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6 15:15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1987. 5. 3. 주일새벽
본문:사도행전 24장 15절∼16절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이번에 공과가 세번째지? 두번째야? 양심에 대해서 주일학생들을 가르치기로 작정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도 가르쳤고 그러면 이번 주일 가르치면 두번째 가르치는데 먼저 반사 선생님들이 양심대로의 생활을 할려고 애를 쓸 때에 양심대로 생활하게 하려고 책임지신 성령님께서 그 사람과 같이 하십니다.
우리 구원을 완성하려고 책임지신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에 성령님이라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역사하기로 그렇게 작정된 것을 성경에 선포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구원을 완성시키려고 책임지신 하나님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런고로 가르치는 내가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힘을 써서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 내가 가르치는 데도 성령님이 함께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님을 배반하고 입으로만 가르치면 거게는 인간의 말만 움직이지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자의 구원은 비판적인 구원이며 또 평가적인 구원입니다. 비판적인 구원이라 말은 아무리 이렇게 놓고 따지고 또 구별하고 아무리 시비를 해 봐도 제일 옳고 바른 것이다, 옳고 바른 것이다 하는 것이라야 됩니다.
기독교는 그저 하나님이 이 도를 증거했기 때문에 그 권세를 가지고 눌러서 처리하는 이 세상 권세와 같지 않습니다. 이북에는 김일성씨의 그 하는 일이 옳고 발라 그런 것이 아니고 세력과 강제와 그런 것을 가지고 하니까 사람들이 못 견뎌서 그 복종하고 또 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은 다 그러한 세상입니다.
하늘나라도 하나님이 권세가 크기 때문에 그분이 주장하고 그분이 역사하는 일이니까 아무도 막지 못하고 그 권력에 따라서 그렇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늘나라는 어데까지나 비판적입니다.
비판적이라 말은 따져보고, 비교해 보고, 대 보고, 또 변론해 보고 아무리 해도 그게 옳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제일 그 이상 옳은 게 없고 가장 완전하고 조그마치도 틀림이 없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구원이지 무슨 권력으로나 사정으로나 방법으로나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다. 기독교는 절대 비판적입니다. 요거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삐뚤어진 일에는 하나님께서 절대 찬성을 안 하십니다. 할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늘나라는 절대 평가적입니다. 평가적.
평가적이라 말은 ‘요거보다는 요게 그래도 가치가 더 있다. 조거보다는 요게 가치가 더 있다.’ 모든 존재들의 가치를 비교하고 비교하고 비교해서 ‘요것이 제일 가치가 낫고 옳다’ 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것을 그대로 존재케 하시고 건설하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옳은 거, 제일 가치있는 거, 비판적이며 평가적인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그 사람이 옳게 할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가진 지식이 삐뚤어지면 옳게 될 수 없고 또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이 온전치 못하면 옳은 것을 가지고 행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전지하신 지혜로 우리에게 옳고 바르게 선포해 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전지자가 비판하고 이래 가지고 요것이 제일 옳고 하후하박이 아니고 하나님이 권세 있다고 권세 가지고 누르는 게 아니라 이것은 아무리 비판해 봐도 요것이 제일 옳고 참되고 바르다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또 수많은 가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게 말하면 땅에 있는 가치 하늘에 있는 가치, 없어질 가치 또 없어지지 안하고 완전 영원한 가치, 이 가치를 둘로 말할 수가 있고 또 피조물들의 힘으로써 만들어 놓은 가치가 있고 창조주의 능력으로 만들어 놓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가치와 가치를 서로 대결하고 비중을 달 때에 피조물의 만들어 놓은 것보다 창조주의 완전자가 만들어 놓은 것이 그것이 옳고 바르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 마련해 가지고 얻어 가지고 갈라고 하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기독자의 구원은 비판적이며 평가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제일 요구되는 것이 뭐이냐? 완전한 지식이 요구됩니다. 완전한 지식이 요구되는 데에는 완전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곧 신구약 성경 지식 외에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완전한 지식을 가졌으니까 그다음으로 요구되는 게 뭐인가? 비판적인 나라요 평가적인 나라니까 완전한 지식이 제일 요구되고, 완전한 지식이 제일 요구되고 그다음에는 뭐이 요구되는가? 완전한 지식을 가졌으니 완전한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참되게 가치있는 것을 자기가 취하고 마련하고 이 도리를 자기가 쓰는 것이 그다음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비판적인 나라인데 제가 비판적으로 ‘이것보다 이게 옳다’ 비판적으로 어떤 것이 와도 `그건 틀렸다' 할 수 없는 그게 우리 구원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 얻었다 하는 것이 다른 지식이 와 가지고 ‘그것은 틀렸다, 이것 보라. 