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성령-옥토


선지자선교회 1983년 7월 21일 목새

 

본문 : 마13:3-9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길가밭에 뿌리운 씨는 이 세상에 짓밟혀 속화가 돼서, 속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타락해 가지고 못쓰게 된 것을 가리켜서 속이라 그렇게 안 믿는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또 성경에도 말했습니다. '세속에 물 들지 않는 것이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길바닥으로 비유한 것은 속화된 것을 말하는데 길가에 뿌린 씨가 안 되고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고 하면 이 속화를 벗는 그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묵상을 하든지 하는 거게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깨닫는 그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도적질 하지 마라' 하는 데에 도적질 안 해야 된다 하는 그걸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자기가 속화된 속화를 다 벗고 속화를  이길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성령의 감화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자기가 묵상하든지 성신의 감화를 자기가 받지  안하면 그저 명문된 이 육십육 권을 다 안다 할지라도 외운다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평생 육십육 권에 기록한 문서만 알고 그 이상  영감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털끝만한 것도 쓸데 없습니다. 안 됩니다.

 성신의 감화를 받아야 되는데 감화는 한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성신의 감화는  자기가 영접해서 성신의 감동이 된다면, 성신에게 붙들린다면 성신은 전능한  성령이기 때문에-성신이나 성령이나 같은 말입니다. 그전에는 성신이라 했고 또  지금은 번역하기를 성령이라 이랬는데 같은 말입니다.-성령은 전지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령님만 영접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그 접선이 안 되면 헛일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만나는 데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자기의 지정의를 다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에게 붙들리고 그분의 것이 되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려고 애를 쓰는 그게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우리 인간 요소에서 말하기를 착한  양심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착한 양심 착한 양심을 자기가 가졌으면 자기를  다한 셈입니다. 깨달으려로 하는 그 지각하는 면에 있어서는 착한 양심을  가졌으면 자기 할 인적 요소는 다 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생각할 때에 자기를 다하지 안하면  착한 양심이 자기에게 협조 안 합니다. 자기를 다하지 안하면 착한 양심이  협조를 안 합니다. 협조 안 한다 말은 착한 양심을 부인 하고 있다 그말이오.

자기를 다하지 안하면 착한 양심을 부인 하고 있어. 착한 양심을 부인하기  때문에 착한 양심이 아무리 주장을 해 봤지 안 듣는다 그거요.

 자기에게 있는 자기와 자기를 시비해서 자기도 인정하지 안하는 그 자기에게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중에 제일 옳은 주장을 하고 있는 그  양심을 인정해서 양심하고 한덩어리가 돼도 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하나님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영접하고 인정하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건데 자기도 다하지 아니했으니까, 다하지 안하는 것은 자기와 자기가  시비가 나 가지고서, 돈 욕심하고 권세 욕심하고 둘이 시비할 때도 있고 또, 뭐  욕심은 돈 욕심이나 권세 욕심이나 지위 욕심이나 정욕의 욕심이나 뭐 오만 욕심  다 한 종류입니다.

 욕심하고 또 거게 도덕심하고 둘이 시비를 해서 어떤 사람은 도덕심이 근방에  오지도 못하고 입도 벌리지 못합니다. 그만 욕심이 꽉 왕이 돼 가지고서 욕심이  전마음을 통치하고 또 온 몸을 다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욕심이  강해서, 욕심이라는 그 자기 속에 있는 요소가 강해서 다른 것들이 와 가지고서  근방에 오지도 못합니다. 입도 못 벌리요.

