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위하여

 

1981. 1. 26. 새벽 (월)

 

본문:요한복음 10장 11절∼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에 양은 곧 구원 얻을 백성을 가리켜서 양이라 이렇게 비유했고 목자와  절도와 강도와 삯꾼은 양을 기르는 그 인도자들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도요 강도도 양을 인도하는 자요 삯꾼도 양을 인도하는 자요 목자도 양을  인도하는 자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절도 강도인지  삯꾼인지 목자인지 구별해야 되겠고 이보다도 자기 자신이 삯꾼인지 절도  강도인지 목자인지 구별을 해야겠습니다.

절도 강도는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는고 하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을 하는  자인지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오는 출입을 하는 자인지 이것으로 절도와 강도와  목자는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을 여기에 나타냈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하는 자는 목자요 문으로 출입하지 안하고 다른 데로 넘어 출입하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목자와 삯꾼은 무엇으로 구별되느냐?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려두고 달아나기 때문에 양들이 다 이리에게  삼켜지고 또 다 흩어져 버린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걸 보고서 삯꾼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증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삯꾼은 이리가 올 때에 양을 두고 도망을  치고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신을 가리켰는데 거기에 보면 이  12절에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했습니다. 그러면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려두고  달아나는 것이 그게 삯꾼이요 목자는 이리가 올 때에 달아나지 안하고 그 양을  지키는 것이 목자라 이렇게 여기에 표시했습니다.

그러면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말씀은 여기 있고 일반적인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하는 그 말씀이 여기에 명시되지를  안했습니다. 혹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 했으니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마는 인간이 인간 목자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온 자가 목자라는 이것은 예수님을 말씀한 것 아닙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하는 자가 목자라 하는 이 목자는 예수님을 가리킴이 아니고  예수님 외에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모든 목자들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는 선한 목자라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이래 놓고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이 소리를 안해 놨기 때문에 여기에서  ‘예수님만 목숨을 버리고 일반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보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에는 보면 그 친구는 다 양인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 그러면 여기에는 목자된 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이것이  최고의 사랑이라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일서 3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으니  이에서 사랑을 알고 너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씀해서 거기에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성경을 종합하면 선한 목자 예수님만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목자는 목숨을 버려야,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씀했는데  여기에, 여기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누구든지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하는 그 표본으로 말한 것이지 ‘예수님만 버리지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하는  목자는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안 버려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하는  자는 다 선한 목자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하는 자는 목자요 선한  목자입니다. 그러기에 이것 다 목자라. 목자인데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이 말씀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하는 자는 목자니 이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야 한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 말씀해 놓은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하는 것은 목적은 여기에 있는 것 아닙니다. 13절에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이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그러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지식적으로 예수님이 아버지를 알고 있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안다는 말입니까? 여기 지식적으로 아는 걸 말하는 걸 말하는 것 아닙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책임성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책임지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책임지고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한 몸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영원히 떨어지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일이 예수님의 일이요 예수님의 일이 아버지의 일이요, 아버지의  성공이 예수님의 성공이요 예수님의 성공이 아버지의 성공이요, 아버지의 것이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모든 지능이  예수님의 지능이요 예수님의 지능이 아버지의 지능이요, 아버지의 움직임이  예수님의 움직임이요 예수님의 움직임이 곧 아버지의 움직임인 서로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이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 안다는 것을 좀 깨닫기가 어렵고 믿기가 어렵습니다. 요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게 비유는 잘 안 되지마는 어떤 사람이 청년이 와 가지고서 상점에 외상값을  한 백만 원 지우고 갔습니다. 그 뒤에 그 아버지나 그 사장이 왔습니다.

‘아무것이가 와 가지고 여기에서 돈을 백만 원 외상을 지우고 갔는데 이 어찌  되지요?’ 사장이 있다가 ‘나는 그것 모릅니다.' 하면은 거기 대해서 책임이  없다 그말입니다. ‘백만 원 지우고 갔는데 이 어쩌지요?’ `예, 그것 제가  압니다. 내가 그것 압니다.’ 그말은 무슨 말이요? 갚아준다 말이요 안 갚아준다  말이요? 모른다는 말은? 거기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이요 안다는 말은 책임진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대한 모든 것을 다 책임집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한 모든 것을 다 책임집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상호 관계와 같은 요 관계가 예수님과 양과의  관계에 있는 것을 여기에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나도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요 참 무섭고 지극히  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들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제자들이. 요게  느껴집니까?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같은 관계를 성자 예수님과 우리와의 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여기에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만이 아니고 “양의  우리의 문으로 출입하는 자는 목자라.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양이  목자를 알고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양을 알고 양이 예수님을 아는 것과 같다, 양의 우리의  문으로 출입하는 그 목자가 양을 아는 것과 양이 그 목자를 아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아는 것과 같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이것은 느끼지를 못합니다. 무슨 말인지 느끼지를 못하요.

양심을 써서 깊이 생각하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원수인 그 미개국에 부강한 그 나라의 사람들이 가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미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양을 인도해서 양을 구출하느냐? 무엇 때문에  그들이 세상 모든 평안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양을 위해서 세상을 버리고,  소유를 버리고, 자기의 몸과 생명을 양을 위해서 다 투자하느냐? 그들은 수지  계산을 맞추지를 못해 그러냐? 그가 예수님과의 그 관계점에서 그러하냐?  예수님과의 관계점에서만 그런 것 아닙니다.

