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19:44
알고 실행한 만치 변화
1986. 11. 19. 새벽 (수)
본문:요한복음 6장 41절∼58절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사람들이 어두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듣기 쉽고 알기 쉽도록 또 기억하기 쉽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모든 뜻인 구원 얻는 도리와 또 하나님 당신 그 자체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에 언제든지 사람이 배우기 쉽고 깨닫기 쉽고 기억하기 쉽도록 그렇게 가르치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보이는 이 물질 이 형체 있는 것 이런 것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신령한 것을 가르쳐서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이래서,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보다 훨씬 알기 쉽게 육적으로 가르쳤고 신약 성경은 신령적으로 가르쳤고, 또 구약 중에도 아주 태초에 그 아담 하와와 그때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나 또 약속하신 것이나 그런 것이 이스라엘 시대보다 훨씬 더 사람들이 미개적이라고 하면 미개적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다 이거 볼 수 있는 가견적이라고 하면은 가견적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다음 육체의 이스라엘 때는 그때에 인류 시조 뭐 노아니 있을 그때보다 더 좀더 신령면이 많이 계시할 때에 이용이 됐고 또 신령면을 더 가르쳤고 또 구약에 육체의 이스라엘 시대보다 신령한 이스라엘 시대는 더욱 더 이제는 신령적으로 그렇게 가르쳐서 놨기 때문에 알기가 좀 까다롭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나타난 이 계시를 알라면 그보다 더 알기 쉽고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약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이 계시해 놓으신 것을 참고로 삼아야 되고, 또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대한 계시를 알려고 하면은 상고 시대 인류시조 때부터 그 시대의 것을 가서 참고로 삼으면 좀 알게 되고, 또 상고의 것을 알라고 하면은 혹은 구약 시대 혹은 신약 시대에 계시한 것을 이렇게 연관시켜 가지고 연구하게 되면은 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하면 구약은 신약에서 좀 자세치 못한 것을 연구하고, 신약은 구약에서 구약은 신약에서 이렇게 범위를 잡아 가지고 연구하면 그 전면이 깨닫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는 기독교도 진화 종교라 그렇게 그들은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는 다 진화 종교입니다. 그러면 차차 차차 세월이 감에 따라서 연구가 더 발달이 돼지고 또 거게 대한 지식이 더 많은 경험과 체험의 지식을 더 가하게 되고 이라니까 그것이 좀 더 정확성 있는 데로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이래서 기독교도 다 진화적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차차차 진화라 말은 그것이 차차 차차 더 또 발달되고 성장돼서 좋아진다 그런 뜻인데 기독교도 이종교와 마찬가지다 그렇게들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으로 말해도 마가복음이 짧고 하니까 마가복음이 제일 처음에고 그다음에는 마태복음이고 그다음에는 누가복음이고 마지막에는 요한복음이라 그렇게 그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고, 기독교는 그래서 계시 종교라 이랍니다. 기독교는 계시 종교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열어서 알려 줘서 안 것이지 인간의 연고는 아무것도 없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 기록한 것은 성경 기록한 사람들도 기록은 해 놓고 그 속에 뜻은 뭐인지를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 성경 기록을 선지자들이 기록을 했고 사도들이 기록을 했고 또 그 기록한 것을 구약 성도들이 신약 성도들이 받아 가지고서 이렇게 성경을 보고 깨닫는데 성경 보고 깨닫는 것은 그때에 성경 기자들이 기록하고도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그 후에 받은 성도들이 더 잘 깨닫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진화 종교라고 하면은 그들이 깨달아서 기록한 것은 그들이 다 알 터인데 그걸 모릅니다. 모르는 것을 많이 기록했고 그후에 하나님께서 또 다른 계시를 나타내 주실 때에 또 영감을 받아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깨달을 때에 깨달아졌습니다.
