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1 20:53
아브라함의 신앙
1988. 12. 13. 화새벽
본문: 마태복음 10장 40절∼42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게는 처음에는 우리를 영접하는 것을, 우리 전체를 영접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했고 두번째는 선지자 영접하는 것 의인 영접하는 것 또 제자 영접하는 것 그 영접하는 데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영접이 라는 것은 환영을 중심하는 말입니다. 아버지보다 예수님은 아주 아래 있습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성령님은 본체가 하나요 영광과 지혜와 능력과 존귀가 동등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도성인신 한 이후로는 차이가 무한히 있습니다.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서요 동등이시지마는 우리 때문에 이것은 다 내어 놓아서 가난하게 됐습니다. 가난하게 되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그런 충만을 가지게 됐습니다. 충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모든 면에 무한하신 충만이 하나도 없어져서 아주 인자, 인간 중에 제일 천하고 가난해지고 이런 가장 저주를 크게 받고 하나도 옳은 것이 없는 이런 완전한 참 멸망이요 완전한 무능으로 송장같이 됐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이런 멸망의 원인으로 영원한 멸망되어 있는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모든 댓가로 내 놔서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자 되어겼습니다.
혀 한 번도 자유로 꼬꾸릴 수 없는 완전히 송장이, 하나도 자기의 능력이나 주관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이렇게 되어졌습니다.
그것은 근본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본체시요 영광과 지위와 권능이 동등이신 이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잘못 하나님을 거슬려 취한 이런 모든 사망의 원인을 당신이 다 대신 댓가를 내기 위해서 그렇게 가난해졌어요.
거게서 이제 또 우리를 모든 멸망에서 면제 해방은 해 주셨지마는 우리들이 다시 생명의 존귀와 권세와 영광과 지혜를 가지고 그걸 가지고 살아야 되지 아무런, 형벌받을 것만 없어졌다고 해 가지고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비한 모든 생명과 평강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또. 당신이 이것을 우리 대신 마련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셔야 되기 때문에 대신 마련하시기 위해서 조물주의 자유법에 따라서 죽도록 순종했습니다. 순종해 가지고 하나님의 충만을 다 얻어서 충만했습니다.
이래서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너희들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한 것을 다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그러면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와 같이 하겠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당신이 순종으로 부자가 됐습니다. 근본 부요한 자이나 우리를 위해세 완전히 가난해지시고 또 우리 위해서 부자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순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터러기 하나도 흔들 수 없는 완전 송장같이 기능적으로는 하나도 없는 무능한 자가 됐는데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모든 부요 모든 전능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마련한 그것은 어떻게 마련했는가? 아버지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충만을 다 당신 것을 삼는 이 길을 틔욋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지신 것은 아버지의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것은 아버지의 것이 아닌 것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것은 아버지의 것을 가졌는데 아버지에게 순종으로 받아 가진 것이지 순종 없이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무한하신 그 부요는 순종으로 얻은, 순종으로 은혜로 얻은 순송 부요요 은혜 부요입니다.
아버지의 것에 부요입니다.
이것으로써 순종으로 부요한 이 부요를 우리를 영원한 별망에서 구출하신 주님이 또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대신 순종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것이 된 이것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받아 누리게 하시느냐? 이것을 순종으로 받고 순종으로 누려서 순종으로 그 혜택의 효력을 보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크시고 예수님은 그다음 크시고 또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다음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 차이를 예수님의 도성인신의 이 대속하시기 이전에 차이 있다고 생각하는 섯은 이단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면 안 된니다.
