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주일

 

1986. 10. 25. 새벽(토)

 

본문:히브리서 4장 1절∼16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구약에 속한 사람 말입니다.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믿음을 화합하지 안했기 때문에, 믿음하고 들은 말씀하고 화합이 돼야 되는데 “하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우리들 믿는 사람으로 보고,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러면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안식은 지금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안식할 곳을 찾아서 가는 것입니다.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이 말씀이 있지마는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벌써 하나님 맹세해서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이 구약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제칠일에 관하여」 제칠일이 안식일입니다.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안식일 안 지킨다 말 아니고 안식일 못 지킨다 말 아닙니다. 안식일 못 지킨다 말이 아니고 안식하는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니까 그 안식에 들어갈 사람이 있다 말 아닙니까?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했으니까 저희가 아닌 자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예약적으로 예표적으로 그들은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완성해 놓은 대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예표로 받았기 때문에 예표로 예약으로 받은 그것이 복음입니다. 짐승의 피로 속죄제, 속건제, 번제, 화목제의 이 대속의 약속을 예약적으로 받은 것이 그들이 복음 받은 겁니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무슨 순종? 예약을 순종치 안한 것입니다. 예약을, 짐승의 피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 이것을, 이 예약을 순종 안 했습니다. 아벨은 순종해서 구원에 이르렀고 가인은 순종치 안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다시 안식일을 정하여, 다시 안식일을 정하여, 지금 우리가 지키는 것은 다시 안식일을 정한 날입니다, 안식일로.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다시 안식일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어느 때든지, 이 예언이기 때문에, 미래에 닥칠 것이기 때문에 이제 다시 안식일이 정해지거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이 소리를 듣거든, 다시 복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여호수아가 준 그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에 주신 안식이 그대로 계속되는 안식이요, 또 십계명에서 그 다음에 안식을 한번 더 강조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안식 준 그것이 안식이 그들에게 됐다면, 그로써 만족하다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안식을 준비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구약에서 안식에 들어간 자도 있습니다, 대부분이 다 멸망을 받았지마는.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요 쉬느니라, 자기 일을 쉬느니라. 요게 대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을 쉬느니라 하는 요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또 안식일이라 하니까 안식일에 대해서 깨달음을 바로 가지지 못해 가지고 실패를 합니다.

1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그러면 안식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세상에서 일 안 하고 하는 그것이 안식일 지키는 게 아니고 안식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그러면 다시 안식일을 정해 준 것입니다. 안식일을 정해 줬는데 이 안식일을 정해 주셨으니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되 그렇게 믿는 그런 잘못된 것을 우리가 모방하고 그것을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안식 지키기가 쉬우니, 안식 준비하기가 쉬우니, 안식일을 그렇게 지키기가 쉬우니까 그런 것을, 그런 데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 말은 무한한 능력 있는 걸 말합니다. 무한한 능력이 있고 하나님 말씀이 자든지 혹은 정신을 잃었든지 바보든지 뭐 복잡하면 챙기지 못하든지 그렇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없는 가운데에서 엿새 동안에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창조했는데 그 한 창조한 조그만한 곤충이나 이 식물 한 포기도 그 속에 내부 구조되어 있는 것을 인간들이 모르나 인간들의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서 조그만한 세균 하나도 그 속에 일생을 인간이 연구해서 그 세균을 그저 몇 부분이나 아는지 아는 대로 알아서 세균 박사도 있고 또 조그만한 식물 그것도 어떤 요소인지 그걸 모르나 지금은 그걸 발명해 가지고 그것을 가리켜서 아마 식물 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하는 말은 무한한 능력을 가졌다 그말입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어떤 칼보다 「예리하여」 날카롭다 말입니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이러니까 인간의 모든 것을 다 이 말씀이 다 해부하고 이 말씀이 안 들어간 데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속 세포까지도 다 이 말씀이 다 들어가서 이 말씀에 걸린 것은 전부 정죄가 되고 지금도 다 죽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이 말씀이 들어가지 안한 좁은 곳이 없고, 들어가지 않는 깊은 곳이 없고, 들어가지 않는 여문 곳이 없고, 들어가지 않는 어두운 곳이 없습니다. 인간이 몰라 그렇지 이 말씀은 다 들어가서 정죄할 거 정죄하고 벌써 도울 거 돕고 지금도 그렇게 역사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혼은 우리 마음을 말하고 영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물을 말합니다. 혼은 내나 물질에 속한 것입니다. 「및 관절과 골수」 이것도 고기덩어리를 말합니다.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우리 마음에 모든 생각한 거 우리 마음에 뜻한 거 이런 것을 전부 이 말씀이 낱낱이 다 상대해서 심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이 우리 마음을 심사하지 안하고 상대하지 안한 마음이 없고 상대하지 안한 뜻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기 때문에 이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일시 동안에 천 번 이런 마음을 먹었다면 천 번 먹은 마음 그것이 다 이 말씀이 낱낱이 다 취급하고 있다 그말이오. 전부 관리 취급하고 있다 말입니다.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지음을 받은 것들이 「하나라도 그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과 같이 드러나느니라」 이렇게 우리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는 마치 이거 유리 속에 있으면은 다 아는 것처럼 우리는 전부 투명체와 같이 사람들이 볼 때에 가리워져서 안 보이고 사람도 그 사람을 볼 때에 그저 형체만 보는 사람 있고 또 형체 속에 더 보는 사람 있고, 여기 관상 보는 것은 형체 속에 좀 더 들여보는 것입니다. 그거는 형체를 통계하는 것입니다. ‘아, 코가 저래 생긴 사람은 어떻다, 귀가 저래 생긴 사람은 어떻다.’ 또 뭐 그런 것은 많은 사람들을 통계해 가지고 그래 사는 사람들은 다 그대로 거기 또 거의 나타나고 있다 말이오.

