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양심생활-믿음 생활


선지자선교회 1985년 6월 10일 월새 

 

본문 : 야고보서 1장 2절∼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려고 할 때에 신앙생활을 계속하기에 어려움이 되는  그런 모든 것을 가리켜서 시험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어려움은 여러  종류가 있겠는데 크게 나누면 좋아서 신앙 계속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나빠서  신앙 계속하기 어려운 그런 것도 있고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 예를 든다면 물질이라고 하면 물질이 너무 많아져서 신앙 계속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물질이 아주 매우 가난해져서 계속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자기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짐으로 그만 사람들은  교만해져 가지고 신앙 계속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또 모든 것이 다 막혀지고  욥과 같이 그렇게 어려움이 되므로 신앙을 계속하기 어려운 그런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고, 그것을 분류한다면 물질로 어려움, 신체적으로  어려움, 활동적으로 어려움, 또 이 모든 인인 관계의 사회적으로 어려움,  가정적으로 어려움 뭐 어려움이 수가 심히 많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닥칠 때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말은 껍데기로 기쁘게 여기는 그런 일 하지 말고 참 거기 대한 것을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똑 바로 알고 바로 알면 따지고 따지고  암만 따져도 그 기쁨은 없어질 수 없는 그런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기쁨을  가리켜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말하면 그것이 지성적인 기쁨을 가지라, 지식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라, 논리적인 기쁨을 가져라. 그러면, 이치에 맞는 그런 기쁨을 가지라  이런 말인 것입니다.

 잘못하면 사람들은 여기 유의하지 안하면 그 사람이 뭐 기뻐한다는 것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조금만 환경이 변해져도 그만 기쁨이 슬픔 되고 고통 되고. 뭐  그렇게 변해지는 그런 것은, 그 기쁨이 변해지는 것은 그것은 다 진실한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하고, 껍데기 하나의 감정, 또 그렇지 않으면 자기 주관에  맞으니까 기뻐하는 자기 주관대로의 기쁜 그런 기쁨은 다 온전한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이라는 것이 객관이라도 하나님적인 기쁨이라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 진리로 인한 기쁨 그런 기쁨은 변동이 없습니다.

 어려움이 오는 것을 왜 기쁘게 여기느냐 하면 그 어려움이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시험하고, 네가 믿나 안 믿나 하나님께 믿음을 시험해  보시고, 또 하나님만 알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네가 믿는지 안 믿는지 네가  알아라' 본인이 알도록 하고, 또 제삼자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저 사람  믿음 있는 사람이라 믿음 없는 사람이라 이래. 우리는 인인 성사를 하기 때문에  믿음 없는 사람을 믿음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날이면 그 사람 인정한 그 모든  경영과 역사는 다 실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본인이 알아야 되겠고 또 제삼자들이  알아야 되겠고, 뭐 하나님은 하나 안 하나 다 알고 계시지만 인간들이 알아야  되기 때문에 그 믿음에 대한 시험을 주는 것입니다. 시험 치르는 것은 이 사람이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을 치러 가지고 그 사람을 등용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어느 정도인지 하는 그 사실을 본인이 알고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시험을 만들어서. 힘들여서 시험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닥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시련이라 말은 처음에는 그런 일을 닥칠 때에 그만 넘어지고  실패했지만 두 번째 닥칠 때에는 좀 후회가 돼서 이겨 볼라고 애를 쓰고  그라다가 몇 번 하면 그 다음에는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연습하는 가운데서  그렇게 점점 강해지고 온전해지고 구비해지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연단이라 말은 쇠를 연단하는데. 금을 연단하는 데에 그런 데에 쓰는  말인데, 금이 처음에 주먹덩이만한 금덩이를 불에다 대고 구우면 차차 그  덩어리가 작아집니다. 처음에는 모래니 흙이니 하는 것이 다 타 버리고 그  다음에는 쇠가 타고 그 다음에는 구리쇠가 타고 주석이 타고 그 다음에는, 뭐  여러가지 쇠가 다 섞여 있기 때문에 또 마지막에는 은이 타고 은이 타고 난  다음에 남는 것은 금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순금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  것을 할 때에 그것을 불로 연단한다, 구워서 잡것을 태운다. 그런 말인데.