이거와 그와 비교하면은 이게 옳으냐 그게 옳으냐? 어느 게 옳으냐?’ 만일 기독자의 구원이라는 거 그것보다도 옳은 것이 있으면 기독자의 구원은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고 멸망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든 움직임과 모든 지식과 비교해서 제일 비판적으로 ‘이게 제일 옳고 바르고 참되다’ 그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독자의 구원이요, 가치적으로도 ‘이것보다 이것이 더 가치 있다. 이게 더 귀하다.’ `이것을 두랴 저걸 두랴?’ 모든 존재들이 ‘그것보다는 이것을 둬 둬야 되겠다.' 선택할 때에 모든 것을 가치를 비교하고 비교하고 볼 때에 모든 가치보다 이것이 제일 온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리 공평으로 보든지, 또 장구성을 보든지, 또 그 본질과 본성을 보든지, 그것이 모든 대외에 대해 가지고 관계되는 그 효력을 보든지 아무래도 이것이 제일 가치있다 한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하늘나라요 기독자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데는 첫째로 뭐이 필요합니까? 첫째로 필요한 것은 올바른 지식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지식.
또 둘째로 필요한 거는 뭐이냐? 암만 올바른 지식을 자기가 가졌다 할지라도 그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참되게 제일 가치있는 것을 취해서 할려고 하는 요 양심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 둘째로는 양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셋째로는 뭐이 필요하냐? 양심대로 살라고 할 때에도 거게서 방해물들이 굉장이 많습니다. 방해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옳은 거 외에 삐뚤어진 건 천도 만도 넘은데 그 전부는 다 방해물들입니다. 제일 옳은 것 하나 외에 거는 전부 방해들입니다.
방해들인데 방해를 누가 제일 많이 하는가?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방해하는 것은 나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방해할 것이며 접하지 안한 사람이 어떻게 방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건이, 나와 가까운 물건이 이런 것들이 내가 옳고 바르게 할려고 할 때에 하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방해할 때에 그때에 우리가 방해를 받으면, 그 방해를 받으면은 방해받은 마음을 가리켜서 무슨 마음이라고 공부했습니까? 화인맞은 양심. 화인맞은 양심. 방해를 받는 양심은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만일 제가 비판을 할라고 할 때에 사람에게, 사람의 방해를 받아서 자기 양심대로 못 합니다. 양심대로 하는 게 뭐인데? 자기가 옳고 바른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뿐이라는 것을 자기가 판정한 자가 기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니 하나님의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할려고 하는 요것이 양심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가 좁으니 ‘요면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겠다. 요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면에 대한 지식을 알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양심의 노력이요, 그면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 보고 ‘요게 옳다’ 확고하게 알고 난 다음에는 옳고 바른 대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지식대로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는 비판적이요 평가적의 나라기 때문에 올바른 지식이 첫째로 중요하고 둘째로는 올바른 지식대로 바로 하려고 애를 쓰는 양심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올바른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은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고 하는 그것이 없으면, 양심의 역사가 없으면 그것도 다 허사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무엇이 필요하느냐? 양심이 화인맞지 안해야 된다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양심대로 살라고 할 때에 옆에 물건이나 혹은 사람이나 어떤 것이라도, 인정이나 감정이나 혹은 나와의 무슨 잘못된 원수 이런 것이나 뭐 어떤 것이든지, 무슨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나와 친한 사람이나 나와 원수된 사람이나, 또 내가 평안한 것이나 고난스러운 것이나, 평안도 방해합니다. 평안도 양심대로 할라고 할 때에 양심대로 할라고 하면 평안 그것이 절단나는 수가 있으니까 평안 그것을 절단내지 않기 위해서, 또 고통도 양심대로 하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고통이 들어서, 고통이 되니까 양심대로 못 하는 거, 또 자기가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 고통에 충격받아서 안 되는 거, 어쨌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옳고 바르게 할라는 요것이 양심인데 양심이 어떤 것에게 충격을 받아도 받으면 그 양심은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셋째로 중요한 것은 화인맞은 양심이 안 돼야 된다 하는 요것이 셋째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넷째로는 뭐이 중요하냐? 넷째로는 단행입니다. 넷째로는 단행. 넷째로는 단정을 짓고 행하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단정이 필요합니다.