 회의를 할 때에 자기 속에 마음의 각양의 요소들이 모이고 또 이 몸에 모든  기능들이 모여 가지고서 의논을 해서 결의를 해 가지고 행동하는 건데 사람이  그만 병신이 되든지, 쇠약해지든지, 나이가 많든지, 그러면 그 회의를 하는데  원만한 회의를 하지 못하고 거게 강한 세력을 가진 몇몇이 달라들어서 주장을  하기 때문에 옆에 다른 것이 발언도 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그 회의라고  하지마는 실은 독재와 같이 그렇게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젊을 때부터 차차 차차 회의 하기를 늘 하나님의 말씀과 이런, 또  영감을 받고 이래 가지고 이 회의에서, 참 야당 여당 있는 것처럼 새사람의 그  당이 있고 옛사람의 당이 있는데 그 두 당이 시비를 하고 의논을 하는데  새사람의 세력이 조금씩 세력을 가지고서 모든 결의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옛사람은 회의를 열었지마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이렇게 늘 새사람이  주장하는 그것이 자꾸 결의가 돼지고 그 주장대로 모든 것이 이래 돼지고 이러면  차차 차차 옛사람의 당은 약해지고 새사람의 당은 강해지니까 나이가 많아갈수록  새사람의 당이 강해지니까 옛사람의 당은 힘을 못 쓰고 새사람의 당이  강해지니까 늘 그렇게 새사람으로 살려고 애를 쓴 사람은 바로 그대로 애를  썼다고 하면 세상을 떠나 죽을 때에 그 사람의 그 새사람 당이 제일 강하게  됩니다.

 옛사람의 당은 아주 힘이 없어지고 새사람 당이 제일 강하게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그만 영감대로지 영감이 아니면 다른 건 힘을 못 쓴다 그거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속에 이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인 줄 알지마는  하나가 아니고 마음은 실은 수백 수천도 넘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종합체입니다, 종합. 수많은 것을 주 모아 가지고서 모여 가지고서 하나되는,  나라와 같이. 국민이, 나라가, 한국이라 하면 하니 뿐이지마는 한국이 백성으로  말하면 지금 뭐 한 오천만이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하면 하나지마는 마음에 포함되어 있는 그 요소는 뭐  몇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러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단번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에 요소가 요 현실에서 요것 하나 구 원되고 조 현실에서 조것 하나  구원되고 현실 현실에서 하나씩 구원 하기 때문에 이거는 중복적으로 구원을  얻는다.

 영은 하나뿐인 단일체기 때문에 단번에 얻고, 단일체기 때문에 딘 번에 얻고 또  그는 주격이기 때문에 죽었으니까 단번에 객관의 힘이 살려야 되지 산 요소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영은 살리는 것을 그 인간 자체에게 맡기지 안했습니다.

주체가 죽어 있으니까 뭐 살릴 게 있습니까?  이러니까 맡기지 안 하고 주격체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살리시고 거지 소속한 이  마음과 몸의 수많은 요소, 요소 요소마다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요소  요소마다 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그 기능을 살리는 데에는 현실에서 살리는데  회수가 수없는 회수를 가지고 살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은 설교를 어떻게 어렵게 하는지 쉽게 하면 좋을  건데 어렵게 해서 못 알아듣는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 있다 하는데 제가 설교를  가장 쉽게 하려고 애를 쓰기는 씁니다.

 왜 그러냐? 나는 본래 이 세상 학문을 또 세상 그 모든 방언들 그런 것을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그저 한국말 하나밖에는 모릅니다. 아니, 일본 말은 좀  알지마는 한국말 하나밖에는 모르는데 한국말도 또 유 식한 문자 쓰는 말은  모릅니다. 문자 쓰는 말은 모르고 아주 일반 이 모든 서민들이 말 하고 있는  아주 저급의 말을 제가 씁니다. 고급 말 쓰지 못하요. 저급의 말을 쓰는데 그  이상 더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쉽게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이 들을 때에 왜 어렵게 들리느냐 하면 어렵게 들리는  이유는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 많은데  아브라함의 그 일면, 지난밤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한 것처럼.

그걸 아브라함이 소돔 왕과 서로 대화할 때에 그때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다  돌아보지 안 하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욕심을 희생했다.

 그러면 그걸 아는 사람은 그말을 척 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렇고 그렇고  하니까' 그 아브라함에 대한 역사가 말하려면 그 몇 시간 걸려야 될 그런,  자기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아브라함 말만 하면 척 듣는데 아브라함 말 하니  아브라함 누군지 모르니까 아브라함 말하니까 아브라함을 말한, 아브라함을  모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거요.

 또 그걸 또 알도록 할라 하는 날이면 아브라함에 대해서 또 가르쳐야 될 터이니  그러다 보면 또 그 시간에 가르치는 거는 안 되니까 그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말하고, 엘리야는 엘리야대로 말하고, 엘리 사는 엘리사대로  말하는데 그걸 모르니까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거요.

