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16:15
아이와 같이 집회에서 말씀을 받자
1987. 5. 4. 월밤집회
본문:마태복음 13장 53절∼58절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다니시면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시고 또 여러가지 비유로 천국에 대한 도리를 가르치시고 또 자기 고향으로 가서 고향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늘 따라다니면서 듣는 사람, 또 그때에 처음으로 듣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놀라 가로되”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 놀라서 말하기를 ‘이 지혜가 어디서 왔으며 이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그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그들이 다는 모르지마는 그래도 저희들이 이제까지 알고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들려졌고 또 깨달아졌음으로 놀랐습니다. ‘이 지혜가 어디서 났느냐, 또 이 능력이 어디서 왔느냐?’ 이렇게 놀라서 모두 수군거렸습니다.
놀란 것은 그들이 놀랐지마는 실은 놀라야 할 그 놀랄 정도대로 놀란 것은 아니고 그저 놀랄 만한 사실에 하나의 먼 데서 오는 한 향기를 맡아진 거와 같은 그런 정도입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신 이 지혜에 대해서 저들이 알 대로 알았다면 다 기절해서 죽어버립니다. 또 이 능력도 알대로 알면 다 기절해서 죽어버립니다.
왜? 이 지혜와 능력의 범위는 심히 광대합니다. 얼마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지혜가 범위가 넓은가? 그 범위는 시간적으로 말하면 영원 전에서 영원 후 이 영원한 시간을 다 계산하고 맞추어 가지고 거기에 하나도 잘못됨이나 또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이 말씀하신 이 말씀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굉장히 광대합니다.
이 말을 여러분들이 들려져야 합니다. 인간들은 말해 봤자 혹 하루라는 그 시간 범위 내, 또 이런 무슨 대정권자들이 말하는 것도 그 말하는 것이 불과 며칠에 지내지 못하는 범위 내, 왜? 그들이 말한 것이 며칠도 안 가서 그것이 다 말한 거와 삐뚤어지기 때문에 거게 대한 것을 몰라 그런 것입니다.
또, 유력하다고 하는 철학자라고 하면은 그들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그 넓은 범위를 사색한 학설을 가리켜서 철학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들이 말한 그 철학의 전부를 다 뭉쳐 봤자 인간의 이 세상이라는 인간 일생에 대한 것도 정확하지를 못합니다. 모두 삐뚤어졌소.
전부 세월이 지나가면 ‘이 주장도 삐뚤어졌다, 이 사상도 삐뚤어졌다, 이 지도도 삐뚤어졌다, 이 계획도 삐뚤어졌다, 이 평가도 삐뚤어졌다, 이 비판도 삐뚤어졌다.’ 전부 삐뚤어진 것뿐이오.
실은 사람들이 거짓돼서 참을 찾을라고 하는 진실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겪어봐서 열 가지 말한 가운데에 아홉 가지 삐뚤어졌으면 그까짓 거 다 못쓸 거라 집어던져야 될 터인데 열 가지에 열 가지가 다 삐뚤어져도 그래도 거기 옳은 것이 있을 것이라 하는 그런 주장이요, 어떤 사람은 쌀 가마니에 돌이 한 개 든 것 보고 ‘보라 쌀 가마니인데 여기 돌이 들었다’ 이렇게는 말할 줄 알면서, 또 짚북더기 한 가마니 놓고 ‘이거는 짚북더기다’ 하니까 거기서 쌀 한 낱을 가려 내면서 `여게도 쌀이 있네, 짚북더미 가마니가 아니라 쌀 가마니로구만.’ 이렇게 꺼꾸로 반동적으로 반항적으로 해 가지고 스스로 멸망을 받는 것이 인간의 그 못된 원죄와 본죄입니다.
인간들이 뭐 어떤 유식한 사람이나 말한 그것이 자세히 살펴보면 하루도 완전히 알고 말한 말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그 말한 그 자체가 생각한 대로 하루도 안 맞습니다. 자기가 그러리라고 계산한 그대로 하루도 안 맞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욕심나는 대로 계획하고 환경 따라 움직이는 것뿐이지 그 말하는 지식이라는 그 지식이 송곳 끄트머리와 같이 그렇게 좁습니다. 이 말이 인정이 됩니까? 인간의 지식은 송곳 끝과 같이 그렇게 범위가 좁다 한 그말이 이해가 됩니까? 또, 그 사람의 그 종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그 사람의 말하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몇 종류에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거게는 약간 맞는 게 있으나 제가 종류적으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몇 억억억억?만 배도 더 됩니다. 이러니까 그이 안다는 그것은 몇 억억억억?의 만분지 일을 말하고 그 나머지기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자는 또 그 사람에게 배워 가지고 억억억억?의 만분의 일 그것밖에 모르는 자기 때문에 그자 말을 듣고서 맞다 이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돼야 됩니다. 인간이 어두워져서 이 광명을 찾아야 되지 어두운 걸 어두운 줄 모르면 광명을 찾을 희망은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모든 것이 전개되리라,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리라, 어떻게 나타나리라 하는 이 모든 앞으로 전개될 그 모든 실상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극소 범위라고 할 수 없고 전연히 얼토당토 않게 막무식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따져보지 안해 그렇지.
또 존재에 대해서, 제가 무슨 만물 박사라고 하면 제법 아는 거 같지마는 실은 안다는 것도 모든 존재 가운데에 뭐 억억억억??의 만분의 일도 그 존재의 숫자를 모릅니다.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저 ○장로 이해돼요 안 돼요? 참 허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셔서 성경을 주신 이 성경 범위 내로 봐도 세상에서 말하는 것이 성경에 맞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이 완전 거짓말이든지 그게 완전 거짓말이든지 둘 중에 하나는 완전 거짓말입니다. 성경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성경이 틀렸든지 그게 틀렸든지 마지막에는 한번 모든 것이 결산이 될 것입니다.
