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1 20:54
아브라함의 신앙의 길
1987. 10. 18. 주일오전
본문:창세기 12장 1절∼20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은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그 신앙의 자손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형편은 우리 형편이요 아브라함이 걸어간 걸음은 우리의 걸음이니 아브라함에게서 우리의 앞길을 우리가 배워 가지고 우리의 앞길에 이러한 일을 당할 때에 아브라함이 바로 걸은 그 걸음은 우리가 본받아서 바로 따라가야겠고 아브라함이 잘못되어 실패한 걸음은 우리들이 보아서 우리는 실패하지 아니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여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복받은 잘 걸어간 그 행위도 있고 또 아브라함이 잘못 걸어가 하나님 앞에서 노를 받은 복없는 걸음을 걸은 일도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진실치를 못하고 변동했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변한 일이 없이 시종 일관으로 신실히 지키셨습니다.
여게서 아브라함의 실수로 앞으로 우리의 실수를 예방하고 아브라함의 장점으로 우리들도 앞으로 이 좋은 점의 길을 걸어가야겠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약속의 변한 것을 우리가 거울로 삼아서 우리는 변치 아니하여야 하겠고 또 아브라함은 변해도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신 그 신실하심을 우리가 보아 우리는 믿음에 요동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좀 되기 힘듭니다. 왜? 본토라 말은 자기가 나고 자란 자기 고향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는 지방 정실을 버리고 또 친척 아비 집이라 말은 혈육 정실을 버리고 내가 지시한 곳으로 가라 그렇게 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는 경남이면 경남 지방 정실, 자기는 호남이면 호남 지방 정실, 또 이북이면 이북의 지방 정실, 이남이면 이남의 지방 정실, 이 지방 정실을 버리고, 또 자기는 어느 족속에 속했든지 자기의 혈육 정실, 혈통의 그 혈육 정실을 버리고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 일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힘드는 말씀입니다. 또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래서 이 성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해석하려고 하지 안하고 그저 그대로 제쳐두고 지내는 것이 오늘 일반적 교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방 정실관과 혈육 정실관을 똑 바로 깨닫고 가지는 데에 첫째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랬기 때문에 제일 첫째 문제가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 문제가 제일 첫째 문제로 당면됐습니다. 그러기에 요 두 가지 문제를 잘 해결짓지 안하면 신앙 생활은 다 헛일인 것입니다.
또 우리는 지방 정실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혈육 정실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버릴 수 없는데 하나님은 버리라고 하셨으니 버리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없고 버리지 아니하자니 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 되고 이러니까 그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생각지 아니하고 그저 버멀거리고 넘겨 가는 것이 오늘 교회들입니다.
우리는 요 문제를 똑똑히 깨닫고 바른 지방 정실관과 혈육 정실관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 신앙 생활은 다 헛된 것입니다. 제일 첫 출발이 이거 버리는 것이 첫 출발이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보를, 한 첫 자욱을 떼놓지 않고는 그 다음 자욱은 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 자욱을 떼놓고 그 다음에 둘째 자욱 셋째 자욱으로 자꾸 걸어서 등산도 하는 것이고 앞으로 진로도 되는 것이지 이 첫째 자욱이 없이는 걸음걸이는 걸을 수가 없는 것이 이것이 우리가 다 상식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는 것을 지금 증거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이 없을 때에 가진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은 일단 끊어라 하는 말입니다. 일단 끊어라 하는 말이오.
또 둘째로는 너를 오늘까지 주장하고 있는, 너는 지방 정실에 속했고 혈육 정실에 속하여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은 나보다 앞서 관계를 가지고 나보다 더 두껍고 강한 관계를 가졌으니 이것을 끊어야 한다 하신 말씀입니다.
셋째로는 내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나를 따를 때에 방해가 되는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은 끊어야 한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맺어져 있는 이 두 정실을 끊어야 할 것과, 또 하나님보다 더 두껍게 강하게 견고하게 맺어져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두껍게 강하게 견고하게 맺어져 있는 이 두 정실은 끊어야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또 셋째로는 네가 나를 따라올 때에, 내가 너를 지도할 때에 내 지도를 받고 인도를 받는 데에 방해가 되는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은 끊어야 한다 하는 요 세 가지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 세 가지를 끊지 못하면 하나님의 인도는 받지를 못합니다. 제가 보는 대로도 이것이 바로 되지를 못해서 교계도 웅성웅성하고, 우리 진영에도 웅성웅성하고, 이러는 가운데에 마지막에 나타난 결말의 표적을 보면 이는 지방 정실이 그를 주관하고 있고 혹은 혈육 정실이 그를 주관하고 해서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자와 지방 정실이 주관하고 있는 자들과 혈육 정실이 주관하고 있는 자들은 세 갈래로 갈라져서 오늘도 싸우고 있고 오늘도 대립이 되고 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 정실이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 돕는 정실,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돕는 정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데에 필요한 정실은 이는 보배입니다. 이는 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을 버리면 안 됩니다.
