 살살 해 가지고서 이것을 어떻게 터를 사서 이 교회에 넣어 주면 뒤에 댓가를 치르겠다. 어떻게 이렇게 이리 말해 가지고 교회 딱 들어가기는 들어가 버렸지 나중에 그거는 그만 돈도 안 주고 자꾸 씰락거리니까 아야 연보하라 하는 거 분명하니까 에라 연보해 버려라 이래하면 그 사람 망하고 교회 망하고 다 망해요. 그 손해 갑니다. 그런 일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혹 돈이 없을 때는 교회 돈 없을 때는 사 가지고 그럴 때에 사 가지고 넣었으면 뒤에 댓가를 치러 줄 때에는 반드시 그 십일조의 법칙과 같이 현 시세의 한 몫을 더 줘야 됩니다. 현 시세의 한 몫을 더 주면 그 사람을 살수가 있고 그 사람의 구원을 이룰 수가 있고 그 사람도 그동안 한 것이 상급이 될 수 있고 교회도 축복을 받습니다. 그렇게 억지성이라 하는 것을 절대 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도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다른 일반 시세 보담도 조금 시세에 조금 넘도록 그래 주고서 사서 넣었지 그걸 조금 이미 걸려 놨으니까 안 줘도 괜찮다 하는 그런 억설같은 그런 행위는 하지를 안했습니다. 그거 하면 안 됩니다.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즐겨서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 즐겁기는 뭐이 즐겁습니까? 즐겁기는 예수님이 나를 구속하신 그 은총을 거기서 뿌럭지를 밑바탕으로 삼아 가지고서 그걸 생각하니 나도 몸과 생명도 다 바쳐야 될 터인데 내가 부스러기 바치는 거, 돈을 바치는 것은 피를 바치는 것입니다. 돈을 바치는 것은 피를 바치는 것이요 돈을 바치는 것은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이요 돈을 바치는 것은 자기의 생명에 억만분지 일이 될는지 백분지 일이 될는지 모르지마는 그 사람의 피와 몸의 건강과 힘과 생명을 생명을 주고 산 그것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역연 자기의 몸을 바치는 거와 꼭 같은 그 계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절에 '하나님이 능히' '하나님이 능히' 그말은 하나님이 하고도 남음이 있다 말이오. 넉넉히 할 수 있다 말이오. 능히 그말은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넉넉히 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넉넉히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일은 얼마든지 풍성히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제 연보하는 그렇게 연보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즐겨 받고서 즐겨 받으니까 그 댓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대접을 하니까 그 대접함에 고마워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는 넘치는 은혜, 즐겨 연보하면 즐겨 연보를 하면은 연보를 하면은 그 즐겨 연보를 했을 때에 하나님이 그 연보를 즐겨 받으시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은혜를 넘치게 하시니까 연보한 댓가입니까 뭐입니까? 저 ○집사님, 아, 이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해 주는데 연보 즐겨내는 그 댓가가 아니라? 댓가가 아니라? 두 번 물으면 또 답을 못 한다 달이오 모든 은혜라 했소. 자, 은혜는 댓가가 있는 거요, 없는 거요? 공짜배기라 그 말이오, 공짜배기. 이러니까 네가 나를 대접하는데 기뻐서 하나님께서 그 대접한 댓가로 주는 것이 아니라, 아까 흰죽뺌이는 그 뭐 댓가 그것도 감사로 준 것이지 그 댓가가 안돼. 뭐 흰죽 한 그릇이 어찌 일등 아홉 마지기 그것이 댓가가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한다.
우리가 연보를 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연보를 하면은 하나님께서 감사히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고마와서 우리에게 공짜배기로 모든 걸 주산다. 그 댓가로 주는게 아니라 공짜배기로 모든 걸 주신다. 모든 것을 은혜로 넘치게 하신다. 요런 것도 똑똑히 구별해야 됩니다.
제일 처음에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그걸 이래 적게 연보하면 하나님께서 적게 주시고 많이 연보하면 많이 주십니다.
이래 그만 쑥 해석하기 쉬운데 이래 해석해 놓으면 그만 연보법이 뒤죽박죽이 돼서 아무것도 안 된다 그거요.
하나님은 법을 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법을 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법을 어길 때는 고 법을 맞추도록 하려고 이리 저리 깨우쳐 가지고 암만 그래도 법을 어길 때에는 하나님은 할 수 없어 하고 싶은 거를 못하고 마는 거라. 그러기에 법에 맞아야 그게 됩니다. 법에 틀린 것을 당신이 하는 것은 불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을 못 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어기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막 가로막고 마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꼭 하나님의 법에 맞추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너희로 모든 일에' 참 얼마나 기쁨입니까? '너희로 모든 일에' 이일 저일 말이오. '모두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면을 넉넉히 하겠노라.
모든 면을 넉넉히 하여. '모든 면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줍니다.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해 주고 어쩌든지 착한 일, 의로운 일. 가치 있는 일 얼마든지 많이 하도록 해 주시다. 연보를 즐겨 내고 많이 하는 자, 그러면 연보 낸 댓가입니까? 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구비해서 넘치도록, 의로운 일이 넘치도록 하도록 해 주시니까 연보를 즐겨 낸 그 연보의 댓가입니까, 이게 뭐입니까? 댓가로 해석, 댓가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댓가가 아닙니다.
보니까 이 즐겨 내니까 희망이 있다 말이오. 이래 주니까 그것을 허비하지 안하고 쓸데를 꼭 정확하게 이렇게 써서 이래하니까 희망이 있으니까 그만 여기에 '모든 일이 넉넉하여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니까, 이렇게 모든 것을 자꾸 넉넉하게 해 주고 많이 줘 가지고서 착한 일을 많이 하도록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적은 것을 주니까 그거 가지고 착한 일을 하니 그 상급은 무궁세계에서 갚아줄 것이고 착한 일하니 또 주니까 또 착한 일 하고 또 주니까 착한 일 하고 자꾸 이 모든 일을 넉넉하게 해 주시는 것은 당신의 곡간에서 새로 내다가 주는 것입니까, 그 값으로 댓가로 따라 들어왔습니까? 비싼 댓가로 주는 것입니까, 아주 댓가는 상관이 없고 공짜배기로 주시는 것입니까? 어떻지요? 댓가를 비싸게 주는 것이요, 아주 공짜배기로 주는 것이요? 예, 자. 댓가를 비싸게 좀 많이 비싸게 쳐줍니까, 아주 주는 것을 아주 공짜배기로 주고 그 연보한 거는 하나님이 감사하게 받아서 이거 주니까 이거 옳게 바로 쓰니까 새것으로서 넉넉히 많이 주는 것입니까? 댓가로 주는 것이 한번 댓가로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봐요. 댓가는 아니고 그거 주니까 희망이 그러하니 귀엽고 아름다워서 이제 또 착한 일 하라고 새것으로 넉넉히 준다고 새것으로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봐요. 네, 놓읍시다. 잘 배웠습니다. 요거 똑똑히 배워요. 새로 새것으로 주십니다.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니까 뭐 하나 줘서 그거 가지고서 잘 하니까 또 둘 줘서 둘도 잘하니까 또 셋 줘서 또 열 줘서 자꾸 이래 하니까 또 주고 주고 하는 것은 먼저 준 것의 댓가가 아니라 그것은 다 하늘나라에 다 저축해 놨고 새로 자꾸 착한 일 하는 고 일이 고마워서 기뻐서 자꾸 착한 일 할 수 있도록 자본을 자꾸 준다 말이오. 그러면 이 새 자본입니까 옛 자본입니까 새자본, 새자본입니다. 요렇게 믿어오. 믿을 때 하나님께서 고대로 이루어지지 믿지 안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지를 안해요.