그들이 다 이렇게 하는 것은 “친구를 위하여 네가 목숨을 버리면 네게 이제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너를 친구라 하리니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너에게 알릴  것이니라”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이것으로 인해서 주님과 자기가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원인이요 또 자기와 그 양과의 관계가  성부 성자의 관계와 같은 이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세상 화려하고 평안한 것을 버리고, 자기의 부귀와  영광과 평강을 버리고, 자기의 일생 생애와 자기의 몸과 생명을 양을 위해서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양을 위해서 자기의 소유나 무엇이나 있는 것을  버린 것만치 투자한 것만치 그 양과 그 목자된 그와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같은 요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불변, 영원 불변 영원 부동의  이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요한복음 10장에는 자기와 자기가 희생하는 그 양과의 관계를 여기에  말해 놨습니다. 예수님과 양과의 관계, 양을 위해서 희생했기 때문에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진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는 말씀해 놨고, 요한복음  15장에는 목자가 양을 위해서 희생할 때에 그 목자와 그 목자의 목자가 되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지는 것을 그것을 거기에 발표했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이와같이 내  계명을 지켜서 목숨을 버렸으면 내가 이제 후로는 너를 종이라 하지 안하고  친구라 하리니 종은 주인의 집에 영원히 있지 못하지마는 친구는 영원히 함께  있나니 내게 있는 것을 너희에게 다 알릴 것임이라” “내게 있는 것을 다  너희에게 알릴 것임이라” 이 말씀은 내게 있는 것이 다 네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알린다는 말도 책임을 말합니다. 내게 있는 것은 다 너의 것이  되고 네게 있는 것은 다 내것이 된다. 너의 약점이 다 내 약점 내것 되고 나의  장점이 다 네것 된다.

이제는 너의 모든 점을 다 이것이 내것 된다. 내가 책임지겠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너의 것이 된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된 것처럼 너와 나와의 하나되고  너와 네 양과의 하나된다 하는 이 영원성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모든 소유를 버리고 시간과 정력과 일생과  생명을 버리는 것이 무슨 이유냐? 자기 이상의 관련된 이 결합 이것 때문에 하는  것이요 자기 이하의 결합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자기와의 이 결합이 이것으로 인해서 강하여지기 때문에, 이것만이  아니고 자기가 양을 위해서 버린 것이 하나도 허비되지 안하고 양과 자기와의  관련된 이 관계가 성부와 성자의 관련 같은 이런 관련이 맺어지는 이것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에게 있는 것을 투자하는 것은 이 투자로 인해서 양면이 영원  불변의 견고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자기와의 관계, 자기와 양과의  관계 이것이 변동이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벧전 1:24) 육체적으로  관련 있는 모든 것을 풀과 같애. 말라.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게 있어도 다  없어져.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는 말씀이 곧 너희에게 전한  이 복음이니라” 이 복음으로 맺어진 것은 영원합니다.

그런고로 자기가 직분 없이 한 사람 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심신을  기울이는 그것이 자라서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기울일 수 있는 데까지 자라가는  것인데, 기울이는 것, 또 자기가 직책을 가지고 보조반사니 반사가 돼 가지고서  양떼를 위해서 기울이는 것, 또 중간반 반사가 돼 가지고서 양떼를 위해서  기울이는 것, 권찰이 돼 가지고서 양떼를 위해서 기울이는 것, 교역자가 돼  가지고 양떼를 위해 기울이는 것이 뭣 때문에 기울여야 하는 그 원인을 이것을  잘 알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나와의 영원 불변의 결합의 친구를 맺는 것입니다. 친구를 맺는다  그말은 주님이 나 위해서 이미 목숨을 다 기울였지마는, 목숨은 최종의 것이  목숨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나 위해서 기울이는 인연을 맺습니다. 내가 양을  위해서 기울이는 그것은, 내가 양을 위해서 내 소유를 기울이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모든 소유를 나 위해서 기울이게 만드는 그 원인입니다.

내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주님이 당신의 최종 것까지를 나 위해서  다 투자해 주시도록, 앞으로 영원히 투자해 주시도록 인연을 만드는 것이요 이미  만든 인연 때문에 하는 것이요, 또 자기가 이렇게 투자하는 것은 양과 자기와의  영원히 성부 성자의 관련 같은 이런 관련이 맺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에 있는 것을,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시 투자하고 다시 얻기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위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같은 관계가 맺어지고, 나와  내 위에 있는 부자와 가난한 나와의 관계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같은 관계가  맺어지고 내 아래로 있는 그와 나와의 성부와 성자와의 불변 관계처럼 그와  영원한 불변의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상급이요 나의 기쁨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의 소유를 투자하기에 넉넉합니다. 투자할 만합니다. 이는  투자, 알면 안 할 수 없는 참 긴요한 일입니다. 허비가 아닙니다.

이러기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피곤치 아니하면”(살후3:13) 이렇게  똑똑히 깨닫는 이 깨달음에 입각해 가지고 하는 자는 피곤할 수가 없는 것이  바른 깨달음이라 그말입니다. 바로 깨달으면 피곤할 수가 없다는, 다 바쳐도  유위부족으로 느껴지는 그것이 이 사실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양과 목자의 관계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 같은 이  관계가 맺어지는 요것을 여러분들에게 지금 내가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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