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양심생활에서 영감생활로


선지자선교회 1985년 6월 23일 주일새벽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오늘 공과가 13공과 곧 신앙 양심에 대해서 가르치는 공과입니다. 이번에 두  주간째 가르치지요? 네, 단단히 가르쳐서 신앙 양심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증요한 것을 다 학생들에게 인식을 시키도록 그렇게 해야 될 것입니다. 뭐 여러  가지를 가르칠려고 하지말고 그저 아이들이기 때문에 주입적으로 그들에게 자꾸  이렇게 속에 박히면 됩니다. 그 아이들은 그 게 없는 거는 아니지만 무슨  논리적으로 이렇게 사색하는 그런 것은 별로 없고 그저 기억하는 그 시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억만 시켜 놓으면 뒤에 자기가 그런 현실을 만날 때에 기억되어  있는 그 진리가 나와 가지고 자기를 주관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것도 속에 기억이라는 그 요소 속에다가 집어넣어 놓은 것이  그것이 모두가 다 회의를 하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이렇게 돌발돼 나오는 그런  것이 다 대개는 꿈입니다. 대개는 그 사람이 한번 생각했던 것, 봤던 것, 들었던  것 그런 것이 다 속에 들어 가지고 있다가 다른 신경 정신은 다, 마음의 다른  요소는 다 누워자고 있는데, 쉬고 있는데 어느 하나가 나서 가지고 기형적으로  할동하기 때문에 그렇게 꿈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영몽이 있고  악령이 주는 악몽이 있고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이번 공과에 제일 처음에 말한 대로 아홉가지 말해 놨는데. 신앙 양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지식 곧 성경 말씀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신앙 양심이다 이랬습니다.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서 옳은 것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 양심이요, 불교 양심은 불경을  가지고 불경대로의 옳은 것을 찾아가는 것이 불교 양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인의 양심이나 기독자의 양심이나 어떤 이종교의 양심이나 다  양심은 양심인데 그 지식이 죽었고 살았기 때문에 그 양심이 죽었고 살았습니다.

지식이 죽은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 따라가기 때문에 죽은 지식 가진 사람들은  다 양심이 죽었습니다. 산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산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  양심이 살았습니다. 그러면, 산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 뿐이지 그 외에는 다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이요 그것이 다 뱀에게서 나왔습니다. 타락 후에  타락한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서 그것을 궁구해 놓은 것인데 그것은 다  실은 뱀의 지식이요 시작할 때부터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온 지식이요 또 지식이  결과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식과 뱀의 지식을 구별하는 그런 말이 도무지 세상에  없습니다. 신학자들이 그런 말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 박사들이 좀 그런 말하면  '아. 이것 참 그런가 보다' 이럴 건데, 인간들은 진리를 듣는 것보다도 간판을 잘  봅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 모든 학박사들은 다 그 뱀의 지식 가지고 학박사가  됐기 때문에 자기의 가진 학박사를 자꾸 이와 같이 자꾸 드러내서 자랑할라고  하고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해서 인기를 끌도록 할라고 하지 그 지식이  뱀의 지식이라 죽은 지식이라고 그렇게 말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만 살았지 다른 지식은 다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입니다. 타락 후에 영이 죽었고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이 사람을  주관하고 있는데, 악령 악성 악습이 주관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이니까  그 지식은 틀림없이 죽은 지식이지만 죽은 지식이라는 그런 말을 하기가 대단히  힘이 듭니다. 왜? 모르기도 모르고 또 안대도 어느 시기에는 어느 장소에서는  말하지만 그라면 온 세상을 죽었다고 정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날라들기 때문에 이제 그런 것을 슬기롭게 하지 그렇게 말하면 다 증거하지도  못하고 도로 절단 나기 때문에 안한다 그거요.