또 그러고 성경 기록은 한 시대에 몇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기록을 한 것을 한테 이렇게 종합한 것이 성경입니다. 또 기록한 사람도 다를 뿐만 아니라 기록한 시대도 다릅니다. 이래서, 아주 상고 시대에 기록한 거 중세대에 근세대에 이렇게 기록했는데 기록한 때가 각각 다르지마는 성경 기록은 꼭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만물관이든지 모든 만물관에 대해서 다 일관성을 가져, 인생관이라든지 생사관이라든지 또 화와 복에 관한 것이라든지 모든 존재에 대해서든지 거게 대해서 기록한 지식이 꼭 같습니다. 다른 시대에 기록해도 꼭 같고 각각 다른 사람들이 기록했는데 꼭 같고 또 기록한 사람도 뭘 기록해 놓고 하나님이 영감으로 기록하라 해 기록했지 자기가 다 의식을 하고서 기록한 것이 아니고 기록하라는 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 뜻을 뭐인지 모르는 그런 것 선지자들이 많이, 기록은 해 놓고 뭐인지 모르고 세상을 뜬 걸 그후 시대의 사람들이 이제 영감받아 가지고 알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진화의 종교가 아니고 계시 종교라 그렇게 발표하는 게 좋습니다. 계시 종교라 말은 하나님이 열어 보이셔서 알게 된 것이지 사람이 자꾸 이렇게 연구해 가지고 자꾸 알아진 것 아니라 그거요.
지금도 그러합니다. 지금도 제가 여기 설교하는 거 뭘 이런가 저런가 자꾸 거기서 연구해 가지고서 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라 하는 대로 그대로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기록돼 있지마는 성경에 어느 말씀을 증거할지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마는 그 성경의 선택에 대해서 인본, 인간이 선택했으면 그 말은 결국은 인간의 말이 되고 맙니다. 왜? 성경에 기록한 말이지마는 성경에 기록한 말은 별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쓰고 있는 그 방언대로 기록해 있는 것이오. 방언입니다.
방언인데, 성경에 기록한 말씀이라고 그 말씀을 선택을 사람이 이 말을 선택해서 이 말 하고 저 말 하고 제 마음대로 이와같이 하고 하면은 결국 그거는 사람의 의사가 되고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안 되고 맙니다.
이래서 그걸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초두에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기를 성경 말씀을 이용해 가지고서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성경 말씀을 이용해서 “기록되었으되” 성경이 이렇게 말씀한 것을 말했지마는 그것은 사탄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암만 성경 말씀을 인용해도 성경 말씀은 전지 전능의 말씀인데 마귀가 자꾸 이용해 먹는다고서 마귀가 이용한다고 이용된 것 아닙니다. 사람 보기에는 꼭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말한 것 같지마는 실은 그것이 성경 말씀은 그에게 이용되지를 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 같은 말씀을 제가 말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은 이용되지 안하고 제가 만들어서 성경 말씀같이 그렇게 예수님에게 유혹을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 예수님 당신 뜻대로 말한 것이 아니고 속에 아버지께서 말씀하라 하시는 대로 그대로 말을 했기 때문에 그거는 성경 말씀과 꼭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말은 아버지의 말이라” 한 마디도 당신의 주관대로 뜻대로 하신 말씀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꼭 아버지에게 피동돼서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내가 한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내 입을 통해서 나타나셨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증거를 하셨습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계시 종교로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 주시는 대로 이렇게 받아 가지고 아는 도이기 때문에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는 데에는 다른 세상 학문을 연구하는 거와 같이 그만 어릴 때부터 책상 위에 앉아 가지고서 성경 읽고 자꾸 성경만 파고 들어가고 모든 사람들의 주석이나 자꾸 보고 이와같이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유명한 그 모든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를 했지마는 성경을 앉아서 책상 위에서 일생 동안 성경만 거머쥐고 연구한 사람으로서는 그 성경을 바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똑똑히 모릅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도로 주셨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성경 보고, 혹 모르면 사람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배워도 배운 그거 가지고서 배워진 것 아닙니다. 그저 배운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배우는 데에 그 배움을 도움 주는 것뿐입니다. 도움 주는 것뿐이지, 그라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안 대로 그대로 실행을 하면, 그대로 실행을 하면 실행을 따라서 그 사람이 실행한 것만치 자기가 변화가 됩니다.