9절에.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있는 것을 흩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서 이제 연보하고 구제하고 이래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이랬으니까 그 댓가가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영원한 나라에서 댓가가 나옵니까? '영원토록' 이랬으니까 영원한 나라에서 이 댓가가 나옵니까, 이 세상에서 나옵니까? 영원한 나라에서 나온다 말이오. 요걸 똑똑히 알아야 돼요.
우리가 연보만 했으면 그 댓가는 이 세상에서 그만 없어지지 안해요. 하늘의 보배 창고에 들어 있기 때문에 좀도 먹지 안하고 동록도 슬지 안하고 도적도 구멍 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도적이 구멍 뚫는다 말은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 마지막 심판에도 해하지 못한다 그 말이오. 죽음도 해하지 못 한다 그 말이오.
좀이 안 먹는다 말은 억만 년 가도 그거는 없어지지 않는다. 시간의 제한 안 받고 시간이 영원하다. 동록이 쓸지 않는다 동록은 옆의 것이 썩으면 옆의 것이 썩으면 그것도 썩어요. 동록 치는 것은 그 환경이 더러우면, 거기에 놓으면 썩어요. 깨끗한 쌀도 환경이 더러우면 거기에 놓으면 동록 쓸고 곰팡이 피고 그만 썩어 버려요.
이거는 이 우주의 어떤 죄악에, 주변의 어떤 죄악을 인해서라도 그는 상해를 받지 않는다, 그 죄악으로 상해받지 않는다. 한번 주의 이름으로 이래 바쳐서 해놓은 것은 그것은 영원히 그것이 살아 있고 영원히 있고 시간에도 영원하고 모든 다 그 질적으로도 완전해서 다시 불변의 것이 되고 완전한 것이 되고 영원한 것이 된다 하는 것을 여기에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10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의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의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그 심는다는 것은 심는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이 복음 운동에 쓰는 것을 가리켜서 심는 것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는 하나의 형용사입니다.
그러면, 심은 것은 심은 것은 그것이 먹을 거는 썩어 버리지마는 심은 것은 움이 나면은 백배 육십배 삼십배로 커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복음에 투자하는 것. 진리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 또 진리를 위해서 없어지는 것 그런 거는 다 심는 것이라 말이오.
그 심는 자에게는 씨를 준다 하는 그말은 다시 심을 것을 준다. 또 양식을 준다 하는 것은 심으는 그 본인의 사용할 것을 준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심는 자에게 씨를 주시니까 먼저 심은 댓가로 이제 한되 심으니까 또 두 되쯤이나 배나 해서 두 되 심을 씨를 준다. 심으니까 심은 댓가로 이제 새로 씨를 주니까 써는 이거 새로 주는 것입니까? 자 이제 심으는 자에게 씨를 주신다 했으니까 심은 그 처음에 씨를 줘서 심으니까 고마워서 심은 그 댓가로 또 심으라고 새로 씨를 준 것입니까, 그래 안 하면 이것을 싱은 것은 다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뿐이지 이번에 씨 주는 것은 먼저 심은 댓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거는 또 새로 공짜배기로 주시는 것인지, 그 심은 그 댓가로 주시는 것인지. 새로 씨와 양식을 주는 것은 그 댓가로 주는 것입니까? 새로 하나님께서 새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까? 자 댓가로 주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며 댓 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 댓가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고 새로 씨와 양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곡간에서 하나님께서 새것으로 그에게 또 새 자본을 주시는 것, 새 자본으로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네. 새 자본으로 주는 것입니다. 새 자본으로 주십니다.
그런데, '씨와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심을 것을 주사' 심을 거면 또 양식도 같이 준다 말이오.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그러면 이렇게 자꾸 심으니까 심으니까 의의 열매는 이 열매는 일시 열매입니까, 영원한 열매입니까? 영원한 열매요, 영원한 열매인데 이걸 심어 가지고서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서 선이 격동되고 격발됩니다.
격발되는 그거는 외나 심으는 그 댓가는 무궁세계에서 받고 무궁세계에서 받고.
무궁세계에서 받는 그 영광의 빛이 비추어 가지고 또 이 세상에서도 또 수입이 된다 말이오. 그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이 그거보고 선이 격발돼 가지고 하게 되면 그것도 자기는 또 얼마 부가 있어요. 얼마 할이를 얻어먹을게 있다 말이오.
아무것이 네가 연보해 가지고 그것보고 이렇게 이 아무것이가 모본해 가지고 이래 했으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 연보한 거 보고 그 사람이 그만 모본을 그 사람 모본해 가지고서 이 사람도 그 복음에 많이 투자하는 그걸 했으면 아무것이 보고 이 사람이 복음에 투자했으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에게 선을 격발케 했기 때문에 그 분량의 할당도 자기에게 돌아온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옳은 일에 격발케 해 가지고 하는 그 덕을 세우는 신덕을 세우는 것은 상당한 그 뒤에 그 상급을 받을 때에 우리가 동참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 무엇이든지 돈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지혜와 총명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언변도 그러하고 지식도 그러하고 지 위도 그러하고 권세도 그러하고 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인데, 가지고 있는 거 그 전부에는 그 씨와 양식이 있다는 요것을 똑똑히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씨가 있고, 양식이 있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야 됩니다. 그만 전부 우리 이남에 있는 신자들은 이거 뭐 내건데 그 믿음이 없어 그래. 이렇기 때문에 항상 거지로 산다 그 말이오. 항상 거지로 살아. 예수 믿는 사람 쳐놓고 십일조를 똑똑히 하는 사람 쳐놓고 경제에 곤란 당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십일조는 드리는데 곤고하다면은 입구가 틀렸어 수입하는 입문이 틀려.
도둑질해서 자꾸 십일조 내니까 하나님이 뭐 좋아할게 뭐 있습니까? 입문이 틀렸든지 그 출고하는 출문이 틀렸든지 그래 안 하면 그걸 이제 구별하는 것이 틀렸든지 뭐이든지 틀려 그렇지 틀리지만 안하면 그 뭐 삼 년이면 부자됩니다.
삼 년이면 부자돼요. 이 경제면을 성경대로 정확하게 하면은 그 경제 이런 거는 쉬워요. 경제 이거는 아주 쉬운 것이면서도 중요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삼 년이면 경제 문제가 해결이 돼.