 믿음의 시련이라 하는 것은 믿음을 시험하고 네가 믿음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을  시험하고 또 그 다음에는 믿음에 잡것이 들여 있나 없나 해서 믿음의 잡것을  제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힘들여서 우리에게 시험을 만들어  가지고 닥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됩니다.

또 그로 인해서 우리가 얻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뻐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결론은 그런 말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요거로 결론의 말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말은 네가 신앙생활을  작정한 신앙생활을 네가 온전히 이루라 그 말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온전히 계속해라 그 말이오. 신앙생활이 어떤 일이 와도 요동치  안하고 계속하도록 해라.

그러면, 믿음을 언제든지 중단하지 말고 믿음 계속을 온전히 이루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 말은, 인내란 말은 계속이라는 말인데, 믿음 계속을 온전히  하라, 중단하지 말고 온전히 하라.

(말귀를 알아들어야 잠이 깨지. 저 와가지고 앉아서 자꾸 정신없이 잔다. 어. 저  학생. 잠 깨! 말을 알아. 말을 알아들어야 잠이 확 달아나고 기쁘고 즐거움이 오지  말 안 듣고 그냥 와 앉았으면 그거는 잠이 오지요.)  믿음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 말은 계속을 온전히 하라. 그 계속이 이런,  저런 어떤 환경을 만나도 변동하지 말고 그 계속이 온전하도록, 그 계속이 어떤  데서라도 침해받지 안하고 중단되지 안하고 그 인내 계속이 온전히. 온전한  계속이 돼져라, 온전한 계속이 돼져라 하는, 무엇이 온전한 계속이 돼져라  말인가? 그것은 믿음 계속이 온전히 이루어져라 그 말입니다. 믿음 계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 계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라 말은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양심 행동이 온전히 계속하라 그런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네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하고 구비한 사람이 되어진다 말씀했습니다.

 어제 양심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혹 그러면, 양심을 이루면, 믿음을 지키라  하더니만 또 양심을 지키라 하니까 양심을 지키라는 것과 믿음을 지키라는 것의  서로 조화성이 어찌 되는가 하는 데 대해 가지고 혹 그 의문되고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게 양심인고 하니 양심은 어제 배운 대로 일반적인  양심과 신앙양심은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 없는 사람은 없지만 그 양심이  그 사람의 지식대로의 양심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마다 그 양심이 다릅니다. 양심은 같은 줄 알아도 다릅니다.

기독교 양심은 세상에는 아무 데도 없는 양심이니, 기독교 양심은 하나님의  지식인 신구약 성경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근거해 가지고 생겨지는 양심이기  때문에 이 양심은 세상에는 없는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산지식인데 이 지식을 힘입어서, 이 지식을 자기가  가진 대로 이 지식을 다 써 가지고, 활용해 가지고, 이 지식을 힘입어서 옳고  바른 그것을 찾는 것이니, 옳고 바른 것은, 요 성경 지식보다 더 옳고 바른 것은  어떤 것이냐?  양심은 거기에서 자기가 가진 지식 중에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자꾸 찾는  것입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옳고 바르고 온전한 것을 찾아가는 것이 양심인데,  불교인 그런 사람들은 그 지식이 삐뚤어졌기 때문에 불교적인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가고 보니까 그것은 완전히 우상 종교에 깊이 빠져 버리는 것이 되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신구약 성경 지식을 자기의 지식을 삼아 가지고 이 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비판하고 평가하고 또 모든 것을 저울질 해 보고 재어 보고 과거  현재 미래도 다 조사해 보고 조사해 봐 가지고 온전하고 올바른 것을 찾을라고  하는 것이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보다도 더 온전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신구약  성경보다 더 깨끗하고 온전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 예, 영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가  힘입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자꾸 이리 저리 비판하고 평가하고 이래 가지고  조사를 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씀보다 더 온전한 것을 찾아 나가려고  하는 것이 신앙 양심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보다도 더 깨끗하고 온전한 것은  뭐이냐? 그것은 영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활용하고 힘입어 가지고  영감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 양심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 가지고, 말씀하고 양심하고 동행해 가지고 말씀의 도움을 입어  가지고 성령의 영감을 만나게 되는 것이 그것이 양심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양심이 성공해서 영감을 만났습니다. 영감하고 동행을 합니다.