이것만 볼 뿐 아니라 같은 사람이지마는 ‘저 사람은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다, 저런 심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 보고서 ‘그 사람은 못쓸 사람이다, 그 사람은 가까이 접해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이 볼 줄 몰라 그렇지 말로 나오고, 태도로 나오고, 행동으로 나오고, 피부로 나오고, 눈초리로 나오고 모두가 다 나온다 그말이오, 그게 다 겉어머리로 발휘하고 있는데 볼 줄 몰라 그렇지. 또 그뿐 아니라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사람도 사람의, 인간이 나타나지 안한 그런 것을 비밀로 다 보고 있다 말이오.

다 보이지마는 그것을 자기가 확실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고 또 그런 걸 책임지지 안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나 ‘저 사람은 어떤 일이 있다, 어떤 행위가 있다, 어떤 일이 있다.’ 하는 걸 다 짐작을 하고 있다 그말이오.

이런데,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동촉하고 계십니다, 낱낱이.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라 말은 우리를 구원도 하셨지마는 우리를 심판도 하실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대제사장,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게 제사장이냐 하면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가 잘못돼 가지고 마찰되는 그런 것을 제사장이 무마시켜 가지고 창조주도 피조물에게 대해서 소망과 만족을 가지고 피조물도 이 창조주에 대해서 소망과 의뢰를 가질 수 있는 이런 조화를 붙이는 것이 제사장직이라고 오랫 동안 가르쳤습니다.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곧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과거에 짐승으로 제물했던 것을 당신 자체로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를 제물 삼아 가지고 당신이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의 이 제물을 드려 가지고 우리들이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의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하는 말씀은 복음을 굳게 잡을지어다.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입혀 주신 대속의 세 가지 공로를 벗으면 죽고 입고 있으면 삽니다. 만일 벗어서 실수했으면은 빨리 이 옷을 입어야 됩니다. 이 옷을 가리켜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는 그 흰옷이라고 상징한 것도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대제사장 예수님은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우리의 연약한 거, 우리가 뭐 연약해서 결심하고 어제 손 들어 결심했지만 오늘 새벽에 못 나오고, 또 죄 안 짓겠다고 금방 울고 금방 죄짓고 하는 이 모두 다 우리가 연약한 것과 또 악령의 궤휼이 가득 차 있는 이런 것을 예수님이 모르시지 안하고 이런 것을 보고 우리 모양으로 ‘왜 사람이 저따위일까?’ 이렇게 생각지를 아니하고 우리를 체휼하신다 말입니다.