우리가 경제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그때 배운 것 네 가지 있는데 네 가지 이거 누가 다 외워요? 처음의 것이 뭐이요? 다 잊어 버렸어? 경제에 대해서 네 가지인데 첫째는 뭐이지요? 우리가 모든 걸 받았을 때에 피조물에게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덕택으로 받았든지 제 능력으로 했다든지 인간 덕택으로 이것이 왔다 하는고 죄를 회개를 해야 됩니다. 고거 회개해야 되요. 어제도 그렇지 안했어요? 간부 문제 많이 했지요. 간부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은 전부 포도주니 뭐 향유든지 모두 다 그런 것을, 그 떡이니 그런 거 이거간부가 줬다, 전부 주님이 줬는데 간부가 줬다 이거 분하다 그 말이오. 호세아서 2장을 자꾸 읽어 보라 했지요. 이러니까 우리가 물질은 사람에게서 받았다 그 죄를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에게서 만 받을 것 하나님에게서만 받는 것은 어떤 것이 받는 것이냐? 하나님에게서만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대로 계명을 지킬 때에 오는 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계명을 어김으로 오는 돈은 그게 내게 보물이 오는 것이 아니라 화근이 왔다 말이오. 화근이 왔어 그 돈이 와 가지고는 반드시 병원 그래 치료비로 가든지 치료비로 다 가든지 뭐 얄궂은 그런 걸로 나가 가지고 그 돈 때문에 고통을 당해요. 그 돈만 아니면 그만 병 안올 건데 돈 그놈 때문에 병이 들어 가지고서 기어코 배를 째고 뭘 째고 이래 가지고서 아픈 약값으로 다 나간다 그거요. 자 돈 있는 거 약값으로 나가면 좋겠소, 안 좋겠소. 한번 대답해 봐요. 돈이 약값으로 나가면 좋겠어? 약값으로 나갈 돈이나 따나 왔으면 좋겠다.
싶은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어? 수술비로 나갈 돈이나 따나 들어오기만 들어왔으면 좋겠다. 싶은 분들 한번 손들어 봐요? 그런 거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도 없을 것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거 그런 거 성도에게 오면 반드시 그것 이 화근이지 그것이 자기에게 보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받을 것 그 말입니다. 다른 무엇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걸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에게만 받을 것.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에 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이라 그거요.
또, 그 다음에는 또 뭐이요? 둘째가 보관주의로 이남 사람들 다 이거 회개해요.
보관주의로 살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보관하라는 것만 보관해야 되지 되나 안 되나 그만 들어가면 그만 거머쥐고는 안 내놔 안 됩니다. 그거. 보관주의, 뭐이 들어오면 안 내놔요. 그만 들어가면 안 내놔. 들어가면 안 내놓는 고것 아주 회개해야 됩니다. 보관주의 그것 나빠요. 하나님이 보관하라는 것만 보관해야 되지.
또 셋째로는 뭐이요? 지출도 말이요 지출을 제 마음대로 지출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지출하라 할 때에 제 마음대로 지출한 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지출하라는 대로만 딱딱 지출할 것. 그라면 몇 가지입니까? 또 하나 더 있는데 하나는 뭐이요? 가지고 있는 것을 제 마음대로 내거라 해 가지고서 제 마음대로 제가 벌로 쓰는 남용한 죄를, 제 마음대로 남용한 죄를, 제 마음대로 제가 쓰고 남 주고 싶다고 주고 하는 이거 안돼. 하나님이 주라 해야 주지 제 마음대로 줄 권리도 없고 제가 쓸 권리도 없어. 남용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쓰라고 하는 양식만 제가 쓸 것. 요 네 가지 지켜요. 양식을 안 쓰고 양식을 쓰지 안하고 이것을 이리저리 없애는 것은 무슨 죄를 짓는 거라고 했지? 자살죄, 자살죄. 자살죄를 범하는 것이요. 이 경제에 대해서 네 가지를 말했는데 요 네 가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만 삼 년만 하면 부자돼요.
뭐 그 사람 망하지 안 할 정도, 돈 가지고 돈에 치어서 죽지 안하도록은 줍니다. 돈에 치어서 죽지 안하도록은 줘요. 돈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고 유리할 만치는 넉넉하게 주시오.
이러니까, 다 부자되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데 이 비결을,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여호와입니다.
내 이름은 여호와로라. 따라 합시다. 내 이름은! 여호와로라! 내 이름은 여호와로라! 약속 이행의 불변의 하나님이로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거 심는데 대해서 심으는데 대해서 우리가 받은 것이 각각 다릅니다. 다 같은 것이 아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눈도 있고 발도 있고 이렇게 손도 있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각각 달라요. 이 사람에게 이 은혜 주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은혜 주시는데 각각 받은 것이 다르니까 받은 것 가운데에 첫째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자. 받은 것 가운데 첫째 할 일이 무엇이지요? 네, 두 가지로 딱 구별해요. 받은 거, 지식이든지 지혜든지 총명이든지 재산이든지 권세든지 건강이든지 무엇이든지 요 두 가지로 딱 구별해서 가르기를 첫째 해놔야 됩니다.
하나는 뭐 심을 거, 하나는 양식 먹을 거 이 두 가지를
(이제는 구역장들 말이요. 구역장들 자기네들이 가서 새김질해요. 새김질하는데 새김질 못하고 백지 오라고 오라고 항상 송아지 믿음, 송아지 믿음은 오라 오라 하지마는 나중에 갓난 송아지 그까짓 거야 모가지 끌어 가지고 이래 끌면 끌어오지마는 차차 차차 명달 키워 놓으면 못 끌고 옵니다. 안돼. 그 뒤에 끌고 올 수 있습니까? 뒤에서 저러 저러 저러 하면 이리 오고 저리 오고 자꾸 이래 와야 되지. 그러니까 진리를 가르쳐 놔야 되지 자꾸 오라만 해서 안 된다 그거요. 잘 듣고 가르쳐야지 안 가르치면 안돼. 이제 요 다음에는 부산 서부 교회 가 가지고서 마구 말해서 자, 누구든지 새김질해서 가르치고 어디든지 가거라. 이래 인제 내가 한번 할 거야. 왜? 이 권찰님들이 오라는 거기에만 전력을 기울이지 이 진리를 가르칠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떡 데려다 놓고 자기는 실컷 누워 잡니다. 실컷 누워 자고 오라 했으면 됐다 이래 놓으니까 그 구역장 자니까 자기도 자지 구역장 따라서 자지. 또 나중에 와 봐야 오라 소리만 하지 그에게 양식을 뭐 먹여 줘야지 하나도 안 먹여 준다 말이오. 이런데 어떤 사람들은 딱 요래 가지고 있다가서 아, 요거는 아무것이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요거는 아무것이에게 해당된다, 딱딱 고것을 딱 알아 가지고 가 가지고서 가서 슬그머니 '어제 주일날 말씀에 어떤 말씀이 있었지?' 이래 실실 말하면 제가 안다 말이오. 여기에 물으면 고 답을 제가 딱 하거든, '네가 잘 알았다' 벌써 그때 치료가가 네가 잘 알았다 실컷 그때 치료할 것인데 저는 모르고 있다 말이오. 네가 잘 알았다 이랬는데 한 삼사 일 지나고 나니까 고 병이 들거든, 고 병이 들면 '너 뭐라고 배웠지' '뭐라하면 어떻게 하지 안했습니까' '너 뭐 그래 해야지' 글쎄 그래 해야 될터인데 그 못하는 것을 제가 탄식을 하고 회개를 하지 그 걸 미리 안 가르쳐 놓으면 꼭 권찰님은 나에게 꼭 듣기 싫은 소리만 하고 날 저주나 하고 자꾸 그래 하네요.