영감하고 동행하면 그때 영감하고 동행하는 것을 가리켜서 무어라고 하는고 하니  믿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감하고 동행하는 것을 믿음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영감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양심이 지금 영감을 찾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 사람이 신앙 양심 생활은 된다 할지라도 믿음 생활은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또 믿음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다,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는다. 그  말은, 신앙 양심으로 모든 것을 받는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 양심으로  모든 걸 받는다. 신앙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신앙 양심  생활함으로써, 신앙 양심 생활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생활과 믿음생활이 차이 있어서. 양심생활은 어떤 게  양심생활인고 하니 믿음에 이끌고 가는, 믿음생활까지 이끌고 가는 선구자라,  자기의 전체에서 믿음생활까지 끌고 가는 길잡이라, 앞잡이라. 그래 가지고  양심생활이 성공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인고 하니 양심생활 성공한 것이 곧  믿음생활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말하기를 믿음생활,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한다고 믿음 되는  것 아니다' 그런 말을 제가 늘 자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행동했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 생활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다가  어째 참 다행스럽게 믿음 생활이 된다면, 말씀대로 살던 그것이 믿음 생활이  된다면 그는 대성공이다.' 이 믿음 생활이 됐으면 그거는 온전한 것이요 그거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 생활에, 믿음 생활이 되기까지 나아가는 그 생활을 가리켜서 다른  말로 말하면은 신앙 양심 생활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양심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자기가 살라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말씀대로 살면서 그 양심이 영감을 찾으려고 애를 써 가지고 영감을 만나 가지고  영감대로 살면 고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써서 살면 산다고 해서 성령이  인정하는 것 아닙니다. 말씀대로 자기가 살려고 애를 써 말씀대로 삽니다.

말씀대로 살아도 말씀대로는 자기가 사는데 성령이 인정을 안 합니다. 성령이  인정은 안하고, 말씀대로 살기는 사는데 성령님이 '좀 더' '좀 더 자꾸 재촉을  합니다. 재촉을 하는 것은 어째 그러냐? 그 사람이 말씀대로 살기는 살지만  사람의 인적 요소는 수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마음속에도 뭐 생각도 있고 뜻도  있고 욕심도 있고 감정도 있고 모든 기억성도 있고 별게 다 있는데 거기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하지  안하고 남김이 있을 때에는 성령님은 안타깝지만 네가 무엇을 다하지 안했기  때문에 이것을 다하라 다하라는 것을 자꾸 사람을 통해서 깨우쳐 알려 주기도  하고 또 스스로 양심에게 알려서 양심이 깨달아 가지고 그렇게 호소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의 진리대로 사는 그것을 가리켜서 모두 일반들이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세밀히 분석한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에 이를려고  애를 쓰는 생활이니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생활이라 그렇게 표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이래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쓰는 것이 그렇게 살 때에 성령이  보시고 이제는 됐다 할 때는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성신의 인을 맞는다, 성신이  인을 친다, 성신이 인을 친다. '이제는 네가 여게 대해서는 됐다 인을 쳐 버리면  고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면 고 믿음은 고 종류대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그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귀로 들으니까 십사만 사천이 눈으로  보니까 헬 수 없는 많은 흰옷 입은 무리들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십사만  사천이라는 것은 그것은 구약의 십이 지파, 신약의 십이 사도, 구약은 십이  지파를 통해 가지고 그것이 근원돼 나왔고, 또 신약은 십이 사도를 통해 가지고  신약 교회가 서 나왔습니다.