 이런데 이걸 들으면, 파딱 들으면 그만 그걸 깨닫고 먹어야 될 것인데 그렇게  먹지를 안한다 그거요. 짐승들도 보면. 고양이가 쥐사냥, 쥐 잡는 것을 보면,  지금은 뭐 먹을 게 쌨지만 그때는 먹을 게 없으니까 고양이들은 쥐를 잡아먹고  삽니다. 있다가서 쥐가 나타나면 퍼뜩 잡습니다. 그만. 탁 물어서 그만 자기  양식을 삼아서 먹어 버립니다. 이런 것도 다 이런 건데, 이것 다 모두 양심을  쓰면,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서. 설교를 듣다가서 '아. 이거다' 하면서 딱 물어  가지고 그만 자기 양식을 삼을 것인데 양심이 썩었기 때문에 도무지 그런 거  없고 세상이 이 허영 허욕 이런 것만 말하면 좋아서 듣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썩은 것 좋아하는 사람 산 거 좋아하는 사람 두 종류로 나눌 수 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는 어떤 사람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어떤 게 선한 양심인고 하니 신앙 양심이 선한 양심이요 곧  해석하면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그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은 완전하시고 영원 불변하신, 자존자이시 주권자이신, 전지  전능자이신, 영원 불변자이신 이 하나님만이 옳다 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곧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인격의 눈입니다. 또 귀가됩니다. 눈이 없으면 자기 가 쳐 박힐  길인지 물에 빠질 길인지 언덕에 떨어져서 죽을 길인지 모르는 소경이 돼 놓으면  제가 어떻게 지척을 분별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못 살지. 사람들이 모두 눈뜬  사람이 많아서 눈뜬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 놨고 또 이렇게 저렇게 다 있어  그렇지 눈이 어두운 소경 된 그것을 만일 사람이 모두 다 개발해 놓지 않은  개발해 놓은 데가 아니고 개발하지 안한 아주 미개지 그런 곳에 갖다 놔  보십시오. 눈 어두운 그것이 당장 구덩이에 빠져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언덕에  떨어져 죽든지 하지 그게 뭐 어떻게 그래 가지고 살겠습니까? 눈 어두우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또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는 거 그리 가면 죽는다 하는데 그거 못 들으면  제가 죽었지 별수 뭐 있겠소? 네가 그리가면 맹수를 만나 가지고 맹수의 밥이  된다 하는데 그 소리 들었으면 그리 안 갈 터인데 그 소리 못 듣고 가면 맹수  밥이 되지 뭐 별수가 뭐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눈과 귀가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눈과 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운전 기사에게,  운전 기사인데 그 사람이 운전 기사 운전은 잘 할 줄 아는 사람이고 모두 다  자동차에 대한 내부를 다 강의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눈이 소경됐어 소경됐지만 '아. 이  사람 자동차에 대해서 해설해서 가르쳐 주는 것 보니까 아주 모든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이 사람에게 운전을 맡겨야 되겠다' 하고 그 사람에게 운전을 맡겨  놓으면 눈이 멀었는데 그 사람 어찌 되겠소? 가다가 쳐박아 다 죽어 버리지.

 그와 마찬가지라 살이오. 자신의 전, 영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말 할 것  없고, 이 심신으로 된 이 육체에게는 신앙 양심이 제일 밝은 자입니다. 욕심이니  정신이니 지식이니 감정이니 뭐 기억성이니 또 무슨 이성이니 비판이니 이성이니  그런 것은 다 그게 뭐이냐? 그게 눈이 없습니다. 눈이 없어 이성이 뭐. 이성  비판이 이치를 생각해 가지고 이리 비판 하니까 이성 비판이 뭐 눈이, 그것도  눈이 없어. 욕심도 눈이 없어. 눈도 없는 것이 어찌 됐던 간에 마구 달리기만  달립니다. 달리기만 날리는 것이 그런 요소들이오. 신앙 양심만이 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욕심에게, 무슨 명예욕이든지 지위욕이든지 권세욕이든지  돈 욕심이든지 욕심에게, 아니면 남녀 이성의 더러운 음욕이라든지 이런 욕심에게  떡 자기를 맡겨 놓고 욕심이. 자기를 인도하도록 욕심이 끄는 대로 가는 그  걸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가련한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이렇게 우리가 가는 길에 눈이 되어 있고 귀가되어 있기  때문에 눈 없고 귀 없으면 그만 그 사람은 죽은 사람 한가지 아닙니까? 죽은  것이 낫지. 눈 없고 귀 없으면 죽은 것보다도. 더 큰 재를 저지르고 큰 낭파를  만들지 않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어쩌든지 신앙 양심을 우리가 매장시키면 안 됩니다. 신앙  양심을 화인 맞아도 안 되고, 신앙 양심이 어떤 것에게 속해도 안 된다 그  말이오. 화인 맞는다 말은, 신앙 양심은 이것에게도 저것에게도 속하지 안하고  아무 데도 속하지 안하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옳고 바른 것을 판다하도록 이렇게  자유있는 그 양심이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화인 맞는 것은 그 양심이 자유 없이  어디든지 붙들려 매였다 그 말이오.