임시 됐을 때에 고치는 법을 말해 주면 안돼요. 미리 그 사람을 지식으로 있어 가지고 지식으로 줘 가지고 그 사람의 지식이 되고 난 다음에 이제 성경에 뭐라고 말했지? 자기 지식이 자기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이 아 이거 틀렸다 이랄 때는 제가 틀렸다는 것은 제가 긍정하니까 고칠라고 하니까 대번에 고쳐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권찰들은 그래 그저 교인을 자꾸 이래 돌아다니면서 이래 슬슬 묻고 이러니까 아. 이러니까 그 교인들이 권찰 오면 재미가 난다 말이오.
권찰이 오면 '오늘 권찰이 와 가지고 나한테 뭘 물을라나 보자.' 뭐 물을라고 반드시 오면 시험을 친다. 물을 터이니까 한번 보자, 그래 와 가지고는 딱 권찰이 식구의 실력을 딱 알아. 이게 일학년인지 이 학년인지 실력을 딱 안다 말이오. 요 문제를 내면 백점을 맞을 거다 요 문제는 내면 오십점을 맞을 거다.
요 문제만 내면 빵점을 맞을 거다고 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백 점 맞을 수 있는 문제를 떡 하나 낸다 말이오. 그라면 딱 이래 말하면 '야, 너 그거 들었나? 이거 백 점이다 이야말로 그 목사님한테 가도 백 점이고 하나님한테 가도 백 점이다. 이 백 점이다.' 그 사람한테 살아 있는 그 부분 살아 있는 부분을 사기를 돋우어서 살아 있는 부분에 힘을 꽉 준다 말이오. 힘을 꽉 주고 난 다음에 이라면 이 교만할 터이니 차고 다음에는 또 살그머니 하나만 그 오십 점밖에 안 된다 말이오. 그래 요 딱 이라면은 암만 요리조리 말하면 고래 밖에 못 하거든.
그래 내가 있다가 고걸 요렇고 요렇고 요 옆에 주변을 살살 요래 말하면 '아, 그겁니다.' 뭐? 그 말 새로 한번 해봐.' 잘못됐습니다. 이겁니다.' '어 아까 말한 거는 오십 점인데 요번에 말 한 거는 백 점이야.' ' 이러면 딱 정신을 차려 가지고서 욕심이 딱 내 가지고 눈을 떴다 그 말이오. 눈이 떴오.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그만 이만하면 됐다 이라지마는 몇 번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그래 놓으면 교만해지니까 자, 이제 뭐 내가 뭐 설교 다 아는 거, 다 아는 내가 다 안다 백 점이다 백 점이라면 안 될 터이니까 또 모를 거 하나도 모를 거 딱 물어서 '그 날 요런 말씀 요런 말씀했지? 요 말씀 무슨 말씀이지?' 깜깜하다 그 말이오. '고 요 말씀은 무슨 말씀인지 말해 봐라' 요리 저리 물어도 몰라, '요 말씀이 요렇고 요렇고 요런 거 아니가?' '아. 그겁니다.' '거기에 대하여는 네가 빵점이야' 이러니까 빵점이야' 이러니까 백 점도 맞았지 권면 받아서 오십 점이 백 점도 됐지 빵점도 맞았지 이래 놓으니까 정신이 또록또록 차려집니다.
이제는 주일을 의례히 기다립니다. '오늘 주일날 또 내일 새벽에 어서 이제 가 가지고서 또 딱 정신 차려 들으니까 요러니까 요거 요거 오늘이야 내가 권찰님이 와서 물으면 내가 백 점 모든 걸 백 점하지' 딱 요래 가지고서 들으니까 들으니 쏙쏙 속에 들어오고 그만 그 말씀이 들어오니까 속에 있는 마음에나 고기 덩어리에 있는 마귀 물들은 거, 마귀의 감염된 이것이 다 자꾸 죄악에 물든 것이 자꾸 빠져나간다 말이오. 빠져나가고, 이래 가지고서 그만 귀가 열렸어 귀가 열리니까 귀가 열리고 보니까 아, 그전에는 설교할 때에 잠이 오는데 이제는 설교 말씀이 알아들을 만 하고 재미가 있고 재미가 있다. 그래 놓아 귀를 열어 놓으면 딴 데 못 가요. 귀를 열어 놓으면 제가 신신학에나 그런데 못 갑니다. 또 모두가 다 합리주의, 그런데 인본주의 그런데 못 가요. 이래 자꾸 길러야 돼요.
이러니까, 요새는 조금 슬그머니 그랬더니마는 이 권사님이 어제도 보니까 뭐 ○○○ 권사님이 뭐 데리고 새김질한다 하는데 이거는 아무래도 안 하면 안 되니 해야 될 터이니까 골탕을 집어먹을 만치 그래. 그 새김질 하는 거 거기에다가 너무 많이 하지말고 할 수 있는 일 더러 맡겨요. 맡겨 놓고 뒤에 떡 앉아서 밑에 그 새끼 권찰 딱 시켜서 맡겨 놓고 뒤에 떡 앉아서 이래 가지고 있다가서 나중에 딱 하고 난 다음에 뭐 한 마디 두 마디 이거 이거는 여기에서 보충을 해서 요렇고 요렇고 요렇게 하면 '아이구야 우리 권사님은 더 이거네' 이래 가지고서 이라면 또 지도를 잘 받는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어쩌든지 청년의 행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함으로 모든 것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함으로 모든 것이 깨끗해져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첫째 구별할 것이 씨냐 양식이냐 그것을 구별해야 됩니다.
이것을 서부 교회에서 제가 한 두 주간 전인가 언제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이것이 생각나서 아무래도 이것을 가르쳐야 되겠다. 하면서 자꾸 다른 것이 급해서 그걸 가르치지를 못하고 밀려 나왔는데 오늘 여기에서 말하게 됩니다. 그때 생각한 것 딴 게 아니라 다른 것보다도 이 씨와 양식을 구별해야 되지 씨와 양식을 다 혼합시켜 가지고서 우리 교인들이 다 경제에 타격을 맞고 있다. 그 씨를 심을 거는 그 씨가 들어. 씨가 뭐이냐? 써가 들어서 남의 구원도 되고 나의 생명도 되고 나의 치료도 되고 나의 화를 면하는 것도 있고 이 씨가 지금 무슨 큰 역사를 할 건데 이놈을 딱딱 집어먹으니까 남의 생명의 피를 쪽쪽 다 빨아먹는 것이 돼 놓으니까 이래 놓으니까 하나님 앞에 저주를 진노를 안 받을 수가 있어야지. 이러니까 생활이 다 곤고하다 그 말이오. 씨와 양식 요것을 똑똑히 구별해야 됩니다.