이래서, 십이에다가 십이를 곱을 하면 백 사십 사가 됩니다. 이래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것은 그것은 더 거기다가 또 만수를. 인간 만수를 자꾸 곱하게 되면  나중에 십사만 사천이 됩니다.

 그래서, 들으니까 십사만 사천이라 말은,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으로 다 해 놨고  그것을 바로, 바로 전문적으로 하지를 안했습니다. 왜? 그거는 다 예언서이기  때문에 세상에 악의 세력들이 많은 것이니까 그것을 저희들이 환하게 알게 그 면  저희들의 다 망하고 흥하는 걸 환하게 해 놨고 그걸 말해 놨기 때문에 그들이  그걸 이 성경을 내버려두지 안할 터이니까 성도들이 공연히 박해를 당할  터이니까 예언서는 대개는 다 상징적으로 해 놨습니다. 상징적으로 해 놔서  성신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은 깨닫고 감화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암만 읽어 봤자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저들이 아무리 심문을 할라고  해도 책잡지를 못합니다. 예언서를 책잡지를 못하기 때문에 '이게 우리를 말한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지마는서도 영감받은 사람들은 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 십사만 사천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구약 교회 신약 교회를 다  합해서 말했는데, 그 교회가 들으니까 십사만 사천이지만 눈으로 보니까 그 흰옷  입은 무리들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흰옷 입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피에 다 씻어서  깨끗함을 받은 자들이더라 그렇게 말씀을 해 놨습니다.

이런데, 거기 보면 인 맞은 자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라 이랬습니다. 이래서, 그  모든 땅위에 있는 바람을 잡고 있는 천사들에게 말하기를. 사방 바람을 잡고 있는  천사들에게 '좀 바람을 중단시켜라 바람을 중단시켜 가지고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기다려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인을 치기까지 기다리라' 그 말은, 인을 치면, 하나님이 인을 치면  하나님의 것이 됐다 말이요 하나님이 인정했다 말입니다. 뭣이라도, 문서라도  이래 할 때는 결재의 책임자가 결재의 인을 딱 찍어 버리면 이제 책임자가 그  책임을 지고 '이거 됐다' 통과시키는 그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 맞기를 기다리라  이랬습니다. 그래서 성신의 인 맞은 것은 그것은 뭐이냐? 그것은 곧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참. 온전하고 구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보고 믿을라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해도 애만 써도  제 주관을 다 버리지 안하면 자기 주관대로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지 그  말씀대로 산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  ○○○씨, 아, ○○○씨 조불면 안 돼. 졸면 또 생겨. 또 아파 못 견뎌. 하나님이  그렇게 지금 딱 걸어 놓고 이제는 '봤지' 요래 놓고는 믿음을 가지면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믿음을 잊어버리면 그만 쏙쏙쏙 쑤시고 그만 아프게 만듭니다.

이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러면, 죄는 하나님과 끊어지는 게 죄입니다.

죄는 삐뚤어진 게 죄인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 끊겨지는 것은 죄 외에는 끊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마라 삐뚤어진 거 하지 마라 끊겨지지  말아라 그러면 다시 더 큰 증세가 나온다.

 이러기 때문에, 이번에 보니까 우리 전국 우리 진영 교회에 표적을 받은 사람의  수보다 우리 서부교회 받은 수가 거의 반이나 돼요. 어떤 교회는 그게 없습니다.

없는 교회는 두 말 할 것 없이 그 교회 믿음이 없습니다. 그 교역자가 껍데기로  자꾸 이렇게 말만 하고 하지 진짜를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속에 교인들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서부교회에 제일 숫자가 많은 것이 참 기쁩니다. 그런 것은 뭐이냐?  하나님께 매인 자가 많다 말이오. 하나님께 매인 자가 많아서, 뭐 이번에 아마  대구 집회 가 가지고 치료함을 받지 안한 사람은 제 심령이 어두워서 그렇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택한 자는 한 사람도 없고 무슨 병이나, 마음의 치료를  받았든지 영의 치료를 받았든지 몸의 치료를 받았든지 행위의 치료를 받았든지  치료 안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라 말이오.