다만 하나님 없이는 가질 수 있는 지방 정실이요 혈육 정실이지마는 하나님을 모시고는 가질 수 없는 두 정실이오. 하나님은 동으로 가자 하는데 이 정실이 서로 가자고 하니 할 수 없어 하나님을 두고 서로 가야 하는, 하나님보다 더 인연이, 주도권이, 관계가 견고하고 강하게 되어 있는 이런 정실을 버리지 안하면 신앙 생활을 못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갈려고 할 때에 가는 데에 방해하는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을 끊지 안하면 그는 하나님에게 끌려갈 수는 없고 지방 정실에 끌리고 혈육 정실에 끌리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교회가 이 세 가지 갈래길로 갈려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 교회요, 또 교인들 그 한 교회 안에서도 이 세 가지로 갈라져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 교회의 모든 현 상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셋은 목적이 다르고 향방이 다르고 근본이 다르고 그의 사는 그 법칙과 주관하는 세력이 다르니 이 셋은 절대 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아브라함에게 제일 첫째로 말씀하신 이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신앙 생활에 출발은 안 되는 것입니다. 천리길도 첫 자욱으로 시작해서 가는 것이고 수천 미터 산을 오르는 것도 첫 발자국이 있고 둘째 발자국이 있지 첫 발자국을 떼지 않고는 그 다음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 두 가지를 정리해서 이제는 본토의 정실과 혈육 정실을 가지되 하나님을 모시고 가질 수 있는 본토 정실은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가질 수 있는 혈육 정실은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가져진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은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순종 생활 하는 데에 방해되지 안하고 도움이 되는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은 가져야 합니다. 이 방해되는 것만은 정리를 해야 됩니다. 이것이 택자들이요 기독자의 걸음입니다.
이 말씀을 그저 퍼뜩 지나보내지 말고 자기를 살펴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총공회 진영에 유력한 목사님들이 떠난 사람들 있습니다. 그들이 떠난 데에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교훈은 좋다마는 행정이 나쁘다’ 이랬습니다. 행정이 나쁜 것은 곧 이 두 가지 문제입니다.
너희들이 나는 남해 사람이다, 나는 거창 사람이다, 나는 호남 사람이다, 나는 강원도 사람이다, 나는 월남한 이북 사람이다 하는 그 정실에 너희들이 매이고는 신앙 생활 못 하니까 아예 그런 것을 초월해라.
그것이 네 신앙 생활하는 데에 도움이 되면 보배고, 또 그것이 네 신앙 생활 하는 데에 네 농장같이 되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그들에게 연결시켜서 네 농장과 같이 그들을 살리고 도울 수 있는 것이면 좋고 네 가는 길에 방해가 되면은 그거는 고쳐야 된다, 너보다 강하게 인연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다음으로 돌려야 된다, 하나님 없이라야 되지 하나님 모시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것은 다 고쳐서 가져야 되고 고치다 안 되면 버려야 한다 하는 요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어데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네가 볼 때에 하나님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네가 심사해 보고 하나님이 이리 가라고 하시는 이것은 가면 좋겠다, 저리 가라고 하시는 그것은 가면 불리하겠다, 네 자율 주관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을 가지고 네가 비판해서 네 비판에 합당하면 하나님의 지도를 따르고 네 비판에 맞지 안하면 버리고 네 비판으로 유익된 데로만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 지도 받는 게 아니라 네가 네 주관 네 욕심 네 좋은 데로 가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따라 순종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불구덩이 가라면 불구덩이 가고, 물구덩이 가라면 물구덩이 가고, 고대광실 높은 데로 가라면 가고, 대궐로 가라면 가고, 사형장으로 가라면 사형장으로 가고, 감옥에 가라면 감옥에 가고, 네 생각 다 버리고 내가 인도하는 그 인도대로만 따라라 하는 요것이 하나님의 둘째의 아브라함에게 대한 명령인 것입니다.