자기가 뭐 깨달아서 각오로 그런 게 아니고 실행한 것만치 자신이 그 변화가 됩니다. 변화되는 거는 제가 노력을 해 가지고 변화되는 게 아니고 순전히 성경 말씀으로 행할 때에 그 능력이 그 사람을 행함을 통해서 변화를 시킵니다.
변화를 시키면 변화한 것만치 자기가 행한 그 성경 말씀을 다시 알게 됩니다.
말씀을 알고 행하면 변화되고, 변화되고 나니까 행한 그 말씀을 행할 때보다 더 정확히 알고 또 그 말씀을 또 행하니까 또 변화되고, 변화되면 더 정확하게 알고, 그래서 성경 말씀을 아는 것이 참 천층 만층입니다. 천층 만층이라 말은 성경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이 같은 성구라도 깨달아 아는 것이 천층 만층이라 하는 것이 이 사람은 많이 깨닫고 저 사람은 적게 깨닫고 사람과 사람과 비교해서 천층 만층이라는 그것뿐만이 아니고 그 한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오늘은 요만치 깨달았는데 내일은 이만치 깨닫고 모레는 이만치 깨닫고 점점 자기 일생 동안 깨달은 것을 개인이 깨달은 것을 보면은 그 깨달음이 천층 만층입니다.
깨달은 것이 자꾸 더 깨닫게 되고 더 깨닫게 되고 더 깨닫게 되고 하는 그것은 자신이 아는 대로 행하고 또 행한 대로 자기가 성화가 되고 성화된 것만치 다시 깨달아지고 하는 요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방법입니다.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알라고 첫째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대로 믿으라고 주셨고, 그대로 행하라고 주셨고, 그대로 사람이 변화되라고 주셨기 때문에 요것이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기 때문에 그대로, 듣든지 읽든지 해서 알고, 알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는, 아는 것만 가지고는 그 알고 난 다음에 믿음으로 자기가 깨달아진 거는 모릅니다. 알고 믿고 또 믿음으로 또 행하고 또 행함으로 자기가 성화되고 성화되므로 다시 또 깨닫고, 이러니까, 알고 믿고 행하고 성화되고 다시 깨닫고 또 깨달은 그대로 알고 또 믿고 또 행하고 또 성화되고 자꾸 이러니까 이것을 한 번 했으면 그만치 깨달았고, 두 번 그걸 되풀이 했으면은 그만치 더 깨닫고, 세 번 되풀이 했으면 더 깨닫고, 백 번 되풀이 했으면 더 깨닫고 그것이 천 번이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현실을 주실 때에 되풀이 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주시면 되풀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을 주시지 안하면 되풀이 못 한다 그말이오. 이 말 알아듣겠습니까?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그 현실을 만들어 주셔야 그 말씀을 지키지 그 현실을 만들어 주시지 안한 데 다른 현실에다가 그 말씀대로 행하면 엉뚱이 행함이 됩니다. 그것은 소용이 없어. 그거는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 말씀 어기는 것이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오.
그 시간에 해당된 말씀을 행해야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되고 그 현실에 해당된 하나님의 뜻은 그 현실에 요 성구대로 행하라 했는데 저는 제맘대로 딴 성구들을 택해 가지고 행하면은 그것은 성경 말씀대로 하기는 했지마는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입니까 그거는 거역한 것입니까? 거역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고 하니 성경의 권위성을 여러분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지금 말하는데 성경은 이렇게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과 다릅니다.
모든 학문들은 사람들이 만들어 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말은 인간 말로서도 좀 위대한 거 있고 또 좀 박식, 널리 아는 박식의 말이 있고 또 좁은 말이 있고 이러나 그것이 인간을 초월하지 못합니다. 언제든지 인간이라는 그 수평선 이하에 있는 것이 이 모든 세상 지식들이고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수평선에 있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온 지식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인간들이 그 지식에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리 통달하고 모든 세계에 있는 지식을 다 통달한 그런 박식을 가진, 아주 넓은 그런 지식을 가진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경 말씀은 그 사람이 연구한다고 연구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연구한다고, 명철한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서 연구한다고 연구를 당하지 않습니다. 연구를 당하지 않는다 요 말이 조금 알아듣기가 좀 까다롭겠는데.
