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양심으로 단속

 

1988. 10. 16. 주일오전

 

본문:마태복음 5장 13절∼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세상 소금이라 빛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빛으로 살기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상 생활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은 어데서든지 어두움으로 살지 아니하고 빛으로 살도록 노력을 하고 또 빛으로 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희생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불만이나 불평이나 혹은 원망이나 정당치 않는 환경이라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면 벌써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됐든지 나는 빛으로 사는 것이 이것이 구속받은 나의 생애 법칙이요 또 이렇게 빛으로 살려고 하면 자연히 정당성을 넘어서 희생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땅위에 두시기를 희생하는 생애로 우리 생애를 정해 주셨기 때문에 희생하는 것도 별스럽게 생각할 것이 없고 우리가 당연한 우리의 천직이요 또 남이야 어둡든지 뭐 검든지 나는 빛으로 사는 그것이 구속받은 우리들의 천직이요 또 생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빛으로 사는 그 방편에 대해서 몇 가지를 증거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노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내 자체에 대해서, 내 모든 생활에 대해서, 내 소유에 대해서, 내 모든 활동에 대해서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것이 있으면 이 노여워하시는 것을 풀어서 드리도록 그렇게 우리가 항상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요 이 세상만 보고 막살이 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영원 무궁에 희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막 가는 그 불택자들의 생활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과거에 부름을 입기 전에는 그저 세상만 보고 막살이를 했던 저희들입니다. 뭐 돈만 들어오면 된다, 내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또 나만 유익하고 좋으면 된다 이런 모든 막살이 생활을 과거에는 하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영원 장래의 희망을 두고 사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첫째 하나님이 섭섭해 하시는 것을 우리가 찾아서 하나 둘 힘 있는 대로 고쳐 나가도록 노력을 해야 하겠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다문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대주재인 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기의 생활이 다문 뭐 먼지 같은 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겠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 사는 우리 생활이 돼야 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막살이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무한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희망하는 모든 소망이 다 하나님 그분 한 분에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모르심이 없고 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기 때문에 참 이 세상은 너무도 거짓부리요 사이비한 세상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정죄받고 불의한 것이 오히려 찬양을 받는 이 뒤죽박죽의 이 세상을 좀 보는 사람 또 자기의 허무한 것을 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참 하나님이 계시는 여게 대해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소망을 가지고 살 무슨 의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을 보고서, 제가 그런 사람들을 더러 접촉했습니다. 세상을 보고서 사는 사람으로서 ‘이제 이 세상에서 마음껏 악을 행하고, 선 해 봤자 그까짓 거 소용없기 때문에 악을 행하고 마지막에는 한 사십 되면 비행기 타고서 저 태평양에 가 가지고 한가운데 가서 내리 아래로 질러 가지고서 물 속에 매장하고 말겠다’ 하면서 세상에 대해서 어느 모를 봐도 옳고 바른 참된 것이 없으니, 옳은 것에 그 표준할 만한 표준이 없으니 살 수 없다 하는 그런 사람을 제가 더러 만나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속여서 단합된 거짓말에도 유혹받지 아니하시고 아무리 사람들이 매장시키는 깊은 매장 속에서도 옳은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갈라내시는 모든 그 진상을 그대로 알아 가지고 판단하시는 이 하나님을 우리가 찾게 되고 하나님이 계시게 된 것이 어떻게 기쁜지 모릅니다. 참 이분이 안 계신다면 뭐 땅위에 네나 내나 봐야 하나도 둬 둘 것 하나도 없고 있어야 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멸해야 될 것뿐이지 뭐 전부 자멸 행위뿐인데 뭐 취할 게 없지마는 이분이 계시고 이분이 죄와 의를 책임지시고 진가를 책임지시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공변된 심판의 보응을 당신이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무한한 그 희망을 가진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속는 이런 낙망 생활도 안 되고 또 속는 모든 사기 횡령 허영의 허욕의 이런 생활도 안 되고 이렇게 과장하는 억울하고 애매한 이런 복술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분이 계시고, 또 이 세상은 하루밤 나그네라고 말씀했고 다음 세계는 영원 무궁한 세계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루밤 나그네 같은 이 짧은 세상에서 영원 무궁이 좌우되는 우리의 생애입니다. 이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리 해 봤자 옳은 판사가 없으면 소용없고 옳게 보응시키는 일이 없다면 그까짓 거 다 뭐 모조리 다 멸망인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마는서도 정확한 판사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판단할 판사가 있습니다. 또 냉수 한 그릇에도 억울치 않고 정확한 보응을 일으키실 그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보응은 죽었다가 부활한 그다음 영원 무궁에 변치 않는 끝이 없는 그 세계의 보응으로 우리에게 갚으시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자마다 땅위에는 소망이 넘치고 희망이 불붙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땅위에 이런 거 저런 거 모든 거짓 것이 있다 할지라도 몰라 그런 것이니까 안타까울 것뿐이지 그것 보고서 낙망이나 내가 따라서 더러워지거나 어두워지거나 흐려질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 생활을 하는 데에는 우리가 일학년으로 시작을 해 보려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에는 사람에 대한 것은 다음으로 두고 먼저 하나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많이 공부를 했고 또 많이 노력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게 되면은 사람과의 관계는 저절로 바로 가지게 되는데 이 모든 생활이나 가르침이 모두 잘못됐는지 이것이 바로 정상화되지를 못하고 자꾸 이렇게 삐뚤어져서 잡것이 돼 나가는 것을 제가 봅니다.