요것도 우리가 작정해야 됩니다. 제가 아무리 일 년을 하나님을 따르고 십 년을 하나님을 따라서 살았다 할지라도 제 비위에, 제 욕심에, 제 지식에 맞은 곳으로만 따라 살았다고 하면은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다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일은 되지 못합니다. 자기 주관과 하나님의 인도가 하나가 되었을 때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따르지마는 마지막에 자기 주관과 하나님의 인도가 대립이 되었을 그때에 어데로 따라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기 때문에 이거는 아직까지는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도는 성경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할려고 하니 자기 지식, 자기 욕심, 자기 형편, 자기 사정, 자기 소원, 여기에 과거에는 일치됐기 때문에 잘 믿는듯이 했지마는 이것은 자기에게 맞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만 맞아서 인도하는 것이니 하나님에게 맞추어 살면 순종할 것이고 자기에게 맞추어 살면 순종하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둘째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네 자율, 네 주관, 네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네 온갖 소원, 욕심, 네 성미, 네 형편 사정 다 그런 것 버리고 그저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서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거라, 내가 어데로 인도하든지 내 인도만 따라서 가라 요것이 아브라함에게 둘째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요것을 작정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살아 계시면 지금 말 안 하지마는 벌써 세상을 떴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이 다대포에 제일 부자의 집에 양자로 들어간 양자 아들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랬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보니까 이 제사라 하는 것은 지낼 수 없는 일이요 산 부모는 얼마든지 섬겨서 효성을 해야 되는데 산 부모만 섬기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하고 하나님 영광 위해서 잘할 수 있는데 죽은 사람에게 제사드리는 이 일을 해야 되니까 이것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고민해서 ‘내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 온갖 효성은 하겠으나 사후에 제사는 지내지를 못합니다. 여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사를 못 지내니 제사 못 지내면 너는 양자를 다 파양하고 나가야 된다 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제사 못 지내도 내 양자로서 생전에 나 봉양하는 것만 해도 족하다 그러시면 제가 양자노릇을 하겠습니다.’ 양자 재물이 많았습니다. 부모네들이 허락지 아니할 때에 그는 많은 양자 재물을 다, 참 귀한 그 재물을 다 버리고 빈손 쥐고 하나님의 인도 따라서 나선 분이 한상동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그 양자 재물 탔으면 다대포의 부자는 됐지마는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랐기 때문에 고신에 제일 큰 부자입니다. 영적으로는 한국에 몇째 가는 큰 부자가 됐습니다.
그들이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뭐 그런 사람의 숫자를 말하면 셀 수도 없습니다.
다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거리끼는 것은 다 부득이 청산하고 하나님의 인도 하나만을 따라서 어데로 인도하시든지 따랐습니다.
이래서 왜정 말년에 감옥으로 인도할 때에,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려면 감옥 가야 되니까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감옥 갔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를 당하셨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 위해서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둘째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는 물이든지 불이든지, 가난이든지 부든지, 평안이든지 고통이든지,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든지 존대를 받든지 모든 것을 다 자기 형편은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라면 어데든지 따라가기로 작정하고 따르는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 따르는 데에 방해되지 안하는 사람들, 방해되지 아니하는 모든 소유들은 가지고 떠났습니다. 아내도 ‘내가 하나님 인도를 따라가야 되겠으니까 자기는 어쩔 것입니까?’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조카도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모든 거게 자기가 얻은 사람들도 ‘나도 아브라함 따라가는 데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르는 것은 가지고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이것이 신앙 걸음입니다.
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쳤으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아이라는 지방입니다.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7절 이하에 있는 말씀이오. 창세기 12장 7절 이하에. 거게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제단은 요새 말로 말하면 교회를 세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랬는데 거기 보니까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왜 하나님께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게서 살라 했는데 왜 이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옮겨갔는가? 옮겨간 이유를 그 밑에 말했습니다.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너무 벧엘과 아이 있는 그 지방에는 흉년이 들어서 살 수가 없어서 너무 살기에 고통스러워서 차차 차차 흉년 든 곳을 피해서 곡식을 얻어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다 보니까애굽까지 내려갔습니다. 애굽까지 갔습니다. 애굽은 물풍하고 곡식이 있어서 거게서는 살기 괜찮은고로 내려갔습니다.