내가 내게 있는 그 지혜와 총명이라면 지혜 총명 고것을 나를 위해서 사용할 것도 있고, 이 지혜 총명을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씨로 주는 것이 있다 말이오. 내 지혜 총명을 조금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면은 그 사람이 죽을 것을 살고 함정에 빠질 것을 일어나고 큰 대 화를 만날 거 평탄해지고 자꾸 이래지는 이거 뭐 전체가 사람 살리는 것인데 그게 뭐이냐? 오병이어 한가지라. 오병이어 오병이어가 찍해야 오병이어는 그 아이 하나의 도시락밖에는 안되는 것 이지마는 그거 주님의 손에 일단 잡혀 가지고 그게 바로 사용이 될 때에는 오천 인이 먹고도 남았다 그 말이오. 네게 있는 이 명철에 명철에 이것에 그 양식 부분 떼어놓고서 씨로 심어야 될 씨부분. 씨부분 내게 있는 명철의 씨부분 그것이 다른 데 가 가지고서 무슨 오병이어가 돼서 오천 명을 먹고 남을는지 뭐 만 명이 먹고 남을는지 모르는데 그렇츰 큰 것을 내가 싹 도식을 해 버려 가지고 이러니까 남의 생명을 잡아먹은 것이요 남의 행복을 잡아먹는 것이요 남의 화를 멸하는 모든 치료비를 제가 다 닦아 먹고 병들어 죽구로 만드는 것인데 이거 안 된다 그 말이오.
우리의 씨와 양식을 요것을 똑똑히 구별해야 됩니다. 권세도 그렇고, 지 혜와 총명도 그렇고, 명철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믿음도 그렇고, 하나님의 지식도 그렇고, 이제 자기의 재산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뭐 모든 것 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다 두 가지로 구별부터 해라. 여기에 제일 중요합니다. 구별 할 것, 씨와 양식을 구별할 것. 씨와 양식을 구별하는데 구별하고 난 다음에 씨는 심어야 되고 양식은 자기가 사용해야 됩니다. 씨는 심은다는 것은 심으면 심으면 일단 심으면 첫째 순서가 내놔야 됩니다. 심은다는 거는 내가 거머쥐고 씨를 거머쥐고 있는데 씨를 이래 뿌려야 심어지지 씨를 거머쥐고 있는데 뭐 심어지나? 거머쥐고 있는 거 뿌려야 된다, 내놔야 된다 말이오.
흩어서 가난한 자에게 줬다 그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물위에 뿌리는 자는 어디 있지?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자는, 어? 어데? 어? 전도서 몇 장이야 그러면 11장? 1절 한번 읽어봐. 네, 그것이 내나 심은 다는 것을 그랬는데 그 전에 그 구역에는 어찌 됐는고 모르겠어. 자꾸 이거 번역을 해 쌓아서 뭐 잘못된 것도 많애.
그 ○○○목사님이 해방 직후에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톨톨 털어 가지고서 그때 뭐 착실하게 지냈습니다. 재산이 있는 것을 톨톨 털어 가지고서 그때 부자로 지냈어요. 톨톨 털어 가지고 요 성구를 보고 네가 가진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그러면 몇 날 후에 다시 찾으리라 또 가난자에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꾸어 주는 것이라. 또 그 말씀이 있지요? 예? 하나님에게 꾸이는 것이라. 그 말씀 읽고 ○○○목사님이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다 털어 가지고서 대구역에서 만주서 일본에서 교포들이 돌아오는데 다 빈 손 쥐고 전부 그 관동이니 뭐 만주니 저런 데서 모두 이제 해방이 되니까 돌아오는데 그 돌아오는 동포들이 아무것도 없고 빈손으로 다 그래 돌아온다 말이오. 돌아올 때 그때 자기 재산을 털어 가지고서 그때에 처음에 도시락 한 개 계란 하나 또 뭐 무슨 음료수 물 한 컵 이렇게 다 줬습니다. 대구역에서, 대구역에서 그래 줬는데 처음에 자기 있는 재산을 다 들여 가지고 줬는데 그 재산이 떨어지기 전에 나중에 자꾸 들어와, 대구에 그 창고가 뭐 큰 게 있답니다. 그 창고 마지막에는 세 창고에 가득 차 쌓였더랍니다. 가득 쌓였어. 자꾸 주는데 어디서 들어오는지 들어와 가지고서 세 창고에 가득 차였어. 그 세 창고에 가득 차여서 그때 아주 ○○○목사님이 아주 유명하게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그만 그분의 말이라면 다 순종하고 어쩌든지 그분의 하는 일에 다 찬동해서 여기에서 저게서 자꾸 이렇게 내놔 가지고서 처음에 자기는 한 창고에 뭐 귀때기도 못 채웠는데 마지막에는 큰 창고에 계란, 그 뭐 식품, 쌀 이런 것이 가득 세 창고가 차였어. 그래 가지고 얼마든지 주고 이라다가서 마지막에 그것을 다 넘겨 버리고 이 정부에다가 넘겨 버리고 자기는 고려 신학교에 신학으로 입학하고 돌아왔습니다. 이거 좀 ○○○목사님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분이 처음에 시작할 때에 이 성구를 읽고 시작을 했어요.
우리가 두 가지로 구별하고 난 다음에 심으는 것은 심으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뭐 배가 고프니까 뭣인가 어떻게 배가 고프니까 안 됐다 생활이 어려우니까 안 됐다 그렇게 그걸로 한 것은 주님에게는 상관이 없어요. 상관이 없어요. 주님에게 꼭 꾸어야 됩니다.
네가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여호와에게 꾸어 주는 것이라 그 말 있지요? (찾았어? 여호와에게 꾸는 것이라 아직 못찾았어 못찾았으면 그만 됐어.)(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19:17) 여호와에게 꾸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약을 보고 그 사람들을 아무리 배고픈데 육체로 암만 도와봤자 그게 소용없소. 그러기 때문에 목적은 뭐이냐?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 버려서 곤고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는 것은 그것으로 미끼를 삼고 그것으로 도화선을 삼아 가지고 그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해서 하나님과 연결해서 모든 것이 충만하신 그 분에게 연결해서 그분들을 금생과 내세에 영원히 완전이 가난이나 곤고나 어려움을 완전히 벗겨 주는 완전히 해방시켜 주는 그 목적에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에서.