아무리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 박식들이 다 달라들어 가지고 이걸 암만 연구할라 해도 달라든다고 해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려 주는 것은 아니라.
알려지는 것은 아니라 말이오. 연구가 되어지지 않는다. 알려지지 않는다.
암만 이 세상 지식은 그 지식을 사람들이 자꾸 연구하면은 알아지게 됩니다. 암만 이 세상 지식은 연구하면서 ‘지식아, 지식 네가 나한테 모르도록 해라. 모르도록 해라. 암만 모르도록 해라.’ 이렇게 하면서라도 연구하면 그 지식은 알려지지 별로 알려지지 안할 수 없다 말이오. 이 말도 알아듣겠습니까? 알려지지 알려지지 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다 달라들어 해도 하나님 말씀이 알려 줘야 알려지지 알려 주지 안한 데는 알지를 못한다 말이오. 알려지지를 안한다 말이오.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들의 지식에 굴복하지 안하고 그들의 지식에 피동되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방법대로, 알고 난 다음에 믿어야 그다음에 그 지식이 믿는 것만치 같이 역사하시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행해야 그대로 이제 그대로 실행을 해야 그래야 또 하나님 말씀이 그와 같이 하고, 만일 알고 난 다음에 믿지 안하면 아는 데까지만 말씀이 그에게 같이 했지 그다음에 믿지 안하는 데에는 저희들이 알고 나서 뭐 믿지 안하는 것을 천인 만인에게 증거하고 대강사가 돼 가지고서 어떻게 힘있게 역설한다 해도 거게 하나님의 말씀은 털끝만치도 역사하지 않습니다. 역사당하지 않습니다.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이제 믿으면 믿은 데까지 그 말씀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 말씀은 없는 가운데서 엿새 동안에 우주와 모든 영계 것을 다 창조하신 그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음받은 것들이 그 말씀을 건드린다고서 흔들리지 않는다 말이오. 그 말씀대로 알고 난 다음에 믿으면 그 말씀이 대우를 해 줍니다. 그 말씀이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요.
또 믿는 대로 실행을 하면은 그 말씀이 또 그 사람을 도와 주십니다. 그 사람을 도와서 변화시켜 주십니다.
변화시켜 주고 또 변화되면은 또 그 사람이 변화된 것만치 그 말씀이 또 그 사람에게 알려 주십니다.
알려 주고 난 다음에는 아는 대로 믿게 할라고 애를 쓰고, 그 말씀이. 믿게 할라고. 아는 대로 믿으면 믿고 난 다음에는 또 그 사람에게 행하도록 할라고 그 말씀 자체가 애를 쓰고, 또 행할 때에 그 말씀이 이제는 행한 대로 성화시킬라고 애를 써 성화를 시킵니다. 성화시키고 난 다음에는 성화된 것만치 또 더 깊이 알릴라고 애를 씁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는 우리가 어데까지나 피동이지 우리가 능동할 때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피동되는 일은 절대 없다 하는 요것을 확고하게 가져야 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자꾸 지금 벌판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신학에서도 이제 실천 신학이라 하는 것이 약간 나와 가지고 있지마는 그 실천 신학을 무시합니다, 사람들이. 실천 신학을 무시하고, ‘신학은 실천해 봐야 된다’ 하는 그거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 말했는데 그런 거는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이 많은 모든 학자들이 말한 거, 한 학자가 말한 것을 자기가 알면 그만치 큰 학자가 됐고, 백 학자가, 백 명 학자가 말한 것을 알았으면 그만치 신학자가 크고, 또 한 나라 말로써 한 것을 알았으면 그만치 신학자가 크고, 열 나라 방언으로써 알았으면 그만치 신학자가 커서, 그래서 지혜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신학은 어학 자랑이다. 어학 자랑이다.’ 또 ‘신학은 많은 사람의 것을 읽어서 광문,많은 사람의 일을 들었고, 광문이라 여러 사람의 말을 들었고, 넓을 광자 들을 문자, 많은 사람의 말을 들었고 다학이라, 많은 사람의 것을 배웠다. 그렇게 광문 다학으로 이라지마는,신학은 그래서 광문 다학이다.’ 이래 가지고서 신학이라 하는, 신학이라 하는 거는 뭐이냐 하면 아무 학자는 이렇게 말했고 아무 학자는 그렇게 말했고, 그러면 백 명 학자 말한 것을 많이 알면 사람들의 깨달음을 많이 아는 것이지 그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건 아니라 말이오.