이 걸음은 하나님이 ‘네가 여게 흉년이 들어서 굶어 죽게 됐으니 애굽으로 내려가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안했습니다. 흉년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풍년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신데 아브라함도 신앙이 어렸습니다.
‘이곳에는 흉년을 줘서 우리가 배를 곯게 되니 어떻게 하든지 배곯지 아니할 그런 발동을 쳐 가지고서 배곯지 아니할 그런 곳을 찾고 그것을 우리가 해야 되겠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모든 것을 당신이 주권하고 계시는데 내가 여게, 인도하시며 복 준다고 했는데 내가 벧엘과 아이에 와서 머무는데 배곯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겠느냐, 또 여게서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실 능력이 과연 하나님이 없느냐?’ 이것을 따져보면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치 안해 그런가? 하나님은 너만 보고 살겠다고 했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데 왜 이럴까?’ ‘이것은 이 흉년이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셨으니 나는 여게서 하나님 순종하다가 굶어 죽으면 그것이 신앙 생활에 승리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로 작정했으니 여게 있으라면 여게 있어야 되지 배고프다고 옮기고, 덥다고 옮기고, 춥다고 옮기고, 그것은 내 맘대로 옮기는 게 아닌가? 이러기 때문에 이제 출발할 때에 내가 네게 지시하는 대로 어떤 형편이든지 순종해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는데 내가 여기 떠날 수가 있느냐?’ 하고 만일 거기 떠나지 아니했더라면 하나님이 흉년과 풍년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그가 볼 수 있었을 터인데 못 견뎌서 떠나갔습니다.
떠나가서 애굽에 가니까 배부르게 밥은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가다가 보니까 배고픈 것이 좀 면해지고 이제 배가 조금 부르게 되니까 그 다음에 다른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아내 사래는 아주 아름다운 미인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고 있고 나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만일 내 아내를 데리고 가면 내 아내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이 내 아내를 욕심내서 남편되는 나는 죽여버리고 아내는 취해 가지고 저거 아내를 삼을 터이니까 이거 큰일 났다’ 해서 그때는 지금 꾀를 냅니다.
‘어라, 이래 내려가다가는, 하나님의 명령 어겨서 내려가다가는 아내도 뺏기고 내 목숨도 끊어지겠다. 도로 하나님이 인도하신 벧엘로 고생을 해도 돌아가자.’ 요 생각이 회개인데 요 회개는 안 하고, 거게서 꾀를 내 가지고서 ‘여보 당신은 아름다우니 당선이 나의 아내가 되고 내가 남편이 되면 자기를 인해서 나는 죽고 자기는 살 것이다. 이러니까 이제는 우리가 꾀를 쓰자.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해라. 나는 또 남형제 오빠라고 그렇게 하자. 이러면 자기로 인해서 나는 생명이 구원되고 죽지 안할 것이고 자기야 어떤 자의 아내가 되든지 말든지’ 완전히 무책임한 사람과 완전히 이것은 변질된 사람, 하나님이 택함의 아름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이래 가지고 그 꾀를 썼습니다. 쓰고 애굽을 들어갔습니다.
애굽에 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보고 놀랬습니다. ‘아이쿠 저런 아름다운 여인이 어데 있느냐? 저거 어쩐 사람이냐?’ ‘그거는 어떤 남자하고 둘이 동행하더라’ 이러니까 ‘그러면 그 남자 그놈만 죽여버리면 저걸 우리가 취할 수 있다’ 욕심을 내고, 너무 아리따워 놓으니까 어떤 개인이 잡아 취할 수는 없고 왕에게 알렸습니다. ‘왕이여 우리 땅에 아주 우리가 과거에 보지 못한 참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들어왔는데 아주 그 여인이 모든 면이 볼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래 그 왕이 ‘그러면 불러 들여라' 불러 들였습니다.
들여 가지고서 ‘그래 너는 어데 사람이냐?’ `네, 갈대아 우르에서 왔습니다.’ ‘너하고 같이 다니는 그 남자는 누구냐?' `녜, 그는 우리 오빠입니다.' `너는 그의 아내 아니냐?’ ‘아닙니다' 거짓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내가 너를 취해서 네게 장가들어서 내 아내를 삼겠으니까 내 아내가 되겠느냐?’ ‘예, 되겠습니다.' 했습니다. `예, 되겠습니다.' 19절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아내 삼지 안했습니까?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하니까 아내 삼았다 말이오.