그래,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완전하신 지식과 지혜, 또 영원하신 지식과 지혜, 영원히 불변하는 지식과 지혜, 참 영원한 생명과 평강이 되는 지식과 지혜 이것을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이것을 알려 주실라고 하시는데 이것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가 있으며, 그 지식을 비판해서 평가할 자격이 있으며, 거게 대해서 시비 곡직을 논평할 만한 그런 무엇이 있으며,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무엇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참 인간이 상상도 못할 이 지식과 지혜의 말씀을 주님이 말씀하시니 이 말씀은 어떤 대신학자가, 어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주님의 하신 말씀을 이렇다 하고서 자기가 확실하게 깨달았다 해도 깨달아야 할 대로 다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연합니까? 이치가 맞습니까? 또 이 말씀에 대해서 영원히 권위 있어 정확무오하게, 주님이 하도 답답해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획 하나도 가감도 변동도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우리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지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범위와 그 권위의 두려움과 정확성과 권위성과 불변성을 인간이 이해하고 납득하고 할 만한 그런 요소가 인간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없는데, 예수님이 이것을 알면 생명이 되고 이것을 알아서 그대로 살면 영생이 되고 모르면 다 멸망받기 때문에 이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입술로는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이렇게 말하지마는 하나님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봤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자기 지식대로도 한번 살펴 가지고 ‘이런 것을 창조하셨다’ 하여 자기 지식대로라도 그분의 그 위대함을 자기가 궁구해 보고 자기가 또 평가해 보고 그렇게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 허무합니다.
이렇게 이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우리와의 거리는, 이 거리는 억억억억만 리도 더 됩니다. 측량 못할 만치 무한히 거리가 멉니다. 그분과 우리와의 그 지식과 지혜에 그 차이는 무한하다 하는 것이 그것이 정확한 말이지 몇억만 리라 하면은 그것은 다 틀린 말입니다. 이만치 거리 멉니다. 이만치 큽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세가, 모세만치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도 모세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두려워할 자가 어디 있느냐” 말했어. 두려워해야 할 만치 두려워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 말입니다. 그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말입니다.
이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서 낙심하지 아니하시고 이 무한을, 유한한 것이 또 마귀에게 팔려 미혹받아 가지고 유한한 이것이 더 타락해 가지고서 빛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것을 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살리시기 위해 가지고 도성인신 하셨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끼는 모든 것을 다 대형해 가지고 해결지웠고, 대행해서 해결을 지웠고, 또 대신 화친하셔 가지고 이와같이 공로를 설정해 놨는데 주님이 설정하신 공로도 무한한 신성이 유한한 인성을 통해서 설정했으니까 외부에 나타난 것은 유한한 인성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들이 짐작하고 알 수 있으나 그 이면에 신성이 역사하신 것은 무한하기 때문에 측량 못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측량 못 한다. 인간의 지식으로 측량 못 할,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그 사랑을 가지셨다 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짐작하고 간증한 발표입니다. 그것도 영감이 돼서 발표했지 그리 안 하면 인간에 대해 발표하지를 못했습니다. 영감으로서 발표했습니다.
이런데, 이렇게 그 무한하심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유한한 것이 무한과 접선이 돼 가지고 무한으로 말미암아 우리 멸망할 것이 이 유한의 이것이 무한으로 접선돼서 거게서 흘러 나오는, 어린양의 보좌에서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이 은혜로 인해 가지고 우리들이 멸망치 않고 영생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큰 역사를 하시는데, 이러니까, 전능하신 분이 전능으로 역사하시고, 전능하신 성령님이 전능으로 역사하시고, 전능하신 성부가 역사하시고, 또 이 삼위의 대속의 공로가 역사하시고, 또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실물 교재로 영계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또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이런 저런 모든 예정으로 하나 둘 전개하는 모든 당신의 교훈으로 우리를 알려 주시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니까 그의 무한하심이 와 가지고 들리는 이 먹장같은 쇠판때기 무쇠 판때기와 같이 감각 없는 인간들의 심령에 이 말씀을 증거하니까 그들이 ‘아, 이 지혜가 어데 났노? 이 지혜가 어데 났노?’ 그 말씀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려 그게 아니고 그 말씀의 자체의 능력이 와 가지고 알게 하니까 그때에 비로소 알아서 ‘이 능력이 어데서 났노?’ 그들이 놀랐습니다.
놀라는 이 놀라기까지, 놀랐다는 말은 그들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는 범위에서 넘었기 때문에 그 범위 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놀랐고, 그분이 경험하고 체험하고 또 지식하고 또 지식하고 있는 자기 주관이라는 주관 범위에 그 초월한 것이 왔기 때문에 깜짝 놀라며 ‘이게 뭐꼬? 이게 어데서 왔노?’ 이렇게 그들이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데 났느뇨?” 놀랬습니다.
놀란 이거는 분명히 저들이 가지고 있는 범위 밖의 것이 왔기 때문에 놀랐고 저들이 알고 있는 그 주관 너머 것이 왔기 때문에 그들이 놀란 것은 사실 아닙니까? 이것은 인정 됩니까? 이거 인정 됩니까? 강퍅하면 안 돼요! 어두우면 안 돼요! 세상은 깜깜해요! 배암에게 밟혀서 자기 대대 손손과 영원히 멸망시키는 독 중에 독을 가지고 있는 선악과지마는 마귀 그놈에게 유혹받으면 그것이 하나님보다도 남편보다도 좋은 것으로 안 먹으면 안 될 만치 보암직 먹음직 지혜로울 만치 탐스럽게 봐서 기어코 먹고야 만 것입니다.
마귀 들어 놓으면 굉장합니다. 그때에 마귀 들린 그 하와의 비판과 평가가 얼마나 오판이 됐습니까, 얼마나 오평이 됐습니까? 여러분들 이거 압니까? 얼마나 오판되고 오평됐소? 이는 참 얼토당토 않게 오평 오판 됐습니다.