이래서, 이것이 인간 관계에 단계를 밟아서 여게서 초월해서 하나님 앞으로 가야 될 이것을 그만 인간 단계를 밟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가서 거게만 욕망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돌담 쌓듯이 돌을 한 개 놓고 그 위에 또 하나 놓고 또 하나 놓고 이렇게 포개면 뭐 얼마든지 포개 올라갈 수가 있지마는 밑엣돌을 놓지 안하고 위엣돌을 놓으면 그것은 포개질 수가 없기 때문에 뭐 전지의 능력으로서도 밑엣돌 없이 위엣돌은 놓을 수 없는 것이 그것이 이 물리의 이치입니다.

어떤 사람 말하면 ‘이 우주에 이 돌 억억억만 배도 더 큰 모든 달이니 별이니 해니 그런 것들도 아무 얹힌 데 없이 달려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말을 해서 또 이 설교를 반박할 자가 있을란지 모르지마는 그것이 이 우주에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대로 당신이 그것을 매달아 놓은 그 법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그 운행이 없으면 그런 거 다 박살되고 맙니다. 또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물질계라는 조그만한 지구 땅덩어리 안에서 요게서는 돌 하나에 돌을 놓고 그 위에 포개야만 포개지는 것이 이것이 진리요 법칙입니다.

그러기에, 이 낮은 인간 생활을 차차 밟아 가는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신령한 생활이 원만하게 되어지도록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나서 오늘 이 말씀을 증거합니다.