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그러나 대속하신 우리의 대속주가 되고 난 후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도 이단입니다. 요견 잘 알아야 됩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부요와 꼭 같은 부요를 가졌으니 이것은 아버지의 부요를 믿음으로 받아서 가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서는 말 한 마디도 세상에 계실 때에 자유하신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말하라는 것만 하고 행하라는 것만 행하고 받은 것만 가지고 했습니다. 여게 대해서는 좀 여러분들이 알기가 어려울 것이나 그저 기억하고 하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말단에 '너희를 발단에 되어 있는 우리 대속받은 성도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그 위에 우리 위에 있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또 '나를 영접하는 자는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보내신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보내신 이는 누구입니까?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그렇게 망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지마는,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지마는 우리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 영접하는 것으로, 또 예수님은 아버지가 아니지 마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아버지 영접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늘 나라에서 인정하고 대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전할 때에 예수 믿는, 지극히 적은 자라고 말하면 아마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우리가 볼 때에 누가 적은 자라고 뭐 할 수 있겠습니까? 꼭 같은 자로 봐지지요.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제일 작고 적고 제일 참 무가치한 자, 그자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자는 예수님이 아니지마는 그자를 대우하는 것이 막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 대우하는 것이요 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계통이 그래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마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이 막바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요 주님을 높이는 것이 아버지를 막바로 높이는 것이요 주님을 위하는 그것이, 마음으로나 생각으로나 행동으로나 말로나 물질로 위하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위하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계통이라는 것, 이 계통이라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이렇게 여게 다뤄서 말씀을 했습니다. 계통. 그러면 성도는 아무리 지극히 작은 자라도 바로 주님과 하나되어 있는 계통이요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되어 있는 계통이라.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를 무시하는 것이 바로 주님 무시한 것이요 주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등한히 한 것이 바로 아버지에게 등한히 한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계통이 위에와 아래서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성도가 성도를 대할 때에 조심 있게 대해야 되겠고 또 주님을 생각할 때에 바로 아버지에게 대한 것인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알고 상대해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보통 인간 대우, 예수 믿는 보통 예수 믿는 사람 전체를 대우하는 것, 예수 믿는 크고 작고 모든 사람을 상대할 때에 바로 그것이 주님 상대인 것을 알고 우리가 해야 되지 우리가 주님이라면 높일 줄 알고 크신 줄도 알고 대우할 줄도 이래 알지마는 우리는 예수 믿는 그 소자 하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여게 예수 믿는 아주, 예수 믿는 중에 예를 들어서 논리로 말을 한다면 예수 믿는 자 중에 제일 작은 자가 어떤 자가 있다 합시다. 바로 그자가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이 바로 아버지요, 이러기 때문에 그자에게, 내가 멸시를 하든지 내가 대우를 하든지 그자에게 상대하는, 그것이 곧 주님에게 직접 상대하는 것이요, 내가 주님을 내가 어떻게 경외하고 사모하고 하는 그것이 바로 근본의 자존자 근본이신 아버지를 상대하는 것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줄 알고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도의 그 계통이 하나라.
보면 사람이지마는 거게는 성자와 성부 주님과 아버지가 바로 하나되어서 그 안에 계셔. 소자 안에 성자도 그 안에 계시고 성부도 그 안에 계시고, 그 껍데기 사람만이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할 때에 존대하는 것도 그렇고, 멸시하는 것도 그렇고, 그 사람을 이간을 붙이든지 뭐 뭘 줘서 유혹을 시키든지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는 하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라.하나님이야 넘어지지 않지요. 넘어지지 않으나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 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서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이 친밀히 될 수도 있고 불목이 될 수도 있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서 하나님 대우함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함이 될 수도 있는 요 연결 계통이 하나라는 요것을 중하게 우리는 여겨야 된다는 것을 지금 말씀합니다.
41절에 여게 선지자 영접, 의인 영접,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 영접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그 모든 행위를 가리켜서 선지자 행위라고 이렇게 성경에 가르켰고 또 의인의 행위는 의인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행해서 성취하는 것을 가리면서 의인이라고 이렇게 성경이 발하고 제자는 예수님을 닮은, 예수님을 닯은 언행심사의 그 모든 행동이나 생활하는 것을 가리켜서 '제자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의 생활이 이 세 가지 중에 다 들었습니다. 안 든 게 아니고.