이 마귀는 오늘도 죽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이 마귀는 우리에게 들어와 가지고 우리를 지금도 삼키고 헤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자유하는 줄 알아도, 주님이 우리에게 죄에서 사망에서 마귀에게서 자유를 주셨지마는 이 자유를 하고 있는 줄 압니까? 이 자유는 자유는 그 세 가지가 우리를 범죄케 할 때에 범죄하지 않는 것이 자유요 범죄하면 그놈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얼마나 자유하며 죄에 얼마나 자유하며 사망에게 얼마나 우리가 자유하고 있습니까? 자유한다 말은 순전히 거짓말 아닙니까? 그놈이 시키는 대로 얼마든지 복종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오늘은 그놈이 시키는 대로 복종 안 했습니까? 오늘은 어떻게 했소? 그러기 때문에, ‘내 가족을 작별하고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기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자기의 강퍅성, 완패성, 방종성, 나태성, 모든 만용성, 허영성, 허욕성 이런 것을 뽑아 버리기를 쉬지 않는 자가 아니면 하늘나라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 말은 자기의 지금 그 인격을 갈아서 옥토같은 그런 참사람의 그 심신의 인격을 만들어 볼라고 쉬지 않고 갈아야 할 터인데 뒤만 돌아보면 쟁기 잡고 있어도 헛일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자꾸 새롭게 새롭게 자꾸 해서 갈아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될 터인데 우리들이 여게 대해서 게을리 하면 헛일입니다.
이 시간에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에 대해서 겨우 ‘이 지혜가 어데서 왔느냐, 어데서 났느냐, 이 능력이 어데서 났느냐?’ 그가 놀라기까지 깨닫게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능력이 역사했고 어느 정도의 힘이 들었다고 생각해 봤습니까? 우리가 측량 못 할 만치 큰 힘 들였습니다. 큰 사랑의 힘을 들였습니다. 큰 것을 제공하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지혜와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지혜와 능력 보고 놀랐으면 그 놀란 그 양이, 지혜에 대해서 ‘아이쿠’ 놀란 그 지혜의 양이, 능력 보고서 ‘아이쿠’ 놀란 그 능력의 양이 그 양이 주님의 말씀에 이 지혜의 본 양과 능력의 본 양에 그 양을 거의 다 알았다고 생각합니까, 그 양의 얼마나 알았을까요? 그 양의 반이나 알았을까요, ○○○권사님? 반이나 알았겠소? 얼마나 알았겠어? ○○○조사님, 얼마나 알았을까요? 느껴봐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되지 아무도 구원할 자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됩니다. 주님이 암만 구원할라 해도 스스로 자기가 구원하지 안하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 강제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놀랐다고 해도 그 실상에 억억억억??만분의 일을 보고 놀라는 것입니다, 일을 보고. 그걸 보고 놀란 것이오. 놀라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보고 또 보고 놀라고 평생 보고 놀라고 보고 놀라고 ‘아이쿠, 아이쿠, 아이쿠, 아이쿠’ 놀라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에 무한을 이래 찾아 들어가도, 능력의 무한을 찾아 들어가도 우리는 끝이 없는 우리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랬는데, 이렇게 주님이 알리시느라고 큰 힘 들였고 자기대로는 큰 축복 받아서 알았습니다, 요만침이라도. 참 실상에다 비해서 먼지만치 알았지요. 먼지만치 안 것도 이것도 참 큰 축복이요 큰 은혜요, 알리시는 분도 알리시느라고 큰 힘 들었고, 또 안 자도 참 인간으로서는 큰 축복 받아서 알았고 이랬는데 요놈을 딱 따먹는 원수가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요놈을 딱 따먹는 원수가 있어. 원수 그놈이 딱 바라고 앉았어.
어떤 놈이 바라고 앉았는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라니까 옆에 귀신 마귀가 있다가 말하기를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놀란 거는 다 없어져 버리고 자기가 아는 범위로 돌아갔습니다.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알고 있는 범위, 자기가 가지고 알고 있는 자기 주관, 자기의 범위와 자기의 주관을 요것을 토대로 삼아 가지고 자기 주관과 자기 범위 요것에 맞추고, 모처럼 이것을 초월한 무한의 것을 그에게 비추어 줘서 알려 줬는데 이 놀라면서 깨달아진 요것은 버려버리고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주관과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요것으로서 바꾸었습니다. 요것으로서 바꿨소.
“아니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를 배척한지라”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했다 그말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어디서 났느뇨 하고, 놀랄 만한 지혜와 능력이 그들에게 보였는데 그들이 배척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니까 그들이 알기를 지혜와 능력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몇 군데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다? 유대인들은 몇 군데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아는 대로 한번 말해 보이소. 유대인들은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온다고 그때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두 군데라, 두 군데.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오고 하나는 마귀 귀신에게서 온다고 알아요. 알겠습니까? ‘저거는 우리 인간의 것은 아니다.’ `아니면 어떠냐?' `하나님에게서 왔느냐? 하나님에게서 왔으면 섬기고 높이고 따라야지.’ ‘인간을 탁월하기는 탁월한 것인데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배척할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귀신에게서 왔다.’ 이래서 그들이 배척해 버렸습니다. 요 해석이 이해가 됩니까? 안 되면 헛일이라, 안 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들이 여기뿐 아니고 기적이 나타날 때에 ‘기적은 분명히 기적이다, 이가 귀신을 빙자해 가지고 이와같이 하고 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 하시는 일을 그들이 배척하면 하나님 배척하는 것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 인정하고는 배척하지 안하고, 속으로는 인정한다고 해도 입술이라도 ‘이거는 귀신에게서 온 것이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히 배척해야 된다’ 요렇게 말을 하고 배척을 했던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지 아니하시니라” 그러면 선지자가 이 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난 그 고향에서는, 고향 이거 잘 안 돼요. 그래 내가 좀 서투르니까 고향 이거 읽을라 하면 좀 주저주저해요. 그래 들어요, 그만. 고항이라 하든지 뭐이든지 그만 고향인 줄 아십시오. 고향인 줄 알아요. 나는 쓸 줄은 알아요, 고향.