 그러면, 치료받은 것은 다시 죄를 범하지 안하면 자꾸 점점 온전해 가지만  범죄하면 더 큰 증세가 나와서, 행위의 치료받은 것은 더 악한 행위 하게 될  것이고, 또 몸의 치료받은 것은 몸의 병이 더 심해질 것이고 마음에 치료받은  사람은 그 마음이 더 악해지고 분주해지고 아주 허무해지는 그런 거짓되어질  것이고, 영의 치료받은 사람은 영이 더 무능한 영이 되고 말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런고로, 단단히 하십시오.

 그래서, 이제까지 말한 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믿음을 만드는 데까지  믿음을 만드는 데까지 중간 역할 하는 것은 뭐이냐? 그것은 순전히 인적  요소입니다. 인적 요소. 인적 요소로, 이래 자꾸 하나님이 인간에게 힘을 줘  가지고 인적 요소로 만드는 것은 뭐 만드느냐? 신앙 양심 생활한다, 신앙 양심  생활을 하다가, 신앙 양심 생활이면 다냐? 신앙 양심 생활은 아직까지  인간만으로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이 하나님과 연결될 때는 어떤 것이 하나님과  연결되느냐? 신앙 양심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양심이 같이  동행하는 것이 양심생활인데, 신앙 양심 생활인데, 신앙 양심 생활이 성공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신앙 양심 생활이 영감을 만나게 됩니다.

이래서, 영감 생활로 이제 성장됩니다. 영감 생활이 된 그때부터 그것을 성령이  인정합니다. 성령이 옳다 인을 쳐 가지고 인정해서 아, 너는 지금 요 성경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네게 아무 흠없이 네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네 인격을 다해서 성심성의를 다 해 가지고, 네 인격을  다해서 요 말씀 지켰기 때문에, 지켰기 때문에, 고 인격이 다 요 말씀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고 인격이 성화된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이 돼야 성화가 되지 믿음이 안 되면 성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양심생활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 인적 요소에서만 지금 횡횡  돌고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이 믿음 생활에 나아가지를 못한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  나아가는 것은 성령이 와 가지고 됐다 할 때는 딱 도장을 찍어 버립니다. 도장을  찍으면 이제 그 다음에는 고 부분은 하나님이 책임을 집니다.

이래서,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제자가 되고' 그 말은 주님의 제자되는 게 뭐냐 하면 성화다 말이오. 주의  말씀을 지켜 나가면 주님의 제자,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성화된다 말이오.

성화되는 것은 성화되는 것은 성령이 인쳐야 되는 것인데, 성화가 됐으면 그  다음에 진리를 압니다. 성화 되고 난 다음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아는 진리대로 뭐 불 앞에서도 아는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도 실행할 수 있고, 아무리 세상 부귀 영광 앞에서도 실행할 수 있고, 어떤  유혹의 어떤 유혹이 와도 그 유혹 앞에서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었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졌다 말입니다.

책임졌기 때문에 그 다음부텀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 양심 생활을 시작해야 되겠고 신앙 양심 생활이  계속해 나가게 되면 영감 생활이 되니 영감 생활이 됐을 때에는 신앙생활이 된다,  믿음 생활이 된다. 믿음 생활은 온전하고 그거는 능치 못 할 것이 없게 된다, 그  믿음 생활이 됐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성신의 인을 쳤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책임을 지신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자꾸 기도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참  땀이 핏방울같이 흐르시면서, 피와 땀이 얽혀서 흐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힘이  모자라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구해 가지고 천사를 보내셔서 천사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그때까지 자꾸 미결이니까 고민스러운 기도를 했습니다.