 어떤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이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있는데 내게 대해서  좀 사정을 더 두고, 그리 안하면 '아. 내게 사정 둘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더  옹호를 해야 되겠다' 상대방을 나보다 더 옹호를 하고 내게 대해서 좀 조금  박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박하게 하고 내게 대해서 후하게 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는 좀 후하게 하고 내게 대해서 박하게 한다면 그것이 양심입니까  그것이 뭐입니까? 양심입니까 뭐입니까? 그까짓 게 무슨 양심이라. 양심은! 귀신  마음이지 그게 무슨 양심이라. 양심은! 다른 사람에게는 후하게 하고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고, 그러면, 그것이 그게 양심이 아니라면, 그러면 자기에게 후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박하게 하면 그건 양심이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양심 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봐요. 바로 하지 안하고 자기에게는 후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박하 게 하는 그까짓 게 무슨 양심이라. 순 도둑놈이지. 그렇지  안해요,? 이러니까, 양심은 자유해야 된다 말이오. 양심은 다른 사람이나 자기나  아무 거기 대해서 하후 하박이 없이 꼭 공평되게 하는 그게 양심입니다. 공평되게  하는 것이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화인 맞은 것은 뭘 말하는가? 양심이 그거 어떤 것에게  어떤 것의 종이 됐다 그 말이오. 양심의 주인이 생겼다 그 말입니다. 양심의  주인이 생겼으면 헛일이오. 그러니까, 양심은 어쨌든지 자유해야 된다. 그러면, 내  것이나 남의 것이나, 내 생명. 내 가 생명이 죽든지 살든지 뭐 불리하든지 그거는  상관 없고 어짜든지 옳고 바르게 참되게만 판단하는 그것이 산 양심이요  자유하는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없으면 예수 믿는 사람 다 헛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이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제인가 언제도 말했지만 온전한 행위가 되어야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인데 온전한 행위가 되는 것은 신앙 양심 생활을 해 가지고 신앙 양심  생활이면 그것이, 온전한 행위면 성화된다고 했는데 신앙 양심 생활이면 온전한  행위가 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신앙 양심 생활은 희망은 있기는 있지만 신앙  양심 생활이라고 그것이 온전한 행위 아닙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 옳게 하면  성신이 보고 있다가 '됐다' 성령이 인을 탁 치면서 '됐다' 성령이 됐다고 인정하고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성령이 동행하십니다. 성령은 죄와 동행하지 못하는 거라.

동행하지 못하니까. 성령이 동행하시면 벌써 전능자기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니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이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 됐는데,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오만 거 다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거 없는 것이 없어.

다 있어. 다 있는데, 이분을 바로 찾아서 만나야 뭐 만나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주시기를 원하고 또 우리는 받기를 원하니까 만나면  된다 그 말이오. 만나면 되는데 자꾸 우리 아버지에게 찾아가지는 못하고 엉뚱한  데 마귀에게 찾아가 가지고 상처만 나고 두드려 맞기만 하고 절단만 나고 병신만  돼 가지고 다 십년이고 이십 년이고 사십 년이고 오십 년이고 이와같이 허송  세월만 한다 그 말이오. 아버지만 찾아 가지고 딱 만나면 딱 되는데.