세 가지 중에 다 내포뇌어 있습니다. 있는데,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한다' 이 말은 본인은 선지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인은 선지자가 아니라 말이오.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이렇게 말하지 안했고.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이랬습니다. 선자자도 아니고 그저 선지자라는 그런, 선지자라는 그런 실상 선지자는 되지도 못하고 선지자라는 이름만 가진 그것이라도 이렇게 대우하는 자는, 영접한다, 말은 대우한다 말이요, 존경한다 말이요 귀중히 여긴다 말이요, 아주 존중히 여기고 귀중히 여기고 대우하고 위하고 높여 섬기는 이런 것을 다 합동해서 영접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저는 없지마는, 저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아니지마는 선지자 제자를 보고 자기가 좋아하고 기뻐하고 대우하는 이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선지자 의인 제자를 보고 제자의 그 모든 행동이나 그 실상의 그거를 보고 대우하는 자는 선지자 의인 제자의 상을 받는다 이 말씀과 선지자가 아니고 선지자의 이름이라, '이거는 선지자라' 이름만 가 졌어.
실상 가진 것이 큽니까 이름 가진 것이 큽니까? 실상 가진 것이 큰 것이오.
그러면 이름은 실상의 껍데기 중에 껍데기라 말이오. 이것을 표현을 이래 했으니까 선지자의 지극히 작은 것 뿌스러기, 선지자의 뿌스러기라도 이렇게 대우하고 높이고 좋아하고 환영하는 사람은 그 상을 받는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렇게 일이 모든 것이 연결, 연결 연합성이 강하고 이렇게 모든 것이 철두 철미합니다.
이래서 어제 아침에도 말한 거와 같이, 자기에게 없어도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보고 좋아하고 가치로 여겨서 대우하는 자는 상 받는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 보고가 아니라 이름만 가진 그것 보고 대우하는 그것 보고 대우하는 것도 상을 받는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면에 대해서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반대로 우리가 말해 봅시다. 자기는, 여게 의가 없는 자인데. 자기가 의를 가지고, 의를 가지고 의인을, 의인의 뽀스래기, 의인의 껍데기, 의인의 이름읍 영접하지 아니하고 멸시하고 대적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무슨 벌을 받겠습니까? 그 사람은 벌을 받겠습니까 상을 받겠습니까? 자기는 의인입니다. 의인이면서 다른 사람의, 의인을 멸시하고 훼 방하는 게 아니라 '의인의 이름' 의인의 뿌스러기를 멸시하고 훼방하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뭐이 되겠습니까? 뭣이 되겠지요? 뭐이 되겠어? OOO.뭐이 되겠지? 의인이니까 의인의 상을 받겠습니까 의인을 멸한 벌을 받겠습니까? 의인을 멸한 벌을 받습니다. 의인을 멸한 벌을 받습니다. 왜? 자기는 의인인데 다른 사람에게 있는 의를 보고 멸시하고, 영접 반대는 배척 아니요? 멸시 아니요? 배척하는, 다른 사람에게 의가 있는 것을 배척하고 하는 그게 아니라 그보다 작은 것, 의의 이름, 의라는 그 이름만 가진 것을 배척을 해도. 이름만 가진 것을 영접을 해도 상을 받고 배척을 해도 뭣 받습니까? 벌을 받습니다. 요 말은 아주 어려워서 여러분들이 좀 깊이 양심을 가지면 알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의인인데 다른 사람에게 있는 의를 환영하지 않고 배척을 한다면, 의인이 아니라도 이름만 가지고 이름만 가진 것을 이렇게 환영해도 상을 받는데 이 사람은 의인인데, 실상으로 의인인데, 의인인데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그 의인을, 의인뿐 아니라 의인의 이름을, 의는 없고 의인이라 하는 이름 있는 그것을 배척을 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상 대신에 벌을 주니까 그 이유가 뭐이겠습니까? 그것만 대답하면 오늘 아침에 그만 설교를 그칩니다.
누구든지 하나만 대답하면, 알고만 있으면 되니까, 한번 대답해 봐. 아는 사람 손 들어 봐. 손을 들어 봐, 아는 사람. 연결?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좀 이해 못할 답이야. 예, 시기 죄. OOO? 아니오.
의인이지마는 해부를 해 보니까, 의인이지마는 해부를 해 보니까 속에 뭣 들었습니까? 악이 들었소. 자기 중심으로, 자기 위해서, 자기 명예 위해서, 자기 지위 위해서, 자기 인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점령 하기 위해서 속에 하나님의 원수인 적, 악, 하나님의 원수인 자기 중심 요것이 속에 왕이 돼 가지고 지금, 이리가 양의 껍질을 입고 지금 그렇게 성자인것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양떼를 삼키기 위해서, 죽이기 위해서, 노략질하기 위해서 하는 속에 악이 들어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크면 클수록 벌이 큽니다.