첫째는 우리 생활에 이 양심을 써야 하겠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땅위에 사람으로서는 없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양심은 다 있습니다. 그 양심을 가리켜서 성경에 자기 마음에 빛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양심 없는 사람이 없는데 양심은 무엇이 양심인가? 양심은 자기 마음에서 이렇게 하면 옳으냐 저렇게 하면 옳으냐 어떻게 하면 바르고 옳은가 하는, 자기 편이 되지 안하고 자기에게 붙어서 자기에게로 치우치지 안하고 남에게도 치우치지 안하고,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치우치지 안하고 자기나 남이나 공평되게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할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면, 만일 양심이 화인 맞았다 하는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양심이 어떤 것의 것이 됐으면은 양심이 무엇의 것이 됐든지 거게 속하게 됐으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라 죽은 양심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돈에 매여서 범사를 비판하고 평가할 때에 이렇게 하면 내 돈에 어떻게 되나 돈이 손해가나 유익되나 하면 그 사람은 그 양심이 돈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아무짝도 못쓰는 양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자기의 무슨 권세나 그런 것으로 화인 맞은 양심 또 자기 자존심 자기 주장 자기라는 것에 편이 돼 가지고서 어데든지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차이 있게 자기를 좀 두둔하고 자기의 편이 돼 가지고서 자기를 더 위하는 공평이 없는 그런 양심은 자기라는 화인을 맞아서 아무짝도 못쓰는 양심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저것에게도 아무것에도 매이지 안하고 그저 양심은 무엇이든지 바로 옳게 참되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대로는 바로 옳게 해 볼라고 하는 그 마음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이 양심은 안 믿는 사람들로서도 이 양심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모든 실패와 모든 더러운 거, 실패라든지 또 자기에게 모든 잘못된 것이라든지 남에게 수치당하는 거, 욕 얻어먹는 거, 뭐 멸시받는 거 모든 그런 것이 자기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 모든 해를 이것을 치료하는 제일호가 양심 생활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잘못된 것을 치료받는 제일호가 이 양심 생활입니다. 또 자기에게 오는 온갖 세상 축복을 끌어오는 제일호 방법이 이 양심 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이라도 양심을 버린 사람은 자기의 화를 치료하는 길이 없는 사람이요 양심을 버린 사람은 자기에게 오는 모든 행복을 끌어올 수 있는 그 길이 없는 그런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신자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애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자기 애끼는 사람인고 하니 자기를 애끼는 사람은 자기 양심을 애껴서 양심을 상우지 안할라고 양심을 북돋우고 양심을 잘 길러서 참 양심이 명철하고 예민해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자기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이런 귀한 실력 있는 밝은 양심을 보배인 줄 알고 이것을 가질라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불신자로서 세상 생활에 절대 그에게 멸망이라 하는 것이 오지를 않습니다. 또 모든 인간에게 오는 행복은 그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게서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서 신앙 양심을 우리는 가지게 됐습니다.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어떤 게 신앙 양심인고 하니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 이 도리의 지식대로의 양심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일반적 양심은 그 사람에게 뭐 불교 지식이 있든지 유교 지식이 있든지 무식하든지 유식하든지 어짜든지 제대로의 잡탱이 지식 있는 그 지식으로라도 바로 옳게 해 보려 하는 그것이 이방인의 양심이요, 기독자의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거게서 한 걸음 나아가서 신앙 양심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이 지식을 자기 지식을 삼아 가지고서 이 지식을 활용해서 옳게 바르게 해 볼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과거에는 성경을 모를 때에는 이 세상 지식으로 했지마는 이제 성경을 알게 됐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혹 옳다고 하는 것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에 틀린 것도 있고 또 세상이 틀렸다고 하는 것도 성경에 비춰 볼 때에 옳은 것도 있습니다. 이제는 신앙 양심으로 산다는 말은 신구약 성경 이 지식을 가지고 이 지식이 옳다고 하는 대로 이 지식이 옳다고 하는 대로 그대로 해 볼라고 하는 것이 신앙 양심의 생활인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진리대로 살자 영감대로 살자 이렇게 진리대로 살자 영감대로 살자 하는 이 말은 좋은 말인데 신앙 양심의 순서를 밟지 안하고 신앙 양심을 그만 초절해 가지고서 신앙 양심은 그 단계를 밟지 안하고 그 위에 뛰어 올라가 가지고서 진리 생활이니 뭐 영감 생활이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생활이니 이라다 보니까 모든 것이 중둥이가 다 뿔라져 가지고서 마치 밑엣돌 없이 위엣돌을 놓으려고 하는 그런 식과 꼭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면 누가 봐도 이 말씀대로 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고 머리되고 꼬리되지 안하고 위에 있고 아래 있지 안하고 또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고 말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 형통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이 말씀과 우리의 현재 당면하고 있는 실상과는 이 모순된 모순을 우리가 많이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돼 버렸습니다.

이것은 고장이 어데서 나 가지고 이리 되는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정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 믿어도 잘못 믿어 그렇다든지 둘 중에 고장은 하나이지 딴 데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머리가 되고 위에 있고 뛰어나고 모든 일에 축복을 받아서 말씀대로 그렇게 성공한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해서 안 된다고 해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남이 ‘너는 이거 이것이 잘못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다는 축복은 안 오고 너에게는 반대가 온다’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이 달게 받으면 하지마는서도 말들은 다 ‘내게 대해서 무엇이든지 잘못된 거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그라면 내가 달게 받아서 감사히 받아 가지고 어짜든지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지마는서도 그 아는 사람들이 말해 가지고 바로 말해 가지고 그 효력을 보지 못하기를 마치 개에게 진주를 던지면 개가 진주의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밟고 도리어 물러 달라든다 주님이 말씀하신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자기에 화근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잘못된 것이고 자기에게 오는 복을 가로막고 있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데 잘못된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안하고 다른 사람들이 말해 주면 그것은 화를 막는 보배요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오는 보배이건마는서도 이 보배의 가치를 모르고 그 속에 악령 b성 b습 옛사람 그놈 자기 중심 그놈이 속에 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중심에 거리끼는 말이 되니까 오히려 반발해 가지고서 도리어 죄가 더 많아지지 효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으로 말해 주지 않습니다.

이래서, 그 목회학을 공부하는 데에 그렇게 목회학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대해서 절대 개적으로 그에게 잘못된 것을 말하지 말아라.