다섯째로는 뭐이냐? 아무리 옳고 바른 것이라도 그것이 다 시간이 있고 거기에 필요로 하는 그 모든 순서가 있는데 자기가 아무리 그렇게 단행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때가 차지 안하면 안 됩니다. 때가 차야 됩니다.
농사 짓는 사람도 그 때가 차야 열매를 맺어서 거둘 수가 있고 공부하는 사람도 때가 차야 그 순서에 진학해 가지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 때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내가 다섯째로는 필요합니다. 인내가 그다음으로는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 생활은 되는 것인데,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이 지식을 가지고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씁니다.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면 누구를 찾아가게 됩니까?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면 누구를 찾게 되겠습니까? 옳고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옳게 바르게 할라고 요 양심 쓰는 요것을 하지 안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제대로의 옳은 것을 찾아갈 수 없고 또 더군다나 더 완전이신 하나님은 찾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인들은 불교가 말하는 불교 지식대로의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가기 때문에 그는 순진한 불교인이 돼 버리고 맙니다. 공산주의는 순진한 공산주의가 되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은 종류가 많다.
양심대로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양심의 종류가 많은 것이니까 양심대로 해도 올바른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건 다 삐뚤어지기 때문에 올바른 지식은 뭐이냐? 하나님의 지식 하나뿐이니 기독교 외에는 올바른 지식을 가진 자가 없고 또 올바른 행위를 비판적으로 평가적으로 해도 정죄받지 안하고, ‘이거는 틀렸다’ 정죄받지 안할 수 있는 그런 비판 평가의 그 생애를 이룰 자는 참된 기독자뿐인 것입니다.
이런데 기독자들이 왜 이렇게 비판적으로 평가적으로 모든 만물이 그 앞에는 입을 벌리지 못하는데, 지금은 거짓부리들이 다, 마귀 세상이기 때문에 거짓부리가 힘을 씁니다. 이렇지마는 앞으로 그런 모든 거짓된 세력이 일단 중단을 하고 비판과 평가의 그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인데 심판에서 비판과 평가로 이래 나아갈 때에 거기에 정죄받으면, 정죄는 뭘로 하는가? 비판해 가지고 ‘요것은, 요것 봐라. 요것이 옳고 요건 틀리지 안했느냐?’ 그 정죄받는 것이 심판이오. 또 가치적으로 ‘이것은 요면은 좋지마는 조면이 가치가 없다. 조면에 불리하다. 이거는 모든 존재에게 다 유리하기 때문에 가치있다.