그런고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남의 선을, 선지자노릇 의인노릇 예수님의 제자노릇 하는 것 이게 다 신앙생활에 관련된 이 세 가지 분류로 하면 전체가 다인데 이것을 싫어하는 그것은, 싫어하면서 제가 남의 것은 싫어하면서 저는 많이 갖추어 가지고, 있습니다.
왜? 제가 의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은 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많이 가지고 았는데 왜 제게 있는 의는 열심히 가져서 많이 부요해졌는데 남에게 있는 의의 뿌스러기 그거는 왜 귀중히 여기지 않고 싫어하는가? 왜 그런가? 왜 자기에게 있는 의와 남에게 있는 의가 다른가? 다르지 그거는.
남에게 있는 의는 자기 의가 아니고 자기에게 있는 의는 자기 것이기 때문에 그래. 그러면 자기 것이라는 그 주인공 그놈이 누군가? 그게 곧 악이요 자기 중심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을 껍데기로 보는 게 아니고 사람을 접할 때에 그 신령한 눈이 밝은 사람은 그 속의 이면까지를 이렇게 보고 이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이래서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과 아주 하나님 섬기는 일을 반대하고 있는 두 정 양극의 사람이 있을 때에 하나님 섬기는 사람은 좋고 하나님을 섬기는 걸 반대하는 사람은 나쁘다 이렇게 일반들이 보는 데에 거게는 간혹, 하나님을 섬기는 걸 반대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열심 있게 하는 그 사람이 더 두렵고 교회를 절단낼 사람이 그 속에 들었다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신령한 눈이 밝은 사람입니다.
왜? 반대하는 사람은 껍데기 악한 사람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까짓 거는 다른 사람이 신용도 안 하고 별 피해를 못 줍니다.마는 겉으머리 아주 좋은 꺼풀을 입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런 줄 알고 유혹받아 가지고 멸망되는 그런 일이 많기 때문에, 내가 지금으로부터, 한 사십 년 한 오십 년 전에 진주 성경학교에 가니까 어떤 강도사가 와서 설교를 하는데 '교회 일에 열심 있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대하는 사람 그것은 잘 다스려서 길러갈 수 있고 열심 있는 그 사람 속에 삼가 조심할 무서운 적이 있다' 하는 것을 설교해서 나는 처음에 그때 예수 믿은 지 서너 달밖에 안 됐기 때문에 '저게 무슨 말인가' 했으나 이상한 말이다 기억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제가 깨달았어요.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중심이 돼 가지고 하는 모든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적 중에 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신앙생활에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라.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신앙생활 해야 되지 내나 자기 중심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활동하는 그것을, 자기 중심으로 예수 믿는 모든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최고급의 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자기 중심인 이것을 완전히 돌이키지 않으면 그것은 다 스스로 속는 일이요 하나님의심판 앞에서는 다 걸리고 하나도 없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고 꼭 실천을 하고 실천에서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가르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어쩌든지 잊지 마십시다. 뭐 밤에 하든지 낮에 하든지 아침에 하든지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삼십 분 기도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부장 선생님들과 반사 선생님들과 보조반사 선생님들은 자기에게 소속한 짓을 언제는지 마음 속에 품어 놓고 기르고 주님과 함께 동행으로 기르고 또 거게 집선하는 그런 것을 조심해서, 접하는 그런 것을 조심해서 잘 관리하는 것이 관리하는 것이라. 접선 잘못하면 헛일이라. 요새 감기 들린 사람 많은데 그 감기도 접선에서 감기 듭니다. 자기 몸과 자기 몸 밖에 있는 온도와 자기 안에 기후와 자기 밖에 있는 기후가 서로 조화가 바로 되지 못할 때에는 감기가 드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람이 열심 있고 진실해도 그 사람과 접하는 그 접촉하는 사람이 잘못되면 그 사람 절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