 그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옳고 바르고 참되게 깨끗하게 해야  되지, 안 하고 있으면, 깨끗하지 안하면 아버지 못 만납니다. 왜? 깨끗하지 안한  자에게, 깨끗지 안한 자에게 아버지를 만나면, 깨끗지 안한 자에게 아버지가 오면  그 아버지가 와 가지고 무슨 일을 하십니까? 무슨 일 하지요? 예? 소멸하지,  소멸해. 소멸해. 요 진리를 딱 알아야 돼.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게, 있는 걸 다  주실려고 애를 쓰고 기다리고 있고 원하고 원하고, 얼마나 원하는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원하셨습니다.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라는데, 우리가 이 아버지에게 가면 그만 오만 거 필요한 거 다 있는 데. 뭐  돈벌이 할 것 없이 거기 가면 천하 모든 민족 위에 제일 큰 부자 될수 있는 것도  다. 있고 오마는 것 다 있는데 가면 되는데, 아버지에게 갈라고 하는 자가 아버지  찾아가지 안하고 엉뚱한 데 찾아 삽니다. 또 아버지 찾아간다고 해도 뭐 아주  심판 받을 죄를 가지고 찾아 삽니다. 죄를 가지고 찾아가면 하나님은 뭐이라고요?  소멸하는 불이라. 이러니까 죄가 있으면 우리는 소멸시킨다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죄 뭉텅이를 짊어지고 이와같이 아버지에게 찾아가니까, 아버지에게  찾아가기는 갔지만 가도 이 죄 뭉텅이를 가지고 갔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피해야  되겠소 나를 반갑다고 맞이해야 되겠소? 한번 대답해 봐요. 피해야 되지 안  피하면 죽여야 되니까 하나님은 지공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안 피하면 죽여야  되니까 할 수 없어 하나님은 피해야 된다 그 말이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다가 '내가 너거하고  같이 안 가겠다, 천사들만 보내고 나는 가지 않겠다. 왜? 내가 가다가는 너거  당장 즉사를 시키겠다' 왜? 하나님은 공의로서 죄를 멸하지 죄를 두고는 그냥  두지 못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다가 너희들이 강퍅하고 목이 곧은 자라  가다가서 죄 지을 터이니까 죄 지으면 당장 멸해 버리니까 그만 애굽에서 인도해  내 가지고 그만 다 헛일 할 터이니까 아예 내가 같이 안 가겠다 천사들과 같이  보내겠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신앙 양심을 가지면 자기에게 아버지한테 가면 꾸지람들을 것,  아버지한데 가면 몽둥이 맞을 것 아버지한테 가면 불로 소멸시킬 것, 아버지한테  가면 칼로 탁 쳐서 목이 끊겨 죽을 거 이런 걸 지금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이것을  신앙 양심의 눈으로 보고 '아이구. 이거 또 씻어야 되겠다 이거 또 고쳐야 되겠다.

이 악한 동무 또 이별해야 되겠다' 뭐 전부 다 이래 가지고 자기를 깨끗게 깨끗게  이래 자신을 깨끗게 하지, 또 아버지를 바로 찾아가는 길을 찾아가 가지고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 이러면 만사가 성공이라.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이런 부자 아버지를 두고 우리 신앙 양심만 가지면 그것만 찾아서 만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내 것 되니까 뭐 천하 세계의 갑부가 뒬 것이고 그 사람 이  모든 존영하게 되어지는 것인데 이분은 만나지 안하고 돈벌이 다고 야단을  지기니까 이거 탈이라 말이오. 그 신앙 양심 생활하는 것이 그것이 돈벌이 중에는  제일 귀한 돈벌이요, 신앙 양심 행위는 돈벌이하는 것이요 권세를 차지하는  것이요 출세하는 것이오 취직하는 것이요 성공하는 것이요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과거에는 참 안 믿을 때도 그렇고 믿을 때도 그렇고  돈벌이되기는 되지만 돈벌이 그거 세상에서는 할라 하면 남을 속여야 되고  해쳐야 되고 하니까 돈벌이하고 난 다음에 께끄름하이 안 믿을 때도 재미가 없다  말이오. 안 믿을 때도 재미가 없어 깨끄름하이 못 견뎌.