체휼한다 말은 무슨 말이고 하니 당신의 몸과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체휼이라 말은. 「쳬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체휼한다 말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우리와 같이 땅위에서 시험을 다 받았습니다. 당신이 시험 받은 거는 얼마나 받았느냐? 우리 택한 자가 천 명이면 천 명 몫을 시험을 받았습니다. 만 명이면 만 명 몫을 시험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짧은 세상을 지나가실 때에 시험 받으신 것은 택한 자 전부를 대신해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 그 시험 받은 중에는 내 몫의 시험도 당신이 대신해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래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이런 시험을 받았지마는,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패전한 일이 없고 완전 승리를 했기 때문에 그 승리가 우리 승리가 된 것입니다. 그 승리를 주님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입으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 때문에 우리 몫을 대신 해 가지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 승리가 됐습니다.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를 체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를 얼마든지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이 대제사장 앞에서 「긍휼하심을 받고」 긍휼히 이래 불쌍히 여기시는 그 불쌍히 여김을 우리가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때를 따른다는 것은 현실 현실마다 우리에게 그 현실에서 족족한 승리로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살 수 있는 완전자로, 무죄자로, 율법을 완전히 이행자로,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는 자로 그렇게 현실을 살 수 있는 그런 은혜를 「때를 따라」 그말은 현실 현실마다 주신다는 말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은혜의 보좌에」 은혜의 보좌라 말은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나와서 강을 이루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강이라, 생명강 좌우 언덕에는 달마다 열매 맺는 생명 나무 과실이 가득히 맺어 가지고 있더라 하는 것을 상징으로 했는데 내나 예수님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나오는 구멍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우리가 다 받아 가질 수 있는 그 중보자요 곧 그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분은 은혜의 뭉텅이요, 은혜의 근원이요, 은혜의 중보입니다.

그는 자존자, 창조주, 무한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어 있으니 신성은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신성은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우리의 중보입니다.

이래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이 아니고 일위가 되기까지 그렇게 신인양성일위까지 결합된 것은, 결합이 아니고, 모순된 말이오. 결합이 아니고 일위 된 거, 하나 됐다 말이오. 하나 된 것은, 하나 돼 가지고 이 직책을 하고 있습니다.

일위는 , ‘양성일위’ 이 위는 뭐 하고 있는가? 우리의 대속과 구속의 일을 영원히 하고 있기 위해서 다시 또 인성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셔서 영원히 신인양성일위를 벗지 못하고 우리를 위해서 영원히, 창조주 자존자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성을 입고 계시는 이 부활하신 그 사랑은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랑과 꼭 같은 중량의 효력을 가진 사랑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지니라」 「담대히 나아갈지니라」 우리가 그분이 대형, 대행, 대화친을 하셨고, 또 우리에게 세 가지, 대형, 대행, 대화친과 이 세 가지 공로로 인해서 우리에게 성령과 진리를 보내 가지고 이 다섯 가지로 우리를 완전히 살렸습니다. 우리가 중생된 것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우리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완전 대속이 있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이 대속을 믿지 못하게 자꾸 이렇게 하나 이 대속을 언제든지 믿고,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범죄했을지라도 이 대속을 믿고 빨리 이 대속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또 자기가 자꾸 이것을 하나님의 피를 속된 것으로 여겨서 ‘뭐 그거는 아무리 범죄하고라도 또 그래 된다 된다’ 이렇게 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 대속의 피를 속된 것으로 여기는 그런 자는 하나님이 죄 정하지 않지 않고 진노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거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럴 때에는 그것이 고범죄인데 고범죄는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그 죄를 고쳤으면, 고하면 사함 받아서 주님과 나와의 연결되고 고범죄 된 것은 고치면 고친 즉시 연결됩니다. 고치면 고친 즉시 연결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하루 백 번 잘못해서 떠났으면 즉시 내가 그 시간 그것을 고쳐 버리면 그 시간 연결됐습니다. 연결되고 다시 떨어지지만 안하면 되는데 떨어지면 또 마귀 자식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런데, 오늘 금요일날 왔는데 여러분들이 연구하기 위해서, 안식일이 세 번 지나갔습니다. 제일 처음에 안식을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안식 줬습니다. 줬는데 그때는 대속이 없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사람들에게 주시면서 “네가 정복하고 통치하라” 이런 권세를 주시고 다만 그때에 주신 법은 뭐이냐 하면은 “동산에서 동산을 지키고 다스리고 하나님이 먹으라는 것만 먹고 먹지 말라는 건 안 먹고” 요것이 하나님이 계약하신 계약이었습니다.