개적으로 그이의 비를 말해 주지 말아라. 그의 단점을 말해 주지 말아라. 그의 비와 단점을 말해 주면 개에게 진주 던지는 거와 같다. 그러니까 다만 공적으로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 제가 스스로 받아 가지고서 돌이켜 회개를 해야 되지 개적으로 단점을 지적하고 그 모든 비를 지적하게 되면은 결국은 사람 잃고 복수되고 그 사람은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하는 그런 말을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혹 그런 것을 말을 해서 고쳐 줄 수 있는 실력 있으면 말해야 됩니다.

고쳐 줄 수 있는 실력이 있으면은 그걸 스스로 깨달을라 하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는 것을 당장에 말해 가지고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잘못을 말할 때에 고치고자 해서 고쳐가는 사람은 뭐 가속도로 그것이 성장돼 가지마는서도 그 일이 아주 속성 방편인데 그 방편에 위험성이 많이 있기 때문에 둔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둬 둬 버리면 제가 실컷 죄지을 대로 죄짓고 망할 대로 망하고 구원 다 팔아먹고 이제 나중에 뭐 아무것도 남은 찌끄러기 없이 빈자루 모양으로 쭈그러져 가지고서 아무 속에 알맹이 없을 그럴 때사 이제 제가 돌이켜 가지고 구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강단이기 때문에 제가 말을 합니다.

믿는 사람이 신앙 양심을 버리면 신앙 생활은 다 헛일입니다. 신앙 양심을 버리고 신앙 생활 한다고 뭐 기도해도 소용없고 또 찬송해도 소용없고 전도해도 소용없고 심방해도 소용없고 뭐 금식해도 소용없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신앙 양심을 버린 자는 순교를 해도 순교가 아니라 제 죄값으로 죽는 개죽음이지 그거는 순교는 절대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앙 생활은 크든지 작든지 모든 신앙 생활은 신앙 양심의 그 디딤돌을 밟고 올라서야 가는 것이지 그 신앙 양심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전혀 안 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것 하나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양심을 가지고서 우리 마음을 한번 단속해야 되겠습니다. 자기 신앙 양심, ‘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해 보자.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곧게 깨끗하게 말씀에 딱 들어맞게 살아보자.’ 하는 요게 신앙 양심이오. 요 마음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요 마음 없는 자가 날뛰는 것은 전부 허영이요 허욕이요 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자기가 우상이 돼 가지고서 우상을 섬기는 그 행세지 하나님에게는 진노만 돼지지 아무 효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양심을 가지고서, 이 양심부터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이 양심을 우리는 마구 짓밟아서 양심을 짓밟아 가지고서 양심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또 양심은 일어날라 하면 처박아 버립니다. 안 되면 안 믿는 사람은 술을 먹어 처박든지 믿는 사람이 독을 부려 처박든지 어짜든지 양심을 처박아서 양심을 애끼지 안하고 양심을 가꾸지 안하기 때문에 이 양심을 자라지를 못합니다.

이 양심이 아니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양심으로라야 찾아가지 양심의 인도를 받지 안하면 하나님에게는 찾아가지를 못합니다. 또 양심의 인도를 받지 안하면 하나님을 보지도 못한다 했습니다. 이래서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그말은 이 신앙 양심으로라야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말이요,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말은 하나님 찾아가는 행동도 이 양심으로 찾아가는 행동, 양심으로라야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든가 뭐, 자기기 밤에 잠을 안 자고 산에 가고 며칠 동안 금식을 하고 하나님 가까이 할라고 한다고 해도 자기가 신앙 양심을 써 가지고서 해야 하나님을 찾아가고 만나게 되지 그리 안 하면 만나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가지되 우리는 신앙 양심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양심을 가지되 신앙 양심, 뭐 안 믿는 사람의 양심대로 해 봤자 지옥 갑니다. 소용없어. 그 양심은 소용 없어. 꼭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해야 되겠다 하는 요것이 신앙 양심이기 때문에 요 양심에게만 이제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래서, 이 양심으로 우리 마음을 단속해 봅시다. 내가 지금 내가 이 시간 먹는 마음은, 내가 이 가진 마음은 이 마음을 신앙 양심으로 한번 생각해 봐서 죽일 것이면 죽이고 버릴 것이면 버리고 또 그거는 단단히 가져야 될 것이면 가지고 자기 마음을 이 신앙 양심으로 비판해 보고 단속하는 일이 없으면 모든 생활은 다 거게서 나오는 것인데 헛일입니다.

이래서, 우리 마음을 그저 계속 신앙 양심으로 다져서 살펴서 신앙 양심이 인정하는 마음으로 또 신앙 양심이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으로 이래 될 때에 거게서 오랫 동안 좀 힘을 쓰면 믿음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너머 있는 것이오. 믿음이라는 것은 신앙 양심대로 사는 것은 믿음 아니오. 신앙 양심대로 사는 것은 믿음을 만들라고 애를 쓰는 것이오.