이 예수님이나 모든 선지자들이 다 말하는 것은 그 선지자의 고향에서는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고 저 타처에서는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어떻게 해서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다 같은 말 들었는데 자기 그 고향에서는 인정을 안 하고 다른 데서는 인정을 하는가? 왜 그렇습니까? 고것도 한번 차이를 한번 찾아봐요. 왜 그럴까요? 왜 그렇습니까? 여기 한번 대답해 봐요 왜 그렇지요? 그래. 타처의 사람은 그 선지자에 대한 자기 범위와 자기 주관 기존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 선지자가 전해 주는 것을, 전해 주고, 하나님이 알리도록,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 주시고, 또 하나님의 영감이 와 가지고 알도록 하고 하는 그 역사로 말미암아 지혜에 대해서 놀라고 능력에 대해서 놀란 이 놀람을 만나고 난 다음에 이 놀람을 까먹기를 어떤 놈이 까먹었습니까? 이것에서 어데서 이런 지혜와 능력이 났느뇨 하고서 놀랐는데 놀라기까지 그들이 깨달은 것을 완전히 까먹어서 없애 버리고 그 하나도 없어버린 그것을 무엇이 까먹었습니까? 녜, 자기가 보고 듣고 접촉한 모든 자기 생각한 자기 경험, 체험, 주관 그것들의 그 자기 주관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 범위 그것이 완전히 까먹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완전히 까먹었소.
까먹고, 저 타처에서 처음으로 만나 가지고 이 말씀 들은 사람은 그것이 하나도 없어. 선지자에 대한 선입적 관념이나 기존 지식이나 그에 대한 뭐 상식이나 자기가 거기 대해서 생각한 범위나 그런 게 하나도 없어. 없으니까 받은 그대로 있어. 받은 그대로 있으니까 선지자를 대우했습니다.
선지자를 존경했으면 그 사람은 선지자를 존경했으니까 선지자로 말미암은 그 은택을 그 사람이 받아서 가진 사람입니까 못 가졌습니까? 선지자로 통한 그 은택을 가진 사람입니까 못 가진 사람입니까? 가진 사람입니다.
가졌는데 자기 고향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 선지자의 은택을 놀랄 만치 받았다가 다 그만 죽여 던져 버렸으니까, 배척했으니까 그 사람들은 이 은혜를 받았다가 가졌습니까 집어 던졌습니까? 집어 던졌습니다.
우리가 여게서 이것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 광대하심이 무한하시고 그 자체의 능력이 무한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알았다 알았다 해도 실상에 실상만치 알지를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데, 그 능력과 그 지혜를 안 것만치, 안 것만치 그 사람은 그 지혜와 능력이 자기에게 효력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안 것만치 효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믿는 것만치 자기에게는 그 능력을 쓸 수 있습니다. 그 지혜를 알고 믿는 것만치 그 지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과 지혜를 아는 것만치 자기에게는 생활 변화가 오게 될 것이고 또 생활 변화에 따라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게서 요 말씀을 할 때 예수님께서 요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주인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서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데서 났느뇨” 하고서 그다음에 “이는 목수의 아들이라” 그렇게 말해 가지고 마지막에는 배척을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제가 먼저 증거하게 된 것은 그 동기가 어데 있느냐 하면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기 때문에 대대로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지마는 그들의 건설구원은 이룬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 사람밖에는 없었습니다.
건설구원은 다 헛일이고 택한 자의 기본구원은 그대로 가졌겠지마는 건설구원 행위구원 성화구원은 다 헛일했습니다.
왜 헛일했는가? 그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놀랄 만치 깨달아진 것을 자기가 이미 가지고 알고 가지고 있는 그 범위와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주관 그것을 토대로 삼아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ㅡ그 해석은 할라면은 좀 심령이 밝아야 듣지 못 듣는데, 이렇게 놀라게 된 놀랄 만치 지혜와 능력을 자기가 알았는데, 그 능력과 지혜를 알았는데 놀랄 만치 자기가 그 지혜와 능력을 알고, 알았기 때문에 놀라지.
놀랄 만치 알았는데 놀랄 만치 안 그것을 가지면은 놀랄 만치 안 그것을 버리지 안하고 그대로 그 지혜를 놀라고 그 능력을 놀라서 인정을 했다고 하면 그대로 살 것이고 그대로 구원 이루어질 것이고 그만치 그는 무한한 지식에 더 깊이 들어갔을 것이고 무한한 능력에 더 깊이 들어가서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과의 그만치 더 가까워져서 자기에게 충만하게 될 터인데 그것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기존 지식의 그 범위와 자기 모든 관념 주관 그것으로 인해서 놀란 것이 없어졌습니다. 놀란 것이 깨져버렸습니다.
놀란 것이 깨졌으니까 그들이 놀랄 수 있도록 온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라고 큰 힘을 들여서 했는데, 놀랄 만치 그들에게 와서 그 효력 있게 실지의 양이 그만치 와서 부딪혀졌는데, 그것은 곧 지혜요 능력인데, 그것은 곧 영생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 신적 요소인데, 전지의 지혜요 전능의 능력의 그 요소를 저희가 받았는데 그만 그것을 자기에게 있는 그 주관이라는 범위와 주관이라는 그 지식 그거 가지고 그것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온 구원을 없애버렸습니다.
그것이 그때에만 그렇게 역사된 것이 아니고 오늘밤 우리들에게도 꼭 같습니다.