요것만 지키면 그때에 죽음이 없고 영원히 안식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으신 게 다 저희 것이라. 정복하는 건 저희들이 다 다스릴 수가 있고 저희가 소유하고 얼마든지 이용할 수가 있어서 에덴동산에서는 아무런 이런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모든 피조물들은 다 정복이 됐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아담에게 다 복종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라다가 배암에게 꼬임받아 가지고 이 안식을, 안식하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을 주셨는데 안식에는, 복 줬다는 것은 뭘 복 줬다 하느냐 하면은 이 일차 안식에서는 “이 모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식하라” 하는 이것이 복입니다. 우리의 복과는 지금 다릅니다. 그는 다 유한의 복이요 땅의 것들인데, 이랬는데 그거 하나님과 안식을 할 수 있는 그 법칙을 줬는데 법칙을 어겨 가지고 그만 거게서 안식에서 패전했습니다.

패전해서 하나님께서 거게 하나 더 첨부해 가지고 대속을 첨부했습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인해서 너희들이 이렇게 배암의 후손으로 다 승리하는 이 대속이 있을 것을 그때 말씀하시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이 대속의 예약적 예표적 대속이 있었으니 이것이 곧 짐승으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을 얻을 수 있는 모형적, 예표적, 예약적 대속인데 말하면 성경에는 지금은 실상이요 그때는 그림자와 같다고 그렇게 표시한 것도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그때는, 구약 시대는 이 두번째 안식을 가지고 그들이 다 구원 얻게 됐는데 두번째 안식은 예수님의 예약적 예표적 대속을 소망하고 지켰기 때문에 이 대속을 완전히 지킨 사람들은 우리의 구원과 꼭 같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그 구원을 언제 얻느냐? 그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그때에 이제 휘장이 찢어졌고, 또 바위가 터졌고, 모든 흑암에서 빛이 다시 드러났고, 또 무덤이 열리고 무덤 가운데에서 죽은 성도들이 일어나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예수님의 재림 때 부활을 인하여서 다시 머물고 있는 그때에 비로소 그들의 바라보던 그 구원이 완성됐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십자가에 못박히지 안했으면 구약 시대에 있는 모든 그 대속의 예약을 믿는 일은 다 헛일이 되고 맙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당신이 모든 예약적으로 선포해 놓은 그 전부가 예약입니다. 구약은 다 예약인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안 하면 벌한다” 그런 게 다 예약인데 그 예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 했습니다. 그 완성은 언제 했느냐 하면은 십자가 못박혀 죽으실 때에 대속의 완성이 됐고 또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구속의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그때 그들은 미래의 이 대속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들이 약간 있었고, 이 신약에서는 이 완성된 대속을 입음으로써 그때와 다른 “성령을 물붓듯 부어 준다” 하는 그 약속이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루어져서, 구약 성도들이 성령 받은 것과 신약 성도들이 성령 받은 것이 다릅니다. 구약 성도들이 성령 받은 것은 언제든지 중복적이고 외부적입니다.

이래서 감화를 시켜서 역사해서 역사할 때만 역사했지마는 신약 시대는 이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 중생시켜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그때는 다 예약적 중생이요,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는 있었지마는 성령이 우리 생명이 되어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명돼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중생한 생명은 성령의 이 능력이 우리의 생명이 됐고, 진리의 능력이 우리 생명이 됐고, 예수님의 피의 세 가지 대속의 공로가 우리의 생명이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이라” 말은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안식일 말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이 안식일 하는 것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그 준비를 하는 날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것을 구약 때도 잘 깨닫지 못해서 일반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안식 지키는 것인 줄로 그렇게 알았고, 일하지 않는 것은 안식 지키는 것이지마는 일하지 않는 거게서는 안식 지키는 외부의 소극적인 행위고 적극적인 행위는 안식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예표한 예약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번제 이 제에 거리낌이 없이, 있으면은 제사를 드려 가지고 하나도 하나님과의 허물도, 죄도, 모든 불목한 것도 이런 모든 하나님께 다 바쳐, 번제는 다 바치는 것입니다.

다 바치는 그런 것이 미완성 될 때에는 완성하는 그 일을 안식일날 한번 다져서 깨끗이 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갔지마는 그거는 하지 못하고 그저 그날 일하지 안하는 것으로, 일하지 않는 것은 일을 안 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고 일할 수가 없다. 그 일일랑 하지 말고 이 일 하라 하는 거, 이 일 하라 하는데 일하지 말라는 그것만 듣고서 형식으로 지켰지 이 일 하라는 그것을 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때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순종치 안한다 말은 무슨 그날 일하지 말라 해도 일을 해서 그렇다 말 아닙니다.