고민스러운 기도를 하다가서 마지막에는 '이제 자고 쉬라' 이제는 안심해라, 자고  쉬라 하는 것은 그때 인을 맞았다 말이오. 성신의 인을 맞았다 말이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데 대해서 성신이 인쳐서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책임지겠다' 하는, 책임지겠다는 인을 맞고 난 다음에 안심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할 때에 자꾸  기도해도 미결이 되는 게 있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에게 기도해도 자꾸 확신이  생겨지지 안하고 기도해도 미결이 돼서 또 안심이 안 되니까 또 기도하고  기도하고 자꾸 기도하는데, 기도할 그때는 자꾸 그걸 간절한 도수를 올리는 것,  간절한 도수를 올리는 것도 있지만 간절한 도수를 올릴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도  기도하면서 내가 하나님에게 뭐 거리낌이 있는가 그런 걸 자꾸 살핍니다. 이런 걸  자꾸 살펴서 그걸 찾아 가지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낌이 완전히 정리돼  버리고 딱 결합이 돼서 기도됐을 때는 그 기도에 기도하고 나서 아멘 할 때  믿어져 버립니다. 믿어지는 믿음이 생깁니다. 기도할 때 '아, 하나님께서 이 일은  들어 주셨다. 벌써 틀림없다' 이렇게 자기에게 확실히 믿어지는 그런 믿음이  생겨질 때에 그때에 벌써 그거는 성신의 인을 맞은 것이기 때문에 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것이라든지 행동하는 것이라든지 거기에  대해서 확신이 생겨지는 것을 여러분들 이 경험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아, 이  생활하면 이 행동에는 주님이 같이 하신다. 틀림없다. 이 생활은 같이 하신다. 이  말에는 같이 하신다, 이 행동에는 같이 하신다, 내 이 생각에는 같이 하신다. 이  마음에는 같이 하신다, 이 기도에는 같이 하신다' 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확실히 믿어지는 것이 오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성령이 인정하셔서  인쳤다 말이오. 성령이 '인제 됐다' 인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의 그릇이 차지를 못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말을  종종 제가 했습니다. 기도의 그릇이 차지 않는다 그 말은 기도하는데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 그 말이오. 회개에 부족한 것이 있고, 또 자기가 그것을  간구하지만 그것을 주시면 그 뒤에 후유증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놓으면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어떤 난제가 생기고 어떤  역경이 생기고 어떤 복잡한 일들이 생겨질 것을 알지도 못하고 달라고만 자꾸  이래 하니까, 그것을 차차 차차 알아서 '내가 주님께서 주시면, 이런 은혜를  주시면 내게 이런 복잡이 오겠고, 이런 또한 역경이 오겠고, 이런 핍박이 오겠고.

이런 모든 난제들이 오겠습니다. 올 때에 나는 이것은 이렇게 이기고 이렇게  이기고 저렇게 이기고 이래 가지고 재물 바칠 것은 내가 재물 바치고 몸 바칠 건  몸 바치고 지위 명예 권세 바칠 것은 바치고 그래 바쳐서 내가 기어코라도  주님이 인도하시는 요 인도를 놓지 앓겠습니다하는 이것이 되어지면 하나님께서  '됐다.' 그라고 나면 구하는 것이 마음에 믿어지게 됩니다. 믿어지게 되는 것은  뭐이냐?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을 졌기 때문에 내게 위로와 평강과  믿어지는 그 믿음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도 한 육백 오십 명인가 이렇게 낫게 된 것은, 아,  건수로는 육백 오십이야. 나은 사람은 육백 일 명. 육백 일 명인데, 어제도 많이  들어왔어요. 다른 교회도 또 들어온 데는 들어와 있을 거라. 이렇게 된 것은 그  사람들이 다 오래 믿었다고 된 거 아니오. 오래 믿은 사람들이 도로 못 받는 것  있습니다. 오래 믿는 사람은 못 받는데 첨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때에 아무 섞인 것 없이, 다른 거 잡탱이 하나도 없이 '믿습니다. 섞인 것  없이 다 온 전신이. 마음, 뜻, 성품, 힘, 뭐 목숨 남은 것 없이 확실히 믿을 때, 꽉  믿을 때 그때 탁 부딪힙니다.