여기서 꼭 같습니다. 같기 때문에 여게서 하나님의 말씀의 그 지혜는 전지의 지혜를 아는데 전지의 지혜를 자기가 들어도 듣지 못할 수도 있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할 수가 있고, 그저 알 정도가 있고, 또 놀랄 정도도 있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그 정도는 각각 다르겠습니다.
다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깨달아 놀라는 것이나 또 하나님이 그 말씀과 함께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그 능력이 우리에게 알려져서 그 능력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것이나, 놀라게 되는 것은 아는 것만치 자기에게 믿어지게 됩니다.
믿어지게 되고 알고 믿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빼앗기지 안하고 자꾸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서 이래 나가면 굉장한 구원을 이루게 될 터인데 그것을 저축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자기가 성경 가운데도 성령이 내재해 계시고, 또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데도 성령이 내재해 계시고 읽는 데나 듣는 데나 성령이 내재해 계시니까 거게서 그 지혜에 대해서나 능력에 대해서 자기가 깨닫게 되어지는데, 깨닫게 되어지는데 그것을 자기가 깨달아진 것이 알밤만치 깨달아졌으면 알밤만치 그것을 보존하고, 주먹덩이만치 깨달아졌으면 주먹덩이만치 그것을 보존하고, 자기가 집채 무더기만치 깨달아졌으면 집채 무더기만치 깨달아진 것을 보존하고 다 자기가 깨달아지고 느껴짐이 다를 것입니다. 다릅니다.
또 자기가 성경을 읽고 듣고 이렇게 할 때도 느껴지는 것도 다르고 깨달아지는 것도 자기 혼자 성경 보고 읽어도 다릅니다. 다른데, 그렇게 내가 성경을 혼자 읽든지 또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계시록 1장 3절에 보면은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켜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읽는 데도 자기가 읽으니까 아는 은혜가 있고 듣는 데도 또 깨닫는 은혜가 있고 아는 은혜가 있고 행하는 은혜 그거 다 각각 다 은혜가 있어서 세 가지 다 은혜인데 자기에게 알려지고 느껴지고 하는 그 정도가 여게는 “놀라” 했는데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놀라” 했으니까 좀 정도가 강한 것입니다.
정도가 강한데 강한 그것을 그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지 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보존을 하고 또 주님 말씀 또 들을 때에 또 놀라게 그 지혜와 능력에 대해 놀라진 그것을 또 그대로 보존을 하고 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삼아 가지고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그만 뺏기고 그것을 뺏긴 자들은 대대로 메시야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마는 그 사람들은 메시야를 십자가 못박아 죽이고 저주하고 말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택한 자라면 기본구원은 있었지마는, 택한 자라면 기본구원은 있었지마는 성화구원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대대로 기다리고 있지 안한 사람이 하나도 없이 대대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대로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로 말미암아 자기네들이 이 건설구원 성화구원을 받은 사람이 몇 사람이 있습니까? 몇 사람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그때에 칠십 문도라고 하고 일백이십 명이라고 하고 이랬는데 그저 일백이십 명 칠십 명 뭐 그 이상이 더 되지는 안했으리라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면 그 많은 사람들이 그 건설구원을 뭣한테 뺏겼는가? 오늘밤에 증거한 요 원수에게 뺏겼습니다.
그러면 오늘밤도 그날밤과 같은 밤인데 우리들이 이렇게 읽든지 듣든지 해 가지고 자기에게 깨달아지는 그 깨달아질 때에는 마음에 감흥 깊게 깨달아지는 것도 있겠고, 또 놀랄 만치 깨달아지는 것도 있겠고, 마음에 참 기절할 만치 두려워 떨릴 만치 깨달아지는 것도 있겠고, 깨달아지는 정도도 많은 차이가 있겠습니다.
있는데, 그러면 이 깨달아지는 데 대해서, 이제 몇 가지만 묻고 맙니다.
여러분들과 나와, 여러분들 벌써 병마개를 딱 막고 있어. 병마개를 딱 막고 있는데 뭐 나는 그래도 이 파수꾼의 직책이 있기 때문에 막고 있든지 말든지 내가 증거는 하기는 합니다. 조금만 하면 하면 다 돼요, 인제.
이렇게 그 능력과 지혜에 대해서 놀랄 만치 깨달아졌는데 이 능력과 지혜가 그들이 깨달아진 그 능력과 지혜가 그 실상은 얼마나 큽니까? 얼마나 큽니까? 자, 거짓말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입에 발려서 자꾸 하지 말고.
그러면 그 지혜는 얼마나 그 지혜가 실력적으로나 범위적으로나 또 그 모든 지능적으로, 그러면 그 지혜가 예를 들면은 지혜가 만일 거게 대한 만 조건이 있는데, 만 조건에 다 딱 들어맞았으면은 그거는 거게 대해서는 완전하겠고 만 조건이 있는데 만 조건 가운데에 한쪽만 맞았으면은 그 지식은 무슨 지식이 되겠습니까? 한쪽만 맞았으면. 만분지 일만 들어맞았으면은 그 지식은 어떤 지식입니까? ○○○교회 장로님? 그래 그 지식은 어떤 지식이야? 그러면 그 지식 쓸모 있어 없어? 쓸모 없어. 아무짝도 못 써. 요것도 심령을 깨우는 거라. 요것도 생각을 못 해 봐요. 여러분들이 여기서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에 다 깨우쳐서 살아야 돼요. 요것도 평생 예수 믿어야 몰라요.
그래, 이 지식이 무한한 지식이고 또 하나님은 지식 가지고 일 다 합니다. 지식 가지고 일 다 하요. ‘이렇다’ 할 때 `네가 이래라’ 하면 그게 지식 아닙니까? 이래라 할 때 그말 듣고 그래 하면은 돈도 되고 권세도 되고 다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실 때에는 뭐 내나 지식이 실물이요 실물이 지식입니다.