이거 잘못하면 외식으로 꺼꾸로 깨닫게 되는데, 일하지 말라 했는데 일을 했다는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예약 예표로 되어 있는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 이 제사에 대해서 완성을 이루지 못해서 자기에게 허물이 그대로 있고 죄가 그대로 있고 불목성이 그대로 있고, 하나님께 다 바쳐 ‘이거는 주님의 것이라’ 하는 이 일이 완성되지 안한 그대로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순종치 안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은, 주일을 안식이라 할 터인데 왜 주일을 안식일이라 하지 안했느냐? 다시 정한, 다시 정한 안식, 다시 정한 안식이라고 하면은 어떤 데에 유리한 점이 있느냐 하면은 ‘구약 때에 하나님이 정해 준 제칠일 안식은 폐지됐다’ 하는 거게 대해서는 강조가 되어지고 확실히 알아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리하지마는 그것보다 더 큰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주의 날이라 하는 건 왜 주의 날이라 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의 이 주일이 반이 됐습니다. 죽으심의 반, 또 삼 일 만에 부활하심의 반, 이래서 죽으시고 난 다음에 이 주일이 시작되지 안했고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때부터 이 주일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면 주일은 예수님의 사활의 날이라. 사활의 날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주일날은 우리가 구약에와 같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하지 않는 것은 일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할 수 없느냐? 이는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그 은혜를 주일날 받아야, 주일날 받아야 이 능력 받아 가지고, 깨달음도 받고,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의 능력도 받고, 영감의 능력도 받고, 진리의 능력도 받아서, 이는 깨달음도 또 소망도 행함도 모든 이 새생명에 속한 것을 주일날 하나님이 특별히 주십니다. 설교로 주실 뿐 아니라 주일날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말입니다.

주일날 주시기 때문에 이 날에 이것만 받아도, 이것만 받을라 해도 우리는 전심 전력을 다 기울여도 이걸 원만히 받느냐 하면은 우리만 다 기울이면 된다는 약속을 응한 것뿐이지 우리가 다 기울여도 주일날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활의 대속의 은혜를 이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있는 전부를 여기 다 기울여서, 딴거 할 여가가 없이, 딴거 할 여유 시간이 없으니까 있는 걸 여기 다 기울이는 것을 하나님이 순종이라 하는 것이지, 다 기울인 것이지, 일만 하지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일 하나도 안 하고 있어도 하나도 순종 안 하는 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주일날은 일하지 않는 날이라, 이래서 엿새 동안 자기 일 한다 말은 주일날 종자적으로, 모든 재료적으로, 환형적으로 얻은 것을 우리가 엿새 동안에, 자기 일이라 하는 것은 무슨 농사 짓는 것이 자기 일이 아니고 자기 일은 자기 구원 이루는 게 자기 일이기 때문에 자기 일을 하는 엿새 동안에, 그 주일날 받은 걸 엿새 동안에 하다가 또 모지라니까 삼일 예배를 또 정해 가지고, 안 됐으니까 삼일날 또 보강을 해 가지고, 또 안 되니까 금요일날 보강하고 자꾸 이래, 헐어지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주일날 또 은혜 받은 것을 우리가 엿새 동안에 힘써 이루는 이것이 우리의 구원 이루는 이 일인데, 이 주일을 그 일차, 이차, 삼차적으로 우리에게 온 다시 정한 안식일인데 이 다시 정한 안식일이라는 뜻을 우리가 모르고, 그것보다도 우리가 이 주일날은 뭐 하는 게 주일날인가? 주님의 죽으심으로 세 가지 대속의 은혜, 이 능력, 또 부활하심으로써의 우리에게 그 대속의 이 은혜, 이 사활의 은혜를 받는 것이 우리가 주일날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전심 전력을 다 기울여 남김 없이 다 들여 가지고 이를 받아 가지고 받은 이것을 힘입어서 엿새 동안 자기 구원 이루는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요 하나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당신 하는 일에 쉬었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을 쉬었습니다. 쉬었다 말은 또 쉬다가 새로 한다 말이 아니고, 쉬었다 말은 앞으로 새로 한다는 거게다가 전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쉬었다 말은 이제 창조하시는 일이 다 완료돼서 끝났다 그말입니다.

이제 창조하는 일을 다했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창조를 안 합니다.