이러니까 그렇게 광문 다학하는 것보다 한 말씀이라도 들어서 알고 난 다음에 믿는 게 문제입니다. 믿는 데서부터 생명은 역사합니다.
아는 데에까지 생명이 왔고, 믿으면 거게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시고, 그다음에 행하면 같이 하시고, 행하고 난 다음에는, 행하면 하나님께서 또 성화시켜 주시는 대로 자기가 성화되고, 그러면 아는 것이 인간이 노력해 가지고서, 아는 것은 사람이 노력해 가지고서 읽고 들어서 압니까 하나님이 알려 줘서 압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아는 거는 알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알려 주셔야 아는 것입니까? 인간이 노력으로 이렇게 노력하면 아는 것까지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하나도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정통으로 배우기는 배웠어. 이거, 얼마나 이거 기막히는 말인지? 여러분들이 또 거짓부리로 나를 속이고 자꾸 말뿐이고 그런지 모르는데.
아는 것도, 아는 것도 하나님이 알려 준 것만치 알게 됩니다. 알려 준 것만치 알지 인간의 힘으로 아는 것 없어. 하나님이 알려 준 것만치.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흙덩이 같은 인간이라도 그에게 하나님이 많이 알려 줄라면 많이 알려 줄 수 있고 아무리 명철해서 유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안 알려 줄라면 하나도 안 알려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택자의 그 명철자들이 세상에서 한없이 있지마는 그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을 하나도 안 알려 줍니다. 하나도 모릅니다. ‘그 사람 뭐 신구약 성경을 다 알던데’ 다 알지마는, 다 읽고 외우고 이래 한다 할지라도 성경 말씀에 대한 것을 참 아는 것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참 아는 것은 그들에게 한 마디도 주지 안하니까 참 아는 거 없고 저거들이 저거 나름대로 자꾸 성경 보고 이렇게 저렇게 아는 것이지, 인본으로 인간 나름으로 아는 것이지 하나님이 알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이 옳소이다.” 이랬어.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지식은 피동되거나 이용되는 것 아닙니다. 그들에게, 그들에게 정복을 당하는 것 아닙니다.
이 세상 지식은 아무리 어떤 학자가 말해 놓은 그 지식을 욕을 하면서라도 ‘이놈의 새끼, 연구한 이 학을 내가 알지.’ 하고 욕을 하면서라도 자꾸 파고 들어가서 연구하면 그 정복을 당합니다. 알아지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절대 안 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꾸 하나님 말씀대로 이렇게 아는 방법 자기 구원이 되는, 복음이 되는 도리를 하나님이 가르친 그 방법대로 알지 안하고 인간 이 세상 지식 방법대로 하는 자들은 다 헛일이라. 그러기 때문에 유명한 학자들이, 유명한 학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진리를 깨달아서 파악해 내놓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 산골에 있는 사람, 이 무식한 사람들, 말씀 들으면 그대로 알고 그대로 믿고 죽어도 살아도 그대로 행하는 사람 그런, 이런 믿음 가진 그런 사람들이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새로운 그 진리를 받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파했지 그렇게 인간의 그런 것 가지고서 한 것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총공회 산하에서는 교수들에게 한 달에 삼십만 원씩 연구비를 줍니다. 삼십만 원씩을 연구비 주고 또 따라서 십오만 원 연구비 주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연구비를 한 달에 주는데 그러면 주면은 석 달 셋 주일을 연구합니다. 석 달 셋 주일을 연구하면 그라면 값이 얼마입니까? 넉 달 동안, 석 달 석 주일은 연구비를 삼십만 원씩을 주고 발표는 한 주간 발표합니다, 한 주간 발표. 석 달 석 주간 연구한 것을 한 주간 발표합니다.