이거는 피조물만 아니라 창조주도 기뻐하기 때문에 가치있다.’ 이렇게 평가적으로 해 가지고 되는 이것이 기독자의 구원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양심 가지고도 옳고 바른 것을 찾지 않는 그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바른 것을 찾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양심을 쓰지 않는 자는 그는 공중에다가 활을 쏴 놓고 잉어가 떨어지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자와 같은 자입니다.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자기 어두운, 아무리 인간의 빛인 이 양심이 밝다 할지라도 참 그것은 자연의 빛이지 완전치 못한 것인데 자기 양심으로도 옳고 바르게 할라고 애쓰지 안하는 그자가 어떻게 완전자가 볼 때에 옳고 바른 것을 찾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양심 쓰지 않는 자는 기독자의 구원에는 천리 만리 멉니다.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뭐 어떻게 일을 많이 하고 역사를 많이 하고 공로가 많다 할지라도 공로는 공로대로 가치를 따져서 하나님이 시상해 주실 것이고 자기 자체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양심 쓰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또 일도 다 비판적이고 평가적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옳은 일 했다 할지라도 옳은 일 그것을 또 비판합니다. 비판하고 비판해서 ‘이거는 옳다. 끝까지 옳다.
틀림없다.’ 이거라야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치적으로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기독자들이 자기 양심대로 하고도, 양심에 자책할 것을 내가 찾지 못한다. 내가 양심대로 해서 양심에 삐뚤어진 걸 찾지 못하겠다. 이러나 나는 어둡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항상 떨며 가지 자기 양심에 가책된 일이 없다고 됐다 안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늘나라는 비판의 나라요 평가의 나라라. 이러기 때문에 비판하고 평가해서 틀렸다 하는 것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번연히, ‘요거 봐라. 요게 옳고 요거 틀리지 안했느냐?’ 틀린 것을 제가 어떤 역설로 어떤 강제로 가지고 성립을 시키며 달성을 시키겠습니까? 못 시켜. 또 평가적으로 ‘이거는 가치가 요것만 못하다’ 하는데 그거 가진 자는 그거 가지고 그대로 죽고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비판적이요 평가적인 나라기 때문에 그걸 기억하고, ‘하늘나라는 비판적의 나라요 평가적인 나라다’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잡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전부 다 중심이 뭐이냐? 제 중심이기 때문에 똥이 돼도 제 똥은 꾸리지 않다 하는 그말이 있어. 이러기 때문에 제게 속했으면 다 되지만, 하나님께 속했으면 하나님이 다 인간 모양으로 그렇게 할 줄 압니까? 아니오. 하늘나라는 비판적이요 평가적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는 옳고 바르고 참돼서 아무리 따지고 삣고 깎고 아무리 헤벼뜯고 아무리 거기서 어떻게 한다 해도 깎일 수 없고 정죄받을 수 없고 틀렸다 할 수 없고 옳고 바르고 참되고 가치있는 그것만이가 남아 있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생명이요 영생이요 사망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비판적이요 평가적인 구원이라 요걸 기억하고, 그러기에 둘째로 필요한 것이 뭐입니까? 그렇게 하는 데는 둘째로 뭐이 필요합니까? 예? 뭐이 필요해, 둘째는? 평가적인 나라요 비판적인 나라니까 이 구원을 이룰라고 하면은 첫째로 뭐이 필요합니까? 올바른 지식이 필요합니다. 요 필연성이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해.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고 그다음으로는 뭐 필요합니까? 그다음에는 올바른 지식대로 바로 하려고 하는 그 양심이 필요하다 그말이오. 양심이 필요하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뭐이 필요합니까? 아무리 양심대로 할라고 할지라도 그만 이것에게 피동돼서 헛일 저것에게 피동돼서 헛일입니다. 모든 과거 선진들이 양심대로 살라고 애를 썼지마는 양심대로 살아서 그 사는 것이 차차 좀 올라가면은 거게 대해서 올라갈수록이 적이 많습니다. 시기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니까 자기 양심대로에 하는 데에 그와 대립되는 거는 막 달라듭니다.