그러니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람 구원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개적으로 뭣을 이렇게 도와 주든지 혹은 단체를 통해서 도와 주든지 혹은 그 사람에게 여러모로 뭐 치료를 해서 준 다든지 또 어려움을 면제해 준다든지 그 사람에게 살길을 좀 열어준다든지 이렇게 그 사람을 구원 운동하기 위해서 그 하는 그 속에는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피의 증거라 말이오. 피의 증거로 거기에 성령과 진리가 같이 그것을 통해서 그에게 전달돼 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안돼요.
이러기 때문에, 천주교에서 이렇게 많은 구제를 하고 있는데 천주교는 여러분들이 자세히 보면 알 것입니다. 천주교는 사람에게 구제하는 이거는 참 대자 대비, 불교에서는 대자 대비 하는 거와 같이 사람에게 자비롭게 사람을 구제한다는 거기에서 그런 것이지 이로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그들에게 전달해 줘야 되겠다. 하는 그것은 좀 빈약합니다.
남의 하는 일을 똑똑히 알지 못하지마는 그것은 빈약해. 사람 그 사람들은 인간을 구제해야 된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구제해야 된다 하는 여기에 주목적을 두지 인간에게 복음을 줘야 되지 복음 안 주면 소용없다 그 속에 핵심이 복음이 되어 있지 안하고 인간을 구제한다는 것, 자비성 그것이기 때문에 먼저 그 교황이 와 가지고도 그분의 하는 것을 전부 총합 해 가지고서 똘똘 뭉치면 그거는 자비의 사람이라, 화평의 사람이라, 구제의 사람이라 인자의 사람이라, 사람을 구제하는 사람이라. 그러나 그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에 역사라는 것과 이 역사를 가루어 막고 있는 이 모든 이단들을 다 치는 것과 이 진리를 또렷이 불거트려서 복음을 또렷이 불거트리고, 복음에 방해하는 거 다 제거하고 복음을 힘입게 활발하게 한 것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거요.
천주교가 지금 하는 거와같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재미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아원 하는 사람들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아원 하는 것이나 양로원 하는 것이 사람들이 이렇게 불쌍하니 사람들을 구제한다 하는 그 뜻에서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다만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이 면으로 저 면으로 하기 때문에 여러면으로 입체적으로 사람을 구원해야 되기 때문에 이것도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이 사람을 구원해서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일편 단심 그 목적을 두고서 그것을 위해서 한 방편적으로 외부에 이런 것을 하는 것은 돼도 그 사람 구원하는 그것이 주 목적이 안돼 가지고 있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생명 역사가 안 일어납니다.
양로원이나 고아원이나 보면 사람 구제한다는 그것이 주로 돼 가지고 있고 복음의 역사를 주로 되지 안한 그것은 차차 차차 쇠해져 버리고 나중에 가서는 보면 사기 협잡군이 돼 가지고서 이제 그 기관을 통해서 큰 착취의 죄나 짓지 무슨 뒤에 좋은 결과를 맺지를 못하게 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자세히 보면 알 것입니다.
우리 남한에 한 은세 장로님이라는 장로님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그 속에 인간을 구원해야 된다는 그것이 그 속에 골자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그 양로원이 신망애 양로원이 하나 있었고 또 애광 양로원이 하나 있었는데 애광 양로원은 지금 어찌 됐는고 모르겠습니다. 애광 양로원 없어졌지요? 아, 있습니까? 아직 있기는 있습니까? 아 그때 그 뭐 땅은 ○○○교회 가 다 샀다 하더니마는.
그래서 우리는 이모로 저모로 어쨌든지 사람을 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면 인간은 구원할 수가 없고, 대속의 공로로 구원하는 데에는 그 뒷받침 이 진리와 성신의 감화가 뒷받침되지 안하면은 대속의 공로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를 안합니다. 받아들이도록 중간 역할을 해 가지고서 힘쓰는 것이 성신의 감화요 또 진리라 말이오.
그러면, 이 두 가지로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서 다만 외부의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외부면을 이 꺼풀을 곱게 포장을 하고 장식을 하고 그 속에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를 그 속에 넣고 껍데기는 그 구제니 또 양로원이니 고아원이니 나병원이나 이렇게 하면서 그 속에는 요 세 가지가 핵심이 돼 가지고 하는 것은 다 성공을 했습니다.
제가 그 ○○교파에 있을 때에는 그저 문둥이 교회라 하는 것은. 저기에 어데 전라도 어디 있지? 그 큰 애양원 말고 소록도, 소록도 거기에는 내가 안 가 봤어요. 거기에는 안가보고 다른 그 나환자 교회에는 뭐 골짝 골짜기 거의 다 갔습니다. 다 갔는데 보면 그 나환자 수용소에 핵심이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가 핵심이 되어 있는 것 있고, 하나 명예주의로 그 허영과 허욕심을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것도 있고 허영과 허욕심을 하고 있는 것은 가 보면 벌써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것이 환하게 보여지고.
그게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은 하나인데 이 셋이라야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인데 이 셋의 운동을 위해서 자기의 가진 거 몸이나 정성이나 지능이나 물질이나 지위나 권세나 이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거 이것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 그것이 심는 것입니다. 심는 것.
어떤 사람이 자기 권세 있는 거, 그 권세 하나 가지고 자기 권세 그것 가지고서 이제 그것에 조금 돌봄으로서, 돌봄으로서 아주 활기 있게 나가는 수가 있어.
돈이 아니라도 돈이 아니라도 만일 내가 여기에 거창 군수가 됐다 한다면 거창 군수가, 양혜원, 양혜원 있지요? 그 양혜원 그런 데라도 떡 한번 가 가지고 말이지요. 이 군수가 떡 가 가지고서 '아이구 수고하십니다.' 그 책임자에게 '수고하십니다.' '형제들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별로이 도와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어쩌든지 하늘의 구원의 소망만 보고서 달리십시오.' 한번 떡 가서 방문했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아이구야 군수님이 군수 영감님이 우리에게 오셨더라.' 그들에게 뭐 사기가 충천할 거라 말이오. 충천할 것.