 제가 안 믿을 때인데, 술도가 하면 술도가에서는 그전에는, 지금은 모르지만,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모를 거라 밀주를 많이 모두, 밀주를 술을 모두 밀주를  하면 술도가 술이 안 팔립니다. 이러니까 세무소에서 뭐. 밀주 술 뒤지러 온다고  술 조사하러 옵니다. 와 가지고 동네 다니며 뒤지면 벌금을 하고 이래 가지고  한목 오면 그때 돈으로서 뭐 한 번 들리면 삼만 원이면 요새 돈으로 한 삼십만원  가는 건 데, 삼십만 원 더 가지 이래 놓으니까 와 가지고 왁 뒤져 가지고 이래  가는데, 제가 술도가 할 때는 '우리 지역에는 밀주가 하나도 없으니까 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래 못 오게 했는데. 어떤 영업하는 사람이 술장사하는 사람들이 항상  밀주를 해 가지고 뭐 술도가만치나 팔고 있다 말이오. 그래 그것을 말을 듣고 그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들한테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데 그걸 지금 조사하러  간다 이라기 때문에 내가 암말도 안 하고 그만 냅뒀다 말이오. '아. 나는  모르겠습니다. 뭐 가든지 말든지 해 보십시오' 가 가지고 딱 들렸다 말이오. 들려  가지고 벌금이 나왔어. 벌금이 나왔는데. 그라고 나니까 마음에 불쾌해서 못  견디겠어. 내가 할 수 없어 가서 그 이야기를 하고 말이지, 그 뒤에 그  이야기하고 그 벌금하고 비용하고 전부 다 물어 줬습니다. 안 물어주니까  안되겠어. 그라고 나니까 그 사람들 그거 밀주 안 하니까 술이야 많이 팔리겠지만  암만해도 께끄름해서 불쾌해서 안 되겠어. 그걸 물어주고 나니까. 자 물어줄라  하니 돈 물어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를 할라 하니 참  기가 차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해서 서로 해결을 하고 이라고 나니까 평안하다  그 말이오. 안 믿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안 믿는 사람도 암만 권세나 돈이나 한다고 해도 그대로의 양심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께끄름한 일 해 가지고 뭐 하면 불쾌하고 못 견디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성공하는 것이 옳고 바르고 참되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진실되고  이렇게 바로 할수록 돈벌이도 되고 성공도 되고 모든 것이 성사가 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를 죄 짓는 방편대로 뭐 세상 걸. 세상과 하늘나라의 좋은 걸  차지한다고 해도 그걸 과거에 우리가 사용했었는데 예수 믿는 길은 좋고 옳고  바른 좋은 방편 가지고 되어 지는데 왜 우리가 이런 방편을 쓰지 않습니까 못  쓰는 것은 몰라 못 쓴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오늘 공과에서는 양심이 우리의 범사에 눈이 된다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요,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중보자시요 이런데, 이분에게  오만 것 다 있어. 주 하나님에게 오만 것 다 있다 그 말이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능치 못할 것이 없어 그 다음에 보니까, 천사들도 주님에게 주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권세들도 복종하지. 능력들도 복종하지 모두가 다 순복한다  그 말이오. 순복하니까, 그분만 하나 만나면 천사를 내 마음대로 잡아 부립니다.

그분 한 분 만나니까 이제 천사가 우리 심부름꾼이 된다 말이오.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 주님과 나와 하나가 되면 그 말 했어. '네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은 모든 것이 다 너희 것이  된다 그래 말하지 안했소? 고린도전서 3장 21절 이하에 있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주님 만나 가지고 주님 시키는 대로하면 천군이고 천사고 모든  존재들이 우리에게 다 예예 하면서 순종하지 그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 돼 버려.

이러니까, 그래서, 양심으로 사는 것이 제일 능률이 크다 효력이 크다 성공이  많다. 양심생활이 제일 능률이 많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은 진리 생활이 능룰이 더  높고 또 진리 생활보다 영감 생활이 더 높고 영감 생활보다 하나님과 그만  동행하면 그게 제일 높습니다. 거기에는 사망이 없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  하다가 죽음 없는 그대로 산 채로 성공하지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요 신앙 양심을 버리면 그 사람의 인격이나 정신이나 모든 것이 다  눈이 멀었고 눈이 멀었고, 귀가 먹었고 그런데 제가 뭐 하겠소? 그러니 이 신앙  양심을 어짜든지 가꾸어야 된다. 신앙 양심을 죽여서는 안된다, 신앙 양심을 매장  해서는 안 된다, 신앙 양심을 북돋워야 된다, 신앙 양심을 길러야 된다. 신앙  양심을 장성하게 해야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버지와 동행할 수 있고, 신앙  양심이 장성하면 그는 곧 그 양심은 영감으로 인도하고 하나님 만나게 인도하고  이라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만사가 성공이라 그거요.