이런데, 그 무한한 그 지식과 지혜를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렇게 그 지식과 지혜가 이 유대인들이 깨달은 이 지식과 지혜, 놀라서 깨달은 지식과 지혜가 그것이 제법 큽니까 무한합니까? 저 뒤에 있는 목사님들 좀 한번 대답해 보이소. 무한합니까 제법 큽니까? 이 말을 하면은 웃습니다, 웃어. 웃어. 왜? 전능이라 쌓기 때문에, 전능이라고 쌓기 때문에.
전능이라고 하면은 참으로 이 지식이 이 지혜와 능력이 전지라고 정말 믿느냐 네가 외식자냐? 전지의 지혜로 믿느냐? 전지의 지혜로 믿으면 복이 있습니다. 이 지혜는 전지의 지혜라. 전지의 지혜라 말은 모든 존재, 모든 움직임, 모든 뭐 존재, 그만 존재라 할 수밖에 없어. 모든 거 그 전부에 대해서 딱 들어맞게 아는 지혜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한 군데도 빈틈이 없어. 틀린 데가 없어. 일방적이 아니라.
그 전부에 대해서 옳고 바르게 딱 들어맞은 지식이라 그말이요, 전지의 지혜요 지식이라 말은.
또 전능이라 말은 여게도 다 능하고 저게도 능해. 여게도 필요하고 저게도 필요하고 이것도 살리고 또 저것도 살리고, 아무 데도 필요없는 데가 없어. 쓸모 없는 데가 없어. 아무 데도 관련 없는 데가 없어.
이 전능을 해석을 하라 할 때 해석을 하는 신학자가 별로 없어! 그래 쉬운 줄 알아도. 전능이 뭐인데? 전능이 뭐인데?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 하는 그게 전능인 줄 아는구만.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전능의 능력이라 말은 이 능력은 모든 존재에 대해서 다 움직이고 있는 능력입니다. 알겠습니까? 모든 존재를 다 움직이고 있는 능력이라, 이 능력이. 이 능력이 모든 존재에 대해서 다 움직이고 있는데 제까짓 거 혼자만 반대하고 제가 안 죽고 어짤 거야! 이 능력은 모든 존재를 다 이래 움직이고 있는데 저 혼자만 반대하면 안 죽고 제가 어짤 거야! 전지를 아는 자가 주의 말씀을 어기지 안하고 전능을 아는 자가 주님을 배반하지 안해! 공산주의가 오든지 뭐 왜정 말년이 오든지 그런 거는 눈도 꼼짝 안 해. 왜? 전지 전능을 아는 자는 그를 범할 수가 없어. 또 거게가 제일 피난처고 안정지인데 어디로 좋은 곳이 없어, 더 좋은 곳이.
이 지혜와 능력은 이런 지혜와 능력인데 이 큰 지혜와 능력을 그 유대인들에게 놀랄 만치 알도록 한 것은 누가 그렇게 알도록 했지요? ○○○집사님, 아직 권사님 안 됐습니까? ○○○집사님 누가 알게 했습니까? 누가 알게 했어요? 하나님이? 성령님이 알게 했다 해. 성령 그래야 맞지. 하나님만 자꾸, 자꾸 하나님만 도매금으로 그래 하지 말고.
이것도 세계 신학에 난제입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자기의 사색의 힘으로써 자기의 선천 후천의 명철의 힘으로써 안다고 이렇게 하는 자들이 다 대학자이기 때문에 대학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는 사람이 많지를 못해,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렇게 알리기 위해서 큰 힘 들였어. 유대인들에게 놀랄 만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지혜와 능력의 크심을 그들이 깜짝 놀랄 만치 알리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이 얼마나 힘을 쓴지 몰라. 성령님이 얼마나 힘을 쓴지 몰라. 주님이 얼마나 힘을 쓴지 몰라요. 힘을 써서 이렇게 큰 힘 들여서 알려 놨는데, 큰 힘 들여 알려 놨는데.
이러면 두 가지, 이 지혜와 능력은 무한하다 하는 거 하나 알았고ㅡ요거 똑똑히 잡고 놓지 말아요ㅡ무한하다는 거 알았고, 둘째로는 우리에게 크게 알리든지, 적게 알리든지, 놀라게 알리든지 우리에게 알리신 것은, 알리신 건 주님이 알리시기 위해서 도성인신 십자가의 대속하셨고 성령님이 직접 알릴라고 애를 써 책임지고 보증으로 보증을 짊어지고 보증하고서 지금 알릴라고 지금 애를 쓰고, 이거 성경 가운데도 내재 영감이 있어. 또 진리 자체가 전능의 능력을 가졌는데 독자적 전능의 능력을 가진 이 진리가 또 알릴라고.
그러면 우리에게 이 지혜와 능력을 알릴라고 애를 쓰는, 그 지혜와 능력을 알릴라고 애를 쓰기를 몇이 애를 써요, 손가락으로? 몇이 애를 쓰고 있어요, 손가락으로? 여게도 다 손가락 들어 봐요. 몇이 애를 써? 하나가, 또 서이, 또? 성부가 독생자를 보내서 알릴라고 애를 썼습니다. 알겠습니까? 뭐 어떤 사람 말하면 ‘그거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또 거기 갖다 붙이는가?’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고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무형의 존재가 어떠한 존재라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창조했고, 또 피조한 모든 창조물들에게 당신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성부는 알릴라고 독생자를 보냈고, 또 성자는 알릴라고 가로막고 있는 것을 다 당신이 대속하시고, 이와같이 재연결을 시켜서 대속하신 대속으로 역사하셨고, 또 성령은 우리에게 알릴라고 보증을 하고, 또 진리는 독자적 권위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진리가 우리에게 알릴라고 애를 쓰고.