 이 세상 공부도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공부도 처음에는 단어를 공부해 가지고  단어를 알아야 말을 알아듣는데 단어 공부를 하면 그 다음에는 그 사상들을  알아야 되니까, '누구의 사상' 하면 그만 그 사상이라면 그것도 여러 수십권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누구의 사상'하면 그만 그 사상 공부를 다 했으니까 그걸  말하면 알 수 있도룩 이래 돼야 되지,  그 사람의 이름을, 그 사람의 사상을 모르고 그 사람의 이름도 누군지 모르면  그 이름을 말해 가지고서 자꾸 아무것이, 아무것이와 아무것이와 비교하고  아무것이와 아무것이와 비교하고 자꾸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 그게 한없는 그  수많은 사상과 복잡한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건데 그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하나도 모르는, 모르고 있으니까 자기가 그 말 하는 것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말이오.

 그걸 가리켜서 그 수준의, 그 수준의 기초가 되는 기초 상식이 없기 때문에 그  수준에 대한 공부를 못한다 그거요.

 그러니까 학교 공부를 누구든지 돈만 있으면 하는 게 아니라 학교에 입학 시험  치는 것은 '이 사람이 이 수준의 그 공부를 할 수 있는 기초 상식이 있는가  보자. 기초 지식이 있는가 보자.' 그것을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거게 합격이 안  되면 안 된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 것도 그런데 이제까지 예수 믿는다 하지마는 예수 믿는  이치는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예수 믿으면 병낫는다,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예수 믿으면 형통한다, 예수 믿으면 장사된다. 이것만 듣고서 좋아하는 그  기분을 가지고서 수십 년 예수 믿었던 사람이 하나도 상식이 없다 말이오.

 공부는 하나도 못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참 이치를 말할라 하면 그 참 이치를  먈하는데 그 이치를 들어서 말만 하면 뭐인지 모르니까 한 사람씩을 들어서  소개하는 거는 그 사람 말하면 그 사람의 그 모든 사역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  사역을 들어 말하면 자기가 배우는 진리에 대해 좀 더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 하나씩 들어 말하고 이래 들어 말하고,  가장 잘 알도록 하기 위해서 부득이 자꾸 이쪽도 말하고 저쪽도 말하고 이렇게  말을 하고,  또 제가 들어 가지고 앞으로 요런 미혹을 받을 터이니까 그 미혹을 방비하기  위해서 그걸 다를 때는 안 되니까 그 말씀을 가르치면서 앞으로 요런 미혹이  있다 하는 조런 미혹이 있다 하는 그런 걸 방비해서 말하는 것인데,  그 사람 이름도 모르고, 그 역사도 모르고, 단어도 모르고 이러니까 제가  대번에 어찌 그걸 배울 수가 있겠느냐 말이요?  그러니까 자꾸 주입식적으로 듣고 듣고 해서 그걸 배워서 알고, 또 뭐인지  모르면 자기가 자기보다 낫게 안 사람에게 '이 단어는 뭐이며 또 이거는 뭣이냐?  아브라함이라 하는데 아브라함이라는 그거 뭐입니까? 아브라함이 사람입니까  짐승입니까 물건입니까 땅 이름입니까 아브라함이 뭣입니까?' 그 사람에게  아브라함을 가지고 증거를 하면 모를 터이니까 그 사람은 아브라함 공부를 해야  될 거라 말이오.

 그러면 가르치기를 '아브라함이라는 이는 사람인데 아브라함에 대해서 공부를  하려거든 창세기 어데 어데를 가서 읽어 가지고서 공부를 하면 대략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제 그걸 공부를 해야 그거 돼지는 것이지 그거 공부를 안  하고 이래 있으니까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수준이 되겠는가?  그러면 그 하나 하나를 그 사람에게 그 기초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릴 터이니까 그 사람 보고서 다 그래 할 수 없고 또 대번에 처음 온  사람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교회라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국민학교 일학년도 하지  못하는 사람하고 또 최고의 학을 공부한 박사하고 한 자리에 앉혀 놓고 같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니까 그 지식 그 수준의 차이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라는 것은 다 이런 것이요 또 성경 공부라는 것은 다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인데, 그거 참 그러니까 그 공부하기가 힘이 든다 그거요. 힘들지  저 먼저 고신대학에 가 가지고서 서 목사님이 가서 강의하는데 그 질문을  하기를 '일학년 하고 육학년 하고 한테 갖다 놓고서 가르치면 학생들이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그렇게 장년반에 가르치는 그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쳐 가지고  그게 됩니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하는 그런 질문을 합디다, 내가 녹음을  들어보니까.