어데까지 삼아졌는지 그거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말은 약속한 거는 분명합니다. 허락지 안하면 아내 삼았다 하겠습니까? ‘예, 아내되고 하겠습니다’ 허락한 건 분명하다 말이요, 삼았다 한 것 보니까. 선을 넘어서 동침까지는 됐는지 그거는 우리가 모르지마는 어쨌든지 아내로 삼았고 아내가 됐어.
이러니까 바로가 그 아리따운 사래를 저의 아내를 삼고 아브라함은 저의 처남이 됐으니까 이제 대접으로 여게 뭘 많이 줬습니다. 16절에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함으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약대를 얻었더라” 아주 뭐 참 아내는 뺏겼지마는 아주 후대를 받아서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또 뭐 굉장했을 것이오. ‘처남 처남, 처남 처남’ 이래 쌓아면서 이래 가지고 뭐 요새 같으면 차도 태이고 비행기도 태이고 굉장했을 것입니다. 아주 그래, 또 물질도 많이 얻었고.
이랬는데, 17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그만 이거 사래를 취해다가 이제 자기 아내로 약혼했는지 뭐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로 삼아 놓고 처남 대접하고 예물 주고 마구 좋아서 지금 어쩔 줄을 모르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재앙은 무슨 재앙인지 모르겠습니다. 뭐 아마 사람들을, 이거 회개하면 되니까 뭐 없어질 것은 하지 안하고 큰 재앙을 내렸으니 무슨 재앙을 내렸는지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그만 바로에게 욕심이 다 확 달아나 버렸고 뭐 욕심이 하나도 없이 욕심이 확 달아나고 그만 이 사래가 보기도 싫고 뭐 겁이 나서 뻘뻘 떠는 그만 바로 왕이 돼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 가지고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대접하느냐?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네 아내를 내가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큰 재앙을 받게 되었으니 이거 어쩐 일이냐?’ 그러면 뭐 거게서 바로가 왕이고 아브라함이야 그때 그까짓 거 뭐 지나가는 과객 같으니까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이런데 그만 아브라함에게 뻘뻘 떱니다, 아브라함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까 어서 데리고 가라.’ 또 사람들에게 명해서 ‘데리고 가는 데 너희들이 호송해야 된다. 벌로 건드렸다가는 큰일 난다. 또 그에게 예물 준 것도 하나도 잔소리 말고 잘 호송하고 이 아브라함을 아주 후대해서 잘 보내라. 잘못 했다가는 우리 나라 전체가 망한다.’ 이래 가지고서 보냈습니다. 이것이 12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를 곤란스럽다고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니까 고기덩어리의 배는 불렀습니다. 또 물질도 얻었습니다. 한창 높여 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내는 뺏겼습니다. 자기 아내는 뺏겼습니다. 마지막에는 죽습니다. 가만히 둬 두면 아내를 뺏겨서 바로 왕이 사래를 아내로 삼았는데 왕은 좋아 죽겠다고 사래를 좋아하는데 사래는 하나님을 알지 자기 남편과 그리 되지 그러니까 좋을 턱이 있습니까? 이러니까 ‘뭐인가 내게 불만이 있어 그렇지’ 의심을 가지는데 나중에 가 보니까 그리 둘이 동침하는 게, 아브라함과 동침하는 게 발각이 안 나겠습니까? 발각나면은 당장 죽여버리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육체의 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걸은 걸음은 자기 생명이 끊어지는 걸음이고, 또 이 걸음은 물질 얻기 위해서 걸은 걸음이 끝까지 화가 되는 물질을 얻었고, 하나님의 축복과 자기 아내는 버렸고, 아내는 뺏겼고 생명도 뺏길 그 순서에 놓여 있고,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여게서 우리가 배울 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처음에 좋은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나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
당장 인도 받으니까 잘 먹고 잘 입는 이 일이 있지 안하고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리는 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몰라 그런 것 아니고 어려움을 면해 주실 수가 없는 게 아니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순종을 지키느냐 배반하느냐 하는 시험이요, 또 그럴 때에 애굽 나라 가는, 애굽에 내려가는 그 힘 가지고 애굽에 내려가지 말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에게 복 주시마고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여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서 지금 우리가 빠짝 마른 것 못 봅니까?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당신이 여게서 굶어 죽게 하시면 굶어 죽겠습니다. 그러나 인도 따르면 복 주신다고 해 놓고 여기서 굶어 죽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여게서 꼭 굶어 죽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줘 가지고서 네 자손이 창대케 하겠다고 말했는데 내가 굶어 죽으면 뭣 됩니까?’ 이거 좀 하나님하고 좀 시비를 따져 가지고서 말하면 하나님이 ‘그래. 내가 너를 복 주마고 했지, 창대한 민족을 만든다고 했지, 그렇지, 굶어 죽으면 자손이 못 나지.’ 그러니까 ‘밥 좀 주십시오' 이러면 웃으며 ‘내가 너 밥을 줄 수 있느냐? 이렇츰 흉년이 들어 밥이 없는데 어찌 내가 밥을 줄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또 그래 말했을 것이오. ‘하나님이여 당신은 능치 못하심이 없지 않습니까?’ ‘아멘! 그래, 그런 줄 아나? 내가 이 가운데서도 너에게 줄 줄 아느냐?’ 마구 밥 속에 파묻힐 만치 주실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요럴 때에 요 아브라함이 연약성입니다.