자, 그러면 이제 알릴라고 애쓰는 것이 몇입니까? 그 외에는 없습니까? 그 외에는 없습니까? 그 외에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도 알릴라고 애를 쓰고, 선지 사도들을 통해서 알릴라고 애를 써서 성경을 기록해 주셨고, 또 여러분들의 목사님을 통해서 알려 줄라고 또 애를 쓰시고, 또 오늘도 백 목사를 통해 알릴라고 애를 쓰시고, 그라면 다 들어갔습니까? 인제 또 빠진 이는 없습니까, 여기 ○○○교회 ○장로님? 만물을 통해서. 녜, 만물을 통해서도 자연계시로 만물 통해 알려 주시지요. 엔간히 또 알았구만. 또 하나는 없는가? 인제 다요? 다입니까? 이제는 알려 주시는 역사 다른 이는 없소?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증거해 준다고 했습니다. 중생된 영, 중생된 영도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라고 애를 씁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중생된 영이 알라고 하는 것입니까 중생된 영하고 성령하고 모두 협동해 가지고 우리의 심신에게 알릴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심신에게 알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알리는 것이 넷, 그다음에는 우리 중생된 영, 또 모든 선지 사도들의 모든 이미 구속받은 성도들, 이렇게 큰 힘 들여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요것도 아주 알기 어렵습니다. 나도 요것 때문에 오랫 동안 고민하고 연구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성경을 보고 성경을 보게 되는 거, 성경이 보고 싶어 보게 되는 거, 성경을 깨닫게 되는 거, ‘깨닫게 되는 건 누가 이렇게 깨닫게 해 주는 데서 깨닫게 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많은 학자들에게 물어 봤습니다. 분명치 안해.
이래서 비로소 많이 힘쓰고 애쓰는 가운데에서 내 심신이 들어서 내가 아는 게 아니고 내 심신은 이걸 안 할라 하는데 내 심신을 알라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이 역사들이 역사해 가지고 이 강권해서 비로소 성경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지고 읽어보고 듣고 이래 가지고 했으니 이것이 순전히 내 주관이라 하는 것은 반대하고 있고 모든 이 객관 세력, 심지어 내게 중생된 영까지도 육에 대해서는 객관이기 때문에 수많은 객관 세력들이 이거 단합돼 가지고 막 공동으로 협동해 가지고 나에게 이 진리를 알려 줄라고 애를 쓴다 하는 이 공동 구원 작업 작전이라 하는 것을 깨달을 때 나도 놀랐습니다.
이래 가지고 알려 주는데 이 알려 주는 여게 대해서는 안 그것은 이 겉어머리고 하나의 싹수고 알려 주는 데에 알려 주는 그 속에, 이 진리를 하나 깨닫게 해 주시는 그 깨닫게 하신 그 속에, 그 속에 배경이 얼마나 큽니까? 이 배경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까? 이 배경이 큽니다.
이 큰 세력이 뭉쳐 가지고 나에게 알려 주실라고 이렇게 애를 썼는데, 나에게 신구약 성경의 이 생명 도리를 알려 주실라고 힘 쓰기를 얼마나 썼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거는 뭣 때문인데? 부활은 뭣 때문인데? 성령은 뭐 때문인데? 모든 선지 사도들이 다 순교한 거는 뭐 때문인데? 이 성경 기록해 준 건 뭐 때문인데? 나 때문이지! 이러니까, 어떤 암흑이 와도 이걸 생각할 때에 나는 암흑이 삼키지를 못해. 우리는 삼킬 자가 없어. 이것으로써 자기 믿음을 자꾸 이 암흑이 오는 것을 벗겨서 새로와져야 합니다.
이렇게 힘들여 가지고 이 무한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알려 준 것을 이 알려 줄 때는 요대로 해서 실상을 이루기 위해서 알려 주셨는데 이 알려 준 것을 요것을 알려 준 데에 하나 알고 또 버리지 안하고, 또 하나에 둘 알고 둘 저축하고 자꾸 하나씩 백 번 저축하면 몇 개 됩니까? 저 ○집사? 뭐라 하노? 한 번에 한 개씩 알아서 백 번 알았으면 몇 개? 백 개. 만 번 알았으면? 이래 가지고 진합태산이라고, 티끌 모아 태산 된다고서 요래도 자꾸 놓지 안하고 자꾸 이라면은 한없이 커져가고, 들어 버리고 들어 버린 자는 헛일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들어 버리는데 요것을 저축하지 못하게 삼키는 원수가 누굽니까? 자기 주관, 모든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범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범위와 자기의 주관, 자기의 기존 지식, 하나님께 받은 거 아닌 거 말이오.
이런 것이기 때문에, “네가 너를 부인하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인하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제 우리의 원수가 누구라요? 우리 원수가 누구라요? 원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깨달았는데 깨달은 그것을 보존되지 못하게 만드는 그놈이 원수인 줄 아십시오. 요 주관이라고 요라면은 여러분들은 또 복잡해서 또 잡탱이로 미혹받기 쉬운데.
어찌 됐든간에 깨달은 요것을 보존하지 못하구로 하는 그놈이 원수입니다.
알겠습니까? 깨달은 그것을 보존하지 못하게 하는 그놈이 원수요, 깨달은 그것을 뺏기지 안하고 자꾸 저축하는 것이 그것이 승리에 유일한 방법이요, 성장에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장하는 방법은 뭐입니까? 성장하는 방법은 보수입니다. 성장하는 방법은 보수요, 보수. 보호하고 지키는 거. 또 우리의 원수는 뭐입니까? 원수는 깨달음을 없애는 그놈이 원수지. 깨달음을 없애는 그놈이 원수.