자기 주관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해석해서 말씀대로 바로 옳게 할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주관이 들어 있기 때문에, 무지한 주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온전치를 못합니다. 이렇게 애를 쓰다 보면 영감의 마음이 됩니다, 영감. 성신의 감동의 마음이 되면 그때 비로소 그대로 행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명하는 그대로 행하는 그게 믿음입니다. 자기 주관에서 말씀대로 한다고 해 가지고서 고거 믿음은 되는 거 아니오. 신앙 양심에 통과하고 난 다음에 영감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 생활은 쉽고 어렵습니다. 뭐 얼마나 하기는 쉬운데 또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어려운 것은 자기라는 자기 중심의 악령, 자기 중심의 자기 원죄 부패성, 자기 중심의 본죄의 이 모든 습성, 자기 중심이라는 이놈이 들어서 이 신앙 생활하기가 어렵고 구원 이루기가 어렵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할라고 하면은 하나님께서는 가장 쉽고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다 통과할 수 있는 그런 아주 쉽고 보편적인 아주 쉬운 그 순서를 통과해서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신앙 양심으로 좀 한번 살펴서 단속을 해서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그 마음으로 단속을 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딴걸 해야 되지 그 마음을 신앙 양심으로 단속하지 안하고 한다면은 그거는 만물보다 거짓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가장 악한 자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나중에 가서 인간 중에 악한 인간이 되어지는 것이 잘못 믿은 종교 말년의 모든 신자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신앙 양심으로 다음에는 우리 혀를 한번 단속해 봅시다. 신앙 양심으로.

내가 이 시간에 이 혀를 놀리는 것은 이것은 신앙 양심으로 한번 거게서 한번 검토를 해 보면 자기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어짜든지 신앙 양심에 거리끼면 그 혀를 우리는 재갈먹여서 중단하고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그 혀만 놀리도록 이렇게 혀를 또 신앙 양심으로 한번 단속을 해 보고, 또 우리가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접할 때에 우리 귀를 또 신앙 양심으로 한번 단속해 봐야 되겠습니다. 귀가 이것도 못된 습성이 있어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은 자기 귀에 즐거운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스승을 찾아다닌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저녁을 먹고 나면은 못 견딥니다. 못 견뎌서 가 가지고 이 귀에 아주 자기 망하고 남 망하고 하는 그런 망치는 말 아주 제게 독소가 되는 그런 말을 들어야 됩니다. 사람에게 뭐 독이 많이 있다 하지마는서도 혀보다도 더 독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 혀는 세계같은 독이라 했습니다. 쉬지 않는 악이라고 했습니다. 쉬지 않는 독이라 했습니다. 이런데 이 독약을 먹어야 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저녁 먹고 스르르르 가 가지고 또 가 만나 가지고서 그 사람이 사람 죽이는 말 진리를 떠나서 요래 거짓말 조래 거짓말 요래 남 논인장단 조렇게 죄되는 말 그런 모두 나쁜 말 그런 말 한 마디 들어야 이제 잠이 옵니다.

그 잠이 오는데 그 잠 오는 그놈은 어떤 놈입니까? 그놈은 어떤 놈이요? 그놈을 죽여야 할 놈입니다. 그놈이 자기 아닌 자기요 자기를 죽인 원수인 자기요 옛사람 악령 b성 b습으로 된 자기지 자기 영이 아닙니다. 악령하고 원죄인 자기 중심인 원죄하고 본죄 자기 중심으로 행동한 습성의 그 본죄하고 이게 뚤뚤 뭉친 그 옛사람인데 옛사람은 그놈은 죄를 지어야 맛이 있습니다.

이거 어떨 때는 그냥 그 사람에게 정상으로 대하면은 못 견뎌서 막 아편쟁이 모양으로 못 견뎌 죽을라 합니다. 죽을라 하니까 부득이 해서 이것을 조금 붙들기 위해 가지고서 죄를 조끄매 가미하면 막 좋아합니다, 죄 가미한 말을 한 마디 하고 죄를 가미한 그런 무슨 행동이라도 하나 하면은 이제 그게 허기를 면합니다.