이제 여러가지 그런 것으로 또 이런 것으로 뭐 권세든지 지혜든지 지식이든지 모두가 다 이 복음 운동을 위해서 자기의 씨와 양식이 다 있는 것이지 씨와 양식이 없는 선물은 없기 때문에 씨와 양식이 다 있으니 그것을 구별해 가지고 양식은 제가 사용하고 씨는 이 복음을 위해서 바치는 요것만 구별하면 마구 하나님이 축복의 덩어리로 옵니다. 막 축복의 덩어리가 와요 아주 이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 바치는 그것이 있고, 하나는 또 이 복음 운동이라 하면은 벌써 복음 운동이라 하면은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세 가지 생명 운동을 가리켜서 복음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 운동을 위해서 내가 자원적으로 내가 거기다 바쳐서 이렇게 하는 그 길이 하나 있고. 심으는 방법이 또 하나는 이 복음 운동을 위해서 나는 바치기 싫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꾸 말을 해서 다른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 명령에 순종해서 내가 바치는 그게 하나 있고. 또 내가 이 운동 때문에 바쳐 보지도 못하고 운동 때문에 강제로 뺏겨지는 것. 이 운동 때문에 강제로 뺏기는 것 있고, 또 이 운동 때문에 그만 박살을 맞아 가지고서 완전히 깨져서 없어지는 것 있고, 깨진 것 있고 뺏기는 것 있고 다른 사람의 권유를 따라서 한 것 있고 제가 자원적으로 한 것 있고 이래 있는데 이 네 가지가 있는데 네 가지가 있는데, 일 호는 자기가 자원적으로 한 것이고. 이 호는 다른 사람이 나는 몰랐는데 다른 사람이 권유를 해 가지고서 이래 하라 하는데 그 가만히 살펴보니까 나는 몰랐으니까 다른 사람이 깨우쳐서 다른 사람의 권유를 따라서 알아보니까 그 참 해야 되겠다. 싶어서 하는 다른 사람의 권유에 따라서 한 거 있고, 그것 때문에 하지도 못하고 그것 때문에 뺏긴 것 있고 나중에 하지도 못하고 그것 때문에 박살 난 것 있고 그러면 일 호 이 호 삼 호 사 호인데 어느 것이 제일 가치 있는 것입니까? 자, 일 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일 호, 또 이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없고, 그러면 삼 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사 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어렵기는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어렵기는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어느 것이 어렵겠습니까? 어렵기는 어떤 것이 어렵겠소? 사 호가 제일 어려운 것이오. 사 호가 제일 어려운 것이오. 제가 자원해서 하는 거는 쉽지마는 그것 때문에 희생을 당할 때에는 이거는 주를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이래 가지고서 그게 대해서는 마구 그걸 파괴 안 당하려고 오만 힘을 다 씁니다. 오만 힘을 오만 수단 방법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때에 깨끗이 이 복음을 위해서 파괴당할 때에는 이제 복음을 위한 것이니까 이러나 저러나 복음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주여. 이제 복음을 위해서 나는 이것을 이렇게 바치는 길이 있는데 그래 바치면 좋지마는 이거는 그래 못 하니까 할 수 없이 이거는 복음을 위해서 이거는 깨지고 이거 깨져도 나는 복음을 살리겠습니다. 그거 깨져도 복음을 살립니다. 그거 안 깨질라고 복음을 양보해. 그때 대개 보면 내가 자원해서 할 사람들 넉넉히 있어도 자원할 만한 그런 신앙은 있어도 신앙은 있어도 그 복음 때문에 그것이 박살이 날 그때에는 복음을 내놓더라도 박살 난 그걸 구제하려고 애를 쓴다 그 말이오.
그때에 내가 이걸 깨져도 복음을 내대로 아껴야 되겠습니다. 하고 복음을 아끼면서 그거 깨지면서 복음을 아끼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어렵고 상급이 제일 큽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요? 뭐 이거 잘 이해가 안 될 것 같은데 손들라 하고 보니까 영 허무한데 자기가 이 복음 때문에 그것이 뺏겨지게 될 때에 뺏겨지게 될 때에 복음 때문에 뺏겨지니까 어쩌든지 복음 때문에 없어지니 내가 써서 없어지나 뺏겨 없어지나 이제 그거는 복음 때문에 없어졌으니 주님 때문에 없어진 것이 그것도 고맙다 하고서 그럴수록 이 복음을 조그만치라도 흔들고 그걸 안 뺏길라면 복음을 좀 흔들고 내놔야 될 때에 복음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니까 복음을 좀 내놔도 그걸 간직하려고 그것의 가치를 복음보다 크게 여겨 가지고서 복음을 희생시키고 복음을 희생시키고 그것을 보존시키는 그런 방편을 취하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에 복음을 위해서 그것을 다 던져버리는 것 복음을 위해서 다 파괴당하는 것 그래도 파괴당하면서 복음을 보호한다는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사 호가 제일 어렵습니다. 사 호가 제일 어렵고 제일 가치 있고, 일 호가 제일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어? 이거는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목회하는 사람들은 해 보면 알아요. 제 신명이 나 가지고 제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얼마든지 잘 하지마는 제가 이 복음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하기 싫어해요.
그 사람이 제가 그 속에는 명예나 영광이나 제 소욕이 있어, 제 주관이 있기 때문에 제 주관에 맞고 기분 좋으니까 하지마는, 제 주관이 바싹 깨지고 명예도 영광도 존귀도 아무것도 없이 희생당할 때에는 다 안 당할라 해요. 이래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인데 그게 이해가 안 되면 아직까지 신앙생활에 감감한 어린 아이의 신앙생활이오. 고걸 좀 깊이 좀 생각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올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사람 이 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내가 복음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 심는 것이라. 심으면 심은 추수의 효과는 세상에서 받느냐, 세상에서 받지 않는다, 어떻게 산 것의 댓 가를 썩은 것으로 받을 수가 없다, 완전한 것의 댓가를 불완전한 것으로서 받을 수가 없다, 축복의 댓가를 저주의 것으로 받을 수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심은 것은 일단 심은 것은 무궁세계의 의로운 것으로 다 받게 된다. 그러면 심을 때에 다시 더 그와 같은 것을 많이 주시는 것은 그것의 댓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해서 또 심으라 또 심으라 새 씨, 새 양식을 주는 것이지 그 댓가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새 씨와 새 양식으로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연보 제도를 연보 제도를 하나님이 내신 것은 하나님에게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주면은 또 심으니까 또 하나님이 주시고 또 심으고 양식 먹고 또 주니까 또 주니까 또 주니까 심을 거, 심을 거 심고, 먹을 거만 먹고 심으니까 또 주니까 이제 많이 주니까 자꾸 하나님이 자꾸 대 주고 자꾸 심으고 이라면 이제 하늘나라에 뭐이 쌓입니까? 어? 추수가 자꾸 쌓이요. 이러니까 이제 더 많이 하도록 하기 위해서 연보 제도를 냈다 그 말이오. 하나님의 무진장의 것을 사람에게 줘 가지고서, 사람이 하나님의 무진장의 것을 받아 가지고서 전부 제것을 만들고 무진장의 것을 받아 가지고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무진장 받아 가지고서 하늘에 저축하고 이래서 그 의가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제도를 내셨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걸 모르니까 망령을 부리고 씨까지 다 갖다가, 씨하고 양식하고 주니까 그만 씨를 줘놓고 주님이 '야 그 씨는 심으라 심으라' 하니까 '내게 내 손에 들어왔는데 심어요?' 안 심으고 요놈 똘똘 볶아 먹습니다. 심으지 않고 딸딸 그만 볶아 먹어 버려요. 볶아서 바작바작 깨물어 먹어 버린 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아이구 이놈 씨 주면 또 먹을 터이니까 이제 안 줘야 되겠다. 그만 안 주는 거야. 그래 놓으니까 남한에 있는 신자들은 다 생활이 곤고해요. 그것을 심으면 안 그래요.