 그러니까 답을 하기를 '장년반 그 차이점과, 주일학교는 암만 해야 찍해야 오륙  년 차이밖에 없는데 장년반은 삼십 년 공부한 사람과 일 년도 공부 안 한 사람을  한테 두고 가르치니까 그 차이는 더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꼭 유식한  사람이 잘 깨닫고 예수를 잘믿는 것이 아니고 무식한 사람 가운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하는 그런 것을 약간 설명을 합디다. 그런데도 그게  되니까 묘한 일입니다.

 말하기를 이런 차이가 있는데 이런 차이 있는 공부를 시켜도 그게 되는 이유는,  그 이유를 하나 말하던데 그 이유가 뭣이겠소? 자, 남반에 한번 대답해 보이소.

어째서 그게 될까? 어째서 되는 거라? ○선생? 뭐라 하노? 뭐라 하노? 남자가  소리가 툭 터져야 돼. 젊은 사람 때 부터. 그 연습할 거는 아니지마는  '성령님이!' 이래 그만 고함을 지르지, 좀. '성령님이' '성령님이' 그러면 안  돼.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이 됩니다. 그러니까 깨닫는 자는 대번  깨닫게 돼.

 씨뿌리는 비유로 말해도 이 말씀은 중매쟁이라. 문서계시의 말씀은 중매쟁이라.

중매쟁이라. 누구를 중매해요? 누구를 중매합니까? 누구에게 중매를 해요? 성경  말씀이 누구를 누구에게 중매해요? 참 깜깜한 사람들이라. 전부 고기덩어리만 와  있지 마음을 기울이지? 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 믿는 도는 그런 것 아닙니다.

껍데기는 다 소용 없어, 쭉정이. 키로 이래 까불면 전부 쭉정이 다 날아가 버려.

키가 뭐인데? 환난 오면 이 까불면 전부 쭉정이는 다 날아가 버려. 알맹이는 안  날아가요.

 성경 말씀이 누구를 누구에게 중매합니까? 여기 ○선생? 그 사람을 영감에게  중매하지, 영감에게. '하나님에게' 하는 것도 다 상식으로 대답하는 것이지 고거  명중이 안 되니까 그런 것은 좋은 선생님은 줄을 딱 그어 낙제를 시켜 버립니다.

언제든지 답이 정확해야 되지 그렇게 미실미실하이 그렇게 흐리멍덩한 그런 답은  안 돼요.

 성경 말씀은 문서계시는 영감에게 중매합니다. 그러기에 문사계시가 아니고는  영감을 접할 수 없습니다. 영감 없는 문서계시만 가지고는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될 어떻게 해야 될 그것은 깜깜하게 몰라. 알았는데 해도 틀린다 그거요. 영감의  인도를 받아야 되지.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중요한데 왜 중요하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신  영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러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가 그 말씀으로 성령님을 만나도록 하게 되고  성령님을 만나서, 그게 뭣이냐? 성령님을 만나려면 성령님이 하나님인데 하나님  만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만난다 했습니까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이러니까 양심을 써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귀는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양심 있는 자는  영감을 받을 수 있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영감이 자기에게 접선되면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양심을 쓰려고 하면 어째야 됩니까? 자기의 모든 형편  사정 그것도 다 떼놓고, 또 자기의 감정도 떼놓고 급한것도 떼놓고 자기에게  있는, 자기에 있는 자기 욕심 그놈도 '이 이놈아. 욕심 너 좀 가만 있어.'  눌러놓고 또, 또 자기의 감정 '감정 이놈아 가만 있어.' 눌러놓고, 또 뭐  기억력이 뭐 추억 기억이 뭐 하면 '너 기억력 가만 있어.' 생각이 뭐라 하면  '생각도 가만 있어.' 모든 걸 다 그만 다 눌러서 말이지 마구 꺾어대야 됩니다.