면하고서. 그러나 그라면서 그 사람이 정말로 단속을 해 가지고 이거 차차차 그 목적으로 하면은 사람 고치는 방법은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귀를 이 양심으로 단속하는 이 일을 우리가 해 봐야 되겠어. 귀를 양심으로 단속하는. ‘내 귀가 지금 가서’ 여게 그 사람에 말하니까 그 말이 듣고 재미가 있습니다. 잠도 안 오고 그만, 잠이 와, 하나님 말씀 들을 때는 잠이 오지마는서도 그 말 들으니까 잠이 안 와. 잠이 안 오는데 요 귀가 요거 내 양심으로 판단해 볼 때에 요 귀가 마귀 말을 듣기 좋아하는 귀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는 귀냐 요 귀가 나 망할 말을 듣기 좋아하나 나를 살리는 말을 듣기 좋아하느냐 자기 귀를 신앙 양심으로 한번 판단을 해 보고 검사도 해 보고 이렇게 단속하는, 신앙 양심으로 자기 귀를 단속할 수 있는 이 면을 보고서 이 면을 단속할라고 애를 쓰는 사람이면 그 사람 마귀란 놈이 만만히 못합니다.

이 전부 우리 교회가 이 귀를 단속하지 안해 가지고서 다 죽고, 죽이는 독이 전부 혀로 다 죽이요. 혀로 죽여. 너 일생 동안 망했는데 뭘로 망한 줄 아느냐? 네가 죄 지은 건 다른 사람을 혀로 망쳤기 때문에 그 혀로 죄지은 그 값으로 네가 망한다.

네게 멸망이 어데로 들어오는 줄 아느냐? 네게 멸망이, 멸망이 어데로 들어왔나? 네 믿음이 어데로 들어왔나? 근심이 어데로 들어왔나? 걱정이 어데로 들어왔나? 원망 불평이 어데로 들어왔나? 낙망이 어데로 들어왔나? 악독이 어데로 들어왔나? 네 귓구멍으로 들어왔다. 귓구멍으로 들어와 가지고 전신을 망칩니다. 이래서 귀를 자기가 좀 단속해 볼라고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되겠고, 그다음에는 우리가 눈을 단속해 봐야 되겠습니다. 내 눈이 보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눈에, 뭐 테레비 그런 것도 보고 싶은 그것도 신앙 양심으로, 자, 우리가 테레비 못 볼 건 아닙니다. 보지마는서도 신앙 양심으로 따져보면 아, 이 테레비는 봐야 되겠다, 이거는 안 봐야 되겠다, 이거는 봐야 되지마는서도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만 봐야 되겠다, 암만 봐야 되지마는 이거 주일날은 또 안 봐야 되겠다 하는 그런 것이 우리가 이 눈을 단속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눈을 단속하는 거.

나는 저 지난 주일에 주일을 범했어요. 왜 범했느냐 하면은 내가 예배 마치고 난 다음에 양산동 그 기도실에 가서 또 여러 사람을 만나 가지고 이래 뭐 권면을 이래 했지, 또 여기 와 가지고 여러 사람을 만나서 권면했지, 또 저 새사택에 와 가지고 또 이런 사람 만나 가지고 이런 거 저런 거 많이 얘기했지. 너무 일을 많이 하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 그만 주일인 걸 몰랐어. 주일인 걸 모르고 시계를 보니까, 시계를 보니까 아홉시라. 아홉시에 ‘야, 아홉시인데 보자, 요새 내가 테레비 안 봐서 아홉시에 뉴스가 무슨 뉴스인가 보자.’ 아홉시에 뉴스 보자고 테레비를 탁 틀어 가지고 딱 보니까 주일이라. 그거 주일날에 테레비를 봤어요. 그래 죄를 지어서 내가 여러분들한테 이 죄를 고합니다. 그래서 그 같이 있는 사람에게 ‘내가 오늘 이 주일을 범한 죄를 지었다.’ 그만 주일날 이거 뭐 사람 살리는 일이니까 괜찮다 싶었는데 아니야. 사람 살리는 일도 주일날 자기가 말씀 주신 그 말씀을 새김질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서 이렇게 여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새김질하고 이래 자기 단속해서 이래 해야 되지 그날 사람 살리는 일 이런 이 하나 만나 가지고 문제 모르면 그 문제 또 바로 말해서 지도해 주고 그래 가지고 이라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주일날인 것을 잊어버려 버리고 테레비를 봤어, 목사가. 테레비를. 아마 보기를 한 삼 분 봤는가 한 이 분 봤는가 봤어요. 봤는데 보니까 이래 보니까 그 아홉시가 됐는데 뉴스가 안 나와요.

안 나오는데 ‘왜 뉴스가 안 나와? 아, 오늘 주일이로구나.’ 죄를 범했어.