 장성한 양심은 어떤 게 장성한 양심인가? 장성한 양심은 양심을 장성시켜  놓으면 그 양심은 아무 것에게도 제재 받지 않습니다. 아무 것에게도 제재를 받지  안해. 간섭을 받지 안해요. 그 양심은 그저 하나님과 진리대로만 하는 양심이지  아무 것에게 간섭받지 안해. 그러니까, 양심 장성한 양심은 자기의 소유나 자기의  모든 행동이나 자기의 몸이나 자기의 생명이나 신앙 양심이 주권하고 있어. 죽을  데라도 '아이구 나 죽을 테니까 안 갈랍니다' 하면 신앙 양심이 호통을 쳐. 그러면  죽을 데라도 뿍뿍 가야 되고, 살림이 다 패전을 해도 양심의 인도대로 가야 되고  또 감옥에 갇혀도 양심대로 가야 되고 이렇게 장성한 양심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신자들이라 말이오. 사도 바울도 그런 양심 가졌소.

 오늘도 신앙 양심이 이래 장성한 사람들 그 양심이 말하면 거기에 대해서  죽어도 어길 수가 없는 그 사람이, 죽음의 자리라도 양심이 '아, 이거는 틀렸다.'  이제 하나님이 가라 한다 하는 걸 알면 죽일라고 지금 기다리고 있지만 어짤 수  없이 그 자리를 뿍뿍 가는 것이 그것이 장성한 양심이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그래 있지만 갔다 그거요. 모두 오늘 신자들도 다 그렇습니다. 오늘  기독자들도 다 이렇게 순교하는 사람들이나 뭐 신사 참배나 뭐 6.25나  인민군이나 이런데, 오늘 이 평소 생활에서나 그 사람이 자기에게 낭파되는 그거,  자기에게 뭐 이해를 생각하고 자기의 생사를 생각하고 고락을 생각하고 그것을  생각해서 그것이 조건이 되는 그런 양심은 다 약한 양심이요 다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그런 것이 조건되지 안해. 상관없이 어짜든지 옳은 것이면 나아가는  그것이 장성한 양심이라. 그러니까 이 양심을 우리가 자꾸 길러야 됩니다.