 꺾어대고 '가만 있어. 너는 발언할 수 없어. 우리가 소망하는 희망 있는 자가  발언을 해야 될 터이니까 너 입 닥트려.' '왜 나는 왜 말 못 합니까?' '너 말해  봤자 찍해야 네가 돈 욕심이나 뭐 욕심이나 네 감정이나 내 주관이나 그런  것이기 때문에 네 말 듣기 싫어. 가만 있어.'  그러고 '자, 양심님이 와 가지고 양심님이 와서 좀 한번 말해 주십시오.' 모든  것이 발언 안 하고 있으면 이제 그다음에 양심이 말할 수 있다 말이오.

 양심이 말하면 양심은 우리 속에 제일 빛이요 착하고 옳은 것이지마는 이 욕심  같은 것은 이거는 아주 무지하고 순전히 그거는 악령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량합니다. 불량하니까 막 주먹을 대놓고 하니까 그거 양심은 말을  내놓을 수가 없어. 내놔 봤자 그들이 듣지도 안해. 이러니까 이런 걸 부인해야,  자기가 하나님의 도리를 들을 때에 자기를 부인을 해야 그래야 자기 속에 있는  요소인 그 양심을 천거 합니다, 이래 국회의원 내듯이.

 양심은 천거해서 양심의 인도를 받으려고 이러면 양심이 어디다가 소개를  하느냐 하면 이제 성신의 감화에 소개를 합니다. 성신의 감화에 소개를 하는데  성신의 감화에 소개하도록, 성령님의 감화에 소개를 하도록 성령님을 찾아가기는  찾아가는 길은 뭣입니까? 찾아가는 길은 뭣이지요? 누구한테 한번 물어볼꼬?  성령님을 찾아가는 그 길은 어데 있는지 ○○○조사님? 어데? 진리라니? 진리는  우주에 꽉 찼는데. 우주에 꽉 찼는데. 진리는 우주에 꽉 찼습니다. 참된 이치는  꽉 찼소 그러면 참된 이치면 어느 이치에 가 가지고 물을꼬? 어느 이치에?  ○○○조사님? 현실에. ○○○조사님? 현실에. 모두 그거는 모두 다 빵점 인데,  영점. 그러니까 일이 안 되는 거라. ○○○? 이러니까 다 모두, ○○○? 인제 다  틀려 놓으니까 그것밖에 잡을 게 없어 그런지 알았는지 모르겠다. 성경 말씀.

성경 말씀.

 신구약 성경 말씀이라 해야 돼. 진리라 하면 안 돼. 성경 말씀 외에도 진리가  많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간추려  주신 게 신구약 성경이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뜻은 이외에도 많이 있어.

만물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다 있지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간추려 주신  구원의 도리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 진리가 신구약 성경이라 말이오.

 착한 양심이 무슨 길을 걸어 가지고서 성령을 만나게 해 주느냐 하는 신구약  성경에 문서계시로 되어 있는 이 말씀을 밟아 가지고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으로 걸어들어가 가지고 성령님을 영접하게 된다 그거요.

 뭐 이렇게 말해 줘도 모르면 그거는, 하나님의 도가 아니고 자꾸 이 세상,  불교에도 있고 유교에도 있고 이 모든 이종교 어데든지 거계는 도덕 없는 게  없고, 사상 없는 게 없고, 단체 없는 게 없고, 서로 화평 없는 게 없고, 협조  없는 게 없습니다. 그전 세상에 꽉 찼다 말이오 그런 것만 장 말하니까 제것을  말하니까 잘 듣고 이렇지마는 그것을 다 죽이고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이걸 말하니까 잘 들 려지지를 안한다 그거요.

 그러니까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고 성품을 다 하고. 힘을  다해야 된다'는 그거는 다하면 그게 뭣 되느냐? 다하면 그게 착한 양심됩니다,  다 하면. 다 했다 말은 그런 것이 다 협조를 했다 말이요, 다 회의해서. 그저  양심대로 양심대로 자꾸 이래서 양심이 그 자기의 마음에 제일 왕이 돼 있으면  이제 다른 것이 양심에 다 다스림을 받고 양심이 왕이 돼 있으면 그 양심이  하나님과 교제를 잘 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아서 전달해 주요.