그래 가지고서 이제 주일날은 나 할 일만 하지 주일날 백지, 그 마귀란 놈이 이런 문제 가지고 말하면 그거 또 말해 줘야 되고 저런 문제 가지고 말하면 말해 줘야 되고 이라다가 보니까 남 살리다 나 죽는 일 하기 때문에 나부터 살아야 되지 남 살리다 안 되겠다, 나는 주일날 나는 그런 일을 일체 안 하겠다 그렇게 지금 작정을 했어. 주일날 나한테 뭐 묻지 마십시오. 물어봐야 내가 말 안 해 줄 겁니다.

이래서, 우리 귀를 단속해 봅시다. 우리 귀를 단속해서 성경에 네 귀가 할례를 받지 안했다 이래. 귀가 할례를 받지 안했다 이래, 성경에. 우리가 귀를 신앙 양심으로 한번 단속해서 이렇게 단속해 보고, 또 우리 눈을 신앙 양심으로 단속해 보고, 눈도 그 눈 이것도 참 보배인 동시에 그놈이 독이 굉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 볼 눈, 안 볼 눈, 공연히 다른 사람 잘 사는 것 보고서 평생 불만입니다. 내가 며칠 전에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야, 무슨 시험에 들었노?’ 이라니 ‘다른 사람은 집을 샀는데 나는 집을 못 사서 다른 사람 모두 집 사 가지고 있는데 나는 집 한 칸도 사지 못했다 이래 가지고 그게 마음에 들어와 가지고서 그만 시험에 들어서 내가 그만,’ 그놈 하나 들어와 버리면 다른 거 다 돼 버려.

그거야 뭐 그것도 그렇지마는서고 그것뿐입니까? 고 눈으로, 어떤 사람은 말이지요.

황보 기 장로님 내가 그 사모님에게 말을 들었는데 황보 기 장로님이 젊을 때에 그 눈을 뺄라고 눈을 때려서 눈이 퉁바리같이 부은 적이 많이 있었다고. ‘왜? 왜 그렇습니까?’ 하니까 길을 가다 보면은 여자들이 지나가면은 공연히 그 여자 예쁘나 어떠나 쳐다보고 또 그 쳐다보고 난 다음에 또 후회가 돼서 회개하고 그래서 이제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 보는 그 눈깔, 또 여자는 남자의 아름다움 보는 눈깔 그 눈깔을 우리가 뽑아 버려야 돼. 성경에 말하기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면은 뽑아 버리고 두 눈으로 지옥 가는 것보다는 한 눈은 뽑아 버리고 천국 가는 게 낫다 요렇게 말씀했어.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 눈 하나 가지고 그 사람 가정이고 모든 거 망하는 게 눈 하나 가지고 다 망해요. 눈 하나 가지고. 안 볼 거 보는 눈. 그래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했어. ‘야, 네게 지금 눈이 하나 떨어졌다. 네가 과거에는 그것에 대해서는 보는 눈이 없었는데 이제 지금 그걸 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에 네가 그거 지금 큰 화인데 그 눈을 네가 소경될라고 하면은 심히 힘이 들어야 될 거다.’ 내가 그렇게 권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눈을 단속해 봅시다. 신앙 양심으로 눈을 단속하고, 또 우리 손을 신앙 양심으로 단속하고 내 손이 이거 만지는 것이 쥐는 것이 이것이 신앙 양심으로 살펴볼 때에 이것이 인정하는 것인지 신앙 양심이 허락지 않는 것인지? 손도 단속해 보고 우리의 발도 신앙 양심으로 단속하고, 이 발이 안 갈 걸음을 자꾸 걷고 안 갈 길을 가는 것.

저는 요새 주일날 양산동을 주일 오후에 꼭 갑니다. 내가 하루는 안 갈라고 해 보니까 안 가고 있으니까 집에서 사람들만 자꾸 만나고 도로 기도할 시간도 없고 도로 명상할 시간이 없어서 차를 타면 타고 가면서 상구 기도할 수가 있고 또 오며 기도할 수가 있고 거기 가면 또 주님 접촉할 수가 있고 훨씬 명상하고 좋은데 이래서 내가 주일날은 꼭 오후에는 차를 타고 양산동 가야 되겠다, 이러니까 매일 가는 이 습성을 들이면은 되지도 안하고 좀 수월할 거다 이래서 그래 차를 타고 갑니다.