한 주간 발표하면 한 주간 발표한 건 또 발표하는 시간마다 또 가르치는 강의료가 있습니다, 강의료. 강의하는 강의 또 값이 있습니다. 그거는 일반 대학에서 다 그라고 있기 때문에 그 일반 대학에서 연구하는 연구비를 따라 줬는데 그걸 정한 것이 좀 오래 됐기 때문에 지금은 일반 대학에서는 그보다 더 올라가지 안했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가르치면 가르치는 강의료를 받습니다. 하루 얼마씩입니까, 교학실장? 강의료가 하루 얼마입니까 한 시간 얼마입니까? 한 시간에 삼천 원? 다른 거 가르치는 거는 이천 원 성경 가르치는 거는 삼천 원인데, 하루? 한 시간에 삼천 원이면 하루 얼마입니까? 그라면 만오천 원 아닙니까? 강의료가 하루 만오천 원입니다. 만오천 원 그거 지금 저 양성원에 내가 저축을 해 놔서 나 한번도 받아보지는 안했고 저축해 놨는데 잘 저축돼 가지고 있습니까? 그 딱 저축이 돼서 하나도, 나도 그래 받고 합니다.
그러기에 석 달 셋 주간을 연구비를 줘 가지고서 연구해 가지고 한 주간 발표합니다. 그거는 뭐이냐? 이제 모든 사람들이 가르친 걸 그런 걸 가지고 자꾸 지저분하게 그런 걸 하지 말고 그거 그것은 참고로 삼고 거게서 하나님이 깨닫게 해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는 거, 사람에게 배운 것 말고 하나님에게 배운 그것을 가르치라.
그러니까 가르치는 가운데에 일주간 내 그 교수가 와서 가르치는 데에 사람들이 가르치는 그거는 다 그들이 다 책 보면 다 알아요. 알고 있는 그거 알고 그라고 난 다음에 그 교수가 하나님에게 직접 받아 가지고 가르치는 거, 아직까지 이 세상에 없는 거 그게 뭐이냐 그것을 지금 가치로 삼아 가지고서 듣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른 데에서 온 학생들이 다 신학교 졸업맡은 사람들, 신학대학 졸업맡은 사람들이 다 와 가지고 배우는데 여기 와서 새로 배우고 참 배울 게 있다고 그들이 와 가지고 사람도 변화되고 또 배우는 지식도 변화돼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내가 자꾸 하는 건 뭣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느냐 하면은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서 알았고 열어 주셔서 알았지 인간의 힘으로 안 게 아니고 하나님이 알려 주셔서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려 주시면 알고 안 알려 주시면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알려 주심을 받는 자는 먼저 외부가 뭐이냐? 알려 주심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서 받아서 알라고 하는 그 사람이 됩니다. 받아서 알려고 하는 그 깨달음이 옵니다, 그 깨달음.
그러면 ‘이거는 내가 암만 연구한다 해도, 내가 이거 연구한다 해도 알지 못한다.’ 이거는 뭐이냐? 암만 앉아서, 굴에 앉아서 연구하고 천막에 가 앉아서 연구하고 도서실에서 연구실에서 앉아서 연구해도 안 되고 이 연구는 어떻게 해야 연구됩니까? 이 연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실행에서 연구를 해야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 자기가 자꾸 이 말씀대로 실행함으로써 실행함으로 사람이 변화된 것만치, 변화된 걸 자기가 안다 말이오. 실행하면 자기가 변화된 걸 알아요.
변화된 것만치 깨달아진다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거 느꼈을 거라. 뭐 많이 느끼고 적게 느낀 것만 있지 여러분들도 느꼈을 거라.