그러기 때문에 마음의 중보자가 양심이라.

 스톡 박사가 그때 와서 말하는 데는 양심을 하나님의 사자라 이랬어 보니까  암만 봐야 양심은 자기 인적 요소가 아니고 신적 요소도 아니고 중간에 이래  심부름하는 그래 보이거든. 그러나 그 인적 요소요, 잘못 깨달아 그렇지.

 인적 요소지마는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중보시키는 것이고 또  그러면 그다음에 영감이, 영감 소개가 되면 영감은 이제 예수님의 이 대속을  중매시키고 그러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그 능력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서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 꼭 그 진리를 들으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진리를 깨달으려고 애를 써야 돼요. 진리를 깨달으려고.

 엊저녁에 ○○○목사님이 설교를 잘했는데 하나 고쳐야 됩니다. 하나 고칠 것은  뭐인고 하니 그 이치를 깨닫는 데다가 전력을 주력을 하고 그걸 수사학에서는  공부하지마는 성대를 그렇게 하는 성대에 관심까지 두면 좋은데 사람은 그래도  성대에 관심을 두고 또 그 모든 술어에 관심을 두고 그런 것 다 말을 수사적으로  하는 것도 그거 좋습니다. 다 좋지마는 마음을 제일 전적 어데다가 기울이느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하나님의 도리를 바로 증거하는 거게만 전력을 기울여야  되지 거게 전력을 기울이지 안 하고 무슨 '내가 성대를 이래 해야 되겠다. 뭐  하겠다.' 그리 되면 그만 마음이 나누어져 가지고서 안 돼져요.

 기도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기도를 하면 자기 입에서 나와 가지고 자기 귀로  들어가고 입에서 나와 자기 귀로 들어가고 이래 들어가서 하나님을 상대하지  못하게 돼.

 그 웅변성, 거기다가 관심을, 그 좋기는 좋은데 거기 관심 가지다 보면 제일  관심을 둬야 될 데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런 데 좀 관심을 가지지 마. 뭐 그것 잘하면 좋지마는 그게  어찌됐든지 꼭 내가 진리 하나 파고 들어가 가지고 진리 하나를 바로 깨달아서  증거하려고 애쓰는 거기다가 전력을 기울이는 그 힘밖에 없어요. 그 기울이다  보면 그 나머지기는 뭐 말은 수세미 같은 말 무슨 말이라도 하나님의 도,  하나님의 도는 진리인데 진리 그것을 증거하려고 애를 쓰는 거게서 이제 바로  됩니다.

 설교할 때에 고함 지르는 설교, 고함 지르는 설교 할 때는 다 진리를 가르쳐  놓고 가르친 진리를 가지고서 이렇게 하라고 강조할 때는 고 함을 지르지마는  진리를 가르칠 때에는 큰 소리로 가르치지를 못합니다. 큰 소리로 가르치면  알아듣지를 못해요.

 오늘 아침에는 이거 돌밭에 뿌리운 씨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를 찾아요. 하나님을 말씀을 들을 때에 '내가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어떤 자기가 방해하겠다.' 방해할 자기를 깨달아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방해하는 자가 몇이 되겠다.' 방해하는  자를 깨닫고,  방해하는 자와 또 이 말씀과 말씀하신 분의 권위를 서로 비교를 해 가지고서  자기가 이 말씀대로 살 때에 어떤 방편을 가지고, 자기의 욕심이 나오든지, 자기  감정이 나오든지, 물욕이 나오든지, 생의 애착욕이 나오든지, 안일욕이  나오든지, 그 욕심도 여러가지인데 어떤 게 나와도 그것을 꺾어서 부인 하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그것을 자기가 그 말씀을 받을 때에 받아 가지는 것이  그것이 이제 돌짝밭에 뿌린 씨를 면하는 것인데 그것을 받는 것 그것이  뭐입니까? 그것이 뭐입니까?  자기의, 돌은 자기인데, 돌은 자기인데 자기를 그것을 없애야. 된다. 자기를  없애야 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받아야 되는데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이? 뭐  그런가 싶어서 물어보면 또 껍데기고 껍데기고 그래.그 능력이 뭣이지요?  ○○○? 성령. 성령. 이리 들어가나 저리 들어가나 내나 성령 만나라고 하지  안해요?  '성령을 받아라' 하는 것은 우리 말로 알아듣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라 하는 것이지 작은 자가 큰 자를 어떻게 받습니까? 성령을 받아라 그말은  성령을 네가 가지라 그말인데 성령을 가지라 그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네가  성령에게 가져짐을 받아라, 성령이 너를 가지도록 네가 성령의 것이 되어라 하는  그말을 그래 말하면 모르니까 이제 부득이 아는 말로 자꾸 해 가지고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라 그거요.