대립되는 거는 막 달라들어요. 대립되는 건 막 달라드는데, 막 달라드는데 제일 가까운 것이 막 달라듭니다. 먼 데 거는, 가까운 거 달라들고 가까운 것을 다 이기고 나면 이제 차차 차차, 제일 가까운 거 이기고 나면 그다음에 그다음에 먼 것이 달라들고 그거 이기고 나면 더 먼 것이 달라들고 더 먼 것이 달라들어서 온 우주와 피조물 가운데 전부가 다 달라들어도 승리한 그것이 승리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승리의 차이가 천층 만층 억만층도 더 됩니다. 그것대로 하늘나라에 대우와 가치의 영광은 차이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방해받지 안해야 된다 말이오. 방해받지 안해야 되는데 방해받지 안해야 되는 것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양심이 화인맞지 안해야 돼.
화인맞으면 안 돼요.
그 사람이 양심은 쓰는데 공산주의 양심이면 그건 공산주의 화인을 맞았어.
그사람은 양심은 쓰기는 쓰는데 저거 가족에게 차이를 두면은 가족의 화인을 맞았어. 그 사람은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사람과 다른 사람에 하후하박으로 차이있게 비판하면은 그 사람은 그 민족의 화인을 맞았다 그말이오. 또 자기 나라라는 애국의 화인을 맞았어. 자기에게 관련됐으면 자기에게 화인을 맞았고. 그 사람은 또 이 세상 뭐 문화 건설이라든지 이런 데에 끌려 가지고 정평 정가 못 하면 그 문화에 화인을 맞았다 말이오.
이러기때문에 원수가 많애. 이런 원수의 방해를 받을 때에 그 양심을 가리켜서 화인맞은 양심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걸 다 이겨야 돼.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이것에게도 저것에게도 속하면 안 돼. 아무데도 속하지 안해야 돼.
어데 속해야 돼? 옳고 바른 데만 속해야 돼.
옳고 바른 게 어데 있는데? 우리에게는 영감과 진리 외에는 나타난 것이 옳고 바른 것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 옳고 바른 데만 속해 가지고 하지 피조물에게 속한 것은 다 그것은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화인맞은 양심이 되지 안하고 피해를 받지 안하도록 하고 난 다음에는 그라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다음에 뭐이 필요합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자기가 아무리 옳다 바르다 이렇게 생각해도 소용 없어. 단행이라 말은 즉시 행한다 그말이오. 단행은 옳다 바르다 했으면은, 할라고 하면은 방해물이 있는데, 방해물이 있는데 거기 방해받지 말고 단행을 해 버려야 돼. 행해야 돼. 단행해야 돼. 단행하고 난 다음에 뭐 필요합니까? 인내해야 돼. 이렇게 기독자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사 선생님들이 자기가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쓰는 것이 없으면 뭐이 없는 사람입니까? 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쓸 때에 옳고 바르게 되도록 도와 주는 것이 누굽니까? 성령님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을 쓴 반사가 가르쳐야 그 학생에게 양심을 쓸 수 있고 또 영감의 협조를 받아서 영감에 도달해서 영감하고 연결된 그 사람이 그에게 가르쳐야 영감이 건너갑니다. 양심으로 가르쳐야 양심이 건너가고 또 영감으로 가르쳐야 영감이 건너가기 때문에 반사가 자기가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자기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지식을 어떻게 전해 줄 수 있겠소? 지식만 가지고 있고 양심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양심을 어떻게 전해 줄 수 있겠소? 양심만 가지고 영감 안 가졌으면 어떻게 영감을 전해 줄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 양심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반사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반사 선생님 자체에게 있는 것이라야 주지 없는 것은 주지 못합니다. 있는 것이라야 줍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먼저 가지자 그말이오.
가지고, 자기가 가진 것이라야 주지 가지지 안한 거는 암만 줘 봤자 못 줘. 아무리 자기에게 떡이 없는데 떡을 준다고 ‘아나, 떡 먹어라 떡 먹어라’ 아무리 해 봤자 떡이 주어집니까? 떡을 가지고 떡을 줘야 되지.
그러기 때문에 반사들이 요 신앙 양심을 가지고 있는 자라야 양심을 그들에게 전해 줄 수가 있고 또 양심으로 영감을 접선한 자라야 영감을 그에게 전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반사 선생님들이 먼저 요 신앙 양심 생활 하지 못한 것은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돼.