 우르르 딱딱 하지 않습니까? 우르르르 하는 것은 이 음전기와 양전기가 공중에  이라니까 우르르 하는 소리고, 이라다가 번개가 탁 하면서. 딱 그라면서 번개불이  켜지는 거, 딱 그라는 것은 음전기와 양전기가 이래 돌아다니다가 딱 부딪히면  그만 벼락이 된다. 말이오. 부딪히면 벼락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자꾸 접할라고 애를 쓰는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고 믿음에  잡것이 섞이지 안하고 하나님을 딱 믿으면, 꽉 믿어질 때에 그때에 능력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제 주일학교 견학하러 왔던. 목사님이요 반사 선생님이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인지 목사님인지 장로님인지 어떤 분인지 왔다가 광고하는데 그만  믿음이 딱 돼. 믿음이 딱 되고 나서 보니까 나중에 보니까 그만, 허리가 아파서  못 견디게 허리 아프던 게 어디로 가고 그만 나아 버렸어. 그래 가지고 '아, 내가  이것을 증거하고 가야 되겠다' 하면서 그래 자기가 허리가 아픈 것이 그 광고할  때에 나았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 광고할 때 그때 꽉 믿어졌다 말이오.

 이러니까, 어짜든지 고 믿음은 성신이 인을 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모든 다 표적을 본 사람들은 완전히 결정을 지우십시오. 표적을 나타낼  때는 그 사람이 믿음으로 할 때에 표적이 나타났는데, 인제 처음으로 믿는  사람이라도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그 공로를 입어서 네 죄를 완전히 다 사함  받았다. 너는 완전히 의로워졌다, 너는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에 보면 표적이 나타날 때마다 반드시 '죄  사함을 받았다' 말씀했고, 죄 사함을 받았다 말하지 안한 사람이라도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거기서 표시했습니다. 삼십 팔 년 된 병자도 '네가 나았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라' 하는 것은. 그 말은 이미 이제까지의 모든 죄는 다  해결이 됐다 말입니까 안 됐다 말입니까? '다시는' 하는 말은 뭐이요? '다시'하는  말은 해결이 됐다 말이오, 해결이 됐다는 말.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자기가 사죄 칭의와 화친을 입은 것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나는 입고 있다 입고 있던 걸 깨닫고 그 다음으로 할 일은 뭐인고 하니  자기가 벗었을 때는 다시 주님 앞에 자복하고 속히 입으라 말입니다. 그러면,  벗기는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벗을 수 있으나  벗었을 때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 벗었었더라도 즉시 입으라 그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합시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양심대로 사는 것도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다'그 사람이, 그 사람은 경제적인 면에는  양심생활합니다. 경제적인 면에는 아주, 경제면으로서는 자기 양심에 가책 받는  일이면 뭐 재산이 다 절단나도 경제면으로는 그걸로 요동치 안하고 양심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무슨 감정적으로는 양심생활 못 해. 어떤 사람은  감정에, 자존심에 대해서는, 그만 자기가 암만 거석해도 자존심에 좀 걸려 놓으면  그만 뭐 죽을똥 살똥 모른다 그 말이오. 그거는 자존심적으로서는 양심생활을 못  하는 사람이라.