 말씀을 들을 때에 돌짝밭이 되지 안해야 옥토 안 됩니까? 이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에는 내게 이런 이런 요소가 들어 가지고서 그때마다 방해를 해서  내나 시작하다 그만 말고 시작하다 말고, 새벽 기도 시작하다 말고 새벽기도  시작하다 말고, 또 말 조심을 시작하다 말고, 또 자기 마음의 단속을 시작하다  말고, 자꾸 이래 시작하다 말고 이런데 타, 방해자 그자를 말씀을 들을 때에  찾아야 된다 말이오.

 명예욕자 뭐 이런 공명욕자 뭐 욕심도 수없이 많은데 이제 그자를 발견 하고  그자를 깨뜨릴 수 있는, 바위를 깨뜨려서 돌을 만들고, 돌을 깨뜨려서 모래를  만들고, 모래를 깨뜨려서 이제 흙을 만들어서 옥토가 될 수 있도록 이렇게  깨뜨려야 되는데 그 깨뜨리는 데에는 누가 와야 깨뜨려집니까? 누가 그걸 개간해  줍니까? 성령님이 와야만 된다 말이요, 성령님이 와야만 돼.

 그러니까 성령님이 오는 데에는 또 내나 착한 양심이 되도록 가져야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의논을 해 가지고 '우리가 뭐 좋습니다. 우리가 환영하니까'  이래야 양심이 중보자가 되고 대표자가 돼 가지고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말이오. 영감을 영접할 수 있어.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양심 만나지 못한 사람은 평생 믿어도 다  헛일입니다. 신앙 양심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평생 믿어도 헛일이오. 그거는 뭐  부흥회도 잘할 수 있고 잘할 수 있습니다 잘하는 그거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데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졌지, 도구로만 쓰여졌지 저는 생물은 못 됩니다.

 이러니까 설교 잘한다고 구원 잘 이루는 게 아니라. 그것은 자기가 완전히,  자기를 바사뜨려서 깨야, 그게 부인인데. 그 부인 안 하고 그게 됩니까?  그러니까 돌짝밭에 씨가 안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돼요. 길가 뿌린 씨가 안  되려면 세상 이 모든 지식을 다 부인해 버려야 돼 덤불 밑에 뿌린 씨가 안  되려면 이 세상 모든 재리나 세상 문제 그런 걸 다 부인해 버려야 돼. 그  부인해야 이제 옥토에 뿌린 씨가 되지. 말씀을 들을 때에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자기가 돼야 된다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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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니까 자꾸 들으려고 애를 쓰면 느는데, 그래 내가 늘 말, 어짤 때 말하기를  '여게다가 하나님이 뭐하려고 이 자꾸 이런 설교를 하라 하는고? 자꾸 설교 해  봐야 뭣이 되나 싶으지 안한데, 그래도 이 반사들이 있으니까 이 배 나가서 안  되겠나?' 주일학교 학생들은 말하면 빠뜩빠뜩 다 알아들어요. 박사보다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훨씬 잘 알아들어.

 그 사람들은 그걸 몰라 그런 거라. 오는 사람마다 다 '이거 지식의 층하가  있으니까 층을 따라서 해야 되는데' 이러다가 장년반 말하면 그만 '참 그거'  이의를 못 답니다. 이의를 못 다요.

 장년반 말할 때 이의를 못 달고 '성령님이 와서 감동시키는 그것이 방언입니다.