곤란을 면키 위해서 설설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에 내려간 것은 오늘로 말하면 세상으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 생활하고 나면 차차 차차 생활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생활에 어려움을 당합니다. 경제의 어려움이나 신체상 어려움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요것이 하나님이 시험하는 시험인 줄 알고 그때에 제 생각대로 가면 아내 뺏기고, 생명 뺏기고, 자기에게 화가 되는 물질 그런 것은 얻지마는 하나님의 축복 뺏기고 다 뺏깁니다.
그럴 때에 제 생각대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세상으로 기어 들어가지 말고 세상으로 기어 내려가지 말고 그럴 때에 하나님에게 따져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주님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다고 하셨고 우리에게 영육에 복 주마고 하셨고 영생의 천국 주마고 했는데 내가 대관절 지금 곤란해서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시옵소서.’ 이 하나님에게 조우면 하나님이ㅡ아마 내가 생각하는 대로는 그렇습니다ㅡ하나님이 ‘이렇게 흉년이 져 가지고 있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지마는 내가 너한테 밥을 줄 수가 있나? 흉년이 들어서 지금 모두 뭐 잘 먹일 도리가 있나?’ 하나님이 그렇게 말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뭐라 할랍니까? ‘하나님이여, 당신은 없는 데 있게 하시고 있는 걸 없게도 하시고 애굽 나라에 풍년 준 것도 당신이요 여게 흉년 든 것도 당신이니 당신이 하고자 하면 될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러나 내게 필요해서 이런 흉년을 준 줄 압니다. 그러나 내가 배고파서 못 견디니까 당신이 배가 고파서 한 달 열흘 일 년 굶어도 안 죽어야 자식을 낳을 것 아닙니까? 일 년 굶어도 안 죽도록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굶고 가만 앉았겠습니다. 먹을 것 주시면 내가 먹었겠고.’ 이렇게 하나님을 따져 들어갔으면 ‘그래 내가 너를 일 년을 굶겨도 안 죽도록만 해 주면 네가 벧엘 안 떠날래?’ ‘예, 안 떠나겠습니다.' 그만하면 다 됐어. 그만 하나님에게 만족이라. ‘내가 네게 이렇게 무엇이든지 다 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인 줄 네가 믿느냐?’ ‘녜, 믿습니다.' `믿는 대로 되리라'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패했는데 우리는 아브라함같이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을 보고 아브라함 자손된 사람들은 이런 실패를 걷지 않고 쪽 일관으로 가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랬는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기대로 가 가지고서 갔었는데 자기 아내 속속들이는 이성까지는 변질이 됐는지 모르겠지마는 바로의 아내가 되겠다고 허락했기 때문에 내가 장가들었다 했지. 내 아내 삼았다 했지. 이렇게 천추만대에 추접한 것을 남기게 됐지 또 그때 모든 노비와 소와 양과 그것을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때까지는 참 멀었습니다. 멀었어. 안 가져가면 그 사람들이 죽일까 하니까 가져가지마는 오다가서 ‘하나님이면 다 되는데 이까짓 거 더러운 거 아내 팔아 가지고서 이거 얻은 거 이까짓 가져갈 게 뭐꼬?’ 그만 중간에 가다가 저 산에 가서 다 집어던져 버리고 갔을 터인데 그걸 깨닫지 못했으니까 끌고 올라갔어. 올라갔기 때문에 뒤에 하나님이 큰 시험을 했어요. 새로 시험을 해서 시험에 합격되고 난 다음에 회복이 됐습니다.