이 발을 단속하는 건 자기가내가 그 사람 이름은 잊어버렸는데어떤 대장이 자기가 기생집에 늘 다녔는데 자기가 예수 믿고 회개하고 난 다음에 ‘내가 다시는 기생집에 안 가겠다’ 이렇게 하고 나섰는데 그날, 장군인데 대장인데 그 말을 타고서 지금 이래 나가니까 과거에 다니던 집이니까 그 기생집으로 말이 쑥 그만 들어가 버렸다 말이오. 들어가니까 그래 그만 그 대장이 자기 칼을 빼 가지고서 말 목을 끊어 버렸어. 그 말이 무슨 죄 있겠습니까? 그렇지마는서도 그 사람이 그러기 때문에 그 회개를 하고서 유명한 그 성자가 됐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발로 안 갈 걸음, 안 갈 걸음. 안 갈 걸음. 이 발로 안 갈 데 가는 것. 안 걸어야 될 것 요것을 자기가 살펴서 발을 살펴서 내가 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신앙 양심이 허락하느냐 안 하느냐? 신앙 양심과 하나님의 진리가 허락 하느냐 안 하느냐? 이래서 자기 발을 신앙 양심으로 단속을 해 보고, 단속을 해 보고 자기의 눈을 신앙 양심으로 단속을 해 보고, 자기 입을 신앙 양심으로 단속을 해 보고, 자기 몸뚱이가 지금 신앙 양심으로, 내가 이 몸뚱이를 이렇게 굴고 저렇게 굴고 이 몸뚱이를 이렇게 날뛰는 이 몸뚱이 날뛰는 것이 이거 신앙 양심에 옳으냐 여게 대해 생각만 해 보고 신앙 양심으로 살피기만 해 보면 당장 치료가 되고 될 것인데 그렇지 안하고 마구 미련하게 꾹 참고 하면은, 하나님께서 망치는 것은 무섭습니다. 자기가 당장에 그런 게 아니라 벌써 주위 환경에 전부 분위기부터 다 그래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거는 나중에 망하고 난 다음에는 다시 회복할래야 회복을 못해요. 회복 못 하도록 그래요.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복 주시는 것도 눈에 안 보이게 주시고 다 망치는 것도 눈에 안 보이게 망쳐. 그러니까 망하는 줄 모르게 망하고 복되게 성공하는 줄 모르게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섭리입니다. 그러나 정확해요.

하나님께서 봄을 오게 하는 것은 봄 오는 줄도 모르게, 뭐 사람은 딸칵딸칵 뭐 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봄 오게 하는 것도 오는 줄 모르나 봄이 완전히 오고 또 여름이 오는 것도 여름이 오는 줄 모르게 여름이 오고 하나님은 하시는 것은 눈에 안 보이나 달성은 합니다. 아무리 정원에 있는 그 꽃이 암만 봐야 피는 것도 안 보이지마는서도 그분은 부절히 쉬지 않고 역사하기 때문에 그 꽃이 핀다 말이오. 내 눈에 피는 게 보이지 안하면서 꽃이 피고 꽃이 늙어서 지기까지 된다 그거요.

하나님이 하시는, 이러기 때문에 그분은 두렵습니다.

그분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 지으면 망해. 제가 아무리 지혜롭게 해서 뭐 사람의 눈은 아무리 속이고 네가 뭐 또 무슨 돈으로 또 권세로 네 구변으로 이렇게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죄는 가루지 못한다. 하나님은 가루지 못해. 하나님의 눈은 가루지 못해요. 죄는 가루지 못하고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의 댓가는 사망이라, 은혜는 영생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후에 계속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진리와 영감으로 주를 섬기는 일에 힘을 썼으나 우리 자체에 빛이 되어 있는 이 신앙 양심의 역사가 심히 태만하였으므로 우리들에 실상의 결과가 성경 말씀과 같은 실상의 결과가 맺어지지 아니하는 데에서 세상의 빛이 못 되는 일이 많고 스스로 믿음에 굳게 서지를 못하고 의심되고 유혹받는 일이 많이 있는 저희들인데 오늘 주님께서 이 흠점을 찾아서 치료해 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후로는 신앙 양심으로 내 일동 일정에 전체를 다 검사하여 아무 책망할 것이 없는 생애에서 주의 뜻을 순종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주의 것이 되었사오니 이 의지 없는 허무한 거짓된 세상에서 주님을 주로 만나게 되었사오니 이제는 전적 믿고 바라고 의지하고 맡겨 놓고 순종하는 생활로 염려 없는 여생이 되도록 항상 주님이 지키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고한 사랑하는 남녀 종들에게도 이 일을 게으르게 하지 말고 더욱 힘쓰는 저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도 그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을 알게 하사 계속 힘쓰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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