“네 죄가ㅡ네 삐뚤어진 것이ㅡ주홍같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리라” 이 시간, 이 시간 내가 가지면 가질 수 있어. 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만 입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완전한 양심 완전한 영감으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것이니까 내가 입고 벗지만 안 하면 돼.
이래 가지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하고, 가르치는데 학생들이 이번에 이 배운 것 가지고 늙어 죽을 때까지 어데 가든지 잊어버리지 안하고, 여러분들의 성공은 양심이라 말이오. 그 학생이 뭐 낙심을 할란지 어데 무신론자에게 끌려가 가지고 어떻게 될란지 모릅니다. 이러나 지금 가르쳐 놓은 그 말씀이 그를 구원할 거라 말이오. ‘신앙 양심이라. 모든 양심은 다 죽은 양심이요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대로의 양심만이 산 양심이라.’ 요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언젠간가 어떤 궁지에서도 살아나올 수가 있어.
그런고로 양심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을 시켜서 요 공과는 자기가 외우지 못하면 그대로 자꾸 보고 읽어줘도 좋습니다. 읽어, 주입식이기 때문에 읽어줘도 좋아.
제가 여기 지하실에 ○○○장로님이 가르치는 것 보니까 그대로 아이들에게 주입을 시켜서, 아마 그 학생들에게 제일 문답을 해서 물으면 지하실에 있는 그 학생들이 제일 올바른 것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해석을 해야 소용없습니다.
내가 일층, 남반 일층에 부장이 가르치는 걸 봤는데 그분은 좀 중간반에서 조금 효력이 있도록 그렇게 그 해석을 많이 가할라고 애를 쓰는데 그 해석을 가해야 그 아이들이 요새 아무리 지능이 발달됐다 할지라도 잘 모릅니다. 또 마귀 지능만 발달됐지 하늘나라의 지능은 발달 안 됐습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주입을 시켜서 그들에게, ‘사람이 양심 생활 안 하면은 하나님도 찾아볼 수가 없고, 또 생명을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고, 죄악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복을 받을 수도 없고, 모든 위험과 환란의 그 궁지에서 피난할 수도 없다. 양심 안 쓰면 다 헛일이다.’ 하는 요것을 학생들에게 단단히 인식시켜서 요 공과대로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간추려 말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옳고 바르게 살아보자. 옳고 바른 것이 하늘나라다. 옳고 바르지 안한 것은 다 사망이다. 옳고 바르게 살아보자. 옳고 바르게 살라면은 뭐이냐?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옳고 바르지 이 세상에 모든 지식은 다 삐뚤어졌기 때문에 옳은 지식은 신구약 성경밖에 없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만이 옳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살아보자.’ 요게 제일 중요합니다. ‘옳게 바르게 살아보자' 요게 제일 중요합니다. ‘옳게 바르게 살아보자.’ 이런 데에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뭐이냐? 화인맞으면 안 돼. 옳게 바르게 살라고 할 때 방해받지 마. 방해받으면 안 돼. 방해 받으면 안 돼. 자기 생명에도 방해받지 안하는데, 목숨이 끊어져도 방해받지 안하는데 어떤 인간에게 방해받겠소? 혹 사람들이 말하기를 ‘가족에게 방해받지 않는다’ 이 소리를 잘 못 합니다.
`가족에게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면 그건 저만 아는 사람들이로구만.’ 자기의 생명에게도 방해받지 안하고 생명이 죽어도 지키는데, 생명도 돌아보지 않는데 가족이 무슨 필요가 있나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아무데도 방해받지 안해야 됩니다. 아무데도 방해받지 안해야 돼. 방해받은 자는 다 사망 속에 들어가서 예수를 믿어도 모든 행위구원은 다 사망이라.
요렇게 해야 자기도 구원되고 영육도 구원되고 모든 사람이 구원돼서 금생도 내세도 구원되지 이렇게 진리대로 지키는 데 구원이 있지 진리를 양보해 가지고 구원되는 성공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요것도 확고히 우리가 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