그러면, 양심은 자기 자존이라고 하는 그 자존심이 완전히 팍삭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져도 양심을 버리지 안하고, 신앙 양심을 버리지 안하는 그것이 고 자존심  면에 대해서 양심생활하는 사람인데 그것 못 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다 잘 하는데 행락, 이 모든 춤추고 놀고 신명 풀이하는 이 행락에 대해서  양심생활을 못 한다 그 말이오. 또 그 사람은 남한테 뭐 다른 사람이 이렇게  추켜올리면, 다른 사람이 추켜올리는데 대해서는 양심생활 못 하는 사람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이 면 저 면 모든 면에 다 양심생활이 동가리 나지 안하고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떨 때는 사람마다 고 나름대로 명예를 줬다가 행락을  줬다가 돈을 줬다가 또 자존심에 걸리는 그런 일을 줬다가 또 억울한 꼴 봤다가  매장을 받았다가 별별 자꾸 현실을 바꿔 줘야 고 현실에도 내가 그만 신앙 양심  생활이 계속하고 끊어지지 안할 수 있는 그것이 고걸 닥쳐야 자꾸, 현실을 자꾸  바꿔 줘야 우리가 거기에서 어서 연단 받고 연습을 받는다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바꿔지는 현실에는 한없는 사랑으로 참 큰 비용을  들여 가지고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 현실을 다  잘 이용해야 되지 그저 우리가 속단적으로 하나 편식된, 편벽된 지식 가지고  일방적 지식 가지고 뭐 좋다 나쁘다 이렇게 현실을 불평하는 것은 대단히 무식한  소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생활하되 이 면도 저 면도 여러 면을 구비해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그런 면을 자꾸 갖추어 가도록,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생활  구원 이루는 것은 뭐 일생 동안 노력을 해도 할 일은 남았습니다. 자기가 할 일이  남았을 때는 그 사람은 긴장이 풀리지 않습니다. 할 일이 다 했다 할 때에는  긴장이 풀어집니다.

또 그 사람이 자기에게 언제든지 기쁨이라 하는 것은 '병이 나았다'요 사이에  끼인 기쁨이 그것이 참 기쁨인데 이 기쁨이 평생 계속할라 하면 평생 새로  발견된 병이 발견되고, 죄병이나 뭐이나 발견되고, 또 현재에 또 낫우고, 그러면,  발견이 계속되고 치료받음이 계속될 때에는 그 사람의 새 기쁨이 계속된다.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사람들이 힘을 얻었다가 그만 툭 떨어지고 풀어지는 것은  그 사람이 게을해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게을은 적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번개같이 움직이고 부지런해야 되지 기독자는 게을한 사람은 예수 못  믿어요. 게을하면 예수 못 믿습니다. 어쨌든지 기독자는 부지런해야 돼.

 그러기 때문에, 나태병, 따라 합시다. 나태병! 나태병! 나태병! 교만병! 오만병  이런 것은 다 신앙의 적입니다. 이것을 어쨌든 간에 자기를 꺾어서 회개를 해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꾸 새벽으로 나오고 이 말씀을 자꾸 새겨서 놓지 말아요. 오늘 아침에는 좀  많이 나왔는데, 놓지 말고, 또 재독 들을 때에 자꾸 듣고, 이래서,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도 으뜸 되는 사람이 될라고 하면 힘이 드는데 무궁세계 영원  세계에서 으뜸될라 하면 그렇게 쉬운 줄 압니까? 쉬운 것 아닌 것입니다. 또 그  으뜸 되는 생활이 이 세상 공부하는 것처럼 그렇게 피곤한 줄 압니까? 이 생활은  할수록 한없는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은 피곤치 안해. 자꾸 기쁘고  즐겁고, 아무리 생각해도, 공연히 세상의 뭐 미국 대통령이라도 안 한다, 공연히  그래 하지?' 어림도 없어. 신앙의 사람은 미국 대통령을 줘 보십시오. 하는가. 안  합니다. 뭐 때문에 천국을 위해서 수고하자 천국에 수입 없는 그 일을 위해서  분망을 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무가치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런데  유혹을 받지 않는다 그 말이오.

 이 보고에는 기도하러 온 수는 육십이라 했는데. 도장 찍은 사람 숫자만 말하는  것이지 재독하러 온 사람도 이백 명이니까 나온 사람 많을 건데. 아마 나와  가지고 기도록에 도장을 찍지 안하고 그냥 가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찍고 가는  게 좋습니다. 찍고 가고, 어쨌든지 교회서 하는 것은 공연히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다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지만 대개는 다 기도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양심을 거쳐서 벌써 신앙에도 달해 가지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서 하는 것은 그저, 무조건 순종이 좋지만 그래 안 할라면 비판해 가지고  순종해야 되겠다는 데 자기가 지성을 가지고 순종하는 게 좋습니다.

 양심을 뺏기면 신앙은 가지지 못합니다. 양심 성공이 신앙의 입학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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