창조는 영원히 하지 안하고 창조로 다 했습니다. 영계나 물질계나 다 같이 동시에 창조했습니다. 동시에 창조한 걸 성경에 보면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하셨는데 이 창조는 다시는 하지 안하고 그 다음에 하와도 창조할 때에 갈빗대 빼 가지고 하나님이 여인을 만드셨다, 그 다음에 만드셨기에, 창조라 하는 것은 없는 데에서 만드는 게 창조요 창조하신 그것을 하는 것은 요새 말로 말하면은 다시 만드는 것이니까 요새 말로 말하면 가공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그것을 다시 재창조라, 창조를 가지고 이렇게 만들고 저렇게 만들고 또 사람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어 내고 사람을 가지고 사람 만들어 내는 그거는 다시 만드셨다 이렇게 했지 창조는 쉬었다 말입니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창조는 그 엿새 동안 창조로서 완전히 완료적으로는 다 창조됐습니다. 무궁세계에 뭐 이것이 천번 만번 이렇게 변동돼도 창조된 그것 가지고 이렇게 다시 재창조 이렇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두번째 제이차 창조는 진동되지 아니할 것들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준비는 영원 전 목적을 정하신 그때부터 정해 가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과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진동되지 아니할 것은 완성됐습니다.

우리가 이제 예수를 믿어서 사죄, 칭의, 화친, 다시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 영원히 사는 이 일은 우리가 만드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고 그분이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언제부터 시작했느냐? 시작한 것은 영원 전 목적 정하시는 그때부터 시작한 일인데, 창조, 이 물질계 엿새 동안에 창조하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는 큰 것이 아니고 근본 당신이 창조한 거는 뭐이냐? 목적 그것이 당신이 근본 변동치 않을 그 창조요, 그것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변동될 것들을 창조하시고 예정하시고 그런 것을 모두 해 가지고 당신의 목적이 달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루어 놓은 것을 순전히 받기 때문에 은혜로 받는 것이고 우리의 공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꼭 자기가 한 것같이 해서 되는 것이나 실은 자기 한 것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 은혜라 하는 것을 칼빈 선생이 깨달았는데 대단히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적 은혜라는 것과, 또 하나님의 주권과, 또 궁극적 은혜, 또 제한적 대속 이것은 대단히 칼빈 선생이 깨달음의 그 범위가 아주 넓고 깊었다는 것, 아주 넓은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그 시대에 줘 가지고 오늘까지 우리들이 가지도록 이렇게 했고 또 오늘에 하나님이 또 새로 깨닫게 해 주신 건 또 깨달아 가지고 우리가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쉬셨다 하는 말은 하나님은 창조를 끝냈다라는 그 말씀을 말했고, 우리는, 쉬심같이 우리도 이 안식에 힘써 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하는 모든 일을 쉬었다, 쉬었다. 쉬었다 말은 이제 끝났다 그말입니다. 끝났다 말인데 우리는 어떤 일을 끝냈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를 내가 입는 일이 끝났습니다.

사활의 공로의 은택을 입는 일이 끝났습니다. 입는 일이 끝나서 이제 세상에서 입은 것만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영원히 입고 삽니다. 세상에 입지 안한 것은 다시 입지 못합니다. 여기서 입는 일이 끝났다.

그러면 그거 뭐 쉬기는 뭐 쉬느냐? 거게는, 거게는 우리가 평안히 쉬는 데에는 첫 째는 제일 주권자와 우리와 단합이 돼서 친밀히 돼 가지고 있어야 거기는 평안이 있습니다. 주권자와 친밀히 돼 가지고 있어야 평강이 있는 것이고 자체가 강건해야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영육의 강건을 지금 만듭니다.

영육의 건강을 지금 만드요. 영육의 강건을 지금 만들고, 또 자기의 그 모든 처소가 좋아야 평안합니다. 이 쉬었다 말은 우리 처소 만드는 것은 지금으로 끝납니다. 다시는 처소를 못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도 이 처소 만드느라고 탄식하면서 그렇게 무거운 짐진 것같이 노력했습니다. 처소 만드는 것도 지금으로 끝나고, 또 모든 실력도 지금으로 끝나고, 모든 존재와의 화친도 지금으로 끝나고 모든 존재의 환영도 끝나고, 모든 존재를 영원히 줄 수 있는 선물,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히 줄 수 있는 선물도 오늘로서 준비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 쉰다 말은 모든 준비가 다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준비 많이 한 사람은 많이 한 대로 끝났고, 병신은 병신, 예를 들면은 병신은 병신대로 가고 또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대로 가고 천인은 천인대로 가서, 거게는 무슨 죄악이 없습니다. 다시 더러워지거나 죄악이나 병든 거나 아프는 것이나 이런 모든 대적이 없습니다. 대적이 없어도 자기 된 대로 산다 그말입니다. 자기 된 대로 살기 때문에 그 나라의 것을 지금 준비해야 됩니다.