 이 양심을 기르는 것은 뭐인가? 양심을 기르는 것은 어떤 것이 기르는  것입니까? 키우는 것, 키우는 것 어떤 게 키우는 것이오? 양심에 요게 옳다  확정됐으면, 뭐 거기에 따른 확정된 양심대로 하고 나면 거기에 따른 무슨 뒤에  낭파가 닥쳐오든지 말든지 확정됐으면 고대로 단행하는 것이 그것이, 고대로 행해  버리면 양심이 자라 버립니다. 양심 자라면 아버지의 아들 됐고 주님의 지체가  됐는데 문제가 뭐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양심생활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신앙 양심, 주일학교에서는 그저, 다 해석을 해 가지고 가르칠라 하다가는  여러분들이 손해 갈 터이니까 안 되면 자꾸 주입식으로 말이지, 신앙 양심 요  9가지를 자꾸 간단하게 해서 주입식으로 해서 그 속에 집어넣어 놓으면 그게  나이가 한 서른 살이나 마흔 살이나 떡 되면 그때 가서는 인제 그때 사색 사색을  하고 사고하는 그런 시기라. 뭐이든지 생각하고 또 살되 가지고 뭣을 이렇게 선악  비판을 해 가지고 나가는 그런 시기니까 한 서른 댓 한 사십이 넘어. 사십이  넘으면 뭘 생각할 줄 알아요. 사십이 넘으면 이게 옳으나 그르나 생각할 줄 알지  만 사십 전에는 그거는 아무것도 생각지를 못해요.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이러니까 뒤에 그때 생각할 때에는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게 떠올라서. 신앙 양심이  뭐고? 퍼뜩 또 나오기를 '아. 양심은 이런 것이 양심 아니냐? 그러면, 양심이 이거  거리끼냐 옳은 거냐' 이러기 때문에, 주일학교 때에 교회 다니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못견뎌서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그게 뭐이냐 하면 속에 신앙 양심이  지금 역사해 가지고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역사하는 것이니까 자꾸 주입식으로 자꾸 신앙  양심이라는 것을 자꾸 속에 감각, 기억력, 기억하는 그 기억 부대 속에다가 자꾸  집어넣어요. 그만 자꾸. 아이 때는 자꾸 뭐이든지 입을 벌려 놓고 뭐이든지 막  테레비고 뭐이든지 받아들이고 흡수할라고 애를 쓰기 때문에 거기다가 자꾸  집어넣어요. 집어넣어서.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듣고 교회 접촉을  많이 하고 난 사람들은 그 속에. 그 사람이 뭐 개망나니 노릇을 해도 하나님  말씀이 그 상상 푸대에, 이상 푸대에 또 기억 푸대에 속에 가득히 차 가지고 있기  때문에. 쌀가루에서 터지면 쌀 나오지 딴 거 나올 게 뭐 있겠소? 이러니까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거요  이런데, 얼마 전에 ○정권 말년에 한창 데모 날 때 그때마다 어떤 사람들 이  모두 말하기를 '아, 학생들은 다 지성인이라' 그만 학생 이것들이 제일이라. 이게  제일 지성인이고 다른 사람은 다 무식한 사람들이고 '학생이 지성인이고 제일  머리 안다' 그까짓 것들이 뭘 알아, 알기를! 그까짓 게 까짓 거, 나이가 찍해야  삼십도 안 된,그까짓 게 뭘 알아, 알기를!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삼십 안 됐으면  모두 다 뭐 대학원이고 뭐 대학 졸업 맞았지만 뭘 알아? 아무것도 몰라. 비판을  몰라. 저거 혈기대로만 그대로만 나가고 마는 것이지, 그래 가지고 내가 그때  대학생 하나 보고 야단을 쳤습니다. '너거가 뭐 안다고 너거가 그따위 소리하고  있노? 너거 데모하면 어찌 되나? 너거 데모 해 봤자 찍해야 내나 김일성이 부하  노릇했지 딴거 아무 것도 없다. 네 똑똑히 알아 봐라' 내가 야단을 치고 말았는데,  이 세상이 디비지면 그렇게 디비집니다. 벌써 그 가정에 삼십세 미만되는 것이 그  가정의 주권을 잡아 가지고 막 설치면 그 가정 망하고 맙니다. 망하요 그거는.

그래도 오십 이상 노인이 주권을 가지고 '야, 그렇지만 안 된다' 이래서 그래야 그  가정이 넓게 길게 골고루 구비하게 생각을 해서 그 가정이 바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네, 그러니까, 어짜든지 양심을. 못 가르치면 자꾸 양심 말만 많이 해. '신앙 양심  양심생활 해라 양심생활 해라. 신앙 양심은 우리의 눈이요 우리의 귀다. 양심  없는 사람은 눈과 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데인지 살 데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벌로 날뛰어서 결국은 망하고 만다' 그러니까 양심 없이 산 생활이, 양심  없이 사업한 사람들이 다 헛일되고 만다 말이오. 그 나라의 제일 갑부라 하면,  갑부라도 그 사람이 죽은 양심 가지고 살았으면 마지막에는 갈 때에 후회하고  '이렇게 여러 수백 억을 내가 가졌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것이 다  헛되다' 마지막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소 있기를! 그 사람들 다 죽은 양심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산 양심으로 살았으면 '아, 이게 무슨 소용  있느냐? 예수 믿어야 되겠다 하나님 뜻으로 살아야 되겠다' 그거 알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은 학생들에게 어짜든지 이 두 주간에서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이 귀에서.

양심 생활 안 하면 죽는다, 양심생활 안 하면 망한다 인간성공은 양심이  찾아간다, 양심이 없으면 인간의 행복과 성공과 존영은 찾아가지를 못한다 이런  것만 자꾸 인식을 시켜 놔도 그만 된다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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