방언의 역사를 하기 때문에 한 말로 했는데 여러 나라 사람들이 와 가지고 저거  나라 말로 다 알아듣게 된 것은 성신의 감화의 역사로 다 알아들었습니다.' 일본  말로 했는데 일본 말 한 마디도 모르는 사람이 그 설교를 듣고 깨닫고 감화도  받고 오만 것 다 되는 그게 영감 역사라 말이오. 그 영감 역사를 말하면 부인해.

그건 하면 '무슨 말인가?' 말하다 보면 알아듣는 걸 아는데 그 보면 못 느낀다  그말이오. 와서 그걸 말해도 못 느껴.

 이러니까 영감 역사를 느끼지 안 하고 인간이 아동심리만 가지고서 하려 하고  하는 그것이 영감 역사를 부인하는 거라. 그 부인하는 게 하나님 부인하는 거라.

부인해도 부인하는 줄을 모른다 그거요.

 이러니까 어떤 소식에 들려 오기를 '서부교회 뭐 조그만한 목사가 하나  오더디마는 제 자랑만 살컷 하고 가더라' 어데 뭐 한다고 지금 다른 시간이  아까워서 갈 수 없는 시간이지마는 하나님의 사명인 줄 알고 가 가지고 그저 뭐  자랑이 아니라 '우리는 이래 하고 있다'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물으니까  '이래 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건데 그거 또 '자랑 실컷 하고' 그것 자랑인 줄  아니까 자랑할 만한 뭐 자랑거리가 되는 줄 알면 그거 취하면 될 거라 말이오.

좋은 줄 알기 때문에 자랑인 줄 알지 뭐 나쁜 줄 알았으면 '제 우사만 실컷 하고  가더라' 이럴 건데 자랑이라고 말하니까 좋은 줄 알기는 아는 모양이라.

 한자리에 들어도 그래요. '저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몰랐는데 하는 걸 말해  주니 참 고맙다.' 이래 듣는 사람도 있고 '제 자랑만 실컷, 조 그만한 목사가  오더니만 제 자랑만 실컷 하고 가더라'고서. 그러니까 그거 참 좀 그런 사람은  좀 답답한 사람입니다.

 진실치 안하면 하나님의 도에는 아무 받을 것도 없어요. 암만 여기 와야 소용  없어. 진실치 안하면 안 돼요. 자기를 부인해 버려야 돼요 자기를 부인하지 안  하고 하면 착한 양심이 안 나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잘난 사람 그 사람들이  자기 부인하기가 어렵거든. 자기 안 부인 하고 자기 가지고 뭣이 되리라 하기  때문에 헛일이라 그거요.

 엊저녁에 ○목사님도 그 말에 대해서 말이지요, 뭣을 처음부터 찬송할 때부터  이 감정적으로 하려고, 말도 말이요, 이 박사는 그전에 말할 때에 그것 가지고  한수 봤습니다. '어어어어어어' 떨면서 말하는 것, '어어어어' 삼가 조심하며  떨며 말하는 그것 가지고 한수 봤는데 그런 것 다 치워버리라 말이요, 그것 다  소용 없다 말이오. 그저 진리 하나만을 이러나 저러나 증거하려고 애를 써야지  다른 무슨 수식을 만들다 보면 그만 거게 관심 가면 마음이 나누어져 가지고서  한 군데만 거석하지 못한다 그거요.

 다 각각 뭣을 장기, 그런 장기 그런 것 다 치워버리고 꼭 진리 하나에만 주력을  해야 됩니다. 감동적으로 하려고 하는 그게 시험에 들어요. 설교할 때에  '교인들이 감동을 받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그거 대시험입니다.

 감동을 받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도를 그대로만 증거하면 내나 증거할 거게만  전력을 기울여도 잘 안 되는데 거게서 뭐 '또 이럴 때는 무슨 사학을 하나  증거를 하나 해야 되겠다. 또 세상 소식을 하나 갖다 붙여야 되겠다. 또 여게는  과학을 달아 붙여야 되겠다.' 이래야 섞은 비빔밥이 돼서 맛이 있지 싶어서 이래  꾸밀라 하는 사람은 저는 평생 그것 가지고서는 영감의 진리는 증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들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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