말씀대로 실행을 하고 나면은 자기의 양심에 불쾌감이 없습니다. 양심에 께꾸름하고는 암만 깨달을라 해야 못 깨달아. 양심에, 실행을 하고 나면 양심이 깨끗해지고, 자기 마음이 깨끗해지고, 또 정신이 깨끗해지고, 기분이 깨끗해지고 자기가 봐도, 자기가 봐도 ‘요럴 때는 요 참 요게 아마 요게 참사람인가보다.
요거는 사람이 됐다. 요때는 사람이 됐다.’ 아무 가책될 것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 됐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있다 그거요.
그 사람이라도 그만 나쁜 거 하나 죄 하나 짓고, 죄 하나 짓고 나면은 그만 께꾸름해 그게 달아나 버립니다. 그게 그만 달아나고 광명의 빛이 달아나고 참사람의 인격이 달아나 버리고 없습니다.
없다가서 다시 그걸 회개를 하고 그걸 회개를 해서 그걸 고쳐서 다시 고쳐 가지고 고친 게 마음으로 고침만 가지고 안 되고 생각으로만 고쳐 가지고도 안 되고 자기 행동까지 고쳐졌을 때에 그것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여러분들이 보게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은 아무리 안다 해도 아는 대로 안 믿으면 아무 소용 없다. 아는 대로 안 믿으면 소용 없어. 또 아무리 제가 믿는다 해도 실행 안 하면 소용 없어. 아무리 실행해도 또 뭐입니까? 실행해도 뭐입니까? 실행을 하는데 안 됩니다. 실행을 해도 뭐입니까? 실행한 것만치 변화가 돼야 됩니다. 변화가 안 되는 건 실행 가짜 실행했다 말이오. 실행하는데 실행에 가짜 껍데기로 뭐인가 외식 실행을 했다 말이오.
자, 실행을 했는지 안 했는지 하는 것은 뭘 보고 아느냐? 변화 보고 알고, 또 그 사람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뭘 보고 압니까? 행함 보고 압니다. 그 사람이 배워서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건 뭣 보고 압니까? 믿는 것 보고 알아.
아는데 알고 믿어지지 안하는 것은 모르는 거라, 아직까지. 알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것은 모르는 증거라. 아는 증거는 믿는 데서 나왔다 말이오. 아는 증거는 뭐이요? 아는 증거는 믿어지는 것이오. 하나님 말씀을 참 알았으면 믿어지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안하는데 왜 안 믿어지겠습니까? 알면 믿어지는 것이 바로 알았다는 증거요.
또 믿는 증거는 뭐입니까? 믿으면 절대로 행합니다. 믿으면 행하는 것이 믿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믿기는 믿는데 행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보호합니다. 하나님 능력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보호합니다. 전능이 나를 보호합니다.’ 이라는데도 공산주의든지 사자든지 사자가 ‘어흥’ 하고서 이래 오면 `하나님의 전능이 나를 지키는데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자기에게 두려움이 와서 떨리면 그게 믿는 겁니까 안 믿는 겁니까? 안 믿는 것이라.
자꾸 믿을라고 애를 쓰고 이래 자꾸 해 가지고 ‘믿습니다’ 믿는 공을 자꾸 들이니까 `하나님의 전능이 나를 지키고 있는데 사자 네가 어떻게 하리요?’ 차차 차차 두려움이 없어지고 사자에게 대해서도 ‘네가 암만 해 봤자사자 옆으로 지나가면서라도네가 암만 해 봤자 전능자가 지키기 때문에 전능자가 나를 네 입이 삼켜지라 해야 삼켜지지 네 자유권은 하나도 없어. 주님의 전능의 절대 주권의 개별 섭리가 있어. 사자야, 네가 암만 내 옆에 와도 내 팔을 물지 못해.’ 이렇게 그런 것이 그것이 믿어지는 증거입니까 안 믿는 증거입니까? 믿는 증거라.
믿는 증거는 행함에 나타난다 그말이오.