이래서, 그 뒤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백삼십 년을 아무 이유 없이 애굽 나라에 가 가지고서 애매하게 종질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백삼십 년을 애굽에 가 가지고 종질했어, 종노릇. 종은 값에 팔리는 것 아닙니까? 종노릇했어.
하나님 말씀 어기고 걸은 걸음은 고기덩어리는 좋을지라도 인격 파괴되고, 인간의 결백성 파괴되고, 하나님의 축복 중단되고, 그래 걸어 가지고 얻은 그 재물은 그 자손이 사백삼십 년 동안을 종노릇으로 갚아 줘야 되는 요 결과가 맺어진 것이 하나님의 절대 공평된 심판이요 보응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해서 배신 배약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기지 안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족속을 이룬다 했는데 만일 그리 시집갔으면은 바로의 아들만 나왔지 아브라함의 아들이 나올 리가 있습니까? 약속하신 대로 기어코라도 바로를 물리치고 아브라함의 혈육 자손을 나게 했습니다.
또 내가 너를 지켜서 복의 기관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거게서 죽었으면 어떻게 복의 기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신실히 지켜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려 가지고서 바로가 어떻게 겁이 나 놨든지 그만 내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에 하나나 어겼습니까? “큰 민족을 이루고” 이 약속을 지켰습니까 안 지켰습니까? 지켰습니다. 아브라함은 배신해서 애굽으로 망령되게 내려가도 하나님은 거게서도 약속한 것을 어기지 안하고 지켜서 아브라함의 생명을 건져서 큰 민족을 이뤘던 것입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
아브라함은 배약했지마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약속한 거,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 됐습니까 안 창대 됐습니까? 창대는 불을 창자 큰 대자입니다. 아주 크게 유명했습니다. 세계에 아브라함이라면 신불신자간에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세계에 어떤 유명한 사람보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제일 유명합니다. 그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약속 하나도 어기지 안하고 그대로 지켰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아브라함으로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니까 믿는 사람이 축복 받는 것은 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씨 이삭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탄생돼서 우리들이 다 구원받고 있지 않습니까?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서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을 해치니까 해치는 자는 내가 해하고 아브라함을 돕는 자는 내가 돕겠다. 바로 왕이 아브라함을 해치니까 하나님이 그를 해쳤지요. 그가 회개하고 아브라함에게 후대하니까 또 애굽 나라에 하나님이 후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한 거 하나도 변하지 안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게서 깨달을 것, 첫째 명령 본토 친척 떠나서, 조건 가리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서 가고, 가는 걸음에 여러가지 애로가 있어도 변질되지 안하고 그대로 계속됐으면 하나님의 축복만 있을 터인데 계속하지 안하는 그 망령을 부리는 거게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백 년 동안 종노릇했고 자기 아내도 큰 모욕을 당했고 자기도 모욕을 당했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나도 어기지 안했습니다. 이 약속을 뭐 말하면 한정 없지만 여러분들이 돌아가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은 한 마디도 어기지 안했습니다.
그대로 신실히 지켰습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 일호 시키는 것, 지방 정실과 혈육 정실에 대해서 똑똑히 구별해서 정리할 것. 하나님 순종에 도움되는 지방 정실 혈육 정실,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혈육 정실 지방 정실은 가져도 하나님과 관계를 방해하고 끊어지는 것은 정리하고. 정리해서 복음으로 싸우다가 회개하면 돌이키고.
저도 제 혈육의 형님이 있는데 장형인데 거창집회 가도 절대 큰 집에 발 안 놓습니다. 내가 버스 타고 올라가면은 하도 그리우니까 형님이 와 가지고서 ‘이 사람’ 요번에 또 출발해서 올라오면 창문 열고 거게서 `녜 평안하십니까?’ 했지 ‘요번에는 꼭 갈 때는 들리게' 해도 한번도 들리지 안했습니다. 위해서 기도만 했어.