이러니까 요것을 원수라는 걸 생각하면은 못나도 좋소. 아무리 못나도, 아무리 못나도 잠깐 세계에 이것 돼. 아무리 못나도. 우리가 이놈한테 자꾸 뺏겨 그렇지 뺏기지 않고 깨달은 그것을 깨달은 거 버리지 않고 깨달은 거 버리지 않고 깨달은 거 버리지 않고 놓지 안하고 깨달은 데서 깨달은 걸 보태고 보태고 자꾸 커져 나가면, 이 지혜가 무슨 지혜입니까? 전지의 지혜. 이 능력이 무슨 능력입니까? (전능) 그러면 이것을 많이 가지면 그 사람은 무슨 사람 됩니까? 전지의 사람 전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밤에 요 말씀을 봉독했소.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원수일 줄 알아야 되지 이것이 원수라는 걸 생각지 못하고 자기는 제법 하나님 말씀을 놓고 자기 주관을 가지고 비판을 해서 ‘뭐 그래 놀랄 게 없다, 그렇게 공연히 최면술에 걸린 거 모양으로 그럴 게 없다.’ 네 지식이 들어서 너를 망쳤다. 네 지식이 들어서 너를 망쳤다! 네 교만이 들어서 너를 망쳤다! 무한하신 지혜와 무한하신 능력을 네까짓 게 비판할 만한 그만한 잣대가 있느냐! 그만한 자격이 있느냐! 그만한 지식이 있느냐! 네가 네 지식으로 너를 망쳤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네가 깨닫는 데는 무한한 그 은총으로서 깨닫게 했으니까 네가 놓지 안하면 다 영생이지마는 놓고 팔면 너는 멸망이다.
네게 있는 모든 배암의 지식이 들어서 이 지식을 다 믿지 못하게 다 뺏기게 흐리게 하는 배암의 지식을 네가 부인하지 안하면 너에게는 영생이 없느니라! 맞습니까? 왜 저 뒤에는 대답 안 합니까? 안 맞습니까? 우리가 원수가 뭐인지를 바로 알아야 되지, 저거 사업하는 데에 방해나 지기면 원수인 줄 알고, 사업하는 데 방해하는 자는 실력을 길러 줍니다. 원수 아니오.
사업하는 데 방해하면은 자꾸 방해할수록이 자꾸 나는 죄 짓지 말고자 하나님 앞에 더 기도하니까 기도의 실력이 올라가지, 연구의 실력이 올라가지, 모든 실지의 실력이 올라가니까 자꾸 실력이 올라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면 원수입니까? 견디면 복 있지. 그까짓 거 그런 것은 다 우리에게 유익되게만 하는 것뿐이지, 신앙 가지면 유익되는 것뿐이지 손해갈 건 없습니다.
요런 게 우리의 원수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안일주의 그놈 때문에 안 되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안하면은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간에 오늘 밤에는, 자기 주관을 부인하지 안하면은 영감과 진리의 도리를 깨달은 그 지혜와 능력은 자기 주관 그놈이 다 삼켜 버리고 맙니다. 그놈을 원수인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깨달은 이 진리와 깨달은 지혜와 깨달은 능력을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면 그것을 꼭 되찾아야 됩니다. 되찾아야 돼.
어떤 사람은 깨달은 그 지혜와 능력을 깨닫고 나서 가다가 노다리 건너니까, 이 자꾸 이래 깨닫고 이래 생각하고 하니까 그거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접쳐 가지고 장 종이 가져 다니며 딱 적어 넣고 자꾸 깨달으면 또 몇 번이든 몇십 번 몇백 번이라도 자다가 깨달아도 깨닫도록 자꾸 이래 할라고 이래 애를 쓰고 이라다가 그만 어떤 친구 만나 가지고 얘기하다 보니 딱 잊어버려 버렸습니다.
잊어버리면 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를 통해서 마귀란 놈이 나를 삼켜버렸어.
이러니까 다시 그 친구 떠나고 난 다음에 혼자 밤새도록 기도해 가지고 찾을라 해도 못 찾은 거 많아.
어떨 때는 노다리를 건너가다가 요 돌 디디고 요 돌 디딜라 하니까 그 물이 출렁출렁하니까 ‘넘어갈까, 이라면 어째 빠질까?’ 빠질까 하는 마음에 빽 돌아가 버려서 마음이 그리 가 버리고 그만 자기가 깨달은 지혜와 능력을 그만 잊어버렸다 말이오.
이러니까 원통해서 도로 노다리를 도로 기어 들어갔다가 건너 갔다가 또 도로 오면서 한번 거석해 볼라고 암만 해도 안 나오니까 도로 산으로 도로 기어 올라가 가지고 산에 가서 또 기도해도 안 나오고 이래 가지고 밤새도록 애써도 안 나오다가 나중에 그 이튿날 새벽에 설교할라 하니까 설교할 때 딱 그 말씀이 나오니까 뽈끈 잡고 난 다음에 이제 놓지 않습니다.
‘이제 죽어도 안 놓는다, 죽어도 안 놓는다.’ 뭐 안 놓는다 이래 가지고 그뭐 마침 붓이 없으면 말이요 붓이 없으면 손톱을 가지고 뭐 종이든지 뭐이든지 안 되면 성경도 좋지마는 성경에다 대고 막 이 주 그려 가지고라도 이래 가지고 해서 알 수 있도록 뭐 이래 가지고라도 놓지 안할라고 애를 쓰고 나중에 날새면 그걸 그려 놓고서 적어 놓고 자꾸 찾고, 이렇게 우리에게 온 하나님의 은혜 역사를 업신여기지 말고 우리가 허비하지 안해야 됩니다. 놓으면 안 됩니다, 놓으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었으니까 그까짓 거 뭐 뿌스러기 무슨 소용 있겠소? 이래도 뿌스러기 하나도 버리지 말고 주으라 하는 그 뜻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많아도 풍성해도 뿌스러기라도 놓으면 안 된다, 버리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