그 행함에 바로 행했나 안 행했나 하는 행함의 증거는 어데 나타납니까? 자신 성화에 나타난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외식을 하지 말라 그말이오. 오늘 아침에 지금 말하는 것은 이 외식하지 말고 껍데기로 암만 그래 해 봤자 소용 없어. 이제 아는 대로 믿어야 되고! 믿는 대로 행해야 되고! 행한 대로 성화가 됐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은 증거로 제일 첫번에 껍데기가 뭐라 했지요? 무슨 표적이라 했소? 의식주 표적, 또? 건강과 수명의 표적, 또? 의인되는 표적, 또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사활의 대속과 나와 한덩어리 되는 것이라 말이오.
사활의 대속과 나와 한덩어리 됐으면 됐어. 이거면 다라. 이 전지 전능의 모든 건 다 가졌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도 뭐 얼마 안 나왔어요. 오늘 아침에도 뭐 얼마 안 돼. 한 팔백 명 될까 그런 정도라. 이거 자꾸 내려오니까 이거 암만 말해도 여러분들이 지켜 주지 않으니까 내려오지. 암만 알아봤자 새벽기도 안 나오면 소용 없어. ‘새벽기도 나와야 되겠다’ 이렇게 알아도 소용 없고 `새벽기도 꼭 나간다, 나가야 된다.’ 이 믿어도 소용 없어. 나와야 되지 안 나오면 그거 소용 없어. 안 나오면 성화 안 돼.
삼십 분 기도 빠지지 마십시오. 이거 앞으로 이제 큰 일 냅니다. 삼십 분 기도, 요번에 김일성이가 뭐 죽었다 하니까 또 야단이고 모두 좋아서 춤을 춘다 하더니만 또 안 죽어서 또 실쭉하겠어. 죽고 안 죽고 상관이 없어, 우리에게는.
그라면 안 죽었느냐? 안 죽었는지 죽었는지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몰라. 그 사람들 안 죽었다고 누가 만났다 한다고 그것도 믿을 수 없는 거, 또 죽었다 해도 믿을 수 없는 거, 그거는 죽었든지 안 죽었든지 상관이 없어. 상관이 없고 우리는 그런 말은 또 조심해 들어야 돼. 죽었다 하니까 거게 대해서 우리에게 뭣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지금 이런 모든 소리들이 들리게 하시느냐 하는 그것은 우리가 알 필요 있어. 주의해야 돼요.
어짜든지 이게 다 예수 잘 믿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리 듣고 퍽 섭섭했어. 왜 섭섭했느냐? 그 자꾸 그거 지금 우리 구원 이루도록 하느라고 평생 애를 썼는데, 평생 애를 쓰고 노력을 했는데 그만 그거 없어졌다 하니까 안 됐어.
그저,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는 예수향만 피운다” 뭐 환난이 지금, 사자굴이 없었으면 어떻게 다니엘의 신앙을 전파해 가지고 우리가 다 은혜를 받게 합니까? 불미불의 느부갓네살 왕의 혹독한 고형이 없어서 불 속에 집어던지는 그게 없었으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그 신앙의 승리가 우리에게 어떻게 은혜가 되겠소? 이러기 때문에 그저 세상을 어떻게 하든지 해서 예수 믿는 데 어려움이 올수록 우리는 정금만 돼 나갑니다. 알겠습니까? ‘폭풍아 불어라 노암은 웃는다’ 막 폭풍이 때려부니까 저 산만당에 그 큰 바위덤승이가 폭풍이 들이 부으니까 이 날아갈듯이, 이 폭풍이 바위덩이를 날려 갈듯이 깨뜨릴듯이 이래 쌓지마는 그 수천 년 가도 가만히 있는 그 노암은 웃는다. 그뭐 바람에 대해서 꼼짝 않는다 말이오. 이 세상에 어떤 풍화가 상관이 없어. 그게 믿는 사람의 신앙 아닙니까?
새벽기도 계속해 나와요. 이 나왔으니까 앞으로 나온 사람은 좀 뒤로 후퇴하지 말고 안 나온 사람들 나오구로 해요. 나왔던 사람들이 또 안 나오지 자꾸 이라니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