그 형님이 회개하고, 마지막에 폐병 들어 가지고서 우리 집에 왔습니다. 우리 집에 왔을 때에 그때 인제 동생을 보고 죽는다고 폐병 들어 왔습니다. 왔을 때 그때 겸상 차려서 먹으면서 회개하라고 이제 복음 전하니까 믿겠다고 작정해서 그래 내가 그때 약도 보내고 젖 짜 먹으라고 양도 보내고 그때부터 예수 믿기 시작하고 난 다음부터는 가 가지고 그 집을 방문했지 그전에는 방문하지 안했습니다. 하나님께 방해하는 것은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호 순종.
이호 순종, 조건 따지지 안하고 어데든지 따라나가는 이호 순종.
삼호 순종이 아브라함은 갔다 돌아와 가지고 회개하고 순종했습니다. 그 다음에 롯으로 더불어 시비한 것 보면 재물에 대한 소욕은 하나도 안 가졌습니다. 그 재물 다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 버리고 재물 취한 것이 어떻게 후회가 됐든지 그 다음에는 그런 걸음을 다시 걷지 안했습니다.
소돔으로 더불어 전쟁하고 물질에 큰 전쟁해 가지고 승리한 그 적산, 많은 적산이 있었지마는 실나끈 하나도 취하지 않기로 하고 하나님의 뜻만 찾았습니다. 요렇게 아브라함은 한번 꾸불텅이 쳤다가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꾸불텅이 치지 안하고 그대로 순종해요. 일호 순종 이호 순종 삼호 순종, 어려워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참고 견디고 있어.
이러면 하나님이 뭣 주십니까? “큰 민족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고, 모든 사람이 너로 인하여서 복을 받는 복의 기관이 되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 받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받는다.” 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 축복 요것을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저도 잘못 믿지마는, 이거요 저 개명 골짝에 아주 못난 술쟁이 하고 있던 이것이 이제는 그래도 한국 교회서는, 욕을 하든지, 욕으로도 유명합니다. 백 목사는 이단이다 하는 거로 유명했든지 어쨌든지 한국 교회가 제 이름을 다 압니다. 나는 여기만 아는 줄 알았더니마는 미국에는 더 똑똑히 안답니다. 백영희 목사 서부교회를 그렇게 안답니다. 이름이 참 창대해졌어. 창대해졌어.
세계 제일 큰 모범할 만한 어린이 교회라고 우리 한국에서 방문한 숫자가 얼마라 했어요? 팔백서른여섯 차례를 사람들이 여게 왔습니다. 목사, 장로, 전도사, 반사들.
이러고, 여게 보면 너 하나만 잘되면 다른 것 다 잘된다. 너 하나로서 복의 기관되게 하겠다. 모든 사람이 너로 인해서 복받게 하겠다. 나 하나만 잘하면 모든 거 다 잘하는데 내가 이거 잘 못 해서 여러분들에게 복이 좀 덜 가는 것 같은데 나 잘 살도록 합시다. 나 하나만 잘 살면 여러분들이 다 복받습니다.
그러고 “너 욕하면 내가 그놈 욕할 것이고 너 때리면 내가 그놈 때릴 것이고 너 축복하는 사람은 그 사람 축복하겠다” 이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요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행 심사가 하나 됐으니 아브라함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 미워하는 것이지, 아브라함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지, 아브라함 위하는 게 하나님 위하는 것이지, 아브라함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 대적하는 것이지 요 사람만 되면 천하에 아무것도 해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12장을 증거했습니다. 오후에는 13장을 증거하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요걸 잘 읽어 보고 일호 순종, 이호 순종, 삼호 순종만 하면 돼.
아브라함은 삼호 순종을 그대로 바로 하지는 못하고 한번 꾸불텅이 쳤다가 삼호 순종하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그대로 주셨어. 아브라함은 배신해도 하나님은 배신 하나도 안 했어요. 꾸불텅이 쳐서 일시 좋은 것 받았으나 그것으로 인해서 자손이 사백삼십 년 동안 자기 선조 아브라함 때문에 종노릇 했어, 애굽에게.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아브라함을 우리의 믿음의 표본으로 거울로 주셔서 신앙을 따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도 명한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서가 우리의 순서로 노정되어 있는 것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실수를 거울하여 우리들이 다시는 실수하지 않게 하시고 아브라함이 회개하여 다시 주의 만족하시는 성도되어 축복받은 것을 우리도 본삼아서 회개하여 완전함에 이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형제들을 불러 구원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것이오니 험한 세상을 갈 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사 아무 어려움 없이 평강 가운데서 영육이 복받아 형통케 하시고 놓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형제를 구원코자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속에 항상 불붙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