그래, 요 보시오. '심는 자에게'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이것 때문에 연보 제도를 내놨다 그거요. 연보 제도를 내놨다 그 겁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그러면 자꾸 공 짜배기로 준다 공짜배기로 주는 것을 공짜배기로 주는 것을 자꾸 또 심으고 먹을 것을 먹고 이렇게 하면 자꾸 공짜배기로 또 주고 또 주고 그러면 은혜를 주고 주고 주고, 그 은혜를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한다 말이오. 또 주고 또 주고 자꾸 넘치게 해 줘.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 때문에 연보 제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것이나 저런 것이나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 것을 모르고 어떤 세상에게 받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행위입니까? 그게 간부 좋아하는 행위라 말이오.
간부 좋아하는 행위 그게 간부 좋아하는 행위라.
그러니까, 우리가 네 가지 그 조문을 우리가 삼은 것은 물질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죄든지 다른 사람에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죄를 회개해서 하나님에게만 받을 것, 우리가 받을 것, 또 보관주의를 회개해서 하나님이 보관하라는 것만 할 것, 제 마음대로 모두 지출하는 그 행실을 회개하고서 하나님이 지출하라는 것만 할 것. 또 제 마음대로 내것이니까 다 쓸게 아니라 하나님이 쓰라는 것만 사용하고 그 심을 것만 사용하고 그 심을 것은 똑 심으도록 구별해서 그래 할 것, 이렇게 두 가지 심을 거와 자기가 먹을 것 요 두 가지를 구별해 가지고서 심는 자에게는 또 주시고 또 주시고 자꾸 주어서 이제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하고 그 모든 것이 자꾸, 그래 이러니까 넉넉해집니까, 이래 자꾸 이래 하니까 넉넉해집니까, 줄어집니까? 넉넉해집니다.
넉넉해지는데, 사람들은 열 가지가 다 맞아야 될 터인데, 한 가지만 맞 춰 놓고 아홉 가지는 틀려 놓고 한 가지 맞았다고 맞아 가지고 다 안 된다고 자꾸 하는 것이지 안 되거들랑 하나님의 계약은 틀리지 안하니까 안 되거든 자꾸 고쳐요.
안 되거든 여기에 아마 아직 미정인가, 아직 미완성인가 보다. 미완성이니까 미완성 부분을 찾아 가지고 자꾸 수정하고 수정해서 완성만하면 하나님께서는 막 할렐루야! 자, 아나 하면서 턱 주십니다. 아나, 하면서.
우리는 어쩌든지 요 씨와 양식을 구별하는 요 일을 잘해서, 그러면 자기가 권세든지 지위든지 총명이든지 명철이든지 언변이든지 언변도 저 위해서 사용할 거 있고, 이제 또 씨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그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출하는 거기에 사용해야 된다 말이오. 사용하면 자꾸 그 언변이 자꾸 언변이 자꾸 더해집니다. 자꾸 언변이 더해져요.
설교하는 것도 하나의 언변인데 설교를 더 자꾸 잘하게 돼요. 자꾸 더 잘 해요.
더 잘하게 됩니다. 그라면 먼저 설교 잘했으니까 또 설교 잘한 다 해서 먼저 설교를 잘하고 알뜰히 하고 충성되게 한 그 값으로 설교하는 능력을 줍니까, 능력은 새 능력으로 줍니까? 여기 목사님, 새 능력으로, 이러니까 씨까지 다 먹어 버렸다 말이오. 씨까지 다 먹어 버렸어.
그만 목사가 심지어 하나님께서 지혜 총명 주니까 그 지혜 총명 가지고서 '선지자는' '선지자는' 어? 선지자는 뭐 어째요?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고' 이랬기 때문에 그만 씨를 마구 볶아 먹어 버렸으니까 그만 뒤에 안 줘요.
이러니까, 목사들이 하나님께서 그 특수한 은혜를 줘 가지고서 준 그것은 씨와 양식인데 그것을 구별하지 안하고 그만 그것 가지고서 이제 돈, 내가 보니까 사람을 만나 보니까 제가 지혜가 위에 있거든. 위에 있으니까 이것 가지고서 정치 운동하고, 세상에 취직 운동하고, 돈벌이 운동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그걸 구별하지 안하고 쓰니까 나중에 가서는 폭 망하게 돼 버리고 맙니다.
해방 직후에 해방 직후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귀중한 사업 큰 사업 그런 거는 지위는 전부 신자들에게 맡겼습니다. 믿는 사람이 맡아야 된다. 안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겸손해요.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는 다 이 체면도 없다,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리를 다 맡기니까 믿는 사람은 아무 자격도 없는 것이 국민학교 선생 노릇도 못 할 것이 그 대학의 학장으로 앉히려 해도 척 제가 들어앉고 어쩌든지 그때 주는 대로 받아 가지고 앉았다가 큰 냉면을 당하고 그래 가지고 모두 다 복음이 팍 끌어 묻혔습니다.
시골에서도 시골에서 처음에 예수 믿으니까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과 생활의 박력을 주십니다. 생활의 박력을 주시요. 안 믿을 때보다 생활의 박력은 있어.
박력을 주시는 것은 왜 박력을 주시느냐 하면은 의롭게 살려고 하니까 그전 박력 가지고는 의롭게 살면 밥을 못 먹을 거라 말이오.
새로 더 실력을 줬으니까 이제 의롭게 살아도 그전에 생활은 그 생활은 넉넉히 할 수 있도록 의롭게 살아도 살 수 있는 그것으로서 생활 박력을 더 많이 주니까 이걸 가지고서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해. 그 생활 박력이 내가 이만치 있는 것 보니까 이 시골에 있을 것이 아니라 중도시에 가도 내가 중견 인물은 되겠다.
이래 가지고서 거기에 가보니 가보니까 되거든, 이러니까 내가 저 한 도시에 가서 활동해서 내가 일류 상류가 되겠다. 그래 가지고서 다 나가서 신앙 팔고 막 망하고 말았다 말이오.
믿는 사람들이 촌 아니고 도시로 나가 가지고서 그렇게 잘못 악용해 가지고 되는 거 우선은 되는 것 같지마는 나중에 끝을 보십시오. 결과가 좋아야 좋지 결과가 나쁘면 안 된다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만일 시골에서 그래 가지고서 도시에 나와 가지고서 지금 돈이 많이 들어왔거들랑 어서 씨와 양식을 구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서 그 씨는 얼른 심으라. 씨는 저거 교회 가 심으든지 안 되면 여기에서 심으든지 여기에도 심으면 움이 잘나요.
여기에도 심으면 잘 될 수가 있어요. 여기에 심으면 이번에 여기 와 가지고 사람들 얼마나 구원합니까? 이러니까 뭐 저거 교회 하는 것도 내 교회 내 교회 만날 그것만 있는 것이니까 그저 어쩌든지 복음 운동을 위해서 투자할 때에 투자하도록 하십시오.
네, 다 같이 잠깐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