요래서, 주일과 안식일에 대해서 좀 연구를 해 가지고, 이제까지의 지금 이렇게 쌓아 나온 이것이 좀 미비된 점을 우리가 또 우리 책임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 보충해 가지고 보강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라고, 지난밤에 말씀한 대로 여러분들이 이래 어려우니까 기도를 어째 합니까? 기도는 하나님께서 첫째 우리에게 그런 어떤 환난이 당신의 뜻으로도 보낼란지 안 보낼란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의 뜻이라면 어떤 환난이 와도 이 환난에 우리가 요동치 않는 신앙 가지고 믿음으로 죽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모든 사물을 대하고, 모든 인민군도 믿음으로 대할 수 있는, 이 믿음을 계속할 수 있는 이런 은혜, 어떤 고문과 고형이나 어떤 독주사를 주고 어떤 독약을 마시고 어떻게 고문과 고형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에게 대한 것이나 모든 인류에게 대한 것을 요동치 안하도록, 그 원수들이 자꾸 독침으로 찌르면 사람 미워하기 쉽습니다. 사람 미워하면 영생이 그 속에 없다 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러기 때문에 그때에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지 안할 수 있는 사람, 또 하나님에게 대해서 변동 없을 사람 이런 사람 되기를 우리가 기도해야 되고, 두번째로는 이렇게 아직까지 믿음 어린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이제, 그들이 지금은 욕망을 하기를 뭐 김일성이는 요번에 뭐 제가 똑똑히는 모르지마는 가서는 그 의논 했을 겁니다. 이북에 있는 바다에서 요게서 떵 하니까 이북 안에 있는 거 다 들은 것 다 할 수 있거든. 다 연습 해 봤다 말이오. 요와 같이만 이래 요 재판만 밑에서 하면은 그 몇 시간 걸린다까지 다 계산 다 해 가지고 했을 것입니다.

이러나 그것도 참 비정상입니다. 저것뿐으로 다 되는 게 아니고 거게 주권자, 대주재자, 개별 섭리자가 계시는데 그분을 모르고 날뛰고 있으니 그것도 정신 이상자, 모두 비정상이라 하는 것을 엊저녁에 많이 말했는데 하나 내가 빠졌습니다.

비정상 말하는 거 하나 내가 가 보니까 빠진 게 있는 거 뭐이냐 하면은 이제 이 미국이니 일본 나라니 그런 강대국이기 때문에 그런 나라를 아주 피난처로 알고서 거게 시민권이나 이래 가지고 와 가지고 있으면서 여기서 있다가 무슨 전쟁 나면은 이 시민권 가지고 후루루 날아가면 된다고 그렇게 말하니까 그것을 영원한 피난처로서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도 비정상의 사람이오.

비정상은 뭐입니까? 비정상이라 말은 무슨 말이요? 예? 비정상이라 말은 뭐입니까? 정상이 아니라 그말이 아니고, 그러면 말이 돼야지? 미쳤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비정상이라 말은 미쳤다 말입니다. 그게 비정상은 정상이 아니라 그게 아니고 비정상이라 말은 다 변질되고 변상됐기 때문에 미쳤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나왔는데 이렇게, 오늘 아침에 나온 사람들은 저 있기는 좀 많이 더 있지마는 천 명 안 됩니다. 천 명 좀 미만 됩니다.

이걸 이렇게 못 하고 이라면 안 돼요. 이라면 우리 불쌍한 사람만 돼요. 환난 올 때 그때 기쁘고 즐거움으로 평안으로 사는 사람은 지금 울어야 됩니다.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은, 준비 고통당하는 사람은 그때에 평안하게 지내고 지금 평안하게 지내는 사람은 그때 준비 고통 안 했으니까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때 당해도 당하기는 당하요. 지금 미리 당하면 구원되고 그때 당하면 실패되고 고통만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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